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레니즘 시대 ‘지혜의 배꼽’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책이 보물 대접을 받은 것은 기원전 4세기부터였다. 이때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그 증거다. 도서관은 “교양 교육을 통해 자유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졌다. 그럼에도 왕실의 관리와 감시는 엄격했다. 책에 담긴 통찰과 비판의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식과 지혜는 빛의 날개가 있어 가둘 수 없었다. 기원전 5세기는 그리스 학문과 문화가 활짝 꽃피었던 시기다. 운문에 있어서는 비극과 희극이, 산문에 있어서는 역사와 철학이 절정에 도달했다. 이를 고려할 때, 공적이든 사적이든, 어떤 형식으로든 책을 모아두었던 도서관이 있을 법한데,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해서는 어떠한 직접적인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일부 연구를 보면, 플라톤(기원전 427~347)이 개인 도서관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물론, 이도 추정이다. 이른바 ‘도서관’이라 부를 수 있는 시설이 등장한 것은 기원전 4세기부터다. 도서관 기능에 맞게 책들을 분류하고, 단지 책을 보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육을 위해서 도서관을 세운 이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니, 그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1)다. 개인 서재가 아닌, 자신이 건립한 학교 리케이온에 도서관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도서관이 겪어야 했던 운명은 그 주인만큼이나 기구했다. 이에 대한 지리학자 스트라본(기원전 60~서기 24)의 보고다.
‘도서관’ 처음 세운 아리스토텔레스
그들은 아탈로스왕이 페르가몬에 도서관을 세우기 위해 책들을 구하고 모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들은 땅을 파서 참호를 만들고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숨겼다. 한참 후 책들이 습기와 벌레들에 의해서 손상을 입자, (중략) 아펠리콘은 벌레들에 먹혀 손상된 부분을 복구하였고, 새로운 복사본을 만들었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게 보충되었고, 오류와 오식들로 가득 찬 것들이었다. (중략) 여기에는 로마도 한몫 거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아테네를 장악하고 있었던 술라는 아펠리콘이 죽자 곧바로 도서관을 전리품으로 가져왔고, 이곳(아마도 로마)으로 옮겨진 도서관을 아리스토텔레스 추종자였던 티라니온이 관리했기 때문이다. 이 도서관에서도 필경사들이 도서들을 교정하고 고쳤다. (중략) 필사본들을 전혀 대조하지도 원본을 비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로마뿐만이 아니라 알렉산드리아에서도 흔히 있는 일이었다. ( 13권 1장 54절) 인용은, 황금 따위의 보물이 아닌 책들이 매우 중요한 전리품으로 취급받았다고 전한다. 단적으로, 심지어 로마의 독재자인 술라(기원전 138~78)가 도서관을 주요 전리품으로 취하고 있다. 도서관을 아예 통째로 옮겨왔다는 보고가 흥미롭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핵심은 책이 큰 대접을 받게 되었다는 소리다. 책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보이는 왕과 독재자가 책을 수집하고 도서관을 세우기에 혈안이 될 정도다. 책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땅을 파고 책을 숨기는 일까지 벌어질 정도다. 미뤄보건대, 책이 보물 대접을 받고, 도서관이 주요 공공 기반 시설로 인정받았던 것은 기원전 4세기부터였음이 분명하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이때에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다. 로마의 산문 작가 겔리우스(기원 후 130~180)의 보고다.
누구였던가? 최초로 공공 교육을 위해 책들을 제공했던 자는?
