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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검정고시총동문회 초대회장이시며 대한변호사협회 재무이사를 역임하시고,
특검때마다 후보에 오르는 등 저명하시며,
현재는 법무법인 화우에서 변호사로 재직중이신
박영립선배님의 검정고시 수기를 올립니다.
본 내용은 검정고시수기집에 내용을 전제한 것입니다.
주요동문들의 수기를 계속 올릴예정임.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박영립 진정 이 사회와 모든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펜을 듭니다. 그러나 막상 펜을 들고 보니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역겨움이나 분노를 자아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또한 이제 그만 묻어두고 싶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지난날들, 그러나 오늘의 저를 있게 해준 소중한 날들을 반추(反芻)하려 하니 만감이 교차함을 개인적이고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데 부족한 문장 실력으로 개념화하고 문장화하려 하니 어색한 마음이 앞섭니다. 운이 좋았고 이 사회와 수많은 분들께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으로 조그만 결실을 맺었다 하여 이와 같은 글을 쓴다는 것이 어쩐지 건방진 생각 같고 정말 어려운 처치에서 공부하시는 많은 분들께 송구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이글을 쓰고 읽으면서 우리의 지난날을 잠깐 뒤돌아보고 반성과 분발의 계기로 삼아 밝아오는 내일을 준비하고 설계하고 싶은 충동에서 감히 펜을 들게 되었으니 넓은 이해와 관용을 바랍니다. 서울의 하늘 밑 전남 담양의 조그만 산골 동네에서 태어나 중학교 입학시험에 합격은 했으나 진학을 포기하고 고아주에 있는 조그만 사무실에서 사환으로 객지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해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이듬해에 대바구니 장수 아주머니들을 따라 무작정 상경했습니다. 밤새워 달려온 완행열차에서 내린 새벽의 노량진역은 하얗게 서리가 내려있었고, 2월 말의 찬바람이 겁먹은 15살 촌놈을 더욱 촌놈을 더욱 춥게 만들었습니다. 그 길로 앞뒤도 없는 전차에 몸을 싣고 청량리에서 일하고 있는 친척을 찾아갔습니다. ꡒ당장 오늘 저녁차로 내려가거라. 서울이 어떤 덴데…….ꡓ 그분의 첫마디였습니다. 나는 무언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막연하나마 화려한 설계도 해보았고 금의환향도 꿈꾸어보았던 서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서울이었고 친척 역시 시골 소문과는 달랐습니다. ꡒ죽어도 못 내려갑니다. 죽어도…….ꡓ 무슨 일이 어찌 되든 내려갈 수만은 없었습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겨우 올라온 서울인데, 내려간다는 것은 상상조차 학 수 없었습니다. 그 친척은 내가 도저히 내려갈 것 같지 않았던지 마지못해 하면서 서울역 부근 누군가를 찾아가보라고 하였습니다. 그 친척이 가르쳐준 대로 한나절 걸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은 서울역 부근에 있는 여관이었습니다. 첫 직장은 여관ꡐ조바ꡑ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야 그곳이 숭남동이라기보다는 ꡐ양동ꡑ으로 더욱 잘 알려져 있었고 여관이란 곳이 나그네의 숙소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둠의 자식들」의 ꡐ카수 영애ꡑ등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럭저럭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시골에서 수학여행 온 중학생 단체손님을 받았습니다. 여관 측에는 학생들의 점심을 배달해주기로 하고 그들은 창경원을 구경하러 떠났습니다. 얼마 후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저는 무척이나 전화라는 것을 받아보고 싶던 터라, 때는 이때다 싶어 얼른 뛰어가 받았습니다. ꡒ열두시까지 ꡐ근천문ꡑ앞으로 점심을 배달해 달라ꡓ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분명 그렇게 들들 것 같았는데 몇 통의 전화가 다시 오고, 두시가 훨씬 넘어서 점심이 배달된 후에야 지는 비로소 약속 장소가 ꡐ근천문ꡑ이 아니고 ꡐ근정전ꡑ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좌우간 그 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여관 주인과 수학여행 인솔자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고, 앞으로 또 꾸중들을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놈의 ꡐ근정전ꡑ인가가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무엇 이길래.……. 러닝셔츠와 슬리퍼 차림으로 여관을 아무 말도 없이 뛰쳐나왔습니다. 어린 지의 판단으로는 그것이 최선인 듯싶었습니다. 