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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종 이야기 한다.
“류사장은 참 행복한 사람이야”
“남들은 돈을 써가며 여행을 하는데, 여행하면서 돈까지 벌고---”
여행이 반드시 즐거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필자는 이 말에 긍정도 부정도 않는다. 베트남에 거주하면서 여행 전문가로 행세할 만큼 많은 여행을 다닌 것도 사실이고, 앞으로도 계속 여행을 다닐 계획이다. 중요한 것은 필자에게 있어 여행은 구도자의 고행 길과 같고, 무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점이다. 또한 여행 전문지인 ‘CREATION’의 발행인이기에 매월 1주일 정도는 의무적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사진가의 여행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즐거움’은 결코 아니다. 20킬로그램이 넘는 카메라 가방과 컴퓨터를 비롯한 보조 장비를 항상 몸에 휴대하고, 뜨거운 열대의 햇볕을 온 몸으로 받으며 종일 걸어야 한다.
먹는 것도 문제다. 촬영장비의 무거움 때문에 별도의 부식을 휴대하기 어렵다. 때문에 언제나 현지식만으로 최상의 컨디션으로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 현지식에 적응하지 못하면, 여행 그 자체가 취소된다. 한마디로 여행 그 자체는 인내와 체력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다.
사진을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한 것은 나 자신에게도 매우 뜻밖의 일이었다. 공부에 관심도 없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때문에 일찍부터 대학 가기를 포기했었다. 부모님께서도 안타깝지만 머리가 명석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 형에게 은근히 기대를 거는 눈치였다.
고등학교 3학년을 앞에 둔 2학년 겨울 방학. 친구들은 학원도 다니고 열심히 공부할 시기,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홀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새해를 몇 일 앞둔 연말이고 게다가 추운 겨울이기에 부모님의 반대는 매우 심했다. 끈질긴 설득으로 어렵게 허락을 받았다. 행선지는 제주도. 커다란 배낭을 메고, 서울 용산에서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이용해 중간 기착지인 목포로 향했다.
자정도 멀고, 저녁이라고 하기엔 늦은 밤 10시경. 육중한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시간 뒤에는 땅끝 전라도 목포에 도착할 예정이다. 기차는 달리고 또 달렸다. 때로는 거칠고 추운 들길을, 가끔은 도심을 통과하고 있었다.
수원 즈음의 마을을 지날 때이다. 무심코 바라본 기차길 옆 공터에는 여러 명이 드럼통에 불을 지피고 둘러 쌓여 추위를 피하고 있었다. 주위는 어둡고, 놀러 나오기엔 너무 늦은 시간. 날씨도 추웠다.
특별히 바라볼 대상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 다시 관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아뿔사! 한 눈에 보기에 하나의 가족이었다. 40대 중반의 지금에도 시력 2.0을 유지할 정도로, 필자는 시력이 매우 좋다. 모닥불이 바람 따라 흔들리며, 이따금씩 가족들의 표정을 비춰주었다. 추위에 몸을 떠는 아이들---. ‘절망이 극에 달하면 포기를 한다’고 그들의 표정은 ‘무표정’ 그 자체였다.
안타까워야 할 노숙 가족보다, 갑자기 내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공부도 못하고 특별히 잘 하는 것도 내세울 수 없는 내 미래---. 눈은 점점 그들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두뇌는 생각과는 달리 선명한 사진으로 머리 속 한구석에 저장시켜 놓았다.
기차는 쇠가 찢기는 굉음을 내며 목적지를 향해 또 다시 달리고, 시간은 새벽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차창 밖으로 바라본 새벽은, 빠른 속도로 어둠을 산 밑으로 몰아내고 있었다. 출발 당시의 시끄러움은 사라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화로운 수면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잠들 수 없었다. 기차길 옆 노숙 가족의 영상이 머리 속 곳곳을 헤집고 다니며, 사고의 영역을 완전히 점령한 상태였다.
최종 목적지인 제주도에 도착해서도 마음이 무거웠다. 여행길이 구도자의 고행길로 변하고 있었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엔 걷고 또 걸었다.
서귀포 중문마을.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화려한 관광지로 변해 있지만, 당시엔 그저 바닷가 작은 어촌. 지친 몸을 이끌고 밤을 보낼 장소를 찾았다. 마침 양지바른 장소에 넓은 장소를 가진 무덤이 눈에 띄었다. 무덤 주변엔 구멍이 숭숭뚤린 검은색의 화산석이 바람을 막아주고, 푹신한 잔디는 훌륭한 쿠션을 제공할 것이다. 게다가 아침이 되면 따듯한 햇살이 비추어 늦잠을 자기엔 최적의 여건이다. 나그네가 겨울 밤을 지내기엔 안성마춤이었다.
오랜 시간을 걸어야 하는 나그네의 에너지의 원천은 충분한 휴식이다. 서둘러 밥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한 몸과는 달리 좀처럼 숙면에 빠지지 못했다. 새벽이 동틀 무렵, 억지로 잠을 청하는 상황이 싫어 자리에 일어났다. 신선한 공기가 그리워 밖으로 나왔다.
동쪽 산 뒷편에선 여명이 올라오고, 검은색 청솔모들이 지난밤 식사 후 텐트 옆에 방치해 두었던 코펠에서 밥알을 주워먹다 놀라 달아났다.
산 너머론 장엄한 일출이 시작되고 있을 시간이다. 바다는 호수처럼 조용하고 평화롭다. 엷게 가라 앉은 바다안개는 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모두가 하나였다. 조용한 바다는 오히려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바다처럼 깊은 생각의 저 너머에서 갑자기 ‘대학’이라는 명제가 튀어나왔다. 아침 식사도 잊은 채 팔자에 없는 자연과의 ‘선문답’을 시작했다. 예상에 없던 일이었다. 남들은 중학교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했는데---. 가능할까? 어려운 일이었다. 전국에 한곳밖에 없는 4년제 사진학과에 입학하기 위해선 체계적인 공부도 필요했고, 기적적으로 입학해도 사진학과를 다니기 위해선 상상할 수 없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누군가로부터 도움이 필요했다. 고개가 절로 흔들렸다. 쓸데없는 헛된 망상이란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면서도 ‘혹시’라는 가능성에 기대를 걸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하루를 더 눌러 앉았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이 작았던 ‘혹시’가 조금씩 부피를 늘리기 시작했다. 쓰디 쓴 커피와 여행을 떠나면서 휴대했던 아돌프 히틀러 자서전 ‘나의 투쟁’은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서둘러 배낭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5년의 공백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대학 4학년 1학기. 대학을 미처 졸업하기도 전에 한국 유명 여성지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하루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세상이 만만하게 보이고 건방이 온 몸에 배어있던 시기다.
모두가 다 아는 유명 산악인 A씨를 인터뷰 하면서, 사진기자가 취재기자보다 더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고교시절부터 배낭여행을 시작했고, 1차레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을 종주한 경험을 가진 필자로서는, 유명 정치인이나 연예인 그 누구보다 더 만나고 싶었다.
반가움은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비가 오면 즐겨 찾았던 남대문 시장 돼지족발 집에서 소주와 막걸리를 교대로 목에 넘기며 이런 저런 반가움을 나누었다.
‘취중토그!’ 그 자리에서 필자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류 기자님! 무전여행을 하셨다고 하는데---. 왜 하셨습니까?”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다. 질문의 요지와 의도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어려서 고생은 사서 한다고 했는데---. 일종의 제 체력의 한계에 도전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여행을 다녀오면 제가 한참 커져 있는 것 같아요---.”
지극히 의례적인 ‘우답(愚答)’에 A씨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산이 좋아 산에 미쳤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남보다 잘 할 수 있는 유일한게 ‘산’ 타는 겁니다.”
