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방송 이야기 할머니 임옥훈님의 맹사성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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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불 맹사성
맹사성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다. 고려국 전의시승, 조선국 판한성부사 등을 지냈다. 본관은 신창이다. 자는 자명(自明), 호는 고불(古佛)·동포(東浦)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세종 시대의 명재상 맹사성. 그의 처세의 기본은 절제와 중용이었다. 물론 그의 젊은 시절은 파직, 좌천, 유배 등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맹사성은 이를 약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마음은 겸손과 배려로 연결되었고 궁극에는 ‘적을 만들지 않는’ 처세로 완성되었다. 결벽에 가까운 도덕성을 기본으로 한 청렴하고 정직한 재상이었던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세종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 얕은 재주가 넘치면 인격을 해친다.
맹사성은 1360년 고려 공민왕 때 충남 온양에서 태어났다. 증조할아버지 맹의는 이조전서, 할아버지 맹유는 이부상서, 아버지 맹희도는 수문전 제학을 지내는 등 대를 이은 관리 집안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천재성을 발휘했다.
맹사성은 5세 때부터 당대 최고의 학자였던 권근에게 사사했다. 맹사성은 1386년 문과에 급제하며 춘추관 검열이 되면서 관리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최영 장군의 손녀딸과 결혼했다. 당시 고려는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흥 사대부세력이 위화도 회군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리고 새로운 왕조를 열기 위해 최대의 걸림돌인 최영을 숙청했다. 최영은 귀양을 떠났고 그의 아들, 즉 맹사성의 장인인 최담 역시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맹사성도 연좌에 걸려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하자 황희를 비롯한 고려의 충신들은 두문동에 들어가 고려와 운명을 같이하려 했다. 이곳에는 맹사성의 조부 맹유, 아버지 맹희도도 있었다. 하지만 두문동의 72현은 재주가 뛰어난 황희를 내보냈고 맹희도 역시 한산으로 낙향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이때 맹희도는 맹사성에게 새로운 왕조에 협조해 ‘백성을 위한 진정한 관리가 되라’는 당부를 했다. 권근, 하륜, 성석린 등의 천거와 이성계의 배려로 맹사성의 조선 개국을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맹사성의 평생 가치관을 확립한 일화가 있다. 소년 급제한 맹사성은 우쭐했다. 자신의 빛나는 성과와 스스로의 재주에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지방관으로 가면서 맹사성은 당시 덕망과 학식으로 이름 높은 노스님을 찾았다.
“스님, 어떻게 하면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을지 알려주길 바랍니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면 됩니다.”
“그거야, 세상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 아니겠습니까?”
실망한 맹사성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스님이 다시 말했다.
“그렇다면 차나 한 잔 하고 가시지요.”
맹사성은 할 수 없이 자리에 앉아 차를 받았다. 그런데 스님이 차를 따르는데 찻잔에 물이 넘쳐 방바닥에 흘렀다.
“스님, 찻잔의 물이 넘쳐 방바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래요? 어찌 찻잔의 물이 넘치는 것은 잘 알고 있으면서 얕은 재주가 넘쳐 인격을 망치는 것은 모르십니까?”
순간 얼굴이 빨개진 맹사성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급하게 일어나 방을 나가다 그만 문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스님의 말이 이어졌다.
“항상 몸을 낮추세요. 그러면 머리를 부딪치고 다닐 일이 없습니다.”
맹사성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부터 그는 실용적 가치를 중시하고 물욕과 권력에 대한 유혹을 버리게 되었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몸가짐을 하는 한편, 상대의 귀천과 고귀를 따지지 않고 하나의 인격으로 대했다.

2. 피리 하나, 검은 소 한 마리를 남긴 정승
1418년 세종이 즉위했다. 세종은 맹사성을 공조판서로 임명했다. 맹사성은 이후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의정부찬성사 등을 역임하며 좌의정에 올라 황희와 함께 쌍두마차로 세종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세종의 명을 받아 예악을 정리했고 또한 <신찬팔도지리지>를 펴내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세종시대의 충실한 기획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국방 분야에서도 맹사성은 능력을 발휘했다. 세종 초부터 북쪽의 오랑캐들이 자주 국경을 침범해 백성을 괴롭혔다. 세종은 이를 토벌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계획했지만 황희, 윤회 등 조정의 온건파 대신들은 반대했다. 명목상으로는 오랑캐의 주둔지가 명나라 영토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토벌의 효과, 전비 지출 등 여러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맹사성은 세종의 의견에 적극 찬성했다. 평소 그의 온화한 성품에 비하면 파격적인 강경 발언이었다. 이에 세종은 좌의정이던 맹사성을 문관 최초로 삼군도진무 즉 합참의장으로 임명해 여진토벌을 지휘하게 했다. 맹사성은 최윤덕을 장수로 내세웠다. 토벌군 모집과 훈련, 공격 시기, 기습과 정면승부 등 다양한 작전 계획을 세운 끝에 맹사성은 총 1만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공격했다. 몇 번의 전투 끝에 여진족은 퇴각했고 맹사성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맹사성은 크게 기뻐하는 세종에게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은 최윤덕 장군이 세웠습니다. 그에게 좌의정을 제수해 그 공을 칭찬해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제청했다. 즉 후배의 공을 높이 인정하고 자신의 자리를 내주겠다는 뜻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파격적인 승진이라 반대했고 세종은 최윤덕을 우의정으로 임명해 맹사성과 최윤덕 모두의 공을 치하했다.
