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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론리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김상우
2010년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은 의미 있는 해이다.
6.25전쟁은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었고, 전쟁 이후 남과 북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사고와 행동을 규정짓는 일대 사건이었다. 1천만 이산가족의 한(恨)과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채 병상에 누워있는 전상자들, 늙은 몸으로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살아가는 전쟁미망인들, 그리고 국군포로 문제 등 오늘날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다. 이처럼 6.25전쟁은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참혹한 전쟁의 배경이 무엇이며, 무엇을 남겼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가슴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다.
마침 인제군에서는 6.25 6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며 기념사업의 기본취지를 지난 6,25 전쟁을 기억, 정리하고 그 속에서 교훈을 얻어 미래를 준비하자는 의미로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필요한 예산 마련부터 준비, 진행까지 인제군민이 주최가 되어 스스로 ,함께, 밑에서부터 치른다는 계획아래 행사 내용은 위령제, 공연, 체험, 세미나, 화합의 장 등으로 구성하였다.
물론 이러한 행사도 중요하지만 이 기회에 우리의 지역에서 6.25의 접전이 제일 먼저 이루어졌으며 마을주민들이 북한괴뢰군을 몸으로 막은 한 전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 국가의 흥망성쇠는 자기나라의 역사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갖고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느냐? 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이다.
1. 인제군 소개 (문화재 해설사 2009.10.1 강원대학교 엄찬호 교수)
1945년 광복과 동시에 38도선을 경계로 양단되면서 인제면. 기린면. 기린면 일부, 북면, 서화면과 인제면 일부가 공산치하에 들어가고, 남면, 내면, 기린면이 홍천군으로 편입되었다.
1950년 6.25사변이 발발하자 남면 수산리에서는 청장년 40명이 결사대를 조직해 장만규 등 고정간첩 3명을 제거하고 7월에는 반달골에서 북괴 정규군 80명을 격퇴하는 등 이 지역 주민들은 멸공전선에 앞장섰다.
휴전협정이 성립된 후 1954년 2월 20일이 지역에는 군정이 실시되고,
농민 수복령으로 주민입주가 시작되었으며, 10월 21일에는 “수복지구임시행정조치법”에 따라 양군군의 해안면과 홍천군의 남면 . 기린면이 이 지역에 편입되었다.
1963년 해안면이 서화면에 통합되었고, 1973년 춘성군 북산년 수산리와 양구군 남면 상수내리. 하수내리가 인제군 남면에, 홍천군 내면 미산리가 인제군 기린면에, 인제군 남면 두무리가 양구군 남면으로, 서화면 현리. 오류리. 만대리. 후리. 월산리. 이현리가 양구군 동면으로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 인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 2월 15일 기린면 상남 출장소가 상남면으로 승격되어 남면 금부리, 기린면 하남리, 상남리, 미산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1993년 인제읍 덕산리 일부가 북면으로 편입되었다.
2. 북괴치하의 반공활동 (양구군지 1984)
* 수산리 반공결사대 활약
양구군 남면 상수내리와 하수내리는 38접경의 최남단 마을로서 역시 38선 접경 이남마을인 춘성군 북산면 추전리와 대곡리와 소양강을 사이에 두고 맞대고 있다.
상.하수내리에 살던 우익인사들은 공산당의 압박에 못 이겨 상당수가 월남하여 수산리에 정착했다. 이들은 원주민 청년들과 함께 청년단을 조직, 반공투쟁에 앞장섰고, 6.25 동란 중에 반공 결사대를 조직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대한 청년단 활동
수산리 반공청년들은 1948년 가을 대한청년단 리단(단장 이문규)을 조직, 본격적인 반공투쟁을 전개했다.
➀ 1948년 가을 북괴 유격대원 수십명이 야간 침투,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많은 사상자를 냈다. 한청단원들은 군경과 함께 유격대 섬멸에 큰 전공을 세웠다. 또 민가에 숨어든 패잔병을 추격 1명 사살, 2명은 자폭케 했다.
➁한청무장대는 1948년 7월 밤을 틈타 명곶리 38보안대를 습격하여 12인을 사살하고 막사에 불을 질러 전소시켰다.
