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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콤퓨터나 노트북이 있으시면 검색하셔서 보시기
바랍니다. 스마트폰으로 보시게 되면 가운데 정열한 글도
흐트러지며 음악도 들을 수가 없고 인물 사진의
선명성 확인이나 아름다운 풍경의 웅장함도
보시는 느낌의 감도(感度)가 떨어집니다
경남 함안의 악양루,무진정,
가야고분,박물관을 다녀와서!
2017년8월26일 토요일 인터넷 카페 여행동호회에서
8월의 여행지로 정한 경상남도 함안군의 악양루, 무진정, 아라가야, 박물관을 가기
위해 새벅 04:40분에 기상하여 우리의 전통주(傳通酒) 막걸리와 안주 여행하기 편한
산행복장으로 여장(旅裝)을 갖추고 05:20분에 집에서 출발 버스로 전철로 집결지
종로3가역에 도착하여 12번 출구로 나가니 자상한 맘으로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석운님뿐이여서 20여분을 기다리니 회원님들도 차도 도착하여 07:10분에 사당동
으로 이동 대기중인 회원들이 동승 07;40분에 출발하여 가다가 죽전에서 대기중인
회원들이 탑승을 하니 전원합승이라 달리는 경부고속도로는 정체구간이 없는 주행
길이었고 연일 궂은 날씨도 쾌청하여 찬 안의 마음들도 상쾌한 기분들인데 난 여행방
나들이는 초행이라서 처음 대하는 낯설음에 서먹함도 있었고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면서~차안에서 통성명을 하며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뤄지면서 서로의 마음들을
공유하게되고 세상사는 얘기를 나누다보니 차는 어느덧 둑방길목의 주차장에 도착
백일홍 맨드라미가 활짝핀 화원같은 둑방길을 거닐면서 사진촬영들을 한 뒤 점심식사
장소로 이동 산 아래 강이 흘러 풍경이 아름다운 강언덕 위에 우뚝선 악양루에서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다가 한국의 전통정원인 원지원도(圓池圓島)로 꾸며진 무진정
으로 이동 원지에는 부평초(浮蓱草)가 촘촘히 떠있고 큰 나무가 있는 원도에는 다리가
놓여져 고상하고 품위있는 운치감(韻致感)을 더해주는 유서깊은 전통정원과 주변을
관람하고는 가야고분과 함안박물관으로 이동 무소불위의 왕권시대에 축조된 거대한
고분군을 차례로 돌아 내려오며 사진촬영을 하면서 박물관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는
귀가 길의 장도(長途)에 올라 막힘없는 경부고속도로로 세 곳의 휴게소를 거쳐 사당역
에 도착하니 21:40분 정해진 기간동안 준비에 만전을 기하여 오늘 처음 함안관광행사를
주관한 여행방장 강북짱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가면서 찍은 차창 밖의 풍경
▼마지막 휴게소 뒤의 풍경
▼함안 둑방길 풍경
▼ 악양루로 가는 길 옆에 세워진 처녀뱃사공 노래비
▼오찬 장소인 악양루
악양루(岳陽樓)
경상남도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개치마을에 있는 조선 시대 누각.
‘악양’은 중국 후베이 성에 있는 한 현(縣)의 명칭으로, 악양루(岳陽樓),
동정호(洞庭湖), 군산(君山) 등 여러 이름난 유적이 있는 곳이다. 중국의
악양루는 북송 때 범중엄(范仲淹)[989~1052]의 「악양루기(岳陽樓記)」
를 비롯해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두보(杜甫)[712~770]나
이백(李白)[701~762]의 시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경상남도 하동군의 악양은 바로 중국 악양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으며, 지명
의 유래에서부터 중국의 악양을 모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동군 악양면의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악양루와 동정호가 있다. 나당 연합군의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592~667]이 중국의 악양과 같다고 하여 ‘악양’이라 이름
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후 하동군 악양의 여러 유적은 우리나라 문인들의
한문학 작품 속에 널리 애용되었으며, 악양루는 그 대표적 명승 중의 하나이다.
하동군 하동읍에서 하동포구 80리 벚꽃길을 따라 화개 쪽으로 국도 19
호선을 타고 가다 보면 악양삼거리가 나오는데, 악양삼거리쯤에서 오른쪽
으로 가면 악양면 미점리의 개치마을이 나온다. 악양루는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개치마을 입구의 대로변에 위치한다.