“류기자님이 사진 잘 찍는 것처럼---.”
“지금은 산 타는 직업을 가진 것이 무진장 다행이죠.”
“남을 속일 필요도 없고, 화 낼 일도 없고요”
“하 하 하(웃음)”
하지만 그에게도 남에게 말 못할 고뇌가 있었다. 함께 출발하고 산을 올랐던 사람들이 사고로 같이 돌아오지 못 할 때이다. 많은 밤을 눈물과 안타까움, 그리움, 같이 돌아오지 못한 죄스러움으로 불면의 밤을 보낸다고 했다. 그럴 때면 산을 바라보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다고 했다.
지난 6월 25일 캄보디아에서 비행기추락사고가 있었다. 22명을 태운 캄보디아 소형 전세기가 캄보디아 남부 휴양지인 시하눅 빌을 향하다, 인근의 캄포 지방 산악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기에는 휴가를 즐기던 기자 한명을 포함한 한국인 탑승객 13명이 탑승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보도 사진을 전공했고, 한때 기자 생활을 했던 필자는, 당장 사고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한국의 한 신문사에서 재해현장을 촬영해 달라는 제의도 있었다. 사진 촬영을 못하더라도 수습에 조금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떠날 수 없었다.
회사에 급박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3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한국인 직원 한명이 퇴사했기 때문이다. 절실한 교인은 아니지만, 주말의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교회를 찾았던 것 같다. 그곳에서 자연스런 이직제의가 있었고 장고(長考)중에 결심한 것이다.
7월호 잡지 마감을 몇일 앞둔 시점이었다. 오랫동안 함께 근무했던 한국인 직원의 갑작스런 퇴사 소식에 다른 직원들도 술렁거렸다.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을 쫓아 사무실 구조도 바꾸고, 편제도 달리했다. 예상보다는 직원들이 안정을 빨리 찾아 주었고, 새로운 직원도 순조롭게 보충되었다. 하지만 마음의 한 구석에는 퇴사한 직원에 대한 안타까움이 계속 남았다. 산악인 A의 말대로 3년이라는 시간을 정상을 향해 함께하다 낙오했기 때문이다.
7월호 잡지가 예정보다 앞서 발행되고 직원들도 더 열심히 일에 열중해 주었다. 이런저런 고민이 해결되자 미뤄놓았던 시하눅 빌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갑자기 미루어 놓은 숙제가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캄보디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시하눅 빌도 보고, 재해현장에 가서 쓴 소주 한잔으로 비명에 간 영혼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호찌민에서 시하눅 빌까지
10개월만의 캄보디아 방문이다.
호치민 탄손녓(Than Son Nhat) 국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 지난 방문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가난, 어둠, 치욕, 악, 절망------. 킬링필드(Cheung Ek Killing field)와 톤레샾(Tonle Sap) 그리고 빈민가에서 마주했던 캄보디아의 이미지이다.
비행기는 어느덧 국경을 넘어서고 있다. 구름 사이로 캄보디아 남부 논밭이 눈에 들어온다. 온통 물바다. 길도, 가옥도, 나무도 허리춤까지 물에 잠긴 상태다. 우기 탓만은 아니다. 군데군데 유실된 제방으로 메콩강이 범람한 것이다. 자연 재해에 속수무책으로 손 놓고 있는, 캄보디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캄보디아는 전체 국민의 90퍼센트가 농업 인구다. 그럼에도 동남아사아에서 가장 적은 산출량을 보인다. 인근 국가들이 2~3모작을 하는 반면 1모작에 머물고 있다. 메콩강의 범람 과 게으른 국민성 때문이다. 70년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이 추진했던 새마을 운동이 꼭 필요한 국가이다. 국가와 온 국민들이 힘을 합쳐 열심히 일하지 않는 한, 캄보디아 경제는 계속 암울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빠르게 치안이 안정되고, 유전도 발견되어 산유국의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외국 기업들의 투자진출이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다. 참고로 한국의 GS칼텍스와 미국기업이 컨소시엄으로 참가한 유전탐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2008년부터 본격적인 원유 생산에 들어간다. 이 밖에도 기타의 한국 기업들도 추가로 유전탐사에 나서고 신도시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킬링필드(Choeung Ek Killing field)의 현장으로
이번 캄보디아 방문엔 베트남, 캄보디아 전문 여행사 ‘㈜굳모닝 베트남’에서 스폰서가 돼었다. 프놈펜(Phnom Penh)에선 타이밍 프라자 호텔(Tai Ming Plaza Hotel) 을 숙소로 정했다. 모니봉 도로(Monivong Blvd) 한편에 위치한 이 호텔의 주요 고객은 한국인과 중국인들로 보인다.
4성급의 호텔로 깨끗하고 넓은 객실이 마음에 흡족했다. 방에 들어서자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들이켰다. 차가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는 느낌이 더위를 한번에 씻겨준다. 갈증을 달래고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향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립셉션 앞. 대절한 오토바이를 기다리기 위해 푹신한 소파에 앉은 순간, 건너편 소파에서 익숙한 한국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자리엔 50세 초반의 한국인 남자와 18~ 20세로 보이는 캄보디아 여성(방금 샤워를 한 듯 머리엔 물기가 많이 남아 있었다.)이 앉고, 또 다른 한쪽엔 30대 초반의 한국남자, 60대의 캄보디아 여성, 그리고 통역으로 보이는 캄보디아 여성이 앉아 있다. 무심코 귀에 들리는 내용.
업체: (신부 엄마에게)“신랑은 집에 소가 무진장 많아요. 커다란 빌딩도 있어요.
신랑: “빌딩은 없는데---.”
업체: 그냥 그렇게 말해요.
업체: 근데 아가씨는 처녀 맞아요?
신랑: 예~(작은 목소리로)
목적지로 이동하면서 마음이 답답했다. ‘캄보디아 숫 처녀와 결혼하십시오.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라는 커다란 광고 문구가 한국 거리에 나부끼는 장면이 연상됐다.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결혼정보회사들이 일으킨 일련의 문제로 한국교민사회 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많은 부작용이 있었다. 이제는 캄보디아에서---. 취재 시작 첫날부터 생각지도 않은 장면을 보았다. 아! 머리가 아프다!
오토바이는 무섭게 질주했다. 어깨를 손으로 톡톡 치면서, 천천히 달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이고 씩 웃더니 여전히 중앙선을 오가며 마구 달린다. 참다 못해 오토바이에서 내려 지나가는 ‘뚝뚝(시발택시의 일종)’을 세웠다. 당황한 오토바이 기사는 천천히 달리겠다고 사정했다. 무시하고 뚝뚝이 운전기사에게 목적지를 설명했다. 아뿔싸! 영어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 가방에 들어있던 준비자료를 보여주고, 손짓 발짓 끝에 겨우 설명 완료---.
도로 포장이 엉망이다. 뚝뚝이는 좌우로 몸짓을 흔들며 길을 나섰다. 더불어 내 몸도 좌우로 크게 흔들렸다. 이동하면서 사진촬영을 계획했지만 포기하고 카메라를 품에 꼭 껴안았다. 군데군데 움푹 파이고 물이 고인 도로는 중앙선이 처음부터 무시되었다. 길가엔 라면 가닥을 뿌려 놓은 모양의 캄보디아 글자와 중국한자가 뒤섞인 간판이 즐비하다. 화교의 영향이 지대한 듯 하다. ‘대단한 화교들!’ 그들의 힘은 동남아시아 뿐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 선진국, 후진국을 제한하지 않는다. 종종 삼성(Samsung)과 엘지(LG)의 빌보드(옥외광고)가 눈에 들어온다. 너무 너무 반갑다. 난---, 어쩔 수 없는 국수주의자이다.
