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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이형근 베드로. 이다한 스테파노(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옮김
레오 셀리-프라이스Leo Sherley- Price의 영문판 『완덕의 거울』은 『St. Francis of Assisi: His Life and Writings as recorded by his contemporaries』에 수록되어 있으며, 1959년 뉴욕의 하퍼 브라더스 출판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의회 도서관 목록 카드 번호: 60-8137. 폴 올리니Paul Oligny가 테오필 데스보네트T. Desbonnet의 프랑스어 해설을 번역했다.
1959년 알렉산더 마세롱Alexander Masseron은 레오 형제의 글들과 『완덕의 거울』에 대해 다루는 자신의 저서 속 한 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레오 형제가 쓴 「완덕의 거울(Speculum Perfectionis)」 혹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관한 가장 오래된 전기(S. Francisci Assisiensis Legenda antiqussima)」를 폴 사바티에Paul Sabatier가 처음으로 편집했다. 이 첫 번째 편집은 1898년에 있었다. 그 제목은 마치 전투에서 완벽하게 승리한 모든 프란치스칸이 기뻐 부르는 승전가처럼 들린다."
이제 이 전투의 반향들은 희미해졌고, 주요 인물들도 모두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이 연구하고 발견한 것들의 중요성을 볼때 그들은 열정적인 학자였으며, 성 프란치스코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마땅히 그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 사바티에에 의한 『완덕의 거울』의 부활이 그러한 논의들에 활기를 불어넣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오직 비평의 역사만이 『완덕의 거울』이 왜 오랜 시간 동안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페루자 필사본 1046이 아직 알려지지 않았을 때 『완덕의 거울』이 레오 형제의 기억들을 담고 있으며, 비록 왜곡되기는 했지만 토마스 첼라노가 사용했던 원천들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전해 준 유일한 작품이었다는 것이다.
『완덕의 거울』에서 제기된 많은 문제가 지금은 해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알렉산더 마세롱이 지지하는 전투의 모습들을 설명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초판(1898년 판)
폴 사바티에를 『완덕의 거울』로 이끌었던 연구의 발전에 관해서는 이미 충분히 언급되었다.
폴 사바티에는 1898년에 자신의 연구들을 출간했다. 그의 책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 매우 가치 있는 서문을 담고 있다.
서문의 첫 부분에서 저자는 레오 형제의 삶과 초기 형제회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일관되게 옹호할 논지를 진술한다. 이는 다음과 같다. 첼라노와 성 보나벤뚜라가 그렸던 성 프란치스코의 모습에는 오류가 있는데, 그것이 권위라는 이름 앞에 그리고 존경할 만하지만 진실과는 동떨어진 편향된 생각의 영향으로 인해 의도적으로 왜곡되었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코의 진실된 모습을 알고자 우리는 반드시 『완덕의 거울』의 저자인 레오 형제에게 집중해야 한다.
특별히 저자의 뛰어난 솜씨 때문에 이 첫 번째 부분을 읽는 것은 흥미롭지만, 이 부분은 그의 책에서 가장 논란의 여지가 많은 부분이다. 후속 연구들은 레오 형제가 『완덕의 거울』을 적어도 직접 저술하지는 않았음을 밝혀냈다. 또한 이 연구들은, 만약 이상적인 프란치스칸에 대한 해석의 차이들이 존재했다면, 적어도 성 보라벤투라가 총봉사자로 봉사하던 시기 까지는 이 차이들이 성 프란치스코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는 데 방해가 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토마스 첼라노의 『2생애』의 존재는 이 문제들을 증명해 주고 있으며, 폴 사바티에가 생각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예시의 크레센시오가 제기한 레오 형제에 대한 의혹들은 해소되었다.
