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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작이 뭐예요?”
쉬리, 주유소 습격사건, 박하사탕, 반칙왕, 산책, 친구, 파이란에 이르기
까지 굵직굵직한 근작 한국영화가 감자 캐내듯이 주렁주렁 나온다.
“역은 뭔데요?”
주인공을 보필하다 장렬히 전사하는 특공요원, 열받은 보스가 줄줄이 따귀
를 때릴 때 9번째로 맞고 쓰러지는 조직폭력배, 자장면 먹고 이 쑤시다가 “
자,또 고문해야지”하며 일어서는 고문형사, 반칙을 밥먹듯 하는 프로레슬러
, 깡통처럼 처참히 우그러진 자동차를 견인하는 운전기사,얌전히 새 인생 살
아보려는 여자를 괴롭히는 깡패.
엑스트라만 10년,서른 세살 베테랑 조연배우 지대한씨의 얘기다.
두툼한 시나리오에서 그가 차지하는 부분은 고작 반 페이지도 안되지만,땡
볕이 내리쬐는 영화 촬영장 구석에서 종일 감독의 큐사인을 기다리는 그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그나마 주연배우의 거듭되는 NG로 달랑 한컷짜리 촬영도
못하는 날이 많다.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배우’라는 대형 시나리오 속의
일상적인 ‘신’이다.
“재미있냐고요? 재미로 하기에는 너무 가혹한 일이죠.”그에게 엑스트라
는 본업이다.일반적인 엑스트라는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기본급으로 약
4만원을 받는다.초과분에 대해 시간 외 수당이 있지만,매일 밤까지 출연해
야 한달에 약 150만원을 벌 수 있다.배곯는 직업이다.
소소한 연예인 선발대회에도 2만여명의 인파가 몰려든다.중·고생 사이에
서 ‘연예인’은 장래희망 3순위 안에 든다.‘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
다는데’라며 엑스트라를 지원하는 사람도 많다.그러나 전직 엑스트라에서
정식 연기자가 되는 사람은 채 1%도 안 된다는 것이 한 엑스트라센터 관계자
의 말이다.엑스트라의 수는 별도의 협회가 없어 정확한 집계를 내기는 어렵
지만 수만명에 이른다는 게 관계자들의 얘기다.
1989년 배우가 되겠다며 무작정 서울에 온 그가 이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
면 지금의 그는 주말에 가끔 극장에 들러 영화를 보는 평범한 직장인이 돼
있을지도 모른다.
“처음 출연한 게 KBS 대하드라마 ‘지리산’이었습니다.저 같은 엑스트라
만 수천명이 동원된 어마어마한 작품이었죠.”
빨치산으로 1년여를 지내는 동안 지리산의 사계절이 지나갔다.엑스트라의
상황도 실제 빨치산과 다를 바 없었다.초반에 등장해 죽어가는 사람도 있고,
끝까지 살아남는 장수 엑스트라도 있었다.결국 최후에 남은 엑스트라는 5명
으로 압축됐다.하필 거기에 그가 끼어 있었고,진짜 배우가 되리라는 꿈은 여
기서 싹을 틔었다.
그러나 배우와 영화의 관계는 태생적으로 과잉공급이다.수천 수만의 배우
중에서 소위 ‘스타’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힘들다.한 사람의 스타가 탄생하는 동안 수천명의 엑스트라는 쓴 눈물을 삼
켜야 한다.
“그래서 엑스트라 생활 10년이면 절에서 도 닦고 나온 거랑 똑같다고 합
니다.해탈의 경지에 이르거든요.”
역이나 비중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나니 최근 2년 동안 부쩍 일이 찾아들
기 시작했다.기껏 뒤통수나 팔다리가 나오던 예전의 그가 아니다.얼굴 등장
하는 일이 잦아지더니,어느 날부턴가 한두 마디 대사도 늘어나고 있다.
최근 개봉한 송해성 감독의 ‘파이란’에서 그는 주인공 최민식의 똘마니
2를 맡았다.후배 용식에게 구역을 빼앗기고 실의에 빠진 최민식에게 엉기다
가 하얀 연탄재에 머리를 호되게 얻어맞는 역이다.
얄미운 역이지만 꽤 오랜 시간 등장한다.그에겐 보기 드문 기회였고,이제
길에서 슬쩍 돌아보는 사람도 생겼다.
“사람들이 말합니다.제2의 명계남이라고.하도 여기저기 얼굴을 내미니까,
어떤 영화를 봐도 나올 것 같아 곰곰히 찾아본답니다.”웃는 얼굴에서 여유
가 묻어난다.
현장경험은 어느 배우 못지않지만 연기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그는
지난 1월 극단 ‘유씨어터’의 4기로 입단했다.
오디션을 통과하고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워 이번에 첫 무대에 선다.세익스
피어의 연극 ‘한여름밤의 꿈’에서 그가 맡은 역은 ‘달빛’이다.26일 공연
을 앞두고 그는 지금 초긴장 상태다.배우로서 진정한 도전에 성공하고 그는
더 성숙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설 예정이다.
“다라락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환하게 쏟아지는 조명 아래 서면 편안해집
니다.전생에 광대였나봐요.”
만년 엑스트라 그리고 초자 연극배우 지대한씨는 이제 진짜 주연이 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