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공무원 중국(요령성) 연수기
<제2기 : 2002. 6. 6 ∼ 7. 1(25일간)〉
2002. 10. 31
차 례
○ 서론
○ 연수개요
○ huanying! huanying! hanguo gongwuyuan!
○ 우리의 여행기
- 강건너가 바로 우리 조국!(단동여행기)
- 중국아줌마 대단합디다!(심양여행기)
- 북경으로 가는 기차여행(북경여행기)
-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발 딛다(백두산기행기)
- 요녕성 방송탑에 올라
- 여기가 중국 맞아!(대련시 방문기)
○ 학습기
- 중국의 공무원제도
- 경극에 대하여
- 중국전통문화와 현대화
- 요녕성 인민대표 대외관계
- 24식 태극권
- 시험보는 날
○ 견학기
- 북릉공원
- 동릉구 농업생산기지 ∼화평구청 방문기
○ 에피소드 1
- 월드컵의 영광을 같이 했던 서탑거리에 대한 회상
- 평양관의 평양냉면과 평양아가씨들
- 오! 필승코리아, 월드컵의 태극전사를 응원하며
○ 에피소드 2.
- 이상한 중국, 알고싶었던 중국생활
- 중국에 정말 자장면이 있을까?
- 중국의 거리풍경
- 웃통벗고 다니는 남자와 미니스커트입고 자전거타는 여자
- 다시가고 싶지 않은 화장실
- 맞사지 누가 제일 많이 갔어!?
○ 맺음말
서 론
1993년도 경기도와 중국 요령성간 자매결연이 체결된 이후 양 도성간에는 경제사절단 방문, 공무원 교류근무 및 교류연수 등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여 오고 있으며, 특히, 2001년부터는 어학교류 연수를 통해 더욱더 양국간의 이해 증진에 노력하고 있다.
어학연수교류는 양 도성간 우호증진과 양국의 행정, 문화 등의 이해의 폭을 증진시키고 실무공무원의 어학능력을 배양하여 다가오는 서해안 교류시대에 대비한 국제 인적자원 육성을 목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경기도 연수단은 6월6일부터 7월1일까지 중국 요령성 정치경제학원에서 요령성 연수단은 5월6일부터 5월31일까지 경기도 공무원교육원에서 각각 실시하였다.
우리 연수단은 중국의 생활습관, 문화, 전통, 역사 등에 관한 철저한 고찰 등 자료 준비와 4주간의 짧은 기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언어능력의 극대화를 위한 어학공부 등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한 후 출국하였으며, 연수는 了寧城 沈陽市 和平區 五裏河街에 위치한 了寧城政治經濟學院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와 식당을 이용하며 어학교육과 문화체험등 활발한 연수생활을 하였다.
연수활동(進修漢語)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오전 8시에 수업이 시작되어 2시간은 조선족 교수가 가르치는 독해, 2시간은 한족 선생님이 지도하는 청취 시간이었고, 12시에서 오후 2시까지 점심시간을 오후에는 5시까지 중국역사, 공무원제도, 중국사상 등 강좌와 고적지 및 산업시찰, 기관방문등의 중국생활에 대한 체험학습으로 진행되었으며, 주말은 자유 체험시간으로 여행 등을 통해 일상적인 생활 언어 습득과 중국문화 체험을 하는 것으로 일정이 진행되었다.
새벽시간 農産物市場 看看, 점심시간을 이용 현지 대학생이나 교사들로부터 개인교습을 받는 등 어학능력 향상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주말등 과외 시간을 활용하여 심양시장에 위치한 五愛市場(우아이스창), 생필품 도매시장과 번화가에 위치한 中街(중지에),太原街(타이위엔지)등을 둘러보며 중국인들의 생활 모습을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었으며, 한인 거리인 西塔에서 가슴 뭉클한 월드컵 열기를 함께 느끼고 북한 식당을 찾아 통일의 열망을 가슴속 깊이 새길 수 있었다.
단동시에서 신의주지역과 끊어진 압록강 철교를 바라보고, 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천지에 올라 조국 분단의 아픈 현실에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또한, 용정에 있는 대성 중학교와 일송정을 방문하여 머나먼 이곳 만주 벌판에서 조국해방을 위해 온갖 고난 속에서 몸부림쳤을 선조들의 얼을 되새기며 깊은 감회에 젖어 보기도 했다.
중국은 약 70%이상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이지만 눈부시게 발전된 북경이나 대련시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잠재된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20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나라로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세계무대에서의 역할이 큰 비중으로 다가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어 중국에 대해 균형적인 감각을 갖고 이해하는 것이 현명하다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체험이 앞으로 다가올 서해안 시대 한국과 중국의 우호협력 관계를 발전시키는데 소중한 밑걸음이 될 것으로 확신하며 이런 소중한 기회를 마련하여 주신 도지사님과 중국 요령성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우리 연수단 모두는 경기도와 요령성의 우호협력관계를 돈독히 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을 약속드리며, 서해안 시대를 열어 가는 첨병 역할을 위해 더욱더 정진해 나갈 것입니다.
2002. 10. 31
제2기 한국경기도 공무원중국어 연수단 일동
연 수 개 요
○ 과 정 명 : 경기도 - 중국 요녕성 공무원 어학교류과정
○ 연수인원 : 총 20명(도 4, 시군 16명)
- 단장 1명, 부단장 2명(남,여 각1명)
○ 연수기간 : 2002. 6. 6 ∼ 7. 1(25일간)
○ 연수장소 : 요녕성정치경제학원(심양시 화평구 오리하가 18호)
○ 연수목적 : 중국어 어학연수, 문화체험, 산업시찰
○ 연수방법 : 합숙연수(숙소 : 1인 1실)
○ 연수일정표(일일)
o 06:00 ∼ 07:00 기상 및 운동(태극권)
o 07:00 ∼ 08:00 아침식사
o 08:00 ∼ 11:40 중국어학습(독해 및 청취)
o 12:00 ∼ 14:00 점심식사
o 14:00 ∼ 17:00 중국문화체험(강좌, 산업시찰, 기관방문)
o 17:00 ∼ 18:00 저녁식사
o 18:00 ∼ 22:00 자유활동(팀별 시내견학 및 개인 과외학습)
o 22:00 ∼ 취침
※ 토·일요일은 팀별 문화체험활동(단동시, 북경시, 대련시, 심양시)
huan ying! huan ying hanguo gongwuyuan
6월6일(목)
아! 드디어 중국으로 가는 날이다. 인천공항에서 우리는 8시에 만나 떠나기로 되어있었다. 다들 조금은 긴장되고, 들뜬 표정들이 얼굴에 영력하다. 월드컵 기간이라 공항은 평소보다 외국인, 내국인들이 많다고 듣고 왔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티켓팅을 하는데도 줄을 길게 서야 했다. 다행이 단체여행이라 좀 더 빨리 티켓팅을 마칠 수 있었다.
예정보다 다소 늦은 10시15분에 출발하여 12시15분에 심양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주영생 요령성 정치경제학원처장을 비롯한 직원 몇 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역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문화에 어울리게 요란스럽지 않은 간소한 환영식이었다.
공항으로부터 학원까지는 약 30분이 소요되었다.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중국의 첫인상은 역시 광활한 땅이라는 것이다. 어렴풋이 그 의미를 추측할 수 있는 간판이나 공장들.........
도착 후 곧 바로 낯선 분들의 환영을 받으며 학원의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숙소는 붉으스레한 벽돌로 지은 4층 건물이었으며, 뒤편에는 유학생 기숙사가 자리잡고 잇었다. 1인1실로 각방에는 침대1개, 의자3개, 책상1개 T.V 1대, 전화1대 샤워장 겸 화장실(나무로 된 변기 뚜껑, 흔들리는 세면대, 휴지 1통, 세면비누, 칫솔, 치약 각 1개)을 갖추고 있었으며, 약간은 부족한 느낌이었으나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에 호기심과 함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16시부터 입교식이 진행되었는데 양국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인지 다소 엄숙한 분위기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들 모두 정장 차림인데 반해 그들은 노타이차림의 자유복장이 사회주의 국가의 평등사상과 우리와의 전혀 다른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켐코더를 들고 촬영하는 사진기사는 츄리닝 차림을 하고 있어, 우리의 정서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측면을 엿볼 수 있었다.
저녁에는 만찬연회가 학원건물 1층에 있는 식당에서 개최되었다. 중국에서의 첫 술자리라는 다소의 긴장감을 갖고 함께 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동질성을 느끼게 되며 자연스럽고 유쾌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평소 중국인들이 술을 많이 먹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으나, 의외로 우리 사회의 폭탄주나, 잔 돌리는 등의 술 문화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이 자리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평등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얼큰하게 취하고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자 중국인들이 우리의 "아리랑"을, 우리측에서는 "만남"을 노래하며, 이렇게 우리의 25박26일의 중국연수는 시작되었다.
타국에서 눈뜬 첫날아침
6월7일(금)
모두들 아침 일찍 먼 타국의 아침을 맞이하였다. 우리나라보다 햇살이 일찍 창가를 넘어 우리의 얼굴을 비췄다. 대부분 5∼6시경에 잠에서 깨어나 앞으로의 연수생활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친 사람, 낯선 새벽시장을 구경하는 사람,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등 비교적 차분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7시부터의 즐거운 아침식사 시간을 가졌다. 밥, 만두, 콩국,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반찬들 아직 중국음식에 익숙해 있지는 않지만 다들 맛있게 먹었다. 한편으로 우리 입맛에 맞추려는 요리사의 정성을 깊이 느낄수 있었다. 학원의 착오로 안내서에 수업 시작시간을 8시30분으로 착오 기재한 관계로 당초 수업시간인 8시보다 늦은 9시경에야 수업이 시작되었다.
첫 시간(8:00∼10:00)은 조선족이신 李甲振선생님께서 독해부분을 강의하셨다. 연세가 지긋하신 모습에 선한 인상이 우리의 옛날 자상한 이웃집 아저씨 또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었다. 둘째 시간(10:00∼12:00)은 聽力(팅리)시간으로 張翠林선생님 시간으로 우리들보다 나이 어리고(26살), 까무잡잡한 피부에 둥그런 큰 눈을 갖은 중국한족 선생님이었다.
12시 수업 종료 후에는 자습시간을 가졌다. 다들 공부보다는 삼삼오오 짝을 찾아 시장 등 주변 거리도 돌아보고, 노트나, 필기도구, 생활 필수품 등을 구입하며, 앞으로의 생활에 필요한 준비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둘째 날의 하루를 보냈다.
- 우리의 여행기 -
강건너가 바로 우리조국!!!
단동시여행기(6.8∼6.9)
중국에서의 두 번째 밤을 떠나보내고 첫 주말을 맞이하였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로 요녕성 북동쪽에 위치한 단동시로 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다.
단동시는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한 국경도시로 약 50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평양과 북경을 달리는 국경열차가 이 단동시를 통과하고 있다. 유명한 관광지로는 압록강공원과 금강산공원이 있는데, 압록강공원은 북한과의 국경을 흐르는 압록강의 강 언덕에 있는 공원으로 압록강대교가 아름답기 그지없으며, 압록강을 따라 모터보트나 소형 유람선을 탈 수 있다. 금강산공원은 시내 북서쪽에 있는 공원으로 여기에서는 북한까지도 볼 수 있다.
도시의 외곽, 산기슭에 건립된 박물관에 올라서면 단동 시내와 압록강 그리고 멀리 신의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는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형제국이였던 북조선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전리품들과 문헌들이 사진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한때 언론에서 보도되어 우리에게 알려졌던 모택동에게 중공군 참전을 요청한 김일성과 박헌영의 친필서신이 바로 이 박물관의 소장품이다.
박물관에는 여느 전쟁 박물관과 같이 전쟁 당시에 사용된 무기들이나 군복들, 당시의 종군기자들이 촬영한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 당시의 재산피해나 중국의 각 성별로 참전한 군인의 수, 사상자의 수 같은 통계도 전시되어 있다.
아침 식사후 서둘러 택시를 타고 심양역에 도착하였으나, 기차시간 착오로 인하여 1시간동안을 심양역 주변을 각 팀별로 구경한 후 9시15분에 단동행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시끌시끌한 역전 대합실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차에 올랐다. 약 4시간여의 기차여행이지만 모두들 낮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현지에서 어학을 배우려는 욕구로 열심히들 중국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일부는 한족 여대생과 담소하고(물론 미숙하지만 안 통할 때는 손짓, 몸짓 해가며) 일부는 한족 아줌마와 열심히 책 찾아가며, 듣고, 말하고 이야기하며 언어에 대한 욕구를 마음껏 충족해 나가고 있었다.
오후 1시30분경 단동역에 도착하니 거대한 모택동 동상이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약 20여분을 걸어 점심으로 중국식당에서 중국 요리의 맛을 즐기고 그렇게 그리던 압록강으로 향하였다. 압록강에 도착 한 많은 강을 바라보며, 모두들 그 어느 곳보다도 깊은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야말로 지척에 우리의 땅인 북한의 신의주가 보이는 것이다. 분단이라는 조국의 현실 때문에 반세기 이상 밟아보지 못하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절실히 느끼며, 언제 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그곳을....... 더욱 안타깝고 가슴아픈 것은 중국에서도 비교적 낙후 지역이라는 단동시 보다도 더욱 초라해 보이는 강건너 조국의 모습이었다. 모두 큰배에 올라 갈 수 없는 땅을 바라보며, 그 곳을 배경으로 사진에 담아보고, 일부는 그것이 아쉬워서 모타보트를 타고 더욱 가까이 다가가 보고, 끊어진 철교위에 올라 눈시울도 글썽이고 이렇게 세 번째 중국일정을 감동과 애달픔과 아쉬움으로 떠나 보냈다. 저녁숙소는 3성급 호텔인 郵電大厦(YOU DIAN HOTEL)에서 머물기로 했다. 우리는 호텔의 11층에서 단동시의 야경을 감상하고, 12층 나이트클럽의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자장가 삼아 피로에 지친 몸을 뉘었다.
6월9(일)
세 번째의 아침을 이곳 단동시에서 맞이하였다. 대부분 긴 여정의 피곤함보다는 새로운 호기심에 잠에서 일찍 깨어 났다. 이곳 단동의 새벽은 우리나라의 새벽보다는 분주하고 바쁘게 생활하는 느낌을 받았다. 비교적 깨끗한 대로변보다는 지저분한 골목길, 배드민턴을 치는 사람, 제기 차는 부부인 듯 보이는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 공원에 모여 태극권하는 사람, 짐을 실을 수 있게 개조한 자전거에 잔득 짐을 싣고 어디론가 급히 가는 사람, 보따리 여러개 들고 온 가족이 어딘가에 함께 가는 사람 그야말로 우리의 어릴적 70년대 초반 모습을 연상케하는 거리의 풍경들... 호텔에서 아침식사 후(예약할 경우 1인당 5원, 미 예약 시 1인당 8원) 금강산 공원에 올랐다. 높지 않은 산에 놀이 공원시설, 동물원 등(우리가 볼 때 조잡스러운)을 갖춘 주민들의 휴식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 항미 기념탑 및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우리나라의 6.25 전쟁당사 참전한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외상으로 비춰진 웅장한 외부의 모습으로도 중국인의 큰 스케일을 느낄 수 있었다. 내부로 들어감에 따라 그 웅장함에 더욱 놀람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당시의 참상을 담은 사진, 그 당시의 모습들(중공군, 인민군, 간호사, 주민들, 아이들 등) 전쟁과 관련된 각종 문서들... 특히 휴전 협정서에 미국, 북한, 중국은 서명되었으나, 우리나라는 제외되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러한 세밀한 역사적 기념관을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아쉬움과 함께 다시 한번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가슴에 담고서 아쉬움과 함께 단동시를 떠났다.
단동역에서 2시에 출발하여 6시경에 심양역에 도착하였다. 물론 기차 안에서 한 단어라도 머리에 넣으려고 서로 다투어 가며 중국인(할머니,기차승무원 등)과 대화하며 심양으로 돌아왔다. 도착하여 저녁식사로 조선족 거리인 西塔의 평양관에서 평양냉면을 음미하며, 또다시 분단의 아쉬움을 달래며 이렇게 또 하루를 보내었다.
(西塔은 조선족의 거리로 모든 간판이 한글로 되어 있으며, 모란각, 평양각에서는 냉면 등 우리나라 음식을 주로 판매하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비용이 비싼편이다. 월드컵 기간중 우리나라의 경기를 이곳에서 시청하며 타국에서 조국의 열기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중국아줌마 정말 대단합디다!!!
심양여행기(6.15-6.16)
중국에 도착한지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어제 포르투칼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16강에 진출하는 감격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자유스럽게 주말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다. 연수생 20명중 15명은 이미 어제 북경으로 이미 떠나고 이미 북경을 다녀온 바 있는 5명이 함께 하기로 하고 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시장을 둘러보다가 옆 유학생 기숙사에 있는 학생을 만났다. 산동성에서 유학온 학생으로 요령畢商經濟學院 1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으로 순박하게 생긴 모습이었다. 학생과 함께 나뭇잎으로 싼 주먹밥과 리즈(남부지방에서 나는 과일)라는 과일을 간단히 먹었다. 그리고 학원 정문옆에 위치한 슈퍼에서 전날 길 안내를 약속한 한족 여인 두명과 만나 모두 8명이 즐거운 시내 관광에 나섰다.
먼저 심양의 교외에 위치한 植物園에 가기로 하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며 2시간여 만에 식물원에 도착했다. 식물원의 규모는 대단하였다. 하지만 식물원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에버랜드를 연상케 하는 놀이 기구로 가득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놀이기구는 군대의 유격 훈련장을 방불케하는 외줄타기, 암벽타기, 배타고 물 총싸움놀이 등 체력훈련을 요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잘못 실수하면 물에 빠지도록 되어 있어 다소의 두려움으로 타기를 꺼렸으나 중국 여인들이 솔선하여 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타야만 하는 형편이 되었다. 특히, 30미터의 암벽을 타고난 후에 다시 외줄에 도르레 타고 약 300여미터의 호수위를 건너는 놀이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짜릿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여인들이 타는데 남자로서 안 탈수도 없고(자존심!!!) 우리 모두들 안간힘을 다하여 함께 탔다. 하나하나 탈 때마다 간이 콩 알만 해지는 것 같았지만 긴 호수면 위를 나는 기분은 마치 하늘을 나는 새의 기분처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기분이었다.
여러 가지 놀이 기구를 타고 놀다가 점심이 되어 냉면과 요리 두가지를 시켜 간단히 식사를 하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 중 중국여인들이 나서 음식 맛이 없다고 음식값을 깎았다. 이러한 진풍경에 우리들은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다. 물건값을 깎는 것은 보통이고 놀이시설 타는 비용과 전화카드비까지 깎는다. 말이 깎는 것이지 서로 흥정을 잘하면 통하는 것이 이곳의 인심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아직까지 정립되지 못한 자유주의 시장체계를 볼 수 있었다. 여러 곳을 보려고 하였으나 장소들이 너무 넓어 도저히 다볼 수가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식물원을 나섰다.
이후에 말을 타기 위해 나섰다. 택시 타고 가자는 우리의 의견을 묵살당한 채(?) 중국여인들의 의견을 따라 걸어서 약 30여분만에 말타는 장소에 도착하였다. 요금은 1인당 5원이었으며, 서툴러 혼자 타지 못할 경우 보조원이 따라붙는데 이 경우 2원이 추가된다.
말에 타고 달려 보니 이 드넓은 땅을 달리며 호령하였을 고구려인의 기백을 몸전체로 가득 느낄 수 있었다.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린 후 中街로 향했다 中街는 백화점등 각종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하는 곳으로서 우리나라의 시내 중심가를 연상할 만큼 화려하고 번화한 거리이다. 여러 가지 쇼핑도 하고 중국여인들의 도움을 얻어 물건을 사기도 하였다. 물건구입시 판매원은 통상 정가의 70%를 제시하는데 잘깍으면 30%정도의 가격에 물건을 구입 할 수 있었다. 예로 처음 220원을 부르는 진주목걸이를 끈질긴 흥정 끝에 60원에 살수 있었다. 거리의 모습들은 우리나라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東北藥房등 큰 약국이 몇 개 있는데 1층에는 1∼2십명의 판매원들이 분야별로 판매하고, 2층에는 여러명의 한의사들이 진단을 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구입 가격이 정해져야 있어 깍을 수가 없다. 우황청심환의 경우 북경에서 110원인 반면에 이곳에서는 94원에 살수 있었다. 그리고 웅담은 인기 있는 약품으로 간지방,피로해소,관절 등에 두루 효능이 있는 약으로서 200원대에서 800원대까지 비교적 비싼 가격에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웅담은 대부분 천연산이 아닌 집에서 기르는 곰에서 추출하는 것으로 중국인(공무원)의 말에 의하면 가짜는 거의 없다고 한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음식점에 들러 많은 요리를 먹었다. 어느덧 마음으로 가까원진 가운데 서로 즐거웠던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맛있는 식사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표시하면서 헤어졌다. 다시 한번 중국여성들의 강인함과 중국인의 친절함을 가슴 깊이 느끼며 즐거웠던 토요일의 하루를 떠나 보냈다.
일요일 아침 북경으로 떠난 학우들의 안녕을 염려하면서 중국유학생인 남학생과 다시 만나 아침식사를 간단히 빵과 만두로 때우고 五愛市場으로 향했다. 五愛市場은 우리의 남대문시장과 같이 재래시장의 성격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상상했던 것보다도 거대한 시장이었다. 우리나라 동대문, 남대문시장을 다 합쳐도 이보다는 크지 않을 거 같았다. 시장에는 거의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다만, 물건의 질은 우리보다는 많이 떨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상인들이 국가에다 세금을 내고 장사를 하고 있는데 얼마를 내는지는 정해져 있지는 않고 대강 받아 간다고 한다. 또다시 아직까지 정립되지 못한 행정체계를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시장을 구경하고 심양 시정부 광장으로 향했다. 심양시 정부 청사로 가는 길에 당구장(台球)이 있어 잠시 쉬어 갔다.(당구장은 모드 포켙볼) 조잡한 시설이 우리의 70년대 정도의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웅장한 정부 광장에 도착하였다. 일본식 건물로 심양역에서 약 10분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시청사와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차로 약 10분거리에 있는 西塔거리로 향했다.
西塔은 코리아타운(Korea-town)으로, "한인지역"이자 조선족 거리이다. 사방 1km의 거리로, 조선족 백화 상점과 한성 구물 광장의 빌딩을 중심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의 지역이자 상업의 지역으로, 소비의 중심 지역이다. 시부대로(市府大路), 연변가(延邊街), 신개도가(新開道街) 중심으로 한성 구물광장 빌딩의 뒤편에는 조선족 의원과 서탑 시장이 있다.
이곳은 주로 식품과, 환전, 복덕방 소개가 주 업무이고 많은 한국의 소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조선족 백화상점 앞에는 정창 호텔과 서울 호텔, 녕대 호텔의 빌딩이 있는 시부대로(市府大路)가 있고 조선족 백화상점 옆 건물은 조선문 서점이 있고 옆의 도로인 연변가는 노래방과 싸우나, 식당, 술집 등이 밀집된 거리이다, 따라서 많은 한국 사람이 오고 가는 서탑가는 보따리 상인이나 자영업자나 기업이나 단체에서 꼭 들러 보는 명소이다. 신개도가 에는 볼링장, 당구장, 식당, 카페, 한국음식 전문 식당가와 노래방이 있다. 심양시에는 4개의 탑이 있는데, 그중 서탑은 최근에 1998년 11월에 재시공하였다. 식당가의 비용은 중국음식점보다 비교적 비싼 편이다.
한 식당에 들어가 6인분의 삼겹살을 주문하였다. 역시 조선족 아가씨가 주문을 받았다. 오랜만에 먹는 한국음식이라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중국인 대학생도 상추쌈에 싸먹는 삼겹살 맛에 놀라고, 시원한 김치에 우리 음식의 맛을 음미하며...... 오랜만에 포만감에 적어 식당을 나와 太原街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太原街는 야시장이 열려 밤에 다양한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으며, 볼거리도 제공하고 있다. 이 거리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거리로서 각종 상점과 야시장이 들어서는 곳으로 수준이 높아서 그런지 비교적 물건값이 비싼 편이었다. 쇼핑하거나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모두 부유층 같이 잘입고 다녀 마치 서울의 압구정동에 온 느낌을 받았다. 거리가 너무 긴 관계로 한바퀴 돌고 나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KFC에 가서 콜라를 한잔씩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동하였다.
