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관문인 성전면은 북쪽이 월출산이 자리잡고 남쪽으로 들녘이 펼쳐져 있다. 성전면의 면적은 62.61㎢ 강진군의 11개 읍 면 중 가장 넓은 면적을 보유하고 있으며 논이 13.57㎢ 밭 4.3㎢ 임야 38.36㎢ 기타 6.34㎢로 토지 구성을 보이고 인구는 약 7,500여명 가구수는 약 1800 여 호 중 이중 농가가 85%를 친지하고 있어 주요산업은 농업이다.
이곳 학교가 위치한 성전면 월평리는 성전면 소재지 터로 뒷산 종지기 봉에는 규석과 무연탄이 매장되어 있고 생활자기를 만들던 옛터가 남아있다. 옛 부터 해남, 영암, 장흥, 강진읍 사람들이 소를 몰고 모여드니, 이곳이 생 금(生金)지라 정류소와 관공서 학교가 자리잡고 목포, 해남, 광주, 순천등 교통의 요충지이며 교육적 위치도 좋아 초, 중, 고, 대학까지 유치된 교육 선진 소재지이다.
지금의 성전초등학교는 성전북, 수양, 성전남 초등학교가 통합되어 있다.
2. 지형
가.일반적 지세
강진의 관문인 성전면은 북쪽에 월출산이 자리잡고 남쪽으로 들녁이 펼쳐진다. 영암에서 청풍 고개를 지나 남으로 오르면 정상의 풀치재에서 작천면으로 가는 갈림길을 만난다. 동쪽산 모퉁이에는 월남역 터가 있고 북쪽 산자락에는 삼국시대부터 형성된 월남마을이 있다.
도로 서쪽으로 무위사 가는 길이 있고 안정동과 백운동이 모여 안운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그리고 불꽃처럼 솟은 솔개봉 밑에 달맞이 대월의 마을 앞 동과 서로 세 개의 선 돌은 마을을 수호하고 있다. 남쪽 금강 천변의 새로 생긴 마을에는 근래의 고읍면사무소터와 지석묘가 함께 있다. 소쿠리 안 속에 자리잡은 성의 동족 마을은 배(船)형국이며 동쪽방뫼(博山)와 경계인 자라형국(鰲山)마을에 흰 바위가 마을을 지켜주고 있는데 함양 박씨의 오랜 터이다.
나.산림형태
수암산 서쪽 황금들에 지석묘(고인돌)와 국도변에는 안질바위가 있고 성밭이라는 부르는 영흥마을 앞에 수구(水口)막이 나무들이 즐비하게 서있다.
강진의 진산인 우두봉 북쪽 해맞이산(白峰山)자락에 매미처럼 자리잡은 밝은 마을(明洞)이 있고 그 서쪽 고을 터(堂山)이던 곳은 솔치를 지나 병영으로 가던 옛 길이며 큰 나무가 있던 거목 마을은 성전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북을 향해 경사지고 월남과 경계한다.
다.하천
주요하천은 면의 서쪽에서 시작하여 동으로 흐르는 딱밭골몰과 월출산의 중턱에서 발원하여 성전리 시천에 이르러 월평천을 합류하여 수양리, 명산리를 거쳐 작천쪽으로 흘러가는 금강천이 있다. 북쪽 딱밭(楮田)은 1980년대말저수지 공사로 마을은 흩어졌으나 절골물은 쉬지 않고 금강천으로 흘러 들고 있다. 이렇다 할 장류(長流)는 없지만 월출산에서 발원한 탐진강이 무위사 골짜기를 기원으로 한 한줄기가 성전평야를 뚫고 구강포에 하천을 이룬다.
1. 금강천
본군 서북단의 월출산에서 발원 성전천, 작천천을 합하여 작천 평야을 이루고 인접 장흥군 서쪽을 관통하여 탐진강에 합류 강진만에 이른다.
3. 교통
가.주요도로(국도, 지방도)
도로망을 보면 남쪽으로 국도 2호선(목포-분야)이, 면의 북쪽으로는 국도 13호선(완도- 담양)이 놓여 있다. 또 동쪽으로는 지방도 814호선이 면소재지에서 시작하여 작천, 병영으로 연결되며, 君道는 3호선이 영풍리 신풍에서 월하리 무위사까지, 8호선이 월남리에서 시작하여 작천을 거쳐 병영으로 연결된다.
나.산업구조
면적 및 인구·가구수 등을 1989년 6월의 군 통계에 의하여 살펴보면, 먼저 면적은 총62.61㎢로 강진군의 11개 읍, 면중 가장 넓은 면적을 보유하고 있다. 이중 논 13.36㎢, 발 4.34㎢, 임야 38.36㎢, 기타 6.34㎢의 토지구성을 보이고 있다. 인구는 총 7,326명으로 강진군의 9.4%를 차지하며, 가구수는 1,769호로 이중 농가가 1,525호(86.2%)로 나타나 주산업이 농업임을 알 수 있다.
경작·수리시설은 월송소류지, 송월저수지와 금강상류의 성전저수지, 안운 소류지, 강당 소류지 등을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다.
호당 평균 경작 면적은 1200l평에서 3200평 정도의 농사를 짓는다.
주요 작물은 벼, 보리를 재배하고 있고 축산은 주로 한우, 염소, 젖소, 돼지, 오리 등을 소규모로 사육하고 있다.
사업체 및 종사자수를 살펴보면, 1998년 군 통계에 따르면 총 사업자수는 261개, 종사자 수는 754명이다. 1∼4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업체수는 239개, 50∼99명으로 구성되어 있는 사업체수는 1개로 나타난 사실로 보아 대부분 소규모 영세사업체가 대다수임을 알 수 있다.
농업을 제외한 산업별, 읍면별 사업체는 도소매 및 소비자용품 수리업체가 92개(35%)로 가장 많았고 숙박 및 음식점업 사업체수가 57개(21%)로 두 번재로 많았다. 또한 종사자 수로는 교육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수가 203명(26.9%)로 가장 많았고 도소매 및 소비자용품을 수리하는 업체에 종사하는 수가 133명(17.6%)로 두 번째를 차지했다.
다.특산물
고추, 콩, 녹차, 땅콩, 매실, 오이, 유자, 마늘, 감, 매화, 배 ,밤, 작약, 멧돼지 등이 있다.
라.토산물(토속음식)
특기 오이, 방울토마토, 버섯, 설록차는 이 고장의 특산물이다.