➂ 1949년 8월 한청무장대원은 대낮에 “사래월” 여울 대안에 잠복했다가 명곶리 노동당 세포위원장 박상기를 사살했다.
➃ 수산리 주민들은 동란초기 낙오된 국군 부상병 4명을 결사대 본부에서 치료 간호하여 9.28 수복 때 원대 복귀한 바 있다.
*결사대 활약
1950년 7월 상순 韓靑里團長 이문규와 전 단원은 한 자리에 모여 만장일치로 결사대를 조직하기로 했다. 이들은 우리들은 6.25전에 자유민주 기치하에 멸공투쟁을 한 업적이 뚜렷하니 북괴치하에서 잡혀 죽거나 싸우다 죽거나 택일해야 할 시기에 왔다. 결사대를 조직하여 싸우다 죽으면 국가 민족을 위하여 숭고한 애국정신의 발로가 아니겠느냐는데 모두 뜻을 같이 했다.
결사대는 2개 소대에 대원 43인으로 조직되었고 대장에는 이문규가 선임됐다. 결사대는 본거지를 마을 뒷산에 정하고 곰골 광산골에 각 소대가 분산, 적적을 살폈으며 식량은 수산리 전 주민의 적극 지원으로 조달했다.
* 대원 명단
이문규, 도복수, 이대길, 심재협, 장영희, 김종순, 윤정상, 김윤하, 안봉운, 윤순상, 황관섭, 권흥윤, 이용우, 김용삼, 장웅희, 임성철, 김종식, 장귀동, 전부성, 이원진, 김치삼, 윤웅초, 이원진 (나머지 인원은 불상. 전사 또는 행방불명. 양구출신 21명) 장인규
➀ 결사대는 우선 6.25전 북괴간첩 협의로 복역하다가 남침 후 출옥한 3명의 적색분자를 야간을 틈타 사살하고 가옥 3동을 소각시켰다. 이로써 단원들의 행동에 장애가 될 화근을 없애버렸다.
➁ 대원들은 인근 부락인 대동리에 온 북괴 내무서 지서원 3명을 유인 생포하여 수산리 절골에서 사살했고 장총 3정과 탄약을 함께 노획했다
➂ 민정을 살핀다는 명목으로 수산리에 온 북괴 북산면 인민위원장과 서기 1명을 황골고개에서 타살했다.
➃ 북괴정치보위부원 2명이 수산리에 와서 결사대원 가족을 구타, 실신케 한 후 집에 방화했다는 정보를 듣고 긴급 출동, 생포하여 사살하고 권총 2정을 노획했다.
➄ 부괴군 토벌대 1개 중대를 맞아 유리한 곳에 잠복했다가 수 시간 교전 끝에 81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리고 62정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결사대 측에도 사상자가 다수 있었고 이문규 대장은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➅ 수산리는 북괴관리들이 신변의 위협을 느겨 접근하지 못한 곳이며 노동당을 비롯한 각 사회단체가 조직 활동을 못했고 현물세 과징업무도 수행하지 못했다.
북괴치하에서도 공산당의 세력이 미치지 못한 반공마을이다
➆ 1950년 7월 상순 북괴보안요원이 자위대원 50명을 인솔하고 하수내리에 와서 축우 10여두와 식량 등을 강탈해 간다는 소식을 듣고 긴급 출동, 도강중인 배에 일제 사격을 가했다. 배는 전복되고 3명 사살, 1명 생포의 전과를 올렸고 축우, 식량 등은 주민에게 되돌려 주었다.
➇ 퇴각하는 북괴군 패잔병들에게 수십 차에 걸쳐 무장해제와 교전 끝에 400여 명을 사살하고 무기 150여점을 노획했다. 때로는 북괴군 장교복을 입고 국군이 있으니 위험하므로 순수히 무기를 버리고 가라고 하여 무장해제를 시키기도 했다.
➈ 유엔군 북진 때 우익인사 50여 명이 납북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대원들은 어로지서 뒷산에 잠복하고 있다가 치열한 교전 끝에 납북인사 다수를 탈출시키는데 성공했다. 북괴군 10여 명을 사살했고 대원들은 계속 추격, 납북인사들을 가까스로 구출했고 패잔 북괴군 10여명을 사살했다.
