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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8년 2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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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85년 4월 22일 |
미움으로 가꾼 텃밭에서는 결코 사랑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없다. 가깝고도 먼 이웃 한국과 일본은 오랜 역사의 우여곡절 속에서 깊은 불신과 혐오의 골을 키워왔다. 그런 가운데 양국 의 상황을 직시하고 올곧은 방향으로 화해하고자 하는 일부 지식인들의 노력은 구태의연한 증오심의 돌풍에 휘말려 희화되거나 비난 받기 일쑤였다.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남편이었던 소 다케유키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옛 쓰시마 번주의 후예였던 그는 조선인들의 뇌리에서 고종황제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리고자 했던 일본 황실의 정략에 따라 덕혜옹주와 결혼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덕혜옹주는 부모를 잃고 이역만리에서 고독감에 사로잡힌 끝에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소 다케유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 않고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하에 결혼을 밀어붙였다. 그로 인해 결혼 후에야 소 다케유키는 아내의 증세를 알게 되었지만 그녀의 고통스런 상황을 이해하고 존중해 주었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화족에 대한 지원이 끊기자 궁지에 몰린 소 다케유키는 가산을 정리하여 아내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한데 국내외 언론에서는 그를 불쌍한 아내를 유기한 인물로 규정하고 갖은 비난을 퍼부었다. 그 여파로 소 다케유키는 아내와 이혼해야 했고, 얼마 후에는 딸 마사에까지 잃었다. 그처럼 밀려드는 불행의 너울 속에서 그는 시인, 교육자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았고, 평생 시와 그림을 통해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추억하려 했던 로맨티스트였다.
소 다케유키(宗武志)는 1908년 2월 16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로다 요리유키(黑田和志), 어머니는 구로다 레이코(黑田鏻子), 10형제의 막내아들로 어린 시절 이름은 구로다 다케유키(黑田武志)였다.
아버지 구로다 요리유키는 쓰시마 번주 가문의 35대 당주 소 시게마사(宗重正)의 친동생이었다. 그런데 지바현 쿠루리 번의 3만석 번주 가문이었던 구로다 가문의 딸 레이코와 결혼하면서 양자가 되어 아내의 가문을 계승했다. 한때 나가사키의 재판소에서 일했던 그는 다케유키를 얻을 무렵 도쿄에 살면서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다케유키는 1917년 1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런데 만 10세 때인 1918년 큰아버지 소 시게마사의 후계자였던 소 시게모치(宗重望)가 요절하자 종제인 그가 가문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도쿄의 요츠야 제일심상소학교에 다니던 그는 어쩔 수 없이 쓰시마로 건너가 히라야마(平山) 씨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이즈하라소학교에 다녔다.
1920년 4월, 다케유키는 쓰시마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때부터 영어에 재미를 붙였다. 4학년 때인 1923년 1월과 3월 양부모가 연이어 사망하자 그해 10월, 15세의 나이로 소씨 가문을 정식으로 계승하여 소 다케유키(宗武志) 백작이 되었다.
천혜의 아름다운 환경으로 둘러싸인 쓰시마에서의 나날은 번잡한 도시 생활에 찌들었던 소 다케유키에게 색다른 해방감과 상상력을 안겨주었다. 그는 시문학에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면서 그해에 친구들과 함께 문예잡지 《히쿠이도리(火喰鳥)》를 발간했고, 이듬해에는 시와 동요 잡지 《무쿠게(槿)》를 발간했다. 쓰시마에 대한 애정이 끓어 넘치던 시절, 그는 〈내 꿈은 쓰시마로 이어진다〉라는 시를 통해 희망에 가득한 심경을 다음과 같이 그려냈다.
안개가 걷혀온다.
아소만의 포구마다
고기잡이 어선들이 지금 막 돌아오고 있다.
새벽하늘은 장밋빛으로
시리타케 산을 일찍이도 물들이고 있다.
내 꿈은 쓰시마로 이어진다.
1925년 3월 쓰시마 중학교를 졸업한 소 다케유키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도쿄로 돌아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레이코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는 양부모, 친부모를 모두 잃은 고아가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17세, 백작 가문의 어린 당주로서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다행히 오래 전부터 소씨 가문과 인연이 깊었던 공작 구조 미치자네(九條道實)가 그를 적극 도와줌으로써 가까스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그해 4월 학습원 고등과에 입학한 소 다케유키는 모나지 않은 성품으로 귀족 자녀들과 어울리면서 시와 회화를 통해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문예부의 하이쿠회(俳句會)에서 ‘소낙비가 지나가면 별 것 아닌 빨간 열매도 빛이 나 아름답게 보인다.’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시인으로 공인받기까지 했다. 고등과 3학년이었던 1927년 4월에는 친구들과 함께 미술부 잡지 《풍청(豊靑)》을 창간했다.