오이는 약 50여호에서 재배하는데 매출액이 15억원정도의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서울 가락동 시장에서는 '청자골 오이' 로 통한다.
또 방울 토마토도 약 4억원 정도의 매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설록차는 82년부터 월출산 공기 맑고 물 맑은 산허리에서 장원 산업이 약 10만평을 재배하여 제조까지 하는데 연 25억원 정도의 매출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설록차'라는 상표로 우리나라 녹차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버섯은 월출산 기슭에서 재배하여 무공해 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4. 교육문화 형태
1919년 3.1독립운동을 전후하여 지방의이 향학열과 함께 각처의 사설 강습소, 사숙, 야학등이 설립되었는데 그중 성전면에는 월하리 교회당에 야학이 설립되어 오래되지 않아 폐쇄되었지만 민족사상을 고취시켰으며 그 후 성전 심상소학교가 8년간의 알찬 초등교육을 수업케 하였으며 현재에 이르러는 어린이집,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전문대학, 특수교육을 담당하는 특수학교가 있어 지역 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묘제인 고인돌 유적이 성전면 5개 지역에 77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일찍부터 성전지역이 선사문화가 발달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강진지역은 바닷길에 연하여 고대부터 교통의 중심지였고 이러한 지리적 환경 때문에 외래의 문화요소들과 일찍부터 접촉하여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무위사, 월남사, 백련사, 금곡사, 월남사지 등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한데 이들 중 본면에 소재한 무위사, 월남사지는 그 어떤 여타의 유적보다 유서가 깊고 부각되는 것으로 성전면의 크나큰 자랑거리이다.
5. 경제상황
대부분의 성전 사람들은 농업에 생활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와 함께 최근들어서 영풍, 송학리 등지에서는 비닐하우스를 통해 오이, 방울토마토와 같은 작물을 재배하여 연간 120톤이상을 생산 판매하여 강진군 소득 3위 마을이 되었다.
월출산이라는 명산을 마을에 두고 있는 월남, 월하리 주민들은 산에서 약초를 채취 판매하고 표고버섯, 팽이버섯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고 있으며 또한 매실의 생산이 많아 매실차, 매실장아찌등을 만들어 판매 소득향상을 힘씨고 있다. 그리고 월남리에는 대규모의 녹차 밭이 조성되어 1987년 가공 공장이 세워져 전통차로 각광받는 녹차를 생산하고 있다.
성전은 강진, 완도, 해남의 길목인 교통의 요지이며 무위사, 경포대, 월출산등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으로 농업지역으로서는 드물게 상가가 많이 형성되어 상업이 발달되었다.
6. 인적구조(인심)
성전사람들은 월출산 기슭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과 온화한 경관에 자부심을 갖고 살아가며 각 가정의 친목이 깊고 서로 협동하며 웃어른을 존경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자립심이 강하다, 한편 도·농 문화수준이 차이가 많음을 실감하며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고 자녀교육에 적극적이다.
7. 학구지역 부지 및 건물 형태
성전초등학교가 위치한 학구는 영암, 강진, 해남으로 가는 삼거리로 교통의 중심지이며 교통량이 많기 때문에 아동들의 교통 안전지도가 절실히 요구된다.
건물은 삼거리로 교통량이 많기 때문에 슬라브 형실의 상가건물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대학의 학생들을 위한 아파트형식의 기숙사가 2동 있으며 또 다른 아파트1동이 있다.
8. 관광·문화·체육
가.관광지
1. 월출산경포대
전화 : (0638) 432 - 5416
우편번호 : 527 - 810
주소 :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1152-2
주변화경 : 국보 10호인 무위사와 인접하여 국립공원 월출산 등산로와 경포대 맑은 계곡 등 주변 경관이 수려함으로 청소년 심신 수련의 장소로 적합함.
주요시설 : 부지면적(36,209㎡), 건축면적(1,025㎡)
- 숙박시설 : 30인실 12개, 수용정원 250명(야영 250)
- 집회시설 : 강당, 회의실, 야외광장
- 체육시설 : 배구, 축구, 탁구, 체력단련장
- 기타 시설 : 주창장(대형 5, 소형 10대)
주요행사 : 입소 학교별 자체 계획에 의함
휴관일 : 공휴일
교통 : 광주-영암-성전면 월남리(월출산 입구)에서 도보 25분
나. 문화유적지(사적지 및 문화재)
1. 무위사 극락보전 (국보 제 13호)
지정번호 : 국보 제 13호
지정일 : 1962년 12월 20일
규모 : 정면 3칸, 측면 3칸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무위사는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평 왕 39년(서기617) 원효대사에 의해 당초 관음사로 창건되었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다만 신라시대부터 무위갑사란 이름으로 불려 왔던 사실은 경내에 현존하고 있는 선각대사편광탑비명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무위사에 현존하는 대부분의 건물은 네 번째 중건인 서기 1555년에 건립된 것이나 극락전 만은 최근 (1956년경)에 실시된 보수공사에서 보존 후벽의 벽화 명문에 "십이 병신삼월초길 화성" 이란 기록이 판독됨으로써 성화 12년(서기1476년) 보다 앞서는 건물일 것으로 막연하게 추정해왔다.
그러나 1983년 옥개부 이상을 해체 보수할 때 중앙간 종도리 장혈에서 "선덕오년"이란 묵서명이 발견됨으로써 이 건물이 세종 12년(1430)에 건립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건물 내부에는 전혀 기둥이 없는 널찍한 공간을 이뤘고 내부 벽에는 여러 보살 및 천인상을 그린 벽화가 있는데 당대 인물화인 오도자의 신필이라고 전해 오고 있다.
2. 무위사 선각대사편광탑비(보물 제 507호)
지정번호 : 보물 제 507호
지정일 : 1969년 6월 16일
규모 : 탑신고 2.35m, 폭1.12m
시대 : 고려초기
소재지 :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
탑제는 ' 고려국고무위갑사선각대사편광 암 탑명병존 ' 이라 시작하여 찬자 최언위와 서자 유 훈율의 관등성명을 기록하고 있다. 대사의 법 휘는 형미 속성은 최씨이다.
신라 헌강왕 8년(882) 18세에 구례 화엄사에서 폐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가지산 보림사 구산선문의 태두인 보희선사에게 참알하야 선법을 배운 뒤 27세에 인당 운거도응의 심인을 받고 효공왕 9년(905)에 귀국하여 강진 무위갑사에 머무르니 이때 가대사의 나이 41세때의 일이다.
