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다가올 10월 26일은 비슷한 사연이 겹치는 날이다. 9자 돌림의 해에 일어난 그 사건들, 그 격정과 ‘그 때 그 사람들’에 대한 상념이 떠올라 어줍잖게 글을 쓴다.
이 날의 주인공들은 30년 전(1979년)에는 김재규 씨와 박정희였고, 1백년 전(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였다.
그런데, 13년 전(1996년)의 10월 23일.
이 날의 거사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 날의 주인공은 박기서 의사와 안두희였다.
잠깐!
생존해 계신 박기서 선생에 대해 ‘의사(義士)’란 호칭을 붙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필자는 의사로 칭할 수 있다고 보기에 이하 의사로 칭하고자 한다. 물론 김재규 씨도 의사로 부를 수 있으나, 이 부분은 논란이 더 커질 소지가 있고, 불필요한 반감을 야기할 수 있어 일단 보류하기로 한다...ㅎ
안중근, 박기서의 공통분모는 ‘의사’, 즉 ‘의로운 선비’ 이다. 협객이라 해도 좋다.
‘의사’와 ‘열사’의 구분은 알다시피, 의사 개념은 흉적을 처단하는 행위에 관련되고, 열사는, 이준,유관순 열사처럼, 의분에 못이겨 자결하거나 고난을 겪고 순국한 경우를 말한다.
그럼, 안중근, 박기서, 김재규, 거기에 안두희까지 포함하는 공통분모, 즉 이들을 통칭할 수 낱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자객(刺客)’이다.
‘자객’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아마도, 비수나 검으로 특정인을 죽이는 사람으로 연상할 것이다. 그렇다. 비수, 도검, 철퇴, 몽둥이, 독약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권총이나 폭탄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사람이다.
자객은 ‘찌르는(죽이는) 사람’이란 뜻에 그친다. ‘협객’이란 말은, 그 의미가 자객 개념을 포괄하며, 좋은 뜻을 품고 있다. 따라서 안두희 같은 인간을 협객으로 묶을 수는 없다.
영어에서 자객을 뜻하는 어쌔신(assassin)은 ‘해시시에 중독된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해시시는 대마초로 만든 마약인데, 옛날 중동의 이슬람 극단분자들이 해시시에 취해서 요인들을 죽였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그 유래가 동양의 ‘자객’ 개념 보다는 확실히 젊잖지 못하다.
그런데, 자객, 이 개념 안에는 가치가 들어가 있지 않다.
‘사람’이란 낱말에는 가치 개념이 들어가 있지 않은데, 호인, 악인 하면 가치개념이 들어가 있듯이 말이다.
자객에 가치를 넣어서 좋은 쪽으로 보면 의사요, 나쁜 쪽으로 보면 암살범, 테러범, 흉한이 된다.
요즘, 안중근 의사를 테러범이라고 말하는...이런 헛소리를 하는...같잖은 사람들도 있는데,
의사와 테러범을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자.
첫째, 의사는 대의명분이 있고, 테러범은 그런 것이 없다.
군자유어의(君子喩於義), 소인유어리(小人喩於利),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득에 밝다는 말 그대로 소인 즉 암살범은 의로움이 없기 때문에 사리나 당리를 위해, 또는 개인적 원한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이고, 군자 즉 의사는 대의를 위해, 흉적을 처단하는 것이다.
중국 영화 ‘영웅’을 보면, 무명(이연걸)이란 자객은 진왕을 죽이기 위해 ‘십보일살’ 검법을 수련한다. 열 걸음을 날아가 사람을 쓰러뜨리는 검법이다. 진왕이 자객의 피습을 막기 위해 열 걸음의 간격을 두고 사람을 접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명 보다 앞선 자객들(양조위, 장만옥)처럼, 무명 역시 막판에 진왕을 살해하는 것을 포기하는데, 그 포기 명분이란 게 ‘티엔샤(天下)’를 위한다는 것이었다. 진왕을 죽이면 혼란상은 계속되고 생령은 계속 도탄에 빠지니까, 진왕으로 하여금 빨리 천하를 통일시키는 게 낫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픽션에 지나지 않지만, 죽이고 살리는 것이 그 나름의 명분에 의지했다.
