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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국시대(四國時代)로서 가야(伽耶)의 발전
윤 석 효*1)
1. 머리말
2. 가야의 국가체제와 산업의 발전
3. 가야문화와 민족문화와의 관계
4. 일본 황국사관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5. 맺음말
1. 머리말
한국사에서 가야사는 삼국시대에 비해 연구인원도 적고 관심도 적은 분야로서, 일반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신비스러운 역사로 파악될 정도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가야사를 전문적으로 체계 있게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그 실체가 규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가야도 삼국 못지않은 역사와 문화를 지니고 있으며, 왜(倭)와의 특수한 관계가 있음도 밝혀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가야의 국가체제와 산업의 발전 및 가야문화와 민족문화 그리고 왜와의 관계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일본 황국사관(皇國史觀)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의 내용과 문제점을 제기하여, 가야사가 민족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중요성을 인식시켜 보고자 한다. 특히 초, 중, 고 국사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그 당시가 연맹체 중심의 삼국시대(三國時代)였던가에 의문을 제기하고, 대표적인 가야국들을 중심으로 한 사국시대(四國時代)의 의미 및 그 설정이 왜 필요한지를 밝혀보고자 한다.
2. 가야의 국가체제와 산업의 발전
가야의 역사는 A.D.32년 무렵, 남쪽의 해안지역인 김해지역에서 시작되었고, 6세기 중엽경에 북쪽의 내륙지역인 고령지역에서 마감되었다. ꡔ삼국지(三國志)ꡕ 위지 동이전이나, ꡔ삼국사기(三國史記)ꡕ 그리고 ꡔ일본서기(日本書紀)ꡕ 등의 기록 및 고고학 자료들을 가지고 보면, 그 지역에는 약 12개국 정도의 나라들(소국들)이 독자적인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이들 가야의 여러 나라들은 약 490년에서 520년 동안이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과 나란히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야의 원말은 가라(加羅)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가라는 우리말에서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였는데, 이후로는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김해의 가락국은 ‘가라의 나라’라는 뜻이었다. 가야의 한자표기는 加耶(신라), 伽耶(고려), 伽倻(조선)와 같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사람 인(人)변이 하나씩 더해졌다.
ꡔ삼국지ꡕ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는 3세기경에 산재했던 12개의 가야국을 열거하고 있다. 구야국(狗邪國, 김해), 안야국(安邪國, 함안), 반로국(半路國, 고령), 불사국(不斯國, 창녕) 등이 가야인들이 사용했던 나라이름이었다. 우리에게는 금관가야(金官伽耶, 김해), 아라가야(阿羅伽耶, 함안)와 같은 이름이 친숙하지만, 이것은 고려시대의 일연 스님이 그 당시의 행정구역에 가야라는 이름을 붙여지은 명칭에 불과하다. 따라서 정작 가야인들은 이런 이름을 몰랐을 것이다. 따라서 가야의 각국은 구야국, 안야국, 반로국 등과 같이 부르는 것이 옳다고 보겠다.
이와 같이 가야는 원래 12개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중 큰 세력을 지닌 국가는 5, 6개국이었다. 나머지 소국들은 비교적 큰 규모의 이들 5, 6개의 국가를 중심으로 별반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우호적인 연관관계를 가지면서 몇 개의 세력권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들 세력권을 대표하는 5, 6개의 국가가 6가야 설화와 직접 연관을 맺고 있었다.
가야의 성립 및 발전기에 형성된 이들 세력권은 크게 나누어 김해나 웅주의 본가야권, 고령과 대구 중심의 대가야권, 함안과 진해 등의 아라가야권으로서, 이들은 각각 독자적으로 그들 세력권의 실리를 추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중 가야 전반기를 이끈 세력이 김해의 본가야 세력권이었다. 이것은 김해 구지봉에서 6개의 시조신화가 나타난 역사적 배경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가야 여러 나라 중에서도 맨 처음 두각을 나타낸 것은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본가야였다.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A.D.42년에 가야지방의 구간(九干, 아홉 촌장 혹은 씨족장)이 김해의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거북이 노래’를 부르며 춤추고 놀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황금알을 받았는데, 거기서 태어난 아기 중 맨 먼저 알에서 나와 왕위에 오른 이가 수로(首露)로 불리웠고, 나머지 다섯 명이 다섯 가야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한다.1)
이 사료에서 첫 번째 서론의 줄거리는 가락국 건설 이전의 상태 곧 전사(前史)를 말하고, 새 지도자의 모태인 알(卵)을 얻는 과정을 엮고 있다. 알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새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주색 줄은 탯줄이고, 금상자는 가야 사람들의 자궁을 상징한다. 또한 가야 집단을 알리는 색은 주황색과 붉은 색이며, 남방적 요소가 강한 국가임을 암시해 주고 있다.
두 번째 줄거리는 알에서 사람으로 탄생한 수로왕이 나라를 열고 그 나라에 걸맞는 도읍지를 정하여 궁궐을 건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왕의 인물됨은 비범하고 인자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세력이 구간이다. 우선 구간들의 이름에는 칼도(刀)라는 글자(我刀干, 汝刀干)와 물수(水)라는 글자(留水干), 귀신신(神)이라는 글자(神天干, 神鬼干)가 많이 들어있다. 이는 농사짓는 도구를 맡은 사람, 수리를 맡은 사람, 제사의례를 맡은 사람 따위의 직능분담에 따른 이름인 것이다. 이들중에 아도간이 맹주였다. 맨 앞자리에 이름이 올라있고, 황금알을 그의 집으로 가져가서 부화시킨 사실로 이를 알 수 있다.
저 멀리 김해지방에는 구간들이 간집단(干集團)을 이루어 느슨한 지배력으로 주민을 통제하고 있었다. 간집단은 사로국의 경우와 같이, 마한의 지배권이 해이해지는 과정에서 힘을 겨루다가 제국형식의 공존방법을 모색해 나갔다. 삼국에 비해 다소 늦은 시기, 어느 곳에서 흘러온 수로왕이 간집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였다.