여관에서는 월급이 없었기 때문에 제가 손에 든 것이라고는 손님들이 준 5얼, 10원의 팁을 틈틈이 널어둔 진흙 저금통뿐이었습니다. 우선 급한 김에 나오긴 했으나 그 꼴로는 아무데도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 저금통을 깼습니다. 600원 정도 들어 있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 들러 남방셔츠와 운동화를 산후 청량리행 전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지난번 찾아갔을 때 내려가라던 일이 생각나 그대로 돌아서서 노량진 대바구니장수 아주머니들 게로 향하였습니다. 그곳에도 저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미 다른 곳으로 장사를 떠나버린 후였습니다. 이제는 갈 곳도 없었습니다. 이 넓은 서울 땅에서 철저하게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거리에는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습니다. 저의 발걸음은 서울역 앞 지금의 ꡐ대우빌딩ꡑ, ꡐ남대문 교회ꡑ등이 자리 잡고 있는 잔디밭 위에 멈췄습니다.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들어갈까 하는 생각도 해왔으나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6월이었지만 밤이슬 때문에 잘 수가 없어 신문을 주워서 깔고 덮고 잤습니다. 자다가 추워서 움직이면 나올 것 같아 돌아다니다가 파출소 온기가 있는 연탄재를 안고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날은 일자리를 구한답시고 남대문 시장, 서울역 부근 일대를 두리번거려 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후부터는 비가 내리기 시작해 어느 건물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발밑에 굴러다니는 신문쪼가리가 보였습니다. 무심코 던진 시선은 ꡐ직업소개ꡑ라는 네 글자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신문을 집어 들고 쏟지는 비도 아랑곳없이 공중전화를 창아 신문 광고란 남 직업소개에 전화를 했습니다. 서울은 참으로 자비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제게 서울의 ꡐ직업소개소ꡑ라는 곳은 자고 먹을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 남산의 위에 올라가서 서울 시내를 바라볼 때는 셀 수도 없이 엄청난 건물과 사람들 중에 나 하나 잘 곳, 아는 사람 하나 없는가 하고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는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날 저녁은 무작정 찾아든 분식센터에서 대충 지내고 아침 일찍 전화로 가르쳐준 곳을 묻고 물어 찾아갔습니다. 세운상가 부근에 있는 직업소개소에서는 소개비 천원을 요구하였으나 제게는 100원 정도밖에 업에 월급을 타서 갚겠다는 눈물로 하소연하여 종로 3가 단성사 부근의 음식점에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나중에 이곳도ꡐ종삼ꡑ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라는 것을 알았으나 일자리를 구해준 직업소개소에 고맙다는 인사도 여러 차례 했고 그들도 제가 있는 곳으로 잊지 않고 음식을 주문해주었습니다. 길은 약간 멀었으나 정성껏 배달을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돈은 항상 주지 않고 주인에게 가서 애기하면 도니다고 하였습니다. 월급날에 가서야 직업소개비 외상 900원보다 조금 많던 지위 월급에서 그들이 먹던 밥값이 충당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럭저럭 3개월 정도 흘렀을 무렵, 우연히 고향의 초등하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양복점에 다니던 그 친구가 동대문 시장에 심부름으로 전차를 타고 가다가 길을 건너던 저를 알아보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달려왔던 것입니다, 기술을 배우고 있다는 그 친구 얘기를 듣고는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잘 곳도 먹을 곳도 없을 대는 가릴 것이 있을 수 없었으나 지도 이제는 서울에 와서 어언 반년이 지나고 보니 막연하나마 앞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구 친구와 같은 양복점에 있게 되었고 때까지 여관에서나 음식점에서 항상ꡐ꼬마ꡑ로나 불리던 저는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양복점에서 보낸 그해 겨울은 제게는 유난히도 추웠습니다. 양복점 공장 한 편에 거처를 마련했으나 춥고 배가 고팠습니다. 양복점에서 받은 돈으로는 쌀을 사고 소금과 막간장을 조금사고 나면 없었습니다. 감기에 약을 사먹을 만큼의 여유도, 돈도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거의 매일같이 1년이나 계속된 감기가 축농증으로 되어서 지금도 코가 완전하지가 못한 형편입니다. 이 당시에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월급 무렵에나 간혹 먹는 콩나물과 어쩌다 얻어 먹어보는 ꡐ샘표간장ꡑ이었습니다. 