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20년은 광복(또는 해방) 75주년이자 6.25전쟁(한국전쟁) 발발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에겐 해방이 곧 분단이었으니 분단 75주년이기도 하다. 왜 우리는 3/4세기 동안이나 분단된 상태로 살아야 했던가? 왜 우리는 해방과 함께 분단이라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을 맞아야 했던가? 우리는 왜 해방 3년 만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고 마침내 5년 만에 전쟁이라는 참화를 겪어야 했던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해방 전후사에 들어 있다. 해방 75주년, 한국전쟁 70주년의 해에 해방 전후 역사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에 게재된다. / 필자 주
그날이 오다
1945년 8월 15일 아침 서울 시내 도처에 ‘금일 정오 중대 방송’을 예고하는 벽보가 나붙었다. 일본의 항복 선언이 있을 것이란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정오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떨리는 목소리를 일본의 패배를 알렸다. 드디어 심훈이 말한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온 것이다.
‘거짓말같이’ 해방이 왔다. 이 감격을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이희승은 해방의 기쁨을 “8월 보름날 저들의 벽력이/ 우리에게는 자유의 종이었다/ 태양을 다시 보게 되도다”라고 했다. 홍명희는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짖는 소리 닭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기뻐서 죽는다고(죽으오매) 무슨 한이 남겠는가(남으오리까)”라고 했다.
해방, 민주정권 수립 등의 구호가 적히 플래카드를 들고 해방을 축하하는 한국민.
일본의 항복 방송 뒤에도 한국인들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한동안 태풍 전야의 정적처럼 관망하며 일상처럼 행동했으나 몇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 거리에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해방의 기쁨을 노래했다. 임명방은 해방의 날 자신이 본 광경을 “저녁 6시쯤 경동거리 애관극장 앞길에서 요란한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오기에 집을 뛰쳐나와 그리고 가본 나는 참으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던 것이다. 애관극장 앞길을 메운 군중은 수백 명을 넘었는데, 언제 준비하였는지 ‘조선 독립 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만세 삼창을 외치면서 내동 사거리를 지나 일본인들이 사는 동네로 행진하고 있었다. 그들의 물결 속에서 나는 삼촌이 말했던 태극기를 처음으로 보았다. 감추어 두었던 것인지, 아니면 항복을 알고 난 후에 급히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일왕 담화 몇 시간 후에 그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 죽은 듯이 일제정치를 인내해 온, 바보스럽게만 보였던 조선인들에게 영원히 불타는 애국심과 민족정신이 엄연히 살아 있었다는 역사의 증언을 나는 그 순간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었고, 인중 생활로 인해 일인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해 있었던 나는 그 후 여러 날 동안 잠을 잊은 채 흥분의 도가니 속에 빠지게 되었다.”(주1)라고 했다.
해방, 환호하는 서울 시내 한국민들.
시인 홍윤숙은 그날의 광경을 “서대문, 광화문, 종로 네거리, 거리마다 물결처럼 사람의 물결…… 나는 그처럼 많은 사람의 물결을 난생 처음으로 보았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숨었다가 그렇게 쏟아져 나왔을까. 어디에 숨었다가 살아 나왔을까. 학생들, 젊은이들, 장정들, 노인들 신기하고도 놀라웠다. 그런 것을 감격이라고 하는 것일까.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이 그저 무작정 군중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혼자라는 외로움도 없었고 날이 저물었다는 두려움도 없었다. 밤을 새워 걸어도 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배가 고픈 것도 발이 아픈 것도 잊어 버렸었다. 왜 걷는지도 알지 못하였다. 언제 어떻게 그려 가지고 나왔는지 종이 태극기가 사람들의 손에서 휘날리기도 했었다. 그것을 바라보며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리기도 했다.”(주2)라고 했다.
한국민은 이처럼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해방의 그날을 맞았다. 해방된 한국민의 앞에는 수많은 과제들이 놓여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일제가 통치체제를 허물고 그 자리에 한국민이 주인이 되는 새 나라를 세우는 것이 요구되었다. 한국민은 해방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이를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새 나라를 세우기 위한 활동은 준비된 사람, 여운형이 가장 먼저 시작했다. 여운형은 1940년대 초부터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그에 대비하기 위한 노력과 준비를 기울였고, 이를 위해 1944년에는 건국동맹을 조직했던 것이다. 여운형의 건국동맹은 일제의 패망과 함께 새 나라 건설을 위한 활동에 뛰어들었다.