간집단은 완충지에 자리잡은 탓으로 여러 나라들로부터 많은 시달림을 받았다.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 유천간(留千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 신천간 등 구간의 간(干)은 부여의 가(加)나 고구려의 나(那), 신라의 촌(村)과 같이, 한 집단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간의 한자 뜻은 ‘골짜기’이다. 마한의 통제력이 느슨할 때에 이들은 아홉 개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이나, 그 영역과 실체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시조신화 두 번째 줄거리에는 “6개의 황금알에서 아기가 태어났는데 맨 먼저 왕위에 오른 이가 수로로 불리웠고 나머지 다섯 명이 다섯 가야의 통치자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섯 명의 통치자중 김해의 본가야 세력권 외에 이와 비교될 수 있는 세력권으로서 고령의 대가야 세력권과 함안의 아라가야 세력권이 존속함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고령의 대가야 세력권의 창시자는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고, 9대가 이뇌왕(異腦王), 그 뒤 월광태자(月光太子)의 모습이 보이며, 16대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지속되었다. 아라가야 세력권은 안야국의 소왕(小王)으로 출발하여 후기 가야제국을 이끌어, 가야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국가였다. 김해지방의 가야세력이 전기 가야 여러 나라들의 주도권을 잡게 된 것은 이곳에서 철(鐵, 지금 창원 다호리유적에는 제철유적이 있다.)이 많이 생산되고, 벼농사가 발달하였으며, 해상교통을 이용해 대외무역이 활발한 까닭이었다.
창원 다호리유적은 기원전 1세기경부터 만들어진 무덤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는 주조한 철기는 물론이고, 보다 발달된 단조기술로 만든 각종 철기가 다량 발견되었다. 철검, 창, 쇠살촉 등의 무기류와 각종 형태의 도끼와 괭이, 따비, 낫 등의 농공구들은 당시의 철기제작 기술이 이미 고도로 발달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김해의 본가야는 일찍부터 철을 중심으로 교역을 한 고대 해양국가로서 번성하며, 낙동강 하류의 가야 소국들은 물론이고 가야 전체를 대표하는 세력국으로 등장한 국가였다. 이른바 ‘임나(任那)’라는 호칭이 님의 나라 곧 주국(主國), 왕국(王國)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는 김해의 본가야가 가야 여러 나라의 대표국이었을 때 불려진 이름으로 보아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인 4세기 전후에 고령의 대가야나 함안의 아라가야가 김해의 본가야를 대신하여 가야 여러 나라의 대표세력국으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이 임나의 칭호는 바로 대가야나 아라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교체시기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가야의 국가체제로서의 관료기구와 신분제도를 살펴보면, 김해 본가야의 경우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를 참조해 볼 때, 중앙관료기구가 매우 세분되어 있었다. 천부경(泉府卿)과 사농경(司農卿)의 존재는 재정에 관한 일을 맡았던 중앙관청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는 점을, 그리고 종정경(宗正卿)의 존재는 왕실계통의 일을 맡아본 중앙관제까지 정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2) 또한 왕실 창고인 내고(內庫)가 있었다. 이것은 국가재정을 관리하는 관청과 왕실재정을 관할하는 관청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3) 그밖에 무기고도 있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군대와 군사관계 업무를 맡았던 통치기구가 정비되어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특히 구간의 옛 이름은 “宵人(小人)野夫之號”(소인배로서 촌스런 시골남자와 같은 칭호)였다. 그러한 이들의 명칭개정과 점차 지배권력으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은 가야사회 내부에서의 지배신분계층의 확고한 형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구간의 존재는 김해 본가야 또는 김해 금관국이 일찍부터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마련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해 주며, 더욱이 이러한 구간의 명칭변개는 김해 본가야의 정치제도의 정비와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해 본가야(금관국)에 독자적인 신분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가락국기」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 한 예로, 거등왕 때부터 구형왕 때까지는 ‘태자’ ‘왕자’ ‘자’를 구별해 놓았다. 이것은 지배계층 내에 ‘정통’과 ‘비정통’의 신분을 분류할 정도의 근거인 토착적인 신분질서가 전해져 내려온 것을 토대로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것이다.
한편, ꡔ일본서기ꡕ 계체기(繼體紀)와 흠명기(欽明紀)에 언급되어 있는 가야의 신분으로는 한기(旱岐)와 하한기(下旱岐) 그리고 상수위(上首位), 이수위(二首位) 등이 있다.4) 이것은 가야에 독특한 신분제도가 있었음과 가야 여러 나라 지배층에 계층의 분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신분의 분화현상은 가야 여러 나라에 권력의 분할과 계급의 층서화가 이룩되었을 정도로 정치적 발전을 보였다는 점에서, 고대국가 수준의 영역국가를 확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가야는 스스로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사제도도 갖추고 있었다. 부대의 편성은 일반부대의 경우 보병과 기병 그리고 특수부대로서는 궁병대와 가지극부장대 그리고 수군이 있었다. 이들 부대의 지휘는 환두대도(環頭大刀, 둥근고리칼자루)를 지닌 신분계층인 왕이나 한기, 같은 계층인 상한기와 차한기 그리고 하한기 같은 지배신분층을 보기감(步騎監)이나 노당감(弩幢監) 또는 가지극당감(皆知戟幢監), 수군감(水軍監)과 같은 계층의 지휘관을 장악하고 통솔하면서 이끌어 나갔으리라 보고 있다. 그리고 이 부대를 구성했던 병사들은 대부분 부역에 동원된 양인들이었으며, 보조원으로서 노비들인 장획(臧獲)들이 참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5)