※ 必勝客(피자), 麥當勞(맥도날드)
太原街를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동북대학교로 향했다. 동북3성(길림성,요령성,흑룡강성)중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이다. 역시 웅장하였으며, 우리나라 대학에 비해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대학교정에서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몇마디 나누어 볼 기회가 있었는데 역시 일류대 학생들에서 풍겨 나오는 총명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이틀 동안 심양시의 여행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심양의 어느 곳이던지 혼자서 다닐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을 수 있었다. 더불어 잠깐 스치거나 함께 한 중국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현지 언어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해소될 수 있었다. 모두 즐거웠던 이들간의 추억을 고이 간직한 채 숙소에서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북경으로가는 기차여행"
북경여행기(6.14-6.16)
중국전통문화와 현대화 강의 후에는 북경 관광건으로 하여 잠시 모였고 총인원 20명 중 15명이 북경으로 가고 5명은 심양에 남아 시내관광을 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다. 우리 일행은 저녁식사 후 8시경 당교 공터에 집결하여 瀋陽北站으로 향하였다.
심양북역에 도착한 때는 8시 40분경. 북경행 기차 발차 시각은 밤 9시 25분. 3층으로 된 침대칸에서 10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 7시 25분 도착 예정이었다. 9시경 우리의 박지성 선수가 월드컵에서 골을 넣는 환희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아! 자랑스러운 박지성! 아! 대한민국! 환희의 순간을 뒤로하고 별빛마저 잠든 이국땅의 수도 북경으로 달리고 있었다. 6.14일 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들판, 世界杯의 태극전사, 3층의 新空調硬座特快(침대칸 열차), 輾轉反側의 이역만리.....
江海漂漂共旅遊 강물따라 표표히 떠도는 이몸
一樽相勸散窮愁 통술 서로 권하며 시름 풀었네
夜深醒後愁還在 깊은 밤에 깨어나니 시름 되오고
雨滴梧桐山館秋 오동잎에 빗방울지는 산관의 가을이여.....
오늘같은 분위기에 적격인가, 唐代 詩人 白居易의 <宿桐廬館>이 자연스레 흘러 나왔다. 어느덧 날은 희붐히 밝아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던 기차는 豊潤站을 거쳐 7시 15분경 우리를 北京站에 내려주었다.
북경은 3천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古都이다. 일찍이 기원전 1057년에 이곳은 제후국인 燕나라의 도성이었으며, 당시에는 라고 칭했다. 후에 秦왕조로부터 漢, 魏, 晋를 거쳐 隋, 唐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간 城은 줄곧 지역성의 행정중심지이면서 북방의 물자,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 서기 938년에 거란족이 북방에 요나라를 세우면서 이곳은 요나라 제2의 수도로서 南京이라고 개칭하였으며 燕京이라고도 하였다.
서기 1153년에는 여진족이 세운 金나라가 이곳으로 遷都하여 中都라 불렀으며 아울러 北宋의 卞梁(지금의 開封)의 모습을 본떠서 성지를 개조·증축한 동시에 궁전을 건축 하였다.
서기 1215년에 몽고의 기마병들이 중도를 공격하여 교외의 大寧宮(지금의북해공원)만 남겨두고 화려하고 웅장하던 金왕조의 궁전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서기 1260년에는 징기스칸(成吉思汗)의 손자 쿠빌라이(忽必烈)가 중도에 와서 7년 후에 그곳을 元朝의 수도로 삼고 대녕궁을 중심으로 大都城을 건설하였다.
서기 1403년에 明나라 成祖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 이름을 北京으로 바꾸고 다시 북경성을 축조하였다. 明의 북경성은 北城이 너무 광활하여 성을 수비하기가 어려웠으므로 元朝 대도의 북성 벽을 남쪽으로 500m 옮기고 南城 벽을 지금의 崇文門, 正陽門, 宣武門 일선까지 옮겼다. 明의 북경성은 대성, 황성, 궁성 등 3중으로 되어 있고, 후에 淸朝는 다시 明의 북경성을 바탕으로 수려한 많은 원림을 조성하였다.(원림은 아편전쟁 시기에 외세에 의해 불에 타는 변고를 겪었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였던 중대한 사건들 - 즉, 1919년의 5.4 운동, 1935년의 1.29 운동, 1937년의 7.7 사변 등은 모두 북경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중국 明·淸의 역대 황제가 매년 음력 동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풍년풍우를 기원하였던 天壇이었다. 天壇은 明朝의 成祖 永樂 18년 (1420년)에 약 273만 평방미터의 광활한 대지 위에 창건된 것으로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제단 건축물이다. 明·淸 건축예술을 집대성한 것이며 중국고건축물의 진품이라 하여 1961년 중국국무원에서는 천단을 일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 공포하여 보호하도록 하였다.
천단의 중심건축은 한 개의 큰 石臺로 丘라 하며 主殿은 祈年殿으로, 높이가 38m·직경이 30m로 설계가 정교하며 눈부시도록 화려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천단은 內壇, 外壇이 2개의 담으로 나뉘어지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북쪽은 둥글게 남쪽은 네모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는 "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네모나다)" - 즉, 당시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內壇에는 齋宮과 祭壇이 있다. 재궁은 황제가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재계하던 곳이며, 이곳의 본건물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천단 내부에는 위에서 언급한 원구·기년전 외에도 皇乾殿·皇穹宇·无梁殿·長廊 등의 주요 건물들이 있었다. 원구단의 북쪽에 있는 건축 물을 皇穹宇라고 하는데 그것은 원구제단에서 제사를 모시는 제위가 있는 곳이다. 황궁우의 바깥에는 원형의 담이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回音壁(메아리壁)이다. 담벽 남쪽의 유리문 사이에는 돌로 바닥을 깔은 통로가 있는데 황궁우의 남쪽계단 앞에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 깔려있는 돌을 三音石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돌판 중앙에 서서 건물 내부를 향해서 손뼉을 치면 웅장한 메아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한 나라를 세우면 먼저 종묘와 사직단을 건설한다고 한다. 농경 사회의 전통일수도 있겠으나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섬기며 백성을 사랑하는 동양의 전통 사상이 더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천단을 세워 제천의식을 행하고 국가의 풍년풍우를 기원하였던 점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엄숙하고 신성한 천단이 어느 덧 현대사회에 와서는 휴식공간이 되어 일반시민들의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시대의 변화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다.
천단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긴 곳은 천안문광장 서쪽의 인민대회당이었다. 인민대회당은 전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에 해당되며 1958년 10월부터 1959년 8월까지 10개월동안 준공한 것이다. 내부를 일단 일반인에게 공개한다는 것부터가 의외라는 느낌을 주었고 공항에서의 검색처럼 엄격한 소지품 검색을 하는 것도 특이하였다. 대회당 부근에서는 공안에 의한 노점상 단속이 엄격하였다. 이는 깨끗한 북경 거리를 조성하자는 것도 있겠지만, 중국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산뜻하게 각인시킴과 동시에 차기 북경올림픽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인민대회당 내부로 들어갈 때의 검색은 같은 테러를 우려한 것이라는 傳言이 있었다.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天安門광장이고, 가장 중심지는 장안가이다. 천안문은 수도 북경의 상징으로 원래 明·淸 황성의 정문이며 황제가 조칙을 반포하고 조서를 내리던 곳이었다. 천안문광장은 원래 봉건 조정의 광장으로 당시에는 광장 주변에 붉은 담이 있어서 일반인들은 절대로 접근할 수 없었고 신중국 성립 이후에야 주위의 담을 철거하고 증축공사를 벌여 50여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이 되었다. 천안문의 성루는 원래 황성의 남문이었는데 높이를 올리고 장식을 더하여 더욱 장엄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광장의 서쪽은 인민대회당, 동쪽은 중국역사박물관과 중국혁명박물관, 남쪽은 毛主席 기념당, 중앙은 인민영웅기념비가 자리잡고 있었다. 천안문광장은 중국의 수도 북경의 정치 중심지로서 여기에서 거행되는 정치적 행사는 전국, 전세계에 대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이래로 중국의 많은 중대한 사건이 모두 여기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10여년 전 일어났던 천안문 사건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날, 오늘날의 중국을 있게 한 정신적 지주 毛主席의 기념당을 들어가 볼 수 없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았다. 한 나라의 국가 지도자로서 그만한 인물도 흔치는 않을 것 같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고궁은 예로부터 紫禁城으로 불려왔고 明·淸 시대의 황궁이었다. 紫禁城에서 紫는 황제를 상징하며(天文에 紫微星이 있는데 자미성은 황제를 상징하며 황제의 신상에 중요한 변고가 있을 시 이 별자리에 이상조짐이 보였다 한다.) 禁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구역이란 뜻이다. 북경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明의 成祖 永樂 4년(1406년)에 착공을 시작하여 1420년에 기본적인 완공을 본 건물이다. 옛날 조선의 景福宮이 3년만에 완공을 본 것을 보면 규모도 규모려니와 꽤나 꼼꼼하게 건설했던 것 같았다. 이곳에는 24명의 황제가 기거하였으며, 중국의 역대 보물과 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고궁의 면적은 72만㎡이고 9000여칸의 방이 있으며 外朝(정사를 보는 곳)와 內廷(살림하는 곳)의 양대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고궁의 전반부를 外朝라 칭하는데, 太和殿, 中和殿, 保和殿 등 3대전을 중심으로 삼고 文華殿, 武英殿을 양 날개로 삼아 웅장하고 장엄하며 화려하였다. 태화전은 황제가 대전 의식을 거행하거나 의례를 연습하던 장소이고 보화전은 연회를 베풀어 외국의 귀빈사절들을 접대하던 장소라 한다. 후반부는 內廷이라 하는데 황제가 평상시에 업무를 보고 后妃와 함께 거주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고궁은 1911년 淸朝의 마지막 황제 宣統帝 부의가 퇴위할 때까지 490년동안 정치의 중심지로 존재하였으며,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청조가 전복된 이후에도 한동안 부의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자금성에서 가장 이채로운 것은 굴뚝이었다. 굴뚝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처럼 온돌식 난방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景福宮 交泰殿 후원의 굴뚝처럼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궁궐 건축에 못을 쓰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 건축기법과 같지만 다만 황제일가가 거처하는 곳이라 지붕을 황금색으로 장식한 것이나 모든 전각의 편액을 세로로 한 것은 우리나라 고건축물이나 궁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서울역 부근의 崇禮門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고건축물이나 궁궐의 편액은 거의가 가로로 되어 있다.) 和宮은 상당히 이국적인 건물이었다. 東單大街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舊內城의 바로 앞 동쪽에 위치한 라마교 사원인 옹화궁은 북경에서 가장 크다. 淸朝 康熙 33년(1694년)에 창건되었고 원래는 청조의 옹정왕부로 옹정제가 즉위하기 전의 관저이며 건륭제의 출생지였으나 건륭 9년(1744년)에 다시 라마교 사원으로 개명되었다. 사원내에는 라마교의 대표적인 불상, 불화가 몇 점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 안치된 불상은 웬만한 아파트 높이처럼 높아 보였고 佛前에는 향을 피우며 기원하는 참배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으면서도 내세를 기원하고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강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옹화궁이 이국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곳이라면 和園은 아름다움과 안스러움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북경 서북쪽 교외에 위치한 이화원은 총면적 290㏊의 풍광이 빼어난 황실휴양지이다. 원래는 12세기 금나라 제왕의 행궁이었으나, 淸朝 건륭제에 이르러 황가원림으로 증축하고 청의원이라 개칭하였다, 1860년에 청의원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렸으며 1888년에 서태후가 재건하여 이화원이라 改名하였다.
이화원을 구성하는 산, 호수, 섬, 回廊, 殿, 堂, 樓, 閣 - 속세의 武陵桃源이 따로 없으리라마는 안스러운 심정이 앞서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중국의 아픈 역사가 담긴 곳이라서 그랬던가......
국가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외세의 침입 속에서 비극적으로 탄생하였던 유적이 어서 더더욱 그러한지도 몰랐다, 이런 건물에는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눈물과 피와 땀이 스며들어 있는가! 자못 안스럽고 숙연하여지던 순간이었다. 민생을 외면한 국가 지도자들의 타락 속에서 탄생한 비극적인 건물은 곳곳에 여실하였다. 명 13陵과 중국의 대표적인 유적지 만리장성이 그러할 것이었다.
명 13陵은 북경의 북쪽으로 40㎞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명대 13명 황제의 陵(3대 永樂帝부터 최후의 崇禎帝까지 13명)으로 지면의 건축이 웅장하고 거대한 지하 궁전도 있는데, 현재 개방하고 있는 곳은 長陵과 定陵 뿐이다.
長陵은 明의 成祖의 陵으로 건축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定陵은 明朝 神宗(이분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구원군 파병을 하였던 황제이다. 그러나 明史에는 치적도 공적도 없는 暴君으로 그려져 있다.)과 두 황후와의 합장묘로 1956년에 그곳의 지하궁전이 발굴되면서 중국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정릉의 지하궁전은 前殿· 中殿· 後殿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깊이가 27m로 황제와 황후의 관곽이 후전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또한 궁내에서 출토된 금·은·옥·자기 등 진귀한 문물이 약 3000여 종이 된다 하였다. 살아서는 속세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못다 누린 영화를 저 세상에서 누리고자 하였던 定陵의 主人公들 - 그런 지극정성을 民草들에게 조금이라도 베풀었다면 후인들이 이리도 눈물 흘리며 안스러워 할까. 문득 경주의 신라고분들을 보며 새삼 속세 인간들의 욕심을 탄식하였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부질없는 욕심들인 것을 살아서는 왜 깨닫지 못했던가! 고분들이 살아있는 역사라 한다. 옛 史書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고분이나 묘지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처지라 그릇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백성들이 국가 지도자들의 은혜에 감복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지배층들이 백성들을 착취해서 만든 것이고 보면 그저 측은한 생각에 눈물만 흘렀다. 겉으로는 북방 오랑캐 흉노족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다는 萬里長城 - 꿈틀거리는 뱀같이 생긴 이 유적도 예외는 아닐 것이었다. 후대의 우리들에게는 좋은 관광유적이 된다 하여도 장성을 축조한 실제적 동기나 과정은 순수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안타까웠던 것이다.(장성은 후대에 와서도 상당부분 증·개축을 하였다고 한다.)
천하를 통일하였던 절대군주 秦始皇, 주변의 제후들 - 난세의 군주들이 빚어낸 유적들 앞에서 옛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장성 관리인인 듯한 분이 다가왔다.
- 是 里人?
- 我是韓國人.
만리장성 八達嶺關門에 부는 바람은 다사로웠다. 두 갈래 길에서 반대편에 인파가 많은 곳을 두고 아무도 오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며 나를 보고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편 쪽은 사진 찍을 곳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지만, 이곳은 그런 기대는 처음부터 접어두는 것이 좋으리만큼 다소 무덤덤한 곳이었기 때문일까. 난 사진을 찍으러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를 보러 왔다고 하였다. 언어가 유창했으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 같았는데, 아쉬운 일이었다. (사실은 두 갈래길 다 갔다왔고, 사진찍을 목적은 처음부터 없었다. 두 길 모두 경사가 가파른 곳이었다.)
아쉬움은 龍慶峽 강물에도 말없이 흘렀다. 양쪽 벼랑이 2,300m로 깎아지를 듯하여 그 기세가 매우 장관인 협곡형의 저수지 용경협. 이곳의 규모는 작아도 경치는 天下絶景인 長江三峽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朝辭白帝彩雲間
아침, 빛나는 구름 속에서 백제성과 작별하고
千里江陵一日還
천리 강릉을 하루만에 돌아간다네.
兩岸猿聲啼不盡
강 양쪽 언덕에는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데
輕舟已過萬重山
가벼운 배는 이미 만겹 산을 지났어라.
唐代의 시인 李白이 중국의 絶景 長江三峽의 백제성에서 노래한. <早發白帝城>을 강물 위로 띄우며 아쉬운 맘을 위로하였다. 옛시인의 낭랑한 음성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데, 강물은 그저 무심히도 흘러갔다. 古都 北京. 변변한 강줄기 하나 없이 한 나라의 수도로 유구한 세월동안 존재하여 온 것이 그저 대단하다 싶었는데, 名不虛傳이었다. 연이은 외세의 침략에도 꿋꿋이 버텨온 저력,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보존하여온 유물·유적들......
북경 구석구석에서 살아 숨쉬는 이러한 존재들이 북경의 오늘날을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닌가 싶다.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내일의 희망을 그려 가는 북경의 꿈은 결코 허황된 것도 어두운 것도 아닐 것이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발 딛다!!!
백두산기행기(6.20∼22)
우리 민족의 영산, 민족정기의 발원지 - 우리땅은 분명한데 우리땅이 아닌 가슴아픈 산. 중국에서는 白頭山이라 부르지 못하고 長白山이라고 부르는 곳. 우리의 심정을 하늘도 아는 것일까, 아침부터 빗줄기가 내리그었다. 아침 7시경 출발한 차(黨校 봉고차였는데, 너무 작아서 2대에 나눠 탔다)가 길림성으로 접어들 무렵 빗줄기는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졌다. 민족의 영산으로 간다는 설레임도 경건함도 흘러내리는 빗줄기에 묻혔다. 가는 곳곳에 營城子(?), 新城子 같은 고구려식 지명의 이정표들이 다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을 뿐. ("子"는 옛날 삼국시대의 고구려식 지명이라 한다. "신성자"는 확실하게 보았는데 "영성자"는 조금 애매한 상태. 하여튼 "子"가 붙은 지명은 다소 있었다.) 다행히 오후에 접어들면서 빗줄기는 점점 가늘어져 敦化에 가까워올 무렵 완전히
개어 이국의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돈화는 저 옛날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을 모아 渤海를 건국한 역사적 장소이다. 곳곳에 한글 간판이 많이 보였고, 돈화에서 二道白河까지 간다는 버스도 보였다. 단동에 갈 때의 풍경처럼 차창의 풍경은 한국적인 정취가 그대로 풍겼다. 강원도 아니면 내가 살던 경상도의 어느 산골같은 그런 정취였다. 중국어 간판만 없다면 여기가 한국이라도 하여도 그대로 믿을 것이었다. 운전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 헤매지만 않았다면 이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졌을 것을(나중에 들으니 운전기사가 장백산은 처음 오는 길이라,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長白山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도착한 것은 한밤중, 13시간 소요. 다시 빗줄기는 추적추적 내렸다. 산장의 木工들이 부르는 중국 민요에 취해 40분간 비를 맞으면서 노래를 들었다. 異域의 山莊 - 이곳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동트는 아침, 페루자에서 비신사적으로 안정환을 방출했다는 우울하고도 분기에 찬 소식을 접하며 우리들은 산행길에 올랐다. 두툼한 겨울옷에도 불구하고 산행길을 스산하게 한 것은 찬기온 탓이 아니라 우리 땅을 밟고 오르지 못하고 異域의 중국땅으로 오른다는 것과 世界杯의 소식인 것이었다.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때에는 경의선 열차를 타고 북녘을 통하여 오리라는 희망을 품으며 22일 심양 서탑거리에 가서 멋지게 태극전사들을 응원하여 오늘의 아픔을 씻자고 다들 결의하였다. 발목이 시리도록 우리땅을 밟아보며 올라가야 할 장백산인 것을 차량으로 가는 것은 너무나 아쉬웠다. 차량은 전혀 우리 뜻이 아니었는데......
천지 입구에 우거져 있던 침엽수림이 고도가 높아지면서는 점점 드물어지더니 2,000m 정도 올랐을 즈음에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런대로 선선하고 괜찮던 날씨마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온도가 급강하하고 바람마저 세차게 불었다. 먹구름과 짙은 안개까지 드리우고, 시야마저 흐렸다. 천지에 올라 애국가를 부르기로 한 우리들의 부푼 꿈은 짙은 안개와 구름에 흩어지고 장엄한 천지의 모습을 안개 속에 묻고 우리는 하산해야 했다. 내려오는 길에 長白瀑布에 들러 아쉬운 심회를 달랬다. 이백의 "飛流直下三千尺"의 詩句를 연상하게 하는 시원스런 물줄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장백산에서 하산하는 그길로 떠난 용정도 장백산가는 길만치나 험했다. 장백산이 俗人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면 용정은 독립운동하던 애국지사들의 넋이 잠든 곳이라 그 또한 俗人들의 가벼운 발걸음을 용납하지 않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용정! - 이민족의 첫동네로 불리우는 이곳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소속으로 길림성 동부의 장백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남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전체 면적은 2,590.8㎢이고 총인구는 27만여명으로 비농업인구가 농업인구보다 2만명 정도 많다. 한족과 조선족·회족·장족·묘족 등 10여 부류의 소수민족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이곳은 조선족이 전체인구의 68%정도를 이루고 있다,
용정은 조선민족의 개척지요 겨레문화의 발상지이며 독립운동의 유서깊은 근원지로서 우리민족이 처음으로 뿌리내린 유적지인 <용정지명기원지우물>·망국의 설움을 안고 강을 건너던 <사이섬(間島)>·민족교육의 선각자 김약연 선생의 기념비·항일의 첫 봉화를 올린 충의지사들의 넋이 잠든<3. 13의사묘>·저항시인 윤동주의 생가와 그의 묘소·先驅者의 넋이 깃든 一松亭과 해란강, 이상설 선생이 근대교육의 첫 종소리를 울리었던 <서전서숙>, 민족독립과 항일의 불씨를 지피었던 <대성학교> 등의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용정중학교 내에 자리한 윤동주의 詩碑 앞. 異域(중국)에서 태어나 異域(일본)의 감옥에서 한줌의 재가 되어 異域(중국)에 잠든 시인. 그토록 소망하였던 조국의 독립이었건만 정작 시인 자신에게는 살아 생전에 볼 수 없었던 안타까운 꿈으로만 남지 않았던가! 시신마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 돌아가신 孤魂이나마 조국의 독립을 지켜보았을 것이니, 이제는 편히 눈을 감으소서. 라고 위로를 하며 일송정으로 떠났다. 가곡 선구자(原名은 "용정의 노래")에 나오는 龍門橋·琵岩山을 거쳐 일송정으로 오르자 해란강이 눈앞에 흐르고 용정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애국지사들의 못다 이룬 꿈, 서전서숙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독립운동에 투신 - 끝내는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하여 "조국의 광복을 이루기 전에는 장사도 지내지 말고 유해도 조국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던 이상설 선생의 통한에 사무친 유언을 새기며 조국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요녕성 방송탑에 올라
6월26일(수)
우리는 모두 뒷풀이 겸 그동안 우리를 성심껏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요녕성 방송 탑으로 향했다. 탑높이 305.5미터의 높은 탑위에서 360도 쉬지않고 느리게 회전하는 식당에서 심양의 모든 풍경을 바라보며, 쉴 새없이 나오는 중국요리를 먹으며, 중국의 명주를 마시는 기분은 아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멋과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는 쉴 새없이 깐뻬이를 외치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심양시내의 휘황찬란한 빌딩들에는 하나 둘씩 조명이 켜지고 심양의 야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나오게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중국의 어디를 가든 중국은 낮보다는 밤에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했다. 공원, 광장, 빌딩 등의 조명은 그야말로 예술적이었고, 호화로왔다.
우리나라의 여느 시내모습이 매우 단순하고 단조로운 반면, 중국은 어디를 가든 특색있는 건물들이 있어 우리로 하여금 지루하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조명은 건물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 훌륭한 도구인 것이다.
시내중심 백화점의 물건들은 우리나라 신세계나, LG 백화점의 수준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으며, 시내를 거니는 아가씨들의 패션은 우리의 명동 아가씨들 패션에 버금가고 그 개방적이고 과감한 옷차림은 우리나라를 능가하고 있었다. 핸드폰 사용자가 90%에 이르고 노트북이 보편화 되어있는 중국, 그러나 시내만 조금 벗어나면, 우리의 6,70면대를 연상케하는 아이들의 모습, 당나귀를 이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등은 우리로 하여금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나라, 아름다운 자연을 공업화로 오염시키는 나라, 신비의 나라 바로 중국인 것이다.
6월23일(본계수동)
본계시는 심양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고속버스로 1시간 정도면 도착하며 전체인구
400만 여명이며, 시내 인구만도 150만 여명이 넘는다. 또한 본계시에는 매우 유명한 수동굴이 있다. 역시 교육원측에 요구하여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차를 배차받아 안내를 받으며 동굴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가기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큰 규모에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동굴 길이가 2.8㎞이고 안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평균 수심이 4m나 되었다. 모두들 동굴입구에서 거금 20원을 주고 겨울파카를 빌려 입은 후 동굴을 구경하였다. 15인승 보트를 타고 왕복 50분이 소요될 정도로 굉장히 큰 규모였다. 입구에는 많은 상인들이 리즈나, 꽃게 등 다양한 물건을 갖고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일부 러시아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서로 다 보이는 중국의 독특한 화장실도 보고....
본계시는 자연자원이 풍부하다. 이미 발견된 광산은 100여종이며 금속 광산 중에서
철광석의 저장량이 풍부하며 질량이 높아 등급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중요한 철광석 산지의 하나이다. 비금속광산 중 석탄과 석회석이 가장 유명하다. 본계 역시 중요한 중금속 공업도시중의 하나이다. 중국의 유명한 본계 강철공사와 북대 강철공사와 북대강철장 등의 대기업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가 중국 맞아?!