여운형엔도 회담과 치안권 확보
일제의 패망은 한국인에게는 해방의 환희였으나 일본인들에게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었다. 일본에서는 천황의 항복 방송이 예고된 8월 15일 전날 밤 결사항전을 주장하는 강경세력들이 항복 선언이 담긴 녹음판을 탈취하려고 기도했으나 실패해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러자 육군상 이나미는 새벽에 할복해 사망했고, 5명의 대장과 100여명 이상의 장교들, 그리고 30여명의 민간인들이 패전 선언에 불복해 할복, 자살했다.(주3)
일제의 항복 선언과 함께 조선에서는 일본인들의 안위가 문제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이들 일본인의 생명을 보존, 무사히 귀국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급박한 일이었다. 한국인 중에서 유력 인물과 교섭해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 필요했다. 해방을 맞은 한국인으로서는 독립 국가를 하루 빨리 복원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가 합치되어 조선총독부와 여운형이 협의하게 되었다.
조선총독부는 8월 10일 일본대본영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는 사실을 알고는 일본인의 안전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총독부 치안책임자인 경무국장 니시히로 다다오(西廣忠雄)는 종전과 동시에 정치범·경제범 석방 문제, 한국인 유력자에게 치안 협조를 부탁하는 문제를 생각했고, 그 대상으로 여운형과 안재홍, 송진우 등을 생각하였다. 8월 14일 오후 11시경,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일본 국왕의 조서 전문이 조선총독부에 하달, 보고되었다. 총독부 당국자는 치안과 일본인의 안전을 의탁할 대상으로 여운형을 지목했다. 일제의 판단으로는 여운형은 최후까지 투옥될 만큼 일제에 비타협적이었고, 대중운동과 깊은 관련을 가졌으며 특히 청년층에 인기가 많았다. 사회주의자로 지목되던 여운형은 소련군이 서울에 진주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적임인물이었던 것이다.(주4)
여운형과 회담을 통해 치안권을 넘겨준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
그런데 후에 한민당의 김준연은 그의 저서 『독립정신』이란 책에서 조선총독부가 송진우에게 먼저 치안 협조를 부탁했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주장하며 여운형의 행동을 비난하였다. 그러나 치안교섭의 당사자였던 엔도 정무총감은 1957년 8월 13일 국제타임즈와의 회견에서 송진우와의 치안권 교섭 사실을 부인하였다.(주5)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 조사과장으로 해방 후 심계원장을 지낸 바 있는 최하영은 『월간중앙』 1968년 8월호에 실린 글(「정무총감 한인과장을 호출하다」)에서 송진우가 아니라 여운형을 설득해 치안권을 이양받게 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니시히로 경무국장이 만일 통치권을 조선인에게 이양한다면 누구에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어서 박석윤을 추천했다고 한다. 주 폴란드 만주국 총영사 등을 지낸 바 있는 친일파 거두 박석윤은 일제 말기 근신하면서 독립운동을 지원했는데 여운형과 관계가 있었다. 결국 박석윤을 추천한 것은 그를 통해서 여운형을 추천한 것이었고, 실제로 박석윤은 여운형을 설득해 치안권을 넘겨받도록 했다는 것이다.(주6)
해방 전날인 8월 14일 초저녁 용산의 조선군참모부 소속의 한 한국인 장교 몽양 여운형을 찾아와서 다음날 15일 정오에 있을 일본 천황의 방송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알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몇 시간 후에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가 사람을 보내서 15일 아침 8시에 자신의 관저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여운형은 동생 여운홍과 옆집에 살고 있던 홍증식을 불러 “우리가 일생을 두고 원하고 투쟁하던 조국해방은 왔다. 내일에 할 일을 하자”며 해야 할 일에 대해 지시했다. 몽양은 신문 경험이 있는 홍증식에게는 『매일신보』사를 접수해 수백만 장의 호외를 찍어 모든 국민에게 해방의 기쁨을 알리고,(주7) 동생 여운홍에게는 방송국을 접수하여 우리말은 물론이고 영어로도 방송하라고 말했다.(주8) YMCA 체육부 간사이자 유도사범이었던 장권에게는 치안유지대를 조직해 철수하는 일본인들이 최후 발악으로 방화, 파괴 등을 하지 못하게 하고 친일파들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주9)
다음날 8월 15일 아침 7시 50분경 여운형은 중구 필동의 관저로 정무총감 엔도를 찾아갔다. 엔도는 몽양에게 “일본은 패배하였소. 금일중에 이것이 공식으로 발표될 것이오. 당신은 치안을 맡아주시오. 이제부터는 우리의 생명이 당신에게 달려 있소”라고 말했다. 여운형은 “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 것, 8〜10월 3개월간 식량을 보장할 것, 치안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에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 청년과 학생을 조직 훈련하는 데 간섭하지 말 것, 근로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간섭하지 말 것”(주10) 등 5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고, 엔도는 요구조건을 주저없이 수락했다. 이렇게 해서 여운형은 총독부로부터 과도 기간의 질서유지를 위한 치안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일본은 치안유지권을 넘겨준다고 했지만 여운형은 이를 통해 사실상 행정권을 확보하는 계기로 삼으려 했다.