교양 교육을 통해 자유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아테네인들에게 책들을 공공 차원에서 처음으로 제공한 이는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기원전 605~527)라 한다. 물론, 아테네인 자신들도 큰 열성을 가지고 도서관을 풍부하게 가꾸고 키웠다. (중략) 많은 책들이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의해 수집되었다. (중략)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전쟁 중에 이 나라가 약탈당하는 과정에서 군인들이 의도적으로 혹은 계획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보급을 담당하는 병사들에 의해서 이 책들은 모두 불태워졌다. (, 제7권 17장 1절) 인용은 서양 도서관의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목이다. 하지만 유념해야 할 점은, 기원전 600년부터 서기 400년까지 천 년의 세월이 몇 문장으로 압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도서관에 대한 많은 오해가 생겨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화재 사건이 그것이다. 기원전 47년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공격했을 때에 도서관이 불타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신빙성이 없는, 오해다. 도서관은 항구 근처에 위치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불탄 것들은 수출용으로 항구 근처 창고에 보관중이었던 파피루스였기 때문이다. 물론 카이사르도 도서관에 불을 지를 정도로 야만적이지 않았다. 이 도서관이 실제로 소실된 시기는 서기 270년 정도로 추정된다. 어쨌든,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건립에 착수한 이는 소테르(기원전 367~282)왕이었고, 완공한 이는 소테르의 후계자였던 필라델푸스(기원전 308~246)왕이었다. 도서관은 시인으로도 이름을 날린 칼리마코스 시절(기원전 3세기)에 이미 40만 두루마리를 소장했고, 후대 보고를 보면 70만 두루마리를 소장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서관은 단순하게 고대 문헌들을 보관만 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은, 엄밀한 비판-검증을 거쳐 문헌을 교정하고, 그것의 비판 정본을 만들었으며, 이를 다시 주해하고 번역하는 업무도 수행했으며, 도서 목록을 작성하는 일까지 포괄하는 일종의 연구소였다. 뿐만 아니라 이런 검증 과정을 통해 탄생한 책들을 출판하는 일도 관장했던 곳이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이 도서관이 헬레니즘 시대 지식의 산실이자 지혜의 배꼽(omphalos)이었던 셈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곳은 본래 신전이었다. 다시 스트라본의 보고다. 궁정 안에 무사이온(무사 여신들을 섬기는 사원)이 있는데, 이곳은 회랑과 열람실용 엑스에드라(돌로 된 좌석)와 큰 집을 포함하고 있다. 이 집은 무사이온에 속하는 학자들이 공동 식사를 하는 곳이었다. ( 제17권 1장 8절) 인용은, 책이 원래 보물이고 귀한 물건이었다는 점을 입증해준다. 그래서일까? 도서관은 도서관 관계자와 학자들, 무사이온 학생들과 왕실 관계자에게만 허용되었고, 일반 대중에게는 이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공공 도서관의 최초 기획자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책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조치다. 원래 도서관은, 적어도 겔리우스에 따르면, “교양 교육을 통해 자유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서 세워진 공동의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사정이 이러함에도, 공공의 보물인 책에 대한 왕실의 관리와 감시는 엄격했다. 아테네의 아고라 근처의 로마 제정 시대 도서관 유적지에서 나온 대리석 비문이 그 증거다. 어떤 책도 가지고 나갈 수 없다. 도서관 개관 시간은 첫번째 호라(오전 7시)에서 여섯번째 호라(정오 12시)까지다. (도란디의 논문 중)
대중은 이용할 수 없었던 도서관
도대체, 왜 왕들은 책의 유출을 막으려 했을까? 물론, 보물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꼭 그 때문이었을까? 도서관의 이용까지도 엄격하게 통제했기에. 그러나 왕들의 이런 조치는 실은 무사 여신들에게 히브리스(불경죄)를 범하는 짓이었다. 원래 자유 시민의 교양을 돌보는 신들이 무사 여신들이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왕들은 책의 유출은 물론 일반 시민의 도서관 이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필시 그 까닭이 있을 터. 무엇이었을까? 단적으로, 책에 담긴 통찰과 그 비판의 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책은 도서관에 있어야 옳다. 공동의 보물이니까. 이런 의미에서, 책에 대한 왕들, 나아가 권력자들의 통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또한 그 덕분에 그 통제도 나름 성공했다 하겠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왕들이 두려워했던 책에 담긴 혹은 책에서 얻은 통찰과 비판의 힘이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정작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책을 도서관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리했다. 그 대신에 그들은 책에 담긴 지혜를 가지고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책이 있는 곳은 도서관이지만, 책이 사는 곳은 세상이라는 소리다. 책들의 무덤이기도 한 도서관에서 바로 그 책들이 살아있는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결론적으로 책은 물리적으로 가둘 수는 있지만, 지식과 지혜는 빛의 날개가 있어 도서관에 가둘 수 없는 무엇인 셈이다.
책이 원래 그런 물건이기에.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