다시 비문은 "속년오십유승, 삼십유오우" 이라 하였으나 무위갑사에 머루른지 13년후 시작하였다, 또 말미는 "개운삼세차병우오월경인삭이십구일유무오립"이라 기록되어 있다.
입비년 인 개운삼년은 고려정종원년(946)으로서 대사의 입적후 28년이 되는 해이다, 비는 극락보전 서방 약 30m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재 원장내에 남향을 하고 있으며, 명부의 조기는 당대의 타비에 비해 사실성의 경향을 띠었으며, 특히 조각예술로서의 우수성을 나타내고 있다.
3. 무위사 삼층석탑(문화재자료 제76호)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 76호
지정일 : 1984s년 2월 29일
규모 : 높이 396㎝
시대 : 고려시대
소재지 : 강진군 성전면 월하리 1174(무위사 경내)
무위사 3층석탑은 전형적인 2층 기단의 3층석탑으로 각 부재가 잘 조화 된 석탑이다.
지대석은 수매의 장대석으로 결구하고 그 위에 각형 2단의 괴임대와 하층기단 중식이 연결되고 있으며 각면에는 면상이 새격져 있는데 그 조식이 정교하여 세련되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 1석씩으로 탑신에는 양면에 우주가 모각되고 2,3층에서는 그 높이를 줄여 체감을 보였다. 옥개석은 상면의 낙수면이 평박하고 처마의 곡선도 중앙에서 직선을 이루 다가 우동의 합각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반전을 보였다.
이탑은 3층 옥개석과 1층 옥개석 일부에서 약간의 훼손을 입었으나 그외의 부재에서는 완전한 상태로서 비교적 통일신라의 전형 양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이탑의 조성 연대는 선각대사편광탑비의 조성 연대(946년)와 통시대이거나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은 고려초기로 보인다.
4. 월남사지 모전석탑(국보 제298호)
지정번호 : 국보 제 298호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소재지 :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54
이 탑은 중국의 전탑 양식을 따른 모전석탑으로 그 분포 상황은 우리 나라 중부지방에 많은 밀도를 보였으나 일부에서는 지방으로도 그 전파의 예를 남겼다.
탑의 구성은 단층 기단 위에 삼층석탑으로 기단 구조에서부터 전탑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특히 이석탑에서 주목되는 것은 기단부나 탑신부에서 다수의 소석재로 각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탑은 모전탑이면서 석재 결구에 있어 다분히 백제탑의 양식이 엿보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전탑의 기본양식을 따르면서도 백제탑 구성을 전승한 예로서 이 지역에 백제계 석탑 양식이 계승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한편 월남사는 폐사되고 현재는 탑과 석비만 남아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월남사 재월 출산고려증진각소창 ' 이란 기록이 있다. 한편 후방 약 30m 지점 민가에는 법당의 주초석과 석탑의 결구석으로 보이는 석재 등이 산재하고 있다.
5. 월남사지 지석비(보물 제 313호)
지정번호 : 보물 제 313호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규모 : 높이 3.58m
시대 : 고려시대
소재지 :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13
장방형 지대석 위에 귀부를 마련하였는데 대석과 귀부는 단일석으로 함주귀부는 강열한 사실적 기법을 보여준 석비이다.
전족초단이 좀 둔화되어 생동감이 결한 것 같은 느낌이 오나 사족 전체의 현실성이나 장경두부와 그 세족의 운동표현 등은 이 비의 전체적 균형과 함께 다른 귀부가 따를 수 없는 우수성을 보이고 있다.
비좌는 간결하게 운문을 선각했으며, 비의 상반부는 절단 멸실 되었고 잔존한 하반부도 조각된 글자의 풍화마열이 심하여 그 내용을 판독할 수가 없다.
월남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진편에 ' 월남사재월출산남고려신증각소창유이규보비 '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월남사는 송광사 16국사중 제이조인 진각국사에 의해 창건이 되고 비문은 당대의 명유 이규보가 쓴 것이다. 이 석비는 월남사의 창건중인 진각국사(1178-1234)를 추모하기 위하여 이규보(1168-1241)가 세운 진각국사비로 추정되며 이를 더욱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송광사사적비(진각국사편)이다.
6. 월남사지(지방기념물 제125호)
지정번호 : 지방기면물 제 125호
지정일 : 1988년 12월 21일
규모 : 9,200평
시대 : 고려시대
소재지 :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832
월남사지는 월출산 정상과 양자암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평지에 위치한 전 면 158㎝ 측면 182㎝인 장방형의 사지로 총 면적은 1만여평에 달하고 있으며 옛날에는 그 규모나 지세면에서 인근 무위사보다 컷으리라 추측된다.
지금은 배제계석탑이라하여 주목받고 있는 모전석탑(보물 298호)과 진각국사비(보물 313호) 등 2점의 유물이 남아있으며 석탑을 주변으로 외곽 담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또한 주변 민가에 사리의 기단석이나 탑의 기단부로 보이는 유물들이 남아 있다.
월남사지에서는 기와와 청자, 백자편 등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대부분 고려에서 조선 시대의 유물들이며 특히 월남사의 건물 벽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청자 타이루편이 발견되어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있다.
월남리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옛날에는 탑이 두개가 서 있었으며 무위사 스님 30여명이 1년에 한번씩 월남사지 석탑에 비단을 감싸고 돌면서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다. 문화행사
강진군은 옛부터 살기 좋은 곳, 아름다운 환경을 지닌 천혜의 땅으로 일컬어져 왔다. 그 중에서 성전면은 월출산의 영기를 받은 수려한 산세와 그 사이사이로 이루어진 분지에서 농업이 발달하여 물산이 풍요로운 곳이다.
특히 강진은 물론 한반도 서남해안지역의 불교문화를 대표할 무위사와 월남사의 천년 불교유적이 아직도 찬연한 기운을 발휘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지역편제상으로는 강진에 속해있지만, 이웃한 영암군, 해남군, 목포시와도 교통여건상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성전의 삼거리는 바로 이들을 연결하는 관문의 역할을 한다.
1. 성전지역의 불교문화
불교는 인간 스스로가 진리를 깨달으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고 그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세계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종교이다.