킬링필드(Killing field)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15킬로미터에 위치한 중아이(Choeung Ek). 롤랑 조페(Joffe, Roland) 감독의 영화 ‘킬링필드’ 이후 고유명사가 되어 버린 죽음의 현장. 과거, 크메르 루즈 정권하에 지식인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장소이자 매장지이다. 킬링필드는 단지 중아이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캄보디아 전국 각 지방마다 고르게 흩어져 있다. 다만 이곳이 대표적일 뿐이다.
이 곳에 들어가면 캄보디아 사찰의 지붕 모양을 한 기념탑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기념탑 내부로 들어가면 정사각형 하얀 벽 안에 유리로 둘러싸인 유골 안치대가 높게 서 있다. 하단에는 희생자들의 의복 등이 놓여 있고, 상단부터 성별과 나이를 기준으로 층층이 자리해 있다.
안치된 유골들을 제 정신으로 바라보기에는 담력과 무관심이 필요하다. 뜻하지 않은 상상력에 빠지면 고통과 절망의 ‘블랙홀’속에 서있는 자아를 발견하게 된다. 가능하면 어린아이나 임산부는 관람을 않는 것이 좋다.
유골의 대부분은 아래턱이 훼손되어 있고, 낫으로 찍혀 처형당한 듯 두개골 정면에 선명한 흔적이 남아 있다. 처형 당시의 끔찍한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 크메르 루즈는 총알조차 아깝다며 낫과 곡괭이로 머리를 찍고, 칼로 목을 베고, 죽창을 찌르고, 교수형에 처하고, 심지어 집단 생매장까지 자행했다.
두개골 위로 수 십 마리의 파리들이 저공비행하며 음산한 소리를 만든다. 살아 움직이는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기념탑 주위 넓은 풀밭엔 군데군데 움푹 파인 웅덩이들이 산재하고 있다. 물이 괴인 몇 웅덩이엔 소가 들어앉아 더위를 식히고 있다. 희생자들이 집단 매장되었던 곳이다. 커다란 돌을 던져 소를 쫓았다.
1979년 이곳을 발굴하였을 때, 86개의 웅덩이에서 9천여 구에 이르는 유골이 나왔다고 한다. 한곳에서 5백여 구의 시신이 발굴되기도 했다. 또 다른 웅덩이에선 머리가 잘린 시신 1백 여구를 찾아냈다고 한다. 웅덩이 주위에선 하얀 사금파리와 같은 물체를 손쉽게 볼 수 있다. 희생된 시신에서 떨어져 나온 이빨들이다. 끔찍하다.
범죄 박물관 툴스랭 감옥(Toul Sleng Museum)
프놈펜 시내 한복판, 103번 거리와 350번 거리의 교차 지점에 있는 툴스랭 감옥이다. 원래는 툴스랭 쁘레이(Toul Svay Prey)라는 이름의 고등학교였다. Toul Svay Prey는 불어로 행복한 나무를 뜻한다. 이곳이 크메르 루즈 시절 악명 높은 수용소 S-21(Security office-21)이다. 지금은 ‘잔혹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다. ‘행복의 나무’, 아름다운 이름에 비해 그 운명이 참 기구하다.
입구를 들어서 좌측 소로를 따라 걷다 보면 14기의 묘비가 나타난다.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에서 쫓겨날 당시까지 생존해 있던 이들의 묘라고 한다. 이들은 툴스랭에서 어떠한 일이 자행되었는지 증언한 후 고문 후유증으로 곧 사망했다.
세 개의 동으로 이뤄진 수용소는 3층 건물로 겹겹이 철책이 둘러싸고 있다. 1층에는 한때 캄보디아의 고등학생이 눈을 반짝이며 학업에 열중하였을 교실이, 독방과 합방으로 개조되어 있다. 각 방마다 탄약통이 변기 대용품으로 놓여있다. 수십 명을 한몫에 묶어 놓았을 족쇄도 눈에 띈다. 벽에는 10개 항의 수용 수칙이 적혀 있다. 비명을 질러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섬뜩하다.
2층에는 수감자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남긴 걸로 미뤄 크메르 루즈는 나름대로 정당성을 갖고 확신에 찬 만행을 저질렀던 모양이다. 그 중 한 여인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수인번호 462번인 여인은 외무부 차관의 아내였다고 한다. 여인은 젖먹이 아이를 가슴에 안고 있다.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듯 퀭한 눈빛이다. 생에 대한 기대를 스스로 저버린 듯도 하고, 지독한 고문에 그만 넋을 잃은 듯도 하다. 아이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다. 아이 역시 여인과 함께 킬링필드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한다.
S-21 내의 취조실에서는 숱한 고문이 자행되었다. 반동분자로 낙인 찍힌 지식인이거나 중산계층, 혹은 전혀 무고한 양민이었다. 남녀노소 구분 없었다. 70세 노인에서 초등학교 아이까지 포함되어 있다. 취조실에 남겨진 진술서에 의하면 외국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인 4명, 프랑스인 3명 등 상당수의 외국인을 고문 끝에 처형하였다. 4년 동안 약 2만여 명이 수용되었고, 손에 헤아릴 수 있는 숫자를 제외하곤 모두 중아이 킬링필드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당시의 고문 과정을 묘사한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수감되었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한 한 화가가 그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가히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하다. 전기고문에서 손톱 뽑기, 젖꼭지 뜯어내기, 인분 먹이기, 고문 틀에 묶어놓은 채 사지를 절단하기---.
고문 도구가 전시된 방의 한쪽에 기이한 전시물이 있다. 해골을 늘어놓아 캄보디아 지도를 만든 사진이 걸려있다. 이곳에 실제 수감되었던 이들로, 중아이 킬링필드에서 발굴된 두개골로 만든 것 이라고 한다. 킬링필드의 비극을 잊지 말자는 의도이리라. 하지만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곳에서 벌어진 만행에 빗댄다면, 해골지도를 제작한 발상 역시 참혹하고 엽기적이다.
*기타 볼거리
왕궁(Royal Palace)
어둡고 암울한 느낌의 프놈펜 거리와는 사뭇 다른 화려한 황금색의 왕궁은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1866년에 건설된 이 왕궁은 노로돔(Norodom) 왕이 거주하던 곳이다. 왕궁 옆엔 실버 파고다(Royal Palace, Silver Pagoda)가 위치하고 있다. 98년까지는 관광객에게 실버 파고다만 개방했다. 99년부터 왕궁의 일부 지역을 개방하고 있으며, 왕궁의 입구는 정문에서 약간 남쪽(왕궁과 실버 파고다 중간)에 있다. 왕궁으로 들어가 실버 파고다를 통해 나오도록 되어 있다.
왕궁 중앙의 건물은 왕이 대관식을 하던 곳으로, 한때 프랑스의 신탁통치에 동의하는 서명했던 곳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크메르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중앙의 탑에는 바이욘을 본 딴 얼굴조각이 사방에 있다.
왕궁은 똔레샵강을 마주보고 있으며, 이 곳에서 왕이 군대의 사열식을 자주 하였다고 한다.
실버 파고다 중앙 사원 실내 바닥엔 1.1kg의 은으로 된 타일이 5천 개가 깔려 있다. 이러한 연유로 실버 파고다란 명칭으로 불려졌다고 한다. 은 타일은 1903년에 깔았으며, 크메르 루즈군 점령 직전에 뜯어서 피난 시켰다고 한다. 또한 90kg짜리 순금 불상이 9,584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 제일 큰 다이아몬드는 25 캐럿이라고 한다. 사원의 외부 안쪽 벽의 프레스코 풍 채색 벽화는 폴란드 화가가 다시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똔레샵 강가의 씨소왓 거리 178번가와 13번가 사이에 위치한 국립박물관은 왕궁 옆에 붉은 갈색의 크메르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다. 정원도 아주 아담하면서도 정갈한 느낌이다. 정문은 10세기의 반데아이 쓰레이 사원의 문을 본떠서 만들었는데, 나무 문 자체의 무게가 1톤이 넘는다고 한다.
