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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공부 1회
로마서 공부의 辯(1)
나의 40년간의 교회 생활에서 샤마니즘적인 신앙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자신만 바라보면서 능력 있는 신앙생활을 못해서 좌절했었고, 복리주의만 추구하는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 세워 주시기 위해 로마서 공부를 하게 하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이 얕은 내용의 공부를 발표하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외국어 실력이 부족하여 우리말로 번역된 책(F.B.마이어, 루터, 칼빈, 매튜 헨리, 풀핏, 죤 머리, 로이드 죤스, 內村, 黑崎)과 쓰카모토, 야나이하라, 노평구, 박윤선등 주해로 공부합니다.
수긍이 가는 부분들을 가위질해 가며 제 마음대로 인용하였습니다. 헤아려 가며 봐 주십시오.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이 공부는 아내의 도움을 많이 받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초안을 다듬고 정리하여 컴퓨터로 말끔하게 완성품을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어 공부도 열심히 하여 쓰카모토, 야나이하라 선생님의 책을 번역해 주고 영어 성경도 번역해주어 많은 참고를 합니다. 이렇게 밝히면 더욱 잘 도와 줄 것입니다. 1995년 11월 이진구 선생님으로부터 한달에 한번 사회를 보라고 하여 그동안 혼자 공부했던 로마서를 다시 공부하여 발표하기 시작함 )
1. 복음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이 칭호를 자랑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역서 종이란 ‘노예’, 노복’이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또한 베드로 전서 1장 19절에.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라고 한 말씀은 우리가 사탄 마귀의 지배아래 노예로 있던 처지에서 해방되었음을 뜻합니다. 사도는 이 자유의 기쁨을 알기 때문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너무나 아이러니칼한 고백입니다. 노예로 있다가 해방된 사람이 또 다시 기꺼이 노예가 된 기쁨을 말하다니요? 이것은 강제가 아니고 사랑과 은혜의 관계에서 십자가의 속죄를 통해 해방된 기쁨을 표현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이요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 순종을 뜻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 편지의 맨 앞에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웁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이며, 또한 주인(Master)입니다. 우리는 그의 노예들(Slaves)입니다. 우리가 만일 이점을 잊지 않고 항상 이 영광스러운 진리의 빛에 비추어 살고 있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베풀어 합당하게 살도록 하실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신앙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2)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얼마나 축복의 말씀이며 가슴 벅차는 말입니까? ‘부르심을 받은’이란 하나님이 소명을 직접 주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불렀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의 극심한 우상숭배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불러서 가나안 땅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창12:1-)
또한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내 광야에서 민족 구출의 대역사를 이룩하였음을 출애굽기 3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7:14-15, 3:8), 예레미야(2:4-20:9), 이사야(6장), 에스겔(1,2장) 이들의 소명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이들 예언자들의 생생한 부르심은 이미 이스라엘 종교가 세습적 내지는 직업적으로 흘러 타락으로 달릴 때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르심으로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직업종교가의 전형인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에게 대립하고 있었으며(암7:10-),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와 적대관계에 있었습니다(28장)
따라서 예언자의 소명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진리의 계시와 전달을 위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신앙의 부패와 형식으로의 치우침, 인간주의로의 변질을 경계해야 할 사명도 띠고 이었습니다. 즉 끊임없는 종교 개혁적인 활동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제도화된 직업 기독교를 원치 않으십니다. 오래 된 나무껍질처럼 경직되어 근엄하고 거룩하기만한 종교주의는 개혁되어야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었으므로 개혁적인 활동이 필요할 때 마다 위에 든 개혁자들을 하나님은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된 인류구원의 복음전도를 위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언자들의 소명은 그들의 희망을 완전히 무시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소명 사건은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을 심하게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예수 믿는 자를 잡으러 가던 길이 아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불렀습니다. 복음의 극심한 박해자가 오히려 복음의 사도로, 완전한 기적의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 후 어거스틴, 루터, 웨슬리, 우치무라 등 위대한 전도자들의 생애가 바울의 부르심과 흡사한 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심오한 섭리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유능한 마부일수록 사나운 말을 즐긴다.’고 하듯이 인간 바울이나 어거스틴이 아무리 날뛰어도 하나님은 역시 저들보다 한 수 위에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확실하였습니다. 저들을 하나님이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진리의 반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파멸에서 구원하여 선의 사자, 하나님의 사역자로 궤도를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 자신이 직접!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섭리는 정말 오묘하고 신기합니다.
바울의 소명은 사도의 직책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보냄을 받은 자, 어떤 사명을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신’입니다. 다시 풀이하면 사도는 한 특별한 사명을 위하여 선택받아 파송된 자로서 자기를 보내는 자를 대표할 충분한 권위를 입은 자입니다.
누가복음 6장 13절에서 보면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였으니.”예수님에게는 대단히 많은 제자들이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무리들 가운데 일부러 열 두 명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사도’라는 이름을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아주 특별한 이름이고 명예로우며, 고유한 직무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 보면 자살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사도들이 다락방에 모여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도를 뽑는데 아주 까다로운 조건을 붙였습니다. 이러하므로(가룟 유다가 제 길로 갔으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21절)
사도가 되려면,
1) 부활을 목격했을 것.
2) 항상 우리(기존의 사도들)와 같이 다녔던 사람일 것.
이런 형식적인 조건 외에도.
3) 가르치고,
4) 교리를 정립하고,
5) 진리 안에서 사람들을 견고하게 세울 수 있는 사람일 것.
고린도전서 9장 1절에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또한 고린도후서 12장 12절에
“사도의 표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바울은 비록 예수님 살아 계실 당시에는 그를 따르지 못하여 12사도는 아니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으며, 진리 안에서 사람들을 세우는 일에 직접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가르치고, 교리를 세우고, 진리 안에서 사람들을 튼튼하게 하기위해 받은 권위입니다. 그들은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권위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감독들을 세웠고, 장로들을 지명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가르침과 교리에 관하여 결정할 수 있는 권리까지도 있었습니다.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바울 자신의 말이 곧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도 베드로후서 3장 15-16절에서 사도 바울의 글에 권위를 부여 하였습니다. “다른 성경과 같이!!”라고 말하는데 다른 성경이란 바로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즉 바울의 편지는 구역성경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은 하나님께 권위를 받아 그 말씀들을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사도의 직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 도
사도는 선택된 종입니다.
사도는 주님의 대리인입니다.
사도는 하나님과 동행했던 모세이며, 엘리야입니다.
바울을 그 사도로 부르신 것은 정말 기이한 일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가장 성공적인 선택이며 멋진 작품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다니던 사람이 아닌 바울을 열두 사도와 같은(결과적으로 더욱 많은)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기적의 자리에도 없었고 십자가의 고통도 보지 못했으며, 예수님의 부활 현장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승천하신 후 다락방의 오순절 성령 강림때도 물론 있지 않았습니다. 그때 그는 외인이었습니다. 오히려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모독하고 신자들을 핍박하여 기독교를 없애려고 했던 사람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체험을 다했던 사도들과 똑같은 권위의 사도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8절에서
“주께서 친히 나를 부르셨다. 나를 선택하시고 다른 자들에게 권위를 주셨던 것과 똑같이 나에게도 권위를 주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바울에게는 특별하게 소명을 주셨습니다.
