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선생님 은초할아버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아버지께서 막내딸을 비봉루에 보내시며 글씨를 쓰지 않고 놀다 와도 좋으니 비봉루에 다니라고 하셨다.
비봉루에 올라가 선생님께 필체가 좋지 않아도 붓글씨를 잘 쓸 수 있는지 여쭈어보니 괜찮다고 하시는 말씀에 용기를 내어 서예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루한 가운데 귀엽게 생긴 중학생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큰 대필을 들고 글씨를 척척 쓰는 것을 보고 주눅이 들어 한쪽 기둥옆에 돌아앉아서 줄을 긋기 시작했다. 보름넘게 돌아앉아 줄을 그었다. 선생님이 웃으시며 바로 앉아서 이제 점을 찍어라는 말씀에 부끄럽게 시작한 글씨가 나의 삶에 동반자가 될 줄은 나도 그때는 몰랐다.
매일 신문지를 한 뭉치씩 싸 들고 사철을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비봉산을 바라보며 누각으로 올라가는 길이 얼마나 큰 즐거움이였는지. 너무나 자애롭고 편안한 모습으로 반겨주시는 선생님과 가끔 누각을 출입하시는 진주의 내노라 하시는 어르신들게 한창 감수성 예민한 나는 너무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아버지가 왜 나에게 글씨를 쓰지 않고 놀다와도 좋다고 하셨는지 그 깊은 뜻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과 달리 70년대만 해도 특별히 취미생활을 할 만한 것이 흔치 않던 시절 아가씨들이 서예를 배운다는 것을 어른들이 좋아하셨다.
비봉루는 남자회원보다 여자회원들이 참 많았다.
장난도 많이 치고 서로 글씨를 잘 쓰려고 시샘도 하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 그리고 선생님을 모시고 등산도 참 많이 다녔다. 꽃이 피면 꽃이 피었다고, 녹음이 짙으면 녹음이 짙다고, 단풍이 들면 단풍 들었다며, 그때는 얼마나 핑계거리가 많았던지.
선생님은 그런 제자들의 응석을 한결같이 잘 받아주셨다. 푸근한 우리 할아버지처럼.
제자들은 선생님이 모두 자기 할아버지인양 할아버지라 불렀다.
부산서 오시는 소당 김지호님께서 선생님을 할아버지라 부른다고 야단을 하셔도 그냥 그렇게 불렀다. 우리 마음속에 선생님은 영원한 우리 모두 아니 나의 할아버지로 남아계신다.
나는 결혼이 늦어 주위 어른들의 걱정을 많이 들었다. 결혼이 정해지고 신랑감을 할아버지와 어르신들게 인사를 시켰다. 그때 할아버지와 파성 설창수 선생님께서 결혼하면 출근하기전에 먹을 한 벼루씩 갈아주라고 부탁하셨다. 못난 제자가 결혼하고 붓을 놓을까봐 염려하시는 말씀이셨다. 그 약속을 잘 지켜준 남편 덕분에 아직도 붓을 놓지 않은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내 표정이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며 남편이 은근히 질투도 한다. 그리고 그런 어른을 스승으로 모신 내가 부럽다는 말도 자주 한다.
내 선생님께서 몸소 실천으로 가르쳐주신 한결같은 마음 학 같은 고매한 인품을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도록 항상 긴장하며 오늘을 산다. 선생님의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기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