빈 병을 가지고 가서 조금씩 사먹는 막간장에 비하면ꡐ샘표간장ꡑ은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기술 정도에 따라 월급이 달랐으므로 내일을 생각할 수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기술자 선생님들은 지신들을 거들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을 강요하다시피 가르치나 그 이상은 잘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다 가고 없는 밤을 꼬박 새워 조금씩 보고 들은 것을 익히면서 이른바ꡐ기술자 곤조ꡑ(?)가 어떠한 것인가를 차츰 깨달을 무렵 바지를 간신히 만들 수 있었습니다. 양복점에 들어온 지 약 6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습니다. 이제는 양복점 공장 자취생황도 이골이 나 있었고 월급도 저축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차츰 안정이 되면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님과 동생들, 우리 식구가 서울의 한구석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당시 17살이던 저는 9급(당시 5급) 공무원 월급 수준의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수입을 올라 적도 많았습니다. 양복점 주인은 기능올림픽에 나갈 준비를 위해 웃저고리 등의 기술을 배우도록 권유했으나 기술 배우는 동안 다시 수입이 중어들 것을 염려하여 망설이고 있을 때 기성복이라는 거센 유행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었습니다. 또한 양복점 기술자는 하루 일의 양에 따라 수입이 정해지므로 나이가 들수록 수입이 오로지 않고 오히려 줄어드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교복 입은 아이들에 대한 부러움이, 사회와 부모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점점 커가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양복점을 그만 두어버렸습니다. 막연한 계획은 막연한 것으로 끝나버리는 것인지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할 곳을 찾아보았으나 헛수고로 끝나버렸습니다. 이리하여 정해진 일자리 없이 약 반년 동안은 노동판․버스승객 계수원․가축병원․전선회사 임시 직공․신문보급소 등을 닥치는 대로 전전하였습니다. 가축병원에 있을 때는 애완용 개들이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고급우로 먹는 보았습니다. 이제는 공부고 뭐고 양복점 외에 일정한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구로동 부근의 공장지대 일대를 하루에도 몇 바퀴씩 돌며 기웃거렸으나 어쩌다가 모집공고가 있으면 자격은 대부분이 중졸․고졸 이상이었습니다. 거짓으로 이력서를 꾸며 제출하기도 해보았으나 막상 졸업증명서를 요구하는 데는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게는 이 사회가 중요시하는 곳은 졸업장이지 결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며 시렁ㅂ자의 생활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던 중에 어머님께서 일을 거들어주신 댁에서 이불솜을 파는 동대문시장 점원 자리를 소개해주었습니다. 이름과 나이, 고향 등을 묻고 학력을 물었습니다. 중학교 중퇴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런저런 얘기를 더 하고 나서 신원증서와 주민등록등본을 갖추어 내일 아침 9시까지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런 절차 없이 떠돌아다녔던 저는ꡐ신원보증서ꡑ란 대서소에 가서 양식을 사다가 간단하게 적어 내는 것인 줄만 알고 이제는 취직이 되나 싶어 그 길로 대서소에 물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제 주위엔 재산세 얼마를 내면서 저의 신원을 보증해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쉽게 풀리나 했더니 역시……. 다음날 저의 사정을 말씀드리고 돌아서려니 앞이 막막하고 공연한 분노가 일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러한 업종에서는 하루에 금전을 꽤 다루기 때문에 보통 필요한 서류인데도 그것을 모른 저는 ꡒ아저씨, 지의 고향이ооо이기에 신원보증서가 필요한 겁니까? 그렇다면 어린 저의 마음에 커다란 못이 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맥없이 돌아설 때였습니다. ꡒ어이, 여보게.ꡓ 뒤돌아보니 주인아저씨께서 손짓을 하셨습니다. ꡒ잘 할 수 있겠나?ꡓ ꡒ네, 장담은 못하나 열심히 하겠습니다.ꡓ 그날로 점원이 되었습니다. 그곳 생활을 익히면서 성실과 신용이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자봉이며, 똑같은 크기의 같은 업종인 점포에서도 세금 등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보고 무엇을 알아 야지만이 자기의 정당한 이익을 보호받을 수 있다는 절실히 느꼈습니다. 