해방을 앞둔 1944년 운니동에서 건국동맹원들과 함께 한 여운형(사진=한국일보 자료사진)
건국준비위원회 조직과 활동 개시
1945년 8월 15일 아침 엔도 정무총감과의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계동 여운형의 집에 건국동맹 조직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일본 천황의 특별 방송을 함께 들었다. 12시 정오 히로히또가 떨리는 목소리로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고 발표했다.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일제는 패망하였고 조선은 해방을 맞았다. 방송 후 몇 시간이 지난 뒤부터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해방의 기쁨을 즐기기 시작했다.
여운형은 오후 1시 30분경 헌병사령부로 가서 건국동맹 조직의 핵심 활동가였던 이임수를 석방시켜 데려왔으며, 3시 30분경에는 서대문 형무소로 향했다. 여운형의 강력한 요구로 엔도 총감으로부터 오후 4시에 정치범과 경제범을 석방하겠다는 승낙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법적 수속이 안 되어 석방은 다음날로 미뤄졌다.(주11)
여운형은 건국동맹원들을 정식으로 소집해 각각의 임무를 맡겼다. 유도사범 장권에게는 이전부터 준비해온 치안대 조직 임무가, 이정구에게는 식량대책위원회 조직 임무가 각각 부여되었다. 운니동 송규환의 집에는 건국동맹원인 이여성, 김세용, 이강국, 박문규, 양제하, 이상백, 이만규 등이 모였다. 여운형은 운니동에 기획처를 두고 별도로 안재홍과 함께 계동 임용상의 집에서 실행부를 구성했는데 여기에 이만규, 이상백, 정백, 최근우가 참여했다. 실행부를 중심으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다.(주12)
신간회 총무 시절의 안재홍(1927.2)(사진=경기도 박물관)
여운형은 안재홍을 찾아가 건국준비를 위한 위원회 조직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냈다. 8월 15일 저녁 계동 임용상 소유의 양옥건물에서 여운형을 비롯해 안재홍, 이만규, 이여성, 이상백, 정백, 최근우, 이강국, 박문규 등이 중심이 되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위원장에 여운형, 부위원장에 안재홍이 추대되었다.(주13)
건국동맹을 중심으로 출발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자신의 임무를 치안유지에 한정할 것인가, 아니면 정치활동까지 전개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구성원들은 이 문제를 논의한 끝에 정치활동까지 확대하기로 합의했다. 해방 후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정치적 열기를 치안대만으로 해결할 수 없을 것이므로 정치운동은 필연적이었다. 또한 치안유지는 한국민 전체를 동원하는 것이므로 친일분자라고 해서 제외할 수 없고, 한번 치안사업에 참가한 자들은 반드시 향후 정치활동에도 참여하려 할 것이기에 그때 가서 배제하기도 어렵다는 점 때문이었다.(주14)
8월 16일 오전 10시를 기해 전국 각 형무소에서 독립투사들이 일제히 석방되었다. 일부 지방에서는 8월 15일에 석방된 곳도 있었다. 오랜 형무소 생활로 안색이 창백하고 핏기 없는 얼굴들이었지만 의기는 넘쳤다. 여운형은 보호관찰소장 나가사끼(長琦祐三)와 함께 서대문형무소와 마포형무소 수감자 석방에 입회한 뒤, 석방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인사말을 건넸다. 건준은 전국에서 정치범과 경제범 석방에 입회했다. 전국 형무소에서 2만여 명의 정치사상범·경제범이 석방되었다. 이들이 석방되어 각 지방에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으로 자생적인 치안위원회·자치위원회·치안대·보안대 등의 각종 위원회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시민들과 함께 있는 여운형
8월 16일 오후 1시, 여운형은 계동 건준본부 옆 휘문중학교 운동장에 모인 군중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조선민족의 해방의 날은 왔습니다. ... 이제 우리민족은 새역사의 일보를 내딛게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해방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으니 우리가 지난날의 아프고 쓰리던 것을 이 자리에서 다 잊어버리고 이 땅에다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합니다. 개인적 영웅주의는 단연 없애고 끝까지 집단적으로 일사불란의 단결로 나아갑시다! 머지않아 연합군 군대가 입성할 터이며, 그들이 오면 우리 민족의 모양을 그대로 보게 될 터이니 우리들의 태도는 조금도 부끄럼이 없이 합시다. 세계 각국은 우리들을 주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기를 든 일본의 심흉을 잘 살핍시다. 물론, 우리는 통쾌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하여 우리들의 아량을 보입시다. 세계문화 건설에 백두산 밑에서 자라난 우리민족의 힘을 바칩시다. 이미 전문, 대학, 중학생의 경비대원이 배치되었습니다. 이제 곧 여러 곳으로부터 훌륭한 지도자가 들어오게 될 터이니 그들이 올 때까지 우리들의 힘은 적으나마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주15)
서대문 형무소에서 풀려난 독립운동가들의 기념 촬영(1945.8.16.)