바울에게 왜 특별한 소명을 주셨을까요?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기 때문입니다.(롬1:15) 이방인 모두가 예수님을 따른 적이 없고, 바울처럼 오히려 예수님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체험을 가진 바울이 꼭 적절하게 알맞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둘째 이유는, 갈라디아서 2장 11절 아래에 나와 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와 유대주의적인 모든 교회들의 죽은 제도화, 형식화에 대하여 생생한 복음 수호를 위해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바울은 아주 당당합니다. 그 자신이 이 특별한 소명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교회의 율법적인 감시에서 벗어나지 못한 베드로(대사도 아닙니까?)를 꾸짖은 행동을 보십시오. 바울 자신은 자기가 대사도들에 비해 부족함이 없다고 공언합니다.(고후 11:5)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다”(고후 11: 23) 나무는 그 열매로 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봅시다. 12사도와 바울의 초대 기독교 전파에 있어서, 바울이 대사도라고 하는데 그 누구도 이의가 없을 것입니다.
한 편 하나님은 교회가 율법 신앙으로 흘러가려할 때 마다 개혁자가 나타나도록 준비하셨습니다. 그 개혁자들에 의해서 바울이 전한 이 복음주의 신앙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루터를 생각해 봅시다. 로마 카톨릭이 완전한 형식, 제도주의로 흐르고 있을 때 그 잘못을 용기 있게 지적하고 종교재판의 위협을 감수함으로써 신교는 탄생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주의를 깨우칠 이 시대의 사도는 누구입니까?
우리의 어떤 교역자들은 어떻습니까? 물론 많은 수의 주의 종들이 우리 가까이 있음을 감사하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서 주의 종이 된 것입니까? 직업으로서의 목회인입니까?
목회자, 주님의 종으로서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따르고 있는 양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어야 할텐데....
월급이 적다고 불평, 성도들이 하나님처럼 대접하지 않는다고 불평, 성도들에게 위화감을 조성하는 사치스러운 생활, 성도들의 극진한 대우만을 바라며 편안하게만 살려는 생활 등등 반성해야 합니다.
진리 아닌 것이 오늘날의 교회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정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열정이나 바램으로 주의종을 자처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삯군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양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 것인지 모르고 있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명 없이 제멋대로 가르치고, 이끌어 갑니다. 심지어는 교회를 대물림하는 어리섞음에 빠지는 부류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팔아먹는 현대의 아마샤, 하나냐입니다.
3)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은 바울
바울이 일생동안 그 무서운 사면초가 상태에서 끊임없는 박해와 한없는 고난을 헤치고 복음전도에 전념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직접 부르셨고 또한 성령님이 동행하심을 확신한 까닭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바울은 율법을 가르치던 교사였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전문 연구가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오히려 죄를 더욱 깨닫게 되고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복음은 무엇입니까?’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17)”
복음은 우리가 들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좋은 소식입니다. 만일 내게 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더 이상 가장 큰 기쁨이 못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잘못된 것일 것입니다.
사도는 분명히 복음의 위대함과 영광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 복음의 위대함에 대해 잘 이해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로마의 기독인들이 믿음 안에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들이 정말 그 복음을 제대로 포착했는지 의문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모두 들먹이면서까지 ‘복음의 모든 것’(충만함과 장엄함 등)을 밝혀주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에게 우리들의 죄를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기꺼이 이 참담한 일을 받아들이셨지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낳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낳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심”입니다
우리에게‘아들(딸)’의 이름을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왜?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벧전 3:18)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마지막 목적은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어 오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태어난 목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많은 주장을 해왔지만 결국 ‘하나님(우리의 조물주)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중심이요. 우리 행실의 중심입니다. 사도 바울의 글은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아주 오래 전, 태초부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로마서 공부 2회
2. 복음은 성경에 미리 약속된 것
이 복음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다.(롬1:2)
1) 복음과 구약 성경
1절에서 복음의 사도로서 자기를 소개한 바울은 이제 2절에서 이 복음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즉 복음은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들을 통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이라고 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주님에 관해 예언한 (그가 어떠한 분이시고, 어디서 나오셨으며, 무엇을 행하실 것인지, 또한 어떻게 죽고, 어떻게 부활하실 것인가 등) 모든 것이 옛 선지자의 글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말씀의 내적 통일은 인류의 구속자 메시야의 약속으로 일관하는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유대교인들은 오늘날까지 메시야의 약속은 시인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이 약속의 성취로 보지 않고 아직도 앞날에 메시야가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는데 반해 바울사도는 같은 구약성경 말씀으로 예수의 메시야성을 분명히 믿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구약 전체를 깨닫게 되었으며 이를 증거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 3절 아래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자기를 율법의 완성자로서 선포하였습니다. 그 누가 감히 이런 말씀을 인류사에서 할 수 있었습니까? 구약의 영적 완성자로서 자기를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경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됨을 증거한 바울! 그의 위대함을 생각합니다.
이 복음은 그의 머리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하늘에서 똑 떨어진 신기한 것도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성경에 약속되었던 영원한 진리입니다.
2)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복음도, 좋은 소식도 없습니다. 좋은 소식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가 오셔서 행하신 일과 그 성취하신 일 속에 있습니다. 성경에 모든 선지자나 사도들은 한결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면 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요?
히브리서 1장 1절 아래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라고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또한 세례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 계실 때에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하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를 제자들이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직접 자신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증거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존하시는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 첫머리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합니다. 제자 요한도,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됨을 말합니다. 그 밖의 성경 모두에 수없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밝히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니 우리들(바로 나 자신)의 구속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빌 2 : 6-8)
이점에 대해 찰스 웨슬레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가장 높은 하늘도 경배하던
그리스도 영존하시는 주께서
때가 되매
동정녀의 태의 소생으로 나셨으니
육체 안에 신성이 감취어있네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찬미하리
사람과 함께 거하시기를 기뻐하신 예수
우리의 임마누엘이시여!
주여! 찰스 웨슬레의 고백이 나의 것이 되게 하소서.
로마서 공부 3회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하나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롬 1: 3-6)
1)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 나셨고
2절에서 바울은 복음이 구약에서 약속했던 하나님의 언약 실현임을 말했습니다. 이제 3,4절에서 구체적으로 이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합니다.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라는 말씀은 그 분의 거취가, 즉 취한 모양이 달라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본래 영이신 하나님이셨는데 육신을 입어 사람이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실 때 능력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이 아니라 힘없는 어린 아기로 오셨습니다. 비록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미약하였습니다. 그도 다른 모든 아기들처럼 젖을 먹어야 했고, 보살핌을 받아야 했었습니다. 이 세상의 다른 아기들이 거쳐야 하는 성장과정을 모두 거쳤습니다.