사람들은 공동생활을 하면서 서로를 오랫동안 사귀어 평가하기도 하나 대부분은 각자가 가진 외형적인 어떤 기준으로 먼저 선입견을 가진 후에 대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동안 초등하교 졸업 학력으로 얼마나 많은 벽에 부딪쳐왔던가……. 저도 남들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남보다 나은 생활이 아닌 지금의 위치보다는 낫게 살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 경리학원 애길 듣고 어떻게 할 줄 몰라 하던 치에 ꡐ검정고시학원ꡑ광고를 보았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교복 ꡐ해낼 수 있을까ꡑ하는 의구심도 있었으나 지금 아니면 영영 할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얼마를 생각한 끝에 어머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ꡒ9개월이면 됩니다. 제게 9개월만 주십시오. 중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하늘이라도 훨훨 날 것 같습니다. 주인아저씨께도 말씀을 드렸더니 너무나 고맙게도 오전 시간을 할애 해주셨습니다. 제 나이 스무 살, 초등하교를 졸업한 지 8년, 초등학교 동창들이 대학교 2학년, 지금은 군에 가 있는 남동생이 중학교 2학년 때인 72년 9월 6일, 종로 2가 부근에 잇는 중학교과정 검정고시학원에 나갔습니다. 겸연쩍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하여 맨 뒷자리에 앉았는데 첫 시간이 수학시간으로 방정식을 푼다고 했습니다. 활자체 대문자도 익숙지 못한데 꼬부랑글씨 x, y가 어떻고, 좌변에서 우변으로 넘기면 부호가 어쩌고 하는데 아무리 정신을 바짝 차려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과목 시간도 비슷하게 보내고 학원 문을 나섰습니다. 눈앞이 캄캄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알아보니 내가 다니는 반은 3개월 전에 개강한 반인데 학생수가 적어 합반하다 보니 진도가 꽤 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수학이 가장 문제였기에 그날 배운 걸 모두 외워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바로 옆에서 그것을 듣고 계시던 어머님은 그날 저녁 한잠도 못 주무시거 초등하교 다닐 때는 성적이 남에게 별로 떨어지지 않았는데 못난 부모 때문에 저렇게 엄청난 차이가 나다니 하시면서 우셨다고 제가 합격한 후에야 말씀하셨습니다. 오전 중에 학원에 나갔다가 뛰다시피 하여 가게로 돌아오면 오후 2시경이 되었습니다. 가게 인근의 시장 상인들은 제가 가게에 가면ꡐ 아, 지금 2시군ꡑ할 정도였습니다. 검정고시학원 광고에는 9개월 속성과정이라고 했으나 몇 개월이 되었든 국가에서 시행하는 검정고시 시험에 합격해야만 자격이 인정되었습니다. 73년 7월 말경에 시험에 있었습니다. 막상 시험을 눈앞에 두고 보니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책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식사할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버스 속에서도, 길에 다니면서도……. 사법시험 준비를 할 때도 이때만큼 열심히 하지는 못했습니다. 시험을 얼마 앞두고는 어머님과 여동생에게 모든 살림을 떠맡기고 그 가게는 그만두었습니다. 이미 양복기술자가 된 여동생은 못난 오라버니를 수없이 원망했으리라. 이럼 상황이었기에 제게 남은 길이라곤 합격 이외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천만다행으로 최고득점으로 합격했습니다. 합격만 하면 뭔가 될 줄 알았는데 넘어야 할 산들이 더욱 많았습니다. 최고득점 덕분에 수업료가 면제되어 고등학교과정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형편으로는 대학 다닌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기에 꼭 합격해야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까지 해온 공부가 과연 정구 중․고등학교에서 배운 것과 같은 것인지 궁금했고, 제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비교해보고 싶었습니다. 역시 실력은 떨어져 불합격이었습니다. 다닐 형편은 못 되었다 할지라도 불합격은 유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틀어박혀 있는데 후기에 응시하라는 간곡한 격려와 함께 각 대학교를 소개하는 진학 관계 잡지를 같이 공부했던 여학생이 보내주었습니다. 그때 진학 관계 잡지를 처음 본 저는 대학이 그렇게 많은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리하여 집에서 도보로 통학이 가능한 저는 법대 수석으로 합격한 덕분에 꿈속에서도 그리기 어려운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대학생! 몇 년 늦긴 했으나 얼마나 가슴 부푼 단어인가, 그렇게도 입어보고 싶던 교복을 맞춰 입으며 저에게 주어진 정규 학창생활을 알차게 보내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습니다. 