5세기경에 우리나라에 전파된 이래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를 살찌우게 했던 사상이며 또한 현실세계의 길잡이 구실을 해왔던 불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약간 소외되기는 하였으나 그 사상·의식·문화의 영향은 면면히 뿌리깊게 이어져 온 것이다. 이 같은 불교문화의 유산들은 오늘날에 와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으며 뿐 만 아니라 우리 주변에 수없이 많이 남아 있다.
특히 강진지역은 바닷길에 연하여 고대부터 교통의 중심지였고, 이러한 지리적 환 경 때문에 외래의 문화요소들과 일찍부터 접촉하여 다양하고 독특한 문화들을 발전 시켰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무위사·월남사·백련사·금곡사 등이다. 예를 들면 고려시대에 불교개혁운동인 백련결사를 일으키면서 8개국사를 배출했던 만덕산 백련 사, 선각대사 형미가 주석한 무위사와 이곳에 전해지는 극락보전 벽화들, 진각국사 혜심과 연관된 월남사와 석탑·석비등을 들 수 있다.
2. 조선시대의 성전지역 생활 문화
한편 이같은 불교문화의 전통이 고려시대이래부터 전승되는 가운데 조선시대가 되면 오늘날의 우리와 직접 연관되는 선조들의 숨결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실이 성전면 마을사 자료가 구체적으로 목적하고 대상삼은 문제도 이들 조선시대의 생활 문화사 자료를 어떻게, 그리고 얼마만큼 상세하게 표집 할 것이냐에 두어져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구체적으로 이들 조선시대의 생활 문화와 관련한 자료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세분된 분야로 나뉘어 검토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즉
첫째 어떠한 조상들이 이곳 성전지역의 각 마을에 언제, 어떠한 이유로 들어와 살게 되는가?
둘째 당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문화유산들은 무엇 무엇이 있는가?
셋째 조상들의 생활문화는 어떠한 변화와 변천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과거와 전통에 대한 정확하고 바른 이해는 곧 우리의 미래를 예견하는 토대로서 효율적으로 재 활용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같은 방대한 작업의 자료정리는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9. 복지시설 및 단체
1. 경로당
성전면 사무소에서 관할하는 노인 복지시설로서 복지회관이 1개소가 있는데 목욕탕, 이발소, 경로당 등의 시설이 남녀별 각 1실씩 설치되어 있고 자연정화 운동 ,무료 경로식당 운영, 명절 때의 풍물놀이 등의 활동을 하며 복지회관외 12개소의 경로당이 각 자연부락별로 설치,운영되고 있는데 1일 운영 인원이 평균 185명이라고 한다.
2. 성전어린이집
성전면 월평리에 소재한 성전어린이집은 1998년 3월 1일 58명의 아동으로 개원하여 현재 직원이 7명, 아동이 77명으로써 4개반(유아 2반, 유치, 영아반) 이 운영되고 있다.
10. 공공기관
1. 성전면사무소
1907년 안주면과 고읍면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양면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묶어 행정 사무소를 현 도림리 도림 마을회관에 두고 업무를 관장하다가 1914년 합병하여 면청사를 현 위치인 월평리 원기에 두고 성전면으로 개칭, 1930년 초대면장 윤상호씨가 퇴직금 5원을 기증하여 면 청사를 신축, 1991년 12월. 13대 박재훈 면장 재임 당시 정부 지원금 3억원으로 230평의 2층 규모 신축, 비품 일절은 주민들의 애향심 담긴 성금으로 마련하였다고 한다. 2000년 3월말 현재 17대 박종민 면장이 재임, 4개 부서(총무, 산업, 재무, 민원계), 대지 1736㎡, 건평 861.96㎡, 부속 건물 3동은 보건지소,창고,성전면 중대본부 및 강진소방파출소 성전출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2. 성전지서
1921년 현 성전리 신시마을에 경찰관 주재소를 설치하고 치안 유지, 1936년 현 위치인 월평리 36-3번지로 이전, 1945년 신생국립경찰에 의한 강진경찰서 성전지서가 설립, 1950년 공산당 분주소로 이용하다가 공산당 철수 때 소각되자 현 면사무소를 일시 지서 청사로 활용, 1956년 1월. 현 지서 청사에 건물 복건, 1996년 10월 구청사를 철거하고 신축하였다.
3 성전 보건 지소
성전면 주민의 보건 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시설로서 성전면 월평리 원기에 소재, 1988년 7월 1일 지소 건물 준공과 더불어 개소하여 1989년 4월 25일 일반의사 배치, 1989년 10월 치과실 개실 하였다.
4. 성전우체국
월평리 원기에 소재한 우체국은 1936년 3월, 성전리에 강진우체국 성전우편 취급소를 개설, 1960년 6월 월평리 24-2로 청사 이전(목조 건물) ,1961년 11월 현 위치에 청사 신축(콘크리트 건물), 1986년 12월 개축, 2000년 3월말 현재 직원이 4명, 집배원 3명이 근무하며 26대 국장으로 문구순 씨가 역임하고 있다.
5. 성전 농업협동조합
1966년 11월 관내 17개 리동조합이 합병하여(1대 김종안 조합장) 1969년 8월 1일 상호 금융을 실시한 농업협동조합은 1977년 2월 종합청사 및 농민회관을 준공(성전리 751-1)하여 1998년 4월 1일 자립조합으로 승격, 본관 2층(50평)과 부속건물 3동(연쇄점, 창고, 농기계수리센타)으로써 11대 윤종환 조합장을 비롯한 1999년말 현재 조합원이 1,271명, 23명의 직원과 임원 10명, 대의원 61명으로 구성되어 구매사업,판매사업,이용사업,가공사업,공제사업을 하고 있다.
11. 교육기관
1. 성전초등학교
성전면 월평리 105번지에 소재한 본교(성전초등학교)는 1920년 4월 1일 성전 공립보통 학교로 설립 인가하여 1920년 7월 9일 개교했으며 1953년 4월 1일 성전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 1981년 3월 1일 병설유치원 개원, 1989년 3월 1일 특수학급 1학급을 편성하였는데 1945년 11월 29일 개교한 수양초등학교가 1994년 3월 1일자로 본교에 통폐합되었고, 1968년 3월 15일 개설한 성전국민학교 금당분교(성전남국민학교)가 1995년 3월 1일에, 1935년 6월 5일 성전공립보통학교 부설 월남간이학교로 개교하여 1943년 4월 1일 성전북공립국민학교로 승격, 1945영 4월 1일 성전북국민학교로 교명 변경한 학교가 1996년 3월 1일자로 본교에 통폐합되었다.