인간 예수로 세상에 계실 때에는 많은 것이 감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낮아져서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므로 그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자신이 가진 영광의 마패를 감춘 것입니다. 왕의 명을 받은 암행어사 같이 말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느냐?”
사람의 연약함을 입은 것이 문제꺼리였습니다. 그 연약함은 바로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한없는 사랑의 표현이었는데......
영적인 존재로서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그 일은 부활사건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양성(兩性)이 한 인격을 이루다니!
주 예수 안에는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었습니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었으며, 완전한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오묘한 진리여서 노력으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비 중의 신비인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일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 6 - 11)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 즉 죽기까지의 순종이 인류구원을 이룩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비해 너무나 형편없는 인류는 오히려 교만하여 하나님께 반역하고 사망의 세상을 만들었는데, 그는 말할 수 없는 겸손으로 이 모든 것을 뒤엎고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기독교는 이 그리스도의 죽음 위에 서 있습니다.
2) 부활신앙
예수님 자신이 생시에 제자들에게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게 될 것과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을 수없이 많이 예고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17장 23절, 20장 18-19절) 그러나 제자들은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2절)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였을지라도 상황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교훈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그 자신의 깊은 체험에서 우러난 신앙고백입니다, 어떤 전개에 의한 결론이나 증명이 아닌 생생한 체험적 신앙 자서전으로 이 4절(예수의 부활)을 읽는다면 바울의 마음이 전해져 올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 하시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그런 생활을 한다면 하루하루가 얼마나 기쁠까요?
신앙이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과 인격적인 신뢰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힘이 있다.’는 것은 생명의 주와 항상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신앙이 우리의 뼛속 깊이까지 느껴져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버지’라 부를 수 있으며, 하나님도 좋아하실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지은이들은 이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위해 몸과 마음 모두 바쳤습니다.
그들에 의해 씌어진 복음서, 편지, 계시록에서 정말 살아있는 신앙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부활의 밝은 아침이 있기 전에 십자가의 고난이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기독교에 진정한 부활 신앙이 없기에 현실에 아첨하고 추종, 굴복하게 되어 기독교의 본질을 망각하는 곳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고난과 시련이 닥쳐옴은 진정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게 되기 위한 신호인 줄 알고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장 3-4절)”
부활의 신앙이 나의 머리로만 이해되고, 고증으로만, 어떤 사건으로만 생각될 때 나는 바로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버린 베드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계속 누리지 못할 때, 다시 갈릴리 옛 고향으로 돌아가 고기나 잡으리라던 실망한 제자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항상 이 신앙 안에 살게 하소서.
주와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3) 그 이름을 위하여
사도 바울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의 순종을 가지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역의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함은 그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라고.
사도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고 그의 이름이 사람들 가운데서 높여지고 모든 사람들이 주의 영광을 찬미하며 살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은 그를 영화롭게 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는 우리의 임무이며, 동시에 소명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탁월하심과 덕과 위대하심을 선전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말과 생각만이 아닌 우리의 생활 전체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를 거부하고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한복음 16장 8 - 9절)’
하고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믿는 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 찬미하고 그에게 순종하며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에게서 문제를 해결 받은 많은 사람들은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한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예수를 소개하는 한편, 찬미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 예수님의 영광 받으심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더우기 이제는 구름을 타고 거룩한 천사들에 둘러싸인 위엄 있는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원수들을 쳐서 복종시키시고 죄와 악을 추방하며, 그의 나라를 세우고 영원히 왕 노릇 하실 분이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 우리의 인생, 우리와 관계된 모든 일들이 주께 영광 드리는 것이 되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속에 주님이 사셔서
나의 모든 것을 다스려 주시고
주님을 믿는 믿음이 나날이 자라나는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영광
그것이 내 인생의 목표입니다.
바울처럼 예수님께 취한 사람 되게 하소서.
바울은 그의 이름을 위해서 살았고, 일했고, 모든 희망을 거기에 두었습니다.
나는 어떠합니까?
우리도 바로 그 일을 위해 태어나지 않았습니까? 그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면서도 큰 특권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목숨을 우리와 맞바꾸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으로 시작하여 주님을 통해 이루어짐을 체험하는 감사의 생활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은 오직 그의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그 이름을 위해서!’
4) 그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직을 받음
바울이 사도직을 예수님에게 받았다고 할 때 당시 벌써 예수님에게 받지 않는 사도직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우리 기독교의 형편을 살펴보면 그때와 같음을 느낍니다. 오늘날의 사도직, 즉 ‘교역자직’은 어디서 받습니까? 신학대학의 졸업장, 총회의 임명장, 감독의 안수에 앞서 예수님으로 부터의 부르심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없는 직업으로서의 교역자직은 하나님의 나라를 도둑질한 것이 되고,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 됩니다. 그 영혼들은 모두 순진해서 하나님께 진심으로 충성을 다하려 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합니다.
“이것저것을 하다가 실패하니 하나님이 주의 종이 되라고 하는 것 같다.”
하여 교역자가 되고 그것을 오히려 간증꺼리로 자랑하는 사람들을 가끔 만납니다. 그분들이 모두 하나님의 부르심을 먼저 체험했다면 얼마나 다행스럽겠습니까? 사도직을 받는 목적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입니다. 이것이 전도의 목표입니다. 사실 기독교의 전도는 인류, 국가, 사회, 민족의 정의 실현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 건축도 아니고 교세 확장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면 인류와 국가가 발전하고 참교회가 이루어지고 사회가 개선되고 정의와 평화가 꽃피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5)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음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순종하라고 깨우쳐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 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에 있는 너희도 그 안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는 하나님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에베소서 2장 1절 아래)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한복음 6장 44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입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게 되었다는 말도 됩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어 지체가 된 것입니다. 우리 사이에는 신비스러운 관계가 맺어진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소유로서 그에게 직결(直結), 직속(直屬)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주고 사신 보물 중의 보물입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입니까?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아주 대단한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절망하고 자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다른 사람과 비교되는 자아에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좌절의 고통을 견디기 어려워 주저앉은 경우입니다.