이 건물은 폴 폿 시절에 그대로 방치되어 유물들도 많이 파괴되고, 건물자체의 훼손도 심각하였다고 한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저녁이면 박쥐들이 지붕 안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와 장관을 이루었지만, 2002년 3월 박물관의 천장과 지붕을 보수하면서 박쥐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박물관 바로 앞에 있는 큰 마당은 캄보디아의 명절인 ‘경작의 날’에 왕실의 왕자와 공주가 각각 소를 몰고 씨를 뿌리는 행사하는 곳이다. 또한 왕실 소속의 소로 그 해의 풍흉을 점치는 행사도 한다.
국립박물관엔 고대 크메르 제국의 미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앙코르 유적이 주를 이루지만 푸난과 첸라 왕조의 유적도 일부 전시하고 있으며, 그 규모는 총 5천 여종에 달한다. 앙코르 유적지 현지에서 제대로 관리가 안되어 국립박물관에 옮겨 놓은 것도 많다.
독립 기념탑(Victory Monument)
캄보디아는 1953년 11월 9일에 프랑스로부터 정식 독립했다. 독립을 기념하여 앙코르 왓의 중앙탑을 본떠 독립기념탑을 만들었다. 노로돔 거리(Norodom Blvd)와 시하눅 거리 (Sihanouk Blvd)가 교차하는 로터리에 위치하고 있다.
독립 기념탑의 주변에 캄보디아 국기가 휘날리고, 저녁에는 조명을 비추어 주지만 약간은 촌스럽다. 독립기념탑 근처에는 인공기를 게양한 북한 대사관을 볼 수 있고, 게시판엔 북한 관련 사진들이 부착되어 있다. 맞은편에 한국식당인 소나무 식당이 있다.
왓 프놈 & 왓 우날롬 (Wat Phnom & Wat Ounalom)
왓 프놈은 27m 언덕 위에 있는 절로 '프놈펜'이라는 이름이 유래된 곳이다. 큰 물난리가 났을 때 펜이라는 여인이 강가로 떠내려온 부처상을 발견하여 이 절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공원처럼 꾸며져 있어 쉽게 입장이 가능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다.
공원 안에는 방치된 원숭이들이 있다. 방심하고 휴식하는 동안에 원숭이들에 의해 물건을 탈취해 갈 수 있으므로 휴대품 관리에 주의하여야 한다. 또한 구걸하는 어린이들에게 동정으로 돈의 주었다가 수십 명의 어린이에게 둘러 쌓여 곤혹을 치루거나 지갑이나 기타의 휴대품을 분실할 수 있다. 값싼 동정심은 금물이다.
중앙 시장(Psar Thmei) 러시안 마켓(Psar Toul Tom)
'프사'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중앙시장(프사 트메이, 일명 New Market 또는 Central Market)은 실내 재래시장으로 생필품, 금, 의류 등을 판매하는 곳으로 달러를 교환할 수 있는 환전소가 여럿 있다.
돔 형식으로 지어진 건물로 중앙을 중심으로 네개의 통로가 길게 나있으며, 외부에도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기념품과 음악 CD 때문에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러시안 마켓으로 불리는 프사 뚜얼똠뽕(Psah Toul Tom Pong)은 골동품 가게들과 옷 가게(전통 옷들)들이 있다.
캄보디아 현대사
프놈펜은 한 국가의 수도라 하기엔 지나치게 왜소한 느낌이다. 3십분 이내에 시내 전역을 둘러볼 수 있다. 거주 인구는 120만 정도. 프놈펜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재미있다. 프놈(Phnom)은 시내 중심에 자리한 언덕이다. 펜(Penh)은 14세기 이곳에 살던 여인으로, 프놈 언덕에 사원을 건설해 불상을 모셨고, 그녀를 기려 도시 자체를 프놈펜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메콩강과 돈레삽(Tonle Sap River)강의 합류 지점(Bassac River)에 위치한 프놈펜. 1431년 태국의 침공으로 크메르(Khmer) 왕조는 시엠립(Siem Reap)에서 밀려나 이곳으로 천도했다. 일견 수도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상적인 지형으로 보인다. 그러나 수도를 방위할 만한 지형지물이 따로 없다. 그 때문이었을까. 주변국의 위협에 곧 우동(Udong)으로 옮겨갔고, 프랑스와의 보호조약 이후 1876년에 다시 돌아왔다. 이후 프놈펜은 캄보디아의 중심지가 되었다.
오랜 내전 탓으로 도시는 남루한 모습이다. 왕궁과 박물관 등이 자리한 씨소왓(Sisowath Quay) 거리를 벗어나면 캄보디아의 피폐한 생활상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래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몸짓이 자못 활기차다. 표정 역시 하나같이 밝다.
예부터 캄보디아를 미소의 나라라고 하지 않았던가. 고맙다는 말보다 웃음으로 그 뜻을 전하는 것이 관습화 되었을 정도로 부드러움이 넘치는 나라.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은은하다. 고단하고 참담했던 시련 속에서도 간직하고 있는 그네들의 미소가 놀라울 지경이다.
캄보디아의 현대사를 살펴보자.
1850년대 캄보디아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올라선 듯 위태로웠다. 메콩강 서쪽 영토는 태국에 빼앗겼고, 동쪽은 베트남의 지배하에 있었다. 국토의 대부분을 인접국에 내준 캄보디아는 궁여지책으로 1863년 프랑스와 보호조약을 맺었다.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군주제도의 명맥만 유지한 채 반 세기 넘게 제국주의의 수탈에 시달려야 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의 지배를 받았고, 종전 후에는 다시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1941년 프랑스는 왕위 계승자인 모니렛 왕자가 통치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열아홉 살의 시하누크(Sihanouk, Norodom)를 왕좌에 앉혔다. 당시 시하누크는 사이공에 유학중으로 선왕의 사촌 손자였다. 시하누크는 1947년 왕국헌법을 발포하여 입헌군주국의 면모를 갖췄다. 이어 1949년 한정적으로 독립하였고, 1953 완전 독립을 이루게 되었다.
시하누크는 사회주의 건설을 국가 정책의 기조로 삼으며 대외적으로 중립 외교를 표방했다. 시하누크 독재에 대한 저항이 산발적으로 있었으나 이후 10년은 비교적 평온의 시기였다. 당시 경제 상황은 태국에 앞섰고, 68년에는 아시안게임을 치룰 만큼 안정을 유지했다.
베트남 통일 전쟁 초기 시하누크는 중립적 자세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캄보디아 내 베트남인들과 좌파 세력인 크메르 루즈(Khmer Rouge)는 북베트남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편 미국의 지원을 받은 논롤 장군은 크메르 루즈와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
시하누크가 외유 중이던 1970년 3월, 논롤은 국회를 앞세워 무혈 쿠데타에 성공했다. 시하누크는 북경에 머물며 크메르 루즈와 접촉해 논롤의 축출하기 위한 전략적 연대를 맺었다. 그러나 시하누크는 상징적은 존재일 뿐 모든 영향력은 크메르 루즈의 지도자 폴포트(Pol Pot) 휘하에 있었다. 논롤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크메르 루즈에 가담하였으며, 내전은 점차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이 사이 미국은 북베트남의 보급 통로를 차단하다는 이유로 캄보디아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폭격은 단지 국경 지대에 한정되지 않고 캄보디아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숨겨진 전쟁’이라고 명명된 이 폭격은 비공식적으로 이뤄졌다. 선전포고조차 생략하였다. 언론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며 미국 내 국회의 동의조차 없었다. 1년 이상 계속된 폭격으로 수많은 캄보디아인들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살아남은 자들은 밀림으로 들어가 크메르 루즈에 합류했다. 미국의 폭격은 결과적으로 크메르 루즈를 도운 꼴이었다.
