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5060의 칠순모임을 다녀와서!
금년이 나면서 한 살이 보태어지는 한국 나이로 10간12지(十干十二支) 가 조합되는 1949년
기축생(己丑生) 소띠를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 70세라고해서 가족들은 잔치보다는 해외
여행을 보내는데 저의 경우도 남매의 자식들이 서유럽 바티칸시티를 비롯한 11개국 여행을
권해서 다녀 왔는데 2018년11월17일 제가 취미생활을 하고 있는 인터넷 카페 "아름다운5060"
(지기 심해님) 소띠 동갑내기 여성회원 한 분이 합동칠순잔치를 하자는 발의를 하고 동의를
구하여 모인 사람들이 24명 축하하러오신 지기님과 운영원위원님 12년 터올인 소띠 후배님
들이 오셔서 축하식이 진행되는 중에 양귀비의 정권농단이 극에 달하던 당현종 때의
시인 두보(杜甫)의 인생칠십고래희라는 시상(詩想)에 대한 선배님의 도움 말씀과 강산이
일곱 번 변한다는 지난 칠십년을 살아오시면서 나라가 동족상잔으로 찟기고 깨지고
부셔지고 갈라져 만신창이가 되어 피비린내나는 대한민국을 오늘과 같은 나라로 만들기
위해 지난(至難)한 삶을 살아오신 님들의 이 날을 축하합니다.라는 심해지기님의
말씀들을 듣고나니 하나의 모임으로만 치부하며 침묵하던 가슴에 감동이 일었답니다.
하와이주 미해군기지를 일본군의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 미국의 풍부한 군용물자로
일본의 주요 도시들을 일년이 가깝도록 집중공격을 하여 페허가 되어도 항복을 않던 일본이
가공할 신무기인 원자탄 세발을 맞고는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고 미주리호 함상에서 조인식
이 끝나고 일본이 치욕스런 미군의 관리하에 들어가고 한국도 해방되어 일본 관군이 모두
철수한 뒤 한국도 미군정하에 놓여져 3년간의 통치를 받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
되었다는 얘기는 들어서 아는 이야기이고 1949년에는 소띠(기축생)들이 태어난 해입니다.
해방후 정치세력들은 좌우로 갈라져 한 나라에 두개의 정부가 세워지고 하루도 바람 잘날이
없듯 남북으로 갈라진 세력들이 갈등을 빚다가 1950년6월25일에는 북쪽의 침략으로 부산에
피난 정부가 세워지고 유엔군인천상륙작전 이 후에 서울이 9월28일 수복된 전세가 유리해
진듯 하다가 1951년 1.4후퇴로 흥남철수 중 얼어서 죽고 물에 빠져 죽기도하고 육로로 피난
중에는 눈속을 헤치며 안고오던 난지 얼마 안된 핏덩이 같던 영아는 죽어서 품에서 내려
눈속에 묻고 와야만 했고 그러다가 1953년7월 종전이 아닌 휴전에 전후 복구사업이 한창
이다가 1959년 추석날 사라호 태풍이 휩쓸고간 피해는 전쟁보다 더 처참한 광경이었습니다.
1960년 3.15부정선거로 학생데모가 이어지다가 마산상고학생 김주열의 공권력에
의한 살해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허약한 장면정부의 실정으로 1961년5월16일 무혈
군사혁명이 일어나니 정부 실정과 연이은 혁명으로 민생이 도탄이 빠졌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했고 공화당 정부의 경제를 우선하는 정책으로 민생의 질이 높아
지고 살만하다싶은 때에 10월유신이라는 것이 생겨나서 체육관 대통령이 탄생하고
유신정부가 세워지면서 긴급조치가 발령되고 공권력이 사나워져서 인권이 추락하니
극도로 말조심을 하면서 속내를 감추는 시대였는데 영부인 시해가 발생하고 그러나
유신정권은 계속되다가 이른바 부마항쟁이 발생하고 정부요인들의 불화로 대통령
마저도 측근의 저격으로 서거하니 무자비한 신군부가 출현하여 5.18사건을 일으키고
그 이 후로 6.10 항쟁으로 6.29선언을 이끌어내고 살기 좋은 세상인가 싶더니 일제 잔재
(殘在)인 중앙청과 청와대 안가들을 철거하고 역사 바로세우기를 하면서 국민들의 박수를
받던 문민정부 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외환위기인 IMF사태가 발생하여 기업이
줄도산을 하니 실업자가 급증하던 어려움을 겪기도 했었지요.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당(唐)나라의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곡강시(曲江詩)〉 일절이다.