거기에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종,slave)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룩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몸이 아닙니까? (고린도전서 4장 6-7절, 6장 19-20절)
로마서 공부 4회
4. 은혜와 평강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첫째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을 인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롬 1:7-8)
1)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입은 자(하나님의 애인)
1장 18절 아래에 보면 로마는 가공스러운 죄악과 무서운 방탕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신앙인, 그리고 그 집에서 모여 진리와 사랑의 교제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작은 무리들은 대이교 사회(大異敎 社會)에 우뚝 솟아 있었습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런 자리에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까요? 하나님의 사랑! 그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것은 역시 ‘하나님의 사랑’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우리가 한 어떤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의 우리’된 것은 하나님이 먼저 손을 내밀어 사랑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서운 곤경에서, 죄 때문에 빠졌던 비참 가운데서 건져 올려진 것은 다 하나님의 사랑이 잡아 당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기 때문입니다.(롬 5:8)
그들 주위에는 고발을 하려는 수많은 눈들이 있었고, 사자 우리에 서슴없이 던져 넣는 권력자가 있었습니다. 완전한 반기독교의 본부 로마에서 외롭게 서있는 사람들이었는데 특히 그들은 하층사회의 미약한 사람들이었다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그 미약하나 강한 사람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애인, 부름 받은 성도로 깨달았기 때문에 용기백배하고 희망을 가졌으며 오히려 기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의 정절을 굳게 지켜 앞날의 고난도 기꺼이 맞을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2) 부름 받은 성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성도로서 그의 거룩한 품에 안아 주십니다.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완전무결한 인격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그릇이되 성전에서 사용하므로 거룩한 기구가 된다.’고 한 루터의 설명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완전히 그의 소유물이 되었다는 점에서 성도라고 불립니다.
그는 무가치한 인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또는 악에 물들 수도 있고, 무식할 수도 있고, 유치한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도’입니다. 왜냐하면 어둠의 나라에서 예수의 나라로 그 적(籍)을 옮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시고는 우리 속에서 일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 답을 찾아봅시다.
1.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2-13)”
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 2:11-12)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
하나님은 어떻게 일하실까요? 성령을 보내서 일하려 하십니다.
일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구원을 이루어 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내가 나 자신을 성도로 만들 수 없었는데 이미 성도가 되었고, 구별되어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된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그네이며, 행인이고 순례자임을 아는 이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성도로 살아가는 것 외의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우리의 무엇을 좋게 보고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까?
모릅니다.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직 죄인이고, 하나님을 몰랐고, 또한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도 성도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애인’이 되었고 부르심을 받은 ‘성도’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특혜를 받았으니 마땅히 이 일을 알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한편 이것이 우리가 세상과 가까이 살아보려는 헛수고를 그만 두어야 할 이유가 됩니다.
나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애인으로 삼아주시고,
성도라 불러주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답게
성도답게
살게 하소서.
3)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
은혜란 무엇입니까? 받을 이유가 없는데도 주어지는 상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큰 은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준 것입니다. 기독교의 죄는 행위에 의한 나쁜 짓보다 마음속에 깃든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 알고 있습니다. 탐욕은 도적질로, 음욕은 간음으로, 미움은 살인으로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누가 결백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온갖 죄를 눈처럼 희게 해 주는 것, 이것이 은혜의 극치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늘 좌절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가르침대로 바르게 살려고 해도 잘 되지 않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바울의 유명한 탄식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나의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늘 보게 되는구나!”
이 갈등을 깨끗이 씻어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성도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복을 다 누리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평강을 누리도록 합니다.
평강은 무엇입니까?
다툼, 불안, 불행의 반대 의미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평강 누리기를 소원하였습니다. 로마서 5장 4절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하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개선될 때 참 평강이 찾아옵니다.
어거스틴은 “우리 마음이 주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 쉼이 없다.” 라고 고백했으며, 참 평강을 알고 있는 바울 사도도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떠한 형편에서도 자족하기를 배웠다.”
바울사도는 로마의 기독인과 우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이 은혜와 평강을 누리라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은혜와 평강을 주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 아버지가 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 그래서 너희 아비의 일을 행한다.” 하신 말씀이 그 증거입니다.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거룩 거룩하시고 높은 곳에 멀리 떨어져 계시는 하나님’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바로 이곳, 우리 곁에 아버지로 계십니다. 이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였기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 은혜와 평강을 주셨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옵니다.
주의 피로 이룬 샘물
참 깊고 넓도다.
구원하신 크신 능력
다 찬송할지라
찬송하세 주의 보혈
그 샘에 지금 나가
죄에 깊이 빠진 이 몸
그 피로 씻어 맑히네
4) 하나님께 감사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당시 어떤 곳이었습니까?
로마는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제국의 수도였고, 온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온갖 사상과 종교들이 다 유행하였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타락한 도시였습니다.(18절 아래) 오늘날의 도시도 크면 클수록 죄와 악이 많이 행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 ‘참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경이로운 일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변방에 살던 사람들은 로마의 시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의 집에 모여 진리를 배우고 사랑의 교제를 나눈다는 것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다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얼마나 놀랍고 반가운 것이었을까요? 또한 복음의 빛이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비취었다는 증거이기도 했습니다.
복음이 로마에 터를 잡았고 세계 각지로 펴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바울 사도는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그 작은 모임에서 세계에 널리 전파될 기독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계 전도의 꿈을 안고 있는 바울 사도는 수도 로마의 중요성을 생각하여 항상 로마에 가기를 원하였습니다. 이제 그 꿈의 시작을 보게 된 사도 바울의 뛰는 가슴과 넘치는 감사를 우리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주여, 저희들도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을 알고 체험하게 하소서. 부족한 저희들을 인하여서도 영광을 받게 되기를 빕니다.
5)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내 하나님’
바울 사도에게는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그리도 큰 특권을 주었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전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을 수 없고,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 아니면 아버지께 올 자가 없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독선적인 주장같이도 보입니다. 기독교를 배척하는 사람들이 가장 잘 인용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한 대제사장입니다. 그 대제사장 없이는 감히 은혜와 긍휼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피만이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로 말미암아 나아가는 자들은 지성소에 담대하게 들어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 어느 형편에 있든지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오,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와 긍휼에 감사합니다.
로마서 공부 5회
5.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떠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롬 1:9-10 )
1)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바울 사도처럼 바쁜 사람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교회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며 열심히 말씀 전파를 하는 한편, 형제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천막공으로 생활하는 독립 전도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활태도는 바울 사도의 사역활동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을 극진히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이 9절에서는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바울 사도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이 그것입니다.