1928년 봄, 그는 당대에 대시인으로 추앙받던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고, 이후 특유의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당시 그는 일본시인협회 회원이자 시동인지 《세이탄(生誕)》의 일원이기도 했다.
1928년 4월, 소 다케유키는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 영어학에 흥미를 가졌던 그는 대학강의에 만족하지 못하고 도쿄고등학교의 보이즈 선생으로부터 영어 개인교습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보이즈 선생이 존즈(Jones)의 《발음사전》을 찢어발기려 하자 “선생님, 존즈의 사전대로 발음하면 선생님과 같은 발음이 되는데요.”라고 해서 스승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에게 시인다운 유머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림에 대한 열정도 식지 않아서 그해 8월에는 화가 오구치 유(尾口勇)의 화실에 나가 유채 발색법을 배웠고, 그와 함께 고전협회도 창립했다. 그처럼 소 다케유키는 대학 시절 영어·시·회화 등을 두루 섭렵하면서 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1931년,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그는 학업을 계속하려 했다. 그런데 이전부터 황실에서 은밀하게 추진해오던 덕혜옹주와의 결혼이 확정되면서 발목이 잡혔다.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은 일찍부터 일본정부의 국책으로 결정된 사항이었다. 그들은 덕혜옹주를 일본인과 결혼시킨 후 일본의 화족에 편입시킴으로써 조선 왕족으로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고자 했다. 그것은 조선 민중에게 일본의 강제병합에 끝끝내 저항했던 고종황제를 상기시키는 덕혜옹주를 조선인의 기억에서 완전히 격리시킴으로써 저항의 구심력을 지워버리려는 음모의 일환이었다.
덕혜옹주는 소 다케유키가 도쿄에 되돌아온 1925년 봄 일본 유학이란 명목으로 도쿄에 끌려와 영친왕 이은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소 다케유키는 1930년 11월에 후견인이었던 구조 공작 저택에서 덕혜옹주를 보았다고 한다. 선남선녀의 만남이라 색다른 뉴스가 있을 법도 한데 별다른 일화는 전하지 않는다.
다이쇼 천황의 부인이었던 사다코 황후의 뜻에 따라 궁내성 소지츠료(宗秩寮)의 총재 키도 고이치(木戶幸一)가 적극적으로 결혼을 추진하던 1931년 초순. 덕혜옹주는 여자학습원 본과를 졸업한 상태였다.
당시 이왕가에서는 두 사람의 혼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예로부터 쓰시마 번은 조선의 신하를 자처했으므로 덕혜옹주가 아무리 망국의 후예라 해도 소 다케유키와는 신분상으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결혼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덕혜옹주를 데리고 있던 영친왕은 그녀의 의심스러운 건강상태 때문에 영락한 소씨 가문에 재정적인 도움을 주어서라도 하루빨리 시집보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 무렵 이왕가는 천황가에 버금가는 세비를 받았고, 본국에서 보내오는 자금도 막대했다.
결혼식은 1931년 5월 8일 코오지마치 나가다쵸에 있는 소씨 집안의 저택에서 치러졌다. 소 다케유키는 23세, 덕혜옹주는 18세였다. 덕혜옹주에게는 부모를 대신하여 오빠인 영친왕 이은 부부가, 다케유키에게는 후견인이었던 구조 부부가 중매인으로 참석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내외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조선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조선일보는 두 사람의 결혼사진에서 다케유키의 형체를 지워버리기까지 했다.
덕혜옹주는 결혼으로 마음의 안정을 찾은 듯 평온한 나날을 보냈다. 학창시절부터 뒤따라 다니던 감시의 눈초리에서 벗어난 데다, 자신을 존중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남편 소 다케유키의 온화한 성품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병세는 남모르게 심화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6월 상순으로 예정되었던 부부의 쓰시마 방문이 10월로 연기되었다.
그해 10월 30일 소 다케유키 부부는 쓰시마 이즈하라항의 니시하마에 도착했다. 그들은 11월 1일 다케유키가 학창 시절 머물던 히라야마 타메타로의 집을 방문했고, 쓰시마중학교에 가서 기념식수를 했다. 2일에는 킨세키칸(金石館)의 환영식에 참석했다. 이런 바쁜 일정 때문이었는지 덕혜옹주는 마침내 사람들 앞에서 지병을 드러내고 만다.
