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는말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모임에서 ‘귀신들림과 정신병’ 에 대한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반응이 있었습니다. 목사인 한 분은 다소 극단적이셨는데, 연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거창한 제목으로 강의를 한다며, 저를 향해 ‘기독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다시는 이런 제목으로 강의를 하지 말라’며 아주 신랄한 비판을 하셨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은 그런 주제를 다룰 수 없다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역시 목사인 다른 한 분은 정신병원에서 근무를 하셨던 분이셨는데, 저의 발표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며 목회자모임을 주선할테니 똑같은 내용의 강의를 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하셨습니다. 아마도 나머지 분들은 두 분의 입장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상이한 반응을 대하면서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한 편으로 제가 이 문제에 대해 얼마나 연구를 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 주제에 대해 전공의 시절(1986)부터 지금까지 관심을 가지고 논문이나 책들을 보아왔습니다. 1987년부터 1991까지 연세의대 이만홍, 오병훈, 전우택 선생님들, 차준구선생님, 인제의대의 최영민 선생님, 이기연 선생님 등등과 함께 ‘기독정신의학 연구모임’을 하면서 각자의 지식과 경험을 나누는 시간들을 가져왔습니다. 미국정신의학회의 기독정신과의사들의 분과모임의 발표에 대해서 토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주제에 대해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쓴 책들도 많이는 읽지 못했지만, 적지 않게 읽어 왔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저는 신학을 하신 대부분의 사람들이 얘기하는 귀신들려 정신이상을 보이는 사례에 대한 보고를 신뢰하기 어렵다는 것을 점차 강하게 느껴 왔습니다. 그 결정적인 원인은 그 분들이 정신병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2개월 동안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을 경험한 적이 있는 전도사님이나 바로 앞에서 언급한 목사님처럼 정신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분의 얘기들을 통해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정신병원에서의 2주 정도의 실습을 하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 문제는 직접적인 경험이 없이 책상에 앉아서 토론하여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연역적인 접근으로는 그 본질에 전혀 접근할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정신과교실의 한 선배는 귀신론으로 유명한 목사께서 정신이상자에게 축사기도를 하는 현장에 직접 참여한 뒤 두 사람에 대해 추적조사를 한 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병원의 원장이신 신상철 선생님은 귀신을 내쫓아 병을 고친다는 영력이 있다는 분에게 정신병동에서 축사기도를 허락한 경험을 말씀해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분의 요청대로 약도 끊고 원하는 대로 와서 기도하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들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할 것이 못되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다만 정신의학계에서 이 문제에 대해 이론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인 실제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신학을 하신 어떤 분들은 저의 견해에 대해 정신과의사의 관점에서 얘기한다는 식으로 부분화시키시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측면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부분’이라는 것이 전체 정신이상 현상 중 귀신들림보다는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기독정신과의사가 이 주제를 다룬다니 ‘귀신들려 정신이상을 보이는 사례’를 발표하여 영적인 세계의 존재에 대해 증거하는 식이 아닐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읽으신 분이 많으실 줄 압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저의 글이 상당한 분노를 일으키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도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런 목적보다는 오히려 정신병을 귀신들림으로 잘못 판단하는 불행한 오류를 바로 잡기 위한 것이 아주 중요한 목적입니다.
정신과병동에서는 정신과의사와 간호사들을 비롯한 직원들에 의해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얼마나 망령되이 일컬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귀신들렸다고 하여 여기 저기에서 축사기도를 받는 가운데, 결국 심하게 악화된 후에야 어쩔 수 없이 정신병원에 보내지는 정신병 환자들을 보고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해 도대체 뭐라 할 것으로 생각합니까? 정말이지 ‘목사라 하는 사람들’ 운운하면서 기독교는 심심풀이 땅콩 정도도 안되는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기독정신과의사도 함께 분을 토해냅니다. 저는 아무말도 하지 못합니다. 낯이 후끈거립니다. 얼마나 마음이 쓰린지 모르겠습니다. 사실은 저도 진리의 세계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런 엄청난 오류가 행해진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으니까요. 그런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어떻게 구원의 종교로 전도될 수 있겠습니까? 환자나 보호자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일로 인하여 기독교는 아주 냉소적인 조소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신들림과 정신병’을 다룸에 있어, 기독교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저는 우선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잘못된 경우를 교정하는 식의 ‘부정적인 방법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해독이 너무 심각하고 직·간접적으로 너무 많은 사례들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귀신들림에 대해 긍정적으로 얘기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판단하여 기독교를 해하는 사람으로 피상적으로 판단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는 귀신들림 또는 사탄의 세력에 의한 정신이상의 사례를 경험하고 또 발표하여 영적 세계가 있음을 증명하여 ‘긍정적인 방법’으로 기독교가 진리임을 증거하게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나 정신이상 중에서 귀신들림에 의한 경우가 정신병에 의한 경우보다 더 많아야 영적인 세계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기독교의 진리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하면 될 것입니다. 사실보다 우리의 마음이 앞서서 오류를 범한 예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가운데 A씨의 사례를 실을 수 있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총적 간섭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귀신들린 사례를 만날 기회는 그리 많지 않겠지만, 만나게 되어 확실하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또 다른 지면을 통해 발표하도록 할 것입니다.