학교 측과 교수님들의 배려도 매 학기 장학금을 받을 수는 있었으나 등록을 할 때마다 이번 학기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학 정도로 할 때마다 이번학기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대학생활을 지탱하기엔 설움이 많았습니다. 저학년 시절에는 가정교사․그룹지도․월부서적 외판 등을 해 보았으나 신통치 않아 공부에만 전념하기로 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그 일대의 삯빨래 등을 도맡아 하셨고, 용산 시장 ․ 노량진 수산시장 날품팔이, 새마을 취로사업 등을 계속하였습니다. 어머님과 자식과 관계는 그래야만 하는가? 어머님께서는 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 바쳤습니다. 저는 그분께 어떻게 해드려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어려우신 생활 속에서도 성실하고 진지하게 삶을 사시는 그분께 고개가 수그려질 뿐입니다. 또한 지금은 결혼하여 한 아이의 엄마가 된 여동생, 한창 멋 부릴 나이에 마음에 드는 좋은 옷 한 벌 제대로 모 사 입고 우유부단하고 강단 없는 오라버니 대신 가족과 생계와 학비 담당했습니다. 제가 대학 3학년 때 동생이 결혼하던 날, 친구가 술 한 잔 하고 무기력한 저 자신이 원망스러워 눈물을 흘렀습니다. 해볼 마한 것, 사법고시의 도전 호젓한 캠퍼스 잔디 위에 누워 저 자신의 지난날들을 반추하여보았습니다. 밉기만 하던 교복 입은 학생들 당장 뒤집혀버리기만 바랐던 이 사회, 못나 보이고 원망스러웠던 부모님, 신을 저주하고 부정했던 나날들, 이 모든 것이 오늘의 제가 대학생이 될 수 있게끔 해준, 소중하게만 느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r당시에는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고 막막하기 만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풀린 것을 보면 ꡐ절대자의 섭리ꡑ같은 것이 f본명 있다고 믿어졌습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절대자의 뜻은 뭘까? 대학생활을 설계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는 정규학생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음미하기 위해 약간의 나이 차이 있었으나 자주 어울려 대화하고 미팅도 해보고, 술․ 담배․당구 등도 빠지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 시회에서 받은 도움이 아주 적다할지라도 환원해야 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에게는 선천적인 인맥도 금액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라고는 맨 몸뚱이 하나뿐이었습니다. 이 맨몸뚱이 가지고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할 역할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피해의식이 남달린 강한 사람들과 더 넒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나 알찬 대학생활을 위해서나 한번쯤 부딪쳐보리라. 도약해보리라 다짐하여 , 사법시험에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76년 4월 초, 방위소집 명령서가 날아들었습니다. 저는 숙부님께 양자로 입적되어 있었고, 당시 숙부님 가족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보충역으로 편입되어 있다가 이번에 나온 것입니다. 먹구름이 끼는가! 두려웠습니다. 2학년이 되면서 운 좋게 받게 된 외부 장학금은 액수가 많아 학비는 한시름 놓았다 했는데……. 휴학을 하게 되면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은 뻔했으며 또한 복학이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름이 부름인지라 그때 걱정은 그때그때 하기로 하고, 일단 휴학을 하여 방위병으로 6개월의 근무 끝에 76년 11얼 말에 자유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방위병으로 근무하면서부터는 남는 시간에 영어 공부만 하였습니다. 짧은 중․고등학교 과정 때문에 영어 실력이 형편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는 여학생들의 눈초리가 여간 따갑지 않았으나 좀더 시간을 확보키 위해 일과가 끝나면 방위병 복장을 한 채로 학교도서관으로 직행 하여 영자신문과 TOEFL을 보았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적으로 하루에 2~3시간씩 공부한 덕분에 1차 시험에서 간신히 과락을 면할 수 있는 실력이나마 갖추게 되었습니다. 77년 신학기 복학까지는 3개월 정도의 시간의 있었으므로 그동안에 학비조달을 염두에 두고 몇 군데 알아보았으나 여의치 못하였습니다. 기완에 도전장을 마음속으로 내놓은 터였기에 3개월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여 정식으로 77년 3월의 19회 사법시험 1차에 명함을 내밀었습니다. 뚜렷하게 사법시험 준비를 하는 학교 선배님이나 동료들이 거의 없었기에 별다른 애기가 방법론 등을 듣지 못하고, 책 선택도 합격기나 서점에서 많이 팔리는 책 위주로 하여 1차 전 과목을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면서 겨우 1회독하고 시험장에 들어갔습니다. 