요한복음 4:21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씀하시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에 대하여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그 분에게 예배드리냐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예배를 원하신다.” 하였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4장 2절에서 보면 “부끄러워서 드러내지 못할 일들을 우리는 배격하였습니다. 우리는 간교하게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밝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의 양심에다가 우리 스스로를 떳떳하게 내세웁니다.”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항상 하나님 앞에 있으므로 모든 것이 그분에게 드러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였습니다. 시치미를 떼는 것이나 부정직한 것이나 교활한 것이 전혀 없이 하나님을 진지하게 심령으로 섬겼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서도 심령이 하나님과 연결된 선지자의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 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 심령이 불붙는 것 같아서 증거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까지 들어 와 있는 하나님 때문에 회개가 일어나고 저절로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바울 사도가 생각한 예배란 순 영적인 심령문제, 마음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노평구 선생이 로마서 강연에서 지적하였듯이 수 천 년 간 인류는 의식과 형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민족의 구약 종교도 모세 5경에서처럼 철저한 율법적인 의식종교로서 동물에 의한 희생, 까다로운 예배 형식을 가졌기 때문에 온 인류가 여기에 동화 되어 구태의연한 모습을 버릴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울의 영적, 심령적 예배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교황의 금빛무늬 순백색 모자와 법복, 그 수많은 제전, 아름다운 마리아상, 목사들의 가운, 웅장한 예배당 등 보이는 것은 차치하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가 예배 끝 시간을 마무리하는 염불이 되어 버린 것을 생각하면 참 안타깝습니다. 이와 같이 잘 짜여진 의식을 중히 여기는 행동은 신약의 사람이 구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모든 형식적인 규례를 부정하셨으며(막2:23-38),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마6:5-13)
육적인 우리를 영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인데 우리는 자꾸만 예전의 상태로 돌아가려는 타성에 젖어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헛되이 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형식적인 거짓 예배에 종지부를 찍고 참된 예배를 드리도록 가르쳐주신 것인데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 4절 아래에 있는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말씀은 영적인 섬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그 반대인 육적 섬김은 언제나 자기를 나타내며, 자랑하며, 교만합니다.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으며 그리스도 예수가 죄인의 주 되신 것을 마음 깊이 깨달아 겸손히 기도하며 주님을 스스로 증거하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일합니다. 교회에 출석하고 십일조를 하고 각종 헌금은 복받으려고 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거나 주일 성수를 못하고 기타 등등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을까봐 무서워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문제점은 바로 이 형식이 너무나 완벽하고 견고해서 진리가 설 자리는 없다는 점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지도자되는 목사들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섬기러 이 세상에 오셨고, 잃어버린 양을 찾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셨는데, 그들은 주님이 걸으신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또한 자기만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따르기를 강요하고 있으니 참으로 무섭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함부로 여기는 무리들입니다.
바울 사도가 지금 우리나라에 와서 교회를 본다면 어떻게 말할까요? 진리보다는 다른 부분을 성화(聖化)하고 있는 이 땅의 교회들을 향하여 과연 무엇이라고 할까요?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소원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의 철저한 다스림 속에서 순수하고 깨끗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찌무라 선생은 일요일에 드려지는 집회에 대하여 ‘이는 예배가 아니며 단순한 복음진리의 연구일 뿐이다. 참 예배는 일상생활 그 자체이며 주일 집회는 그 일상생활에 영적 힘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요, 바울신앙을 올바르게 이해한 결과입니다.
2)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자신의 행동반경을 바울 사도는‘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이라고 한정시켰습니다. 그는 학식이 많았습니다.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교육을 받았으며 율법으로도 전문가였고 어려서부터 로마시민으로 성장한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똥으로 여겼습니다. 참으로 복음을 바로 이해하고 깨달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복음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런 외형이 쓸모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예수님 안에서 다스려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롭고 거룩하게 해주시며 구속해 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고전1:30)
3) 하나님 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던 다소 사람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겸비한 사도 바울로 변화된 그 놀라운 은혜의 기적을 생각해 봅니다. 그는 이 10절에서 로마에 갈 수 있기를 특별하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에 조용히 순종하려고 합니다.
여러 번 어떻게 하든지 그들에게 가고 싶어 한 바울 사도의 소원은 정말 강하고 깊었습니다. 로마서 15장 23절에 보면 그는 여러 해 전 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을 만나지 못했고 거기에 가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허락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으로 훌륭한 계획을 세워 놓기는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과 부합된다는 결정적인 확신이 들기까지 하나님 앞서 행하지 않는 바울의 위대한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고 기막힌 계획이라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허락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면 어떤 것이라도 잘 됐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소원이 얼마나 강하든지 간에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확증이 들기 전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철저히 하나님에게 복종시켰음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지금까지 길이 막혔었다’, 즉 하나님이 막으셨다는 뜻으로 이야기했습니다. 15장 22-23절에도 보면 ‘너희에게 가려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하고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의도대로 일을 하기로 순종한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붙잡아 놓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직도 바울 사도가 할 일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늘 제어하십니다. 때로는 질병이 그 제어장치의 구실을 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바울 사도도 거의 죽을 정도로 심한 고생을 해서 살 소망까지 끊어졌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질병이나 시련들을 통해서 우리를 제어하고 우리가 짠 계획과 의도를 지체시켜 우리를 더욱 강건하게 키우심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8절에도 바울이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다고 했고, 욥기서에서도 사단이 질병을 일으키며, 다른 많은 방식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방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6-7절에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치 아니하시는지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의미를 던져줍니다. 바울 사도조차도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그 일은 분명히 선한 일이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사도는 자기의 영속에서 성령이 지도하고 안내하는 일에 대해 매우 민감했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계획할 때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거나 책에서 조언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계획이 아무리 옳고 빈틈없다고 생각되어도 최후의 결정은 하나님이 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린 바울의 위대함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또한 사도는 좌절하지 않고 기도를 계속합니다. 방해를 받았다고 포기하지 않습니다. 또한 불만을 갖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바램을 늘 하나님께 말씀드립니다. 바울 사도의 이런 점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을 그 누구보다 깊이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되며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활동하게 된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리들에게도 어떤 장애물이 놓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인도하시는 손길이 내 앞에 있음을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드디어 사도 바울은 그렇게 그리던 로마에 가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계획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죄수가 되어 사슬에 묶인 채 로마에 당도합니다. 사도행전 16장부터 28장까지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계획하더라도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입니다. 가장 바르게 사는 비결은 우리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시키는 것 입니다. 주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로마서 공부 6회
6. 신령한 은사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롬 1:11)
11절을 읽으면 한없는 사랑으로 자녀를 돌보는 어머니 마음이 떠오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도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어 견고케 하리라는 사명감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흔들릴만한 일이 당시 여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한다(빌4:2)’고 당부한 빌립보교회의 내부 분열 문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1-4)’하며 꾸짖은 갈라디아 교회의 율법주의 문제. 그 밖에도 고린도교회, 골로새교회, 데살로니가교회들에게 쓴 내용을 보면 여러 가지 문제들이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기를 돌보는 부모의 심정이 되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고 그들과 함께 지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그들의 신앙을 튼튼하게 하여 다른 교회에 찾아 온 시험에도 끄덕 없기를 바랬습니다. 왜냐하면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파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사실 전도를 위한 가장 큰 광고 매체는 ‘회심한 사람들’이 아닙니까? 성도들의 진실한 삶,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증거해 주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성도는 하늘의 편지요 대사라고 합니다. 특히 로마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은 세계를 향한 정예 용사라 할 수 있었으니 더욱 그들을 견고히 서게 해야 할 의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더구나 바울은 그들과 함께 나눌 영적 은사를 갖고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8-29절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 속에 역사하는 성령의 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1:5)”
성령의 능력으로 일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기 전과 후가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하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르면서 그 모든 기적을 보았고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었지만 예수님의 죽음 후 결국 다 버리고 옛 생활로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그걸 아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서 유하라.(눅24:4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1:8)”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과 권능을 받은 후는 완전히 다릅니다.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땅에 엎드려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고 울부짖게 만들었습니다. 죄에서 돌아서서 자신들이 죽인 ‘예수’를 믿게 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처럼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겁쟁이를 담대한 복음 전도자로 바꾸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성령의 능력으로 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들은 갓난 아기와 같아서 바울의 따뜻한 보살핌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롬1:12)
이 구절은 참다운 성도의 교제가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로마의 성도들이 든든한 믿음을 갖게 되면 그들이 사도 바울에게서 얻었던 것 못지않게 사도 바울도 크나 큰 안위함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크리스챤은 다른 형제와 만남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은사를 경험하며 서로서로 배우고, 감사하고, 힘을 얻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행적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제’를 생각해 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일, 약한 자를 위로한 일, 병든 자를 고쳐주신 일, 가난한 자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일, 어린아이와 과부를 사랑하도록 교훈을 주신 일 등.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하층 계급인 3등 시민을 상대로 복음을 전하였고
그들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며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요즘의 세태와는 반대입니다. 저 자신을 보더라도 때로는 나보다 힘 있는 사람과 친한 것을 은근히 내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교제는 조그마한 이득이라도 얻어 볼까 하는 세상의 사귐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의 코이노니아는 다릅니다. 저도 성도와의 교제를 통하여 위로를 받은 경험이 많습니다. 포도나무 비유에서처럼 가지가 되는 성도들이 서로에게 힘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당연한 것입니까? 로마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섭리와 체험한 은혜를 서로 이야기했고 그러면서 믿음을 키워갔을 것입니다. 이런 교제가 우리에게도 이뤄지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다시 한 번 교제를 위한 자세를 정리해 봅니다.