가야의 군사력은 1세기 무렵 철생산과 함께 철제무기를 만들면서 새로운 활력소로 등장하여 신라와 맞설 정도가 되었다. 가야는 A.D.77년 황산진 전투에 이어 계속 신라와 백제에 맞서 정복전쟁에 임하였다. 가야군이 신라와 백제에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발달된 철제무기의 생산 때문이었다. 지금 창원지역인 다호리유적, 김해 양동리고분에서는 철제유물들이 발굴된 바 있다. 이 무덤은 1-3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곳에서는 도끼자루 모양의 철부(鐵斧)가 많이 출토되었다. 철부는 초기신라의 경우와 같이 화폐처럼 유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철부는 제련된 원료로서 바로 무기나 농기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무쇠로 만든 갑옷과 무기류도 많이 출토되었다. 또한 가야에서 무기로 생산되었던 대도와 창, 창살, 활, 화살촉 등은 왜지(倭地)에까지 전파되어 왜국의 공격용 무기개발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5세기 이후 기마전술도 왜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볼 때에, 가야의 무기 생산기술과 기마전술은 매우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가야 여러 나라가 주위의 강력한 국가인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6세기 중엽까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정치신분제도와 군사제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의 전개는 강상파부(江上波夫, 에가미 나미오)로 하여금 일본왕실은 부여에서 가야를 거쳐 일본의 기내지방에 정착하였다는 기마민족정복설(騎馬民族征服說)을 발표하게 하는 근거를 만들어 주었다. 이 발표는 2차 세계대전의 패전에 못지않은 정신적 충격을 일본인들에게 가한 학설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가야 여러 나라 형성의 원동력은 정치적, 군사적 측면 이외에 사회의 하부조직인 경제적 측면에서 고찰해 볼 때, 가야의 산업으로 농업, 수산업, 제철업 등의 발달을 들 수 있다. 특히 제철업은 가야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다. ꡔ삼국지ꡕ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는 “나라에서 철이 생산된다. 한, 예, 왜가 모두 변진의 철을 사간다.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고 팔 때 모두 무쇠뭉치를 사용하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 낙랑 대방과 같은 고을에 무쇠를 공급한다.”고 기록되어 있다.6) 이 책은 3세기 무렵에 쓰여졌으나, 이 기사는 1세기 무렵의 사실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 지역에서는 위의 기록처럼 무쇠를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교역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김해의 가락국을 금관이라 부른 것도 쇠와 관련이 있으며, 수로왕이 금빛 알에서 나온 것이나, 성을 김씨로 삼은 것도 모두 쇠와 관련지을 수 있다. 한자의 김(金)은 고대에는 쇠를 뜻하여 쇠금이라는 훈음을 가지고 있다. 가락국의 쇠는 나라의 기본 재부였다.
이와 같이 가야는 독자적인 정치제도와 군사제도 및 자주적인 신분제도를 갖추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만한 산업의 발전과 문화역량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삼국과 대등한 고대국가 수준의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고대사는 지금까지 정설화 되어온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국을 포함하여 사국시대(四國時代)를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3. 가야문화와 민족문화와의 관계
가야의 문화로서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음악과 문학을 들 수 있다. 가야의 음악으로서 대표적인 악기는 역시 가야금이다. ꡔ삼국사기ꡕ에는 “가야금은 가야국의 가실왕이 12개월의 율려를 본받아 12현금을 만들고 이에 우륵을 시켜 작곡하게 하였다가, 나라가 소란해지자 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투항하였는데, 그 악기의 이름을 가야금이라 하였다.”7)고 기록되어 있다. 우륵은 성열현 사람으로 12곡의 음악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의 고향인 성열현은 글자대로 본다면, 지리지 당주(唐州) 강양군(江陽郡)의 속현의 하나인 신이현(辛爾縣)에 해당하였던 곳이다. 이 지역은 합천 부근의 지역을 말한다. 따라서 지금의 합천지역이 우륵의 출생지였음은 틀림없다.
우륵이 작곡하였다고 하는 12곡은 ① 하가라도(下加羅都), ② 상가라도(上加羅都), ③ 보기(寶伎), ④ 달이(達已), ⑤ 사물(思勿), ⑥ 물혜(勿慧), ⑦ 하기물(下奇物), ⑧ 사자기(獅子伎), ⑨ 거열(居烈), ⑩ 사팔혜(沙八兮), ⑪ 이사(爾赦), ⑫ 상기물(上奇物) 등이다. 이밖에 이문(尼文)이 편하였다고 하는 3곡도 아울러 전해지고 있는데, ① 조(鳥), ② 서(鼠), ③ 곽(郭) 등이다.8)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이들 12곡의 명칭이 당시의 지명을 전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즉 ①의 하가라도는 남가야 혹은 금관가야라고 하는 지금의 김해지방의 음곡을 말하고, ②의 상가라도는 대가야라고 하는 지금의 고령지방의 음곡을 뜻한다. 여하튼 우륵의 12곡은 당시 지명을 악곡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는 각 지역에서 가야 소국들의 문화가 생성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12곡 자체가 향토색 짙은 가야의 지방 속악이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륵의 음악적 명성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신라본기」 진흥왕 12년 3월에,
“王巡守次娘城 聞于勒及弟子尼文知音樂 特喚之 王駐河臨宮 令奏其樂 二人各製新歌奏之”9)
라고 하여, 우륵은 대가야의 멸망 이전에도 신라에까지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가야의 국운이 기울자, 우륵은 악기를 갖고 신라에 항복하였다. 진흥왕은 그를 받아들여 평안히 국원경(國原京, 충주)에 살게 하였으며, 대나마(大奈麻) 법지(法知)와 계고(階古) 및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보내어 그 업을 전수받게 하였다. 우륵은 그들의 재능을 참작하여 계고에게는 가야금, 법지에게는 노래, 만덕에게는 춤을 가르쳤다. 그 후 이들 세 사람은 12곡을 전해 받고는 서로 말하기를, “이는 번거롭고 또한 음탕하여 정아(正雅)한 음악이 될 수 없다.”10) 하고, 드디어 5곡으로 요약하였다. 우륵은 이 말을 듣고는 노했으나, 그 다섯 가지 음률을 듣고서야 눈물을 흘리며 감탄하고, 화락하여 속되지 아니하고 애련하되 슬프지 아니하니 가히 바르다고 할 만하다고 하고, 제자들로 하여금 국왕의 앞에 가서 연주하라고 하였다.11) 왕은 이를 듣고 크게 즐거워하면서 “앞날 낭성(娘城)에서 듣던 소리와 다름이 없다.” 하고는 후하게 상을 주었다. 간신(諫臣)이 아뢰기를, “멸망한 가야국의 음악은 취할 것이 못됩니다.”라고 하자, 왕은 “가야왕이 음란하여 자멸한 것인데, 악(樂)이 무슨 죄냐. 대개 성인이 악을 제작함은 인정에 따라서 조절한 것이며, 나라의 흥망은 음조에 말미암는 것이 아니다.” 하면서, 이를 시행토록 하여 대악(大樂)을 삼았다.12)
이 기록에서 진흥왕이 우륵의 가야악을 계고와 법지, 만덕을 시켜 전수받도록 할 정도로 가야악의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 이 세 사람은 가야악을 다섯 곡으로 정리하여 신라음악으로 전존화 시킨 과정을 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가야지역에서는 이러한 음악뿐 아니라 미술도 발달하였다. 1963년에 발견된 고령 고아동의 벽화고분은 천장 및 벽면에 청색, 녹색, 홍색, 갈색으로 연화문과 초화문을 그린 매우 귀중한 벽화이다. 경주지방에서는 벽화고분이 발견되지 않았는데 비하여, 대가야의 옛 땅에서 이렇게 우수한 벽화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가야의 미술수준을 짐작케 한다. 이 벽화고분의 석실구조 및 연화문의 토양 등의 묘제는 공주 전분(塼墳, 벽돌로 구성된 무덤)과 비슷하고 연화문은 부여 능산리 고분과 닮았다. 이로써 볼 때, 대가야는 백제로부터 많은 문물을 받아들여 반도 동남부에 편재한 신라보다 문화면에서 뒤지지 않는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고 하겠다.