오후 3시에는 휘문중학교 강당에서 ‘건국치안대’ 발족식이 있었다. 일반체육 무도계 대표, 시내 중학교 이상 체육교사와 학도대표들로 치안대가 꾸려졌다. 치안대 총사령부를 풍문학교에 두었고, 대장 장권, 사무국장 정상윤, 총무부장에 송병무 등 각 부서 책임자를 결정했다. 치안대는 심한 중상모략 때문에 많은 애로와 난관에 부닥쳤지만, 해방 직후 치안유지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했다. 건국치안대는 9월 2일 건국준비위원회의 하부조직으로 통일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운형의 지시에 의해 조직되면서부터 건준의 하부조직으로 활동했다.(주16) 건국치안대의 출범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몽양이 일찍부터 장권을 통해 치밀하게 준비해온 결과였다. 여운형은 1942년 1월 당시 YMCA 체육부 간사로 유도사범이었던 장권에게 치안에 대한 연구와 준비를 지시했고, 장권은 오랫동안 만반의 준비를 해왔던 것이다.(주17)
8월 16일 오후 3시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경성방송국을 통해 ‘해내(海內) 해외의 3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 소식과 향후 계획을 밝히는 방송연설을 했다. 안재홍은 방송연설에서 경위대와 정규병의 편성, 식량의 확보, 통화와 물가 안정, 정치범 석방, 친일파 문제 등 신정부수립에 대한 정책을 다루었다. 방송은 오후 3시와 6시, 9시 등 3회에 걸쳐 이뤄져 건준 결성 소식이 전국에 널리 알려졌으며, 일반 국민들은 흡사 조선독립 후 새 정부의 정책발표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주18)
건국준비위원회의 전국 조직화와 체제 정비
8월 17일 건준은 제1차 부서 결정을 완료하고 ‘치안의 확보, 건국사업을 위한 민족 총역량의 일원화, 교통·통신·금융 및 식량대책의 강구’ 등이 건준의 설립목적이라는 점을 밝히는 담화를 발표했다. 건준은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점차 전국적인 체계를 갖추어 갔다. 전국 28개 형무소에서 출소한 2만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각 지역에서 치안위원회, 자치위원회, 치안대, 보안대 등의 각종 명칭을 달고 자생적인 자치조직들이 출범했다. 이러한 자치조직들은 민중정권·민중권력의 맹아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 자치기관들은 일제로부터 치안·행정 업무 등을 인수받고 각 기관을 접수해 자율적인 지방정권의 토대를 닦아 나갔다.(주19)
각 지역에서 조직된 자연발생적인 조직들이 건준 지부로 개편, 체계화하면서 1945년 8월말까지 전국 145개 군에서 건준의 지부가 설치되었다. 불과 보름 사이에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건준지부가 망라된 것은 건준에 대한 국민대중의 기대와 지지가 컸음을 의미한다. 새 나라 건설에 대한 인민대중의 열망과 열의가 넘쳐 났던 것이다. 건준은 체계를 확고히 하기 위해 8월 22일 중앙조직을 12부 1국 체제로 개편하였다. 8월 22일 확충된 중앙집행위원회 부서는
8월 25일에는 건준의 목적과 성격, 그 진로를 알리기 위해 선언과 강령을 발표하였다. 건준은 선언에서 “우리의 당면과제는 완전독립과 진정한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데 있다. … 국내의 진보적 민주주의 세력은 통일전선의 결성을 갈망하고 있으니 이러한 사회적 요구에 의하여 우리의 건국준비위원회는 결성된 것이다.”라고 하였고, 강령으로 다음의 세 가지를 내세웠다.
1.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민족의 정치적 사회적 기본욕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선언에서 건준은 ‘새로운 완전한 정부의 수립을 위해 산파적 역할을 담당하는 과도적 조직체’로 규정하였다. 과거 일제와 결탁해 민족적 죄악을 범한 ‘반민족적 반동세력’을 제외한 각계각층의 모든 지도자들을 모두 망라하는 것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에 여운형은 일찍부터 사회정치적으로 명망있는 인물들을 접촉해 협력을 꾀하였으며, 조만식, 안재홍, 허헌 등과 합작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안재홍과는 수시로 연락해 건준을 함께 하기로 했으며, 평양에 있던 조만식과도 계속 접촉해 해방 후 상경을 촉구했다. 조만식은 평양의 일이 중대해서 떠날 수는 없지만 모든 일에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내왔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허헌 또한 후에 건준 부위원장을 추대되어 여운형과 함께 일하게 된다.(주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