당시 미국의 캄보디아 정책은 어떠했는가. 미국은 이미 베트남 전쟁에서 철수를 계획하고 있었다. 론롤을 지원한 것은, 베트남 내 미국인의 안전한 철수를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캄보디아는 자국의 이익을 위한 소모품이었다.
1971년 12월 론롤의 정부군은 크메르 루즈와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로 대패한 론롤은 더 이상 공세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프놈펜 수호에 급급했고, 크메르 루즈는 전국적으로 그 세력을 확장했다.
1974년 크메르 루즈는 프놈펜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다. 마침내 1975년 4월 17일, 중무한 소년병을 주축으로 한 크메르 루즈는 별 저항 없이 프놈펜으로 입성했다. 론롤은 부정축재로 모은 막대한 자금을 갖고 하와이로 떠났으며 미국 대사관도 이미 철수한 뒤였다.
1977년 1월까지 크메르 루즈의 통치가 이어졌다. 정식 국가명은 ‘민주 캄보디아(Democratic Kampuchea - DK)’. 그러나 캄보디아인들은 이때를 ‘저주 받은 폴포트(Pol Pot)의 시대’라고 부른다.
4월 17일, 크메르 루즈가 프놈펜을 점령하였을 당시 상주인구는 250만 명이었다. 그들은 비로소 내전이 끝났다고 믿었고, 크메르 루즈를 손을 흔들어 환영했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크메르 루즈에 의해 ‘4월 17일 인민’으로 명명된 그들은 집단농장으로 강제 이주 되었다. 250만 명의 엄청난 이동은 1주일이 걸렸다. 이주는 프놈펜 외에 바탐방, 콤퐁참, 캄폿 등의 도시에서도 동일하게 벌어졌다. 이주 과정에서 숱한 희생자가 발생했다. 또 집단 농장에서 수십만 명은 고문과 질병과 영양실조로 죽어갔다.
강제 이주와 더불어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론놀 정부의 협력자 뿐만 아니라 크메르 루즈에 가담하지 않는 모든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였다. 관료, 지식인, 종교인, 도시 빈민에 이르기까지 무차별적으로 처형되었다. 고등학교를 다녔다는 이유로, 외국어를 구사하거나 전문 분야에서 일한다는 이유로, 안경을 꼈다는 사실 하나로 처형 대상이 되었다.
캄보디아인들에게 존경의 대상이었던 승려들은 강제 노동소로 가던가 아니면 즉결 처형을 당했다. 그 수가 6만 명에 이른다. 캄보디아 내 거주하는 베트남인과 혼혈은 불문곡직 처형했다. 이슬람을 믿는 참족의 피해도 컸다. 참족의 70퍼센트에 해당하는 350만명이 처형 당했다. 또 다른 예로 3천 명의 의사와 간호사 중 50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거되었다.
원시 공산주의를 표방한 크메르 루즈에게 지식과 현대 문명 자체가 해악이었다. 모든 책은 폐기되었고, 교육기관과 병원조차 불태워졌다. 화폐제도, 시장경제, 사유재산권 등은 모두 폐지했다. 출판은 금지되었고 우체국도 없앴다. 심지어 개인의 취미와 여가 활동마저 제한시켰으며 검은색 옷만 입게 했다. 강제이주로 텅 빈 프놈펜처럼 과거의 문화와 문명의 이기마저 깡그리 제거한 뒤 새로운 원시 공산주의를 건설하려 했다.
폴폿이 집권한 4년 동안 무차별한 살육으로 200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25퍼센트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숫자는 아직까지 상당한 논란이 있다. 내전 기간의 희생자와 미국의 폭격에 의한 사상자까지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쯤에서 캄보디아의 인구 추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니세프(UNICEF)조사에 의하면 전체 인구의 65%가 여자이다. 많은 남자가 희생된 탓에 그 중 41%가 과부이며, 인구의 절반이 20세 미만이다. 이러한 기이한 인구 구조는 내전이 빚은 결과이며, 참혹했던 과거의 증거인 셈이다.
희생자 숫자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어쨌든 크메르 루즈가 집권한 4년 동안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대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1979년 유엔 인권위원회는 이 대학살을 나치 이후 가장 잔혹한 학살 행위로 규정한 바 있다. 이 모두를 배후에서 지휘한 자가 바로 폴폿이다.
크메르 루즈의 외무부 직원이었던 롱 노린은 캄보디아 속담을 들어 말한다.
“물통 속의 고기 한 마리가 썩으면 그 안의 모든 고기에서 냄새가 난다. 비록 싱싱한 고기일지라도.”
물통은 캄보디아 통일이라는 대의를 갖고 출발했던 크메르 루즈이며, 썩은 고기는 바로 폴폿을 빗댄 말이다. 그렇다면 폴폿은 어떠한 자인가.
폴폿의 본명은 ‘살로쓰 사(Saloth Sar)'이다. 1976년 이후 대외적으로 사용한 이름이 폴폿이다. 1928년 프놈펜 북부 콤퐁톰(Kampong Thom)에서 9남매 중 여덟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부농이었고,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었다고 한다. 여섯 살 때 폴폿은 고향으로 떠나 궁중의 무용수인 사촌누나에게로 갔다.
왕궁 근처에 있는 불교사원에서 캄보디아 글과 불교 경전을 공부했다. 평범하고 조용하며 예절바른 아이였다고 한다. 프놈펜에 있는 가톨릭계 초등학교 Ecole Miche를 다니며 바울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고향에서 돌아와 중학교를 마친 뒤 1948년 기술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장학생으로 선발돼 프랑스 유학을 떠났다. 이곳에서 공산주의를 접하게 되었으며 1952년에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그 해 캄보디아로 돌아와 인도차이나 공산당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하였다. 한편 프놈펜의 사립 고등학교에서 교사로서 불어와 역사를 가르쳤다. 당시 주위의 평에 의하면 폴폿은 인간적이며 친근감 있고 존경스러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폴폿은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으며 당시 캄보디아에서 특혜랄 수 있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또한 그의 품성에 대한 평가는 놀라울 만큼 호의적이었다. 이런 폴롯이 훗날 그런 잔혹한 만행을 자행했을까. 권력에 담겨 있는 독을 마셨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지배하고 군림하려는 자에게 정녕 화 있을지어다.
프놈펜에서 씨하눅빌(Sihanoukville)로
해질 무렵의 프놈펜 거리는 빠르게 어두워진다. 도로 주변에 조명이 될 만한 식당이나 백화점 등의 시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수도라기엔 너무 어둡다. 디지털 카메라가 발달한 현대엔 웬만한 작은 조명으로도 멋진 사진을 촬영할 수 있지만, 프놈펜에선 야간촬영을 아예 포기했다. 킬링필드의 잔상이 너무 강하게 마음속에 남아 머리가 지근지근 아팠고, 거리의 어디에서도 화려한 조명이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찾아오자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샤워를 마치고 아시안 컵 축구를 보려 TV를 켜는 순간,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류사장요~. 지금 어딥니까?”
우연히 같이 프놈펜행 비행기를 탄 ‘라이프’ 생활 정보지의 안사장이었다. 안사장은 라이프지에 캄보디아 섹션을 별도로 만들고 있기에 한 달에 두 번씩 프놈펜을 방문한다고 했다.
