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항복하는데 결정타를 가한 것은 미국의 핵폭탄 두 발이었다. 그 덕에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여러 나라, 여러 지역이 동시에 해방됐다.
일본을 무릎 꿇린 그 결정적인 힘은 가공할 신무기인 핵폭탄이었지만, 그렇다고 그간 미국의 태평양에서의 전쟁 승리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히로시마에 핵폭탄을 터뜨리기 2주 전인 1945년 7월 25일 미국은 태평양의 비키니섬에서 핵폭탄 실험을 했다. 이어 7월 26일 연합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일본은 내각에서 논의했지만, 끝내 연합국의 항복 권유를 묵살하고 전쟁에 매진할 것을 결의했다.
미국은 히로시마 등 2개 도시에 핵폭탄을 터뜨리기로 하고 8월 6일 일본 해군 기지가 있는 히로시마에 우라늄 핵폭탄을 터뜨렸다.
그럼에도 일본 군국주의 집권인사들은 허세를 부리며 냉엄한 현실을 인정하지 않자, 미국은 8월 9일에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핵폭탄을 추가로 터뜨렸다.
핵폭탄으로 며칠 사이에 합쳐서 20만여 명 가까운 일본사람이 죽었다.
일본은 천황 이하 무조건 항복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천황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는 칙서를 발표했고, 일본정부는 같은 날 미영중소 4개국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일본 천황의 라디오 항복 방송은 그다음 날인 8월 15일에 있었다.
연합군의 최고사령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 SCAP)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가 1945년 8월 30일 일본에 도착했다.
1945년 9월 2일 맥아더 장군은 동경만 미주리 함상에서 영국, 소련, 중국, 프랑스,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 외상과 우메즈 요시지로(梅津美治郎)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이날은 미국의 대일승전기념일이 된다. 동시에 포츠담선언이 체결되어 즉시 발효되었고 일본과 중국, 한국, 동남아, 태평양의 일본군 항복식이 거행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