이번에는 가야의 문학을 알아보자. 「가락국기」의 처음 부분은 적어도 가락의 백성들이 어떻게 천신맞이를 하였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천신맞이를 할 때 부른 노래가 곧 구지가(龜旨歌)였다. 따라서 한국 상고시대의 다른 여러 사회에 천신맞이 굿이 있었고, 거기에 가락(歌樂)이 수반되었다고 할 때 그 가락이 구지가에서 멀지 않았으리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그러나 천신맞이 굿에서의 가락은 한두 마디의 짧은 노래로 불려졌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보다 더 장편의 노래로 불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가락국기」에서는 신이 그의 출현을 알리는 신탁이라 보고 있다. 구지가는 그 신탁의 일부이다. 신탁대로 백성들이 시행함으로써, 비로소 신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신탁에서 신의 출현까지로 일단락되는 이야기에서, 구지가는 시종 결정적인 구실을 다하고 있다. 이야기의 서두가 그 노래로 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결말인 신의 출현 또한 그 노래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노래가 단독으로 불려진 것이 아니라 줄거리인 이야기와 함께 이를 노래로 불렀을 것임을 추측케 하고 있다. 노래 없이는 이야기 줄거리가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함은 노래가 이야기 줄거리 속에 별도로 첨가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 이야기 줄거리 속에 내재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구지가는 이야기 줄거리로 엮어져 있다. 이것은 구지가가 노래로 불려졌을 때 구지가만 따로 노래로 불려진 것이 아니라는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13) 구지가가 노래로 불려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구지가는 신맞이 굿의 핵이다. 구지가를 부르는 것은 장차 나타날 신이 자신의 출현의 전제조건으로서 스스로 요구한 것이다. 따라서 구지가가 이야기 줄거리와 함께 노래로 불려졌다는 것은 신맞이 굿에서 구지가를 내포하고 있는 신의 이야기가 구송(口誦)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상고시대의 신맞이 굿에 수반되었던 가(歌)의 모습이다. 그것은 결코 단편적인 노래 그 자체로서 불려진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삼국시대에 제례에 수반된 가무도 이 「가락국기」의 가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제천의식에서 구송된 신화는 무엇보다도 구전문학의 한 장르이다. 상고시대의 어느 한 때에 신화가 비롯되면서 우리 문학의 출발점을 이루는데 구지가가 기여함으로써, 민족문화의 창조적 원천으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가야의 문학의 수준을 잘 보여주는 근거로는 ꡔ삼국사기ꡕ 강수(强首)에 관한 기록이다. 문무왕은 “강수가 문장을 맡아서 능히 중국에 뜻을 전할 수 있었고 고구려와 백제에도 의사를 보낼 수 있어 능히 친선을 맺을 수 있었다. 나의 선왕께서 당에 청병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했음은 무공이나 또한 문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강수의 공로를 찬양한 바 있다.
강수는 태종 무열왕대부터 혜성처럼 등장한 문장가로 일세에 이름을 떨쳤다. 대당 외교문서를 위시한 고문대책(高文大冊)을 도맡은 거장으로, 신문왕대에 죽은 통일기의 대문호이다. 또한 그는 신문왕 때 국학 창설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4)
강수는 양가녀(良家女)와 재취하라는 아버지에게 학문의 길은 실천하지 않으면 수치스러운 것이라면서 조강지처를 버리지 않았다15)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학(學)과 행(行)이 일치하는 학인이기도 하였다. 일생을 학행을 겸비한 유학자로서 지냈으나, 그의 사후 나라에서 보낸 많은 부물(賻物)은 그의 가족들이 사유물로 삼지 않고 강수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사에 바쳤다. 유학이나 한학의 대가로서, 문장가로서 외교문서의 해독이나 작성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신라의 대문호 강수도 임나가량인(任那加良人)이었다.16) 그러므로 그의 학문과 문장은 가야문학의 영향을 받아 그 맥을 살려 더욱 차원 높은 문장으로 승화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강수의 문장이나 학풍은 제문(帝文), 수진(守眞), 양도(良圖), 골번(骨番)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17)
이런 점에서 가야문학은 신라문학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의 삼국통일에 금관가야계(김해 본가야계)의 김유신이 무(武)로써 공헌했다면, 공교롭게도 무와 문이 모두 가야계임은 가야의 문화수준이 신라와 대등했음을 증좌한다.