ㅇ서로 섬김 -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ㅇ즐거운 뜻으로 -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롬1:13)
여러 번 가고자 했으나 지금까지 길이 막혔던 것을 다시 말하며 그렇게 가려고 했던 이유를 설명합니다.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고. 열매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심고 가꾸고 온갖 땀과 정성을 쏟아야 합니다. 또한 철따라 내리는 단비와 햇볕을 고대합니다. 그래야 튼튼하고 알찬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전도도 이 열매를 얻기 위한 농부의 극진한 자세를 닮아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홀로 서기까지는 정말 긴 성장의 기간이 필요합니다. 성장은 한편 시련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시련을 이겨내는 성장의 기간 동안 사도 바울과 같은 전도자가 곁에서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눠주고 견고하게’ 해 준다면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실제로 로마에서 이 열매를 맺게 한 농부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롬 1:14-15)
바울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빚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책임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전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사실 이 복음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꼭 필요하고 긴급한 것입니다. 국적의 구별, 문화의 차이, 계급의 상하, 지식의 유무, 남녀노소의 차이가 복음 앞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모든 세상 사람이 믿고 받아들이기에 적합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이 하나님의 복음은 능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미약하나마 이런 책임감이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좋은 글을 읽거나 들으면 이웃‧친구와 나누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도 이 ‘전할 수밖에 없는 기쁨’을 여러 경우로 설명하였습니다.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고생 끝에 찾고는 이웃을 불러 함께 즐기자라고 한 것이라든지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 둘째 아들을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버지의 잔치 등 기쁜 소식은 이웃과 같이 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느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이 인류 모두에게 참 기쁜 소식임을 알고 있는 바울로서는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나 누구에게든지 복음 전하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후 5:14)”는 글에서도 바울 사도가 느끼는 강한 책임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그리스도의 사랑!’을 진리로 받아들여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자신은 채무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셨으므로 자신도 당연히 누구에게나 이 진리를 전해 주어야 한다는 위대한 책임감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신실한 종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도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믿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니 한없이 감사함을 느낍니다.
로마서 공부 7회
7.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1:16)
1)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함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참으로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 구절은 부끄러워 한 적도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또한 적극적인 자세로 자랑해야 할 복음을 소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 자신의 문제를 말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형편과 관계지어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복음을 부끄러워했던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8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디모데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것을 듣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모른 체 해버리거나 부끄러워한 사람도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한편, 아직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한 지방 종교로 여겨지고 있던 이 때, 로마대제국의 찬란한 문화와 강대한 권력 앞에서 장차 그것들을 쓰러뜨릴 참 가치‧ 참 복음을 보여주려는 상황입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얼마나 무모한 노력처럼 보였을까요? 그러나 사도 바울의 모습은 담대하기만 합니다.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모습이라고 할까요? 여리고 성 앞에 선 여호수아의 기백이라고 할까요? 오랜 기도와 기다림 끝에 마침내 준비를 다 갖추고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있는 바울 사도의 모습 이 비장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복음을 조롱하며 어리석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 당시 유대교도들은 복음 전체를 혐오하여 예수도 기독교인도 미워하고 핍박했습니다. 세상이 그렇게 복음을 미워한 이유는 복음 그 자체가 거리끼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복음의 주체는 구유에서 태어나신 분이요, 더구나 아주 작은 마을에서 자라나 목수일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이 분은 아주 연약하게 죽어갔으며 치욕스럽게도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까지도 그를 모른다하고 도망가 버린 사람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 분을 세상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였기 때문에 그를 죽인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돌이었고, 문화인인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요즘에도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항상 조롱과 핍박이 뒤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언제나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기 때문에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말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단정하는데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지 않았으면 끝까지 용서받을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전혀 소망이 없는 존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들이 은근히 자부하는 각종 선행마저도 쓸모없다고 일축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오직 십자가의 구속만 필요하다고 하며 기존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니 비웃음과 냉대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는 여러 곳에서 그런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에서도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고난이 복음 전하는 일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 사로잡힌 종들의 생애는 한결같이 핍박과 푸대접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난이 오히려 그들을 강하게 하였고, 복음을 더욱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자극이 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이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곧 구원의 길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나타남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능력 위에 서는 것이요, 하나님의 적극적인 섭리와 지배로 보전되고 발전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모든 것, 계획하시고 이루셨고, 행하셨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앞으로 행하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로이드 존스)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성도로서 할 일을 해야 완전한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평생의 노력으로 선행을 산더미처럼 쌓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지식, 인격, 덕행, 그 어떠한 것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는 말씀처럼 다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것일 뿐입니다.
인류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애써왔습니다. 도덕으로, 철학으로, 예술로, 종교로.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악으로 치달았고,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인류 앞에 멸망만 남아있을 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 복음의 능력은 죄 있는 나를 죄 없다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던 상태가 회복되었고,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8:38-39)”
복음은 우리를 끝날까지 보존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이러한 복음이 자랑스러운 것임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우리도 당시의 로마와 흡사한 이 시대와 맞서서 당당하게 외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하다.
노평구 선생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복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보편성(普遍性), 만인성(萬人性)을 말하는 중요한 글자로 바울은 이를 다시 유대인에서 헬라인에 이르기까지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들은 실로 인류 문명의 두 면을 대표하는 위대한 민족이다. 도덕과 종교를 대표
하는 유대인, 지식과 문화를 대표하는 헬라인이다. 이리하여 바울은 전 인류와 문명이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구원이 완성될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전 인류에게 절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온 인류가 구원에 이르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다는 것 - 믿음’이란 무엇이길래 그런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입니까?