6월27일 - 28일(대련시 방문기)
'北方의 진주,라고 불리우는 항구도시 대련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칭니라 부르는 작은 어촌에 불과했으나, 겨울에도 얼지 않은 부동함임에 1898년 러시아가 야심적으로 조차권을 획득한 후, 파리와 같은 방사선 도로망을 구축하여 오늘날과 같은 대도시의 모습을 지니기 시작했다. 1905년 러일전쟁 후 승리한 일본에 의해 계속 도시건설이 진행되어 도시 전체의 분위기가 이국의 정취를 띄는 아름다운 항구이다. 현재는 경제 특구로 지정되어 한층 더 발전하고 있다. 대련의 특산으로는 유리 공예품과 어폐류 껍집을 이용한 공예품 등이다. 대련의 1月 평균 기온은 -5℃이며, 7月 평균기온은 23℃정도로 온화한 대륙성 해양기후를 띤다.
6월27일 오전 7시30분에 요녕성정치경제학원을 출발하여 도로주변의 자전거인파를 뒤로한 채, 고속도로가 보수공사중이라 국도를 타고 11시 10분경 해안선을 따라 해양관광도시인 대련시에 진입했다. 그동안 숙소였던 심양시와는 사뭇 다른 깨끗한 거리에 한눈에 보아도 이국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축양식과 곡선모형의 조형예술이 펼쳐져 있었다. 14시 15분에 대련시공무원교육원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한 후 15시에 대련시정부를 방문하여 외사부에 직원인 왕처장의 환영인사와 개괄적인 대련시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국어설명이 담긴 스크린을 보았다. 12,000㎢의 면적에 인구는 480만 명 정도된다. 해안선의 길이는 약 8,000㎞로 곳곳에 암초와 작은 섬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해수욕장, 해변 공원, 동물원, 화원 등의 관광객을 위한 시설도 갖추고 있다. 항구도시이며 수심이 깊고, 현재 중국에서 최대항구로 손꼽힌다는 대련시는 최대의 조선소와 도시전반이 해양관광도시로 조성되어 있으며, 녹화율 41%이상으로 가장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광장이 도로보다 더 중요시 한다고 한다. 6시30분경 대련시공무원 교육원장과의 만찬회를 갖고, 잠시 교육원앞에 탁 트여 있는 해안가를 바라보며 흡사 제주도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과 함께 심양시와는 전혀 다른 이곳에서 또 다른 중국을 느꼈다.
19시에 우리는 중국인들에 의해 건축물에 잘 지어졌다 하여 "미남자"라고 불린다는 현대 총본부건물 옆에 있는 백화점을 들린 후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 날 저녁 잠시 외출 허가를 받은 몇몇 직원들은 성해광장 주변을 다시 한번 들렸는데 이곳에서도 북경의 야경을 보고 탄성을 올렸듯이 탄성을 자아냈다. 어쩜 없는 환경 가운데 조경된 야경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는데 그러나 이들이 조성한 몇 안되는 조경 환경은 가히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경을 쓴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중국 공산당이 말하는 후발 학습의 주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평소보다 여유 있게 식사시간은 갖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직원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인근 해안의 해수욕장을 들러보곤 하였다. 여기에서도 많은 중년층의 중국인들이 해안을 가득히 메우고 이른 아침부터 수영을 즐기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큭 보자기를 둘루고서 옷을 갈아입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전 7시 반에 식사를 하고 8시에 려순을 향해 출발하였다. 잠시 후 8시경에 성해광장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서도 많은 중국인들이 아침부터 여가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10분간 정차한다는 말이 있었음에도 다들 광장에서 미니 오토바이, 자전거, 말 등을 타느라 정신 없었고 모두들 유쾌하게 30여분을 그렇게 보냈다. 다시 려순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차창밖으로 비치는 대련시의 모습은 많은 것을 보게했다. 중산로 주변을 달리는 전기차와 버스의 조화는 한국에서 오히려 배워야할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과거 외세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하였다. panasonic공장이 대련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고, 많은 중국인들은 sony보다도 panasonic을 선호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려순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해군기지로 외국인의 출입자체가 허용되지 않은 곳이었기에 겨우 버스안에서 문여사님의 설명을 들어야만 했는데, 러일전쟁시 일본이 승리하여 세운 백옥산탑과 이후 러시아의 승리 기념탑이 중국공산당의 관리를 받으면서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후인들이 보고 그때를 잊지 말자는 의지에서 그러한 것 같았다. 9시40분경 려순 교도소에 도착하였고 다들 말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교도소 앞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후 그곳 보안요원의 제지를 받게되어 아쉽게 입장할 수 었었다. 허가받지 않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려순교도소를 지나 진주집산지를 방문하게되었는데,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귀국 선물을 준비하느라 허비하게 되었다.(상점의 물건을 싹쓸이?) 이후 다시 교육원으로 돌아온 우리는 2시 30분이 되어 겨우 식사를 마치고 심양을 향해 출발하였다. 저녁 8시가 되어 도착하였음에도 학원식당의 직원들은 전혀 불편함 없이 우리들을 맞이하였고 덕분에 편하게 그 날 저녁을 보낼 수 있었다. 중국에서의 우리의 마지막 여행은 그렇게 막을 내리었다.
학습기 - 정치·경제·문화
6월10일(월)
1. 중국의 공무원 제도
주말의 여독을 모두 풀어버리고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다. 오랜 여행으로 피곤도 하련만 모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오전에는 중국어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요령성정치경제 연구원 교수이신 장지영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물론 요령성에 처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조선족 공무원의 통역을 받으면서 중국공무원제도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6월12일(화)
2. 경극에 대하여
오늘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오전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중국의 경극에 대하여 강의를 들었다, 조금은 딱딱한 강의지만 경극에 대해서 조금 알 수 있었다. 경극은 중국의 모든 전통극 예술 형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서 천재예술가들이 창조하고 발전시켜온 중국의 고전극은 독특한 자기양식을 가진 포괄적인 공연예술이다. 곧 중국의 전통음악 시, 창, 영송, 무용, 곡예와 무술이 하나의 위대한 예술로서 함축되어져 있다. 중국의 전통극은 하나의 창극 또는 가극이면서 서양의 오폐라나 오폐레타와 전혀 다르다. 한. 중. 일 세 나라에는 서양의 오폐라와 같은 전통극이 있는데 그 민족적 전통양식 측면에서 관점을 두자면 한국의 창극.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끼가 바로 그것이다.
독특한 형태의 종합예술인 경극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한의 중국화와 함께 중국의 3대 수도라 불리는 중국의 오폐라 경극은 세대에 구분없이 사랑을 받고 있으며 바로 중국 전통문화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18세기말 청나라 대에 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각지의 유명한 희곡 단체들이 북경에 모여 경축 공연을 하게 되었고 이공연들이 효시가 되어 1830년대 도광황제때에 여려가지 지방극이 북경에서 융합되어 발전한 것이 경극이라고 한다,
15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극을 감상하려면 반드시 경극의 미학적 특징을 알아야 한다. 일종의 종합무대예술인 경극은 중국의 전통적인 음악, 노래, 낭독, 춤, 서커스, 무술 등을 교묘하게 융합시킨 것으로서 서양의 노래, 춤, 연극이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므로 경극배우는 반드시 전반적인 기능을 연마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성룡이 경극배우 출신인 것을 보면 서커스, 무술 등이 경극의 중요한 요소임을 잘 알 수 있다.
경극배우들은 정확한 발음으로서 리듬을 맞춰 대사를 읊으며 또한 실생활의 모습이 판토마임과 같은 동작으로 표현된다. 짙은 화장을 하는 배우들의 분장을 살펴보면 개방적 정신과 충성심을 보이는 역은 검은색조의 화장과 수염으로, 익살스러운 역은 얼굴에 흰색과 무의를 그린다 타악기와 현악기가 주로 사용되는 경극의 음악은 매우 속도감이 있고 경쾌하고 배우들의 동작에 맞춰 박자가 조절되기도 한다. 경극의 의상은 주로 15세기 명나라 의상에 바탕을 두고있으며 이 시대의 의상은 색채가 선명하고 대조가 강하며 수공이 세밀하여 복장만으로도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품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3시간 동안 교육을 받은 내용을 정리해보니 경극에 대한 이해와 기초적인 지식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또한 문제는 있었다 우리나라의 창극과 같이 경극은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경극을 관람하는 사람이 드물고 경극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경극 또한 그 전통성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춰 재미있게 변화되어 가면 어떨까! 우리의 마당놀이처럼...
6월14일(금)
3. 중국전통문화와 현대화
"중국전통문화와 현대화" 강의 담당 전광청 선생님은 차림부터가 파격이셨다. 시골 농부 아저씨같은 손질하지 않은 부시시한 헤어스타일에 긴 장화를 신고 강의실에 들어오신 것이다. 선생님이기에 그런 차림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다소 괴짜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차림의 선생님이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더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왔는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중국 역사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먼저 중국과 한국·일본은 유교문화권 국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더욱이 중국은 유교문화의 근본 위에서 전통문화를 꽃피운 나라라는 것으로 서두를 여셨는데, 그 이후는 중국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많이 피력하셨다. 중국 역사와 문화의 과거와 현재,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셨는데, 요지는 이렇다.
과거로부터 면면이 이어 내려온 전통문화가 시간의 흐름 속에 옛 모습과는 상당한 변화를 보였고 현대화의 거센 파도에 밀려 제모습을 많이 잃었음은 사실이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이어받은 지금에도 현대사상이나 사회 진보화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많이 버려지고 있으나 그러나, 중국은 전통문화라 하여 무조건 배격하지는 않고, 이를 현대사회에 접목하여 비판적으로 계승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중국에게 배울 점일 것이다.
다만, 강의 내용중에 중국이 기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는 것은 옥의 티였다. 사실 중국이 숱한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던가! 다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6월18일(화)
4. 요녕성 인민대표 대외관계
요녕성인민대표대회는 요녕성의 국가권력기관이다. 요녕성인민대표대회의 대표는 요녕성의 14개성직할시 및 요녕성주군의 대표대회에서 선발된 것이다. 임기는 5년 요녕성 1계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는 1954년 8월에 개회해서 지금은 제9단계로 다가왔다. 제5차 회의는 2002년2월에 개회. 대표인수 612명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근거하여 헌법과 법률 행정법규와 어긋나지 않는 전제하에서 지방성법규를 제정반포하고 그것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와 국무원에 보고 발의한다. 헌법, 법률, 행정법규와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상무위원회 결의가 요녕성에서 준수, 집행되기를 보증한다. 국가계획과 국가예산이 집행되기를 보증한다. 요녕성의 정치, 경제, 교육, 과학, 문화, 위생, 환경 및 자원보호, 민정, 민족 등 중대기상을 토론 결정한다. 요녕성 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의 조성인원, 성장, 부성장, 성고인민법원원장, 성인민검찰원검찰장과 전국인민대표대회대표를 선발한다. 요녕성인민대표대회는 모두 7개 전문위원회를 설립 : 법제위원회, 내무사법위원회, 재정경제위원회, 농업과농촌위원회, 교육과학문회위생위원회, 민족교무외사위원회, 환경자원성향건설위원회, 각 전문위원회는 요녕성인민대표대회의 영도를 받고 성인민대표대회 패회기간에는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영도를 받는다. 각 전문위원회는 본급 인민대표대회 및 상무위원회의 영도 아래서 유관 의안을 심의 제정한다.
6월17일∼28일(太極拳)
5. 24식 태극권(二十四式太極拳)
24식 태극권은 중국 국가체육운동위원회가 1956년에 태극권의 동작 중에서 가장 필요한 24개의 동작을 개편·정리하여 보급시킨 것이다.
간단한 동작에서 복잡한 동작으로, 쉬운 동작에서 어려운 동작으로 나아감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대중 속에서 유행하고 있는 태극권을 수집하여 대중들이 쉽게 따라하고 배울 수 있도록 그 주요구성과 기술계통 등을 정리하였다. 전체 동작은 "기세(起勢)"와 "수세(收勢)"를 포함하여 모두 24개의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동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수련할 수도 있으며 자신의 신체상황에 맞추어 하나의 식(式)을 선택하거나 몇 개의 조(組)를 나누어 수련해도 무방하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아침은 태극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새벽이면 공원이나 광장 또는 숲속에서도 많은 사람들 특히 노인들이 음악에 맞춰 마치 춤을 추듯 능숙하게 태극권을 수련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들도 교육과정중 문화체험의 일환으로 태극권의 맛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태극권은 8식, 16식, 24식, 48식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우리들이 배운 태극권은 표준격인 24식 태극권으로 5일에 걸쳐 24식을 배웠으나, 아직 많이 부족하며 꾸준히 오랜시간 수련을 해야됨을 느꼈다. 태극권은 겉보기에는 동작이 상당히 부드럽고 유연하나 실제 동작을 따라해서 1식부터 24식까지 한번 해보면 상당한 운동이 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들 새벽 6시에 일어나 노곤한 몸을 이끌고 태극권 배우느냐 고생 많이 했다. 특히, 연세 지긋하신 몇분의 同學들... 그리고, 전날 과음으로 좀 피곤했던 同學들...
월드컵 열기에 잠설쳤던 同學들... 그래도 모두들 열심히 배웠다.
□ 동작명칭 및 설명
6월26일(수)
6. 시험보는 날
오늘도 변함없이 태극권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한국 축구팀이 4강에 올라 어제 모두 늦게까지 응원을 하랴, 시험공부하랴, 구술시험 준비하랴 모두 지친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20여일간의 중국어 교육을 마무리 짖고 오후에 시험을 치르는 날이라 그런지 모두들 약간은 긴장한 얼굴들 이었다. 필기 시험 뿐 아니라 구술시험을 같이 치르기에 그 부담감은 더한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한 후, 여느때와 같이 수업을 받은 후 오후 2시부터 필기 시험을 치렀다.
생각보다 시험문제는 짜임새 있게 출제되어 그동안 학습한 내용을 총망라하고 있었다. 일부 단어나 문장이 생각이 나지 않아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고...... 필기시험이 있은 후, 각자 돌아가면서 중국어로 발표발표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구술시험으로 교육원측에서 부원장을 비롯한, 교수 2분, 처장등이 발표자의 발음, 내용, 등을 평가하는 가운데 발표가 진행되었다.
그 동안 배운 중국어를 최대한 활용하고, 일부는 현지인들의 도움도 받아 정성껏 작성한 중국어로 된 문장을 발표하는 모습은 정말 너무도 진지했다. 모두들 처음보다 발음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일부 同學은 일취월장한 실력을 마음껏 뽐내었다.
필기, 구술 시험을 마치고, 학교측의 인사말과 격려사를 끝으로 우리는 모든 교과과정을 끝마쳤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모두 홀가분한 마음과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채 .......
견학기 - 산업시찰
6월11일(화)
<북릉공원(北陵公園)>
심양시 북쪽의 숲속에 자리 잡고 있는 면적 330만㎡로 청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과 그의 황후를 모신 능으로 청조의 관외 3릉 가운 데 가장 큰 능이기도 하다.
1927년 성 정부에서 공원으로 재정비하면서 북쪽에 있는 능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북능은 패루, 문루, 전각과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나게 한다.
정문에서 묘릉인 소릉(昭陵)에 이르는 참배도로에는 해태, 기린, 낙타, 말, 코끼리, 사자의 6쌍의 돌짐승이 늘어서 있다. 언덕과 산기슭 전체가 공원으로 되어 있어 한여름에는 녹 이 아름답기 그지없기 때문에 봄, 가을에 걸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끊이지 않는 공원이다. 이른 아침에는 태극권이나 기공으로 땀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우리들이 중국에 와서 처음 가진 관람수업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관람을 하였지만 정치경제학원측의 준비 부족과 무성의로 인하여 정작 태종과 그의 황후를 모신 능은 볼 수가 없이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문을 통과 할때마다 입장료를 내고 표를 사야하는데 학원측에서 정문 입장권만 구입하여 두번째 문에서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단지 공원 규모가 크다는 것과 중국사람들의 아직 준비가 부족한 사고방식을 엿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6월13일∼18일
동릉구 농업생산기지 ∼ 화평구청 방문기
산업시찰차 심양시 동릉구 농업생산기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곳은 드넓은 포도밭이 펼쳐진 농장이었다. 이곳 관계자는 중국의 발전된 농업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의 눈에는 아직은 자동화, 기계화가 덜 되어 있고 노동력에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가 상품작물의 종류가 포도나 토마토 등 몇 가지에 그치고 있어 좀더 상품작물 및 특용작물 개발이 필요할 것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화평구 구정부 방문시였다. 구정부 청사는 널찍한 공간을 점령하고 있긴 하지만, 위압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공간과 스스럼없이 어울어져자리하고 있어서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건물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그들의 서비스 헌장과 복무헌장이었다.
"당신을 위해 일류의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
"文明服務(친절)·規範服務(규범준수)·公正服務(공정 및 청렴)·限時服務(신속)" 그들의 최고 덕목은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친절이었다. 권위주의 일색일 것 같은 중국 공직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이었다.
한 직원에게 호적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중국에서 호적은 일반 관공서에서 하지 않고 경찰서에서 관리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보다 호적신고 절차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한 가지 예로 부부가 같이 살다가 나중에 인연이 없어 갈라진다해도 혼인증서가 있어야 이혼을 하고 이혼증서가 있어야 재혼을 할 수 있다 하였다.
일일이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층층마다 안내판을 세워 무슨 부서가 있고 그런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써 놓은 것은 방문인에 대한 배려일 것이었다. 그런 작은 배려조차 우리는 부족하지 않은가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주차공간이 넉넉지 않음은 결정적인 흠이었다. 지금이야 민원인의 방문이 적다 해도 나중에 민원인이 많이 방문하는 일이 있다면 주차문제가 벌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에피소드 1.
월드컵의 영광을 같이 했던 서탑거리에 대한 회상
1. 평양관의 평양냉면과 평양아가씨들
심양에는 동·서·남·북마다 각각 탑이 하나씩 있는데 그중에서 서탑이라는 곳의 거리는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 일명 "코리아 타운"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우리가 그곳에 발을 딛었을 때 "아니 여기가 서울이야? 중국이야?!" 이말이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던 분위기였다. 설운도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코요테의 "비몽" 24시간 편의점 안의 신라면, 꼬마김치, 각종 메뉴의 한식당, 심지어 찜질방까지.... 우리는 단동 여행후의 피곤함과 한국음식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코리아타운이라 불리우는 서탑으로 발길을 돌렸다. 택시에서 내리니 너무나 많은 한국간판이며, 한국식당 들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디로 갈지 무척 망설였으나, 평양관이라는 간판이 눈에 딱 들어왔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입구쪽에 한줄로 늘어선 평양아가씨들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북산사람 특유의 고음 소프라노톤으로 "어서 오시라요" 우리일행들 , 특히 몇 명 남자분들은 그냥 넘어가는 듯해 보였다. 어찌나 목소리들이 간들어지던지...
북한에서 직접 운영하는 식당인 평양관의 분위기는 조용한 한식당 분위기였으며, 화사한 원피스에 뽀얗고 발그스레한 화장을 한 평양아가씨들의 친절함 때문이지 손님도 상당히 많은 편으로 우리나라 식당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우리 일행들은 냉면을 주문하고, 평양아가씨들이 따라주는 술도 한잔 기울이고, 오랜만에 먹는 김치 게눈감추듯 해치우고 김치 조그만 더달라 부탁도하고, 우리나라 미인과 다른 느낌인 평양미인들과 시진도 찍고 다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 테이블은 나름대로 분주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국 음식점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주문을 받던 아가씨들이 식당 한가운데로 가더니 마이크를 잡고 공연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잘아는 북한 가요 "반갑습니다." "휘파람"등등 .. 우리 일행들은 환호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사진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들의 가는 고음의 노랫소리와 약간은 부자연스러운 미소와 흐드러지는 율동(?) ... 우리 일행들 너무 좋아했다. 냉면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식당분위기에 취해 냉면 맛을 평하는 것을 잊을 뻔해서 마지막으로 감히 냉면 맛을 평해보겠다. 일반적으로 냉면 맛은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이 맛있다고 옛부터 전해왔지만, 이미 다른 음식문화에 젖어서 그런가 난 솔직히 우리동네 칡냉면이나 비빔냉면이 훨씬 더 맛있다. 평양냉면에는 뭔가 삐진 듯하고, 입맛에 짝 ~ 악 하고 달라붙는 맛은 영없었다. 김치는 시원한게 먹을만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 많은 것을 보면 한국 음식이기 때문이요, 평양미인들의 친절한 미소와 미모 때문에 그곳을 찾는 손님 특히 남자손님들(?)이 많은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북한사람이랑 구속없이 말할 수 있었다는게 좋은 경험이었고, 정말 南男北女가 사실(???)인가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후문에 의하면 그 이후로 몇 차례 그 평양미녀들을 못 잊어 찾아간 이가 있었다고 하니, 이루지 못할 사랑의 아픔이여.....
2. 오 필승 코리아, 월드컵의 태극전사들을 응원하며
- 이거 답답해 환장하겠네. 뭐 알아들을 수 있어야지.
黨校 숙소의 TV가 중국어 원어 방송으로만 나오니까, 축구용어를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일반방송은 더러 알아듣겠는데 축구방송만큼은 我聽不 이라, 알아듣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이 더 많았다.) 서탑거리에 가면 한국어 방송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귀띔이 있어 만사 제치고 그리로 직행. (축구 방송 본다고 갖은 감언이설로 선생님을 꾀어 수업을 뒤로 미룬 적이 있었다. 그 덕분에 8시 한밤중에 수업을 한 적도 있었다. 수업시간에 시장 어물전의 동태눈 마냥 눈동자는 풀려서 가물거리지,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우리의 열혈남아 류광수씨를 주축으로 몇몇의 광축구팬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밥도 필요없다. 문화체험도 우리가 빨리 축구를 볼 수 있게 얼른 끝내달라!
요녕성 심양시 화평구청에 방문을 마치자 마자 기숙사에 들러 일제히 빨간티를 입고 서탑거리로 향하였다. 한족도 조선족도 모두 축구 열기로 서탑거리가 가득했다. 우리 어디로 가야하나 이리저리 헤메이다 찾은곳이 바로 희래원이라는 식당이었다. 빵빵한 한국방송에 이끌려 저절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조선족, 한국유학생, 사업차 온 사람들 식당안에 정말 한국에 있는 어느 식당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앞쪽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오랜만에 맛보는 약간의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 월드컵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빵빵한 sbs로 중국에서 볼 수 있다니! 정말 세계화가 되었군...한국말로 들으니 정말 실감났다. 역시 한국말로 들어야 감칠나지... 경기가 무르익을수록 우리의 응원열기는 더해져서 어느새 식당의 전 응원을 우리의 응원단장 류광수 주사님이 맡고 계신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정말 목터져라 외쳐댔다. 그런데 우리의 응원에 힘입어서 그런가? 너무 잘하는 것이었다. 그날 엄청 맥주 많이 먹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하는 경기였다.
- 여러분, 이번 경기에서 우리가 이기면 테이블당 맥주 2병씩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길 가게 주인이 했을까? 아니다. 그분이라고 어디 땅을 파서 장사할까! 우리가 했다. 거짓부렁 빈말로 허풍을 떤 것일까? 정답은 아님. 덤으로 술값까지 우리가 계산했다. 그 기분 다들 알 것이다. 이후에 우리는 몇 차례 그 식당에 가서 축구를 보았는데 경상도 진해가 고향이라는 주인은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을 지정석으로 만들어주었다. TV가 정면으로 보이는 지정석이라, 귀빈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게다가 류광수씨를 정식 응원단장으로 임명하여 마이크까지 마련해주셨다.
장백산 갔다 오던 날, 안정환 페루자 방출문제로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우리는 서탑으로 직행하였다, 장백산에서 산 붉은 티를 입고.(아쉬워라, 중국 어디에도 붉은 악마 옷은 없어 색깔만 붉은 것으로 단체구입하였다.) 그 때의 에피소드를 잠깐 하고 가면, 티셔츠는 촌스런 빨간색에 주황의 형광색으로 장백산이라는 글자와 천지의 풍경이 그려져 있는데 어찌나 촌스러운지, 동지의 분의기를 내기 위해 입기 입었으나 또 입고 싶지는 않은 옷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식당을 들어갔는데 그날은 손님이 엄청많았다. 물론 우리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도 꽤 있었는데 우리가 말을 시킬 때마다 실실 피하는게 아닌가! 눈도 잘 안마주치고... 이때 옆테이블에 온 사업차 한국에서 온 남자분이랑 잠깐 애기를 했는데, 그제서야 알았다. 우리의 옷을 보고 사람들이 북한 사람으로 오인.. 그래서 그렇게 쳐다본것아란다. 아니 이렇게 때깔 좋은 북한사람 봤시유~~~~~~~?
6월 22일, 우리는 해냈다 4강이다!