“부르터스, 너 마저!”라고 절규했던 시저(카이사르),
이 시저를 죽인 자객 부르터스는 군중들에게 외쳤다. “나는 누구보다도 시저를 사랑하지만, 시저 보다 더 로마를 사랑했기에 시저를 죽였습니다. 시저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시저를 살려둬서 시저의 노예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시저를 죽여서 자유로운 인민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안토니우스가 그 자리에서 부르터스의 말을 반박하여, 시저가 야심을 품지 않았다고 말하긴 하지만, 부르터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부르터스의 명분 자체는 훌륭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황제를 폐위하고 황후를 시해하는 등 이토의 열 다섯 가지 죄목을 들추었거니와, 이토가 우리 민족을 고난에 빠뜨린 원흉이기에, 또 동양평화를 해치는 괴수이기에 죽인다는 대의명분을 확실히 갖고 있었다.
제나라 선왕이 걸왕이나 주왕 같은 폭군을 죽인 것에 대해, 맹자에게 묻는다. “신하가 임금을 죽여도 되는 것이오? ” 이에 대해 맹자는 “인도(人道)를 해치는 놈을 적(賊)이라 허고 의리를 해치는 자식을 잔(殘)이라 허요. 잔적(殘賊)을 일삼는 자를 양아치(一夫)라고 헙니다. 양아치 죽였다는 말은 들었는데 임금 죽였다는 말은 못들었소" 라고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하물며 이토 같은 자는 군신관계는 커녕, 이민족 침략자의 괴수였으니 안의사의 거사는 정당성을 갖는 것이다.
안중근의사가 이토 처단에 대해 자신의 ‘대한의군참모중장’ 자격, 즉 군인이란 점을 강조한 것도, 단순한 복수심을 넘어, 조국을 구하고 동양평화를 지키겠다는 의전(義戰: 의로운 전쟁) 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 열전 부분이 있는데, 이 가운데 자객열전이 있다. 여기에서 자객 ‘예양’의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예양은 처음에 범씨와 중항씨를 모셨다. 그런데 지백이란 자가 범씨, 중항씨를 없애자, 지백을 모셨다. 나중에 다시 조양자가 지백을 죽이자, 지백을 위해 복수하고자 했다.
다리 밑에 숨어서 조양자를 찌르고자 했으나 말이 놀라는 바람에 들켜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조양자의 부하들이 예양을 죽이고자 했으나, 조양자는 “이 자는 의인이다. 풀어줘라”고 했다.
그럼에도 예양은 복수를 포기하지 않고, 숯을 먹어 목소리를 바꾸고, 옻독을 몸에 발라 문둥병 환자처럼 꾸몄다. 그래서 그의 마누라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어떤 친구가 알아보고서 “왜 이렇게 생고생하냐, 나같으면 조양자를 모시면서 죽일 기회를 노리겠다.”고 말하자. “나도 그 걸 알지, 그러나 내가 굳이 이렇게 하는 것은, 신하된 자로서 두 마음을 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대답한다.
결국, 측간에 숨어 다시 조양자를 찌르려 했는데, 수상한 낌새를 미리 알아챈 조양자 측에 의해 다시 붙잡혔다. 그래서 조양자도 그를 죽이려 하는데, 죽이기 전에 묻는다. “너는 범씨와 중항씨를 죽인 지백에게는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지백에게 빌붙었다. 왜 지백에게만 이렇게 충성하느냐?”
그러자, 예양이 대답한다.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고,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단장합니다”,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 : 나라의 대들보)로서 대접했기에, 나도 국사답게 그를 위해 죽겠소”.
그런데, 지백은 사실 형편없는 임금, 즉 폭군이었다. 이런 임금을 위해, 단지 자신을 알아줬다는 이유 만으로 장렬한 죽음을 택했으니 그 명분이 상대적으로 약하지 않은가!
이스라엘 라빈 총리를 죽인 사람은, 적국인 팔레스타인 사람이 아니라 이스라엘 우익분자였다. 우리나라에서 광복후 여운형, 장덕수, 송진우를 죽인 사람도 당리 때문이었을 것이니 명분이란 게 없다.
백범 김구선생을 암살한 안두희는 자객이긴 하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은 역적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조국광복을 위해 풍찬노숙한 노애국자가 우리 민족에게 베푼 은혜이다.
그리고, 이런 역적을 제 명대로 살게 할 수 없다는 의분으로 거사를 결행한 박기서 선생은 의사이다.
이런 박기서 의사를 비록 실정법 위반으로 구속했지만, 특사로 풀려나게 한 것은 그나마 사리에 맞는다.