가야 여러 나라들은 이러한 독자적인 문화와 더불어 자주적인 사상도 형성하고 있었다. 우선 가야사상의 일반개념으로서 고찰할 수 있는 것은 수로왕 신화에 보이는 태양숭배민족의 불계(祓禊)사상이다. 신라의 혁거세 신화는 그 강림날이 임자(壬子) 3월 초하룻날로 되어 있고, 수로왕 신화는 임인 3월 계욕일(禊浴日)로 되어 있다. 계욕은 혹은 계음(禊飮)이라고도 하고 혹은 불계라고도 한다. 계음일은 3월 상사일(上巳日)로서, 혁거세 신화에 단적으로 표시된 바와 같이, 이것은 태양숭배민족의 불계사상에서 유래한다.
불계사상의 보다 근원적인 시원은 우리의 토착적 신앙인 샤머니즘적인 원시신앙 내지 원시민속에서 구해볼 수 있다. 불계사상은 심신의 오예(汚穢)와 숙구(宿垢)를 제거하고 청정한 본연의 신인(神人)으로 환원코자 하는 관념적 소망에서 출발하여, 물, 새물, 맑은 물 즉 동류수(東流水)로 씻으면 모든 부정을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데서 그 시원을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불계사상은 물과 관계가 있고, 또 농경과 관계있는 사상이라 하겠다.
「가락국기」에서는 가락 건국시조의 강탄(降誕)설화에 계욕 즉 불계의식이 구체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간 등이 집회한 날이 계욕일이었으므로 계욕의식은 일상적으로 행한 생활의식이었을 것이다. 계음의 종교적 행사는 곧 건국의 정치적 행사와도 직결되어 있었다. 계음하는 날은 성산(聖山)을 중심으로 족장들이 부민을 거느리고서 종교적 행사를 하는 날이며, 동시에 부족의 정치적 행사를 결정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계욕일은 가야 여러 나라들의 정치적 종교적 의식과 행사를 전개하는 사상적 모체가 되었다. 청결을 통한 맑지 못한 것과 재액을 물리쳐 복을 추구하는 것은 가야인의 투명한 인생관과 종교관, 정치관 등의 기저를 이루는 사상이 되었다.
가야 여러 나라에 자주적인 사상이 형성되어 있었음은 도가와 관련된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ꡔ동국여지승람ꡕ을 보면, 초현대(招賢臺)는 김해부 동쪽 7리에 있는 작은 산으로, 세속에 전하기를 “가락국 거등왕이 칠점산의 참시선인을 부르면, 참시선인은 배를 타고 거문고를 안고 와서 서로 즐거워했으므로 인하여 이름한 것인데, 왕이 앉았던 연화석과 바둑판들이 지금까지 있다.”고 하였다.18)
참시선인은 금선(琴仙) 또는 칠점산에서 나왔다고 하여 칠점선인이라고도 불리었다. 그의 모습은 한옥(寒玉)과 같고, 말소리는 범음(梵音)과 유사했다. 이에 가락국의 거등왕이 그의 뛰어난 덕을 사모하니, 초현대를 지어 그를 초빙했다. 그는 배를 타고 거문고를 안고 와서 초현대에서 왕을 만나 서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쇠고기로 만든 요리의 향연을 사절하고 단풍나무진(楓香脂)과 도라지를 요구해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 거등왕에게 “임금이 자연스럽게 다스리면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살게 된다.”19)라고 하면서, 치국의 도리를 일러 주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참시선인은 항상 거문고를 휴대하고 다녀 금선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통하여, 음악은 그의 생활의 주요한 한 부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우륵 또한 선인(仙人)으로 불려지기도 하였다.20) 거등왕에게 치국의 도를 가르쳐준 참시선인이나 선인의 생활을 한 우륵과 같은 인물에 대한 이러한 기록들은 가야 여러 나라에 도가사상이 전해져서 만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케 한다.
본가야에 도가사상이 있었음은 대성동 고분군과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철정(鐵鋌)을 통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4세기 중엽으로 편년되고 있는 대성동 제23호 목곽묘는 부곽은 동반하고 있지 않으나, 후한의 방격규구사신경(方格規矩四神鏡)과 환두대도, 단검, 도자(刀子), 갑주 등의 철제무기를 부장하고 있어, 김해의 본가야(즉 금관가야)의 왕묘에 해당하는 규모와 내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도 여기에는 특기할 만한 철정 60여 점 정도가 부장되어 있었다. 제23호분에 다량으로 철정이 부장된 것은 대성동 고분군 가운데서도 특출하다. 이러한 철정은 본가야에 도가사상이 있었음을 나타내는 유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2세기 후반경으로 추정되는 양동리 제162호분과 2세기 말 내지 3세기 초로 추정되는 양동리 제235호분은 모두 구야국(狗耶國)의 수장묘 즉 왕묘로 추측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철정의 전신에 해당하는 판상철부(板狀鐵斧)가 각각 40점과 30점이 부장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판상철부와 철정이 다량으로 매납된 것은 분묘의 피장자가 토지신에게 분묘용 땅을 구입하기 위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판상철부나 철정은 화폐와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이러한 것들이 다량으로 매납된 것은 본가야에 도교적인 사상이 존재하였음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이러한 가야의 도가사상은 계욕적인 의식이나 불교사상 그리고 덕치주의 사상이 공립(共立)하고 융화하는 바탕을 제시해 주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에 도가사상이 있음은 우리의 고유사상인 신도사상(神道思想)이나 선도사상(仙道思想) 그리고 샤머니즘이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술적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무속신앙과 관련이 있는 구지가가 대표적인 신가(神歌)라는 점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 고유사상의 핵심은 청정한 본연의 신인(神人)으로 환원코자 하는 신인사상의 추구이다. 우리 민족은 천손의 후예로서 천신과 하나가 되어 자기완성을 이루는 가운데 오랜 기간 선남선녀로 살아가기를 희구하는 족속이었다. 이러한 신인사상의 추구가 가야 도가사상의 근본임을 가야사상의 고찰에서 얻을 수 있는 귀결점인 것이다.
