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민중의 대변인으로 노동인권의 파수꾼으로
낮은 곳으로의 연대를 실천하신 호죽 정진동 목사님의 뜻을 기리며!!!
12월의 추운날씨에도 불구하고 200여명이 넘은 많은 추모객들이 모인가운데, 지난 9일(화),오후 6시30분부터 민주노총 충북지역본부 대강당(청주)에서 <민중의 벗 호죽 정진동 목사 1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1부(사전마당), 2부(본마당), 3부(연대마당) 순서로 진행된 추모제는 참석자들 모두 충북지역운동의 구심이자 큰 어른이셨던 정진동 목사님을 기리며 엄숙하고, 진지하게 진행되었다.
'짐승의 바다를 사람사는 세상으로 바꿔가자!'
추모제 추진위원을 대표해 인사말씀을 해주신 유초하 충북대교수는 "목사님께서는 언제나 버티고 싸우고 이기셨습니다."라고 하면서 "저들은 민중을 노동자를 민족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사람사는 세상을 짐승의 바다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명박대통령은 2메가바이트가 아니고 2미리바이트입니다. 이런 자에게 우리가 당하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무뇌아라고 하지만 기만의 뇌를 가진 자고, 가슴이 없는 무심아라고 봐야 합니다. 이들은 이쁘게 보기좋게 치장한 신자유주의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화장한 야수, 화장속에 숨은 진실을 찾아내야 합니다.짐승의 바다를 사람사는 세상으로 바꿔야겠습니다. 교육,의료,토지,주택,물,불 모든 공적인 것을 노동자 민중에게 돌려줘야 합니다."라며 지금 이명박정권을 규탄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는 지금 세상돌아가는 꼴이 하도 험해서 편하게 계시지 못할 것입니다."라며 "우리 어깨걸고 정진동목사님이 다 못하신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 모든 것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고 호소했다.
'아직 내게는 통일을 위해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
다음순서로 목사님 약력소개를 해주신 김재수 우진교통 대표는 "목사님 약력을 정리하다보니 목사님 살아오신 길이 이곳 충북지역, 청주지역의 노동운동, 민중운동 역사 그 자체로구나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라고 하며 "정진동 목사님의 자리가 충북지역에서 얼마나 크셨던가"라며 회고했다. 이어서 "또한 목사님께서는 70~80년대에는 노동운동, 90년대 전선운동, 2000년대 통일운동으로 운동의 지평을 넓혀나가셨다."고 소개하면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아직 내게는 통일을 위해 할 일이 남아있다."는 말씀을 전해주었다.
목사님은 1972년 청주에 도시산업선교회 실무목사로 취임한 이후 돌아가시기 전까지 800여 건이 넘는 노동자, 도시빈민들의 인권문제를 해결하고, 30여 차례의 연행과 옥고를 치루셨다.
'노동자보다 노동자다웠던 목사님!'
추모사를 하신 이규재 범민련 남측본부 의장은 "목사님 돌아가신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처음 목사님 만났던게 1988년, 20년전이지만 이 지역분들에 비하면 짧은 인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인상과 많은 정이 가는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노동자보다 더 노동자다웠고, 노동자보다 노동자철학을 노동자의 이상을 몸소 실천하셨던 분이어서 저의 운동의 길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셨다. 그 분의 불꽃같은 인생, 그러나 끝까지 초지일관된 삶을 살아오신 분도 많지 않다. 그 분의 지향이 평등세상, 사회, 모두가 더불어 사는 세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우리들의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들이 책무를 더 열심히해서 민중해방, 조국의 자주적통일을 이루어서 하늘에 계신 목사님과 함께 다같이 즐거워합시다."라고 추모사를 마감했다.
'목사님을 보면서 느낀 것은 예수님도 저렇게 사셨지였다.'
