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원(1367년생)과 오식(1370년생)은 고려의 수도였던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막역한 동무였습니다. 두 사람은 학문을 닦으며 장차 다가올 격동의 시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원은 1383년(우왕 9년) 문과에 급제하며 먼저 관직에 나아갔고, 오식 역시 1390년(공양왕 2년) 과거에 급제했으나 고려 말기의 극심한 환란과 조선 개창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서 곧바로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야인으로 지내야 했습니다. 그 사이 동무였던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하고 두 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쳐 1400년, 조선의 제3대 국왕(태종)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2. 태종의 준엄한 시험대: "나의 치세를 증명하라"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사병을 혁파하고 왕권을 극대화하며 신생국 조선의 기틀을 단단히 다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즉위 3년 차가 되던 1402년(태종 2) 4월 3일, 나라의 인재를 뽑는 문과 식년시 시험장에 친히 한 가지 시제(試題)를 내걸었습니다.
〈해불양파삼년부(海不揚波三年賦)〉"바다에 파도가 일지 않은 지 3년이 되었다"
이 시제는 주나라 성왕 때 천하가 태평해지자 먼 남쪽 오지의 사신이 찾아와 "바다에 거친 파도가 일지 않은 지 3년이 되었으니, 이는 필시 성인이 계시기 때문"이라며 조공을 바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태종은 은연중에 자신이 피를 묻히며 이룩한 지금의 조선이 얼마나 평화로운 태평성대인지 글로써 증명해 보라는 뜻을 담아 유생들을 시험한 것이었습니다.
3. 시험관들을 경악하게 한 오식의 파격적인 문장
과거 장에 모인 수많은 유생은 왕의 입맛에 맞춰 그저 "지금 세상은 요순시대와 같아 바다가 잔잔하고 평화롭습니다"라며 겉치레 가득한 칭송을 써 내려가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개성 시절부터 이방원이라는 인간의 고뇌와 야망, 그리고 그가 거쳐온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오식은 뻔한 아첨 대신, 가슴을 관통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대구(對句)를 던졌습니다.
昔山來而洶湧 (석산래이흉용)옛날에는 산이 밀려 내려와 물결이 거칠게 날뛰었는데,
今地平而混湲 (금지평이혼원)지금은 땅이 평평해지고 물이 합쳐져 잔잔히 흐르는구나.
이 글을 본 시험관들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왕이 "바다가 잔잔하다"는 문제를 냈는데, 감히 글에 "거친 산이 밀려오고 사나운 물결(洶湧)이 날뛰었다"는 불길한 묘사를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시험관들은 왕이 노여워할까 두려워하여 오식의 답안지를 과락(削科)으로 판정해 아래 등급으로 떨어뜨리려 했습니다.
4. 이방원을 전율케 한 동무의 통찰, 장원 급제
그러나 최종 결재권자인 태종 이방원의 안목은 달랐습니다. 오식의 글을 읽어 내려가던 태종은 이 두 구절에 이르러 온몸에 전율을 느끼며 무릎을 쳤습니다. 오식이 쓴 두 줄은 단순한 풍경 묘사가 아니라, 이방원 자신의 거친 삶과 치세를 완벽하게 대변하는 최고의 찬사였기 때문입니다.
昔 (옛날): 고려 말의 대혼란기부터 선죽교의 피바람, 그리고 골육상쟁의 비극이었던 '왕자의 난'을 거치며 나라 전체가 산이 무너지듯 요동치던 격동의 세월을 뜻했습니다.
今 (지금): 그 모든 피바람과 혼란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잠재우고, 마침내 국가의 기틀을 평평하게 다져(地平) 태평성대의 물길을 열어놓은 현재를 의미했습니다.
태종은 다른 유생들의 가식적인 칭송보다, 과거의 처절했던 혼란을 당당히 직시하고 이를 극복해 낸 지금의 평화를 드라마틱하게 대조한 오식의 천재성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태종은 시험관들을 향해 "이 사람이야말로 나의 마음과 시대의 흐름을 가장 정확하게 읽어냈다!"라며 극찬했고, 시험관들의 우려를 단숨에 뒤집으며 고향 동무 오식을 당당히 수석(장원 급제)으로 발탁했습니다.
5. 명문장가가 걸어간 위대한 목민관의 길
이 극적인 장원 급제를 시작으로 오식은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말만 잘하는 문약한 선비가 아니었습니다. 1416년 제주안무사로 부임했을 때는 한라산 남쪽 백성들이 겪는 행정적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태종에게 상소를 올려 '제주 3읍 체제(제주목, 정의현, 대정현)'를 직접 설계하고 완성해 내는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체제는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유지되는 제주의 핵심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그는 형조참의, 전라도 도관찰사, 중군 및 좌군 총제 등 문무 요직을 두루 거쳤고, 말년에는 경주부윤(동도윤)으로 재직하며 백성들을 다스렸습니다.
1426년(세종 8년) 오식이 57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아들인 세종대왕 역시 깊은 애도를 표하며 부의를 내렸고 훗날 1436년에 그의 업적을 기려 영의정으로 추서하였습니다.
역사적 의의 오식의 〈해불양파삼년부〉는 군주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시대를 통찰하여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 조선 초기의 위대한 명문장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지금도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고 기록될 만큼 찬란했던 그의 문장력은, 백성의 삶을 구석구석 살핀 위대한 목민관의 업적으로 이어져 조선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