하늘도 우리의 정성에 감복하신게다. 4강 축하의 비를 내리시지 않는가! 일행 전원이 밖으로 나와 온 서탑거리를 휘저으며 "대한민국! 대한민국!" 외치고 다녔다. 밤새도록이라도 외칠 수 있었다. 그날 우리 열혈남아 류광수주사님은 너무 열광한 나머지 그 넘치는 열을 감당못해 타국에서 저 하늘로 갈 뻔했다. 괜히 열혈남아가 아니지....
우리가 월드컵 경기를 보고 기숙사로 들어갈때면 기숙사 앞 구멍가게 아저씨도 같이 대한민국을 외쳐주셨다. 이럴 때면 한국인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우리 同學들이 더 친할 수밖에 없게 만든 중국에서 본 월드컵, 가슴 뜨거웠던 월드컵....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그 사람들을......
부근의 소학교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교포 등 약 1,2천명의 인파가 몰려 응원을 하는 뜨거운 광경도 볼수 있었다.
에피소드 2.
특이한 중국, 알고싶었던 중국 생활
1. 중국에 정말 자장면이 있을까?
중국에 오면 누구나 궁금해 하는게 몇가지 있다. 그중의 하나가 "중국에는 자장면이 있을까?" 이다. 그런데 그 궁금증을 풀 기회가 드디어 왔으니...
중국에 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2시간이나 되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서점에 갔다오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파 허름한 한 중국식당에 들어갔다. 중국요리는 워낙 菜單이 다양하고, 맛이 특이한 것이 많아 주문하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한자에 능통한 은영언니가 있어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무엇을 주문해야 할까 한참 菜單을 들여다 보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한 여자가 먹고있는 것이 눈에 확아악 들어왔다. 앗! 자장면이다. 우리는 주저함 없이 "저거! 저거!"를 연발 외쳐댔다. 너무나 반가운 자장면! 정말 자장면이 중국에 있었구나! 중국어로는 炸醬麵(zhajiang mian) - 장을 볶은 면이라는 뜻이었다. 자장면의 유래를 잠깐 짚어보면 아래와 같다.
본래 자장면은 산동지방 요리인데 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중국 노동자들이 인천에 들어와 정착, 국수에 춘장을 넣어 비벼 먹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단다. 인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면서 자장면을 기본으로 한 음식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한 것이 1899년 경, 그래서 이미 한국에서의 자장면의 역시는 100년이 넘은 셈이다. 자장면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 6.25와 함께 중국인들이 줄어들자 한국인을 소비자로 한 음식 판매가 서서히 이루어지게 되었단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중국음식의 특징인 과다한 향신료가 차츰 줄어들었고, 물을 타 독특한 향을 줄이고 양파를 듬뿍 넣어 단맛을 강화하였으며, 감자나 당근이나 장면의 새로운 재료로 편입되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 자장면 가격이 15원이라고 하며, 당시 곰탕 가격과 같은 것이라고 하니까 즉 초기의 자장면은 서민들이 대하기 힘든 고급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 이제 중국 자장면에 대한 품평을 하자면.. 완전 꽝이다. 면은 칼국수처럼 넙적하고 매우 쫄깃쫄깃하다 못해 고무를 씹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양념은 우리나라 자장면보다 색이 흐리고 들어가는 야채도 적다. 그냥 그야말로 기름에 춘장 약간, 고기약간.양파약간. 기름만 잔뜩... 역시 자장면은 한국 북경반점이나 만리장성에서 만든 옛날 자장이 최고야!!. 그날 정말 우리나라 자장면이 그리웠다.
2. 중국의 거리풍경
중국에 처음는 사람들에겐 참 낯선 장면들이 많다. 최신형의 외제 스포츠카와 옥수수대나 수수대를 싣고 가는 나귀 수레가 같이다닌다. 게다가 자전거와 발디(자전거와 리어카를 결합한 중국의 운송수단)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정말 묘기에 가까울 정도로 물건을 실어 힘겨운 발디, 사람을 싣고 달리는 발디,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꼬치구이를 파는 발디, 죽부인처럼 생긴 통에 돼지를 넣어 운반하는 발디 등 다양하게 변형된 발디가 눈에 띈다. 이 발디는 중국인들에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발디는 택시에 비해서 차비도 훨씬 쌀뿐만 아니라 손님이 원하고 있었는데하는 구석구석까지 찾아서 데려다 주니, 짧은 거리의 이동은 역시 발디가 최고란 찬사를 해 줄만 하다. 중국의 거리는 신호등은 도대체 왜 달아났는지 머리먼저 드미는 사람이 먼저가는게 이곳에 교통문화인 듯 싶다. 자전거는 물론 오토바이 자동차 할 것 없이 교통 지옥이다.
중국은 오래된 낡은 건물을 부수어 새로 짓는 건축물이 많아 거리를 다니다보면 쉽게 건축현장을 볼 수 있다. 여러 용도의 건물을 짓는데도 대부분 사람의 손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는지 중장비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철골기둥을 세우기 위해 사람 키보다 더 깊은 땅을 포크레인 없이 사람들만의 힘으로 한 팀이 파내고 있으며, 또 다른 한 팀은 그 흙들을 자루가 긴 삽을 이용하여 다른 곳으로 파 옮겼다. 멀리 고속도로 건설현장을 보니 사람들이 떼를 지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저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공사가 끝날까하고 의문을 품게 한다. 중국은 인구가 많아 뭐든 사람으로 밀어 부치는구나 하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나중에 뉴스에서 보니 중국의 실업자문제도 우리나라만큼이나 심각하다고 한다. 만약에 건설 현장에 중장비를 투입해서 공사를 진행한다면 그많은 중국의 실업자들은 누가 구제해야하나?
아무튼 중국은 정말 희안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3. 웃통 벗고 다니는 남자와 미니스커트 입고 자전거 타는 여자
중국에 왔을 때 거리를 다니면서 놀란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 미니스커트입은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광경과 대낮에 남성들이 웃옷을 홀홀벗고 대로변을 거니는 모습이다. 사실 중국여자들은 날씬하다지만 중궁남자들의 배는 정말 박아지 엎어놓은 것처럼 둥그렇다. 과히 보기좋은 풍경은 아닐진데, 그들은 더운 것을 참을 수 없어서 그렇단다. 대로를 다니다보면 정말 멋쟁이 여자들이 많다. 한족여자들은 다리가 길고 가늘어 정말 미니스커트가 잘 어울린고 생각하는데, 그녀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실로 안쳐다볼래야 안쳐다볼 수 없게 만든다. 우리 일행들도 자칫 잘못하면 사시될 뻔한 일이 한 두번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 희안하다. 중국남자들은 별로 무덤덤하다. 여자인 나도 눈길이 몇번은 가는데 중국남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기차여행을 다녀온 우리 同志들도 기차 칸에서 옆에서 자는 아가씨 때문에 가슴이 떨려 잠을 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를 가끔 수행했던 학원장 비서도 아마 우리 남자 同志들의 시선을 잡는 행동이 좀 있었다. 그들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끄럼없이 속옷이 보이든 말든 편한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고개를 들 수 없는 때가 한 두번은 아닌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문화에 적응되지 못하는 우리들이 부끄러운 것이지 그네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기에 더욱 민망했다. 중국인들은 不理他라고 하여 절대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보다는 스스로 편한것에 익숙해진 민족이라 그렇다고 한다.
4. 다시 가고 싶지 않은 화장실
"우~~~~~웩" 중국에 있는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자 나오는 소리... 왠지는 상상에 맡긴다.
"중국에 가면 화장실에 문이 없다더라" 이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까? 시대가 21세기인데, 설마설마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였다. 그곳의 화장실은 칸막이가 없으며,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더욱이 볼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를 보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별 불편없이 살아가는 그들이 정말 신기했다. 어떤 곳에서는 화장실 사용료를 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장소에서 화장실 사용료를 징수했지만, 99년도 전인대에서 외국인에 대한 불편함을 개선하는 차원에서 공공시설에 대한 화장실 사용료 징수를 폐지하였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우연히 중국의 화장실문화에 대한 추론설을 찾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당 정부와의 전쟁에서 민을 통한 승리를 쟁취한 "마오쩌뚱"은 누구보다도 민중의 힘과 그들의 단결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56개 민족이 모인 하나의 중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 제 부문에 대한 효율적 통제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서구적 화장실 문화를 도입하면서 중국에 맞는 방식, 즉 허리높이의 옆 칸막이만 있고 앞문이 없는 화장실을 택하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용자의 불편함과는 상관없이 공산주의 정권 하에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화장실을 들여다보면 누가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으니 노동통제를 하기에 아주 유효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데서 당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사람을 사전에 차단하는 북한의 5호 담당제와 같은 역할이 되었을 것이며, 화장실 문이 없으니 다소간의 불만이 있는 사람도 낙서를 통해 그들의 감정을 적을 수는 없었으리라... 역사적으로 카리스마 정권이 늘 그러하였듯 그 당시 중국 공산당은 당에 대해서 어떠한 비판도 허락할 수 없다는 효율적 민중들의 통제수단으로서 중국의 특징적인 화장실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현재 중국의 화장실문화는 결국 역사적으로 이렇게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서 탄생된 비인간적 통제수단의 결과물임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듯 하지 않은가?! 현재 중국도 개방화이후로 서구의 화장실 시설을 갖춘 곳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공항이나 유흥지 등의 화장실 시설은 선진국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단 휴지가 없다는 불편은 있지만... 앞으로 더 많은 개방화가 이루어지면 중국의 화장실문화도 언젠가는 바뀔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다시 가고 싶은 향기로운 화장실이 되길....
5. 맞사지는 누가 제일 많이 ???
맞사지는 우리나라에도 잊지만 중국만의 특이한 직업이 아닐는지.... 우리 同學중에는 맞사지를 여러차례간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보지는 마라 우리나라의 인식과는 차이가 있으니.... 학원 주위에는 많은 맞사지집을 볼수 있다. 발마사지, 전신마사지......
가격은 각지방마다 차이가 있다. 심양에서는 발마사지(약 40분) 20원, 전신마사지 50원(약2시간) 깍을수도 있다. 그러나 호텔이나 중심가에 가면 이보다도 몇배이상 비싼곳고 있다. 그리고 이상한 유혹도???
맺 는 말
1. 지난 한달 간을 생각하면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고국에 돌아오니 성취감과 아쉬움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한 달간 정들었던 모든 사람과 헤어지고 나니 더욱더 그런 감정으로 빠져들게 되나보다. 서로 전혀 알지도 못하던 여러 동료들과 처음 만났을 때는 서먹함과 어색함이 다소 있었지만 중국에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 모두는 친형제처럼 지냈다. 그리고 처음 요녕성 정치ㆍ경제 학원에 도착했을 때 이곳 직원들하고 서먹서먹함도 있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한가족처럼 즐겁게 지내고 정도 많이 들었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올 때는 각자 나름대로 많은 꿈과 목표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 목표가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각자 나름대로는 무언가를 얻어갔다는 뿌듯함이 가슴 한구석 자리잡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잠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한달간 이곳 생활들이 주마등처럼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무언가를 배우겠다며 아침 일찍 강의실에 나와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으며 교수님들의 강의를 청취하고, 간혹 어설픈 발음이 나오면 전 교육생이 웃음보를 터뜨리고, 어떤때는 교수에게 난처한 질문을 하여 교수들을 당황하게 만들고,(특히, 때붙이 형님) 중국어를 한마디라도 더 배우려고 대학생들로부터 늦도록 과외를 받고, 이른 새벽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태극권을 배우고, 중국 공무원들과 배구를 하며 친목을 도모하고 연수생들끼리 층별로 나누어 족구대회를 하며 우의를 다지고, 한국 연수 왔던 중국공무원들을 다시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서탑에서 월드컵중계 한국방송을 청취하며 목이 터져라 한국팀을 응원하고......
이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되어 우리 모두 가슴속에 오래도록 기억되어 중국에 대한 열정의 불씨로 승화되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시 한번 재도전의 발길을 내디딜 때 밑거름이 되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2. 주말 활동
첫주말에는 연수생끼리 단동을 둘러보기로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 단동행에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여행하는 많은 중국사람들과 서툰 중국말을 이어가며 대화를 나누며 4시간의 여행 끝에 단동에 도착하여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적막한 북한땅을 바라보며 아! 통일은 언제 오려나 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었다.
두 번째 주말에는 북경을 가기로 하고 출반 전날 기차표를 예약하려고 하였으나 북경행 기차표는 최소한 7일전에는 예약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무척 당황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북경 가는 밤기차에 기차 몸을 싣고 다음날 아침 도착하여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려고 북경시내를 여기 저기 열심히 다녔고 특히 용경협의 아름다운 산수 풍경을 보고 우리 모두는 넋을 잃고 감탄사만 연발하였다. 저녁에 호텔에 도착하여 투숙하려고 하였으나 북경에서는 외국인이 호텔에 투숙하려면 여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하여 우리들은 여권을 분실할 염려가 있다고 연수원에 두고 왔으니 낭패가 아닌가. 그래서 급기야 한국 여행사에 연락하여 여권 사본을 팩스로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하지마 북경은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운 역사의 도시로 우리 마음속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셋째주에 우리가 간 백두산은 정말 힘든 여행이었지만 가장 기억속에 남는 것 같다. 비좁은 봉고차에 몸을 싣고 서로의 몸을 부딪기며 13시간을 달려가 아침에 백두산에 올랐으나 짙은 안개로 인하여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하였을 때의 아쉬움과 실망감 그러나 내려오는 길에 장백폭포의 웅장함으로 백두산여행의 서운함을 달래고 백두산을 관광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렵게
시간을 내어 용정에 들러 일송정과 해란강 바라보며 우리 조상들이 뻬앗긴 나라를 되찾으려고 이역만리 만주벌판에서 고통의 눈물을 삼키며 항일운동을 하였을 우리선조 들을 생각하며 가슴이 한없이 메여져옴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주 단동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안에서 각자 연수기간동안에 느낀 점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또 노래도 돌아가면서 한마디씩하며 한달간을 회상하며 석별의 정을 미리 나누었던 일은 한달을 마무리하는 좋은 자리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2. 좋았던 점 및 아쉬웠던 점
〈좋았던 점〉
가. 중국과 한국은 경제 여건이나 상황이 현저히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면 우리가 요구한 사항들을 적극 반영하여 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우리가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또 주말에 연수생들끼리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시간을 잘 안배하여 주었고 학원측에서는 연수일정에는 없는 본계시 수동 동굴 등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 원래 중국의 요리는 향(시향차이)이 많이 첨가되는 관계로 한국사람들이 먹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으나 학원측에서는 특별히 우리연수생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들을 많이 준비하여 주었고 요일별로 메뉴를 편성하여 우리들이 중국에서 한달동안 생활하는 동안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다. 학원 측에서는 일단 계획이 정하여지면 그 시간에 대하여는 시간을 철저히 지켜주었고 교수들도 강의시작 10-20분전에는 미리 도착하여 준비하는 열의를 보여주었으며, 또한 요녕성 정치경제 학원 모든 직원들은 우리들이 기숙사 등에 거주하는 동안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었다.
라. 교수들에게 맡겨진 강의에 대하여는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여 열과 성의를 다하여 가르쳐 주었다. 이외에도 학원측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많은 사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여주었다.
마. 우리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옆에 유학생 기숙사가 위치하여 자연스럽고 쉽게 학생등 현지인과 잡촉하고 어울리며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접할 수가 있었다.
〈아쉬웠던 점〉
가. 전체적인 강의시간 배정은 오전에는 어학강좌 오후에는 문화 및 역사에 대하여 강의하고 현지견학 등으로 일정이 편성되어 있었으나 오후 시간에 이론 과목 등이 너무 많이 안배되어 있어 우리 연수생들이 직접 도시 등을 돌아보며 현지체험 등을 할 시간이 부족하여 아쉬움이 많았으므로 다양한 현지체험을 할 수 있도록 오후시간의 일부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나. 백두산 여행 일정이 너무 촉박하게 안배되다 보니 주변에 많은 볼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쫓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며, 조그만 봉고차로 먼거리를 이동하다 보니 여행에 불편함과 안전에도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다. 차후에는 좀더 여융있는 일정을 편성하고 기차나 대형차로 이동하여 여유를 가지고 역사의 혼이 깃들인 용정도 함께 느긋하게 볼 수 있도록 일정을 배려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다. 학원측에서는 농·공단지 자동차생산시설 및 관공서 등을 방문할 수 있도록 연수일정에 포함하여 일정을 편성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방문지에 가서 우리가 보고 배울 내용이 빈약하였고, 특히 자동차 생산시설은 가동도 되지 않아 아까운 시간만 낭비한 경우도 있었으며, 또한 우리 연수생들은 관공서를 견학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공무원 제도나 시설 등을 비교하여 보기를 바랐으나 일부 시설만 견학하고 자세한 브리핑이 없다보니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라. 전체적인 연수일정이 촉박하다보니 본래 어학연수로서의 효과가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일정을 2개월로 하는 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40일 정도는 되어야 연수 효과가 나지 않을까 생각이 되며, 보다 어학에 대한 사전 준비과정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3. 중국에 대하여 배울 점
가. 중국은 현재 개혁 개방이후 경제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는 또 한 그 현장을 직접 보고 들으며 배웠다. 그들의 움직이지 않는 듯한 느긋함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큰 에너지가 용솟음치고 있으며 중국 국가 운영의 최우선 목표도 경제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중국의 지도자들도 이러한 여건을 조성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에 두려움 마저 느꼈다.
나. 중국은 현재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외국자본을 적극 유치하고 있으며, 그 혜택 또한 파격적이다. 우리가 다녀온 요녕성만 하여도 외국인을 위한 공단을 조성하고 다양 세제 혜택과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규제를 풀어 외국 자본을 적극 유치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일에 지방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관료들 또한 이일에 앞장서서 모든 일을 지원하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 중국인들은 전반적으로 문화 및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또한 문화재를 잘 이용하여 관광자원화하고 있어 개발가능한 곳과 보존할 곳을 잘 구분하여 관리하여 나가고 있다.
라. 중국은 사회주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남녀평등이 일반화된 나라다. 결혼한 여성일지라도 대부분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직장내의 승진기회에 있어서도 남녀차별이란 없다. 남자든 여자든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어느쪽이든 먼저 돌아온 쪽이 식사준비를 한다. 중국에서는 남녀라는 단어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보수적인 면이 강한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한번 앞선 신세대 사고방식이 베어있다.
마. 중국인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말도 있다. 자기 일이 아니면 철저하게 외면하고 간섭도 하지 않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것을 고정화시킬 필요는 없다. 의외로 친분관계가 성립되면 의리가 있으며 또한 중국인들은 외모보다 내실을 중시하여 일을 처리하고 있으므로 매우 실리적인 면이 있다고 하겠다.
4. 우리의 다짐
작년은 연수기간이 두달이라 일정이 다소 여유가 있었지만, 금년은 한달이라 연수 일정이 너무 짧아 일정 또한 빨리 지나간 것 갔다. 짧은 연수기간이었던 만큼 우리 모두는 더 열심히 공부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더 많은 노력을 한 것 같다.
일례로 중국어를 한 마디라도 더 배워보려고 새벽시장도 가보고, 버스도 타보고, 물건도 사보고, 이 모든 것이 중국을 좀더 알려는 뜨거운 열정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중국이란 큰 나라를 한달간이란 짧은 시간에 이해하고 알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중국이란 나라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나라의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려고 계속 노력할 것 것이다. 올해는 특히 한·중 수교 10주년이기도 하여 우리가 중국에 대하여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다가서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중국은 현재 한국과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교류하고 있고 요녕성과 경기도도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로서 오래전부터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앞으로도 좋은 관계가 지속되리라 믿는다. 이제 우리는 고국에 돌아와서 각자 맡은 바 일로 돌아 왔지만
중국이 빠르게 변하는 모습도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우리들의 중국을 알려는 열정을 계속 키워나갈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들은 더 큰 꿈을 가지고 중국호에 몸을 실어 우리의 큰 꿈을 실현시켜 볼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가 그 동안 중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업무와 우리의 주변 상황에 잘 접목시키어 경기도와 요녕성이 앞으로도 좋은 동반자가 되도록 우리 모두의 역할을 다하도록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 연수생들이 연수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경기도공무원교육원 관계자 여러분 및 요녕성 정치경제학원 관계자분께 감사하다는 말을 거듭 전하고 싶다.
경기도 공무원 중국(요령성) 연수기
〈제2기 : 2002. 6. 6 ∼ 7. 1(25일간)〉
2000. 10. 31
차 례
○ 서론
○ 연수개요
○ huanying! huanying! hanguo gongwuyuan!
○ 우리의 여행기
- 강건너가 바로 우리 조국!(단동여행기)
- 중국아줌마 대단합디다!(심양여행기)
- 북경으로 가는 기차여행(북경여행기)
-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발 딛다(백두산기행기)
- 요녕성 방송탑에 올라
- 여기가 중국 맞아!(대련시 방문기)
○ 학습기
- 중국의 공무원제도
- 경극에 대하여
- 중국전통문화와 현대화
- 요녕성 인민대표 대외관계
- 24식 태극권
- 시험보는 날
○ 견학기
- 북릉공원
- 동릉구 농업생산기지 ∼화평구청 방문기
○ 에피소드 1
- 월드컵의 영광을 같이 했던 서탑거리에 대한 회상
- 평양관의 평양냉면과 평양아가씨들
- 오! 필승코리아, 월드컵의 태극전사를 응원하며
○ 에피소드 2.
- 이상한 중국, 알고싶었던 중국생활
- 중국에 정말 자장면이 있을까?
- 중국의 거리풍경
- 웃통벗고 다니는 남자와 미니스커트입고 자전거타는 여자
- 다시가고 싶지 않은 화장실
- 맞사지 누가 제일 많이 갔어!?
○ 맺음말
서 론
1993년도 경기도와 중국 요령성간 자매결연이 체결된 이후 양 도성간에는 경제사절단 방
문, 공무원 교류근무 및 교류연수 등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여 오고 있으며, 특히, 2001
년부터는 어학교류 연수를 통해 더욱더 양국간의 이해 증진에 노력하고 있다.
어학연수교류는 양 도성간 우호증진과 양국의 행정, 문
화 등의 이해의 폭을 증진시키고 실무공무원의 어학능력
을 배양하여 다가오는 서해안 교류시대에 대비한 국제 인
적자원 육성을 목적으로 실시되고 있으며, 경기도 연수단
은 6월6일부터 7월1일까지 중국 요령성 정치경제학원에
서 요령성 연수단은 5월6일부터 5월31일까지 경기도 공
무원교육원에서 각각 실시하였다.
우리 연수단은 중국의 생활습관, 문화, 전통, 역사 등에 관한 철저한 고찰 등 자료 준비와 4
주간의 짧은 기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언어능력의 극대화를 위한 어학공부 등 철
저한 사전 준비를 한 후 출국하였으며, 연수는 了寧城 沈陽市 和平區 五裏河街에 위치한 了
寧城政治經濟學院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와 식당을 이용하며 어학교육과 문화체험등 활발한
연수생활을 하였다.
연수활동(進修漢語)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진행되었으며, 오전 8시에 수업이 시작되어
2시간은 조선족 교수가 가르치는 독해, 2시간은 한족 선생님이 지도하는 청취 시간이었고,
12시에서 오후 2시까지 점심시간을 오후에는 5시까지 중국역사, 공무원제도, 중국사상 등
강좌와 고적지 및 산업시찰, 기관방문등의 중국생활에 대한 체험학습으로 진행되었으며, 주
말은 자유 체험시간으로 여행 등을 통해 일상적인 생활 언어 습득과 중국문화 체험을 하는
것으로 일정이 진행되었다.
새벽시간 農産物市場 看看, 점심시간을 이용 현지 대학생이나 교사들로부터 개인교습을 받
는 등 어학능력 향상을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으며, 주말등 과외 시간을 활용하여 심양시장
에 위치한 五愛市場(우아이스창), 생필품 도매시장과 번화가에 위치한 中街(중지에),太原街
(타이위엔지)등을 둘러보며 중국인들의 생활 모습을 관찰하고 경험할 수 있었으며, 한인 거
리인 西塔에서 가슴 뭉클한 월드컵 열기를 함께 느끼고 북한 식당을 찾아 통일의 열망을 가
슴속 깊이 새길 수 있었다.
단동시에서 신의주지역과 끊어진 압록강 철교를 바라보고, 우리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의 천
지에 올라 조국 분단의 아픈 현실에 눈시울을 붉혀야 했다. 또한, 용정에 있는 대성 중학교와
일송정을 방문하여 머나먼 이곳 만주 벌판에서 조국해방을 위해 온갖 고난 속에서 몸부림쳤
을 선조들의 얼을 되새기며 깊은 감회에 젖어 보기도 했다.