사흘 째 되는 날 소 다케유키는 예전부터 각별하게 지냈던 고모리(高森)의 저택에서 집주인 고모리, 다메타로, 사이토 관리인 등과 함께 담화를 즐기고 있었다. 한데 갑자기 그 자리에 덕혜옹주가 나타나 큰소리로 계속 웃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행동에 다케유키는 몹시 당황했고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부부는 이즈하라를 떠났다. 도쿄로 돌아온 소 다케유키는 아내의 외출을 막고 주변 사람들에게 입조심을 시켰다.
덕혜옹주의 병이 악화되면서 소 다케유키의 시름이 깊어졌지만 애정은 식지 않았던 듯하다. 만주사변이 한창이던 1932년 8월 14일 덕혜옹주가 귀여운 딸을 낳았던 것이다. 다케유키는 몹시 기뻐하면서 아내의 이름에서 혜(惠) 자를 따서 이름을 마사에(正惠)라고 지었다.
석 달 후 그는 아기의 모습을 유화로 그리고 ‘MASAE’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 그림의 어두운 부분 한쪽에는 붉은 색으로 ‘NOVEMBER, NINETEEN THIRTY TWO, THREE MONTHS A. B.’라고 쓰여 있다. ‘1932년 11월, 생후 3개월’이란 뜻이다. 사랑스런 딸의 모습을 영원히 남기고 싶은 아버지의 따뜻한 애정이 엿보인다.
1932년부터 소 다케유키는 히로이케 치쿠로(廣池千九郞)의 도덕과학강습회에 참가했고, 1934년 4월 그는 쓰시마의 민요를 채집 기록한 《쓰시마민요집》을 간행했다. 1935년 도덕과학전공학교가 개설되자 치쿠로의 초빙을 받아 강사가 되어 도덕과학 강의를 담당했다. 그해 12월 29일 영친왕 이은 부부의 아들 이구의 다섯 살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을 때 그는 딸 마사에와 함께 참석했다. 그 무렵 덕혜옹주는 일체의 외부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케유키는 1936년 1월 도덕과학전공학교 본과에서 영어를 가르치다가, 4월 도쿄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현대영어를 공부했다. 1939년 3월 대학에서 졸업한 뒤 본교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1940년 11월 도덕과학전공학교 강사를 사임하고 12월부터 자택연수에 들어갔다. 이는 덕혜옹주의 병세와 관련되어 있음이 분명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전격적인 진주만 기습을 계기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황은 한동안 일본이 주도했지만 미드웨이 해전을 계기로 역전되어 미군의 본토 공습에 이르렀다. 1944년 4월, 소 다케유키는 오랜 칩거생활을 접고 내각 정보국 사무촉탁으로 총재관방 전시자료실 제2과에 들어가 번역 업무에 종사했다.
소 다케유키는 1945년 4월 28일에는 이은 부부의 은혼식에 참석하여 처가에 대한 예의를 다했다. 그해 소 다케유키는 37세, 덕혜옹주는 33세, 마사에는 10세였다. 전쟁이 종국으로 치닫던 그해 7월 말 그는 육군독립 제37대대에 소집되어 이등병의 신분으로 카시와 83부대로 전속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인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1946년부터 연합군최고사령부의 지휘하에 새로운 헌법제도가 추진되었다. 이에 따라 6월부터 소 다케유키는 귀족원의 백작의원에 선출되어 헌법위원회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해 11월 3일 반포된 일본국 헌법에 따라 화족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작위가 박탈되고 평민 신분이 되었다. 그러자 정부의 지원이 끊기면서 생활고가 시작되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1월 12일 공포된 재산세법에 따라 엄청난 세금이 부과되었다. 궁지에 몰린 다케유키는 저택을 팔고 시타메구로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했다. 그로 인해 덕혜옹주를 돌볼 사람이 없어지자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도쿄에 있는 마쓰자와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된 조선은 승전국인 미국과 러시아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북쪽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남쪽의 대한민국으로 각각 분리 독립되었다. 그 와중에 도쿄에 있던 이왕가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자 영친왕 이은은 재일한국인이 되었지만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덕혜옹주는 소 다케유키의 부인으로서 일본인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1950년 이왕가를 방문한 서울신문 도쿄특파원 김을한 기자는 퇴락한 이왕가를 방문했다가 과거 자신의 제수씨가 될 뻔했던 덕혜옹주의 처지를 알아내고 분개했다. 그는 정략결혼의 희생자였던 옹주의 비참한 상황을 조국에 알리면서 여론을 모아 그녀의 귀국을 추진했다. 그 때문에 소 다케유키는 병에 걸린 고귀한 옹주를 병원에 유기했다는 혐의로 한국인은 물론 일부 일본인들의 거친 비난을 받았다.