막상 시험ㅈ디를 받고 보니 확실한 답을 가려낼 수 없다 할지라도 알 듯한 단어들이 눈에 많이 띄어 소문처럼 어려운 시험은 아니 듯싶었으며 내년이면 1차 정도는 가능할 것도 같아 가벼운 마음으로 시험장을 나왔습니다. 후에 시험성적을 알아보니 예상외로 과락이 없어서 사범시험의 고지가 가깝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그 뒤로 두 번이나 1차에 떨어졌습니다. 역시 자만은 금물인 모양입니다. 77년 10월경, 학교 측의 배려로 도서관 지하에 법학과 학생들만을 위한 조그만 방이 마련되었습니다. 이곳에 한자리를 얻어 제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였습니다. 5시 50분쯤 일어나 맨손체조 등을 하고 6시부터 7시까지 지금은 시간이 변경된 KBS라디오 영어강좌를 들은 후 도시락을 두 개 싸들고 학교까지 걸어가면 8시경, 점심 먹고 1시간 정도 자고 저녁 10시 30분경에 귀가하여 영어 단어나 법전 조문을 조금 본 후에 12시경에 자리에 누워 그날 공부한 것을 머리 속에 그리다보면 어느덧 잠에 빠지곤 했습니다. 최대한의 시간확보를 위해 하루하루의 공부시간을 엄격하게 표시하였습니다. 별로 건강하지 못하던 몸이었으나 이때의 규칙적인 생활과 저녁에 잠깐씩 하는 맨손체조와ㅏ 팔굽혀펴기, 30분 정도의 거리를 도보로 등․하교한 덕분에 오히려 건강해졌습니다. 또한 저녁에 자리에 누워 그날 공부한 것을 미리에 떠올리다보니 불면증으로 고생을 했던 기억도 별로 없었습니다. 78년 3얼 이번에는 기어코 붙고 말겠다는 심정으로 20회 1창[ 을시 했으나 영어에서 겨우 과락을 면하는 낮은 점수와 80점이 넘는 높은 커트라인으로 고배를 마셨습니다. 좌석에다 장담하는 구호까지 써놓은 터였기에 자신에 대한 실망과 함께 동료들을 대하기가 어색했습니다. 77년 3월 19회 을시로 1차에 감을 잡았다는 것은 득이 되었으나 시건방지게 1차를 경시한 탓으로 10월 말 시험공고가 날 때까지의 느슨한 공부가 절대 패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번의 분패를 설욕한다는 계획으로 4학년 초에 1․2차 동시라는 터무니없는 설계를 했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은 그런 대로 잡히는 듯하더니 얼마 지나고 나서는 2차 과목을 잡으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아 불안했고, 1차를 잡으면 1․2차 동시라는 계획이 마음이 걸리고……. 이럭저럭 하다 보니 10월 말 도 시험공고가 났습니다. 그때부터는 1차에 더 많은 투자를 하였으나 79년 3월, 21회의 결과는 또 한번의 쓴 잔을 저에게 안겨주었습니다. 이제는 누국에게 말하기도 두려웠습니다. 제가 무엇을, 무슨 공부를 하는지도 알려 하지 않으신 어머님이셨고, 공부에 관한 한 말씀 한마디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하신 어머님까지도 비록 무슨 시험인지는 잘 모르셨지만 이제 그만 했으면 하는 눈치를 보이셨습니다. 학교에서는 제법 기대를 건다고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의 시선을 받아왔는데…….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저 자신에 대한 회의가 엄습했습니다. 이제 그만 물러서버릴까도 수없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투자해놓은 것이야 아까울 것 없었습니다. 원래 가진 것이 없는 놈이라서 잃은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제게는 아직 대학생활도 1년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자. 1차부터 차근차근하게……. 하늘을 보지 않고 어떻게 별을 따겠는가. 1차에 합격하지 않고는 2차 시험장에 들어가 볼 수조차 없지 않는가. 법학 전공에다 몇 번이나 도전했으면서 1차조차 못 붙고 포기한다면 과연 앞으로 이룰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이 사는 것이며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 누가 대신 살아주거나 남아 책임져 줄 성질의 것이 못된다. 남이 어떻게 보든 기어코 하겠다. 한 인간의 삶의 ꡐ대차대조표ꡑ나 ꡐ손익계산서ꡑ는 죽을 때나 한번 쓰는 것이지 어떤 순간마다 쓰다 것은 아닐 것이다. 처음에 중학교 과정을 시작 할 때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약 8년이나 늦었는데 몇 년이 지난 오늘날은 비슷하게 되지 않았는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 이 순간부터 다시 시작하자. 이리하여 이번에는 1차에만 전념하였습니다. 사실 법학과 학생이라면 1차와2차를 구분한다는 것이 우스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기본 3법은 1․2차 공통과목이고, 그 외 2차 과목은 4학년 이전에 대부분 학교수업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2차는 의식하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학기 동안에는 장학금이 걸려 있었기에 시험 기간 1주일 전부터는 학점 과목을 하고, 여름 방학에는 비 법률 과목, 그 나머지 시간에는 기본 3법 위주로 하였습니다. 