중국은 약 70%이상의 주민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이지만 눈부시게 발전된 북
경이나 대련시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잠재된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20세기와 21세기가 공존하는 나라로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는 세계무대에서의 역
할이 큰 비중으로 다가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어 중국에 대해 균형적인 감각을 갖고 이해하
는 것이 현명하다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번 체험이 앞으로 다가올 서해안 시대 한국과 중국의 우호협력 관계를 발전
시키는데 소중한 밑걸음이 될 것으로 확신하며 이런 소중한 기회를 마련하여 주신 도지사님
과 중국 요령성장님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아울러 우리 연수단 모두는 경기도와 요령성의 우호협력관계를 돈독히 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할 것을 약속드리며, 서해안 시대를 열어 가는 첨병 역할을 위해 더욱더 정진해 나갈
것입니다.
2002. 10. 31
제2기 한국경기도 공무원중국어 연수단 일동
연 수 개 요
○ 과 정 명 : 경기도 - 중국 요녕성 공무원 어학교류과정
○ 연수인원 : 총 20명(도 4, 시군 16명)
- 단장 1명, 부단장 2명(남,여 각1명)
○ 연수기간 : 2002. 6. 6 ∼ 7. 1(25일간)
○ 연수장소 : 요녕성정치경제학원(심양시 화평구 오리하가 18호)
○ 연수목적 : 중국어 어학연수, 문화체험, 산업시찰
○ 연수방법 : 합숙연수(숙소 : 1인 1실)
○ 연수일정표(일일)
o 06:00 ∼ 07:00 기상 및 운동(태극권)
o 07:00 ∼ 08:00 아침식사
o 08:00 ∼ 11:40 중국어학습(독해 및 청취)
o 12:00 ∼ 14:00 점심식사
o 14:00 ∼ 17:00 중국문화체험(강좌, 산업시찰, 기관방문)
o 17:00 ∼ 18:00 저녁식사
o 18:00 ∼ 22:00 자유활동(팀별 시내견학 및 개인 과외학습)
o 22:00 ∼ 취침
※ 토·일요일은 팀별 문화체험활동(단동시, 북경시, 대련시, 심양시)
huan ying! huan ying hanguo gongwuyuan
6월6일(목)
아! 드디어 중국으로 가는 날이다. 인천공항에서 우리는
8시에 만나 떠나기로 되어있었다. 다들 조금은 긴장되고,
들뜬 표정들이 얼굴에 영력하다. 월드컵 기간이라 공항은
평소보다 외국인, 내국인들이 많다고 듣고 왔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티켓팅을 하는데도 줄을 길게 서야 했다. 다
행이 단체여행이라 좀 더 빨리 티켓팅을 마칠 수 있었다.
예정보다 다소 늦은 10시15분에 출발하여 12시15분에
심양공항에 도착하였다. 공항에는 주영생 요령성 정치경
제학원처장을 비롯한 직원 몇 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역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문화에
어울리게 요란스럽지 않은 간소한 환영식이었다.
공항으로부터 학원까지는 약 30분이 소요되었다. 차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중국의 첫인상
은 역시 광활한 땅이라는 것이다. 어렴풋이 그 의미를 추측할 수 있는 간판이나 공장
들.........
도착 후 곧 바로 낯선 분들의 환영을 받으며 학원의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숙소는 붉으스레
한 벽돌로 지은 4층 건물이었으며, 뒤편에는 유학생 기숙사가 자리잡고 잇었다. 1인1실로 각
방에는 침대1개, 의자3개, 책상1개 T.V 1대, 전화1대 샤워장 겸 화장실(나무로 된 변기 뚜껑,
흔들리는 세면대, 휴지 1통, 세면비누, 칫솔, 치약 각 1개)을 갖추고 있었으며, 약간은 부족
한 느낌이었으나 그래도 혼자만의 공간이라는 생각에 호기심과 함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
다. 16시부터 입교식이 진행되었는데 양국을 대표한다는 의미에서인지 다소 엄숙한 분위기
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들 모두 정장 차림인데 반해 그들은 노타이차림의 자유복장이 사회
주의 국가의 평등사상과 우리와의 전혀 다른 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특히, 켐코더를 들고 촬
영하는 사진기사는 츄리닝 차림을 하고 있어, 우리의 정서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측
면을 엿볼 수 있었다.
저녁에는 만찬연회가 학원건물 1층에 있는 식당에서 개최되었다. 중국에서의 첫 술자리라는
다소의 긴장감을 갖고 함께 하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동질성을 느끼게 되며 자연
스럽고 유쾌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평소 중국인들이 술을 많이 먹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
으나, 의외로 우리 사회의 폭탄주나, 잔 돌리는 등의 술 문화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이 자리
에서도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평등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얼큰하게 취하고 분위기가 최고
조에 이르자 중국인들이 우리의 "아리랑"을, 우리측에서는 "만남"을 노래하며, 이렇게 우리
의 25박26일의 중국연수는 시작되었다.
타국에서 눈뜬 첫날아침
6월7일(금)
모두들 아침 일찍 먼 타국의 아침을 맞이하였다. 우리나라보다 햇살이 일찍 창가를 넘어 우
리의 얼굴을 비췄다. 대부분 5∼6시경에 잠에서 깨어나 앞으로의 연수생활을 다짐하는 마음
으로 책을 펼친 사람, 낯선 새벽시장을 구경하는 사람, 아침운동을 하는 사람등 비교적 차분
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7시부터의 즐거운 아침식사 시간을 가졌다. 밥, 만두, 콩국,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반찬들 아직 중국음식에 익숙해 있지는 않지만 다들 맛있게
먹었다. 한편으로 우리 입맛에 맞추려는 요리사의 정성을 깊이 느낄수 있었다. 학원의 착오
로 안내서에 수업 시작시간을 8시30분으로 착오 기재한 관계로 당초 수업시간인 8시보다 늦
은 9시경에야 수업이 시작되었다.
첫 시간(8:00∼10:00)은 조선족이신 李甲振선생님께서 독해부분을 강의하셨다. 연세가 지
긋하신 모습에 선한 인상이 우리의 옛날 자상한 이웃집 아저씨 또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연상
케 하는 모습이었다. 둘째 시간(10:00∼12:00)은 聽力(팅리)시간으로 張翠林선생님 시간으
로 우리들보다 나이 어리고(26살), 까무잡잡한 피부에 둥그런 큰 눈을 갖은 중국한족 선생님
이었다.
12시 수업 종료 후에는 자습시간을 가졌다. 다들 공부보다는 삼삼오오 짝을 찾아 시장 등
주변 거리도 돌아보고, 노트나, 필기도구, 생활 필수품 등을 구입하며, 앞으로의 생활에 필요
한 준비의 시간을 가졌다. 이렇게 둘째 날의 하루를 보냈다.
- 우리의 여행기 -
강건너가 바로 우리조국!!!
단동시여행기(6.8∼6.9)
중국에서의 두 번째 밤을 떠나보내고 첫 주말을 맞이하
였다. 오늘은 수업이 없는 날로 요녕성 북동쪽에 위치한
단동시로 여행을 가기로 한 날이다.
단동시는 압록강을 가운데 두고 북한의 신의주와 마주한 국경도시로 약 50만명 정도의 인구
가 살고 있다. 중국과 북한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평양과 북경을 달리는 국경열차가
이 단동시를 통과하고 있다. 유명한 관광지로는 압록강공원과 금강산공원이 있는데, 압록강
공원은 북한과의 국경을 흐르는 압록강의 강 언덕에 있는 공원으로 압록강대교가 아름답기
그지없으며, 압록강을 따라 모터보트나 소형 유람선을 탈 수 있다. 금강산공원은 시내 북서
쪽에 있는 공원으로 여기에서는 북한까지도 볼 수 있다.
도시의 외곽, 산기슭에 건립된 박물관에 올라서면 단동 시내와 압록강 그리고 멀리 신의주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곳에는 한국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형제국이였던 북조선
을 돕기 위해 참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전리품들과 문헌들이 사진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
다.
한때 언론에서 보도되어 우리에게 알려졌던 모택동에게 중공군 참전을 요청한 김일성과 박
헌영의 친필서신이 바로 이 박물관의 소장품이다.
박물관에는 여느 전쟁 박물관과 같이 전쟁 당시에 사용된 무기들이나 군복들, 당시의 종군기
자들이 촬영한 전쟁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 당시의 재산피해나 중국의 각 성별로 참전한 군
인의 수, 사상자의 수 같은 통계도 전시되어 있다.
아침 식사후 서둘러 택시를 타고 심양역에 도착하였으나, 기차시간 착오로 인하여 1시간동
안을 심양역 주변을 각 팀별로 구경한 후 9시15분에 단동행 기차에 오를 수 있었다. 시끌시
끌한 역전 대합실의 분위기를 만끽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차에 올랐다. 약 4시간여의 기차
여행이지만 모두들 낮선 곳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현지에서 어학을 배우려는 욕구로 열심히
들 중국인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일부는 한족 여대생과 담소하고(물론 미숙하지만 안 통할
때는 손짓, 몸짓 해가며) 일부는 한족 아줌마와 열심히 책 찾아가며, 듣고, 말하고 이야기하
며 언어에 대한 욕구를 마음껏 충족해 나가고 있었다.
오후 1시30분경 단동역에 도착하니 거대한 모택동 동상이 우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약 20
여분을 걸어 점심으로 중국식당에서 중국 요리의 맛을 즐기고 그렇게 그리던 압록강으로 향
하였다. 압록강에 도착 한 많은 강을 바라보며, 모두들 그 어느 곳보다도 깊은 감회에 젖어들
었다. 그야말로 지척에 우리의 땅인 북한의 신의주가 보이는 것이다. 분단이라는 조국의 현
실 때문에 반세기 이상 밟아보지 못하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절실히 느끼며, 언제 갈 수 있을
지 알 수 없는 그곳을....... 더욱 안타깝고 가슴아픈 것은 중국에서도 비교적 낙후 지역이라
는 단동시 보다도 더욱 초라해 보이는 강건너 조국의 모습이었다. 모두 큰배에 올라 갈 수 없
는 땅을 바라보며, 그 곳을 배경으로 사진에 담아보고, 일부는 그것이 아쉬워서 모타보트를
타고 더욱 가까이 다가가 보고, 끊어진 철교위에 올라 눈시울도 글썽이고 이렇게 세 번째 중
국일정을 감동과 애달픔과 아쉬움으로 떠나 보냈다. 저녁숙소는 3성급 호텔인 郵電大厦
(YOU DIAN HOTEL)에서 머물기로 했다. 우리는 호텔의 11층에서 단동시의 야경을 감상하
고, 12층 나이트클럽의 시끄러운 음악소리를 자장가 삼아 피로에 지친 몸을 뉘었다.
6월9(일)
세 번째의 아침을 이곳 단동시에서 맞이하였다. 대부분 긴 여정의 피곤함보다는 새로운 호
기심에 잠에서 일찍 깨어 났다. 이곳 단동의 새벽은 우리나라의 새벽보다는 분주하고 바쁘게
생활하는 느낌을 받았다. 비교적 깨끗한 대로변보다는 지저분한 골목길, 배드민턴을 치는 사
람, 제기 차는 부부인 듯 보이는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 공원에 모여 태극권하는 사람, 짐을
실을 수 있게 개조한 자전거에 잔득 짐을 싣고 어디론가 급히 가는 사람, 보따리 여러개 들고
온 가족이 어딘가에 함께 가는 사람 그야말로 우리의 어릴적 70년대 초반 모습을 연상케하
는 거리의 풍경들... 호텔에서 아침식사 후(예약할 경우 1인당 5원, 미 예약 시 1인당 8원) 금
강산 공원에 올랐다. 높지 않은 산에 놀이 공원시설, 동물원 등(우리가 볼 때 조잡스러운)을
갖춘 주민들의 휴식공간임을 알 수 있었다. 이후 항미 기념탑 및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우리
나라의 6.25 전쟁당사 참전한 실상을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든 것으로 외상으로 비춰진 웅장
한 외부의 모습으로도 중국인의 큰 스케일을 느낄 수 있었다. 내부로 들어감에 따라 그 웅장
함에 더욱 놀람과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당시의 참상을 담은 사진, 그 당시의 모습들
(중공군, 인민군, 간호사, 주민들, 아이들 등) 전쟁과 관련된 각종 문서들... 특히 휴전 협정서
에 미국, 북한, 중국은 서명되었으나, 우리나라는 제외되었다는 것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이
러한 세밀한 역사적 기념관을 우리는 갖고 있지 못하다는 아쉬움과 함께 다시 한번 분단된
조국의 아픔을 가슴에 담고서 아쉬움과 함께 단동시를 떠났다.
단동역에서 2시에 출발하여 6시경에 심양역에 도착하였다. 물론 기차 안에서 한 단어라도
머리에 넣으려고 서로 다투어 가며 중국인(할머니,기차승무원 등)과 대화하며 심양으로 돌아
왔다. 도착하여 저녁식사로 조선족 거리인 西塔의 평양관에서 평양냉면을 음미하며, 또다시
분단의 아쉬움을 달래며 이렇게 또 하루를 보내었다.
(西塔은 조선족의 거리로 모든 간판이 한글로 되어 있으며, 모란각, 평양각에서는 냉면 등 우
리나라 음식을 주로 판매하는데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비용이 비싼편이다. 월드컵 기간중
우리나라의 경기를 이곳에서 시청하며 타국에서 조국의 열기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중국아줌마 정말 대단합디다!!!
심양여행기(6.15-6.16)
중국에 도착한지 벌써 10여일이 지났다. 어제 포르투칼과의 대결에서 승리하여 16강에 진
출하는 감격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자유스럽게 주말 여행을 떠나는 시간이다. 연수생 20명
중 15명은 이미 어제 북경으로 이미 떠나고 이미 북경을 다녀온 바 있는 5명이 함께 하기로
하고 하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새벽시장을 둘러보다가 옆 유학생 기숙사에 있는 학생을 만났다. 산동성
에서 유학온 학생으로 요령畢商經濟學院 1학년에 재학중인 학생으로 순박하게 생긴 모습이
었다. 학생과 함께 나뭇잎으로 싼 주먹밥과 리즈(남부지방에서 나는 과일)라는 과일을 간단
히 먹었다. 그리고 학원 정문옆에 위치한 슈퍼에서 전날 길 안내를 약속한 한족 여인 두명과
만나 모두 8명이 즐거운 시내 관광에 나섰다.
먼저 심양의 교외에 위치한 植物園에 가기로 하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타며 2시간여 만에 식
물원에 도착했다. 식물원의 규모는 대단하였다. 하지만 식물원이라기보다는 우리나라 에버
랜드를 연상케 하는 놀이 기구로 가득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놀이기구는 군대의 유격 훈
련장을 방불케하는 외줄타기, 암벽타기, 배타고 물 총싸움놀이 등 체력훈련을 요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잘못 실수하면 물에 빠지도록 되어 있어 다소의 두려움으로 타기를 꺼렸으나
중국 여인들이 솔선하여 타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타야만 하는 형편이 되었다. 특히, 30미
터의 암벽을 타고난 후에 다시 외줄에 도르레 타고 약 300여미터의 호수위를 건너는 놀이는
생각만 해도 아찔하고, 짜릿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여인들이 타는데 남자로서 안 탈수도
없고(자존심!!!) 우리 모두들 안간힘을 다하여 함께 탔다. 하나하나 탈 때마다 간이 콩 알만
해지는 것 같았지만 긴 호수면 위를 나는 기분은 마치 하늘을 나는 새의 기분처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기분이었다.
여러 가지 놀이 기구를 타고 놀다가 점심이 되어 냉면과 요리 두가지를 시켜 간단히 식사를
하고 계산을 하려고 하는 중 중국여인들이 나서 음식 맛이 없다고 음식값을 깎았다. 이러한
진풍경에 우리들은 배꼽을 잡고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다. 물건값을 깎는 것은 보통이고 놀이시설 타는 비용과 전화카드비까지 깎는다. 말이
깎는 것이지 서로 흥정을 잘하면 통하는 것이 이곳의 인심이 아닌가 싶으면서도 아직까지 정
립되지 못한 자유주의 시장체계를 볼 수 있었다. 여러 곳을 보려고 하였으나 장소들이 너무
넓어 도저히 다볼 수가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식물원을 나섰다.
이후에 말을 타기 위해 나섰다. 택시 타고 가자는 우리의 의견을 묵살당한 채(?) 중국여인
들의 의견을 따라 걸어서 약 30여분만에 말타는 장소에 도착하였다. 요금은 1인당 5원이었
으며, 서툴러 혼자 타지 못할 경우 보조원이 따라붙는데 이 경우 2원이 추가된다.
말에 타고 달려 보니 이 드넓은 땅을 달리며 호령하였을 고구려인의 기백을 몸전체로 가득
느낄 수 있었다.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린 후 中街로 향했다 中街는 백화점등 각종 다양한 상품들을 판매하는
곳으로서 우리나라의 시내 중심가를 연상할 만큼 화려하고 번화한 거리이다. 여러 가지 쇼핑
도 하고 중국여인들의 도움을 얻어 물건을 사기도 하였다. 물건구입시 판매원은 통상 정가의
70%를 제시하는데 잘깍으면 30%정도의 가격에 물건을 구입 할 수 있었다. 예로 처음 220
원을 부르는 진주목걸이를 끈질긴 흥정 끝에 60원에 살수 있었다. 거리의 모습들은 우리나
라와 별다른 차이가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東北藥房등 큰 약국이 몇 개 있는데 1층에는
1∼2십명의 판매원들이 분야별로 판매하고, 2층에는 여러명의 한의사들이 진단을 하는 형태
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구입 가격이 정해져야 있어 깍을 수가 없다. 우황청심환의
경우 북경에서 110원인 반면에 이곳에서는 94원에 살수 있었다. 그리고 웅담은 인기 있는
약품으로 간지방,피로해소,관절 등에 두루 효능이 있는 약으로서 200원대에서 800원대까지
비교적 비싼 가격에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웅담은 대부분 천연산이 아닌 집에서 기르는
곰에서 추출하는 것으로 중국인(공무원)의 말에 의하면 가짜는 거의 없다고 한다.(???)
어느덧 저녁이 되어 음식점에 들러 많은 요리를 먹었다. 어느덧 마음으로 가까원진 가운데
서로 즐거웠던 오늘 일을 이야기하며 맛있는 식사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고마
운 마음을 표시하면서 헤어졌다. 다시 한번 중국여성들의 강인함과 중국인의 친절함을 가슴
깊이 느끼며 즐거웠던 토요일의 하루를 떠나 보냈다.
일요일 아침 북경으로 떠난 학우들의 안녕을 염려하면서 중국유학생인 남학생과 다시 만나
아침식사를 간단히 빵과 만두로 때우고 五愛市場으로 향했다. 五愛市場은 우리의 남대문시
장과 같이 재래시장의 성격으로 중국에서 가장 큰 시장으로 알려져 있는 만큼 상상했던 것보
다도 거대한 시장이었다. 우리나라 동대문, 남대문시장을 다 합쳐도 이보다는 크지 않을 거
같았다. 시장에는 거의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다양한 물건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다만,
물건의 질은 우리보다는 많이 떨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모든 상인들이 국가에다 세금
을 내고 장사를 하고 있는데 얼마를 내는지는 정해져 있지는 않고 대강 받아 간다고 한다. 또
다시 아직까지 정립되지 못한 행정체계를 알 수 있었다. 한동안 시장을 구경하고 심양 시정
부 광장으로 향했다. 심양시 정부 청사로 가는 길에 당구장(台球)이 있어 잠시 쉬어 갔다.(당
구장은 모드 포켙볼) 조잡한 시설이 우리의 70년대 정도의 수준을 느낄 수 있었다. 곧이어
웅장한 정부 광장에 도착하였다. 일본식 건물로 심양역에서 약 10분거리에 위치하고 있었
다. 시청사와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차로 약 10분거리에 있는 西塔거리로 향했다.
西塔은 코리아타운(Korea-town)으로, "한인지역"이자 조선족 거리이다. 사방 1km의 거리
로, 조선족 백화 상점과 한성 구물 광장의 빌딩을 중심으로, 활발한 경제활동의 지역이자 상
업의 지역으로, 소비의 중심 지역이다. 시부대로(市府大路), 연변가(延邊街), 신개도가(新開
道街) 중심으로 한성 구물광장 빌딩의 뒤편에는 조선족 의원과 서탑 시장이 있다.
이곳은 주로 식품과, 환전, 복덕방 소개가 주 업무이고 많은 한국의 소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조선족 백화상점 앞에는 정창 호텔과 서울 호텔, 녕대 호텔의 빌딩이 있는 시부대로(市
府大路)가 있고 조선족 백화상점 옆 건물은 조선문 서점이 있고 옆의 도로인 연변가는 노래
방과 싸우나, 식당, 술집 등이 밀집된 거리이다, 따라서 많은 한국 사람이 오고 가는 서탑가
는 보따리 상인이나 자영업자나 기업이나 단체에서 꼭 들러 보는 명소이다. 신개도가 에는
볼링장, 당구장, 식당, 카페, 한국음식 전문 식당가와 노래방이 있다. 심양시에는 4개의 탑이
있는데, 그중 서탑은 최근에 1998년 11월에 재시공하였다. 식당가의 비용은 중국음식점보
다 비교적 비싼 편이다.
한 식당에 들어가 6인분의 삼겹살을 주문하였다. 역시 조선족 아가씨가 주문을 받았다. 오
랜만에 먹는 한국음식이라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중국인 대학생도 상추쌈에 싸먹는 삼겹살
맛에 놀라고, 시원한 김치에 우리 음식의 맛을 음미하며...... 오랜만에 포만감에 적어 식당을
나와 太原街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太原街는 야시장이 열려 밤에 다양한 물건들을 구입할
수 있으며, 볼거리도 제공하고 있다. 이 거리는 아시아에서 제일 큰 거리로서 각종 상점과 야
시장이 들어서는 곳으로 수준이 높아서 그런지 비교적 물건값이 비싼 편이었다. 쇼핑하거나
거리에 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모두 부유층 같이 잘입고 다녀 마치 서울의 압구정동에 온
느낌을 받았다. 거리가 너무 긴 관계로 한바퀴 돌고 나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KFC에
가서 콜라를 한잔씩 마시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동하였다.
※ 必勝客(피자), 麥當勞(맥도날드)
太原街를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동북대학교로 향했다. 동북3성(길림성,요령성,흑룡강성)중
에서 가장 유명한 대학이다. 역시 웅장하였으며, 우리나라 대학에 비해 차분하고 조용한 분
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대학교정에서 대학생들과 이야기를 몇마디 나누어 볼 기회가 있었는
데 역시 일류대 학생들에서 풍겨 나오는 총명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이틀 동안 심양시의 여행은 막을 내렸다. 이제는 심양의 어느 곳이던지 혼자서 다
닐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을 수 있었다. 더불어 잠깐 스치거나 함께 한 중국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현지 언어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해소될 수 있었다. 모두 즐거웠던 이들간의 추억을 고
이 간직한 채 숙소에서 곤한 잠에 빠져들었다.
"북경으로가는 기차여행"
북경여행기(6.14-6.16)
중국전통문화와 현대화 강의 후에는 북경 관광건으로 하여 잠시 모였고 총인원 20명 중 15
명이 북경으로 가고 5명은 심양에 남아 시내관광을 하는 것으로 회의를 마쳤다. 우리 일행은
저녁식사 후 8시경 당교 공터에 집결하여 瀋陽北站으로 향하였다.
심양북역에 도착한 때는 8시 40분경. 북경행 기차 발차 시각은 밤 9시 25분. 3층으로 된 침
대칸에서 10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오전 7시 25분 도착 예정이었다. 9시경 우리의 박지성
선수가 월드컵에서 골을 넣는 환희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아! 자랑스러운 박지성! 아! 대한
민국! 환희의 순간을 뒤로하고 별빛마저 잠든 이국땅의 수도 북경으로 달리고 있었다. 6.14
일 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들판, 世界杯의 태극전사, 3층의 新空調硬座特快(침대칸 열차),
輾轉反側의 이역만리.....
江海漂漂共旅遊 강물따라 표표히 떠도는 이몸
一樽相勸散窮愁 통술 서로 권하며 시름 풀었네
夜深醒後愁還在 깊은 밤에 깨어나니 시름 되오고
雨滴梧桐山館秋 오동잎에 빗방울지는 산관의 가을이여.....
오늘같은 분위기에 적격인가, 唐代 詩人 白居易의 <宿桐廬館>이 자연스레 흘러 나왔다. 어
느덧 날은 희붐히 밝아오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달리던 기차는 豊潤站을 거쳐 7시 15분경 우
리를 北京站에 내려주었다.
북경은 3천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古都이다. 일찍이 기원전 1057년에 이곳은 제후국인
燕나라의 도성이었으며, 당시에는 라고 칭했다. 후에 秦왕조로부터 漢, 魏, 晋를 거쳐 隋, 唐
에 이르기까지 1천여년간 城은 줄곧 지역성의 행정중심지이면서 북방의 물자, 문화 교류의
중심지였다. 서기 938년에 거란족이 북방에 요나라를 세우면서 이곳은 요나라 제2의 수도로
서 南京이라고 개칭하였으며 燕京이라고도 하였다.