오랜 세월 동안 정신질환에 걸린 아내를 보살피면서 살아왔던 그로서는 실로 모욕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내외의 압력이 연일 가중되자 그는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중재로 1955년 6월 이혼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덕혜옹주는 영원히 안타까우면서 성스러운 아내였다. 1956년 4월 발간된 그의 첫 번째 시집 《해향(海嚮)》에 실려 있는 ‘사미시라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에 그의 심경에 잘 나타나 있다.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구완으로
잠시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마사에를 지극히 사랑했다. 평소에 그는 딸과 함께 등산을 하며 많은 시를 썼고, 자신이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쓰시마에 세 차례나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1942년 여름 그는 마사에와 함께 코후(甲府) 오비나산(帶名山)을 넘어 쇼우센쿄(昇仙峽)에 놀러갔다. 그때 14수의 시를 썼는데 마사에를 그린 작품이 무려 여섯 수였다. 그 중에 몇몇을 읽어보면 아버지와 딸이 손잡고 산과 골짜기를 다니며 누린 행복감이 눈에 밟히는 듯하다.
‘내 딸과 함께 먹는 오비나 산기슭의 산딸기에 안개가 서려 있네. 맞은편 후지산에는 햇볕이 쨍쨍.’
‘다리를 끌며 걷는 딸을 얼러가며 겨우 찾은 산장, 벌레가 무서워 곧바로 뛰쳐나와 버렸네.’
이후 장성하여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마사에는 1955년 가을 23세 때 대학 동창 스즈키(鈴木)와 결혼했다. 그해 들어 덕혜옹주와 이혼하고 사랑하는 딸까지 곁을 떠나자 심한 고독감에 사로잡힌 다케유키는 가을에 서둘러 가츠무라 요시에라는 일본 여인과 재혼한 다음 지바현 카시와시에 있는 히로이케 학원 기숙사로 이사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1956년 8월 마사에가 돌연 실종되었다. 그달 26일 마사에는 ‘코마가다케 방면에서 자살한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집을 나갔다. 경찰에서 수차례 험준한 산악지역을 수색했지만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마사에의 장례식은 작은 항아리에 한 알의 진주를 넣고 상자에 담아 치렀다. 다케유키의 마음속에 사랑하는 딸은 진주처럼 영원히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생전에 마사에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남편 스즈키는 이혼절차도 밟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른 1983년 7월 16일, 도쿄 긴자의 마쓰자카야 백화점에서 소 다케유키의 그림전시회가 열렸다. 이때 다케유키는 1931년, 1933년, 1934년에 그린 유아의 초상화 4점을 선보였는데 바로 마사에를 그린 것이었다. 팸플릿의 표지 그림도 생후 3개월 된 마사에의 초상화였다. 말년에 그가 남긴 미완성 시집 《쿠로시오(黑潮)》에도 딸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담겨있다.
나라사키의 비 내리는 산길
내 아이 가버린 후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다.
오늘도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해방 후 김을한 기자와 왕실 인사였던 박찬주, 민병기 등이 덕혜옹주의 귀국을 추진했지만 조선왕실을 경원시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옹주의 귀국은 1962년에 이르러서야 박정희 의장의 단안으로 간신히 성사되었다. 그 무렵 병세가 심했던 덕혜옹주는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비행기에 올라 38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언론에서는 연일 그녀가 일본에서 얼마나 모진 상처를 겪었는지를 마치 소설처럼 그려냄으로써 민심을 자극했다. 그 과정에서 남편 소 다케유키는 그녀를 정신병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모질고 사악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1968년 무렵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낙선재를 찾아갔지만 종실 관계자들에게 냉대를 받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다케유키는 그 후 히로이케 학원의 레이타쿠(麗澤)대학에 교수로 봉직하면서 재혼한 부인과 사이에서 2남 1녀를 얻었다. 1975년에는 시 잡지 《시덴》을 창간하면서 청년시인 육성에 전념했다. 만년에 완성한 시집 《쿠로시오》는 생전에 교정까지 끝냈지만 사망 후에 출판되었다. 이처럼 그는 본질적으로 시인이고 교육자였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불쌍한 덕혜옹주의 고약한 남편일 뿐이었다.
1985년 4월 22일 소 다케유키는 쓰시마에서 만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9년 4월 21일에 덕혜옹주도 세상을 떠났다. 이후 두 사람의 인연은 일제병탄기에 난무했던 음모와 불행의 단편처럼 그려졌다. 하지만 소 다케유키는 최후의 시집 안에서 조강지처였던 덕혜옹주를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먼 바다 갈매기가 모여드는 섬에서
내 사랑하는 아내를 잊지 않을 거야.
세상이 다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