겨울방학이 되면서부터 약 100여일을 3등분하여 1차 마무리에 들어갔습니다. 마지막 시험 전 하루 이틀에 전 과목을 두루 살핀 다음 곧 80년 3월, 22회 사시 1차 시험장으로 향하였습니다. 이미 2월에 대학을 졸업한 후였습니다. 운이 좋아서 전체 수석졸업의 영광은 안았으나 이것이 도리어 부담이 되었습니다. 명색이 수석 졸업생인데 1차마저 떨어지면 무슨 얼굴로 동문들을 대할 수 있단 말인가. 막상 시험지를 받고 보니 경제학과영어가 괴롭혔습니다. 영어는 10문제도 채 풀지 못했지만 학생들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고개를 숙인 탓으로 목은 아파오고……. 시험이 끝나고 불안한 마음으로 취직과의 갈림길에서 책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던 중에 발표가 났습니다. 합격이었습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기뻤습니다. 2차는 준비하지 못하고 참가한 관계로 첫날 두 과목이 과락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1년간 공부할 경제력이 문제였습니다. 여동생이 결혼한 후로 그 뒤를 이어 생활비를 담당했던 남동생이 4학년 말에 군대를 갔기에 이제는 제가 나서야만 할 차례였습니다. 어머님의 삯일과 날 팔일은 한계에 와 있었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던가, 학생처장으로 계실 적부터 장학금을 배려해주신 박길준 교수님의 소개와 법학과 교수님들의 적국적인 후원에 힘입어 재일교포 사업가로부터 장학금을 받을 있었습니다. ꡒ교수님, 감사합니다.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고 후회스럽지 않을 1년을 보내겠습니다.ꡓ 장학금 덕분으로 2차 문제집과 참고서 등을 일괄 구입하였습니다. 이 무렵 고시 잡지 4년분 정성껏 모아두었다가 아낌없이 건네준 채광기 형의 배려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5월 중순에 경기도 양평에 있는 보림사에 짐을 풀었습니다. 재학 중에도 방학 중에도 계속 학교 법률연구실을 이용했기에 학교 도서실 외의 생활은 처음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어색했으나 주위의 따뜻한 배려로 곧 익숙할 t 있었으며, 아침 6시 이전에 일어나 가벼운 조깅과 맨손체조를 한 후 책상에 앉으면서 오늘 하루도 성실히 보낼 것을 다짐하고 밤 12시경 잘 때까지 빡빡한 계획으로 강행군을 시작했습니다. 일주일에 한나절 정도는 쉬었습니다. 학교 다닐 때는 친구들과 만나서 탁구를 치거나 가볍게 술을 마셨으나 이곳에서는 냇가로 멱을 감으로 가거나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날 밤 깡소주를 마시며 물고기를 잡던 일, 멱 감으며 돼지고기 돌 구이를 해서 먹던 일들이 지근도 생생합니다. 자제한다고 했으나 천성적으로 마음이 모질지 못하고 많이는 못 마셔도 술을 좋아하는 편이라서 날이 갈수록 시간 확보가 줄어들었습니다. 후회스럽지 않을 1년을 보냈다고 약속을 하지 않았던가. 9월 초, 정들었던 보림사를 뒤로 하고 10월에 신림고시원에 자리를 정했습니다. 기계적으로 규칙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머리에 남을 정동의 슬럼프는 없었던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른바 슬럼프니 매너리즘이니 하는 것은 불안과 초조에서 오면, 불안과 초조는 만족한 공부를 못하는 데서, 계획된 만족한 공부를 못하는 것은 자기의 정도를 넘는 무리에서 온다고 봅니다. 경제력이 빠듯한데 어떤 형태로든지 무리하여 지출한다든가 하면 경제적으로 불안과 초조가 올 것이고, 체력이 한계가 있는데 너무 지나친 운동이나 음주 등으로 다음날 영향으로 미친다든가, 어떤 날 밤 공부가 잘 된다고 평시보다 밤늦게까지 하여 그 다음날 영향을 미쳐 하루 양을 다 채우지 못할 경우, 즉 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내지 못했을 경우 불안과 초조가 오는 것 같고, 이것이 며칠 계속되다보면 거기에서 헤어 나오기 힘든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하루하루를 무리하지 않고 규칙적으로 보내면서 몸에 피로가 오기 전에 일주일에 한나절쯤 쉰다면 슬럼프니 매너리즘이니 하는 것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닐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한 가지에 억세게 매달리는 모양입니다. 검정고시 중학 과정을 공부할 때도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이 기간에 좋다고 자랑하던 시력이 뚝 떨어져 안경을 끼기 시작할 정도로 악착같았습니다. 이 순간은 제게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9개월만 공부하겠다고 해놓고 대학까지 졸업했으며 그것도 부족하여 공부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 기간은 무려 9년이 되었습니다. 꼭 붙어야만 했습니다. ꡒ나의 실력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여 주소서!ꡓ 하루에 2~3시간씩 자면서 최선을 다하려 하였습니다. 뚜렷하게 잘 치렀다는 과목은 하나도 없고「민소법」과「형소법」이 특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5월 8일, 어버이날이 마지막 시험 날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 한결같이 성실한 자세로 진지하게 살아오신 어머님 가슴에 꽂아 그리기 위해 꽃 한 송이를 샀습니다. 