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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민옥적, 슈젠지, 세잔지, 고려문, 조선통신사의 비… | ||||||||||||||||||||||||||||||||||||||||||||||||||||||||||||||||||||||||||||||||||||||||||||||||||||||||||||||||||||||||||||||||||||||||||||||||||||||||||||||||||||||||||||||||||||||||||
한국인 혼 찾아 떠난 국경의 섬 대마도 이즈하라 당일여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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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10분, 저절로 눈이 떨어졌다. 긴장을 했던지 휴대폰 알람을 4시 15분에 맞춰뒀는데 5분 먼저 일어난 것이다. 씻고 일행들이 기다리는 장소로 나갔다.
5시 정각에 내가 운전을 한 자동차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가면서 편의점에서 아침에 부산항 국제터미널에서 먹을 삼각김밥을 샀다. 마땅히 먹을 장소도, 시간도 없을 듯해서.
6시 30분경 여객터미널에 도착해서 티켓팅을 하고 면세점 방문 후에 대마도 이즈하라행 코비호에 승선했다.
9시 50분경 이즈하라항에 도착한 후 입국수속을 하고 자유여행이 시작되었다. 당일여행이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은 5시간 30분에서 6시간 남짓. 가이드가 없기 때문에 일행들 안내를 위해 미리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4년 전에 한번 따라온 경험만으로 처음에는 힘들었다.
이즈하라 대교를 지나 두 물줄기가 모여지는 안쪽의 삼각부분에 자위대 나가사키 지방연락부가 있는데 이곳이 표민옥적(瓢民屋跡)의 자리이다.
우리나라 해안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들이 풍랑으로 조난이 되면 대부분 해류를 따라 대마도나 일본 서쪽 해안으로 표류하게 된다. 이렇게 표류한 어부들을 모두 대마도에 있던 표류민 집단수용소 즉 표민옥(瓢民屋)에 수용했다가 조선에서 관리가 와서 적절한 협상 후에 귀국시켰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에도시대의 약 200년간에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표류해 들어간 사람들은 약 3,400명, 또 일본으로부터 조선으로는 1,000명 정도라고 하며, 이것은 살아 송환된 사람들의 기록상 숫자이니 실제로는 더 많았을 것이다.
계획한 동선대로 움직이기 위해 슈젠지(修善寺)로 향했다. 지도로는 쉽게 찾을 수가 없어서 주민들에게 물어서 도착했다.
이곳에는 구한말 ‘을사오적’에 대한 상소문을 올리고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대마도에서 순국하신 최익현 선생 순국비가 서있다. 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1986 년 한ㆍ일양국의 유지들이 힘을 모아 세운 비석으로 선생의 순국비는 높이 2.1m, 폭 0.45m, 두께 0.25m의 크기이다.
한국의 황수영(黃壽永) 박사가 쓴 비문의 전면에는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고, 후면에는 “면암 최익현 선생이 1907년 1월 1일 대마도 경비대 억류지에서 사망하여 상여가 본국으로 운구될 때에 이 절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선생의 사적이 사라질까 두려워(근심되어) 이 비를 세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 여정은 세잔지(西山寺)였다. 슈젠지와 정반대 방향인데 여러 사람한테 물은 끝에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정원을 간직한 세잔지는 에도시대에는 토쿠가와 막부의 이테이안(以酊庵)이 있었으며 이테이안은 승려인 겐소가 1611년 대마도에 마련한 일종의 감찰기관 성격의 선원으로 대마도 국서 위조사건 이후 외교문서 작성이나 위조를 감찰하기 위해 막부가 교토의 승려를 교대로 파견하던 곳으로 조선과도 인연이 깊은 절이다.
조선통선사의 숙소로 쓰였고 지금은 유스호스텔로 사용되는 이 절 정원에 1590년 조선통신사 부사로 다녀간 학봉 김성일 시비가 있어 눈길이 끌렸다.
이제부터는 시내중심부로 들어가서 모인 유적들을 감상할 수 있다. 쓰시마시청 1층 쓰시마관광물산협회에 들러서 대마도에 관한 자료들을 구한 후 고려문으로 향했다.
이 문은 원래 대마도 도주가 머물던 사지끼바라 성에 있던 것으로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축했으며 그러다가 1987년 태풍의 피해를 받아 무너진 부재를 수습해 이곳에 옮겨 복원한 것이다. 고려문이란 이름은 에도시대에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 행렬을 맞이하기 위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옆에 세워져 있는 조선국통신사지비(朝鮮國通信使之碑)는 선조 40년(1607) 여우길(呂祐吉)을 정사(正使)로 한 사행단(使行團) 467명을 시작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10여 년 동안 12회에 걸쳐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를 기리며 양국의 선린우호관계를 교훈삼아 21세기의 한일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세운 비석이다.