2. 성전중학교(구.강진공립농업실수학교)
월평리 원기 105번지에 있는 성전중학교는 1938년 5월 20일 농업실수학교를 개교, 1946년 10월 23일 문교부로부터 강진공립초급중학교 인가(6학급) 및 개교하여 정종실 초대교장서리 취임, 1949년 6월 28일 교사 신축, 1951년 성전중학교로 개명, 4년제 학제에서 3년제로 바뀌었고, 계속 증축,개축을 거듭하여 1966년 성전실업고등학교와 병설(1973년 9월 28일 성전고등학교로 개명),2000년 3월말 현재 학생이 6학급에 144명, 직원이 16명이다.
3. 성전고등학교
성전고등학교는 1966년 12월 9일 성전실업고등학교로 인가,1967년 3월 1일 성전중학교와 병설로 월평리 원기에 개교하여 1973년 9월 28일 성전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 1981년 3월 1일 성전중학교와 분리 운영, 1983년 7월 5일 성전리 랑동 430번지 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설, 본관과 후관을 1994년, 1999년에 개축하였으며, 2000년 3월말 현재 학급수가 6, 학생수 242, 직원이 18명, 교장으로서는 22대 문동열 교장이 재임하고 있다.
4. 성화대학
1997년 1월 31일 학교법인 세림학원(성화전문대학)을 설립 인가하여 초대 이사장에 이행기씨가 취임, 월평리 산 224번지에서 4개 학과 320명(건축과, 전기과, 전산정보처리과, 공업경영과 각 80명)으로 동년 3월 13일에 개교한 성화 전문대학은 초대학장에 정학균 교수가 취임하고, 1998년 2월 24일 사회교육원을 설치, 동년 5월 1일 성화대학으로 교명을 변경, 1999년 10월 25일 목포 정보기술교육원 개원, 1998년과 1999년 학과 신설 및 증원으로 2000년 3월말 현재 2회 졸업생을 배출, 12개 계열 31개 전공코스로 휴학생을 제외한 전교생수가 2,803명(학적 3,418명)에 달하며 학장을 포함한 직원 이 70명, 교지 90,400㎡, 교사가 7개동(27,176㎡)이다.
5. 덕수학교
송월리 산 7-1번지에 위치한 덕수학교는 정신지체 사립 특수학교로서 1986년 8월 25일 학교법인 양산학원 설립승인, 1987년 3월 28일 호남영명학교 설립인가 (초등 2학급, 중등 2학급)하여 동년 4월 9일 개교하였는데 초대 이사장에 이동정, 초대교장에 전기수 교장이 취임, 2000년 3월 11일 덕수학교로 교명을 변경하고 현재 2대 이사장에 박종운, 3대 교장에 김정원 교장을 비롯한 직원이 36명, 학생수가 129명으로서 초등부 8회, 중등부 11회, 고등부 4회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6. 월출야영장
전라남도 교육청 직할기관으로서 국립공원 월출산에 위치하면서 초,중,고등학생과 청소년 및 일반사회단체 등에게 야영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립된 월출야영장은(월남리 월남 1152-2) 1980년 1월 14일 전남야영장 조례를 제정하여 2월 2일 시설물 준공, 9월 1일. 초대 관리 사무소장으로 조수한 소장이 취임하여 동년 11월 5일 전남야영장을 개장하였다.
1988년 3월 14일 월출야영장으로 개칭하고 2000년 2월말 현재 임경대 관리사무소장이 재임, 약 27만명의 전남 도민에게 야영교육을 실시하였다.
12. 금융기관
1. 강진 새마을 금고 성전분소
월평리에 소재하는 금융기관으로서의 새마을 금고는 1993년 8월. 발기인 16명이 새마을 기금 1,300만원을 거출하여 동년 10월에 법인 인가를 얻어 이효정 이사장이 취임, 비과세 통장 하나 갖기 운동을 전개하는 등 회원 1,400여명으로 자산 50억원을 목표로 계속 성장해오던 바 IMF로 인해 1999년 7월 11일. 강진군 전체 4개의 새마을 금고를 하나로 합병하여 강진 새마을 금고 성전분소로 변경. (총 회원 9,000여명, 자산 380억 정도) 분소장에 이재철 소장이 취임하였으며, 25평의 건물에서 분소장을 포함한 3명의 직원이 여신업무를 중점적으로 수신업무, 공제사업, 이익배당금 환원사업, 노인복지 후원, 불우이웃 돕기, 성전 중·고등학교 장학금 제도 (매년 6명) 실시등 많은 일을 하고 있다.
13. 종교시설
⊙ 성전내의 대표적인 종교의 불교 유적지
강진은 물론 한반도 서남 지역의 불교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천년의 사찰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에 관음사를 창건, 그후 선각대사가 고려 태조 (왕건)의 소청에 따라 무위사로 중창.
월남사는 월출산 정상 양자암을 배경으로 평지에 세웠으나 화제로 손실, 현재는 사층석탑, 진각구사비, 기단석만이 보존, 전터 규모로 보아 외적으로는 무위사보다 규모가 큰 사찰로 추정됨.
우리 관내는 작고 큰 절 및 암자터가 35개소가 발견되고 불교유물로 석탑, 석불. 기타 40여종이나 보존되고 있으며 성전은 찬란한 불교문화가 꽃피워왔고 이 지역 종교는 한국 불교사나 전남 불교사는 물론 강진의 역사적 지위와 함께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지역 불교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약간 소외되기는 하였으나 지금도 유교와 불교가면 내 종교를 대표하고 있음.
⊙ 대표적인 유교 유적지
순조 20년에 건립된 수암서원 화분 이선재 외 4인선생을 배양해 왔던 곳이 있고 원주 이씨 동강영당 이의경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이 유교적인 대표적 건물이다.
⊙ 대표적인 기독교 유적지
일제이후 최초로 강진출신 김창현이 미국인 선교사 우락스의 협조를 받아 성전 송학리에 초가목조 건물로 송학침례교회를 신축하였고 그후 성전교회, 중앙교회, 신예 교회, 동부교회, 벧엘교회가 최근에 성전리 랑동에 설립 운영중에 있고 교회 규모들은 작지만 6곳의 교회가 있고 신도 또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어 현재까지는 민속신앙의 뿌리가 강하나 연령층의 노령화로 신도의 이동이 심해 선교활동이 활발한 편이 못된다.