4. 일본 황국사관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가야는 일본의 구주지방과 가까워 그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며 소국들을 건설하였다. 이들은 왜(倭)라는 이름으로 가야지방에 왕래하면서 교역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른바 4세기경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는 가야가 아라가야 지역 즉 함안에 두었던 임시교역소였다.21) 후세에 일본인들은 ꡔ일본서기ꡕ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를 일본이 4-5세기까지 가야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정치기구였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의 통설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이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이다. 이 칼은 나라현 천리시 석상신궁에 전래하는 철제 양날검이다. 전체 길이가 75㎝이고, 몸체 좌우에 3개씩 가지를 이루는 칼이 나와 있으며, 앞뒤에 60여 가지의 금상감명문을 새겨놓았다. 명문해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전면문> 泰△四年△月十六日△丙午正陽에 百鍊鋼鐵의 七支刀를 만들었다. 이는 나아가 百兵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므로 마땅히 侯王들에게 공급할 만하다. △△△가 제작하였다.
<후면문> 선세 이래로 아직 이 칼이 없었던 바, 百濟王世△子 奇生聖音이 짐짓 일부러 倭王旨를 위하여 만들었으니, 후세에 길이 전하여 보이라.
이 칼은 백제 근초고왕대에 왜왕에게 준 것으로 여겨진다. 이 왜왕이 대화정부의 왕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이 무렵 백제의 세력이 일본열도의 왜국에 강하게 뻗쳐있었음을 말해준다. 결국 백제의 칠지도는 백제대왕이 후왕(侯王)으로 여기는 하내지방(河內地方) 백제계 도래인의 우두머리에게 하사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일본측의 견해는 이와는 다르다. 그 대표적인 학설로서는 복전민남(福田敏男)의 견해가 있다.22) 이 칼이 만들어진 것은 태화 4년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이 태화 4년을 동진(東晋)의 ‘태화 4년’에 일치하는 것으로 비정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다음으로 ‘태(泰)’와 ‘화(和)’가 새겨진 곳은 명치 이후에 칼 같은 것으로 깎아낸 흔적이 있으므로 ‘화’로 단정하기가 어려우며, 또한 동진의 ‘태화’라면 어째서 새기기 힘든 ‘태’자를 칠지도에 채용하였는가에 대한 충분한 설명도 없었다. 그리고 태화는 동진만이 아니라 다른 시기에도 있었는데, 그가 구태여 동진의 연호로 비정한 것은 ꡔ일본서기ꡕ 신공 52년(372)조에 보이는 “백제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 와서 칠지도 1구(口), 칠자경(七子鏡) 1면(面) 등 각종 중요한 보물을 바쳤다.”고 한 기사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른 시기의 ‘태화’를 비정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은 ‘우리 역사와 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고증의 결과에 의해 동진의 태화 4년으로 낙착된 것이 아니라 ꡔ일본서기ꡕ의 기사를 사실(史實)로 정당화시키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자료를 취급하는 자세가 전도된 것이지만, 일본 학계는 그의 논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왜냐하면 복전의 새로운 학설에 따르면, 백제에서 칠지도가 제작된 것은 바로 섬진강 유역의 소국들인 비자벌, 남가라, 훼국, 탁순, 안라 등 이른바 칠국평정(七國平定)이 이루어진 369년(동진 태화 4년)이며, 백제왕은 ‘영원한 복속’을 맹세하면서 3년 뒤인 372년에 대화정권에게 이것을 헌상한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즉 신공황후의 출병과 임나일본부의 설치는 당대의 금석사료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당대의 금석사료란, 왜가 신묘년(39)에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가야, 백제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는 광개토왕비문 신묘년조와 칠지도 전면문과 후면문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황국사관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에 관한 일본측 통설의 핵심사항이다. 여기에 비해 우리나라의 임나일본부에 관한 새로운 견해로는 인제대학교의 이영식 교수가 주장하는 부(府)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들 수 있다. 곧 ‘부(府)’라는 표현은 그 원형이 어사지(御事持, 미코토모찌)라는 뜻이므로, 이는 기관이나 관청이 아니라 사신(使臣)이라는 뜻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임나일본부를 임나지역에 파견된 왜국의 사절(집합체)로 보는 것이다. 645년 야마토 정권(大和政權) 초기에 미코토모찌는 왕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되었다가, 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오는 일회성 사신이었다는 것이다. 곧 근세조선의 암행어사와 비슷한 임무를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임나일본부는 임나에 파견된 왜국의 사신이었다. ‘일본’은 변경된 왜의 국명이며, ‘부’는 미코토모찌의 한자 번역어라는 것이다.
또한 함안의 충의공원 발굴로 드러난 고고학적 성과도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를 공박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특히 대형 건물터와 창고지의 해석은 많은 암시를 주고 있고, 함안군 가야읍 장명리의 폐자기장의 파편들도 일본토기와의 관계에서 비교해 볼 때에 중요한 자료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사의 민족주의의 연원인 황국사관 즉 지배사관을 극복할 근거가 함안의 아라국에서 발견되고 있고, 임나일본부설은 함안의 아라가야 지역에 두었던 임시교역소였음을 주장할 수 있는 논리가 입증되는 것이다.
원래 구주지역의 판부Ⅰ식 토기는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인 무문토기가 그 원형이고, 가야지역의 김해식 토기는 고분시대 기내지역의 토기인 수혜기(須惠器, 스에키)와 토사기(土師器, 하지키)의 원류이다. 가야식 토기는 지역에 따라 특성이 다르다. 아라가야 토기는 불꽃모양의 투창이 있고, 금관가야의 토기는 긴 직사각형이 일렬로 배열된 투창이 있어 모양새가 다르다.