악양루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조선 시대 전 시기에 걸쳐 악양루와
관련된 유학자들의 한시가 전하고 있다. 변천 역사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며, 현전하는 건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1936년 손영인
(孫永仁), 이태성(李台成), 박준구(朴準球) 등 하동 지역 인사들에 의해 중건
하자는 발의가 있었고, 이어 1937년 9월 악양루의 옛 터인
아미산 아래 언덕에 준공하였다.
이후 누대가 너무 높은 곳에 돌출되어 있어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자, 여론을
따라 1947년 현재 위치인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도로변으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이건한 자리 또한 인가가 멀고 관리할 사람이 없어 유랑배들의 기식
처로 이용되었으며, 건물이 파괴될 우려가 많았다. 1969년 다시 이건 논의가
제기되었으나 하동군 악양면 미점리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층 누각(樓閣)의 목조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 기와지붕
으로 되어 있다. 겹처마에 막새기와로 덮여 있으며, 연등천장(椽燈天障)을
하고 있다. 지붕의 네 귀퉁이에 용머리 장식을 하였으며, 주심포(柱心包)
기둥으로 되어 있다. 누각을 중심으로 사방에 담장이 둘러져 있으며, 악양루
현판은 정면과 오른쪽 측면 두 곳에 걸려 있다. 마루는 장마루이다.
2011년 현재 악양루의 관리자는 악양루보존위원회[회장 장봉무]로 되어 있다
. 악양루에 올라 조망해 보면 섬진강과 악양 들판이 내려다보인다. 전경(前景)
이 아름다운 곳이지만, 국도 19호선의 대로변에 위치하고 있어 차량 이동으로
인한 지반의 흔들림이 심하고 먼지가 많이 쌓여 있다. 게다가 하동군의 관리
소홀로 인해 인근의 쓰레기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으며, 특히 노숙자의 숙식처
로 이용되는 등 방치되어 있다. 게다가 명확한 이정표와 주차할 만한 공간이
없어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지 않고 있다.
악양루는 하동 악양을 대표할 만한 명승지로서, 악양 지역을 지나는
조선조 문인들은 악양루 속에 남겨진 유구한 역사와 유적들을 시로 읊어
내었다. 특히 하동군 악양의 동정호, 한산사(寒山寺) 등과 함께 하동
청학동 유람의 주요 코스로 애용되었던 곳으로, 특별 관리가
필요한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하겠다.
『하동누정재지』(하동문화원, 1997)
『하동의 문화유적 Ⅰ』(하동문화원, 1997)
『악양면지』(악양면지편찬위원회, 2004)강정화 외,
『지리산 유산시 선집, 청학동』(이회, 2010)경상대학교
한적실 문천각 DB자료실(http://nmh.gsnu.ac.kr/index.jsp)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경남 함안의 무진정(無盡亭)
경상남도 함안군 함안면 괴산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정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중종 때
사헌부집의와 춘추관편수관을 역임하였던 조삼(趙參)이 기거하던 곳이다.
함안 군청소재지인 가야읍에서 서쪽으로 3㎞ 떨어진 곳에 있으며, 1547년(명종 2)
후손들이 그를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세워 그의 호를 따서 무진정이라고 하였다.
앞뒤의 퇴를 길게 빼고 중앙 한칸을 온돌방으로 꾸며놓은 현재의 건물은 1929년에
중건한 것인데, 조선 초기의 정자형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아무런 장식 없이
단순하고 소박하게 꾸며져 있다. ‘無盡亭’이라고 쓴 편액과
정기(亭記)는 주세붕(周世鵬)의 글씨로 추정된다.
아라가야를 찾아서
가야를 이야기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아라가야이다.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아라’라는 예쁜 이름의 고향이 바로 함안이다. 6개
나라의 연맹체로 이루어졌으며 우수한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하나로 통일
되지 못하여 나중에 신라와 백제에 병합되게 된다는 것이 가야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
, 금관가야, 비화가야 등 일곱 개의 나라가 나오는데, 가야토기 등의 발굴을 통하여
살펴볼 때 이보다 더 많은 나라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최근의 주장이다. 김해
를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가 가야의 성립기라면, 아라가야는 4세기경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가야읍 함안군청
뒤편으로 아라가야의 고분들이 모여 있다.
정식 명칭은 이곳의 지명을 딴 ‘항리 말산리 고분군’으로 100여 기에 달하는
고분들이 함께 모여 봉긋하게 솟은 그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굽을 가진 그릇에
불꽃문양이 새겨진 토기가 발견됨으로써 독자적인 문화를 이루고 있음이 확인
되었다. 고분군과 이웃해 있는 함안박물관은 함께 들러야 할 수코스이다. 입구의
불꽃문양이 이곳이 아라가야의 박물관임을 알리고 있다. 안에는 복제품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발굴된 수레바퀴 모양 토기와 불꽃문양 토기를 전시하고 있으며
, 마갑총에서 발굴된 말갑옷을 복원해 놓고 있어 아라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를 살펴 볼 수 있다.