환자와 보호자들을 만나면서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해서 반복적으로 설명하게 되는 것들, 좀더 높은 회복율을 위해 그리고 재발을 방지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환자나 보호자들이 궁금하여 자주 물었던 질문들을 나름대로 모아 두었는데, 이제 그러한 것들을 종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직장에 근무하면서 책을 쓴다는 것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몹시 고된 일이었지만, 책이라는 것이 시간과 공간을 건너 뛰어 많은 사람들과 귀한 만남을 가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먼젓 번 책을 내고 나서 경험한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의 전공을 통해 나누어야 하는 두 번째 내용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정신분열증에 대한 것은 꼭 나누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귀신들림과 정신병’도 마찬가지고요. 그 첫번째 대상은 환자와 보호자들이지만, 그 못지 않게 중요한 대상은 교역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문제가 있으면 교역자를 먼저 찾아가는 비율이 높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그 분들이 바른 치료의 길로 잘 인도하면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계는 분업화와 전문화가 급속도로 진행돼가고 있습니다. 지식의 세계가 일천했던 과거와 달리 현대는 교역자가 모든 분야에 있어서 앞선 사람이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교역자의 역할이 재조정되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교역자는 말씀연구에 전문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전문영역들에 있어서는 각각의 전문가들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도록 적절한 역할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전문가들로부터 기본적으로 필요한 내용들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결국 각 영역의 전문가들이 말씀 안에서 잘 훈련되도록 이끌면서, 어떤 영역도 소홀함이 없는 가운데 잘 조화를 이루어 전체사역이 통합적이 되도록 ‘조정하고 통합하는’ 역할이 현대 교역자들의 중요한 자질로 요청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목사직을 맡은 사람만이 아니라 믿는 모두가 제사장이라는 ‘만인제사장설’의 진정한 의미를 바로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물론 만인제사장설은 천주교에서 ‘신부만 제사장이다’라는 식으로 구약시대와 같이 제사장직을 감당하는 그룹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에 들어서서는 믿는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라는 것을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바르게 깨달아 선언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개신교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목사만 제사장’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들어서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경향은 목사직을 맡은 사람에게만 ‘종’ 또는 ‘사자’ 라는 호칭을 쓰는 데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를 ‘선지학교’라 하는데 서도 선지자가 하나님께 점지되듯 점지되는 집단으로 성도들과 구분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경향은 한국에서 특히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데, 수직적 인간관계에 익숙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러한 경향이 쉽게 자리잡게 되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분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목사는 교회에서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약의 경우와 같이 일반성도들과 제사장, 선지자가 구분이 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아닙니다. 기능적으로만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러한 잘못된 경향 뒤에서 교회의 일은 목사나 장로의 일 인양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는지 자신들을 살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인제사장설은 지적인 구호로만 주장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실질적인 역할을 감당하여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제사장인 것입니다. 목사·장로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모두가 똑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실질적인 제사장의 책무를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제사장직을 본업으로 알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데 헌신하여야 성경의 만인제사장설을 올바로 구현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저는 제가 있는 영역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펴내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나눌 수 있는 것을 나누어 이 땅에 진정한 그리스도의 문화가 정착이 되도록 함께 노력하지요. 비록 시들어 버렸거나 지금도 시들어 가고 있다고는 하나, 유럽과 미국에서는 문화적인 꽃을 피웠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기독교는 문화적인 꽃은 전혀 피우지 못하고 그저 반짝하다가 시들어 버렸다고 기독교역사에 적혀질까봐 두렵습니다. 정말 두려운 마음입니다. 이제는 ‘예수 천당’의 구호적 수준을 넘어서서 기독교의 그 깊고 넓은 진리성이 이 땅에 문화적 꽃을 피우게 되기를 애절하게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온전한’ 영광을 받으실 것을 믿습니다.
본론과 동떨어져 본문에서는 할 수 없었던 나누고 싶은 얘기를 후기를 핑계로 좀 늘어 놓았습니다. 이 책이 단순히 책으로가 아니라 제한되지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 김진이라는 한 그리스도인과 인격적인 자그마한 만남을 가능하게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절주절 저의 마음을 내어 놓았음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걸리는 것 하나는 교역자들의 잘못된 사례들만을 소개하는 셈이 되었는데 이것이 저뿐만 아니라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목사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제 저는 마칩니다. 이 책을 열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내용이 전달되게 하시옵소서! 홀로 영광 받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