서문의 두 번째 부분은 필사본들에 관한 설명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별히 실망스러운 것은 저자가 이 설명들을 역사비평적인 소품집(the Opuscula of historical Critism)과 문헌 모음집(the Collection of documents)에 관한 다른 책들에서 계속 서술했다는 것이다. 필사본들의 단편들을 식별하는 데 몇 가지의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독자들이 지나치기 쉬운 이 설명들은 그 가치를 조금도 잃지 않고 있다. 우리가 그 설명들이 보여 준 인내심 있는 연구와 힘든 노력을 생각할 때, 독자는 우리가 그것들을 쓴 사람에 대한 존경을 아끼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서문에 이어 『완덕의 거울』의 본문이 시작된다. 비록 본문의 변형들이 지적되고 있지만, 이 본문이 진정한 비평본은 아니다. 본문에 실린 많은 주석은 그 내용의 많은 부분이 이제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이 본문과 특히 폴 사바티에가 주장하는 논지들의 출판은 활발한 비판과 연구를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사본들 또는 새로운 문헌들이 발견되었고, 이에 폴 사바티에는 『완덕의 거울』을 다시 편집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3년 그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영국 프란치스칸 연구 학회(British Society of Franciscan studies)에서 발표했고, 1925년에는 첫 본문이 인쇄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사바티에의 병으로 인해 출판이 연기되었다. 사바티에가 1928년 3월 4일 사망했을 때 본문의 인쇄작업은 거의 끝났지만, 그는 서문에 대한 작업을 끝내지 못했다. 사바티에의 후손들은 그의 노트를 A.G. 리틀 교수에게 보냈으며, 그가 마침내 사바티에의 개정판을 완성했다. 이 개정판은 두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권에 수록된 본문에서는 오직 일부만 변경되었으며 이것들은 사소한 점들과 관련이 있었다. 1898년 판과는 달리, 이번 판은 다양한 변형을 보여 준 진정한 비평본이다.
둘째 권에 수록된 비평 연구는 1898년 판에 수록된 연구와는 꽤 상이하다. 그렇지만 어떤 사항들에 관해서는 1898년 판이 보다 완벽하기에 이 이전 판은 여전히 참조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바티에가 그의 본래 논지를 실질적으로 수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가 제기한 주장들은 하나하나씩 검토되어야 한다.
필사본
두 번째 판의 『완덕의 거울』 본문을 확립하기 위해 폴 사바티에는 45개의 필사본들을 검토했고. 그중 11개의 필사본이 본문에 적합하다고 확정했다. 11개의 필사본들을 우리는 두 그룹으로 구분할 수 있다.
"포르치운쿨라 모음집(The Portiuncula Collection)"이라 불리는 첫 번째 그룹에는 일련의 공통된 특성을 가진 5개의 필사본들이 포함되어 있다. 보통의 크기이고, 비전문적인 필사가에 의해 쓰였으며(결과적으로 본문들 사이에 비교적 큰 차이가 있으며), 그 필사본들은 모두 엄격한 준수 형제들(Observants)의 수도원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북방 모음집(the Northem Collection)"이라 불리는 두 번째 그룹은 큰 크기의 필사본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크로지에 수도원(Crozier Monasteries)출신의 전문적인 필사가들에 의해 세심하게 제작되었다.
사바티에는 첫 번째 그룸의 필사본들은 다소 은밀히 전달되었지만, 반대로 더 이후의 필사본인 두 번째 그룹의 필사본들은 15세기에 성 프란치스코의 명성이 자자했던 나라에서 그를 이해하기를 원했던 다양한 수도자들에 의해 도서관에 소장될 목적으로 작성되었다고 보았다.
『완덕의 거울』의 정확한 작성 시기
북방 모음집의 두 필사본과 포르치운쿨라 모음집의 한 필사본은 『완덕의 거울』이 언제 쓰였는지에 대한 암시를 주고 있다.
피렌체의 모든 성인 수도원 필사본에 따르면 "the fifth of Ides, May, 1318" 곧 1318년 5월11일에 『완덕의 거울』이 완성되었다. 두 개의 북방 필사본에는 "the fifth of Ides May, 1228"로 적혀잇는데 우리의 계산으로는 1227년 5월 11일에 해당될 것이다.
마자린Mazarin 필사본이 가장 처음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폴 사바티에는 의문의 여지없이 1227년도 날짜를 받아들였다. 더 나아가 이것은 그의 논지를 휼륭하게 입증해 주었다. 그러나 두 개의 북방 필사본에 나타난 차이점에 대한 검토는 그 필사본과는 다르게 그 필사본들은 날짜에 관해 오직 하나의 증언만을 나타낸다.