서기 1153년에는 여진족이 세운 金나라가 이곳으로 遷都하여 中都라 불렀으며 아울러 北
宋의 卞梁(지금의 開封)의 모습을 본떠서 성지를 개조·증축한 동시에 궁전을 건축 하였다.
서기 1215년에 몽고의 기마병들이 중도를 공격하여 교외의 大寧宮(지금의북해공원)만 남
겨두고 화려하고 웅장하던 金왕조의 궁전을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서기 1260년에는 징기스
칸(成吉思汗)의 손자 쿠빌라이(忽必烈)가 중도에 와서 7년 후에 그곳을 元朝의 수도로 삼고
대녕궁을 중심으로 大都城을 건설하였다.
서기 1403년에 明나라 成祖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 이름을 北京으로 바꾸고 다시 북경
성을 축조하였다. 明의 북경성은 北城이 너무 광활하여 성을 수비하기가 어려웠으므로 元朝
대도의 북성 벽을 남쪽으로 500m 옮기고 南城 벽을 지금의 崇文門, 正陽門, 宣武門 일선까
지 옮겼다. 明의 북경성은 대성, 황성, 궁성 등 3중으로 되어 있고, 후에 淸朝는 다시 明의 북
경성을 바탕으로 수려한 많은 원림을 조성하였다.(원림은 아편전쟁 시기에 외세에 의해 불에
타는 변고를 겪었다.) 중국 근대사를 장식하였던 중대한 사건들 - 즉, 1919년의 5.4 운동,
1935년의 1.29 운동, 1937년의 7.7 사변 등은 모두 북경에서 일어났다.
우리가 처음 간 곳은 중국 明·淸의 역대 황제가 매년 음력 동지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풍
년풍우를 기원하였던 天壇이었다. 天壇은 明朝의 成祖 永樂 18년 (1420년)에 약 273만 평방
미터의 광활한 대지 위에 창건된 것으로 중국에 현존하는 최대,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닌 제
단 건축물이다. 明·淸 건축예술을 집대성한 것이며 중국고건축물의 진품이라 하여 1961년
중국국무원에서는 천단을 일러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 공포하여 보호하도록 하였
다.
천단의 중심건축은 한 개의 큰 石臺로 丘라 하며 主殿은 祈年殿으로, 높이가 38m·직경이
30m로 설계가 정교하며 눈부시도록 화려하게 우뚝 솟아 있었다. 천단은 內壇, 外壇이 2개의
담으로 나뉘어지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면 북쪽은 둥글게 남쪽은 네모나게 만들어져 있었다.
이는 "天圓地方(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네모나다)" - 즉, 당시의 세계관을 그대로 반영한 것
이다. 內壇에는 齋宮과 祭壇이 있다. 재궁은 황제가 제사를 지내기 전에 목욕재계하던 곳이
며, 이곳의 본건물은 벽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천단 내부에는 위에서 언급한 원구·기년전 외
에도 皇乾殿·皇穹宇·无梁殿·長廊 등의 주요 건물들이 있었다. 원구단의 북쪽에 있는 건축 물
을 皇穹宇라고 하는데 그것은 원구제단에서 제사를 모시는 제위가 있는 곳이다. 황궁우의 바
깥에는 원형의 담이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回音壁(메아리壁)이다. 담벽 남쪽의 유리문 사이
에는 돌로 바닥을 깔은 통로가 있는데 황궁우의 남쪽계단 앞에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 깔려있는 돌을 三音石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돌판 중앙에 서서 건
물 내부를 향해서 손뼉을 치면 웅장한 메아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한 나라를 세우면 먼저 종묘와 사직단을 건설한다고 한다. 농경 사회
의 전통일수도 있겠으나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섬기며 백성을 사랑하는 동양의 전통 사상
이 더 큰 이유가 아닐까 한다. 천단을 세워 제천의식을 행하고 국가의 풍년풍우를 기원하였
던 점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처럼 엄숙하고 신성한 천단이 어느 덧 현대사회에
와서는 휴식공간이 되어 일반시민들의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시대의
변화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였다.
천단을 뒤로 하고 걸음을 옮긴 곳은 천안문광장 서쪽의 인민대회당이었다. 인민대회당은 전
국인민대표대회가 열리는 곳으로, 우리나라의 국회의사당에 해당되며 1958년 10월부터
1959년 8월까지 10개월동안 준공한 것이다. 내부를 일단 일반인에게 공개한다는 것부터가
의외라는 느낌을 주었고 공항에서의 검색처럼 엄격한 소지품 검색을 하는 것도 특이하였다.
대회당 부근에서는 공안에 의한 노점상 단속이 엄격하였다. 이는 깨끗한 북경 거리를 조성하
자는 것도 있겠지만, 중국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산뜻하게 각인시킴과 동시에 차기 북경올림
픽을 의식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들었다. 인민대회당 내부로 들어갈 때의 검색은 같은
테러를 우려한 것이라는 傳言이 있었다.
북경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天安門광장이고, 가장 중심지는 장안가이다. 천안문은 수도 북
경의 상징으로 원래 明·淸 황성의 정문이며 황제가 조칙을 반포하고 조서를 내리던 곳이었
다. 천안문광장은 원래 봉건 조정의 광장으로 당시에는 광장 주변에 붉은 담이 있어서 일반
인들은 절대로 접근할 수 없었고 신중국 성립 이후에야 주위의 담을 철거하고 증축공사를 벌
여 50여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광장이 되었다. 천안문의 성루는 원래 황성의 남문이었는데
높이를 올리고 장식을 더하여 더욱 장엄하고 아름답게 보였다. 광장의 서쪽은 인민대회당,
동쪽은 중국역사박물관과 중국혁명박물관, 남쪽은 毛主席 기념당, 중앙은 인민영웅기념비가
자리잡고 있었다. 천안문광장은 중국의 수도 북경의 정치 중심지로서 여기에서 거행되는 정
치적 행사는 전국, 전세계에 대하여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 이
래로 중국의 많은 중대한 사건이 모두 여기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10여년 전 일어났던 천안
문 사건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날, 오늘날의 중국을 있게 한 정신적 지주 毛主席의 기념당을 들어가 볼 수 없었던 것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았다. 한 나라의 국가 지도자로서 그만한 인물도 흔치는 않
을 것 같기에 더더욱 그러하였다.
고궁은 예로부터 紫禁城으로 불려왔고 明·淸 시대의 황궁이었다. 紫禁城에서 紫는 황제를
상징하며(天文에 紫微星이 있는데 자미성은 황제를 상징하며 황제의 신상에 중요한 변고가
있을 시 이 별자리에 이상조짐이 보였다 한다.) 禁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구역이
란 뜻이다. 북경성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明의 成祖 永樂 4년(1406년)에 착공을 시작하
여 1420년에 기본적인 완공을 본 건물이다. 옛날 조선의 景福宮이 3년만에 완공을 본 것을
보면 규모도 규모려니와 꽤나 꼼꼼하게 건설했던 것 같았다. 이곳에는 24명의 황제가 기거
하였으며, 중국의 역대 보물과 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었다. 고궁의 면적은 72만㎡이고
9000여칸의 방이 있으며 外朝(정사를 보는 곳)와 內廷(살림하는 곳)의 양대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고궁의 전반부를 外朝라 칭하는데, 太和殿, 中和殿, 保和殿 등 3대전을 중심으로 삼고
文華殿, 武英殿을 양 날개로 삼아 웅장하고 장엄하며 화려하였다. 태화전은 황제가 대전 의
식을 거행하거나 의례를 연습하던 장소이고 보화전은 연회를 베풀어 외국의 귀빈사절들을
접대하던 장소라 한다. 후반부는 內廷이라 하는데 황제가 평상시에 업무를 보고 后妃와 함께
거주하며 생활하던 곳이다. 고궁은 1911년 淸朝의 마지막 황제 宣統帝 부의가 퇴위할 때까
지 490년동안 정치의 중심지로 존재하였으며,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청조가 전복된 이후에도
한동안 부의가 거주하였다고 한다.
자금성에서 가장 이채로운 것은 굴뚝이었다. 굴뚝이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처럼 온돌식 난
방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景福宮 交泰殿 후원의 굴뚝처럼 이곳도 사람사는 곳이구나 하
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궁궐 건축에 못을 쓰지 않는 것은 우리나라 건축기법과 같지만 다만
황제일가가 거처하는 곳이라 지붕을 황금색으로 장식한 것이나 모든 전각의 편액을 세로로
한 것은 우리나라 고건축물이나 궁궐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서울역 부근의 崇禮門을 제
외하고는 우리나라 고건축물이나 궁궐의 편액은 거의가 가로로 되어 있다.) 和宮은 상당히
이국적인 건물이었다. 東單大街에서 똑바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舊內城의 바로 앞 동쪽에
위치한 라마교 사원인 옹화궁은 북경에서 가장 크다. 淸朝 康熙 33년(1694년)에 창건되었고
원래는 청조의 옹정왕부로 옹정제가 즉위하기 전의 관저이며 건륭제의 출생지였으나 건륭 9
년(1744년)에 다시 라마교 사원으로 개명되었다. 사원내에는 라마교의 대표적인 불상, 불화
가 몇 점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에 안치된 불상은 웬만한 아파트 높이처럼 높아 보였고 佛前
에는 향을 피우며 기원하는 참배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현실에 안주하는 것 같으면서도
내세를 기원하고 극락왕생을 염원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강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옹화궁이 이국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는 곳이라면 和園은 아름다움과 안
스러움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북경 서북쪽 교외에 위치한 이화원은 총면적 290㏊의 풍광이
빼어난 황실휴양지이다. 원래는 12세기 금나라 제왕의 행궁이었으나, 淸朝 건륭제에 이르러
황가원림으로 증축하고 청의원이라 개칭하였다, 1860년에 청의원은 영국·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불타버렸으며 1888년에 서태후가 재건하여 이화원이라 改名하였다.
이화원을 구성하는 산, 호수, 섬, 回廊, 殿, 堂, 樓, 閣 - 속세의 武陵桃源이 따로 없으리라
마는 안스러운 심정이 앞서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중국의 아픈 역사가 담긴 곳이라서 그
랬던가......
국가 지도자들의 부정부패, 외세의 침입 속에서 비극적으로 탄생하였던 유적이 어서 더
더욱 그러한지도 몰랐다, 이런 건물에는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눈물과 피와 땀이 스며들어
있는가! 자못 안스럽고 숙연하여지던 순간이었다. 민생을 외면한 국가 지도자들의 타락 속에
서 탄생한 비극적인 건물은 곳곳에 여실하였다. 명 13陵과 중국의 대표적인 유적지 만리장
성이 그러할 것이었다.
명 13陵은 북경의 북쪽으로 40㎞ 남짓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명대 13명 황제의 陵(3대 永樂
帝부터 최후의 崇禎帝까지 13명)으로 지면의 건축이 웅장하고 거대한 지하 궁전도 있는데,
현재 개방하고 있는 곳은 長陵과 定陵 뿐이다.
長陵은 明의 成祖의 陵으로 건축 연대가 가장 오래된 것이고 定陵은 明朝 神宗(이분은 임진
왜란 때 조선에 구원군 파병을 하였던 황제이다. 그러나 明史에는 치적도 공적도 없는 暴君
으로 그려져 있다.)과 두 황후와의 합장묘로 1956년에 그곳의 지하궁전이 발굴되면서 중국
내외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정릉의 지하궁전은 前殿· 中殿· 後殿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깊이가 27m로 황제와 황후의 관곽이 후전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또한 궁내에서 출토된
금·은·옥·자기 등 진귀한 문물이 약 3000여 종이 된다 하였다. 살아서는 속세의 온갖 부귀영
화를 누리고 못다 누린 영화를 저 세상에서 누리고자 하였던 定陵의 主人公들 - 그런 지극정
성을 民草들에게 조금이라도 베풀었다면 후인들이 이리도 눈물 흘리며 안스러워 할까. 문득
경주의 신라고분들을 보며 새삼 속세 인간들의 욕심을 탄식하였던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부
질없는 욕심들인 것을 살아서는 왜 깨닫지 못했던가! 고분들이 살아있는 역사라 한다. 옛 史
書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고분이나 묘지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지금의 처지라
그릇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백성들이 국가 지도자들의 은혜에 감복해서 만든 것도 아니고 지
배층들이 백성들을 착취해서 만든 것이고 보면 그저 측은한 생각에 눈물만 흘렀다. 겉으로는
북방 오랑캐 흉노족들을 방어하기 위해서 쌓았다는 萬里長城 - 꿈틀거리는 뱀같이 생긴 이
유적도 예외는 아닐 것이었다. 후대의 우리들에게는 좋은 관광유적이 된다 하여도 장성을 축
조한 실제적 동기나 과정은 순수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안타까웠던 것이
다.(장성은 후대에 와서도 상당부분 증·개축을 하였다고 한다.)
천하를 통일하였던 절대군주 秦始皇, 주변의 제후들 - 난세의 군주들이 빚어낸 유적들 앞에
서 옛 역사의 한 장면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장성 관리인인 듯한 분이 다가왔다.
- 是 里人?
- 我是韓國人.
만리장성 八達嶺關門에 부는 바람은 다사로웠다. 두 갈래 길에서 반대편에 인파가 많은 곳
을 두고 아무도 오지 않는 길을 선택했다며 나를 보고 관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편 쪽
은 사진 찍을 곳이 많고 경치가 아름답지만, 이곳은 그런 기대는 처음부터 접어두는 것이 좋
으리만큼 다소 무덤덤한 곳이었기 때문일까. 난 사진을 찍으러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역사를
보러 왔다고 하였다. 언어가 유창했으면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 것 같았는데, 아쉬운 일이
었다. (사실은 두 갈래길 다 갔다왔고, 사진찍을 목적은 처음부터 없었다. 두 길 모두 경사가
가파른 곳이었다.)
아쉬움은 龍慶峽 강물에도 말없이 흘렀다. 양쪽 벼랑이 2,300m로 깎아지를 듯하여 그 기세
가 매우 장관인 협곡형의 저수지 용경협. 이곳의 규모는 작아도 경치는 天下絶景인 長江三峽
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朝辭白帝彩雲間
아침, 빛나는 구름 속에서 백제성과 작별하고
千里江陵一日還
천리 강릉을 하루만에 돌아간다네.
兩岸猿聲啼不盡
강 양쪽 언덕에는 원숭이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데
輕舟已過萬重山
가벼운 배는 이미 만겹 산을 지났어라.
唐代의 시인 李白이 중국의 絶景 長江三峽의 백제성에서 노래한. <早發白帝城>을 강물 위
로 띄우며 아쉬운 맘을 위로하였다. 옛시인의 낭랑한 음성이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은
데, 강물은 그저 무심히도 흘러갔다. 古都 北京. 변변한 강줄기 하나 없이 한 나라의 수도로
유구한 세월동안 존재하여 온 것이 그저 대단하다 싶었는데, 名不虛傳이었다. 연이은 외세의
침략에도 꿋꿋이 버텨온 저력,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보존하여온 유물·유적들......
북경 구석구석에서 살아 숨쉬는 이러한 존재들이 북경의 오늘날을 있게 한 원동력이 아닌
가 싶다.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내일의 희망을 그려 가는 북경의 꿈은 결코
허황된 것도 어두운 것도 아닐 것이다.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 발 딛다!!!
백두산기행기(6.20∼22)
우리 민족의 영산, 민족정기의 발원지 - 우리땅은 분명한데 우리땅이 아닌 가슴아픈 산. 중
국에서는 白頭山이라 부르지 못하고 長白山이라고 부르는 곳. 우리의 심정을 하늘도 아는 것
일까, 아침부터 빗줄기가 내리그었다. 아침 7시경 출발한 차(黨校 봉고차였는데, 너무 작아
서 2대에 나눠 탔다)가 길림성으로 접어들 무렵 빗줄기는 시야를 가릴 정도로 쏟아졌다. 민
족의 영산으로 간다는 설레임도 경건함도 흘러내리는 빗줄기에 묻혔다. 가는 곳곳에 營城子
(?), 新城子 같은 고구려식 지명의 이정표들이 다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을 뿐. ("子"는 옛날
삼국시대의 고구려식 지명이라 한다. "신성자"는 확실하게 보았는데 "영성자"는 조금 애매한
상태. 하여튼 "子"가 붙은 지명은 다소 있었다.) 다행히 오후에 접어들면서 빗줄기는 점점 가
늘어져 敦化에 가까워올 무렵 완전히
개어 이국의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돈화는 저 옛날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을
모아 渤海를 건국한 역사적 장소이다. 곳곳에 한글 간판이 많이 보였고, 돈화에서 二道白河
까지 간다는 버스도 보였다. 단동에 갈 때의 풍경처럼 차창의 풍경은 한국적인 정취가 그대
로 풍겼다. 강원도 아니면 내가 살던 경상도의 어느 산골같은 그런 정취였다. 중국어 간판만
없다면 여기가 한국이라도 하여도 그대로 믿을 것이었다. 운전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 헤매지
만 않았다면 이 분위기는 그대로 이어졌을 것을(나중에 들으니 운전기사가 장백산은 처음 오
는 길이라,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이다.) 長白山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도착한 것은 한밤중,
13시간 소요. 다시 빗줄기는 추적추적 내렸다. 산장의 木工들이 부르는 중국 민요에 취해 40
분간 비를 맞으면서 노래를 들었다. 異域의 山莊 - 이곳의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
동트는 아침, 페루자에서 비신사적으로 안정환을 방출했다는 우울하고도 분기에 찬 소식을
접하며 우리들은 산행길에 올랐다. 두툼한 겨울옷에도 불구하고 산행길을 스산하게 한 것은
찬기온 탓이 아니라 우리 땅을 밟고 오르지 못하고 異域의 중국땅으로 오른다는 것과 世界杯
의 소식인 것이었다. 다음에 이곳을 찾을 때에는 경의선 열차를 타고 북녘을 통하여 오리라
는 희망을 품으며 22일 심양 서탑거리에 가서 멋지게 태극전사들을 응원하여 오늘의 아픔을
씻자고 다들 결의하였다. 발목이 시리도록 우리땅을 밟아보며 올라가야 할 장백산인 것을 차
량으로 가는 것은 너무나 아쉬웠다. 차량은 전혀 우리 뜻이 아니었는데......
천지 입구에 우거져 있던 침엽수림이 고도가 높아지면서는 점점 드물어지더니 2,000m 정
도 올랐을 즈음에는 아예 보이지 않았다. 그런대로 선선하고 괜찮던 날씨마저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이더니, 온도가 급강하하고 바람마저 세차게 불었다. 먹구름과 짙은 안개까지 드리
우고, 시야마저 흐렸다. 천지에 올라 애국가를 부르기로 한 우리들의 부푼 꿈은 짙은 안개와
구름에 흩어지고 장엄한 천지의 모습을 안개 속에 묻고 우리는 하산해야 했다. 내려오는 길
에 長白瀑布에 들러 아쉬운 심회를 달랬다. 이백의 "飛流直下三千尺"의 詩句를 연상하게 하
는 시원스런 물줄기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장백산에서 하산하는 그길로 떠난 용정도 장백산가는 길만치나 험했다. 장백산이 俗人의
접근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면 용정은 독립운동하던 애국지사들의 넋이 잠든 곳이라 그
또한 俗人들의 가벼운 발걸음을 용납하지 않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를 고스란히 간직한 용정! - 이민족의 첫동네로 불리우는 이곳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소속으로 길림성 동부의 장백산 동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동남쪽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있
다. 전체 면적은 2,590.8㎢이고 총인구는 27만여명으로 비농업인구가 농업인구보다 2만명
정도 많다. 한족과 조선족·회족·장족·묘족 등 10여 부류의 소수민족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이
곳은 조선족이 전체인구의 68%정도를 이루고 있다,
용정은 조선민족의 개척지요 겨레문화의 발상지이며 독립운동의 유서깊은 근원지로서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뿌리내린 유적지인 <용정지명기원지우물>·망국의 설움을 안고 강을 건너
던 <사이섬(間島)>·민족교육의 선각자 김약연 선생의 기념비·항일의 첫 봉화를 올린 충의지
사들의 넋이 잠든<3. 13의사묘>·저항시인 윤동주의 생가와 그의 묘소·先驅者의 넋이 깃든
一松亭과 해란강, 이상설 선생이 근대교육의 첫 종소리를 울리었던 <서전서숙>, 민족독립과
항일의 불씨를 지피었던 <대성학교> 등의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용정중학교 내
에 자리한 윤동주의 詩碑 앞. 異域(중국)에서 태어나 異域(일본)의 감옥에서 한줌의 재가 되
어 異域(중국)에 잠든 시인. 그토록 소망하였던 조국의 독립이었건만 정작 시인 자신에게는
살아 생전에 볼 수 없었던 안타까운 꿈으로만 남지 않았던가! 시신마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 돌아가신 孤魂이나마 조국의 독립을 지켜보았을 것이니, 이제는 편히 눈을 감으소
서. 라고 위로를 하며 일송정으로 떠났다. 가곡 선구자(原名은 "용정의 노래")에 나오는 龍門
橋·琵岩山을 거쳐 일송정으로 오르자 해란강이 눈앞에 흐르고 용정의 풍광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애국지사들의 못다 이룬 꿈, 서전서숙을 세워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독립운동에 투
신 - 끝내는 러시아의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하여 "조국의 광복을 이루기 전에는 장사도 지내
지 말고 유해도 조국으로 돌려보내지 말라."고 하던 이상설 선생의 통한에 사무친 유언을 새
기며 조국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였다.
요녕성 방송탑에 올라
6월26일(수)
우리는 모두 뒷풀이 겸 그동안 우리를 성심껏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요녕성 방송
탑으로 향했다. 탑높이 305.5미터의 높은 탑위에서 360도 쉬지않고 느리게 회전하는 식당에
서 심양의 모든 풍경을 바라보며, 쉴 새없이 나오는 중국요리를 먹으며, 중국의 명주를 마시
는 기분은 아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멋과 분위기가 있었다.
우리는 쉴 새없이 깐뻬이를 외치며, 흥겨운 시간을 보냈다. 심양시내의 휘황찬란한 빌딩들
에는 하나 둘씩 조명이 켜지고 심양의 야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나오게 할 정도로 아
름다웠다. 중국의 어디를 가든 중국은 낮보다는 밤에 아름다운 나라라고 생각했다. 공원, 광
장, 빌딩 등의 조명은 그야말로 예술적이었고, 호화로왔다.
우리나라의 여느 시내모습이 매우 단순하고 단조로운 반면, 중국은 어디를 가든 특색있는 건
물들이 있어 우리로 하여금 지루하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조명은 건물의 아름
다움을 더욱 빛나게 하는 훌륭한 도구인 것이다.
시내중심 백화점의 물건들은 우리나라 신세계나, LG 백화점의 수준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으
며, 시내를 거니는 아가씨들의 패션은 우리의 명동 아가씨들 패션에 버금가고 그 개방적이고
과감한 옷차림은 우리나라를 능가하고 있었다. 핸드폰 사용자가 90%에 이르고 노트북이 보
편화 되어있는 중국, 그러나 시내만 조금 벗어나면, 우리의 6,70면대를 연상케하는 아이들의
모습, 당나귀를 이끌고 가는 노인의 모습등은 우리로 하여금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과거
와 현재가 공존하는 나라, 아름다운 자연을 공업화로 오염시키는 나라, 신비의 나라 바로 중
국인 것이다.
6월23일(본계수동)
본계시는 심양에서 기차로 1시간 30분, 고속버스로 1시간 정도면 도착하며 전체인구
400만 여명이며, 시내 인구만도 150만 여명이 넘는다. 또한 본계시에는 매우 유명한 수동굴
이 있다. 역시 교육원측에 요구하여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차를 배차받아 안내를 받으며 동
굴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가기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큰 규모에 입을 다물수가 없었다.
동굴 길이가 2.8㎞이고 안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평균 수심이 4m나 되었다. 모두들 동
굴입구에서 거금 20원을 주고 겨울파카를 빌려 입은 후 동굴을 구경하였다. 15인승 보트를
타고 왕복 50분이 소요될 정도로 굉장히 큰 규모였다. 입구에는 많은 상인들이 리즈나, 꽃게
등 다양한 물건을 갖고 우리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일부 러시아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서
로 다 보이는 중국의 독특한 화장실도 보고....
본계시는 자연자원이 풍부하다. 이미 발견된 광산은 100여종이며 금속 광산 중에서
철광석의 저장량이 풍부하며 질량이 높아 등급을 선택할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중요한 철광
석 산지의 하나이다. 비금속광산 중 석탄과 석회석이 가장 유명하다. 본계 역시 중요한 중금
속 공업도시중의 하나이다. 중국의 유명한 본계 강철공사와 북대 강철공사와 북대강철장 등
의 대기업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가 중국 맞아?!