출처: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마로니에북스)
함안가야리고분군(咸安伽倻里古墳群)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일대에 있는 가야시대의 고분군.
남강 지류인 덕천(德川) 서편에 남북으로 전개되는 구릉 위에 30∼50m 거리를
두고 현재 외형상으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3기가 있다. 무덤의 외부 모습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무덤 밑지름 20m 내외, 높이 5m 내외의 비교적
큰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덤은 일제강점기에 대부분 도굴되었고, 지금까지
학술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규모와 성격은 밝혀지지 않았다.
사적 제84호로 지정된 함안 도항리 고분군과 제85호로 지정된 함안 말산리
고분군에서 조사된 내용과 같이 무덤 내부의 구조가 구덩이식
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으로 판단된다.
이 고분군이 위치하는 함안지방은 안야(安耶)·아나(阿那)·안라(安羅) 등으로도
불리는 아라가야(阿羅加耶: 阿羅國)의 본거지로 비정되고 있는 곳이다. 안야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아라가야로 기록되기 이전에 함안지역에 웅거하던
변한(弁韓) 12국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으나, 5세기에 들어서면서 안라 또는
아라로 바뀌게 된다.흔히 가야제국(加耶諸國) 가운데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던
것은 김해의 구야국(狗倻國: 金官加耶)고령의 대가야(大加耶)로 알려져 있으나
함안의 아라가야도 큰 세력을 갖추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라가야는 김해의
구야국, 고령의 대가야와 함께 가야의 중심세력으로 존재하였고, 국력이 가장
강력하였을 때가 5세기로 여겨진다. 이 고분군은 그때의
지배계급의 무덤으로 판단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여행』(이영식, 지식산업사, 2009)
『가야와 그 전환기의 고분문화』(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2007)
『국립진주박물관』(국립진주박물관 편, 1984)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무진정 풍경
▼ 가야고분군의 위용(威容)
▼함안 박물관 주변 풍경
처녀(處女) 뱃사공(1958년)
윤부길 작사
한복남 작곡
황정자 노래
낙동강 강바람에 치마폭을 스치면
군인간 오라버니 소식이 오네
큰애기 사공이면 누가 뭐래나
늙으신 부모님을 내가 모시고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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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강바람에 앙가슴을 헤치면
고요한 처녀가슴 물결이 이네
오라비 제대하면 시집 보내마
어머님 그말씀에 수줍어 질때
에헤야 데헤야 노를 저어라
삿대를 저어라.
처녀 뱃사공은 실제 인물이며
박말순 <당시 23세 >, 정숙 <당시 18세 > 두 처녀가
군에 입대후 소식이 끊긴 오빠 박기중 <6.25 때 전사>을 대신해서
교대로 나룻배를 저어 길손을 건네주며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
때마침 유랑극단을 이끌던 윤부길님이 <윤항기.복희의 부친>
6.25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상경하며 함안 가야에서 공연을
마치고 대산면으로 가던중에 날이 저물어 악양에서 하룻밤을 유하든
중에 처녀 뱃사공에 대한 사연을 듣고 작사를 한 노래가사 였다고 한다.
그 후 서울로 올라온 유랑 극단은 페허속에 자리를 잡느라
여념이 없다가 1959 년도에 유명하신 한복남 님이 작곡을
하시고 당시에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최고에 인기가수 이신
황정자님이 노래를 불러 대힛트한 노래였답니다.
당시에 가요 콩쿠르 대회라면 처녀 뱃사공 노래를 선택한
지원자가 많았으며, 일등은 언제나 처녀 뱃사공을 부른 사람
중에서 나왔기 때문에 너도 나도 이 노래를 선호했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있었답니다.
지금은 이노래를 작사한 분이나 작곡한 분.노래를 부른 가수님
이나 이세상 분이 아니시고, 이노래의 주인공인 처녀 뱃사공
큰언니는 부산에 사시다가 10 년 전에 동생분도 마산에 사시
다가 7 년 전에 돌아가셨고 노래만 남아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 라는 말을 실감케 한답니다.
또한 처녀 뱃사공이 길손을 건네주던 악양나루는
1997 년도에 악양대교 다리가 건립되어 지금은 모터보트만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어 그 옛날 치마폭을 흩날리며 노를 젓던
아릿다운 처녀 뱃사공의 그 자취는 간데 없고
강바람만 무심한 세월을 말해 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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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27 작성자 청해명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