➉ 결사대원들은 국군 북진 후 화랑부대 요청에 의해 양구군 동면에 파견되었으며 북괴 패잔병이 해안에 집결했다가 10월 중순 양구읍을 습격할 때 가까스로 남하했다.
결사대는 11월 중순 해산하고 노획한 무기 250여 정은 두촌 지서에 인계했다.
대원 43명 중 월남 가담한 대원은 21명인데 전사 또는 행방불명자가 16명이나 되고 수복 정착한 대원은 5명에 불과하다.
대장 이문규는 양구출신 대원들을 따라 양구읍 상리에 정착했으며 반공활동 공로로 78년 3월 1일 지사포상을 받았다.
3. 기타 자료 (인터넷)
북한군의 기습으로 국군이 이를 방어하기 어렵게 되자 민간인들이 군번없는 용사가 되어 전투에 참가하였다.
학도의용군이나 무기운송을 하였던 노무자, 현지입대 등으로 국군을 지원하는 경우와 달리 적 후방에서 게릴라활동을 전개한 경우도 많았다.
그들은 국군이 부산까지 밀리면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투쟁을 하겠다는 투쟁의 의지를 가졌다. 전쟁 전 좌익 빨치산 출몰지역에서 이들의 진압에 참가하거나 그들의 공격에 대해 지역주민들이 일시적으로 대항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쟁 초기 북한군의 앞도적인 우세 속에 이루어진 빠른 남진 속도에 남한지역 주민들은 북한군이나 좌익세력들에게 대항하기 어려웠다.
이미 1950년 7월 하순 북한군 제4사단이 진안.군산.광주.남원.목포 등지를 점령했고 제6사단은 순천.하동을 거쳐 진주를 공격하기 위해 집결하였다.
제12사단은 안동을 점령하고 8월초에 이르러 낙동강에 도착하였다. 이러한 긴박한 전세는 유엔군에 참전으로 역전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을 계속 하였는데 이번에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빼앗기고 다시 후퇴 해야 했다. 이에 대한 반격전은 서부전선에서 1월 중순부터 오산.이천.수원을 탈환하였으나 서울을 재차 회복한 것은 3월 중순이었다. 중부전선에서는 1월 하순 원주와 영월을 탈환하였다.
이와 같이 밀고 밀리는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 유격대가 발생할 수 있는 시기는 크게 3개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전쟁초기 국군의 후퇴 시기이고 둘째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 시기이고 셋째는 중공군의 제3차 공세로 서울을 빼앗기고 이를 수복할 때까지이다.
둘째, 북진 시기는 아군의 승리에 고무되어 여러 지역에서 치안대 혹은 학도의용대를 편성해 치안대를 확보하면서 국군을 지원하여 북한군 패잔병이나 빨치산 토벌에 참가한 경우가 많아서 순수 유격대로 보기는 어렵다.
셋째 경우도 북한군 점령 시기보다 짧은 기간인데다가 독자적인 활동 보다는 51년 1월 중순 경북 문경군 동노면 적성리에서 중공군의 공세와 합께 밀고 내려온 북한군에 대해 미 제10군단 산하의 국군과 문경 경찰 및 대한청년단 특공대원 29명이 참가한 경우처럼 국군과 경찰 등을 지원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유격대 활동이활발한 북한군 점령시기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들은 1950년 7월 22일 대통령령 (긴급명령)제7호에 따른 비상시 향토방위령에 의한 전국 각 마을 단위로 조직되었던 향토자위대나 기타 공적인 명령에 의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결성된 것이다 즉 북한군이 남한지역을 점령했을 때 모두 피난을 간것이 아니라 일부는 자원하여 국군에 입대 하거나 반공유격대를 결성하여 곳곳에서 항전을 벌였다 반공유격대에 가담한 이들은 어린 학생들이거나 아니면 북한군의 점령 아래 있던 청장년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반공청년단체에서 활도 하거나 군경이나 공무원 가족 등이 주동이 된 경우가 많았다. 유격대원들은 국군전투복. 인민군복. 민간복장 등 다양한 옷차림을 하고 무기도 국군이나 경찰이 남기고 갔거나 북한군으로 부터 노획한 다발총. 소련제 소총 등으로 무장하였다. 민간 유격대가 활발한 곳은 지역별로는 38선과 근접한 지역인 경기도와 강원도로 이곳 주민들은 전쟁이 이러나기 전부터 북한군의 잦은 도발을 겪었기 때문에 국군이 후퇴한 후에도 북한치하에서 반공투쟁 활동을 계속한 경우가 많았다.