⊙ 무속신앙
각 마을에 당산제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이 근래에까지 당산나무에 정월 초사흘날 당산제를 지내왔다.
입석제는 선돌을 마을의 선두거리에 2기를 세워 정월 대보름날 굿물놀이, 줄다리기를 하고 그 줄을 마을의 수호신 선돌허리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감아두었다.
사람이 객사 또는 몸이 중병을 앓을 때 잡귀가 몸 또는 집에 있다 하여 무당 점쟁이를 불러 큰 굿을 하여 소금을 뿌리고 잡귀를 몰아내 는 시절이 있었으나 무속신앙이 시대 의 흐름에 따라 쇠퇴되어 가는 추세이고, 현재는 불교와 기독교가 번창하는 추세이다.
14. 주요기업
공장이라면 월출산 동남쪽 월남리에 있는 태평양화학 강진 제당공장이 설 녹차를 생산하고 있다.
성전면 성전리에 강진 연합 장류공장을 설립 현재는 도암농협단독으로 된장, 고추장, 쌈장 을 생산하고 있다.
15. 지역특수사항
월출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성전은 미맥위주로 한 농촌지역으로서 근래에는 점차 시설 원예 버섯재배로 주민소득이 향상되어 부유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고도의 원예기술로 축산부산물을 퇴비로 이용한 유기농법 재배로 성전 원예 작목반이 생산한 오이, 토마토는 착색과 맛이 뛰어나 서울 청과물 시장에서 성전 오이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깨끗한 월출산에서 버섯 작목반이 재배한 표고, 느타리, 팽이버섯은 전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청정 무공해 농산물로 소비자들에게 각광을 받고 전국적으로 널리 명성을 얻고 있다.
16. 학구마을의 전설과 유래
⊙ 당산 나무의 울음이 깃든 당산 마을
이마을은 마을내에 수백년된 아름드리 당나무가 있어 당산이라 부르게 되었다한다.
이 마을은 조선 중종대에 청주김씨, 창녕조씨, 죽산안씨등 3성씨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구전되나 조씨와 안씨는 현재 후손이 거주하지 않아 자세한 입향사실을 알수가 없고, 현재 확인 가능한 청주김씨는 보생의 5대손인 충서가 부호군을 역임한후 강진읍 영파리에서 이거하여 본 마을에 정착하였다. 충서의 막내 아들인 덕복은 정유재란때에 명량해전에서 순절하였다.
약 120년 전(1857년) 조선 철종대 청주김씨가 득세하여 김씨의 본터라하여 당산이라 칭한 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후 청주김씨가 자작일촌을 이루며 수많은 인제를 배출하였다.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세아름쯤 되는 당산나무가 있어 옛부터 여기에 당산제를 지내왔는데, 언젠가 쌀 열가마를 받고 팔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산나무를 베기 3일전 마을 사람들의 귀에 당산나무의 울음소리를 들었다고한다. 그 뒤로는 이나무를 팔지 못했다고 전한다.
⊙ 조용한 터전 안운 마을
약 480년전 조선 연산군대에 연안이씨인 청정 대감이 터를 잡았다고 한다. 그후 일제의 행정 개편에 의해 안정동의 안자와 백운동의 운자를 따서 안운이라 칭하였다.
이 마을에 300년 전부터 실화로서 범바위 전설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이 마을에 있는 범 바위는 성전면 월남리와 신풍리 사이의 대로변에 있는 큰 바위의 이름이다. 바위의 형상이 꼭 범과 같아서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했다고 한다. 10월 밝은 달밤 재양 고개(성전과 계곡경계) 근처에 사는 최씨가 자기 집 암소가 낳은 숫송아지를 4년여키워 영암 장에 팔러 갔다가 팔리지 않아 돌아오 던중 땅거미가 들 무렵 영암 천황사 부근에서 호랑이를 만나 새벽까지 소가 고동을 불며 싸우다가 물리치고 집으로 가던 중 첫 닭이 울 무렵 범 바위에 도착하였다. 길을 가던 소가 갑자기 발길을 멈추더니 '움메'하고 큰소리로 울고는 맹렬히 그 바위에 덤벼 들면서 억센 뿔로 큰 바위를 들이받기 한번 두 번 또 세 번 …… 드디어 소는 유혈이 낭자하고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고 하니 이는 바위를 호랑이로 착각하고 호랑이와 격투를 벌인 것이다. 소로서는 자기를 희생하고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으리라.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뒤부터 이 바위를 호암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호암에는 소의 뿔로 해서 바위에 금이 간 흔적도 남았다고 전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 범 바위는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그 면모를 잃게 된 것이니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 월출산 남쪽땅 월남 마을
이 마을은 「세종실록 지리지(1454)」에는 영암군 영역으로 나타났는데 조선시대에 강진현으로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월남사의 석비에 고려시대 최씨 무인 정권의 핵심 인물인 최류(?- 1257)가 관련된 기록이 있어 당시 이절의 세력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느낀다. 또 「신중동국여지승람」 강진현 역원조에 월남역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어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음을 알수 있다.
1300여년전인 신라 문무왕 때(661-681년)에 경주 최씨가 터를 잡았다고 하나 관련자료가 남아있지 않고 해남윤씨 윤하의 거주지를 월남으로 기록한점, 전주 이씨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사이에 입향 했다는 점은 조선 전기에 월남 마을에 입향 했던 성씨 임을 알 수 있다.
월남이라는 마을로 칭하게 된 것은 월남사가 마을중심부에 있었다 하여 월남이라 칭 했다는 설과 월출산 남쪽이라해서 월남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이곳은 국사봉전설, 모전석탑과 석공전설과 보장암의 쌀 바위 전설이 구전되니 여기에 개하고자 한다.
모전 석탑과 석공
월남사는 화순출신 진각국사(1178-1234)의 창건이라고 하나 비문에 의하면 그 이전의 설립인가 한다.
명공인 석장이 모전석탑을 만들기 위해서 아리따운 젊은 아내를 집에 남겨두고 길을 떠나면서 석탑을 완성하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는 절대로 나를 찾아오지 말라고 신신 당부하고 떠났었다. 그후 홀로 수절하고 집안 살림을 꾸려 가던 젊은 부인은 남편 그리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는 남편 석장이 탑을 만들고 있는 곳을 찾아와서 먼발치로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엄숙하리만치 진실한 태도, 삼매경에 빠져있는 명장을 살펴보고는 그대로 되돌아가려다 말고 작은 소리로 남편을 부르기에 이르렀다.
