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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이 되어 논산 훈련소에 들어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이곳의 찌는 듯한 더위를 실감하다 보면 나의 마음은 어느새 구름 한점 없는 파란하늘과 코발트색으로 빛나는 바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에 옹기종기 지어진 흰색건물이 아름다운 지중해의 나라 그리스로 날아가게 된다.
필자는 작년과 올해, 2회에 걸쳐 그리스를 방문하였다. 처음 그리스를 방문한 것은 국제경영을 배우는 전세계의 학생들이 한자리에 모여 경영사례를 연구 발표하는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회의장소는 그리스와 터키, 이스라엘에 둘러쌓여 있는 싸이프러스라는 곳이었고, 그리스를 경유해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모든 여정 준비를 다 마치고, 참석을 기다리고 있던 중 회의를 참석하지 못하게 된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여행을 모두 포기할까 했으나 이미 예약해 둔 숙박과 항공편을 그냥 썩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었고, 마침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연수중이던 대한올림픽 위원회에 근무중인 선배도 만날 겸해서 그리스를 돌아보는 여행으로 목적을 바꾸었다.
올림픽을 연구하는 올림픽 우표 수집가로서 그리스는 참으로 매력적이며 경외감이 드는 나라이다. 약 3천년 전부터 평화와 친선의 이념을 바탕으로 아마추어리즘을 구현한 고대 올림픽의 역사를 보유한 나라이며, 근대 올림픽이 부활하여 첫 대회가 열린 곳이기 때문이다. 어느 장소보다도 올림피아를 가장 먼저 방문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런던 히드로 공항을 이륙하였다. (필자는 당시 영국 Oxford House College에서 비즈니스 영어 연수중이었다.)
그리스는 올림픽의 나라답게 국영 항공사의 명칭도 “OLYMPIC AIRWAYS”라 부르고 있다. 자정에 런던을 출발한 올림픽 항공기는 현지시간 새벽 5시에 아테네 헬레니콘 공항에 도착하였고, 아테네 땅을 밟자마자 올림피아를 향한 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공항버스를 타고 펠로폰네소스 반도 방향과 데살로니키 지역으로 가는 버스가 출발하는 서북부 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 30분, 아침을 먹은 후 한시라도 빨리 올림피아에 도착하고픈 심정으로 8시 30분에 출발하는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스의 교통체계는 대다수가 국영이어서 고속버스도 한 회사가 전국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올림피아로 가기 위해서는 피고스(Pyrgos)라는 곳까지 가서 완행버스로 갈아타야 하는데 승차권을 올림피아까지 직접 끊을 수 있고, 왕복 요금은 약 8,600 드라크마(약 30,000원정도)이다. 우리를 실은 버스는 파트라스를 거쳐 지하터널로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지나갔고, 6시간을 달린 후 나를 올림피아에 내려주었다.
올림피아에서 위에 언급한 선배 한 분을 만나기로 런던을 출발하기 전 전화연락을 해 두었다. 필자는 작년 6월 서울에서 열린 IOC 총회에서 대한 올림픽 위원회 소속으로 각 국 IOC 위원들을 공항에서 영접하는 일을 맡은 적이 있다. 그 때 함께 일했던 대한 올림픽 위원회 관계자 중 1명이 올림피아에 위치한 IOA(International Olympic Academy, 국제 올림픽 위원회 산하의 연구기관)에서 연수중이었고 그 분이 런던을 거쳐갈 때 영국에서 내가 거처하던 집에 이틀간 머물고 갈 정도로 친분이 있어 비공식적으로 IOA에 초대하겠다면서 반드시 들르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다.
버스를 내린 곳은 올림피아 읍내였다.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듯한 그리스 정교회 건물이 서 있었고, 읍 중앙에 뻗쳐 있는 길 양편으로는 주로 2, 3층짜리 규모가 작은 여관들과 기념품 가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잠시 시간 여유가 있어 읍내에서 고대 올림피아 지역 반대편에 위치한 근대 올림픽 박물관에 들어가 보았다. 이 박물관은 전직 그리스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이 평생 모은 자신의 수집품을 전시해 놓은 사설 박물관이었다. 규모는 작았지만 1896년부터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메달, 휘장을 비롯한 각종 수집품이 박물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서울올림픽과 관련된 자료가 동경이나 여타 올림픽에 비해 상당히 빈약했다는 점이다.
읍내 길가에서 극적으로 선배를 만나 그리스 전통음식인 “소블라키”로 점심식사를 한 후 IOA로 발길을 옮겼다. 전체 올림피아 지역은 읍내와 고대 올림피아 유적지, 그리고 IOA, 크게 세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정상 IOA를 먼저 방문한 후 다음 날 올림피아를 방문하였으나 여기에서는 고대 올림피아 지역을 먼저 소개하기로 한다.