강원도 인제군에서도 기린면 상.하남리 .진동리.남면 수산리 등에서 한청 결사대의 유격활동이 있었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수산리 결사대는 전쟁이 나면서 이문규 등 6명으로 조직되었다. 그 후 양주군 남면 하수내리 (당시 38선 이북)에 거주하던 김종순이 수산리로 피난오면서 결사대를 확대 재편되어 대원의 수는 43명으로 늘었다.
대원 구성상의 특이한 점은 월남인이 32명이고 수산리 현지 주민은 11명이었다. 결사대 대장 이문규는 당시 36세 였고 다른 대원들은 16세의 소년으로부터 40세까지 이르렀다. 후에 60여 명으로 대원이 늘어나자 2개의 소대로 편성하였다
마을 주민들은 북한 요원들의 활동상황을 제보하고 식량을 조달하였다
결사대원들은 군. 경이 후퇴하면서 버리고 산 총과 탄약을 입수해 무장하여 수리산 뒷산 광산골을 본거지로 해서 국군이 진주할 때까지 활동했다.
7월 초 북한 내무서원이 자위대원을 데리고 수리산으로 와서 소 10마리 식량 등을 강탈한다는 정보를 입수해 대원들이 출동하여 도강 중인 배를 전복시킨 후 소와 식량을 주민들에게 돌려 주었다.
또한 민정을 살피기 위해 수리산에 온 북산면 인민 위원장과 서기 1명을 황골고개에서 사살한 것을 비롯하여 수리산에 인접한 대동리에 온 내무서원 3명을 유인하여 전골에서 사살하고 장총 3정과 탄약을 노획하였다.
정치보위부원 2명이 수리산에 와서 결사대원의 가족을 구타하고 집을 방화했을때 긴급 출동하여 이들을 모두 사살하였다. 이 때문에 북한군 점령시기에 좌익세력들이 신변에 위협을 느껴 단체활동을 하지 못하고 현물세 징수업무도 수행하지 못한 반공마을이었다.
결사대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북한군을 격퇴하고 북한군이 후퇴할 때 피납된 인사 50여 명을 구출하는 한편 패잔병을 습격해 그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유격 활동중에서 대원들의 희생도 늘어나서 전사자와 행불자가 16명이나 되었다. 11월 경 결사대는 홍천경찰서 두촌지서에 노획한 무기 250여정을 인계하고 해산 하였다.
* 결론/ 건의
반공결사대원 중 현재 생존하는 분은 전부성씨(홍천 거주, 28년생)와 장귀성씨(인제 남면 거주, 31년생)이다.
연로하셔서 그 당시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면서도 당시의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주먹을 불끈 불끈 쥐곤한다.
잊혀져 가는 6.25의 참상을 되살려 다시는 이 땅에 동족상잔의 비극이 없도록 국가방위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상의 자료를 검토한 강원대학교 엄찬호 교수는 충분히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말하여 본(本) 수산리, 상수내리 주민들은 국가를 위해 몸 바친 분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저 마을에 충혼탑 건립을 하여 매년 참배행사와 당시 치열하였던 매봉산을 기점으로 홍천군 원동리, 두촌중학교까지 주먹밥과 감자를 먹으며 행군 등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는 행사를 할 계획이다.
인제 6.25 전쟁 60주년 추진위원회, 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등의 지원과 각계의 동참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0. 7.28
추진위원장 심성흠 (인제군 남면 수산리) 연락처 010-6376-4777
첫댓글 내가 사는 남면 이웃마을 수산리에 이렇게 애국투사들의 활동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앞으로 나라가 어려울때 목숨을 바쳐 싸울 수 있는 재향군인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