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인물편
2. 48 어은공(漁隱公) 휘(諱) 정서(鄭鋤)
공의 휘는 서, 자(字)는 보민(保民), 호(號)는 어은(漁隱) 又 한림(翰林)이시고, 경렬공(地-지)의 증손이시다,
공은 1410년(태종 10년,庚寅)에 태어나셨다, 공은 세조(世祖)때에 사마문과(司馬文科)에 올라 내한림(內翰林)을 지내셨는데,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빈한한 가세임에도 노친(老親)을 봉양함에 있어, 쌀을 빚내고 고기를 낚아 아버님과 어머님을 봉양하는 등 마음과 힘을 다하여 효도를 극진히 함으로써, 임금님이 특별히 전교(傳敎)를 내려 함평 현감(咸平縣監)을 제수하여 노친을 봉양하게 하셨다,
2. 49 우영랑장(右領郞將) 휘(諱) 정간(鄭諫)
공의 휘는 간이시고, 원외랑공(允當-윤당) 9세손으로, 중랑장(中郞將)392) 수(綏)공의 아들이고, 홉곡공(歙谷公) 소(韶)의 아버지이시다,
공의 어머니는 개성김씨(開城金氏)는 공을 옥천군 풍천리(沃川郡楓川里)에서 출생하시어 두살때 고당리(高塘里)로 이사하여 생활하였으며, 벼슬은 우영랑장(右領郞將)393)에 이르렀다, 공은 고려(高麗)의 운세가 장차 쇠퇴하게 됨을 알고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고당리에 돌아와서 은거(隱居)하던중 조선왕조 1421년(세종 3년,辛丑)에 돌아가셨다,
부인 밀양 박씨는 증 호조판서 박천석(朴天錫)공의 딸로, 영동군 심천면 고당리 응봉산(鷹峰山) 임좌원(壬坐原)에 합폄(合窆-합장)하였다,
392) 고려 때 정 5품의 무관 벼슬,
393) 고려 무관의 정 6품 관직,
2. 50 익위공(翊衛公) 휘(諱) 정광조(鄭光祖)
공의 휘는 광조이시고, 문성공(麟趾-인지)의 장자이시다,
공은 1416년(태종 16년,丙申)에 태어나셨으며, 절충장군(折衝將軍) 행 용양위(龍驤衛)의 대호군(大護軍)을 지내시고, 세자(世子)를 모시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좌익위(左翊衛)로 계시다가 1457년(세조 3년,丁丑)에 별세하셨다,
공의 묘소(墓所)는 경기도 양주군 주을동(楊州郡注乙洞)에 모셨음,
2. 51 모산공(茅山公) 휘(諱) 정계주(鄭繼周)
공의 휘는 계주, 호(號)는 모산(茅山)이시고, 문충공(芝衍-지연)의 둘째 아들인 추밀공(宥-유)의 증손이시다,
공은 성품이 강직하고 도량이 넓고 재능과 기예(技藝)도 뛰어났다, 생원 문과(生員文科)에 올라 함양군(咸陽郡) 안의 현감(安義縣監)을 지내실 때 많은 치적을 남기시고, 형(兄) 장령공(掌令公-希周)이 함양(咸陽)에서 담양(潭陽)으로 옮겨 살으셨으므로, 공도 만년(晩年)에는 모산(茅山)으로 이사하여 형님과 같이 이웃에 사시면서 서로 아주 즐겁게 지내시고, 늘 도홍경(陶弘景)394)의 고사(故事)를 생각하시면서, 모산정(茅山亭)에 오르셔서 노후를 스스로 편안하게 하시고 화양은거(華陽隱居)395)와 같이 행하셨으며, 형을 지극히 공경하여 부친과 같이 모시니 홉사 옛 현인들과 같이 고풍(古風)이 있었고, 형제가 같이 계시면 형과 동생을 분별하기가 어려웠다고 하였다, 공은 처음에 안의현감으로 계시면서 정사(政事)를 청렴(淸廉)하게 하시어, 백성을 편안하게 잘 다스렸으므로 백성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공을 아버지와 훌륭한 어머니라고 불렀다,
394) 중국 남송의 도사로 茅山에 들어가 도(道)를 닦았음,
395) 도홍경의 호(號),
2. 52 좌윤공(左尹公) 휘(諱) 정육을(鄭六乙)
공의 휘는 육을이시고, 죽당공(復周-복주)의 아들이시며, 문헌공(汝昌-여창)의 아버지이시다, 1427년(세종 9년,丁未)에 함양 개평 옛집에서 태어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기개(氣槪)가 높고 도량(度量)이 넓었으며, 또한 마음이 활달하여 대범하셨으나 성품은 아주 진실(眞實)하셔서, 옛 가풍(家風)을 잘 본받아 훌륭한 벗들과 선현(先賢)들을 존경하시고, 또 한 지략(智略)이 뛰어나셔서 조정(朝廷)에 힘쓰시니, 1460년(세조 6년,庚辰)에는 의주 통판(義州通判)396)을 지내시면서, 그 해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시고, 1466년(세조 12년,丙戌)에는 절충 장군(折衝將軍) 행(行) 함길도(咸吉道)397) 병마우후(兵馬虞侯)398)로 승차되시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용전분투(勇戰奮鬪)하시다가 입근(立慬)399)하시니, 임금님이 공의 충의(忠義)를 가상히 여겨 가정대부(嘉靖大夫)400)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401)에 추증하시고, 적개(敵愾)402)의 녹(錄)과 원종(原從)403)의 훈(勳)을 내리셨다,