고대 올림피아 지역은 길 양편에 왼편으로는 주차장과 고대 올림피아 유적 박물관이, 오른편으로는 올림피아 유적지가 위치하고 있다. 올림피아 유적은 신전구역, 팔레스트라(Palestra), 그리고 경기장(Stadion)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신전은 제우스 신전과 헤라 신전이 있는데 헤라 신전은 매 올림픽마다 수석여사제가 성화를 채화하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헤라 신전보다도 유적 중앙쪽에 자리잡고 있는 제우스 신전은 그리스 신들 중 가장 높은 신을 모시는 곳인 만큼 그 규모가 가장 컸다. 주춧돌의 배치를 볼 때 어마어마한 크기를 짐작할 수 있었으나 부서진 신전터에는 무너져 내린 열주들이 마치 가래떡 썰어놓은 듯 쓰러져 있는 모습을 하고 있어 역설적으로 올림피아 제전의 규모와 세월의 무상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듯 했다. 제우스 신전을 옆으로 끼고 과거 각 도시국가의 시민들이 앉았던 석좌(石座)를 따라가다 보면 석재 아치를 만나게 되고, 그 아치 너머에 “경기장”이 위치하고 있다. 크기는 축구장 정도이며 출발선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석재가 지금도 남아 있다.
올림피아 유적을 구성하는 마지막 부분은 “팔레스트라”이다. 현재 위치상 팔레스트라는 올림피아 유적 입구 매표소로부터 유적지를 들어가는 어귀 오른편에 위치한 열주 잔해로 선수들의 연습장과 격투기 경기장으로 이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대 올림픽 당시의 경기종목은 크게 육상과 격투기로 나누어지며, 격투기는 레슬링, 복싱, 판크라치온(레슬링과 복싱이 결합된 경기)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모두 이 지역에서 출토된 조각품과 항아리 그림 등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이러한 유물들이 주차장 건너 올림피아 유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이 박물관은 ‘ㄷ’자 회랑으로 지어진 건물로 대규모 조각품에서부터 소규모 유물에 이르기까지 고대 올림피아 유적 발굴과정에서 발견된 모든 유물들을 보유, 전시하고 있다.
고대 올림피아 유적을 나와 언덕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언덕아래 스타디온이 보이고 그 길을 계속 따라 가면 왼쪽으로 올림픽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Baron Pierre de Coubertin)의 묘소가 있다. 1863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1937년에 스위스 로잔에서 죽은 그의 유골은 임시로 로잔에 묻혔다가 쿠베르탱의 유언이었던 “올림피아 안장”을 실현해 주고자 “스타디온”이 바라보이는 언덕으로 이장되어 여기에 묻힌 것이다. 사람의 두 키 정도는 되어 보이는 듯한, 흰 대리석으로 깎인 그의 묘비 앞에는 화환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비행기로도 닿을 수 없는 이곳까지 방문한 ‘올림픽 광’들이라면 누구나 그가 근대올림픽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보여준 행적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성스러운 그의 묘역부터 IOA 지역이 시작된다. 전술한 것처럼 IOA는 IOC 산하의 올림픽 운동(Olympic Movement, Olympism)을 연구하는 수양관이다. 1961년부터 해마다 세계 각국의 NOC(국가올림픽 위원회) 추천을 받은 선수, 임원들이 모여 약 보름에 걸쳐 올림픽운동을 연구하고, 이를 전파하는 첨병이 되도록 훈련받는 곳이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3명의 한국인이 연수 중이었는데 1명은 대한올림픽 위원회에서, 1명은 문화관광부, 1명은 대한 체육회 일을 도맡아하는 동시통역사였으며, 인제대에서 문화인류학 교수로 재직하시는 강 교수님께서 교수진으로 참석하고 있었다.
선배님의 환대를 받고 수영장과 각종 체육시설을 지나 본관으로 향했다. IOA는 강의장, 본부, 선수촌 그리고 체육시설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른 나라의 경우 20세 전후의 현역 운동선수들이 참가하여 공동관심사를 논의하고, 자유로운 토론을 전개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으나,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언어소통문제가 있고 참가자가 대부분 행정실무자여서 어찌 보면 스포츠외교의 장에서 우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은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그 전에는 경기인을 포함하여 6명씩 참가하였는데 IMF 구제금융이후 인원이 3명으로 줄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서글퍼지기도 했다.