조정에서 돌아와 하루하루 춘의를 잡혀[朝回日日典春衣],
매일 강두에서 취하여 돌아오네[每日江頭盡醉歸].
술빚이야 가는 곳마다 흔히 있지만[酒債尋常行處有],
인생 칠십은 고래로 드물도다[人生七十古來稀].
젊은 날의 두보는 각지를 방랑하였다. 그러다 나이 30세가 넘어
장안(長安)으로 돌아와 벼슬길에 나서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뜻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아 허탈한 나날을 보내던 중, 안녹산
(安祿山)의 난이 일어났다. 황제 현종(玄宗)이 난을 피해 쓰촨
[四川]으로 가는 등 나라가 온통 뒤흔들렸다. 두보도 난을 피
하여 새로 즉위한 숙종(肅宗)이 있는 영무(靈武)의 행재소(
行在所)로 가려다가 반군에게 붙잡혔다. 9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탈출하여 봉상(鳳翔)의 행재소로 갔는데, 그 공으로 좌습유
(左拾遺)에 임명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탈환하자 숙종을 따라 환도
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47세쯤 되었다. 수도 장안의 동남쪽에는
곡강이라는 못이 있었고, 그 못의 남쪽에 부용원(芙蓉苑)이라는
궁원(宮苑)이 있어 경치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곡강시〉는 이곳
을 배경으로 하여 지은 것이다. 두보는 59세에 죽었는데,
그의 말처럼 70세까지 살지는 못했다.
서울 빛초롱 축제
매년 11월 첫째 주 금요일부터 셋째 주 일요일까지 서울 종로구 청계천
일대에서 펼쳐지는 빛 축제를 말한다. 약 2주간 수백 개의 등불로 청계천을
밝히는 축제로 2009년 '한국 방문의 해'를 기념해 시작됐으며 매년 25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찾는 서울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2013년 축제까지는 서울등축제라는 이름으로 진행됐다가 진주남강유등축제
를 모방했다는 논란이 일면서 2014년부터는 서울 빛초롱 축제로 명칭을 바꿨다
. 2012년 당시 서울시가 한국 방문의 해 기간(2010~2012년)에 열기로 한 서울
등(燈)축제를 연례화하는 방침을 정하자, 남강유등축제를 열고 있는 진주시
에서 등축제의 독점적 지위를 요구하며 서울등축제 개최 반대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후 두 시는 축제 협력 발전을 위한 실무 협의를 거치면서 축제 명칭
변경 내용의 차별화 등을 합의해 갈등 해결의 물꼬를 텄다. 이에 따라 서울
빛초롱 축제로 축제 명칭을 바꿨고, 내용 역시 기존의 전통 등 중심에서 LED
조명 등 전통과 현대의 빛이 융합된 행사로 바꾸었다.
굳세어라 금순아!강사랑:작사박시춘:작곡현 인:노래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철의 장막 모진 설움 받고서 살아를 간들/ 천지간의 너와 난데 변함 있으랴/ 금순아 굳세어다오 북진통일 그날이 되면/ 손을 잡고 울어보자 얼싸안고 춤도 추어보자.
3년의 한국전쟁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
오리엔트레코드는 1949년 첫 음반을 발매했다. 조금 앞서
부산에서 설립된 코로나레코드 등 다른 영남 지역의 음반 회사
도 있었지만, 전쟁의 피해를 직접 입지 않은 오리엔트레코드는
1950년부터 1953년 사이 최소한 30~40종의 음반을 내며
가장 활발히 활동했다. 오리엔트레코드가 있었기에 전쟁 중에
도 대중가요 생산의 맥이 이어질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오리
엔트레코드에서 낸 가장 중요한 작품은 <전선 야곡>, <아내의
노래>를 수록한 1952년 음반(음반 번호 R815)과 1953년에
나온 바로 이 음반이다.