본문의 많은 세부 사항이 1227년도의 날짜와 다르고 주제에 생소한 내용(위트레흐트의 수호성인인 성 쿠네라에 관한 언급)의 첨가는 북방 필사본에 표시된 날짜를 신뢰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필사가가 혼동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만약 필사본들 가운데 하나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북방 필사본이다. 필사가는 MCCCXVIII를 MCCXXVIII로 바꾸었는데, 세 번째 C를 X로 표기했다. 그렇기 때문에 1227년도 날짜는 잘못되었으며, 확실하지는 않지만 오직 하나의 필사본에서만 나타난 1318년도 날짜가 신빙성이 있다.
서문과 문학 양식
모든 필사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이 작품은 복된 프란치스코와 그의 동료들이 이전에 썼거나 또는 받아 적게 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한 성인전의 형식으로 쓰였다."
이 서문은 폴 사바티에를 매우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사바티에의 대부분의 논지를 훼손했으며, 그가 『완덕의 거울』이 작성되었다고 본 1227년도 날짜와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사바티에는 그 서문이 나중에 첨가되었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그 중요성을 최소화하려고 했지만, 그의 설명이 정교하고 치밀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반면, 우리가 앞으로 본문에 대해 하려는 분석은 이 서문이 매우 정확하게 『완덕의 거울』이 무엇인지를 서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완덕의 거울』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글에서 발췌한 내용들의 모음이며, 그 발췌문들은 대부분 정확한 시기가 기록된 것이다.
『완덕의 거울』의 원천들
『완덕의 거울』은 124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많은 비평가가 그 안에서 각각 다른 출처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완덕의 거울』이 출판되었다. 그들이 원천 사료들을 판별하기 힘들었던 이유는 바로 『완덕의 거울』이 토마스 첼라노가 사용했던 문헌에 의존하는 반면에 『2생애』와 많은 유사함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혹자는 『완덕의 거울』이 직접적으로 『2생애』에 근거한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1922년 토마스 첼라노에 의해 사용되고, 『완덕의 거울』의 편집자에 의해 별도로사용된 문헌을 알려 준 페루자 필사본 1046이 발견됨으로써 우리는 각각의 장이 어떤 출처에서 왔는지를 밝힐 수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는 첼라노의 『1생애』에서 한 장, 『2생애』에서 29개의 장, 페루자 필사본이 상당히 신빙성 있게 서술하고 있는 첫 동료들의 회고 모음집에서 90개의 장, 다른 곳에서 상응함을 갖는 2개의 장이 왔다고 알고 있다. 마지막으로 2개의 장은 확실히 고유한 것이다. 84장은 포르치운쿨라의 영광을 노래하는 6보격(leonine hexameter)의 서사시를 담고 있으며, 85장은 이상적인 작은 형제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비평가들은 이 모든 자료가 재편성되었지만 『완덕의 거울』의 편집자에 의해서 다시 고쳐 쓰이지는 않았다는 것에 대체로 동의한다.
재편성의 분명한 증거는 있다. 『완덕의 거울』은 연대기적 순서를 따르는 전기가 아니라,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열두부분으로 나워서 성 프란치스코라는 인물을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이미 『2생애』의 2부와 『대전기』의 목적이었다. 이 두 작품은 편집자가 『완덕의 거울』을 구상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확률이 크다.
하지만 자료는 고쳐 쓰이진 않았다. 이로써 우리는 그 문헌들의 깊은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저자는 자신 앞에 놓은 본문에 많은 수정을 가했다. B.테라치니는 『2생애』 본문의 변형에 대해서 연구했으며 그의 결론은 『완덕의 거울』에 사용된 모든 문헌에 적용될 수 있다. 그와 함께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에 주목할 수 있다. 『완덕의 거울』의 이탈리아식 문체에 맞지 않는 구문 도치가 전반적으로 해결되는데 종종 모호한 생략부분들은 반복에 의해서 그리고 대명사, 형용사, 더 추가된 동사들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명확해진다. 그리고 동사의 시제들이 변한다. 마지막으로 첨가에 의해서 본문을 희석하는 분명한 경향이 있는데, 그중 많은 것이 주석의 형태를 띠고 있다.