‘믿음’에 대해 설명한 성서 대백과 사전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인간이 하나님을 받아들임이요, 하나님이 스스로를 내어 놓음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선물이나 노력, 또는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 곧 이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내어 주셨다.(히1:1-2에서는 仲保로 언급했음.) 인간은 이 말씀에 긍정적인 응답을 할 수도 있고, 부정적인 응답을 할 수도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긍정적 응답을 하는 것이다.’
믿음이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 너무 쉽기 때문에 오히려 걸림이 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 쉽고 평범해 보여서 안심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무슨 일을 해보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9절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은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이 세상 누구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으니까요.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가장 절망적이고 포악하고 비열한 죄인에게뿐 아니라 훌륭하고 고상한 인격자에게도 복음은 똑같이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인격과 선이란 도토리 키 재기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절대 필요한 최고의 필수품입니다.
로마서 공부 8회
8. 오직 믿음으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7)
1)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 말씀은 로마서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와 같은 곳이라고, 아니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열쇠요,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수 천 년 역사를 배경으로 신약의 영원한 복음이 여기 우뚝 서 있는 것으로 신구약의 분수령이며 척추로서 전 성서의 중심이 되는 구절’이라고도 말합니다.(노평구)
루터가 진정한 기독교인의 길을 이 말씀에서 깨달아, 종교개혁의 구호처럼 알려진 유명한 구절입니다. 청년시대, 양심이 한없이 예민했던 루터는 이 ‘하나님의 의’를 불의와 죄악을 벌하는 추상같은‘심판적인 의’로 알고 공포와 절망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심판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 희생시킴으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과 결국 사람을 창조의 원상태로 의롭게 완성하시려고 하는 그의 의의 일면인 동시에 또한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그의 사랑의 발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의’가 카톨릭의 추잡한 공덕주의와 위선을 몰아내고 유럽인의 양심을 살려낸 종교개혁을 성공시켰고, 더불어 근대 문명을 산출시킨 것이라는 평가는 과장이 아닙니다. 우리도 이 말씀에서 인생의 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심이 되는 ‘의’와 ‘사랑’의 계시는 그대로 하나님의 성격의 양면으로서 신약의 그리스도의 복음, 즉 하나님의 사랑에 의하여 구약의 의가 완성을 보게 됩니다. 신구약을 통한 이 의의 나타남이야 말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에서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이 복음을 믿는 우리를 하나님은 의롭다 보아주시기(God makes us right in God's sight) 때문입니다. 우리가 의로운 사람은커녕 죄로 뭉쳐진 존재인데도 말입니다. 다윗의 시 두 편에서도 우리들의 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精金)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또 주의 종으로 고범죄(故犯罪)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치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시 19:9-13)
여호와의 법을 꿀보다도 더 사모하고, 이를 지키려는 시인이 오히려 죄로 인해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시편 51편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淨)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0)’
다윗은 여기서 죄가 선천적인 것으로,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절망적인 죄악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려고 했지만 죄라는 장애물에 막혀 정반대의 길로 가버린 것에 대해 절망하는 모습입니다. 여호와의 법을 완벽하게 지켜 당당히 그 앞에 서려고 했었는데, 오히려 죄인이 되어 상한 심령으로 하는 통회입니다.
구약 성경 예언서에는 이스라엘의 불의와 죄악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와 구원의 계시 즉 메시아의 구원이 중요한 테마로 전개되는 것이지만 특히 이사야를 읽다 보면 메시아의 희생적인 고난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53장에서 절정을 이룹니다.(노평구 선생의 ‘로마서 강연’ 인용)
그런데 요즘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복음의 위력을 ‘개인의 행복을 얻는 수단’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복음의 힘이 단순히 나를 지옥행에서 천국행으로 옮겨가도록 하는데 효과가 있을 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이생의 고통이나 염려들을 해결해주기 위해서 계획된 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다시 복음을 면죄부로 끌어내리는 것이 됩니다. 물론 믿음 안에 들어와 있으면 고난도 행복이요 감사가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고통을 위로받기도 합니다. 욥처럼 슬픔 후에는 몇 배나 많은 부와 행복을 상으로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이생의 행복이나 내세보장을 위한 보험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욥이 오래 전에 던진 질문에 답을 줍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께 의로우랴?”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만들고 우리가 하나님 얼굴 앞에 설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있겠습니까? 복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 의로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율법을 다 지키면 됩니다.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이 문제는 하나님이 직접 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제공해 준 의, 그것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완전하게 모든 의미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아래 나셨습니다. 율법에 대하여 완전하게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도 실패한 일이 없습니다. 또한 죄의 값이 되는 모든 형벌도 다 처리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형벌을 대신 받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철저하게 높였습니다.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율법이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명이 율법의 완성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이룩한 의를 주신다는 것인데 이 속에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의가 곧 우리의 의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빚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을 지불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과는 깨끗이 지워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완전함과 의까지 나의 것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두루마기로 덧입고 나는 하나님 앞에 섭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으니’라고 말하는 본질이라고 로이드 존스는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이 의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사할 일인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언급한 성경말씀을 찾아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는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0-22)”
“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8-9)”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롬 3:27-28)”
모두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차별 없이 나타나며, 오직 ‘믿음’ 한 가지만으로 그 의를 인정받는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2)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
이 구절은 하박국 2장 4절의 인용으로 하박국 선지자가 유대를 노략질하는 갈대아인들에 대해 하나님께 탄원했을 때 하나님께서 답하여 말한 내용 중에 있는 구절입니다. 이 ‘의인’은 행위로 볼 때의 의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믿음에 의한 의인은 살리라.’라고 번역(노평구 로마서 강연)하면 의미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율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흠이 없어서 의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이 곧 의인입니다. 우리는 이미 의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한편 믿음은 우리의 노력으로나 간절한 바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믿어지는 것입니다. 자기암시처럼 “믿습니다!”나 “아멘!”을 외쳐서 얻어지는 것은 더욱이 아님을 생각해 봅니다.
‘믿고 행하면 이루어진다.’‘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며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면 된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안 되면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런 ‘믿음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도한 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나의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무척 괴로워하였습니다.
노평구 선생은 ‘크리스챤은 자기의식을 할 필요가 없고 선행의 여부를 반성하는 자기성찰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명쾌하게 말하였습니다. 루터도 ‘신앙은 선행여부를 묻지 않는다. 벌써 이를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복음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뿐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우리가 의인으로 인정받았고, 그 의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1996년 8월)
로마서 공부 9회
9. 하나님의 진노
로마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바울은 처음에 복음을 부끄러워했고 미워했고 핍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 앞에서 무릎 꿇은 후 오히려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권유하는 위대한 증거자가 되었습니다. 극과 극을 달리는 변화의 모습은 하나님이 아니시고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최고 최상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세상을 더 좋아하는 거짓된 자가 아닌가? 오히려 주님께 누를 끼치고 복음의 빛을 가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 같은 자는 성서공부를 하면 안 된다는 판단으로 중단하였습니다.