나경숙 작사, 박시춘 작곡의 <즐거운 목장>은 전쟁 상황을 직접
묘사하지 않고 현실과 유리된 이상적인 전원 풍경을 그리면서
당시 대중의 정서를 위무했다. 반면 강해인 작사, 박시춘 작곡의
<굳세어라 금순아>는 한국전쟁 당시 가장 극적인 사건 중 하나
였던 흥남 철수 정경을 묘사하면서 전쟁의 아픔을 사실적으로 표현
했다. 채 3분이 못 되는 짧은 노래지만, 이 곡은 흥남에서 부산
으로 이어지는 공간 전개를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또한 당시 부산
의 랜드마크였던 국제시장과 영도다리를 등장시켜 피난
생활의 생생함을 더했다.
현인을 1950년대 대표 가수로 만든 <굳세어라 금순아>
현인은 데뷔곡 <신라의 달밤>(1949)으로 이미 스타덤에
올랐지만, <굳세어라 금순아>를 부르면서 비로소 1950년
대의 대표 가수로 확실하게 위상을 정립했다. 반면 현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남인수는 건강 등의 문제로 전쟁 중
3년간 특별한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 물론 남인수도 휴전 직후
<이별의 부산정거장> 같은 히트곡으로 건재함을 확인했지만
, 1957년 시행한 가수 인기투표에서 현인이 남인수를 누르고
1위에 선정된 것은 <굳세어라 금순아>의
대히트 덕분이었을 것이다.
‘북진통일’이라는 가사에 담긴 뒷이야기
<굳세어라 금순아> 3절 가사에는 ‘북진통일’이라는 대목이
있었다. 그러나 1960년경 미도파에서 발매한 현인의 리바이벌
10인치 LP 음반에는 이 부분이 ‘남북통일’로 개사되었다.
호전적인 가사가 남북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래를 처음 발표한 1953년 당시에는 3년간
의 전쟁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른 결과가 삼팔선이 휴전선으로
바뀐 것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비판 여론이 많았다. 그렇기에
‘북진통일’이란 가사는 냉전 시대의 사회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사를 다른 시각으로 해석한 증언도 있다. 오리
엔트레코드 설립자 이병주는 “이 노래의 작사가 강해인, 즉 강사랑
이 여순 사건에 연루되어 한동안 공개적인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재기한 첫 작품이 <굳세어라 금순아>였다”고
회고했다. 광복 이전부터 작사가와 작곡가로 활약했던 강사랑은
광복 이후 한동안 곡을 발표하지 않았다. 또한 강사랑의 고향이
여수이기에 이병주가 한 증언의 신뢰도는 매우 높다. 그렇다면
‘북진통일’이라는 가사는 시대상을 반영한 것일 뿐 아니라, 자신
을 용공분자로 의심하는 눈초리에서 벗어나고자 강사랑이 의도적
으로 선택한 어휘일 수도 있다.
폭넓은 파급 효과와 역사적 평가
<굳세어라 금순아>의 히트는 다른 대중문화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1953년 11월에는 악극 「굳세어라 금순아」가, 1962년
10월에는 영화 「굳세어라 금순아」가 개봉했다. 또한 이 영화의
개봉에 맞춰 황금심이 주제가 <금순의 노래>를 발표했다.
2002년에는 제목에서 이 노래와 연관성이 있는 책 「흥남부두
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가 간행되었다. 노래와 내용상 관련
은 전혀 없지만, 2005년에는 이 노래의 제목만 딴 드라마
「굳세어라 금순아」가 방송되기도 했다. <굳세어라 금순아>의
공간적 배경인 부산은 가수 현인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래
와 가수를 함께 기념하는 뜻으로 2003년 영도다리 옆에 현인 동상
과 노래비가 건립됐다. 2007년에는 조금 떨어진 송도해수욕장에도
현인 동상과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비가 들어섰다.비록 비문
내용에는 오류가 많지만, 같은 곡의 노래비가 두 개나 생긴 것은
<굳세어라 금순아>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2014년 선정한
‘한국 대중가요 고전 33’선에도 현인 작품 중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과 함께 세 번째로
<굳세어라 금순아>가 포함됐다.
2018-11-18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