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씨의 연원
1. 배씨의 연원 및 개요
배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로서 뿌리는 멀리 2천여년 전 신라 건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모체인 6부 촌장의 한 분인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지금의 경주 명활산 아래 분황사 일대)의 촌장 지타공(祗沱公)이 바로 우리나라 배씨의 득성조(得姓祖)가 된다.
서라벌 6부 촌장들은 모두 천강(天降)하신 신인(神人)으로 기록된 바 있고, 금산가리촌의 영역은 상 ․ 하서지(上 ․ 下西知), 내아(乃兒) 등으로 지금의 동촌이 이에 속하였다. <삼국유사>
<삼국사기>에는 배씨 득성조(得姓祖)인 지타공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은 서기 전 69년 임자(壬子) 3월의 어느날 다른 5부 촌장과 함께 자제들을 거느리고 경주 알천(閼川)가 양산 기슭에서 6부가 한데 뭉쳐 나라를 세울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멀리 나정(蘿井) 숲 사이에서 한 줄기 서광이 하늘을 뻗는지라 달려가 보니 큰 박 같은 알이 있어 쪼개보니 해와 같이 환한 미소년이 나왔다.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 여겨 ‘밝은 누리(朴赫居世)’라 이름짓고 거두어 기르기 13년(서기전 57년 甲子年)에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삼아 6부가 한 나라로 우뚝 서니 국호가 서라벌이요, 신라 천년 왕국의 출발이었다.
금산가리촌의 이름을 바탕으로 그 성격을 상고할 때 ‘금산근어인(金山根於仁) ․ 가리화어의(加利和於義)’이니 시조께서는 백성을 다스림을 인과 의를 바탕으로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신라 태조 3년(서기전 55 丙寅年)에 6부 공신의 위차를 정할 때 지타공은 개국좌명1등원훈총재태사(開國佐命一等元勳冢宰太師)에 이르렀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 32년)에는 신라 개국의 공을 참작하여 건국의 아버지격인 6부 마을과 촌장에게 마을 이름과 6성(신라6성: 배(裵), 이(李), 최(崔), 정(鄭), 손(孫), 설(薛))이 내려졌다. 금산가리촌은 한지부(지금의 경주)가 됐고, 시조께서는 배씨 성을 받았다. 그때 함께 성을 받은 사람들은 알천양산촌장 이알평(李謁平), 돌산고허촌장 최소벌도리(崔蘇伐都利), 취산진지촌장 정지백호(鄭智伯虎), 무산대수촌장 손구례마(孫俱禮馬), 명활산고야촌장 설호진(薛虎珍) 등이시다.
법흥왕 3년(서기 516년)에는 공에게 시호를 문양(文讓)으로 내리셨고, 무열왕 3년(서기 656년)에는 장렬왕(壯烈王)으로 추봉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라 건국의 원훈이신 지타공께서 성을 배씨로 받으신 후 우리 조상들은 6두품 귀족으로서 활약하였다. 후손으로 계대가 미상하나 신라 성덕왕 때 상대등이었던 휘(諱) 부(賦)와 희강왕을 추대하는데 1등공신이었던 휘(諱) 훤백(萱伯)과 신라말의 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은 역사상 저명하였다.
오늘날 배씨는 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을 중시조로 하여 배씨의 갈래로서 같은 세계(世系)를 갖는다.
서기 918년 고려가 건국될 때 무열공(武烈公) 휘 현경(玄慶)께서는 신숭겸, 복지겸, 홍유와 더불어 후고구려 장군 왕건의 기장으로서 왕 궁예의 폭정에 항거하여 왕건을 도와 태조로 추대하였다. 이에 공신위차(功臣位次)에서 공이 순충분의추대개국정사1등원훈(純忠奮義推戴開國定社一等元勳)에 오르고 대상(大相)으로서 첫 수상이 되었으며 그후 도통(都統)으로서 군사를 총괄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서기 935년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최응과 더불어 통합삼한익찬1등공신(統合三韓翊贊一等功臣)이 되었다.
이에 서기 994년(고려 성종 13) 태묘(太廟)를 처음 세웠을 때 고려 태조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었고 서기 1452년에는 고려 태조외에 민족 발전에 공헌한 영걸들을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에 함께 배향할 때 무열공을 수위로 하였다. 그리고 4태사(四太師)로서 태백산성(太白山城)에 향사(享祀)되고 또 철상(鐵像)이 봉안되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무열공은 모든 배씨의 중시조(中始祖)로서 이후부터 계대(系代)를 가지게 되었음은 신라사와 동국통감,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정절공 배극렴(貞節公 裵克廉)은 고려에 등제(登第)하여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진주에서 왜구를 대파하고 우왕 2년 동왕 4년에는 3도원수(三道元帥)로 승진하여 경산부(京山府)에서 적군을 격파하였고, 이성계를 도와 시들어가는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민생을 도탄에서 구하니 개국1등에 서훈(敍勳), 성산백(星山伯)에 봉작되었으며 첫 영의정이 되니 금산가리촌장 지타공, 무열공 현경, 정절공 극렴 세 분은 세 왕조 건국의 원훈(元勳)으로 모두 수상으로서 국가의 기반을 다졌다. 이와 같이 배씨는 금산가리촌장이신 문양공 휘 지타를 시조로, 고려개국원훈이신 무열공 휘 현경을 중시조로 모시는 단일혈족이며 정절공 휘 극렴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삼조원훈 명문거족으로 중흥하였으며 2000년도 통계조사에 의하면 115,900세대 372,064명이 전국에 살고 있으며 외국 교포를 포함하면 50만으로 추정한다.