“서로 바빠 호찌민에서 만나지 못했지만~프놈펜에서 같이 한번 식사하시지예”
“여기 있는 알라들 주기위해 회하고 몇 가지 준비 좀 해왔지라”
아침 일찍 씨아눅 빌로 떠나야 하는 입장이고 피곤도 했지만, 잊지않고 전화해준 안사장이 고마웠다. 위치는 공항근처의 조선족이 운영하는 한식당. 오토바이를 타고 물어 물어 도착한 식당엔 익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함께 있었다. 대부분이 호찌민에서 비즈니스를 하던 분들이다. 반가움을 표시하기도 전에 소주잔을 건네왔다.
“이렇게 만날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안사장한테 온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반갑기도 하고---.”
“세상 좁지요. 죄 짓고 도망 다닐 수 없는게 세상입니다”
“호찌민에서 죄 짓고 이곳에 왔다면, 류사장에게 걸리면 끝장인데---하하하(웃음)”
오고 가는 술잔은 모처럼의 흥겨움으로 번지고, 안사장의 정성으로 호찌민에서 직접 공수해온 참치회와 성게알 등의 해산물은 풍성한 행복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서로가 권하는 소주잔은 어느 사이에 낮에 보았던 킬링필드의 역겨움 분노를 생각의 저 편으로 밀어버리고, 내일이면 대면할 시아눅 빌로 마음이 향했다.
캄보디아 최고의 해변 휴양지로 불리는 씨하눅빌은, 태국만(Gulf of Thailand)에 접한 캄보디아 남동부 해안에 위치하고 있다. 프놈펜에서 승용차로 3시간, 버스로 4시간 거리로 프놈펜 거주 외국인들과 현지 부호들의 주말관광지로 인기가 높으며, 여행자들에게도 앙코르 유적이 주는 웅장함을 뒤로하고 해변에서 편하게 휴식할 수 있는 곳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해변 도시답게 다른 도시들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곳이다.
씨하눅 빌이란 지명은 70년대 국왕인 씨하눅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것으로,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사용되는 지명은 꼼뽕 쏨(Kompong Som)이다.
해안의 접경이 작은 캄보디아는 1950년대에 이곳을 무역항구로 개발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로가 완성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유입되면서 1960년대부터 캄보디아 최고의 해변휴양지로 변모하였다. 이에 고무된 캄보디아 정부에서는 이곳은 태국의 ‘파타야’ 같은 휴양지로 추진하고 있다.
씨하눅빌은 크게 5개의 해변과 하나의 타운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요 해변으로는 빅토리 해변(Victory Beaches)과 인디펜던스 해변(Independence Beach 혹은 7-Chann Beach), 쏘카 해변(Sokha Beach), 오쯔띠알 해변(Ochheuteal Beach), 오쯔레 해변(Otres Beach)이 있다. 각 해변마다 주요 리조트와 각 종 편의시설이 있다.
이곳에선 스노쿨링, 스쿠버 다이빙, 카지노도 함께 즐길 수 있으며, 최근에는 여행자들이 앙코르왓에서 유적 관광 마치고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이곳 여행의 성수기는 11월에서 4월이다. 성수기엔 수 많은 피서객들로 호텔 및 기타 시설이용료가 비수기에 비해 2배 정도로 가격이 오른다고 한다.
시하눅 빌에서 외국인들이 가장 즐겨 찾는 해변은 빅토리아 비치와 오쯔띠알 비치이다. 중앙의 타운을 두고 원형으로 해변이 이루어진 이곳은 타운 어디서도 이동이 용이하다. 오쯔띠알 비치는 5개의 해변 중에 가장 길고 하얀 모래를 가지고 있는 가장 붐비는 해변이다.
각 비치마다 캄보디아만의 특색과 자연 그대로의 해변을 잘 갖추고 있으나, 리조트 시설이나 환경은 베트남과 비교하여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도시는 타운이 중심부에 위치하며 5개의 해변이 연속적으로 들어서 있다. 도시의 북쪽은 꼬꽁으로 향하는 보트를 타는 선착장과 항구가 있으며, 해변을 연결하는 도로 이름은 현재의 총리 이름을 따서 훈센 해변 도로(Hun Sen Beach Drive)라고 명명되어 있다.
다운타운은 빅토리 비치와 오쯔띠알 비치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장, 버스터미널, 은행 시설 등의 주요시설 대부분이 몰려 있다. 해변까지도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타운에 묵으면서 낮 시간에는 해변에서 저녁 시간은 타운에서 시간을 보내는 여행자들도 많다. 또한 도시에선 고지대에 속하는 웨더 힐 스테이션(Waether Hill Staion)은 저렴한 숙소와 여행시설이 밀집해 있어 배낭 여행객들이 즐겨 찾는다.
씨하눅빌을 동서로 길게 통과하는 주요 도로는 에까리앗 거리(Ekareach St.)로 빅토리 비치-웨더 힐 스테이션-다운타운-오쯔띠알 비치-따오 미어를 연결하고 있다. 씨하눅빌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황금 사자 동상(따오 미어, Golden Lion Traffic Circle)은 다운타운과 오쯔띠알 거리 중간에서 해변을 내려다 보고 있다.
<한인업소 정보>
씨하눅빌에는 약 30여명의 교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교민의 대부분은 한국식당과 게스트하우스, 리조트, 가라오케 등의 관광업에 종사하며 나머지 교민들은 사업과 선교 등의 이유로 거주하고 있다. 씨하눅 빌엔 4곳의 한국식당이 영업하고 있으며, 가장 대표적인 한인업소는 골드스타(대표 박재연, Mondol 4 Sangkat 4 Khan Mittapheap Sihanouk Ville)이다.
골드스타는 오쯔띠알 비치의 골든 샌드 호텔(Golden Sand Hotel)과 비치의 중간 도로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게스트 하우스, 식당(한식, 캄보디아식, 양식), 로컬 가라오케를 운영하고 있으며, 배낭 여행객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여 이곳을 찾은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교통편>
씨하눅빌은 프놈펜에서 230Km 거리에 있으며, 캄보디아에서 가장 좋은 도로 중의 하나인 4번 국도가 연결되어 있어 승용차로 3시간, 버스로 4시간이면 도착이 가능하다. 도로가 발달된 지역인 만큼 대중교통 수단도 발달되어 있어, 두 도시를 연결하는 버스를 운영하는 회사가 세 곳이나 된다. 편도 요금은 회사마다 조금씩 달라 4~6usd이다. 약간의 돈의 더 주면 묵고 있는 호텔까지 픽업을 해준다.
버스 회사들의 사무소는 모두 에까리앗 거리에 서로 인접하고 있다. 프놈펜의 경우 호와겐팅과 G.S.T는 중앙 시장 (프사 트메이) 주변에 터미널이 있으며, 로타 버스는 캐피탈 게스트하우스와 가까운 모니봉 거리의 패시픽 호텔에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정규 버스 이외에도 캐피탈 게스트 하우스에서 여행사 버스를 하루 한 차례 자체 운행한다. (씨하눅빌 출발 12:30, 프놈펜 출발 07:15)
버스회사 이동도시 출발시간
호와겐팅(Ho Wah Genting) 씨하눅빌-> 프놈펜 07:10, 08:00, 12:15, 13:10, 14:00
프놈펜-> 씨하눅빌 06:55, 07:30, 08:30, 12:30, 13:30
G.S.T. 씨하눅빌-> 프놈펜 07:15, 08:15, 12:30, 13:30
로타 버스(Rota Bus) 씨하눅빌-> 프놈펜 07:00, 15:15.
*호찌민에서 시하눅 빌을 방문하기 원하는 여행객 중, 오랜 시간 이동에 큰 부담 없거나 프놈펜 방문을 원치 않는 사람은 육로 이용을 권하고 싶다. 호찌민 인근의 목바이-바벳 국경을 이용하여 렌터카 택시를 이용하면 6시간(차 1대, 80~100Usd)에 도착할 수 있으며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하고, 프놈펜에서 숙박도 필요 없어 시간도 절약된다.