오랜 만에 그리운 아내의 목소리를 들은 남편은 일손을 멈추고 아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천동벽력은 삽시간에 완성 단계에 있던 석탑을 산산조각을 내고 말았으며, 젊은 부인은 그 자리에 굳어져 돌이 되고 말았으니 이무슨 비극인가!
이가 명공인 남편을 만나서는 아니된다는 계율을 어긴 불죄이라고나 할까.? 허탈감 에 빠졌던 석공이 돌이 되어버린 아내를 부둥켜 안고 대성통곡을 했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
마음을 가다듬은 석공이 다시 석탑을 만들려고 석재를 물색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끝내는 아내의 화신인 화석을 사용하여 석탑을 완성하고 슬픔에 겨운 무거운 다리를 끌고 이곳을 떠났다는 애절한 이야기는 듣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려니와 이가 곧 성전면 월남사지에 있는 보물 제298호인 모전석탑인 것이다.
⊙ 보장암의 쌀 바위 전설
월출산 남녁에 월남사라는 거찰이 있었고 그 사지에는 모전석탑과 월남지석비가 있어 이의 말사로 보장암이 있었으나 지금은 폐사되고 그 흔적민이 외로이 남아있다.
보장암에는 3명의 승려가 상주하여 독경삼매 성도를 위하여 정진하고 있었으니 불 덕인지 신령의 조화인지, 암자 부근에 큰 바위에 조그마한 구멍이 있어 그 구멍에서는 매일 세때 한번에 3되의 쌀이 꼭꼭 나와 하루에 9되의 쌀을 얻게 되었다. 보장암의 승려들은 이로써 충분히 생활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시주를 받지 않아도 되었으니 수도승으로서의 정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욕심 많은 한 중이 구멍을 크게 뚫어 놓으면 쌀이 많이 나올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으로 쇠꼬챙이로 쌀구멍을 넓혀 놓았다. 그랬더니 그 날부터 쌀은 한톨도 나오지 않았다고한다.
이러한 쌀 바위 이야기는 장성 백양사, 병영 수인사에도 있어 우리나라 전설의 동질성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서양동화 이솝이야기에서 "욕심 많은 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라 하겠으나 서양의 동화는 사회생활의 현실성을 표현하였고 성전의 쌀 바위 전설은 종교적인 신비성을 부각 시킨 것이라 하겠다. 아무튼 성전면 월남리의 쌀 바위 전설은 과욕을 삼가라는 교훈임에 틀림없다.
⊙ 연꽃 형국의 연포 마을
약 500년(1477년) 전 조선 성종대에 남양홍씨가 터를 잡았던 곳으로, 마을 뒷산의 지형이 연화형이며, 마을의 터는 포구라하여 설립당시부터 연포로 불리어 오다가 일제시대 초대 성전면장인 윤상호(본마을출신)가 시범마을로 육성하면서 도림이라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도림리의 앞은 신예마을로서 배의 형국이라하여 배에 구멍이나면 안되기 때문에 옛 부터 우물을 파서는 안된다는 설이 전하였으나 지금은 시대의 변화로 우물을 파서 사용하고 있다.
⊙ 마을 앞 정자나무 풍치로 유명한 영흥 마을
마을 앞 정자나무 앞들에 지석묘 4기가 있어 이 마을은 이미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던 유래 깊은 마을 임을 알 수 있으나 자료가 없어 현재로는 약 400여년전 이조 선조대에 해남인 윤선귀에 의하여 설립되었다고 하며 "성밖"이라 불리어 오다가 영흥으로 개칭된 것은 일제시대의 일이다.
본 마을에는 윤씨 장씨가 각각 14대, 한씨 조씨가 각각 7대를 살고 있어 마을 형성의 역사가 비교적 오래된 곳이다.
이 마을은 마을 앞을 가로막고 선 즐비한 팽나무 거목으로 유명하다, 이 큰 나무들이 어느 때 이루어 졌는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으나 나무의 크기와 부락설립의 역사등으로 보아 3백년-4백년으로 추측되거니와 나무를 심게 된 데는 비단 방풍만이 목적이 아니고 또 다른 목적이 있었음에 이를 소개코자 하는 것이다. 영흥리 마을에서 건너다 보면 별매산 (성산봉)이 한눈에 들어오니 별매봉은 월평리 제전 마을 뒷산으로 암석의 형태가 남자의 성기와 비슷하다고 한다. 매일 바라보는 성산봉이 그러한 형태여서 인지 부녀자의 행실이 좋지 못한 겨우가 많았다고 하니 소위 여자들이 바람을 잘 피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서는 마을에서 성산봉이 보이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성인들의 생각에서 촌전에 많은 나무를 심어 선산봉의 모습이 마을에 비치지 않게 했다고 한다.
그런 뒤로는 부녀자의 방탕함이 없어지고 미풍양속의 모범 마을로 변했다고 하거니 와 이 수목을 보호하는데 더욱 노력하고 있다는 것인바 나무들은 모두 두 아름이 넘는 웅목들인 것이다.
또 다른 설로는 성산봉의 나쁜 화가 마을에 비친다고 하여 마을 앞에 팽나무를 심었다고도 한다.
⊙ 자라 형국 오산 마을의 앉은 바위 (母子바위) 전설
성전면 명산리 오산 마을은 약 510년전 (1467년) 함양 박씨가 터를 잡았던 곳으로 마을 뒷산의 지형이 '자라' 형국이라 하여 鰲山이라 불리어 오다가 근대에 들어 글자의 복잡성을 피하고 쉽게 부르기 위하여 五山으로 표기하여 현재에 이르렀다.
마을 뒤 산에 '앉은 바위'라 불리 우는 2개의 크고 작은 바위가 나란히 있다. 이 두 개 의 바위가 생긴데 대해서는 애절한 설화가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다. 옛날 이 부락의 신혼부부가 살고 있었다 한다.
이 두 부부는 신혼의 단꿈이 가시기도 전에 남편이 군에 입대하고 말았다. 신혼 초 에 남편을 군에 보내고 난 신부의 심정이 어떠하였으랴?
