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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고 푸른 하늘 밑 하얗게 펼쳐져 있는 억새발을 꿈꾸고, 바람에 너울거리는 억새꽃을 기다렸다. 그리고 단풍이 물들어 절정에 이를 때 즈음, 배낭을 꾸리고 모자를 눌러썼다.
신불평원으로 오르는 첫 길은 넓은 오솔길이다.
시멘트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2박3일의 여정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숨이 차 오를 정도의 오르막을 걷고 나면, 얕으막한 계곡물을 만난다.
숨을 돌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갈 길이 먿라면서 겁을 주는 엄성효씨(울산대OB), 신불산 산장지기이기도 한 엄성효씨는 이번 억새산행에 함께 한 김준모씨(울산대OB)와 함께 텔레이샤가르 원정에서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오랜만의 고향 산행인지라 들뜬 마음에 웃음이 두 사나이의 온 얼굴에 배어 있다.
오르는 길 좌측으로 보이는 산줄기는 이미 단풍이 다 들어, 아직 따사로운 햇살에 짱짱하게 붉어진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산불산으로 오르는 길은 그 줄기에도 있다.
다섯 시간 짜리 사파른 경사 때문에 힘들긴 하지만 이쪽에서 바라보는 것보다 이쪽편을 바라보는 전망이 더욱 좋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 많이 찾는다. 그리고 그뒤편 산줄기에 바로 아리랑리지가 있다.
울긋불긋하게 산중턱을 적신 단풍을 피해(?) 산 속으로 들어섰다. 신불산장까지 가는 길은 지그재그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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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엄쉬엄 젖은 이마를 훔쳐가며 두신 여만에 도착한 산불대피소. 바로 아래 샘의 쪼로록 거리는 물소리가 제일 먼저 반긴다. 얼른 달려가 연거푸 들이켰다.
차고 시원한 물에 열중해 있는데 장병희 기자의 탄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산이 울렁거린다. 온 능선에 억새가 파도치고 있었다.
"우와아..."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신불산의1급수로밥을 지어냈다. 산 아래 무성한 채소들로 반찬을 대신 하고 젖가락 뒤꼭지로 된장을 쿡 찍어 삼킨다.
억새, 황홀한 그녀들의 노래는 잠시 잊었다.
드넓은 고원에 펼쳐진 억새의 향연
억새 이엉으로 지붕을 얹은 대피소 뒤로 10여여미터를 올랐다. <영취산 2.3Km, 신불산 0.65Km>. 능선의 남북으로 갈린 신불산(1208m)과 취서산(1092m) 중간에 갈길 몰라하고 섰다.
어느 쪽부터 보아야 하는가.
사방으로 햇빛에 반짝이는 억새 천재다. 대여섯명의 산행객들이 둘러앉아 평원의 바람을 즐기고 있다.
남쪽으로 넓게 자리한 신불평원의 억새밭은 1시간 가량 떨어진 취서산 정성까지 감싸 안았다.
신불평원을 질러 남쪽 취서산으로 향한다. 아직은 파란 억새잎이 하얀 꽃송이를 받치고 있는데,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동동떠 있는 것과 한 모양새다.
신불평원 서쪽으로 까만 들무더기들이 깔려 있다. 뭔가 싶어 다가가니, 성곽이 무너져 앉았다. 성곽을 이루고 있었을 석축물들은 이미 돌이끼가 잔뜩 끼고 마모되어 둥글둥글해졌다.
취서산 정상까지 석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취사선으로 가는 길은 퍼 가까워 보였지만, 가도가도 똑같은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 풍경을 담기에 여념이 없던 장병희 기자는 신기하다며 앞장서 걷는다. 억새를 헤치며 걷는데 발밑이 물컹물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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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성곽내에 물이 있었다! 그랬구나. 사람들이 충분히 살 수 있는 성지였다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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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축물을 뒤로하고 취서산으로 오르기 위해 길 없는 억새밭을 가로질렀다.
멀리 첩첩히 둘러선 능선들이 운무와 함께 명암을 드러내고, 억새평원에는 드문드문 키 낮은 소나무들이 운치를 자아냈다.
지난 해 글쟁이인 친구 하나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거기 올라보니, 억새에 비해 짝딸만한 소나무가 듬성듬성 볼품 없었다."고, 그녀석은 억새의 여백을 소나무가 채우고 있는 줄 알았나 보다. 아무리 봐도 소나무의 바탕칠이 다름 아닌 억새인 것을.
취서산 정상에 서니, 차가운 바람이 사정없이 불어댄다. 가까운 줄 알고 얇은 셔츠 바람에 달려오다니, 땀이 식어 덜덜 떨다가 다시 억새평원으로 내려섰다.
멀리 시살등, 간월산, 수미봉, 향로봉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곳 억새평원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이 많았다더니 그럴듯도 하다.
키를 넘는 억새밭에 드니, 보이는 건 눈앞의 억새잎과 하늘뿐이다. 키 큰 김준모씨의 모자를 따라 억새를 헤치고 능선에 섰다. 산장지기 엄성효씨 말에 의하면 "여기는 이맘때 빼고는 안개와 비, 바람에 있는 길도 못찾을 수 있는 날씨가 대부분" 이라고 한다.
두 달 가랸 비워 놓은 산장으로 돌아와 대충 정리를 끝낸 뒤, 멋진 노을을 기대하며 저녁밥을 비웠다. 보름이라 달도 밝으리라. 산골의 반짝반짝 빛나는 별들을 기대하며 하늘을 바라보다가 망연자실.
산장으로 자리를 옮겨 버렸다. 조각 파이같이 못난 구름들이 달에 착착 들러 붙고 있었다. 난로에 불을 지피고 시린 코를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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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koutdoor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