<시내 이동>
다운타운에서 해변까지는 걸어서 30분 정도가 걸리지만, 씨하눅 빌 전체를 걸어 다니기에는 다소의 어렵다. 시내 교통 수단은 모또(오토바이)나 뚝뚝(오토바이에 짐칸을 연결한 것)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오토바이(운전자 포함)를 대여는 하루 8달러 정도이며, 스쿠터 대여도 가능하다.
<해양 스포츠>
씨하눅 빌은 베트남이나 태국 해변과 섬들에 비하면 개발이 미약하지만 다이빙, 스노클링 같은 일반적인 해양 스
포츠가 가능하다. 다이빙 포인트로 씨하눅 빌 앞 바다, 태국 만에 있는 꼬 롱 쌈렘(Koh Rong Samlem) 꼬 땅(Koh Tang) 꼬 프린스(Koh Prins) 등의 섬들이 있으며, 스노클링은 꼬 프레스(Koh Preus) 꼬 끄테아(Koh Kteah) 꼬 루세이(Koh Russei)등에서 한다. 꼬 루세이(Koh Russei)는 대나무 섬(Bamboo Island)로 불리지만, 섬의 어디에서도 대나무를 찾아볼 수 없었다. 넓고 하얀 해변과 바닥이 훤히 바라보이는 해변이 매우 아름다운 섬이다. 씨하눅빌 동쪽의 해안과 섬들은 리엠 국립 공원(Ream National Park)로 지정되어 있다.
다이빙 코스를 비롯한 스노클링, 낚시 등의 프로그램은 각각의 호텔에서 예약이 가능하며, 스쿠버 다이빙은 에코 어드벤처 (Eco Sea; Eco Adventure S.E. Asis. www.ecosea.com), 스쿠바 네이션 다이빙 센터(Scuba Nation Diving Center, www.divecambodia.com , www.divecambodia.com)등에 직접 예약할 수 있다.
보트 트립과 낚시 투어는 피셔맨스 덴(Fisherman's Den, Kim Chantha 게스트 하우스와 같은 건물. 전화 : 034-933997, 012-702478)에서 예약할 수 있으며, 일정과 코스는 인원에 따라 조정이 가능하다. 시하눅빌(Sihanouk Ville), 깜뽓(Kampot). 아! 영령들이여--- 시하눅빌의 에까리앗(Ekareach St) 거리. 버스 터미널에서 프놈펜을 거쳐 바벳(Vietnam-Cambodia Border)으로 이동할 택시를 찾았다. 여럿의 택시가 있었지만, 가격도 운전기사도 마음에 흡족하지 않았다. 이곳의 운전기사는 베트남과는 달리 운전기사 얼굴이 대체적으로 ‘한 인상’한다. 말도 통하지 않고 인상까지 험하면---, 이동하는 시간이 즐겁지 않고 한편으론 불안하다. 3일전 목바이-바벳(Vietnam-Cambodia Border) 국경에서 시하눅 빌로 올 때다. 택시 운전기사는 머리를 짧게 깎은 미 해병대원처럼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한 5킬로 미터를 달렸을까? 왼쪽 허리에서 당당히 권총을 풀어, 콘솔 박스 옆에 놓으며 필자를 향해 ‘씩~’하고 웃었다. 갑자기 경계심이 생기고, 등골이 오싹. 아침 일찍 출발하느라 피곤했지만, 잠을 청하기엔 마음이 불안했다. 혹시 모를 사건에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잠자는 사이에 권총으로---’ 캄보디아에선 흔히 있을 수 있는 끔찍한 사건이다. 한국의 모 의과대학 해부학과에서 사진을 가르치며 안 사실이다. 한국 의사들이 의학용으로 보유하고 있는 인체 골격 대부분은 동남아 각국에서 수입된 것들이다. 아이러니칼 하지만, 그 중 60% 이상은 한국인들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대부분은 여행 중에 행방불명 된 사람들일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도, 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는 여행객들을 전문으로 노리는 장기매매 조직들이 기승을 부렸다. 이들은 여행객들에게 접근하며 과잉친절을 베풀며 수면제가 든 음료수나 맥주를 먹이고, 잠든 사이에 신체에서 이식 가능한 장기를 적출한다. 장기의 대부분은 일본이나 대만 등지의 환자들에게 고가에 팔린다. 남은 사체는 화공 약품으로 살을 녹이고, 철사를 이용해 다시 뼈 조직을 고정시켜 의학용으로 판매한다. 한국에선 사전(死前) 혹은 사후(死後)에 사망자나 가족들이 사체를 의학용으로 기증하거나, 신원확인이 불가능한 행려병자가 사망하면 일정한 행정절차를 거쳐 각 의과대학에 기증 처리 된다. 이렇게 기증된 사체는 의과대학 해부 실습용으로 사용한다. 학생들에 의해 해부 된 사체는 반드시 화장 처리하는 것이 한국의 법이다.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완전한 의학용 인체골격을 구하기는 매우 어렵다. 참고로 한국인과 동남아 사람들과는 두개골의 두께, 뼈의 재질, 팔과 다리의 길이를 비롯하여 많은 부분이 인체해부학적으로 서로 많이 다르다. 1시간 정도 달렸을까? 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며 잠을 쫓고 있는 필자에게, 운전기사는 장난기가 잔뜩 섞인 모습으로 말을 걸어왔다. “캄보디아 사람~?” 라며 검게 그을린 내 팔에 자신의 검은 팔을 빗대며 비교했다. 한 눈에 내 팔이 더 진한 검은 색이다. 그리곤 씩 웃었다. 해 맑게 밝은 얼굴을 보면서, 거짓으로 때리는 모션을 취했다. 순간적이다. 처음의 우려와는 달리 밝은 모습의 얼굴을 보면서 전혀 악의가 없음을 느낀 무조건 반사였다. 그 역시 피하는 모션을 취하며, 다시 한번 밝게 웃었다. ‘미소의 나라 캄보디아’ 카피가 떠올랐다. 두렵고 경계의 대상으로 판단했던 운전기사. 그가 보여준 어린아이처럼 해 맑은 얼굴. 미안하고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기분이다. 운전기사는 캄보디아 현역 장교였다. 자세한 사정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지갑을 꺼내어 보여준 각종 증명서가 그의 신분을 확인시켜 주었다. “친구여 오해해서 미안하네---“ 시하눅 빌(Sihanouk Ville)에서 깜폿(Kampot) 다시 베트남으로. 시하눅 빌에서 프놈펜 까지 230Km, 승용차로 3시간 30분 거리다. 시하눅빌에서 프놈펜으로 연결되는 도로는 기타의 타 도시와 비교해, 도로 상태가 대체적으로 좋은 편이다. 관광 수입이 국가재정의 2/3를 차지하는 캄보디아로선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지난 6월 25일 소형 전세 비행기 추락사고가 있었던 깜뽓(Kampot)시의 보꼬 국립공원(Bokor National Park)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베트남과의 국경도시 바벳으로 이동하는 도로는 비포장이나 다름없다. 포장된 도로도 많이 파손되어 있다. 도중에 잠시 쉴 것을 감안하면 약 7시간의 대장정이다. 생각 같아서는 깜폿시에서 사고 현장인 코끼리산(Elaphant Mountain 프놈 덤라이)까지 올라가고 싶지만, 우기철에다가 태풍의 피해로 등반로 곳곳이 끊어지고 파손되어 불가능 하다. 강행하려고 해도 국립공원 관리소에서 등반을 허용하지 않는다. 지난 사고 때에 구조작업이 쉽지 않았던 것도 폭우로 접근이 쉽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주의할 점은, 갑자기 나타나는 소다. 주저 없이 달리는 승용차와 소가 부딪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소는 죽는다. 살아 남는다 해도, 중상 입은 가축은 당연히 도살되기 때문이다. 승용차는 어떻게 될까? 소와 부딪친 승용차는 도로 밖, 논으로 튕겨나간다. 예상보다 큰 충격이다. 당연히 중상 아니면 사망이다. 캄보디아 운전수들이 야간 운전을 기피하는 한 이유중의 하나라고 한다. 다음의 이유는 불안정한 치안이다. 참고로 캄보디아엔 지난 내전에 사용하던 총기, 도검류를 아직도 보유하고 있는 민간인들이 많으며, 이를 이용한 살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는 실정이다. 때문에 정부에서는 주민들에게 위험물 반납을 홍보하고 있다. 생각 끝에 차량 렌트는 골드스타 박사장님께 도움 받기로 했다. 영어 가능한 운전기사를 구해, 다음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베트남과는 달리, 캄보디아에선 한국산 승용차 보기가 매우 어렵다. 