세종의 통치를 뒷받침했던 맹사성도 세종의 뜻에 반대 의견을 낸 적이 있다. 그것은 세종의 불교 귀의였다. 세종은 궁중에 내불당을 짓는 등 불교에 큰 관심을 가졌다. 맹사성은 이를 정면에서 반대했다. “조선은 유교국가입니다”라고 주장하며 세종의 친위부대인 집현전의 학사들까지 설득해가며 세종에게 반대 의견을 올렸다. 또 맹사성은 <태종실록>을 완성해 세종에게 올렸다. 1431년, 춘추관에서 올린 <태종실록>에 대해 세종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세종은 맹사성에게 “부왕이신 태종의 실록을 내게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맹사성은 듣지 않았다. “전하, 군주가 실록을 보게 되면 사관이 사실대로 기록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되면 후세에 전하는 역사의 기록으로서 그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앞으로는 임금도 실록을 볼 수 없다는 전교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라고 세종에게 건의했고 세종 또한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조선 왕조의 어떤 임금도 실록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3. 리더의 뜻을 내게 맞추어 각색하지 마라
‘온유 溫柔’, 말 그대로 따뜻하고 부드러움이다. 적을 만들지 않는 처세의 기본이기도 하다. 물론 자칫 줏대 없는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있지만 ‘부드러운 것은 절대 부러지지 않고 휘어질 뿐이다’라는 말은 직장생활 처세학 10계명 중 최우선이다. 적은 뜬금없이 생기지 않는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나의 행동, 말 한마디가 나비효과처럼 부풀려져 의도되지 않은 오해와 불신을 불러오고 그것이 적을 만드는 DNA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고개를 숙이고 자기 주장 없이 행동해서도 안 된다. ‘왼 뺨을 때린다고 오른 뺨을 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동네북을 자처하는 행동이다. 부드럽고, 따뜻함 뒤에는 엄청난 자기 절제가 필요하다. 꼭 누군가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허물과 과오를 지우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목표로 가는 가장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파벌에서 자유롭고, 도덕성, 정직성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 것은 업무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는 것과 같은 급이다.
조직이 클수록, 역사가 깊을수록 리더십이나 처세에서 ‘조직의 안정화’와 ‘조직의 지속 성장’에 무게를 둔다.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리더에게는 오히려 안정적이고 부드러운 처세의 자세가 소통이나 실천에서 더 궁합에 맞는다. 리더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전파하는 방법에서 중간관리자의 주관적인 의견이 첨삭된 전파 방법을 제일 싫어한다. 사실 그런 방법은 중간관리자의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리더의 주장으로 포장된 중간관리자의 의견 반영은 조직의 체계를 뒤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직급, 직책에 따라 리더의 생각을 각색하는 것은 일시적인 효과는 분명 있다. 하지만 오늘 단 1도가 빗나간 과녁은 10일, 한 달, 1년 뒤에 전혀 엉뚱한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리더에게 정직하다는 것은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숨기지 않는 것이고 부하에게 따뜻하고 부드럽다는 것은 솔선수범이 먼저인 것이다. ‘따뜻한 햇살이 두꺼운 옷을 벗긴다’는 말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말과 행동 하나가 상대의 경계심과 불신을 풀어내는 유일한 열쇠임은 불변의 진리이다.
임금에게도 ‘노’라고 할 수 있는 맹사성은 한마디로 외유내강형이면서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약한 성품이었다. 벼슬이 낮은 사람도 손님으로 오면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맞이했고 상석을 양보했다. 또한 평소 효심이 깊어 지방에 있는 아버지를 뵈려 갈 때도 남루한 옷에 피리 하나 들고 검은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고향으로 갈 때면 인근의 지방관들이 정승을 만나려고 길을 쓸고 닦고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정승은 오지 않고 웬 늙은이가 소를 타고 지나가자 지방관이 역정을 냈다. 아전이 가서 “누구신데 이렇게 정승을 맞이하려는 길을 먼저 지나가는가?” 묻자 “정승은 아니고 그저 맹고불이 지나갔다고 전해 달라” 해 지방관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고불은 맹사성의 호다. 이만큼 맹사성은 허례허식을 싫어했고 민폐를 끼치는 것을 극도로 절제했다. 그가 타고 다닌 검은 소 역시 마을 아이들이 괴롭히는 것을 가엽게 여겨 데려다 길렀는데 훗날 맹사성이 죽자 검은 소 또한 곡기를 끊고 주인인 맹사성의 뒤를 따라 죽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검은 소의 충절을 높이 사 맹사성의 묘 옆에 검은 소의 무덤도 마련했다. 1435년 나이가 들자 맹사성은 은퇴를 청했지만 세종은 불허했고 몇 번에 걸쳐 은퇴를 청해 낙향할 수 있었다. 은퇴기간에도 세종은 국가의 대소사를 맹사성과 상의했다고 한다. 1438년 맹사성은 79세의 나이에 온양 자택에서 사망했다. 세종은 국정을 미루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조선의 명재상 맹사성은 허름한 집 한 채, 흰 피리 하나를 남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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