안두희가 제대로 처벌받았다면 일어날 수 없는 거사였지만, 정권의 비호 아래 일어난 백범암살사건이라서 그런가? 노애국자를 죽여놓고도 안두희는 백주대로를 활보하며 살았었다.
그럼, 박정희를 죽인 김재규 씨 역시 은혜를 원수로 갚은 패륜아인가? 신하되는 사람이 주군을 죽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특히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데, 들리는 소식으로는 몇 년 전에 이른바 ‘김재규장군 명예회복추진위원회’가 생기고, 김재규씨 기일에 제사를 지내며, 그의 애국심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필자가 조심스럽게 생각컨대, 세월이 더 흐르면, 설령 ‘김재규 의사’로 호칭되지 않더라도, 지금보다는 더 긍정적인 평가가 나올 것으로 본다.
그 평가의 관건은 김재규씨의 내심이다. 얼마나 양심적이었으냐, 얼마 만큼의 의로움에서 출발했느냐이다.
다시 말해서, 정권 찬탈 욕심이나 모욕감을 못이겨 박정희를 죽인 게 아니라, 민주화를 위해서거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바탕했다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김재규 씨는 재판과정에서 민주화를 위해서 거사를 결행했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고 한다.
의사의 두 번째 특징은, 그 결행이 당당하고, 그 죽음을 정면에서 받아들인다는데 있다.
테러범처럼 숨어서 일을 저지르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거사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상관없이 거사 결행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심지어 도망갈 기회가 있어도 도망가지 않는다. 그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서다.
윤봉길 의사의 글씨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은, 죽음을 정면에서 맞겠다는 각오를 드러내고 있다.
이는 중국의 자객 ‘형가’의 시를 닮았다. 형가는 전국시대 사람인데, 중국에서 ‘자객’하면 바로 이 형가를 떠올릴 정도로 자객의 상징 같은 사람이다.
“풍소소혜 역수한, 장사일거혜 불부환(風蕭蕭兮易水寒, 壯士一去兮不復還)”:
바람 소리 쓸쓸함이여, 역수가 차갑도다.
장사 한 번 떠남이여,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 !
안중근 의사의 '장부가' 역시 형가의 시를 닮고 있다. 역시 의사들의 심정은 비슷한가 보다.
“동풍점한혜 장사의열(東風漸寒兮 壯士義熱), 분개일거혜 필성목적(憤慨一去兮 必成目的)”:
동풍이 점점 차가워짐이여,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분개하여 한 번 떠남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
어찌 안중근, 윤봉길 뿐이랴!
이재명, 이봉창, 강우규, 나석주, 김상옥, 조명하 등 수많은 의사들이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려서 의로움을 취함)하고, 살신성인(殺身成仁: 목숨을 버려서 큰 뜻을 이룸)하였다.
삶은 태산 보다 무겁고(生重於泰山), 죽음은 깃털 보다 가볍다(死輕於鴻毛).
스스로 해야 할 임무를 자각하기를 태산 보다 무겁게 느끼는 것이요, 임무가 달성되면 죽음이야 깃털 보다 더 가볍게 느끼는 것이다.
셋째, 의사는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지만, 죽음 자체를 즐겨하는 사람이 아니다.
의사는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의 희생에 그친다. 한 사람을 죽여 천하를 이롭게 하고자 한다(殺一人可以利天下). 여기서의 리(利)는 대리(大利)이지, 소리(小利)가 아니다. 대리는 대의와 통한다.
물론, 의사가 전투를 수행하거나 전쟁에 참여할 때는 많은 사람을 죽이지만, 침략자를 죽여야 정의를 지킬 수 있다는 불가피성에 따르는 것이니, 테러범들의 행위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 서있는 것이다. 테러범들은 대개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으며,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고한 인명까지 살상하기를 서슴치 않는다.
의사는 살인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 아니다. 살인은 의로움을 실현하기 위해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니, 의로움을 떨치거나 공동체를 보존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어찌 같을 수 있겠는가!
아아, 안중근 의사의 의기는 천추에 빛난다 !
“해달도 길을 멈추고, 다시 굽어 보도다”
“꽃다운 이름, 백세(百世)에 남으리”
“협객은 죽더라도 그 기개는 향기롭다(縱死俠骨香)”
안중근 의거 1백돌에 즈음하여, 맹강현 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