6월27일 - 28일(대련시 방문기)
'北方의 진주,라고 불리우는 항구도시 대련은 19세기까지만 해도 칭니라 부르는 작은 어촌
에 불과했으나, 겨울에도 얼지 않은 부동함임에 1898년 러시아가 야심적으로 조차권을 획득
한 후, 파리와 같은 방사선 도로망을 구축하여 오늘날과 같은 대도시의 모습을 지니기 시작
했다. 1905년 러일전쟁 후 승리한 일본에 의해 계속 도시건설이 진행되어 도시 전체의 분위
기가 이국의 정취를 띄는 아름다운 항구이다. 현재는 경제 특구로 지정되어 한층 더 발전하
고 있다. 대련의 특산으로는 유리 공예품과 어폐류 껍집을 이용한 공예품 등이다. 대련의 1
月 평균 기온은 -5℃이며, 7月 평균기온은 23℃정도로 온화한 대륙성 해양기후를 띤다.
6월27일 오전 7시30분에 요녕성정치경제학원을 출발하여 도로주변의 자전거인파를 뒤로한
채, 고속도로가 보수공사중이라 국도를 타고 11시 10분경 해안선을 따라 해양관광도시인 대
련시에 진입했다. 그동안 숙소였던 심양시와는 사뭇 다른 깨끗한 거리에 한눈에 보아도 이국
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건축양식과 곡선모형의 조형예술이 펼쳐져 있었다. 14시 15분에
대련시공무원교육원에 도착하여 점심식사를 한 후 15시에 대련시정부를 방문하여 외사부에
직원인 왕처장의 환영인사와 개괄적인 대련시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국어설명이 담긴 스크
린을 보았다. 12,000㎢의 면적에 인구는 480만 명 정도된다. 해안선의 길이는 약 8,000㎞로
곳곳에 암초와 작은 섬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해수욕장, 해변 공원, 동물원, 화원 등의 관광
객을 위한 시설도 갖추고 있다. 항구도시이며 수심이 깊고, 현재 중국에서 최대항구로 손꼽
힌다는 대련시는 최대의 조선소와 도시전반이 해양관광도시로 조성되어 있으며, 녹화율 41
%이상으로 가장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광장이 도로보다 더 중요시 한다고 한다. 6시30분
경 대련시공무원 교육원장과의 만찬회를 갖고, 잠시 교육원앞에 탁 트여 있는 해안가를 바라
보며 흡사 제주도에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과 함께 심양시와는 전혀 다른 이곳에서
또 다른 중국을 느꼈다.
19시에 우리는 중국인들에 의해 건축물에 잘 지어졌다 하여 "미남자"라고 불린다는 현대 총
본부건물 옆에 있는 백화점을 들린 후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 날 저녁 잠시 외출 허가를
받은 몇몇 직원들은 성해광장 주변을 다시 한번 들렸는데 이곳에서도 북경의 야경을 보고 탄
성을 올렸듯이 탄성을 자아냈다. 어쩜 없는 환경 가운데 조경된 야경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는데 그러나 이들이 조성한 몇 안되는 조경 환경은 가히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신경을 쓴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정말 중국 공산당이 말하
는 후발 학습의 주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날 평소보다 여유 있게 식사시간은 갖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직원들은 아침 일찍 일
어나 인근 해안의 해수욕장을 들러보곤 하였다. 여기에서도 많은 중년층의 중국인들이 해안
을 가득히 메우고 이른 아침부터 수영을 즐기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큭 보자기를 둘루고서 옷
을 갈아입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오전 7시 반에 식사를 하고 8시에 려순을 향해 출발하였
다. 잠시 후 8시경에 성해광장에 도착하였는데 이곳에서도 많은 중국인들이 아침부터 여가
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10분간 정차한다는 말이 있었음에도 다들 광장에서 미니
오토바이, 자전거, 말 등을 타느라 정신 없었고 모두들 유쾌하게 30여분을 그렇게 보냈다.
다시 려순을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차창밖으로 비치는 대련시의 모습은 많은 것을 보게했다.
중산로 주변을 달리는 전기차와 버스의 조화는 한국에서 오히려 배워야할 모습이 아닌가 싶
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과거 외세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기도 하였다. panasonic공장이 대련시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었고, 많은 중국인들은
sony보다도 panasonic을 선호한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려순에 도착하였다. 이곳은 해군기지
로 외국인의 출입자체가 허용되지 않은 곳이었기에 겨우 버스안에서 문여사님의 설명을 들
어야만 했는데, 러일전쟁시 일본이 승리하여 세운 백옥산탑과 이후 러시아의 승리 기념탑이
중국공산당의 관리를 받으면서 세워져 있었다. 아마도 후인들이 보고 그때를 잊지 말자는 의
지에서 그러한 것 같았다. 9시40분경 려순 교도소에 도착하였고 다들 말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교도소 앞에서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이후 그곳 보안요원의 제지를 받게
되어 아쉽게 입장할 수 었었다. 허가받지 않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려
순교도소를 지나 진주집산지를 방문하게되었는데,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귀국 선물을 준비
하느라 허비하게 되었다.(상점의 물건을 싹쓸이?) 이후 다시 교육원으로 돌아온 우리는 2시
30분이 되어 겨우 식사를 마치고 심양을 향해 출발하였다. 저녁 8시가 되어 도착하였음에도
학원식당의 직원들은 전혀 불편함 없이 우리들을 맞이하였고 덕분에 편하게 그 날 저녁을 보
낼 수 있었다. 중국에서의 우리의 마지막 여행은 그렇게 막을 내리었다.
학습기 - 정치·경제·문화
6월10일(월)
1. 중국의 공무원 제도
주말의 여독을 모두 풀어버리고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는 날이다. 오랜 여행으로 피곤도
하련만 모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오전에는 중국어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요령성정치경제
연구원 교수이신 장지영교수의 강의가 있었다. 물론 요령성에 처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조선
족 공무원의 통역을 받으면서 중국공무원제도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었다.
6월12일(화)
2. 경극에 대하여
오늘은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오전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중국의 경극에 대하여 강의를 들
었다, 조금은 딱딱한 강의지만 경극에 대해서 조금 알 수 있었다. 경극은 중국의 모든 전통극
예술 형식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수세기에 걸쳐서 천재예술가들이 창조하고 발전시
켜온 중국의 고전극은 독특한 자기양식을 가진 포괄적인 공연예술이다. 곧 중국의 전통음악
시, 창, 영송, 무용, 곡예와 무술이 하나의 위대한 예술로서 함축되어져 있다. 중국의 전통극
은 하나의 창극 또는 가극이면서 서양의 오폐라나 오폐레타와 전혀 다르다. 한. 중. 일 세 나
라에는 서양의 오폐라와 같은 전통극이 있는데 그 민족적 전통양식 측면에서 관점을 두자면
한국의 창극. 중국의 경극, 일본의 가부끼가 바로 그것이다.
독특한 형태의 종합예술인 경극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한의 중국화와 함께 중국의 3대
수도라 불리는 중국의 오폐라 경극은 세대에 구분없이 사랑을 받고 있으며 바로 중국 전통문
화의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18세기말 청나라 대에 한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전국각
지의 유명한 희곡 단체들이 북경에 모여 경축 공연을 하게 되었고 이공연들이 효시가 되어
1830년대 도광황제때에 여려가지 지방극이 북경에서 융합되어 발전한 것이 경극이라고 한
다,
15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경극을 감상하려면 반드시 경극의 미학적 특징을 알아야 한
다. 일종의 종합무대예술인 경극은 중국의 전통적인 음악, 노래, 낭독, 춤, 서커스, 무술 등을
교묘하게 융합시킨 것으로서 서양의 노래, 춤, 연극이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과는 완전히 다
르므로 경극배우는 반드시 전반적인 기능을 연마해야 한다. 예를 들면 성룡이 경극배우 출
신인 것을 보면 서커스, 무술 등이 경극의 중요한 요소임을 잘 알 수 있다.
경극배우들은 정확한 발음으로서 리듬을 맞춰 대사를 읊으며 또한 실생활의 모습이 판토마
임과 같은 동작으로 표현된다. 짙은 화장을 하는 배우들의 분장을 살펴보면 개방적 정신과
충성심을 보이는 역은 검은색조의 화장과 수염으로, 익살스러운 역은 얼굴에 흰색과 무의를
그린다 타악기와 현악기가 주로 사용되는 경극의 음악은 매우 속도감이 있고 경쾌하고 배우
들의 동작에 맞춰 박자가 조절되기도 한다. 경극의 의상은 주로 15세기 명나라 의상에 바탕
을 두고있으며 이 시대의 의상은 색채가 선명하고 대조가 강하며 수공이 세밀하여 복장만으
로도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품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3시간 동안 교육을 받은 내용을 정
리해보니 경극에 대한 이해와 기초적인 지식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 또한 문제는 있었다 우리나라의 창극과 같이 경극은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서
는 경극을 관람하는 사람이 드물고 경극에 대한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경극 또한 그 전통성
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춰 재미있게 변화되어 가면 어떨까! 우리의 마당놀이처럼...
6월14일(금)
3. 중국전통문화와 현대화
"중국전통문화와 현대화" 강의 담당 전광청 선생님은 차림부터가 파격이셨다. 시골 농부 아
저씨같은 손질하지 않은 부시시한 헤어스타일에 긴 장화를 신고 강의실에 들어오신 것이다.
선생님이기에 그런 차림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다소 괴짜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런 차림
의 선생님이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더 친숙한 모습으로 다가왔는지도 몰랐다.
선생님은 중국 역사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계셨다. 먼저 중국과 한국·일본은 유
교문화권 국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며 더욱이 중국은 유교문화의 근본 위에서 전통문
화를 꽃피운 나라라는 것으로 서두를 여셨는데, 그 이후는 중국 역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많이 피력하셨다. 중국 역사와 문화의 과거와 현재,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셨는데, 요지는 이렇다.
과거로부터 면면이 이어 내려온 전통문화가 시간의 흐름 속에 옛 모습과는 상당한 변화를
보였고 현대화의 거센 파도에 밀려 제모습을 많이 잃었음은 사실이다.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이어받은 지금에도 현대사상이나 사회 진보화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많이 버려지고 있으나
그러나, 중국은 전통문화라 하여 무조건 배격하지는 않고, 이를 현대사회에 접목하여 비판적
으로 계승발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중국에게 배울 점일 것이다.
다만, 강의 내용중에 중국이 기타 다른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다는 것은 옥의 티였다. 사실
중국이 숱한 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던가! 다소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6월18일(화)
4. 요녕성 인민대표 대외관계
요녕성인민대표대회는 요녕성의 국가권력기관이다. 요녕성인민대표대회의 대표는 요녕성
의 14개성직할시 및 요녕성주군의 대표대회에서 선발된 것이다. 임기는 5년 요녕성 1계인민
대표대회 제1차 회의는 1954년 8월에 개회해서 지금은 제9단계로 다가왔다. 제5차 회의는
2002년2월에 개회. 대표인수 612명 헌법과 법률의 규정에 근거하여 헌법과 법률 행정법규
와 어긋나지 않는 전제하에서 지방성법규를 제정반포하고 그것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
원회와 국무원에 보고 발의한다. 헌법, 법률, 행정법규와 전국인민대표대회 및 상무위원회
결의가 요녕성에서 준수, 집행되기를 보증한다. 국가계획과 국가예산이 집행되기를 보증한
다. 요녕성의 정치, 경제, 교육, 과학, 문화, 위생, 환경 및 자원보호, 민정, 민족 등 중대기상
을 토론 결정한다. 요녕성 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의 조성인원, 성장, 부성장, 성고인민법원
원장, 성인민검찰원검찰장과 전국인민대표대회대표를 선발한다. 요녕성인민대표대회는 모
두 7개 전문위원회를 설립 : 법제위원회, 내무사법위원회, 재정경제위원회, 농업과농촌위원
회, 교육과학문회위생위원회, 민족교무외사위원회, 환경자원성향건설위원회, 각 전문위원회
는 요녕성인민대표대회의 영도를 받고 성인민대표대회 패회기간에는 인민대표대회 상무위
원회의 영도를 받는다. 각 전문위원회는 본급 인민대표대회 및 상무위원회의 영도 아래서 유
관 의안을 심의 제정한다.
6월17일∼28일(太極拳)
5. 24식 태극권(二十四式太極拳)
24식 태극권은 중국 국가체육운동위원회가 1956년에 태극권의 동작 중에서 가장 필요한
24개의 동작을 개편·정리하여 보급시킨 것이다.
간단한 동작에서 복잡한 동작으로, 쉬운 동작에서 어려운 동작으로 나아감을 원칙으로 하였
으며 대중 속에서 유행하고 있는 태극권을 수집하여 대중들이 쉽게 따라하고 배울 수 있도록
그 주요구성과 기술계통 등을 정리하였다. 전체 동작은 "기세(起勢)"와 "수세(收勢)"를 포함
하여 모두 24개의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 동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수련할 수
도 있으며 자신의 신체상황에 맞추어 하나의 식(式)을 선택하거나 몇 개의 조(組)를 나누어
수련해도 무방하다고 한다.
중국에서의 아침은 태극권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새벽이면 공원이
나 광장 또는 숲속에서도 많은 사람들 특히 노인들이 음악에 맞춰 마치 춤을 추듯 능숙하게
태극권을 수련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들도 교육과정중 문화체험의 일환으로 태극권의 맛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었다.태극권
은 8식, 16식, 24식, 48식등 여러 종류가 있으나, 우리들이 배운 태극권은 표준격인 24식
태극권으로 5일에 걸쳐 24식을 배웠으나, 아직 많이 부족하며 꾸준히 오랜시간 수련을 해야
됨을 느꼈다. 태극권은 겉보기에는 동작이 상당히 부드럽고 유연하나 실제 동작을 따라해서
1식부터 24식까지 한번 해보면 상당한 운동이 됨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들 새벽 6시에 일어
나 노곤한 몸을 이끌고 태극권 배우느냐 고생 많이 했다. 특히, 연세 지긋하신 몇분의 同學
들... 그리고, 전날 과음으로 좀 피곤했던 同學들...
월드컵 열기에 잠설쳤던 同學들... 그래도 모두들 열심히 배웠다.
□ 동작명칭 및 설명
6월26일(수)
6. 시험보는 날
오늘도 변함없이 태극권으로 하루가 시작됐다. 한국 축구팀이 4강에 올라 어제 모두 늦게
까지 응원을 하랴, 시험공부하랴, 구술시험 준비하랴 모두 지친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20여일간의 중국어 교육을 마무리 짖고 오후에 시험을 치르는 날이라 그런
지 모두들 약간은 긴장한 얼굴들 이었다. 필기 시험 뿐 아니라 구술시험을 같이 치르기에 그
부담감은 더한 것 같았다.
아침 식사를 한 후, 여느때와 같이 수업을 받은 후 오후 2시부터 필기 시험을 치렀다.
생각보다 시험문제는 짜임새 있게 출제되어 그동안 학습한 내용을 총망라하고 있었다. 일부
단어나 문장이 생각이 나지 않아 당황하는 사람도 있었고...... 필기시험이 있은 후, 각자 돌
아가면서 중국어로 발표발표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구술시험으로 교육원측에서 부원장을 비
롯한, 교수 2분, 처장등이 발표자의 발음, 내용, 등을 평가하는 가운데 발표가 진행되었다.
그 동안 배운 중국어를 최대한 활용하고, 일부는 현지인들의 도움도 받아 정성껏 작성한 중
국어로 된 문장을 발표하는 모습은 정말 너무도 진지했다. 모두들 처음보다 발음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일부 同學은 일취월장한 실력을 마음껏 뽐내었다.
필기, 구술 시험을 마치고, 학교측의 인사말과 격려사를 끝으로 우리는 모든 교과과정을 끝
마쳤다. 시험이 끝나고 나니 모두 홀가분한 마음과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을 간직한채
.......
견학기 - 산업시찰
6월11일(화)
<북릉공원(北陵公園)>
심양시 북쪽의 숲속에 자리 잡고 있는 면적 330만㎡로 청나라 제2대 황제인 태종과 그의 황
후를 모신 능으로 청조의 관외 3릉 가운 데 가장 큰 능이기도 하다.
1927년 성 정부에서 공원으로 재정비하면서 북쪽에 있는 능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북능
은 패루, 문루, 전각과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으로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나게 한다.
정문에서 묘릉인 소릉(昭陵)에 이르는 참배도로에는 해태, 기린, 낙타, 말, 코끼리, 사자의 6
쌍의 돌짐승이 늘어서 있다. 언덕과 산기슭 전체가 공원으로 되어 있어 한여름에는 녹 이 아
름답기 그지없기 때문에 봄, 가을에 걸쳐서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끊이지 않는 공
원이다. 이른 아침에는 태극권이나 기공으로 땀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한다.
우리들이 중국에 와서 처음 가진 관람수업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관람을 하였지
만 정치경제학원측의 준비 부족과 무성의로 인하여 정작 태종과 그의 황후를 모신 능은 볼
수가 없이 다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문을 통과 할때마다 입장료를 내고 표를 사야하는데 학원측에서 정문 입장
권만 구입하여 두번째 문에서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은 단지 공원 규모가 크다는 것과 중국사람들의 아직 준비가 부족한 사고방식을 엿보
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6월13일∼18일
동릉구 농업생산기지 ∼ 화평구청 방문기
산업시찰차 심양시 동릉구 농업생산기지를 방문한 일이 있었다. 그곳은 드넓은 포도밭이 펼
쳐진 농장이었다. 이곳 관계자는 중국의 발전된 농업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의 눈에는 아직
은 자동화, 기계화가 덜 되어 있고 노동력에 상당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게다
가 상품작물의 종류가 포도나 토마토 등 몇 가지에 그치고 있어 좀더 상품작물 및 특용작물
개발이 필요할 것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곳은 화평구 구정부 방문시였다. 구정부 청사는 널찍한 공간을 점령하고
있긴 하지만, 위압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반 서민들의 공간과 스스럼없이 어울어져자리하
고 있어서 친숙한 느낌을 주었다. 건물뿐만이 아니라,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그들의 서비스
헌장과 복무헌장이었다.
"당신을 위해 일류의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하겠습니다."
"文明服務(친절)·規範服務(규범준수)·公正服務(공정 및 청렴)·限時服務(신속)" 그들의 최
고 덕목은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친절이었다. 권위주의 일색일 것 같은 중국 공직사회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이었다.
한 직원에게 호적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중국에서 호적은 일반 관공서에서 하지 않고 경찰서
에서 관리한다고 하였다. 우리나라보다 호적신고 절차는 상당히 까다로웠다. 한 가지 예로
부부가 같이 살다가 나중에 인연이 없어 갈라진다해도 혼인증서가 있어야 이혼을 하고 이혼
증서가 있어야 재혼을 할 수 있다 하였다.
일일이 문을 열고 사무실에 들어가지 않아도 층층마다 안내판을 세워 무슨 부서가 있고 그
런 부서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써 놓은 것은 방문인에 대한 배려일 것이었다. 그런 작은 배려
조차 우리는 부족하지 않은가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다.
주차공간이 넉넉지 않음은 결정적인 흠이었다. 지금이야 민원인의 방문이 적다 해도 나
중에 민원인이 많이 방문하는 일이 있다면 주차문제가 벌어질 가능성이 많았다.
에피소드 1.
월드컵의 영광을 같이 했던 서탑거리에 대한 회상
1. 평양관의 평양냉면과 평양아가씨들
심양에는 동·서·남·북마다 각각 탑이 하나씩 있는데 그중에서 서탑이라는 곳의 거리는 조
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이라 일명 "코리아 타운"이라 불리우는 곳이다. 우리가 그곳에
발을 딛었을 때 "아니 여기가 서울이야? 중국이야?!" 이말이 저절로 나올 수 밖에 없던 분위
기였다. 설운도 노래방에서 흘러나오는 코요테의 "비몽" 24시간 편의점 안의 신라면, 꼬마김
치, 각종 메뉴의 한식당, 심지어 찜질방까지.... 우리는 단동 여행후의 피곤함과 한국음식
에 대한 그리움으로 인해 코리아타운이라 불리우는 서탑으로 발길을 돌렸다. 택시에서 내리
니 너무나 많은 한국간판이며, 한국식당 들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어디로 갈지 무척 망설였
으나, 평양관이라는 간판이 눈에 딱 들어왔다.
들어가는 순간부터 입구쪽에 한줄로 늘어선 평양아가씨들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북산사람
특유의 고음 소프라노톤으로 "어서 오시라요" 우리일행들 , 특히 몇 명 남자분들은 그냥 넘어
가는 듯해 보였다. 어찌나 목소리들이 간들어지던지...
북한에서 직접 운영하는 식당인 평양관의 분위기는 조용한 한식당 분위기였으며, 화사한
원피스에 뽀얗고 발그스레한 화장을 한 평양아가씨들의 친절함 때문이지 손님도 상당히 많
은 편으로 우리나라 식당과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였다. 우리 일행들은 냉면을 주문하고, 평
양아가씨들이 따라주는 술도 한잔 기울이고, 오랜만에 먹는 김치 게눈감추듯 해치우고 김치
조그만 더달라 부탁도하고, 우리나라 미인과 다른 느낌인 평양미인들과 시진도 찍고 다들 음
식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 테이블은 나름대로 분주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국 음식점에서
전혀 볼 수 없었던 장면이 연출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주문을 받던 아가씨들이 식당 한가
운데로 가더니 마이크를 잡고 공연을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잘아는 북한 가요 "반갑
습니다." "휘파람"등등 .. 우리 일행들은 환호하기 시작했고, 여기저기서 사진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녀들의 가는 고음의 노랫소리와 약간은 부자연스러운 미소와 흐드러지는 율동(?)
... 우리 일행들 너무 좋아했다. 냉면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식당분위기에 취해 냉면 맛을 평하는 것을 잊을 뻔해서 마지막으로 감히 냉면 맛을 평해보
겠다. 일반적으로 냉면 맛은 평양냉면이나 함흥냉면이 맛있다고 옛부터 전해왔지만, 이미 다
른 음식문화에 젖어서 그런가 난 솔직히 우리동네 칡냉면이나 비빔냉면이 훨씬 더 맛있다.
평양냉면에는 뭔가 삐진 듯하고, 입맛에 짝 ~ 악 하고 달라붙는 맛은 영없었다. 김치는 시원
한게 먹을만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님 많은 것을 보면 한국 음식이기 때문이요, 평양
미인들의 친절한 미소와 미모 때문에 그곳을 찾는 손님 특히 남자손님들(?)이 많은게 아닌가
싶다. 어쨌든 북한사람이랑 구속없이 말할 수 있었다는게 좋은 경험이었고, 정말 南男北女가
사실(???)인가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후문에 의하면 그 이후로 몇 차례 그 평양미녀들을 못 잊어 찾아간 이가 있었다고 하니, 이루
지 못할 사랑의 아픔이여.....
2. 오 필승 코리아, 월드컵의 태극전사들을 응원하며
- 이거 답답해 환장하겠네. 뭐 알아들을 수 있어야지.
黨校 숙소의 TV가 중국어 원어 방송으로만 나오니까, 축구용어를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일반방송은 더러 알아듣겠는데 축구방송만큼은 我聽不 이라, 알아듣는 것보다는 모르는 것
이 더 많았다.) 서탑거리에 가면 한국어 방송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귀띔이 있어 만사 제치고
그리로 직행. (축구 방송 본다고 갖은 감언이설로 선생님을 꾀어 수업을 뒤로 미룬 적이 있었
다. 그 덕분에 8시 한밤중에 수업을 한 적도 있었다. 수업시간에 시장 어물전의 동태눈 마냥
눈동자는 풀려서 가물거리지, 참 환장할 노릇이었다.)
우리의 열혈남아 류광수씨를 주축으로 몇몇의 광축구팬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밥도
필요없다. 문화체험도 우리가 빨리 축구를 볼 수 있게 얼른 끝내달라!
요녕성 심양시 화평구청에 방문을 마치자 마자 기숙사에 들러 일제히 빨간티를 입고 서탑거
리로 향하였다. 한족도 조선족도 모두 축구 열기로 서탑거리가 가득했다. 우리 어디로 가야
하나 이리저리 헤메이다 찾은곳이 바로 희래원이라는 식당이었다. 빵빵한 한국방송에 이끌
려 저절로 그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조선족, 한국유학생, 사업차 온 사람들
식당안에 정말 한국에 있는 어느 식당에 와있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앞쪽 한 구석에 자리 잡고 오랜만에 맛보는 약간의 음식으로 배를 채운 후 월드컵의
열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빵빵한 sbs로 중국에서 볼 수 있다니! 정말
세계화가 되었군...한국말로 들으니 정말 실감났다. 역시 한국말로 들어야 감칠나지... 경기
가 무르익을수록 우리의 응원열기는 더해져서 어느새 식당의 전 응원을 우리의 응원단장 류
광수 주사님이 맡고 계신 것이 아닌가!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짝!짝!짝!짝!짝!" 정말 목터
져라 외쳐댔다. 그런데 우리의 응원에 힘입어서 그런가? 너무 잘하는 것이었다. 그날 엄청
맥주 많이 먹었다. 정말 손에 땀을 쥐게하는 경기였다.