다음 추모사를 해주신 노영우 목사는 "목사님과 처음 인연은 73년이었다. 그 때 나는 신학대학 2학년 학생이었는데, 허름한 차림, 딱해보이던 외모와 달리 강한인상이 느껴졌고, 젊은 청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놓으셨다."며 목사님에 대한 첫 인상을 이야기했다. 이어서 "목사님을 보면서 제가 느낀것은 예수님도 저렇게 사셨지!라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무슨 율법이 필요하고, 격식이 필요했나, 늘 현장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함께 계셨다"라고 목사님의 생전의 모습을 기억했다. 이어서 "목사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 우리를 호되게 야간치시고 우리를 현장으로 내모셨을 것"이라며 "목사님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현장으로 들어갑시다. 그러면 우리 목사님께서 정말 기뻐하실거라"며 말씀을 마쳤다.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마지막 추모사를 하신 변상기 도시산업선교회 전도사는 "목사님을 처음 뵌게 어느 가정집이었는데, 거기가 바로 목사님 집이고, 교회였으며 노동자들의 안신처였습니다."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처음 목사님을 만난 그날을 회고하셨다. "목사님은 늘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왜 그리도 걱정을 많이 하시나 의심도 했었는데, 그건 노동자들과 빈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걱정이셨고, 목사님은 믿음과 사랑으로 권력과 자본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들을 손잡고 위로 해주면서 늘 그들에게 힘을 북돋아주셨습니다." 그리도 이어서 "저는 목사님이 눈물 흘히시는 것을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혼자 속으로 우셨습니다. 그러시던 목사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은데...'하고 우는 모습을 처음 뵙습니다. 그런 목사님을 뒤로하고 우리는 추모제에 모여있습니다. 우리가 목사님의 모습을 천분의 일, 백분의 일이라도 따라 배워서 목사님을 기쁘게 해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마치셨다.
이어서 '추모노래', 손녀딸인 정민희양의 '편지글 낭독', 민주노총충북본부와 청주통일청년회의 '결의발언', '추모의 춤',
'헌화', '유가족인사', '특별제안' 순서로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특히, 특별제안으로 <민중의 벗 호죽 정진동 목사 추모사업회>구성이 제안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노동자자주관리기업인 우진교통 김재수 대표이사가 추모사업회 구성을 위한 초기모임 소집책임자로 선정되고, 빠른 시일내에 초기모임을 가지기로 결정하였다.
추모제가 끝나고 연대의 마당으로 뒷풀이가 진행되었다. 유가족과 교회교인들께서 여러가지 음식과 술을 준비해오셨다.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10개월'이 문제라고 모두가 개탄하는 지금, 목사님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목사님께서 남기신 말씀처럼 아직 할 일이 많으신데 그렇게 우리들 곁을 떠나신 것을 모두 안타까워 하며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목사님을 대신하여 다함께 열심히 투쟁할 것을 결의하는 뜻깊은 자리였다.
다음날(10일)에는 광주 5.18민족민주열사 묘역에서 <민중의 벗 호죽 정진동 목사 추모예배>가 열렸다.
정진동
(1933년~2007년 당시 75세)
광주 망월동 민족민주열사 묘역에 안장
1933년 충북 청원군 옥산면 호죽 출생
1953년 고등 성경학교 졸업
1958년 대한신학졸업 (현 대신대학)
1958년 호죽 헌신고등공민학교 교장
1960년 단국대학 문과대학 졸업
1961년 장로회 신학대학 졸업
1963년 덕산 장로교 목사
1972년 청주 도시산업선교 실무목사로 취임
1980년 노동교회 당회장
1991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결성 준비위원회 준비위원
1992년 민주주의 민족통일 충북연합 상임의장
1994년 충북 역사정의 실천협의회 회장
1995년 충북지역 사회민주단체연대회의 상임의장
1999년 민중의 기본권 보장과 양심수 석방을 위한 충북공동대책위 상임대표
2000년 6.15 공동선언 실천연대 공동대표
2001년 충북 민중연대(준) 상임대표
2002년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 공동대표
2002년 충북평화통일연대 공동대표
2003년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 고문
2005년 뇌경색으로 입원. 투병
2005년 노동교회 당회장 사임
2007년 12월 10일 17시 25분 영면
선생의 삶과 죽음
800여건이 넘는 노동자, 도시빈민들의 인권문제 해결.
30여차례의 연행과 옥고
저 서
<노동현장에 보내는 편지>, <저 평등의 땅에>, <민중의 자유는 멀고 험하다.>
<민의 참여를 위한 교회의 실천>, <격동의 30년>, <끌 수 없는 정의에 불꽃>
<나는 이 길 을 가야한다.>
첫댓글 어렸을때 몇번 뵈었는데 ...
좋은글 잘 읽었다만 잘은모르겠다 암튼 고생하고 조은글 자주 올려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