본래 이 마을은 남원의 만덕면(萬德面) 지역으로 왕묘(王廟), 강정(江亭)과 서봉면(棲鳳面)의 정치(正峙) 및 통한면(痛漢面)의 용정(龍井) 각 일부를 병합하여 왕묘와 강정에서 이름을 따 왕정리(王亭里)라 하였다.
1650년경 옥천조씨(玉川趙氏)가 처음 터를 잡았으며, 1700년경에 장수황씨(長水黃氏)가 이주하여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격파하고 돌아가는 길에 남원성에 들렸다가 잠시 마을 앞 축천 강변에 쉬어 갔었다. 훗날 이성계 장군이 조선 왕조를 창건하여 왕위에 오르니, 사람들은 이 마을 이름을 왕정(王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⑪통: 명지아파트, ⑫통: 명지2차아파트, ⑬통: 비사벌아파트, ⑭통: 금호프라자아파트.
신정동(新正洞)-왕정⑥⑦⑧통.
신정동은 본래 서봉면(棲鳳面)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통폐합 때 신기(新基), 정치(正峙)와 만덕면(萬德面) 강정(江亭) 및 이언면(伊彦面) 부동(富洞) 각 일부를 병합하여 신기와 정치에서 이름을 따 신정리(新正里)라 했다.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신정동이라 하고 왕정동 관할이 되었는데, 신정동에는 남부/중부/북부신정동으로 나누어져 있다.
㈀ 남부신정동-⑥통.
남부신정동은 넓은 가방들 일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1300년경에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새로 터를 잡았다 하여 ‘새터’ 또는 ‘신기(新基)’라고 부르고 있다. 매년 칠월 백중날(음력 7월 15일)에 당산제를 지낸다.
㈁ 중부신정동-⑦통.
중부신정동은 교룡산의 남쪽 기슭 최남단에 반달처럼 펼쳐진 구릉지대에 자리한 마을로 윗정재, 가운데 정재, 아랫정재로 나누어진다. 1480년경 정씨가 처음 들어와 정착하여 정재(鄭峙) 또는 정재(正峙)라고 부른다.
㈂ 북부신정동-⑧통.
북부신정동은 1780년경 남원양씨(南原梁氏)가 처음 정착하였으며 처음에는 마을 이름을 칠승(七承)이라고 칭하였는데, 그 보다 먼저 정씨가 정착한 중부 신정(아랫정재) 윗마을이라고 해서 윗정재로 부르고 있다.
화정동(花井洞)-왕정⑨⑩통.
본래 남원의 서봉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서봉면(棲鳳面)의 화산리(花山里)와 대정리(大井里)를 병합하여 화정리(花井里)라 하고 남원읍에 편입되었다가 1981년 남원읍이 시로 승격됨에 따라 리(里)가 동(洞)으로 바뀌어 왕정동 관할이 되었다. 화정동은 동부 화정과 서부 화정으로 나뉘어져있다.
㈁ 서부화정(한우물)-⑩통.
1625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아 김씨 집성촌이다. 김해김씨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는 연화리(蓮花里)라 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에 가뭄에도 변함없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마을 앞 논을 관개할 만큼 수량이 풍부하여 큰 우물이라는 뜻의 한우물로 불렀는데, 이 샘이 교룡산의 정기가 뭉쳐 솟아난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한우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대정리(大井里)라 하였다.
㈁ 서부화정(한우물)-⑩통.
1625년경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아 김씨 집성촌이다. 김해김씨가 처음 이곳에 터를 잡을 때는 연화리(蓮花里)라 했다고 한다. 그러다 마을에 가뭄에도 변함없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마을 앞 논을 관개할 만큼 수량이 풍부하여 큰 우물이라는 뜻의 한우물로 불렀는데, 이 샘이 교룡산의 정기가 뭉쳐 솟아난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한우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뒤 지명을 한자로 바꾸면서 대정리(大井里)라 하였다. ※ 관련 전설: 교룡산 남쪽 자락에 위치한 이 마을에 아득한 옛날 이 마을에 후처와 아들 3형제를 둔 도사가 살고 있었다. 아비는 동네 우물이 천하 명당임을 알고 “내가 죽으면 목을 베어 아무도 모르게 우물에 수장하라, 그러면 3년 후에 발복(發福)하여 부귀를 누릴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자 아들이 아비의 유언을 좇아 우물에 아비의 목을 베어 묻은 지 3년이 가까워 질 무렵 아들과 불화로 화가 난 계모가 개울가 동네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발설해 버렸다.
며칠을 걸러 우물을 퍼내자 앞발을 쳐들고 막 승천하려던 검은 암소가 울부짖으며 연기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후 우물에서 귀곡성이 들리는 변고가 생겨 그치질 않자 무당을 불러 통한에 젖은 우룡신(牛龍神)의 한을 푼 뒤 우물을 메우고 위쪽에 새 우물을 파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지금은 전설의 핵심인 용(龍)이 되다 만 소(牛)를 형상화 한 우룡상(牛龍像) 조각을 우물 정(井)자로 쌓아올린 기단에 올려놓았다. 우물의 가로길이는 259cm, 세로길이는 252cm, 높이는 52cm이다. 한편, 백중을 맞아 마을에 전해오는 한우물(大井) 전설을 후세에 널리 전하고, 여름 내 땀 흘려 수고한 마을사람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한 백중놀이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