또 성신지교린비(誠信之交隣碑)는 아메노모리 호슈(1668-1755)가 주창한 ‘성신지교린’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비석 뒷면에는 우리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하는 뜻을 가진 대마도 유지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두어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며 고려문 뒤에는 아메노모리 호슈의 현창비가 세워져있다. 나가사키현립 대마민속역사자료관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대륙문화를 도입하는 요충지로서 위치한 대마도의 역사적 문화유산과 각종 민속자료, 한반도에서 전래된 융기문(隆起文), 무문(無文) 토기도를 비롯해 조선통신사들의 행적 등 우리나라와 관련된 문서들이 많고 대마도의 민속자료와 조선과 대마도의 교류관계를 살필 수 있는 약 46,000점의 방대한 종가문서(宗家文書)가 있다.
이어서 금석성터와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 옛 가네이시성 정원, 반쇼인(万松院)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덕혜옹주결혼봉축기념비는 조선왕조 26대 고종의 딸 덕혜옹주가 1931년 5월 쓰시마 번주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과 결혼한 것을 축복하기 위해 건립됐으며 지금의 비는 2001년 11월에 복원된 것이다.
반쇼인(万松院)은 소가(宗家) 20대 요시나리(義成)가 아버지 요시토시(義智)를 기리며 1615년 건립한 보리사이다. 절문은 모모야마(桃山) 양식으로 창건 당시 그대로이며, 도쿠가와(德川) 역대 장군들의 위패와 조선통신사 관련 유물이 있는 일본 3대 묘지중의 하나로 국가지정 사적이다. 성인 1인당 300엔의 입장료를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방문한 역사의 현장은 대마도의 대표격인 신사인 하치만구신사(八幡宮神社)였다. 신사에 궁(宮)자를 붙인 곳은 격이 높은 신사임을 말해주고 있으며 맨 앞쪽의 도리이를 들어서면 넓은 주차장이 있고 그 주차장에서 신사앞으로 돌층계가 있으며 바로 신사로 연결된다.
이즈하라 하치만신을 모신 하치만구 신사, 우노도 신사, 천신 신사, 와카미야 신사가 함께 있다. 하치만구 신사는 일본의 덴진, 이나리 신사와 더불어 일본 3대 계파의 신사로 일본 본토에서도 하치만구를 흔히 볼 수 있으며 일본 전체에 하치만구 신사가 3,000곳이나 된다고 한다.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인 신공황후를 받들고 있어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의 증거를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며 최익현 선생이 대마도로 유형이 되어 처음으로 감옥살이를 한 곳이다.
보물관에는 삼십육가선(三十六歌仙) 두루마리 그림이 장관이라고 하는데 음력 8월 15일에 행해지는 팔번궁신사 대제는 예부터 대마도 사람들의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가을축제이다. 신사 뒤편의 보물전은 300엔을 내야 관람할 수 있으나 이날은 휴관하고 있었다. 늦은 점심은 홋토못토라는 가게에서 도시락을 사서 티아라 쇼핑몰 휴게소에서 먹었다. 모스버거와 다이슈안, 100엔샵, 마트 등 복합쇼핑몰인 티아라를 둘러보고 항구로 가는 중에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면세점에 들러 간단한 쇼핑을 한 후 이즈하라항에서 승선권을 받아 다시 코비호를 타고 부산항을 거쳐 영천으로 돌아왔다.
대마도 이즈하라는 조선통신사의 흔적들로 가득 차 있다. 매년 8월 첫 번째 토ㆍ일요일에는 쓰시마 아리랑축제가 열리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그러했듯이 한국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는 곳으로 영천 또한 조선통신사의 주요길목이었다.
조선시대 조선통신사가 영천을 지날 때에는 조양각에서 전별연을 열고 마상재를 시연하며 융숭한 대접을 했고 2007년부터 2년에 한 번씩 세 차례 열린 21세기 조선통신사 한ㆍ일 우정걷기 행사에서도 환영행사 및 공연과 기념품을 전달하며 옛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대마도 당일여행이 활성화된 것은 지난해 11월 1일부터 미래고속(주)과 JR규슈고속선㈜이 이즈하라와 히타카츠항에 코비와 비틀호를 운항하면서 14년간 ㈜대아고속해운이 독점해왔던 이 항로가 3개 선사 경쟁체제로 바뀌게 되면서부터이다.
6시간 남짓한 체류시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도보 6시간의 여행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답사와 쇼핑에 좀 더 욕심을 낸다면 아리아케(有明)산 등산도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저렴한 비용으로 고대로부터 대륙과 일본의 중계지 역할을 했던 역사의 섬 쓰시마에서 조선통신사와 한국인의 혼을 찾아보고 그들의 문화를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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