그날 저녁 친구들과 만나 술을 마시면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은 우선 장기간을 버틸 수 있는 체력, 수험기간 동안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재력, 꾸준히 닦은 학과 실력, 시험을 얼마 앞두고 극도의 불안과 초조․긴장 속에서 이를 극복하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는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나 정신력 등등이 합쳐져 이루어지는 하나의 작품 같다고……. 어머님의 눈물 시험이 끝나던 날 밤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불합격이 된 꿈을 꾸고 불안과 초조 속에서도 행여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발표 하루 전이었습니다. 미리 연락을 주겠다던 친구에기선 아무런 연락이 없었습니다. 역시 떨어졌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나름대로 마음의 정리를 해오던 터라 조금씩은 담담했습니다. 6월 중순이었지만 제겐 연말의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한해를 마무리 짓고 새해를 맞이하듯 이제까지 있었던 나의 지난날을 결산하고 어떤 직장이든 취직해서 새 생활을 시작하는 것으로……. 저는 취직하기로 마음먹고 졸업증명서와 성적증명서를 신청하였습니다. 발표가 있을 그날 아침, 어머님께 합격하지 못했음을 알려드렸습니다. ꡒ내 정성이 부족한 모양이구나, 남들은 절에 공들도 드라고 한다던데 그 짓 한번 못했으니…….ꡓ그 순간에도 어머님은 못난 자식을 탓하시기보다는 당신의 정성 부족을 후회하셨습니다. 이때까지 자식들에게 약한 눈물 한번 내비치지 않던 어머님이었습니다. 그 눈가에 물기가 감돌자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집을 나왔습니다. 교외선을 탈까 생각하다가 졸업증명서 두을 찾으러 하교에 갔습니다. 잠깐 들른 법대 조교 실에서 ꡒ2차 시험 사저위원으로 들어가셨다가 나오시는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합격을 했답니다. 합격!ꡓ하였습니다. 시험은 학생이 보지만 채점은 교수님이 하신다던 가, 나중에 알아보니 과락을 걱정했던 과목이 오히려 평균 점수를 넘었습니다. 역시 중도 포기는 금물인 모양입니다. 믿어지지가 않아서 총무처와 고시연구사로 화인 전화를 하고 나서야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ꡒ어머님, 감사합니다.ꡓ 어머님과 저는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ꡒ네가 내 한을 풀어주었구나. 이젠 죽어도 여항이 없겠다.ꡓ 처음이었습니다. 어머님의 눈물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축전과 축하도 뜸해지자 조용히 지난날들을 반추해보면 내일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뭔가 제가 원하던 것을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맛보았다는 이외에 특별히 합격했다는 실감이 나지는 않았습니다. 시험을 준비 할 때는 합격 이외에는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나 막상 합경이 되고 법조인이 된다 생각하니 막중한 임무에 두려움을 앞섰습니다. 남보다 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과 좀더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겠다는 나의 마음에 위선은 없는가, 지금도 받고 있는 도움을 만에 하나라도 환원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제게 필요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용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겐 참용기가 슬기가 필요하며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항상 시작하는 마음으로 저를 성원하여 주셨고 앞일도 서원하여 주실 여러분들의 기대에 보답할 것을 다짐해봅니다. 끝으로 저의 이런 이야기들이 보는 이에 따라 여러 가지로 비칠 것으로 보나 제에게 남다른 특이한 성격이나 환경이 주어진 것이 아니고 평범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흔히 겪을 수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걷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 내가 태어난 고향, 조국 등은 선택할 수 없이도 그 밖의 많은 것들은 자신들은 자신의 마음 여하에 따라 선택할 수 있으며, 항상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속에서 하루하루론 최선을 다할 때 어떠한 형태로든 보답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주위의 모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