배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성씨의 하나로 뿌리는 멀리 2천여년 전 신라 건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모체인 6부 촌장의 한 분인 금산가리촌의 촌장 지타공이 바로 우리나라 배씨의 득성조가 된다.
서라벌 6부 촌장들은 모두 천강 하신 신인 으로 기록된 바 있고 금산가리촌의 영역은 상 하서지, 내아 등으로 지금의 동촌이 이에 속하였다.
《삼국유사》《삼국사기》에는 배씨 득성조인 지타공에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은 서기전 69년 임자 3월의 어느날 다른 5부 촌장과 함꼐 경주 알천가 기슭에서 6부가 한데 뭉쳐 나라를 세울 일을 의논하였다. 그때 멀리 나정 숲 사이에 한 줄기 서관이 하늘을 뻗는 지라 달려가 보니 큰 박 같은 알이 있어 쪼개보니 해와 같이 황한 미소년이 나왔다. 하늘이 보낸 사람이라 여겨 '밝은 누리'라 이름 짓고 거두어 기르기 13년에 박혁거세를 임금으로 삼아 6부가 한 나라로 우뜩 서니 국호가 서라벌이요, 신라 천년 왕국의 출발이었다.
금산가리촌의 이름을 바탕으로 그 성격을 상고할 때 '금산근어인, 가리어화어의'이니 시조께서는 백성을 다스림을 인과 의를 바탕으로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신라 태조 3년에 6부 공신의 위차를 정할 때 지타공은 개국좌명1등원훈총재태사에 이르렀다.
신라 3대 유리왕 9년에는 신라개국의 공을 참작하여 건국의 아버지격인 6부 마을 과 촌장에게 마을 이름과 성이 내려졌다. 금산가리촌은 한지부가 됐고 시조께서는 배씨 성을 받았다.
그 때 함께 성을 받은 알천양산촌장허촌장 최소벌도리, 자산진지촌장 정지백호, 무산대수촌장 손구례마, 명활산고야촌장 설호진 등과 함께 우리 배씨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성씨가 되었다.
법흥왕 3년에는 공에게 시호를 문양으로 내리셨고 무열왕 3년에는 장렬왕으로 추봉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라 건국의 원훈이신 지타공께서 성을 받으신 후 우리 조상들은 6두품 귀족으로서 활약하였다. 후손으로 계대가 미상하나 신라 성덕왕 때 상대등이었던 휘 부와 희강왕을 추대하는데 1등공신이었던 휘 훤백과 신라 말의 무열공 휘 현경은 역사상 저명하였다.
오늘날 우리 배문은 무열공 휘 현경을 중시조로 하여 배씨의 갈래로서 같은 세계를 갖는다.
서기 918년 고려가 건국될 때 무열공 휘 현경께서는 신숭겸, 복지겸, 홍유와 더불어 후고구려장군 궁예의 폭정에 항거하여 왕건의 기장으로서 왕건을 도와 태조를 추대하였다. 이에 공신위차에서 공이 순충분의추대개국정사1등원훈에 오르고 대상 으로서 첫 수상이 되었으며 그후 도통으로서 군사를 총괄하여 후삼국을 통일하느데 큰 공을 세워 서기935년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최응과 더불어 통합삼헌악천1등공신이 되었다.
이에 서기 994년 태묘를 처음 세웠을 때 고려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고 서기 1452년에는 고려 태조 외에 민족 발전에 공헌한 영걸들을 경기도 현천군 미산면 아미리에 있는 숭의전에 함께 배향할 때 무열공을 수위로 하였다. 그리고 사태사로서 태백산성에 향사되고 또 철상이 봉안되었다. 이런 연유로 인하여 무열공은 모든 배씨의 중시조로서 이후부터 우리 성이 계대를 가지게 되었음은 신라사와 동국통감,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우리 배씨는 금산가리촌장이신 문양공 휘 지타를 시조로 하고 고려개국원훈이신 무열공 휘 현경을 중시조로 모시는 단일혈족이면 지금에 이르기까지 명문거족으로 중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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