하나같이 눈에 띄는 건 일제차다. 거리의 차량 80% 정도가 도요다 캠리(Toyota Camry)다. 이유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많지만 확신이 안 선다. 그 중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이유는, 도요다 차량만은 전국 어디를 가도 수리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결국, 철저한 서비스 정신과 시스템이 만든 승리다. 깜폿(Kampot) 깜폿은 보꼬 국립공원(Bokor National Park)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답고 작은 도시다. 북쪽의 평야에서 남쪽의 바다로 흐르는 강(뜩쭈강)은, 도시를 동서로 구분하고 있다. 서쪽은 차분하고 한적한 주거지역으로, 동쪽은 제법 도시의 느낌을 주는 상업지역으로 영역을 구분한다. 이 중앙을 흐르는 강변은 캄보디아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다. 강변엔 커다란 야자수와 히말라야 시다(상록수)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어 주민들의 휴식장소로 사랑 받고 있다. 도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차분하고, 주민들의 생활에 여유가 느껴진다. 또한 씨하눅빌에 비해 여행자의 발길이 적은 곳으로, 깜폿이 가지고 있는 자체적인 매력 보다는 보꼬 국립공원과 주변 지역을 여행하기 위해 머무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교통 씨하눅빌에서 프놈펜을 연결하는 3번 국도에서 동쪽으로 연결된 깜폿을 연결해 주고 있으며, 북동방향으로 프놈펜으로 연결하는 또 다른 도로가 이어진다. 타운 중앙에는 원형도로가 있다. 정류장은 원형 도로에서 동쪽으로 7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모두 걸어서 다닐 만한 거리로 호텔들은 원형 도로 주변에 모여있다. 보꼬 국립공원(Bokor National Park) 캄보디아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이 가장 선호하던 휴양지인 힐 스테이션은, 1940년대 일본의 침략과 1970년대 크메르 루즈가 집권하면서 두 번에 걸쳐 폐허가 되었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다, 1998년부터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보꼬 힐 스테이션 (Bokor Hill Station, 쓰타니 프놈 보꼬)엔 당시에 건설됐던 호텔, 카지노, 천주교 교회, 우체국, 경찰서 등의 건물이 폐허가 된 채 방치되어 있다. 프놈 보꼬 정상에서는 캄보디아 남부의 해안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해안선 앞바다에 떠 있는 커다란 섬은 베트남 영토인 푸꿕(Phu Quoc) 섬이다. 캄보디아 해안에서는 출입이 불가능하다. 보꼬 국립공원은 다양한 동식물군이 분포하는 지역이다. 캄보디아 환경부와 국제 보호 단체인 와일드 에이드(Wild Aid)가 보호 생태계 보존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프놈 보꼬는 평균 기온이 20도 정도로 선선하지만, 기후 변화가 매우 심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고 안개에 휩싸이면 체감온도는 급격하게 떨어진다. 보꼬 힐 스테이션에는 국립공원 관리를 위해 만든 산장이 있어 숙박이 가능하다. 규모는 6인실 3개이다. 숙박료는 침대 하나에 5달러로 비싼 편이다. 음식을 휴대하거나 재료를 준비하면 부엌에서 요리가 가능하다. 화장실과 샤워시설은 공동으로 사용한다. 공원 입구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대부분 훼손되어 4륜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독자 여러분께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당사에서는 3일동안 2회에 걸쳐 보꼬 국립공원 취재를 시도하였으나, 태풍과 폭우의 영향으로 입산허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여럿의 여행가이드 북과 인터넷 자료로 정보를 취합하여 대신합니다.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취재에 나설 계획입니다. 또한 캄보디아 여행중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비명에가신 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깜폿에서 베트남까지 1991년산(産) 구형 도요다 캠리는 예상보다 잘 달렸다. 16년이나 된 고물 차량이지만 제법 의기양양하다. 지평선이 한없이 펼쳐진다. 도로 양편으로 이따금씩 캄보디아의 주민들의 가난한 살림살이가 보인다. 대부분의 논은 물에 잠겨 있다. 함부로 빗질한 머리카락 모양의 팜 나무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며 서 있다. 이따금씩 소와 닭 등의 가축들이 도로를 가로질러 건넌다. 때론 고속도로 처럼 양호한 도로를 때론 뿌연 먼지를 차 꽁무니에 만들며 3시간쯤 내처 달린 뒤, 도로 한 켠 식당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수 명의 행상 소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소녀의 머리와 손에 들려 있는 쟁반으로 눈길이 간다. 어린아이 손바닥 크기의 거미가 기름에 튀겨진 채로 켜켜이 쌓아 놓여 있다. 여행할 때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제대로 된 식사가 어렵다. 빨리 이동해야 하는 시간적 제한으로 깨끗하고 격조 있는 식당 찾기는 어렵다. 또한 고급 식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주문에서 음식이 완성되어 식탁에 차려 질 때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베트남을 비롯하여 많은 나라를 여행을 하면서 온 갖의 기괴한 음식을 맛보았다. 음식은 그 나라의 문화라는 강박관념에 도전한 뱀 쥐 전갈 박쥐 고슴도치 등. 2년 전 캄보디아 여행시에 조창인 작가와 거미 튀김을 사먹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1불을 손에 보였다. 4마리를 준다. 장난기가 발동했다. 2마리를 더 달라고 한다. 망설인다. 웃으며 다시 돈을 집어 넣으려 하자, 얼른 웃으며 1마리를 더 준다. 대뜸 한 마리를 집었다. 가만히 바라보니 길게 뻗은 여덟 개 다리 거미는 참으로 흉측하다. 거침없이 머리를 베어 물었다. 참새 박쥐 등의 조류는 머리가 제일 맛있다. 하지만 거미는 조금 쓴 씁쓰름한 맛이다. 다음은 다리와 몸통을 먹는다. 소스가 많이 묻어 거미 본래의 맛보다는 새콤 고소하다. 5마리를 다 먹고 나니 한껏 배가 부르다. 1불에 푸짐한 식사를 마친 셈이다.
자료참조: 글, 사진: 류기남(CREATION AD., INC 대표이사, CREATION 발행인)
캄보디아 프놈펜(Phnom Penh) & 씨하눅빌(Sihanoukville) 2
도시정보
1993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보꼬 국립공원은 코끼리 산(Elaphant Mountain 프놈 덤라이)의 남쪽 가장자리에 해당한다. 정상 부근은 해발 1,097미터의 높이로 기상 변화가 심하다. 하얀 구름과 안개에 휩싸여 신비스럽게 보이는 보꼬 국립공원은 베트남의 다랏(Da Lat)과 여러가지로 비교되는 곳이다. 보꼬산(프놈 보꼬)에는 1920년대에 프랑스인들이 산 정상 부분에 건설한 휴양지인 힐 스테이션(Hill Station)이 폐허로 변한채 유령의 도시로 남아있다.
이제 또 다시 출발. 베트남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