아라가야의 대표적인 유물은 뭐니뭐니 해도 5세기에 제조된 불꽃무늬(火焰文) 토기이다. 불꽃무늬는 동그라미 위에 길쭉한 이등변삼각형이 이어진 모습으로, 일반사람의 눈에는 타오르는 불꽃이라기보다 처마 끝에서 숙담으로 떨어지는 물방울로 보인다. 불꽃무늬 토기가 다량 출토된 지역은 함안과 그 주변지역인 창원, 마산, 의령, 진주의 일부지역이며, 멀리는 김천, 거창, 경주, 부산, 일본의 긴키(近畿)지역 등이다. 긴키지역 즉 일본의 옛 수도권지역에서 5세기 함안의 불꽃무늬 토기가 발견되고 있는 곳은 로쿠다이(六代) 유적, 후루(布留) 유적, 큐보지(久寶寺) 유적, 스즈노미야(鈖の宮) 유적 등이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학계에 보고된 불꽃무늬 토기는 약 150점이다. 이 가운데 함안지역에서 1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같은 지역에서의 토기의 출토양상으로 보아 지금의 함안과 그 주변지역인 창원, 마산, 의령, 진주 일부지역은 아라국 또는 안라국(安羅國, 아라국과 같은 이름임)의 영역으로, 그밖의 지역은 아라국과 교류했던 곳으로 볼 수 있다. 바다 건너 왜와는 진동(鎭東)이나 마산항(馬山港)을 통해 교류했다. 아라가야인의 유물과 유적은 북큐슈와 긴키지역을 이어주는 뱃길인 세토(瀨戶) 내해(內海)연안인 중국(中國, 주고쿠)와 사국(四國, 시고쿠)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아라가야식 토기와 산성(山城)이 발견되었고, 심지어는 가야신(伽耶神)을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신사(神社)까지 소재해 있다.
이처럼 함안 충의공원 발굴지의 대형 건물터와 창고지, 함안 장명리의 폐자기장 파편들 및 일본지역 중국과 사국 출토의 아라가야의 유물과 유적들을 견주어볼 때, 임나일본부는 아라가야의 중심인 함안과 일본의 중국 및 기내지역, 사국지역과의 사이에 문물을 교환하는 임시교역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한국이 4-6세기까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은 미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세계 주요 포털 교육백과사전 사이트 등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 2001년 보수우익 편향의 일본 역사교과서 채택부진이 세계 각 나라의 강력한 비난여론 때문이라고 판단한 일본정부는 새로운 전략으로 국제적인 지지를 얻어내려는 사전 홍보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것이 현재 한일관계의 실상이다.
5. 맺음말
가야라는 원말은 가라(加羅)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가라는 우리말에서 산자락과 들에 모여 사는 마을을 뜻하였는데, 이후로는 정치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ꡔ삼국지ꡕ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는 3세기경에 산재했던 12개의 가야국을 열거하고 있다. 구야국, 안야국, 반로국, 불사국 등이 가야인들이 사용했던 나라이름이었다.
가야는 원래 12개 소국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그중 큰 세력을 지닌 국가는 5, 6개국이었다. 나머지 소국들은 비교적 큰 규모의 이들 5, 6개의 국가를 중심으로 별반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우호적인 연관관계를 가진 몇 개의 세력권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들 세력권을 대표하는 5, 6개의 국가들이 6가야 설화와 직접 연관이 있었다.
가야 여러 나라 중에서도 맨 처음 두각을 나타낸 것은 낙동강 하구에 위치한 본가야였다.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있다. 이른바 ‘임나’라는 호칭이 님의 나라 곧 주국(主國), 왕국(王國)을 뜻하는 것이라면, 이는 김해의 본가야가 가야 여러 나라의 대표국이었을 때 불려진 이름으로 보아도 잘못이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이후인 4세기 전후에 고령의 대가야나 함안의 아라가야가 김해의 본가야를 대신하여 가야 여러 나라의 대표세력국으로 등장하게 됨에 따라, 이 임나의 칭호는 바로 대가야나 아라가야를 지칭하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하겠다.
가야의 국가체제로서의 관료기구와 신분제도는 김해 본가야의 경우 ꡔ삼국유사ꡕ 「가락국기」를 참조해 보면, 중앙관료기구가 매우 세분되어 있었다. 특히 구간의 옛 이름이 ‘소인배로서 촌스런 시골남자와 같은 칭호’여서, 이를 고친다는 것은 가야사회 내부에서의 지배신분계층의 확고한 형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ꡔ일본서기ꡕ 계체기와 흠명기에 언급되어 있는 가야의 신분으로는 한기와 하한기 그리고 상수위, 이수위 등이 있었다. 이것은 가야에 독특한 신분제도가 있었음과 가야 여러 나라 지배층에 계층의 분화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가야는 스스로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사제도도 갖추고 있었다. 부대의 편성은 일반부대의 경우 보병과 기병 그리고 특수부대로서는 궁병대와 가지극부장대 그리고 수군이 있었다. 이들 부대의 지휘는 환두대도를 지닌 신분계층인 왕이나 한기, 같은 계층인 상한기와 차한기 그리고 하한기 같은 지배신분층을 보기감이나 궁당감 또는 가지극당감, 수군감과 같은 계층의 지휘관을 장악하고 통솔하면서 이끌어 나갔으리라 보고 있다.
가야의 군사력은 1세기 무렵 철생산과 함께 철제무기를 만들면서 새로운 활력소로 등장하여 신라와 맞설 정도가 되었다. 또한 가야에서 무기로 생산되었던 대도(大刀)와 창, 창살, 활, 화살촉 등은 왜지에까지 전파되어 왜국의 공격용 무기개발에 기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5세기 이후 기마전술도 왜지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을 볼 때에, 가야의 무기 생산기술과 기마전술은 매우 발전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가야 여러 나라 형성의 원동력은 정치적 군사적 측면 이외에 사회의 하부조직인 경제적 측면에서 고찰해 볼 때, 가야의 산업으로 농업, 수산업, 제철업 등의 발달을 들 수 있다. 특히 제철업이 가야의 대표적인 산업이었다. 이와 같이 가야는 독자적인 정치제도와 군사제도 및 자주적인 신분제도를 갖추고 있었고, 이를 뒷받침할만한 산업의 발전과 문화역량을 지니고 있었으므로 삼국과 대등한 고대국가 수준의 국가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고대사는 지금까지 정설화 되어온 삼국시대가 아니라 가야국을 포함하여 사국시대를 상정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야의 문화로서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음악과 문학을 들 수 있다. 가야의 음악으로서 대표적인 악기는 역시 가야금이다. ꡔ삼국사기ꡕ 권32, 악지의 기록에서, 진흥왕이 우륵의 가야악을 계고와 법지, 만덕을 시켜 신라에 전수시킬 정도로 가야악의 수준이 높았음과 또 이 세 사람이 가야악을 다섯 곡으로 정리하여 신라음악으로 전존화 시킨 과정을 알 수 있다. 가야지역에서는 이러한 음악뿐 아니라 미술도 발달하였다. 1963년에 발견된 고령 고아동의 벽화고분은 천장 및 벽면에 청색, 녹색, 홍색, 갈색으로 연화문과 초화문을 그린 매우 귀중한 벽화이다.