공의 묘소(墓所)는 함양군 수동면 승안동(昇安洞)에 모셨으며, 아들은 여창(汝昌), 여유(汝裕), 여관(汝寬) 3형제를 두시고, 딸은 영인군(寧仁君) 이순(李揗)에게 출가시켰다,
396) 감영과 우수영 및 큰 고을에 둔 종 5품 판관,
397) 함경도,
398) 종 3품 외직 무관으로 병마 절도사 밑의 벼슬,
399) 절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림,
400) 조선때 종 2품 上 문무관의 품계로 영조(英祖)때 가의대부(嘉義大夫)로 고침,
401) 현 서울 특별시 제 1 부시장과 같으며 종 2품 관임,
402)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마흔 아홉 사람(49명)에게 내린 훈호,
403) 각 등급의 주장되는 공신 이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공신의 칭호,
2. 53 진사공(進士公) 휘(諱) 정남(鄭楠)
공의 휘는 남이시고, 경렬공(地-지)의 증손이시며, 산음공(穟-수)의 아들이시다, 1438년(세종 20년,戊午)에 전남 함평군 영풍면 신풍리(咸平郡永豊面新豊里)에서 태어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일곱살에 벌써 능히 시를 지을 줄 알아서 까마귀를 가리켜 읊기를, 새 짐승인 까마귀도 부모에게 효도를 잘하는데, 사람이 효를 몰라서야 되겠느냐, 「효는 어버이를 공경하여 섬기면 그것이 효가 되고, 충성은 임금님 섬기기를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것같이 하면 된다고」하였다, 또 공은 아버님이 병환중에 계시니 물고기를 잡아다 공진하고, 하느님에게도 빌고 하였지만 차도가없어 병세가위급하여, 공이 손가락을 째서 피를 넣어드리니 회생하시어 3 일간을 더 계시다가 별세하시므로, 상장(喪葬)의 예절은 예법(禮法)을 잘 받들어 행하고, 어머님도 효를 다하여 받들며 서당에를 다녔는데, 아버님이 집에 안 계셨으므로 집에서 가사를 돌보는 때가 많고 서당에 가 있는 시간이적으니, 어머님께서 부지런히 배우지않는다고 스승에게 책망을 듣겠다 하시므로, 공이 시(詩)로써 대답하기를 「소자가 평소에 집을 못 잊어 하는것은 제 마음이 반은 어머님에게 있고 반은 스승님에게 있지만, 제 본뜻은 어머님을 잘 모시는데 있으므로, 스승님만 쫓아 서당에만 가 있는것은 불가하며, 그렇다고 스승님의 가르침은 한번도 폐한적이 없습니다」 하니 어머님께서 크게 기특하게 여기셨다,
그리고 성년이 되어서는 바르게 배우기 위하여 행촌(杏村) 민순(閔純)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학업(學業)에 진력하니, 크게 발전허여 1471년(성종 2년,辛卯)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며, 1472년(성종 3년,壬辰)에 어머님 상(喪)을 당하여 시묘하면서 삼년상을 모시는데 밤이면 호랑이가 와서 여막(廬幕)을 호위하니, 향당에서 기이한 일이라하며 호랑이도 공의 효성에 감동되었다고 하였다,
공은 영화(榮華)의 길은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고, 만년에는 감방산(坎方山) 아래에다 집을지어 경렬공(地-지)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정사의 이름을 경회정사(景懷精舍)라 하고, 여기에 거처(居處)하시면서 어버이의 덕(德)을 갑고자 하여 아침 저녁으로 우러러 뵙고 국은(國恩)을 연모(戀慕)하고, 경렬공(地-지)을 추모(追慕)하는 마음에서 경회(景懷) 두자를 모셨다, 그리고 후학들을 가르치고 아들과 조카 아이들에게도 덕(德)을 기르도록 가르치면서 임천(林泉)에서 한가하게 지내시다가 별세하시니, 세상 사람들이 감방처사(坎方處士)라고 하였다,
2. 54 유수공(留守公) 휘(諱) 정석(鄭碩)
