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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본명은 인선...( 1504~ 1551). 그는 강릉 북평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며, 19세에 이원수(李元秀)와 결혼한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 왔다. 이후 시가(媤家)인 파주 율곡리에서 생활하기도 하였지만, 자주 강릉에 내려가 홀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렸으며, 이 시기에 셋째 아들인 이율곡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가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하여 서울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가 되던해 삼청동으로 이사간다. 그 해 남편이 평안도로 부임하기 위하여 아들과 함께 갔을 때, 혼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셋째 아들인 이율곡
최근 한국은행이 고액 신권화폐의 모델로 신사임당을 선정하였을 때, 여성계는 "현모양처"라는 家父長的 사회의 이상적인 여성상을 상징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選定이나 그 反對의 이유가 현모양처이라면 한국은행이나 여성계나 둘 다 웃기는 이야기이다. 신사임당은 결코 현모양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신사임당 (申師任堂) 처가에서 결혼을 하고, 친정아버지 3년 喪을 치르고 나서야 시어머니를 처음 대면하였으며, 혼인한지 19년이 지나서야 시집에 들어 온 신사임당이 과연 女性界가 반대하는이유인 가부장 사회의 理想的 여인상이었을까?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면고구려에서는 신부집 본채 뒤에 서옥(壻屋..사위집)이라는작은 집을 짓고 혼례를 치른 뒤에도 사위가 서옥에 살면서 아이를 낳아 장성한 뒤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처가에 머무는 동안 사위는 노동력과 패물을 제공하여야 했다. 태종실록에도" 혼인 예법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어 아들과 손자를 낳아서 외가에서 자라게 합니다, 조선에서도 아직 옛 풍속을 따르고 있습니다"라고 예조가 보고한 내용이 있다. 이러한 혼인 풍습을 바꾼 것은 世宗과 유학자인 士大夫들이었다. 세종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와 신랑집에서 혼인하는 중국식으로 바꿔야 한다고생각했고, 왕실이 앞장 서 이를 실천하였다. 세종이 숙신옹주의 혼례를 中國式으로 치른지 87년이 지나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잡았던 중종17년(1522년)에 혼인한 신사임당은 이 풍습을 거부하였다. 신사임당의 아들 이율곡의 명성이 그 어머니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왜곡되어 간 것이었다. 차라리 위와 같은 행적의 신사임당을 家父長 社會를 거부한 여권 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할지 모른다. 역사는 이렇게 왜곡되고, 그렇게들 알고 있게 된다.
사임당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才能은 일찍부터 나타나 이미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보고 스스로 사숙하기도 하였다. 그의 주된 그림 소재는 풀벌레, 화조(花鳥), 매화, 난초, 산수(山水) 등으로, 이러한 화제(畵題)를 통해 나타난 그림은 마치 生動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이었다.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와 詩, 문장에도 주위의 격찬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율곡은 후일 어머니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율곡은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성품 그리고 정결한 지조 등을 소상하게 기록하였다. 그는 넷째 아들 우(瑀)와 큰딸 매창(梅窓)을 자신의 재능을 계승한 예술가로 키워 냈다. 대표작 으로는 자어리도(紫魚里圖), 산수도(山水圖), 초충도(草蟲圖), 연로도(蓮鷺圖) 등이 있다.
신사임당의 詩...모친(母親)이다. 그가 서울에서 강릉의 홀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은 것 천리가산만첩봉 (千里家山萬疊峰) 산이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귀심장재몽혼중 (歸心長在夢魂中) 자나깨나 꿈 속에서도 돌아 가고파 한송정반쌍윤월 (寒松亭畔雙輪月) 한송정 호수에 외로이 떠있는 달 경포대전일진풍 (鏡浦臺前一陣風) 경포대에 부는 한줄기 바람 사상백로항취산 (沙上白鷺恒聚散) 갈매기는 모래톱에 모였다, 흩어졌다 파두어정각서동 (波頭漁艇各西東) 고깃배들 바다위로 오고 가리니 하시중답임영로 (何時重踏臨潁路) 언제나 강릉 길 다시 밟아 채복반의슬하봉 (綵服斑衣膝下縫) 색동옷입고 어머니 슬하에서 바느질할꼬 약속한 十年 공부 사임당은 19세에 李元秀와 결혼한다. 그러나 남편인 이원수는 학문과 예술 등 모든면에서 사임당만 못 하였던 것 같다. 부인은 어느 날 남편과 마주 앉아 서로 각각 나누어서 10년 동안 학업을 닦은 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을 하였다. 마침내 이원수는 부인을 처가에 두고 서울을 향해서 길을 떠나게 되었다. 10년동안에 크게 성공해서 돌아 오라는 부인의 강력한 권고의 말을 들으며 그는 길을 떠나지만, 처가인 오죽헌에서 20리 되는 성산이란 곳까지 갔다가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집으로 되돌아 왔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나지만 대관령 가맛골이라는 곳까지 40리를 갔다가 다시 집으로 되 돌아온다. 이번에는 대관령 반쟁이라는 곳까지 갔다가 역시 돌아 온다. 사임당은 작정하고 학업을 닦으러 길을 떠났건만, 이같이 사흘을 잇따라 되돌아 오고, 되돌아 온다면 당신이 장차 무슨 인물이 되겠소"하며 아픔을 느낀다. "학업도 학업이지만 나는 도저히 당신을 떠나서 10년이란 긴 세월을 따로 있을 수가 없소. 한 시각도 떨어 질 수가 없는데야 이쩌겠소" 하는 것이었다. 끄집어 내어 남편 앞에 두고, 심각한 목소리로, 나는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몸이라 어찌 더 오래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렇치 않으면 불측한 얘기이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내 인생을 마치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 이원수는 눈이 번쩍 띄어,그 날 밤이 지나서는 서울로 올라 와 열심히 공부하였다고 한다. 그저 평범한 관리로 지내다 죽는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堂號)이다. 당호란 본채나 별채의 이름이다. 그리고 당(堂)은 안주인이 기거하는 집안의 한건물을 말한다. 신사임당이 강릉 오죽헌에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당호를 지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신사임당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사임당은 그의 호(號)가 아니라 그가 거처하던 건물의 이름이다. 師任에서 師는 스승을 의미한다. 그리고 師任의 任은 옛날 중국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 즉, 신사임당은 太任을 스승으로 본 받고 싶다는 의미에서 사임이라고 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周나라 文王시절을 이상향으로 보고, 그 문물을 존중하였다고 한다. 특히 태임의 태교(胎敎)를 본받고 싶어 하였다. 태임의 성품은 단정하고 성실하며 오직 덕(德)을 실행하였다고 한다. 그가 문왕을 임신해서는 눈으로 사악(邪惡)한 빛을 보지않았고,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오만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문왕을 낳으니 총명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여 마침내 주나라의 최고 현군이 되었다. 이렇게 신사임당은 율곡을 비롯하여 7 남매를 애틋히 키워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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