가야의 문학은 「가락국기」의 처음 부분에서 적어도 가락의 백성들이 어떻게 천신맞이를 하였는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천신맞이를 할 때 부른 노래가 곧 구지가였다. 제천의식에서 구송된 신화는 무엇보다도 구전문학의 한 장르이다. 상고시대의 어느 한 때에 신화가 비롯되면서 우리 문학의 출발점을 이루는데 구지가가 기여하여, 민족문화의 창조적 원천으로서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인물로서는 유학이나 한학의 대가로서, 문장가로서 외교문서의 해독이나 작성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신라의 대문호 강수를 들 수 있다. 그는 임나가량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가야문학은 신라문학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가야 여러 나라들은 독자적인 문화를 지님과 더불어 자주적인 사상도 형성하고 있었다. 우선 가야사상의 일반개념으로서, 수로왕 신화에 보이는 태양숭배민족의 불계(祓禊)사상을 들 수 있다. 계욕일은 가야 여러 나라들의 정치적 종교적 의식과 행사를 전개하는 사상적 모체가 되었다. 청결을 통한 맑지 못한 것과 재액을 물리쳐 복을 추구하는 것은 가야인의 투명한 인생관과 종교관, 정치관 등의 기저를 이루는 사상이 되었다.
가야 여러 나라에 자주적인 사상이 형성되어 있었음은 도가와 관련된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도가와 관련된 기록은 ꡔ동국여지승람ꡕ에 보인다. 거등왕에게 치국의 도를 가르쳐준 참시선인이나 선인의 생활을 한 우륵과 같은 인물에 대한 기록을 통해, 가야 여러 나라에 도가사상이 전해져서 만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본가야에 도가사상이 있었음은 대성동 고분군과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철정(鐵鋌)을 통해서도 뒷받침될 수 있다.
이러한 가야의 도가사상은 계욕적인 의식이나 불교사상 그리고 덕치주의 사상이 공립(共立)하고 융화하는 바탕을 제시해 주기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야에 도가사상이 있음은 우리의 고유사상인 신도사상(神道思想)이나 선도사상(仙道思想) 그리고 샤머니즘이 바탕을 이루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술적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 무속신앙과 관련이 있는 구지가가 대표적인 신가(神歌)라는 점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우리 고유사상의 핵심은 청정한 본연의 신인(神人)으로 환원코자 하는 신인사상의 추구이다. 우리 민족은 천손의 후예로서 천신과 하나가 되어 자기완성을 이루는 가운데 오랜 기간 선남선녀로 살아가기를 희구하는 족속이었다. 이러한 신인사상의 추구가 가야 도가사상의 근본임을 가야사상의 고찰에서 얻을 수 있는 귀결점인 것이다.
이른바 4세기경에 설치되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는 가야가 아라가야 지역 즉 함안에 두었던 임시교역소였다. 후세에 일본인들은 ꡔ일본서기ꡕ에 보이는 임나일본부를 일본이 4-6세기까지 가야지방을 통치하기 위한 정치기구였다고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일본의 통설을 뒷받침해주는 유물이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이다. 신공황후의 출병과 임나일본부의 설치는 당대의 금석사료에 의해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하는 주장이다. 당대의 금석사료란, 왜가 신묘년(39)에 바다를 건너와 신라와 가야, 백제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고 하는 광개토왕비문 신묘년조와 칠지도 전면문과 후면문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황국사관의 핵심인 임나일본부설에 관한 일본측 통설의 핵심사항이다. 그러나 함안 충의공원 발굴지의 대형 건물터와 창고지, 함안 장명리의 폐자기장 파편들 및 일본지역 중국과 사국 출토의 아라가야의 유물과 유적들을 견주어볼 때, 임나일본부는 아라가야의 중심인 함안과 일본의 중국 및 기내지역, 사국지역과의 사이에 문물을 교환하는 임시교역소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가야는 삼국과 대등한 국가로서 사국시대를 열어 민족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왜지에도 진출하여 일본 고대국가사는 가야인에 의한 일본개척사라고 지칭할 만한 역사적 역할을 하였던 고대국가였다. 전기 가야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김해의 금관가야는 신라의 팽창정책에 밀려서 중심세력이 왜지로 건너가고 잦은 지진으로 고김해만이 폐항되어 이 지역의 인구가 타지역으로 흩어짐으로써 약세를 면치 못하다가, 6세기초 법흥왕 때 신라에 병합되었다.(532)
후기 가야의 주도권을 이어받은 고령의 대가야와 함안의 아라가야도 고대해양국가 특유의 개방성과 다양성에 기인한 이해관계 중심의 영역국가 유지로 인한 통합의 실패와 국력의 분산, 여기에다가 신라의 분열정책을 극복하지 못하면서 신라 진흥왕 때 정복되었다.(562) 이로써 가야는 490년에서 520여 년의 긴 역사를 누린 끝에 멸망하고 말았다.
첫댓글 윤석효교수님 오랜만에 귀한 논문 보게 되었습니다. 24일 가야 역사 탐방 때 좋은 자료로 특강을 해주실 것을 생각하니 너무 좋습니다. 그날 만나 뵙고 반가운 인사 나누기로 합시다.
그런데 원문에는 각주가 있었는데 옮겨오는 동안에 각주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역사탐방 자료집에는 그대로 다 있습니다.
윤석효교수님. 깊은 감사드립니다.
가야제국 역사탐방을 앞두고 꼼꼼히 정독했습니다. 가야사가 한눈에 확 들어오는 글입니다. 특히 가야인들이 음악과 문학에 뛰어났다는 대목이 흥미롭습니다. 또한 청소년들이 궁금해하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해 확실히 공부했습니다. 이번 역탐길에서 많은 가르침을 청합니다.
이곳에 오니 정말 좋은자료가 많아 공부를 열심히 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