공의 휘는 석이시고, 경렬공(地-지)후 목사공(穖-기)의 아들이시다, 1439년(세종 21년,己未)에 전남 옥과(玉果)에서 태어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고 남달리 총명하여 일찌기 가정교훈을 잘 이어받아, 학업에 열중해서 중종(中宗)때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戶曹)와 공조(工曹)의 좌랑(佐郞)을 지내시고, 여러 고을의 현감(縣監)을 거쳐 다시 내직(內職)404)으로 옮겨 중임(重任)405)을 역임하시다가, 다시 외직(外職)406)으로 개성유수(開城留守)407)를 지내셨다,
404) 중앙 부서,
405) 중요한 직책,
406) 지방관,
407) 정, 종 2품관으로, 별도(別都) 또는 행궁(行宮)의 소재지에 두던 특수한 지방 장관, 즉 임금을 대신하여 머물러 지킨다는 뜻,
2. 55 하성위공(河成衛公) 휘(諱) 정현조(鄭顯祖)
공의 휘는 현조, 자(字)는 효중(孝仲)이시고, 시호(諡號)는 편쟁(編玎), 문성공(麟趾-인지)의 둘째 아들이시다, 1440년(세종 22년,庚申)에 태어나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영민(英敏)하여 일찌기 가정교훈을 잘 이어받아 덕행(德行)과 기량(器量)을 잘 닦았다, 세조(世祖)가 왕위에 오르기전 사가(私家)에 계실 때 공의 집에 오셔서 공의 기특함을 보시고, 바로 의숙공주(懿淑公主)와 결혼을 시켜 사위를 삼으셨다, 공은 처음에는 음보(蔭補)408)로 돈령부(敦寧府)의 주부(主簿)로 관직에 입문하였다, 그 뒤 세조(世祖)가 왕위에 즉위하자 숭덕 대부 하성위(崇德大夫河城尉)로 특진하시고, 공은 상(上)께서 총애하여 항상 자기 곁에서 다른 사무는 금하고 오로지 후설지신(喉舌之臣)409)으로 왕명(王命) 출납(出納)등만 하도록 하셨다,
어느날 상(上)께서 공을 아주 가상히 여겨 웃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비록 어리지만 열 사람을 대적할 수 있다” 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세조(世祖)가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산정(刪定)410)하실 때도 공을 참여시켰다, 1468년(세조 14년,戊子)에 상(上)께서 친히 책략 있는 선비를 뽑는 별시 연영과(延英科)411)의 을과(乙科)에 2위(二位)로 의빈(儀賓)412)으로써 급제하니, 자고로 전례없는 영화라고 하여 왕실의 귀염을 독차지하였다, 예종(睿宗) 즉위 초(初)에 역신(逆臣)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輸忠保社 定難翊戴 純誠明亮 經濟弘化 佐理功臣」
「수충보사 정난익대 순성명양 경제홍화 좌리공신」의
2등(二等)에 책록되어, 수록대부(綏祿大夫) 의빈부 의빈(儀賓府儀賓) 하성 부원군(河城 府院君)에 봉해지셨다,
1469년(예종 1년,己丑)에 예종 임금이 승하(昇遐)413)하시니, 대통(大統)을 이을분이 저해지지 않자, 세조비(世祖妃) 정희왕후(貞熙王后)가 성종(成宗)을 왕으로 세우고자 할때, 공이 궁(宮)안의 복도에서 혼자 황급히 주선하여 대책을 세우셨다, 그리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의 호를 받으셨는데, 1504년(연산 10년,甲子)에 갑자사화로 국내가 혼란할때, 공은 죄도없이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폄출(貶黜)414)되시어 그 해에 적소(謫所)415)에서 향년 65세로 별세하시니, 그 후 2년 뒤에 1506년(연산군 12년,丙寅) 중종반정(中宗反正)416)으로 중종(中宗)이 등극하셔서 모든 관직을 다시 복원(復元)시켜 예장을 지내고 부조지전(不祧之典)417)을 내리셨으며, 그리고 시호(諡號)를 편쟁(編玎)이라 내리셨다,
공은 의빈이었으나 임금께서 특별히 재취(再娶)를 허락하여 삼남일여(三男一女)를 두었다,
408)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음,
409) 현 청와대 대변인과 같음,
410) 글의 자구를 잘 수정하여 정함,
411) 세조 14년 2월 15일 온양 행궁에서 실시한 과거,
412) 부마(駙馬), 임금의 사위,
413) 임금님이 별세하심,
414) 벼슬을 떨어뜨려 물리침,
415) 귀양가서 있는 곳,
416) 연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옹립,
417) 나라에 큰 공훈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는 특전,
출처; 하동정씨 세적실록 2008년인쇄본 雲鶴 炳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