- 여러분, 이번 경기에서 우리가 이기면 테이블당 맥주 2병씩 드리겠습니다. 이 이야길 가
게 주인이 했을까? 아니다. 그분이라고 어디 땅을 파서 장사할까! 우리가 했다. 거짓부렁 빈
말로 허풍을 떤 것일까? 정답은 아님. 덤으로 술값까지 우리가 계산했다. 그 기분 다들 알 것
이다. 이후에 우리는 몇 차례 그 식당에 가서 축구를 보았는데 경상도 진해가 고향이라는 주
인은 우리가 앉았던 테이블을 지정석으로 만들어주었다. TV가 정면으로 보이는 지정석이
라, 귀빈대접을 받은 셈이었다. 게다가 류광수씨를 정식 응원단장으로 임명하여 마이크까지
마련해주셨다.
장백산 갔다 오던 날, 안정환 페루자 방출문제로 열이 오를 대로 올라 있던 우리는 서탑으로
직행하였다, 장백산에서 산 붉은 티를 입고.(아쉬워라, 중국 어디에도 붉은 악마 옷은 없어
색깔만 붉은 것으로 단체구입하였다.) 그 때의 에피소드를 잠깐 하고 가면, 티셔츠는 촌스런
빨간색에 주황의 형광색으로 장백산이라는 글자와 천지의 풍경이 그려져 있는데 어찌나 촌
스러운지, 동지의 분의기를 내기 위해 입기 입었으나 또 입고 싶지는 않은 옷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식당을 들어갔는데 그날은 손님이 엄청많았다. 물론 우리 얼굴을 아는 사람도
있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도 꽤 있었는데 우리가 말을 시킬 때마다 실실 피하는게 아닌가! 눈
도 잘 안마주치고... 이때 옆테이블에 온 사업차 한국에서 온 남자분이랑 잠깐 애기를 했는
데, 그제서야 알았다. 우리의 옷을 보고 사람들이 북한 사람으로 오인.. 그래서 그렇게 쳐다
본것아란다. 아니 이렇게 때깔 좋은 북한사람 봤시유~~~~~~~?
6월 22일, 우리는 해냈다 4강이다!
하늘도 우리의 정성에 감복하신게다. 4강 축하의 비를 내리시지 않는가! 일행 전원이 밖으
로 나와 온 서탑거리를 휘저으며 "대한민국! 대한민국!" 외치고 다녔다. 밤새도록이라도 외칠
수 있었다. 그날 우리 열혈남아 류광수주사님은 너무 열광한 나머지 그 넘치는 열을 감당못
해 타국에서 저 하늘로 갈 뻔했다. 괜히 열혈남아가 아니지....
우리가 월드컵 경기를 보고 기숙사로 들어갈때면 기숙사 앞 구멍가게 아저씨도 같이 대한민
국을 외쳐주셨다. 이럴 때면 한국인 것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우리 同學들이 더 친할 수밖에
없게 만든 중국에서 본 월드컵, 가슴 뜨거웠던 월드컵....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그 사람들을......
부근의 소학교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교포 등 약 1,2천명의 인파가 몰려 응원을 하는
뜨거운 광경도 볼수 있었다.
에피소드 2.
특이한 중국, 알고싶었던 중국 생활
1. 중국에 정말 자장면이 있을까?
중국에 오면 누구나 궁금해 하는게 몇가지 있다. 그중의 하나가 "중국에는 자장면이 있을
까?" 이다. 그런데 그 궁금증을 풀 기회가 드디어 왔으니...
중국에 간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다. 2시간이나 되는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서점에 갔다오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파 허름한 한 중국식당에 들어갔다. 중국요리는 워낙 菜單이 다양하고, 맛
이 특이한 것이 많아 주문하는 것이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한자에 능통한 은
영언니가 있어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무엇을 주문해야 할까 한참 菜單을 들여다 보고 있
는데 옆 테이블의 한 여자가 먹고있는 것이 눈에 확아악 들어왔다. 앗! 자장면이다. 우리는
주저함 없이 "저거! 저거!"를 연발 외쳐댔다. 너무나 반가운 자장면! 정말 자장면이 중국에 있
었구나! 중국어로는 炸醬麵(zhajiang mian) - 장을 볶은 면이라는 뜻이었다. 자장면의 유래
를 잠깐 짚어보면 아래와 같다.
본래 자장면은 산동지방 요리인데 1883년 인천항 개항과 함께 중국 노동자들이 인천에 들어
와 정착, 국수에 춘장을 넣어 비벼 먹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단다. 인천 차이나타운이
형성되면서 자장면을 기본으로 한 음식을 본격적으로 팔기 시작한 것이 1899년 경, 그래서
이미 한국에서의 자장면의 역시는 100년이 넘은 셈이다. 자장면이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
화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 6.25와 함께 중국인들이 줄어들자 한국인을 소비자로 한
음식 판매가 서서히 이루어지게 되었단다. 한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중국음식의 특징인
과다한 향신료가 차츰 줄어들었고, 물을 타 독특한 향을 줄이고 양파를 듬뿍 넣어 단맛을 강
화하였으며, 감자나 당근이나 장면의 새로운 재료로 편입되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 자장
면 가격이 15원이라고 하며, 당시 곰탕 가격과 같은 것이라고 하니까 즉 초기의 자장면은 서
민들이 대하기 힘든 고급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 이제 중국 자장면에 대한 품평을 하자면.. 완전 꽝이다. 면은 칼국수처럼 넙적하고 매우
쫄깃쫄깃하다 못해 고무를 씹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양념은 우리나라 자장면보다 색이 흐리
고 들어가는 야채도 적다. 그냥 그야말로 기름에 춘장 약간, 고기약간.양파약간. 기름만 잔
뜩... 역시 자장면은 한국 북경반점이나 만리장성에서 만든 옛날 자장이 최고야!!. 그날 정말
우리나라 자장면이 그리웠다.
2. 중국의 거리풍경
중국에 처음는 사람들에겐 참 낯선 장면들이 많다. 최신형의 외제 스포츠카와 옥수수대나
수수대를 싣고 가는 나귀 수레가 같이다닌다. 게다가 자전거와 발디(자전거와 리어카를 결합
한 중국의 운송수단)의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정말 묘기에 가까울 정도로 물건을 실어
힘겨운 발디, 사람을 싣고 달리는 발디,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꼬치구이를 파는 발디, 죽부인
처럼 생긴 통에 돼지를 넣어 운반하는 발디 등 다양하게 변형된 발디가 눈에 띈다. 이 발디는
중국인들에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교통수단이다. 발디는 택시에 비해서 차비도 훨씬 쌀뿐
만 아니라 손님이 원하고 있었는데하는 구석구석까지 찾아서 데려다 주니, 짧은 거리의 이동
은 역시 발디가 최고란 찬사를 해 줄만 하다. 중국의 거리는 신호등은 도대체 왜 달아났는지
머리먼저 드미는 사람이 먼저가는게 이곳에 교통문화인 듯 싶다. 자전거는 물론 오토바이 자
동차 할 것 없이 교통 지옥이다.
중국은 오래된 낡은 건물을 부수어 새로 짓는 건축물이 많아 거리를 다니다보면 쉽게 건축
현장을 볼 수 있다. 여러 용도의 건물을 짓는데도 대부분 사람의 손을 이용하여 작업을 하는
지 중장비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철골기둥을 세우기 위해 사람 키보다 더 깊은 땅을 포크
레인 없이 사람들만의 힘으로 한 팀이 파내고 있으며, 또 다른 한 팀은 그 흙들을 자루가 긴
삽을 이용하여 다른 곳으로 파 옮겼다. 멀리 고속도로 건설현장을 보니 사람들이 떼를 지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저래가지고 어느 세월에 공사가 끝날까하고 의문을 품게 한다. 중국은
인구가 많아 뭐든 사람으로 밀어 부치는구나 하고 결론을 내렸다. 사실 나중에 뉴스에서 보
니 중국의 실업자문제도 우리나라만큼이나 심각하다고 한다. 만약에 건설 현장에 중장비를
투입해서 공사를 진행한다면 그많은 중국의 실업자들은 누가 구제해야하나?
아무튼 중국은 정말 희안한 나라임에 틀림없다.
3. 웃통 벗고 다니는 남자와 미니스커트 입고 자전거 타는 여자
중국에 왔을 때 거리를 다니면서 놀란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하나 미니스커트
입은 여자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광경과 대낮에 남성들이 웃옷을 홀홀벗고 대로변을 거니
는 모습이다. 사실 중국여자들은 날씬하다지만 중궁남자들의 배는 정말 박아지 엎어놓은 것
처럼 둥그렇다. 과히 보기좋은 풍경은 아닐진데, 그들은 더운 것을 참을 수 없어서 그렇단다.
대로를 다니다보면 정말 멋쟁이 여자들이 많다. 한족여자들은 다리가 길고 가늘어 정말 미니
스커트가 잘 어울린고 생각하는데, 그녀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실로 안쳐다볼래야 안쳐
다볼 수 없게 만든다. 우리 일행들도 자칫 잘못하면 사시될 뻔한 일이 한 두번은 아니었을 것
이다. 참 희안하다. 중국남자들은 별로 무덤덤하다. 여자인 나도 눈길이 몇번은 가는데 중국
남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기차여행을 다녀온 우리 同志들도 기차 칸에서 옆에서 자
는 아가씨 때문에 가슴이 떨려 잠을 설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를 가끔 수행했던 학원
장 비서도 아마 우리 남자 同志들의 시선을 잡는 행동이 좀 있었다. 그들의 때와 장소를 가리
지 않고 부끄럼없이 속옷이 보이든 말든 편한대로 행동하는 것을 보면 고개를 들 수 없는 때
가 한 두번은 아닌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문화에 적응되지 못하는 우리들이 부끄러운 것이
지 그네들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기에 더욱 민망했다. 중국인들은 不理他라고 하여 절대 남의
일에 상관하지 않으며, 타인에 대한 이해보다는 스스로 편한것에 익숙해진 민족이라 그렇다
고 한다.
4. 다시 가고 싶지 않은 화장실
"우~~~~~웩" 중국에 있는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자 나오는 소리... 왠지는 상상에 맡긴다.
"중국에 가면 화장실에 문이 없다더라" 이 이야기는 많이 들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까? 시
대가 21세기인데, 설마설마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이였다. 그곳의 화장실은 칸막이가 없
으며,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이었다. 더욱이 볼일보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를 보면서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별 불편없이 살아가는 그들이 정말 신기했다. 어떤 곳에
서는 화장실 사용료를 내야만 사용할 수 있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장소에서 화장
실 사용료를 징수했지만, 99년도 전인대에서 외국인에 대한 불편함을 개선하는 차원에서 공
공시설에 대한 화장실 사용료 징수를 폐지하였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우연히 중국의 화장실문화에 대한 추론설을 찾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
다. 국민당 정부와의 전쟁에서 민을 통한 승리를 쟁취한 "마오쩌뚱"은 누구보다도 민중의 힘
과 그들의 단결력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는 56개 민족이 모인 하나의 중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회 제 부문에 대한 효율적 통제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서구적 화장실 문화를 도입하면서 중국에 맞는 방식, 즉 허리높이의 옆 칸막이만 있고 앞문
이 없는 화장실을 택하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용자의 불편함과는 상관없이 공산주의 정
권 하에서는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화장실을 들여다보면 누가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으니 노동통제를 하기에
아주 유효했을 것이고, 다른 사람이 지켜보는데서 당에 대해 불평불만을 늘어놓을 사람을 사
전에 차단하는 북한의 5호 담당제와 같은 역할이 되었을 것이며, 화장실 문이 없으니 다소간
의 불만이 있는 사람도 낙서를 통해 그들의 감정을 적을 수는 없었으리라... 역사적으로 카리
스마 정권이 늘 그러하였듯 그 당시 중국 공산당은 당에 대해서 어떠한 비판도 허락할 수 없
다는 효율적 민중들의 통제수단으로서 중국의 특징적인 화장실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현재 중국의 화장실문화는 결국 역사적으로 이렇게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서 탄생된 비인간
적 통제수단의 결과물임을 추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듯 하지 않은가?! 현재 중국도 개방
화이후로 서구의 화장실 시설을 갖춘 곳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공항이나 유흥지 등의 화
장실 시설은 선진국과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단 휴지가 없다는 불편은 있지만...
앞으로 더 많은 개방화가 이루어지면 중국의 화장실문화도 언젠가는 바뀔 것을 기대한다.
그리고 다시 가고 싶은 향기로운 화장실이 되길....
5. 맞사지는 누가 제일 많이 ???
맞사지는 우리나라에도 잊지만 중국만의 특이한 직업이 아닐는지.... 우리 同學중에는 맞사
지를 여러차례간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이상하게 보지는 마라 우리나라의 인식과는 차이가
있으니.... 학원 주위에는 많은 맞사지집을 볼수 있다. 발마사지, 전신마사지......
가격은 각지방마다 차이가 있다. 심양에서는 발마사지(약 40분) 20원, 전신마사지 50원(약2
시간) 깍을수도 있다. 그러나 호텔이나 중심가에 가면 이보다도 몇배이상 비싼곳고 있다. 그
리고 이상한 유혹도???
맺 는 말
1. 지난 한달 간을 생각하면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고국에 돌아오니 성취감과 아쉬움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한 달간 정
들었던 모든 사람과 헤어지고 나니 더욱더 그런 감정으로 빠져들게 되나보다. 서로 전혀 알
지도 못하던 여러 동료들과 처음 만났을 때는 서먹함과 어색함이 다소 있었지만 중국에 있는
동안만큼은 우리 모두는 친형제처럼 지냈다. 그리고 처음 요녕성 정치ㆍ경제 학원에 도착했
을 때 이곳 직원들하고 서먹서먹함도 있었지만 얼마 되지 않아 한가족처럼 즐겁게 지내고 정
도 많이 들었다.
우리가 처음 이곳에 올 때는 각자 나름대로 많은 꿈과 목표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그 목표가 얼마나 달성되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각자 나름대로는 무언
가를 얻어갔다는 뿌듯함이 가슴 한구석 자리잡고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잠시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니 한달간 이곳 생활들이 주마등처럼 하나하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무언가를 배우겠다며 아침 일찍 강의실에 나와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밀려오는 졸음을 참
으며 교수님들의 강의를 청취하고, 간혹 어설픈 발음이 나오면 전 교육생이 웃음보를 터뜨리
고, 어떤때는 교수에게 난처한 질문을 하여 교수들을 당황하게 만들고,(특히, 때붙이 형님)
중국어를 한마디라도 더 배우려고 대학생들로부터 늦도록 과외를 받고, 이른 새벽부터 졸린
눈을 비비며 태극권을 배우고, 중국 공무원들과 배구를 하며 친목을 도모하고 연수생들끼리
층별로 나누어 족구대회를 하며 우의를 다지고, 한국 연수 왔던 중국공무원들을 다시 만나
재회의 기쁨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고, 서탑에서 월드컵중계 한국방송을 청취하며 목이 터
져라 한국팀을 응원하고......
이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되어 우리 모두 가슴속에 오래도록 기
억되어 중국에 대한 열정의 불씨로 승화되고 있으며, 언젠가는 다시 한번 재도전의 발길을
내디딜 때 밑거름이 되어 우리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2. 주말 활동
첫주말에는 연수생끼리 단동을 둘러보기로 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벽 단동행에 기차에 몸
을 실었다. 여행하는 많은 중국사람들과 서툰 중국말을 이어가며 대화를 나누며 4시간의 여
행 끝에 단동에 도착하여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적막한 북한땅을 바라보며 아! 통일은 언제
오려나 하며 울적한 마음을 달래었다.
두 번째 주말에는 북경을 가기로 하고 출반 전날 기차표를 예약하려고 하였으나 북경행 기
차표는 최소한 7일전에는 예약을 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여 무척 당황하였다. 우여곡
절 끝에 북경 가는 밤기차에 기차 몸을 싣고 다음날 아침 도착하여 새로운 것을 보고 배우려
고 북경시내를 여기 저기 열심히 다녔고 특히 용경협의 아름다운 산수 풍경을 보고 우리 모
두는 넋을 잃고 감탄사만 연발하였다. 저녁에 호텔에 도착하여 투숙하려고 하였으나 북경에
서는 외국인이 호텔에 투숙하려면 여권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지 못하여 우리들
은 여권을 분실할 염려가 있다고 연수원에 두고 왔으니 낭패가 아닌가. 그래서 급기야 한국
여행사에 연락하여 여권 사본을 팩스로 받아 문제를 해결하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하지마 북
경은 우리 모두에게 아름다운 역사의 도시로 우리 마음속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그리고 셋째주에 우리가 간 백두산은 정말 힘든 여행이었지만 가장 기억속에 남는 것 같다.
비좁은 봉고차에 몸을 싣고 서로의 몸을 부딪기며 13시간을 달려가 아침에 백두산에 올랐
으나 짙은 안개로 인하여 백두산 천지를 보지 못하였을 때의 아쉬움과 실망감 그러나 내려오
는 길에 장백폭포의 웅장함으로 백두산여행의 서운함을 달래고 백두산을 관광하고 돌아오는
길에 어렵게
시간을 내어 용정에 들러 일송정과 해란강 바라보며 우리 조상들이 뻬앗긴 나라를 되찾으
려고 이역만리 만주벌판에서 고통의 눈물을 삼키며 항일운동을 하였을 우리선조 들을 생각
하며 가슴이 한없이 메여져옴을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주 단동견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안에서 각자 연수기간동안에 느낀
점과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또 노래도 돌아가면서 한마디씩하며 한달간을 회상하며
석별의 정을 미리 나누었던 일은 한달을 마무리하는 좋은 자리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2. 좋았던 점 및 아쉬웠던 점
〈좋았던 점〉
가. 중국과 한국은 경제 여건이나 상황이 현저히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면 우리가
요구한 사항들을 적극 반영하여 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특히 우리가 새로운 것을
볼 수 있도록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았고 또 주말에 연수생들끼리 시간을 잘 활용할 수 있도
록 시간을 잘 안배하여 주었고 학원측에서는 연수일정에는 없는 본계시 수동 동굴 등을 볼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 원래 중국의 요리는 향(시향차이)이 많이 첨가되는 관계로 한국사람들이 먹기에는 어려
운 점이 많으나 학원측에서는 특별히 우리연수생들의 입맛에 맞는 음식들을 많이 준비하여
주었고 요일별로 메뉴를 편성하여 우리들이 중국에서 한달동안 생활하는 동안 전혀 불편함
이 없었다.
다. 학원 측에서는 일단 계획이 정하여지면 그 시간에 대하여는 시간을 철저히 지켜주었고
교수들도 강의시작 10-20분전에는 미리 도착하여 준비하는 열의를 보여주었으며, 또한 요
녕성 정치경제 학원 모든 직원들은 우리들이 기숙사 등에 거주하는 동안 전혀 불편함이 없도
록 친절하게 안내해주고 적극적으로 보살펴 주었다.
라. 교수들에게 맡겨진 강의에 대하여는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하여 열과 성의를 다하여 가르
쳐 주었다. 이외에도 학원측에서 우리들을 위하여 여러 가지로 많은 사항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하여주었다.
마. 우리들이 기거하는 기숙사 옆에 유학생 기숙사가 위치하여 자연스럽고 쉽게 학생등 현지
인과 잡촉하고 어울리며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접할 수가 있었다.
〈아쉬웠던 점〉
가. 전체적인 강의시간 배정은 오전에는 어학강좌 오후에는 문화 및 역사에 대하여 강의하고
현지견학 등으로 일정이 편성되어 있었으나 오후 시간에 이론 과목 등이 너무 많이 안배되
어 있어 우리 연수생들이 직접 도시 등을 돌아보며 현지체험 등을 할 시간이 부족하여 아쉬
움이 많았으므로 다양한 현지체험을 할 수 있도록 오후시간의 일부 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
된다.
나. 백두산 여행 일정이 너무 촉박하게 안배되다 보니 주변에 많은 볼거리가 있음에도 불구
하고 시간에 쫓겨 제대로 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며, 조그만 봉고차로 먼거리를 이동하
다 보니 여행에 불편함과 안전에도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다. 차후에는 좀더 여융있는 일정을
편성하고 기차나 대형차로 이동하여 여유를 가지고 역사의 혼이 깃들인 용정도 함께 느긋하
게 볼 수 있도록 일정을 배려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
다. 학원측에서는 농·공단지 자동차생산시설 및 관공서 등을 방문할 수 있도록 연수일정에
포함하여 일정을 편성하였으나 전반적으로 방문지에 가서 우리가 보고 배울 내용이 빈약하
였고, 특히 자동차 생산시설은 가동도 되지 않아 아까운 시간만 낭비한 경우도 있었으며, 또
한 우리 연수생들은 관공서를 견학하여 우리나라와 중국의 공무원 제도나 시설 등을 비교하
여 보기를 바랐으나 일부 시설만 견학하고 자세한 브리핑이 없다보니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
움이 있었다.
라. 전체적인 연수일정이 촉박하다보니 본래 어학연수로서의 효과가 많이 나타나지 않았다
고 생각한다. 일정을 2개월로 하는 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40일 정도는 되어야 연수 효과가
나지 않을까 생각이 되며, 보다 어학에 대한 사전 준비과정이 필요함을 느낄 수 있었다.
3. 중국에 대하여 배울 점
가. 중국은 현재 개혁 개방이후 경제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는 또 한 그 현장을 직
접 보고 들으며 배웠다. 그들의 움직이지 않는 듯한 느긋함 속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큰 에
너지가 용솟음치고 있으며 중국 국가 운영의 최우선 목표도 경제성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중국의 지도자들도 이러한 여건을 조성하는데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에 두려움 마저
느꼈다.
나. 중국은 현재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외국자본을 적극 유치하고 있으며, 그 혜택 또한 파
격적이다. 우리가 다녀온 요녕성만 하여도 외국인을 위한 공단을 조성하고 다양 세제 혜택과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규제를 풀어 외국 자본을 적극 유치하고 있으며 또한 이러한 일에 지방
정부가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관료들 또한 이일에 앞장서서 모든 일을 지원하여 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 중국인들은 전반적으로 문화 및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며 또한 문화재를 잘 이용
하여 관광자원화하고 있어 개발가능한 곳과 보존할 곳을 잘 구분하여 관리하여 나가고 있다.
라. 중국은 사회주의 영향으로 오래전부터 남녀평등이 일반화된 나라다. 결혼한 여성일지라
도 대부분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직장내의 승진기회에 있어서도 남녀차별이란 없다. 남자든
여자든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돌아와서 어느쪽이든 먼저 돌아온 쪽이 식사준비를 한다. 중
국에서는 남녀라는 단어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보수적인 면이 강한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한번 앞선 신세대 사고방식이 베어있다.
마. 중국인들은 지나치게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이라는 말도 있다. 자기 일이 아니면 철저하
게 외면하고 간섭도 하지 않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그것을 고정화시킬 필요는 없다. 의외로
친분관계가 성립되면 의리가 있으며 또한 중국인들은 외모보다 내실을 중시하여 일을 처리
하고 있으므로 매우 실리적인 면이 있다고 하겠다.
4. 우리의 다짐
작년은 연수기간이 두달이라 일정이 다소 여유가 있었지만, 금년은 한달이라 연수 일정이
너무 짧아 일정 또한 빨리 지나간 것 갔다. 짧은 연수기간이었던 만큼 우리 모두는 더 열심
히 공부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더 많은 노력을 한 것 같다.
일례로 중국어를 한 마디라도 더 배워보려고 새벽시장도 가보고, 버스도 타보고, 물건도 사
보고, 이 모든 것이 중국을 좀더 알려는 뜨거운 열정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중국이란 큰 나라
를 한달간이란 짧은 시간에 이해하고 알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이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중국이란 나라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 나라의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려고 계속 노력할 것 것이다. 올해는 특히 한·중 수교 10주년
이기도 하여 우리가 중국에 대하여 더욱더 관심을 가지고 다가서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중국은 현재 한국과 다양한 채널을 통하여 교류하고 있고 요녕성과 경기도도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로서 오래전부터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앞으로도 좋은 관계가 지속되리라 믿는
다. 이제 우리는 고국에 돌아와서 각자 맡은 바 일로 돌아 왔지만
중국이 빠르게 변하는 모습도 지속적으로 지켜보며 우리들의 중국을 알려는 열정을 계속 키
워나갈 것이다. 언젠가는 우리들은 더 큰 꿈을 가지고 중국호에 몸을 실어 우리의 큰 꿈을
실현시켜 볼 것이다.
그리고 아울러 우리가 그 동안 중국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업무와 우리의 주변 상황에 잘
접목시키어 경기도와 요녕성이 앞으로도 좋은 동반자가 되도록 우리 모두의 역할을 다하도
록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끝으로 우리 연수생들이 연수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을
주신 경기도공무원교육원 관계자 여러분 및 요녕성 정치경제학원 관계자분께 감사하다는 말
을 거듭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