요약하면 만약 필사할 본문을 선택하고 통합하려는 구상과 본문에 추가한 약간의 주석으로 『완덕의 거울』의 편집자가 자신을 "영성가"로 분류한다 하더라도 그의 본문 변형을 검토해 보면, 그가 논쟁적인 것보다는 문체 혹은 주석적 문제에 더 촉구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발견한 대로 본문들을 사용했으며. 만약 그 가운데 몇몇이 논쟁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가 그러한 뉘앙스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있다.
『완덕의 거울』의 기원
『완덕의 거울』이 세상의 빛을 보았을 때의 상황에 대해 우리는 아직 완전히 분명하게는 말랄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지식 안에서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할 수 있다.
13세기 말과 14세기 초 다른 전기들이 파리 총회(1266)의 결정에 따라 폐기되면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는 모두를 만족시키기에는 부족했던 『대전기』를 통해서만 알려졌다. 『2생애』그리고 레오 형제와 초기 동료들의 회고록들이 발견되면서, 한 형제가 그것들로부터 성 보나벤투라에 의해 조용히 제외된 사실들의 모음집을 얻어 냈다. 페루자 필사본 1046은 이 모음집의 사본이다. 그런 다음 그 형제 또는 다른 형제가 이 모음집을 가지고 『대전기』에 의해 영감받은 구상 위에서 조직적으로 구성된 작품을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완덕의 거울』이었다. 이 작품은 한 번에 완결되지 않고 그 전에 많은 필사본이 모여 완성되었을 것이다. 아비뇽 편집본의 필사본들 안에서 발견된 짧은 판본은 아마 『완덕의 거울』의 첫 번째 편집 형태의 증거일 것이다. 이 작품은 빠르게 형제회 안팎에서 큰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15세기 말 피사의 바르톨로메오가 증언하듯이, 성 프란치스코의 일대기에 관한 고전적 원천 사료 중 하나가 되었다.
『완덕의 거울』에 대한 관심
『완덕의 거울』은 75년 동안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결과적으로 매우 잘 아려져 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작품일까?
만약 우리가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지식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별로 중요한 작품이 아니다. 『완덕의 거울』은 우리가 다른 원천 사료들로부터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 이 작품을 읽으면 우리는 심지어 더욱 심한 논쟁에 관한 꽤 고통스러운 인상을 받게 된다. 이는 놀라운 점인데, 우리가 이미 지적한 대로 『완덕의 거울』이 전하는 본문 안에서 만들어진 변화들은 순전히 문체나 주석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원본과 동일하지 않을 정도로 논쟁적인 인상을 주는 본문들이 있을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이 본문들이 사용된 목적과 관련되지만, 그보다는 서문의 형태를 가지며 전체 글의 논조를 설정하는 첫 장과 관련된다.
논쟁적인 특징과 초자연적인 요소 때문에 첫 장은 폴 사바티에를 당혹케 했으며, 그가 고수하고자 했던 1227년 연도와 부합하지 않았다. 유사한 경우들에서처럼 해결책은 이 첫 장이 작품에 흠집을 낸 나중 가필이었다고 인정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모든 필사본은 이 첫 장이 확실히 저자가 의도한 것이었음을 입증한다. 이 첫 장의 존재는 -필요하다면-1318년 연도를 확증하고 있다.
반대로 우리가 형제회의 역사와 14세기 초 형제회에 퍼져 있던 영적 운동을 유념한다면, 비록 오늘날 『완덕의 거울』이 해답보다는 질문들을 더 많이 제기할지라도, 『완덕의 거울』과 특별히 그것이 형성된 역사에 관한 연구는 흥미로 가득하다.
『완덕의 거울』은 『대전기』의 공식적인 서술을 완성하는가운데 14세기 프란치스칸들의 자녀다운 신심과 성 프란치스코를 향한 사랑 표현의 증언으로 남아 있다. 이처럼 그것은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 작품이 유일하게 우리를 위해 이상적인 프란치스칸의 모습-실존했던 초기 형제들의 자질들을 모두 종합한 인물-을 간직하고 있으며(85장), 이 인상적인 장을 제외한다면 우리는 이 작품의 가치 있는 부분을 잃고 말 것이다.
테오필 데스보네트 (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