세계각국의 젊은이들과 등을 비비며 하루를 보내고, 그 다음날은 일요일이어서 올림피아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예식에 참석하였다. 올림픽에 직접 관계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 문화를 이해하는데 그리스정교가 빠질 수 없음은 물론이다. “Orthodox”라는 그들 종교의 이름처럼 주일예식이 2시간 10분 정도나 소요되는 매우 긴 예식이었으며, 제단은 겹겹이 쌓인 벽과 문을 통해 막혀 있어 오직 사제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스인들의 그리스정교에 대한 믿음이 대단한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겠으나 바쁜 현대인 생활에 순응하다 보니 예식 중간중간에도 성당 밖을 오고 가며 쉬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끝나고 나오는 모든 신자들에게 천주교의 성체에 해당하는 곡물을 컵에 담아 나누어주는데, 주로 굵은 보리쌀, 땅콩, 완두 등을 삶은 것이었다. 특유의 그리스식 향신료가 섞여 있어 우리 같은 한국사람들이 처음 입에 대기에는 역겨움도 있었으나 금방 적응이 되었다.
그 날 오후 올림피아를 떠나는 고속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버스정류장 앞에 서자 올림피아를 뒤로하는 마음 한가운데에 무려 3천년 전부터 인류의 투쟁과 반목의 역사를 스포츠를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실재했다는 점 다시 한 번 나를 놀라게 했고, 올림픽자료를 수집하면서 우표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인류의 대제전을 발로 뛰고 체험하면서 깊이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점에 대해 뿌듯함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우취계에서 스포츠테마는 테마틱 수집에 있어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테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일회성 행사와 같은 올림픽은 다른 테마에 비해 연구의 깊이가 좁아 수박 겉핥기식의 작품전개에 그치고 만 것이 대다수라는 지적을 많이 받아 왔다. 올림피아는 우리에게 올림픽테마의 다양한 연구초점을 가르쳐 주고 있다. 올림픽과 역사, 올림픽과 인류, 올림픽과 미술, 올림픽과 국제정치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면에서 올림피아는 올림픽 필라텔리스트들의 영원한 고향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해 주고 있었다.
[올림피아에 가는 방법]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이 얼마 남지 않아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고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그리스는 차기 2004년 올림픽을 개최하는 나라라는 점도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하다. 여행목적이든, 출장 목적이든 유럽을 방문하게 되는 우취가들에게 그리스 방문을 꼭 한 번 권하고 싶다. 예산별로 여행목적에 따라 그리스 올림피아에 가는 방법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출장차 가는 우취가들에게는 항공편으로 아테네에 들어가는 방법을 권하고 싶다. 아직까지 우리의 국적 항공사는 아테네에 취항하고 있지 않으며 모든 유럽 항공사와 동남아를 경유하는 태국항공과 싱가폴항공이 아테네에 취항하고 있다.
배낭여행을 계획하는 대학생 우취가들에게는 유레일패스를 권한다. 유레일패스로 이태리의 브린디시(Brindish) 항구에서 그리스 파트라스(Patras)까지 운항하는 페리선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요시간은 17시간이나 주로 밤에 이동하고 선내에는 식당을 비롯하여 면세점, 극장 등 많은 부대 시설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생각보다는 지루하지 않게 이용할 수 있다. 물론 그리스 국내에서도 유레일패스는 통용된다.
아테네에서 올림피아까지는 기차편도 있으나 대다수 버스편을 이용한다. 소요시간은 Pyrgos 경유가 6시간, 직통이 5시간 반정도 걸린다. 직행은 하루에 한 편 정도밖에 운행하지 않지만 경유버스는 30분마다 있는 것도 있으므로 직행을 기다리기보다 빠른 버스를 그냥 타는 것이 더 낫다. 버스 요금은 99년 현재 왕복 30,000원 정도이다.
[보충내용]
올림피아는 고대 그리스가 여러 도시국가로 분할되어 있던 시절, 각 도시 국가간의 평화와 친선을 나누고 신에 대한 제사를 올리기 위한 예식으로 제례와 체육경기가 복합된 의식이 열렸던 장소이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문헌상으로는 B.C 776년부터 올림피아대회가 시작되어 A.D 393년, 로마가 카톨릭 국가로 변모한 후 모든 로마제국내의 우상숭배를 금지한다는 이유로 폐지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올림피아는 역사 속에 묻혀 있다가 1840년대 오토만제국에서 그리스가 자주독립을 하고, 전설로만 알았던 트로이의 이야기가 유적발굴을 통해 사실임이 밝혀지는 것에 고무된 한 독일인이 발굴을 시작하여 19세기 후반부터 올림피아 유적은 다시 햇빛을 보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