북녘 하늘을 바라보고 한숨을 지으며 불러오는 배를 만지면서 낭군을 그리워 하던 마음은 동서고금에도 매일반이리라. 창문을 스치는 바람소리에 이불을 찾고 외기러기 울음소리에 눈물 지으며 그럭저럭 반년이 지난 뒤 옥동자를 얻게 되었다.
귀여운 아들에게 젖을 물릴 적마다 아내로서의 슬픔과 어머니로서의 보람이 뒤범벅이 되었다.
가난한 모자의 애닲은 생활은 계속되어 6개성상이 지난 팔월 한가위의 휘영청 밝은 달 아래 낭군이 그리워 몸부림치는 아내와 아버지가 그리워 울먹이는 외아들에게 때 아닌 폭풍우와 뇌성 벽력이 몰아쳐 천지개벽이 일어난 듯 했다.
맑게 개인 다음날 아침 이게 웬일인가? 모자가 외로이 살던 초가삼간은 간데 없고 그 자리에는 크고 작은 바위 한 쌍이 정답게 놓여 있지 않은가!
이를 본 동리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 죽은 남편이 신선이 되어 하늘나라에 올랐고 이승에 남겨진 불쌍한 모자를 하늘나라로 불러 간 것이라고 들 했다. 그리하여 이 바위를 모자바위라 불러오고 있으며 납작하고 반들 반들한 큰 바위는 어미바위, 좀 작은 바위는 아들 바위라 부르고 큰 바위에는 어른들이, 작은 바위에는 아이들이 모여 앉아 한가위 달구경을 하여 오고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차차 널리 전해져서 지금은 모든 동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모 두 다 앉은 바위라고 불리어 오고 있으니 이 모자의 전설은 모든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여 오고 있다.
⊙ 강진의 제일의 명당 터 금당
마을의 설립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전기인 1423년(세종 5년) 진주 강씨 강전 (1365-1426)이 포천에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한다.
그 후 원주 이씨 이남(1505-1555)이 해남에서 이거하여 정착하면서 원주 이씨의 주세거지를 이루게 되었다. 그 후 해남 윤씨 윤극개(1598-1684)도 이거 정착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약 80년전 한·일 합병시 옛부터 칭해오던 김예리중 하부를 연당이라 칭해 오던 것을 금여 의 금자와 연당의 당자를 따서 금당이라 불러오며 강진에서 제일 터가 좋다 하여 일금당이라 불리우고 있으며, 자매열녀가 이마을출신이니 이로써도 유명한 마을임을 알 수 있다.
때는 정유재란 당시의 일이다. 임진왜란은 왜구의 침략주의자가 가져다 준 반갑지 않은 선물이거니와 간접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사색당쟁이 불러 일으킨 결과라고 함도 과언은 아니리라.
임진왜란이 한국해군의 용맹과 지략 그리고 이순신장군의 군략으로 정전상태에 들어섰다가 육 년 후 다시 정유재란이 발발했으니 왜군 선봉이 일대를 이끌고 이곳 금당 마을을 습격한 일이다.
당시 원주 이씨 일문에 이효원씨의 종 14대조 이계복에게 출가한 딸 삼현제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란을 피하여 친정인 금당리에 와 있었다.
큰 딸은 창령 조씨에게 출가했고 셋째딸은 청주 한씨에게 출가했었다. 두 자매는 전란 중이라고는 하나 굶고는 살수가 없어 들에 나가 벼를 베려다가 왜군의 선봉인 장수가 겁탈하려고 몸을 만졌다. 그러자 큰 딸은 왜인의 손이 닿은 젓가슴과 손목을 스스로 잘라 자살하고 말았다. 왜장은 다시 동생에게 추악한 행동을 하려 하자 동생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두 자매가 왜인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자살함에 한국 여성의 고귀한 열부의 행동에 감복하고 부하 장졸을 거느리고 떠나고 말았다 하며 왜장은 "비촌열녀촌 후군 무침"이라 즉 이곳은 열녀의 마을이니 후군은 절대로 이 마을을 침범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이 두분의 자매는 금당리 뒷산에 쌍묘로 묻히었고 영조년대에 비석이 세워졌으며 쌍 묘는 모든 것이 바라보이는 지점에 있다. 여기에 시려 중수기의 일절을 소개하여 보자면 "난형난형이씨녀, 연방병미일천춘"이라 서투르나마 국역을 붙이자면 "이씨부인 두 열녀는 그 절의가 높고 낮음이 없이 두 분이 똑같이 으뜸이며 두 분의 꽃다움과 아름다움이 일천년을 두고 빛나리라"
큰 딸의 정려는 창영 조장일주박의 후손들이 고향인 장흥으로 옮겨 갔고 한득종의 부인은 후손이 없었다고 한다.
임진당시 열녀 이씨 부인 자녀의 절의는 구전되어 오며 두 부인의 죽음으로 인하여 서 인지 금당마을은 외적의 침략이 없었다고 하며 이는 만고열녀 두 이씨 부인 자매의 음덕이라고 흐뭇해 하고 있다.
⊙ 어지관 명당 선정 일화
원주 이씨이며 명지관으로 유명했던 이자신은 남긴 일화도 많지만 원주 이씨가 수암산 8명당 중 1기를 찾아 묘를 쓴 이야기로 여기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이지관의 형님내외가 선조의 묘 자리를 잡아 달라고 부탁함이 한 두 차례가 아니었다. 이에 이지관은 형님 내외분에게 부탁하기를 짚으로 둥우리를 하나 만들어 튼튼한 줄을 달라고 하니 형님 내외는 명당을 얻을 욕심으로 즉시 둥우리를 크게 만들어 튼튼한 줄을 달아놓았다.
이지관은 스스로 그 둥우리에 타고 형님내외에게 그를 끌고 수암산으로 가자고 함에 이지관의 말대로 둥우리를 끌고 수암산을 향하여 산에 오르니 갑자기 끈이 끊어 지고 말았다. 이지관은 혀를 차면서 "복이 그뿐인 걸" "별수 없는 일이로다"하면서 "형님 바로 이 자리에 묘를 쓰도록 하시오"하고 일러 준대로 묘를 쓰게 되었고 원주 이씨가 수암산 명당 중 하나를 얻게 된 것이 그런 연유인 것이다.
끈이 끊어지지만 않았더라면 더 좋은 자리를 얻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으로 모두 가 이야기하여 오고 있다.
참고로 이자신은 윤고산선생의 매제인 것이며 풍수지리학의 명가로서 이 박사라고 불리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