콰콰쾅! 쾅! 쾅!
모든 것을 잡아먹어버리는 음악소리가 암전의 어둠까지 삼킨다. 연극의 시작을 향해 잔뜩 긴장을 준비하던 객석의 오감들은 순간 정지다. 갑자기, 확! 불이 켜지고, 퍽! 주먹을 날리는 남자. 시작부터 싸움? 아니다. 인사다. 갓 출소한 '벅'이 친구 '딕'에게 건네는 인사. 한방 날린 다음은? 욕이다. 주먹과 욕설이 이들 식의 인사법이다.
◇출소 기념 대이벤트가 은행털기?
무대에는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침대 하나, 테이블 하나, 의자 셋, 냉장고 하나가 전부다. 모르핀 중독자 '딕'의 집이다. 집이라고 써 놓고 보니 아주 멋쩍다. 마약 중독자와 범죄자들의 아지트라고 해 두자. 출소 기념 대 이벤트라 해야 할까, 딕은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계획으로 벅을 꼬드기기 시작한다. 새로운 인생, 하이라이프를 위한 한판 승부! 은행 털기!
'딕'은 자칭 천재적인 지능의 소유자, 달리 말하면 말발 구백 단에 잔머리의 대가다. '벅'은 엄청난 완력의 소유자, 역시 달리 말하자면 단순 무식 과격의 사고뭉치다. 여기에 나름 휴머니즘과 천재성을 겸비한 소매치기이자 오장육부가 망가진 왕 소심 '도니', 그리고 한번 눈길만으로도 수많은 여자들이 도미노로 쓰러진다는 얼짱 대학생 '빌리'가 인생역전을 꿈꾸며 합세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은 모르핀을 양껏 맘껏 하는 것. 그러나 이들 각자에게도 꿈은 있었으니, 벅은 산 속에 목장을 짓고 싶어 하고, 도니는 고장 난 오장육부를 몽땅 이식 받고 싶어 한다. 딕은 더 이상 수고하지 않고도 평생 할 수 있는 모르핀을 원하고 빌리는 여자들을 등쳐먹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계획은 일단 완벽해 보인다. 먼저 도니, 신기의 손재주를 발휘해 카드를 소매치기한 후 소액을 인출한다. 다음 빌리, 어마어마한 미모로 은행 여직원을 홀린 후 도니가 인출한 액수보다 많은 돈을 건네주며 인출기가 고장 났음을 알린다. 인출기 수리공이 도착하면 벅의 괴력이 발휘될 차례. 그리고 벅과 딕은 현금을 챙긴다. 네 명의 사나이 유유히 사라진다. 우와, 오션스 투웰브의 대가들도 울고 갈 계획이다.
◇은행털기도 전에 싸우고 지레 겁먹고…
드디어 해피데이. 탁자와 두 개의 의자는 자동차 안이 된다. 배우들의 손짓으로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들려오는 바깥의 소음, 깔끔하고도 정확한 연출이 완벽한 차 안의 풍경을 만들어 낸다. 한쪽 벽면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지고 도시의 검은 실루엣이 투영된다. 멋진 장면 변환이다. 그러나 이 한심한 남자들, 딕이 계획한 강도 치고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는 전례는 차치하고, 지레 겁먹은 왕 소심쟁이 도니는 내내 우는 소리를 해 대고, 벅의 성질머리는 툭 하면 터지고, 한술 더 떠 빌리와 벅은 이유도 없이 서로 트집을 잡고 으르렁댄다. 번뜩이는 칼을 꺼내 든 빌리, 결국 벅과 빌리의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다. 슬로 모션, 그리고 부드러운 음성(케니 로저스였나?)의 Unforgetable이 비극적으로, 또한 희극적으로 흐른다. 이들은 성공했을까? 천재적인 지능과 솜씨+완력+미모=성공이었을지 모른다. 잔머리+단순,무식, 과격+소심=? 결과를 확인하고 싶다면, 극장으로 달려가길.
◇영화 '밀양'에 출연했던 이종옥
영화 '밀양'에 단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던 도니역의 배우 이중옥은 이전 연극 '행복한 가족'에서 사위 역을 맡아 매우 인상적인 디테일 연기를 보여준 적 있다. 이번 연극에서도 바가지 모양의 헤어스타일과 기막힌 분장은 물론, 특유의 섬세한 연기로 오장육부 망가진 소심한 소매치기를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다.
벅 역의 이홍기도 '행복한 가족'에서 장남 역을 맡아 잊히지 않는 표정 연기를 보여줬는데 이번에도 역시다. 빌리 역의 권혁. 너무 잘생겼다. 거기에 갈색 곱슬머리, 빨간색 셔츠, 흰색 재킷을 입은 그는 능글맞도록 빌리 답다. 그는 영화 '아는 여자'에서 순경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딕 역의 이광희, 날카로운 눈매지만 어딘지 모르게 순박한 눈동자, 무자비하게 웃으면 하회탈처럼 부서지는 얼굴, 그러나 샛노랗게 물들인 머리와 실크 셔츠를 입고 잔머리를 굴리며 꼬드길 때의 포커페이스는 단연 강도단의 계획가다.
공연시간 내내 마약에 찌든 사람들이 해롱대고, 담배를 피워대고, 냉장고에 가득 찬 일용할 양식인 맥주의 지릿한 냄새가 떠돌고, 폭력이 난무하고, 노골적이고 거침없는 욕설이 쏟아진다. 마약을 조제하는 몸짓, 피부로 바늘을 찔러 넣는 순간 공간을 울리는 음산한 심장의 박동소리, 그리고 몽환적인 음향과 함께 초록과 붉은 빛으로 얼룩진 환각의 상태는 저절로 나에게 이식된다. 욕설은 어느 순간 욕으로 들리지 않게 된다. 모두가 다를 뿐, 누구나 잠시 현실을 떠나는 방법이 있다. 방법이 다를 뿐, 누구나 나름의 하이라이프를 꿈꾼다. 꿈의 방향이 다를 뿐, 누구나. 이렇게 엔딩, 점점 커지는 음악, Born to r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