믿음도 없고 아는 것도 없이 글을 쓰고 발표하는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차츰 그 부끄러운 생각이 바로 죄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다음 일도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다시 공부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롬 1:18)
1) 하나님의 진노와 십자가
16-17절에서 로마서 주제(곧 복음의 주제)를 구약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을 증거로 제출했습니다.(하박국2:4) 이제 이 18절부터는 주제를 설명하는 본론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17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18절은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는 것인데 사랑이 왜 필요한가 하는 이유를 밝히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치밀한 두 가지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손에 사랑을, 다른 한 손에 매를 드신 하나님이기에 우리는 더욱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습니다. 불경건과 불의를 용서하지 않으시되 우리가 멸망으로 치닫는 것을 방관하지 않는 하나님.
하나님은 앞으로 다가올 종말의 고통을 중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나타나는 그의 진노는 이 무서운 종말의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내려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나타나는’ 경로는 양심의 고통(롬2:15), 피조물과 자연계(롬8:19-22), 인생의 죽음(창2:17), 또는 역사적인 사건 등등 여러 가지입니다. 바울은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은 구약에서 예언되었고 신약에 이르러 명확히 드러난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보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사랑도 보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를 그냥 묵과할 수 없다는 하나님의 진노를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아무 죄 없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 26:39)” 하고 기도했는데도 이 잔은 그냥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는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독생자 예수님의 고통스런 절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기 전에 진노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진노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사랑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온 인류에게 감화를 크게 끼쳤던 대다수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죄의 깊이를 철두철미하게 깨닫고 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결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송두용 선생님의 글을 읽을 때 가장 감동스러웠던 것은 자신을 ‘죄인, 죄인’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전혀 죄라곤 없을 것 같은 분인데 스스로 죄인이라고 공개적으로 틈만 나면 이야기했다는 점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바울 선생님이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한 것은 더욱 두 말할 나위 없이 유명한 사실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느낄 때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게 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을 동시에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2) 불경건과 불의
불경건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죄의 본질이요, 불의는 불경건으로 인해 나타는 죄의 현상입니다. 불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요, 불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경건과 불의는 인류의 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계명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말씀한 새로운 계명도 이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는ㆍㆍㆍㆍㆍㆍ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가12:30-31) 하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불경건은 곧 불신인데 신과 그의 존재를 부인하고, 신을 존경하거나 신에게 봉사할 뜻이 없음을 말하며 불신심(不信心)의 표현이다. 신을 믿지 않는 마음에서 신에 대한 모든 항거의 태도, 곧 불경건이 자리 잡게 되며, 신의 율법을 파괴하는 행동, 즉 불의로 나타나게 된다. 이 신을 믿지 않으려는 마음씨가 죄다. 이 불경건에서 모든 사악, 즉 일체의 악한 생활이 드러나게 된다.’는 고병려 선생의 설명을 보면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따르면 우리의 인생이 바르게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인류의 타락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살펴야 합니다. 그 관계가 평화로울 때 우리의 삶도 평화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롬 1:19-20)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란 ‘인류의 마음 속 깊이 나타나는 것으로서 저들의 양심(良心), 이성(理性) 등에 의한, 저가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정도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라고 노평구 선생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안에는 신의식(神意識)이 있다고 합니다. 인류학자들과 성경 연구자들은 이 난제를 조사했는데 가장 원시적인 부족들이나 문명국가 사람들에게나 공통으로 인간에게는 최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우리 인간들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알만한 지식을 주셨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태양과 달, 별과 우주질서와 체계, 계절 등을 통해서 그의 무한한 힘을 알 수 있으며 사람의 정신, 인격 그리고 역사의 지배, 섭리 등을 통해 그의 신성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4편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을 어떻게 먹이시는지 나무들까지도 어떻게 기르시는지를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물들을 어떻게 계속 돌보고 계신지 성경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에는 작가의 얼과 개성이 나타나게 마련인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도 창조주 하나님의 본성과 능력이 반영되어 있으므로 인간은 만물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반적인 계시를 받은 이방인들조차 핑계의 여지가 없는데 선택된 민족 유대인이야 하물며 어떠하겠습니까? 오늘의 우리들은 더욱 핑계꺼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신구약 성경을 주셨고 2000년 동안의 수많았던 복음전도자들, 거기에 신앙 선배들의 주옥같은 책들까지 주시지 않았습니까? (1997년 4월)
로마서 공부 10회
10.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1-23)
1) 하나님을 알되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식을 넣어 주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인간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의 작품인 만물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신 것으로 세계는 우연히 존재하지 않는다.(칼빈)’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모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나는 부모가 없다.”고 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만 부모가 없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애써 부정할 뿐입니다.
비록 이방인이라 해도 사람에게는 모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 땅에 존재한다는 인식은 생명의 창조주에 대해서 깨달음을 줍니다, 그 기원이 수수께끼인 우주나 대자연의 모습, 그리고 신비로운 그 움직임들은 불가항력적인 초월자가 있음을 알려 줍니다. 또한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죄성을 들여다 볼 때 구원자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서는 “우둔한 자”라고 딱 잘라 말합니다.(시14:1)
2)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자기 교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면서도 자기 힘으로 산다고 자부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이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있다느니 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자신 만만합니다. 구로자키는 ‘영화롭게 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영광의 하나님, 은혜의 하나님에 대한 당연한 태도다. 그런데 이를 하지 않는 자, 즉 하나님을 떠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기의 공로에 의존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영광을 헛되이 피조물에 돌리고 감사하는 생각은 고갈되어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를 멸망하기에 이른다. 하나님을 떠난 가장 분명한 증거는 그가 헛된 피조물에게로 마음이 끌리는 것과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허망하여지고 어두워졌다
사탄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으니 결과는 허망하여지고 어두움으로 치달아 멸망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을 변절시켰다.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을 위로해 줄 만한 구체적인 대상을 찾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마술과 같은 기적 보기를 기대하며 모여든 어리석은 군중들과 같이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동네 앞의 서낭당이며 큰 바위를 찾아 치성을 드렸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그 원시신앙과는 모습이 달라졌지만 변형된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들이 만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직접 체험한 모세시대의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어떤 우상숭배를 했는지 이 경우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고 그 진리에서 떠났을 때 얄궂게도 자신들의 미련함과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미약함을 오히려 드러내어 우상숭배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라고 노평구 선생은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롬 1:24-27)
우상숭배가 죄악의 원인이란 것은 모든 구약 예언자들이 입을 모아 경고한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물론 강조되고 있습니다. 높일 분을 높이지 않고 높이지 않을 것을 높이는 것은 병적인 현상입니다. 마음이 병들면 사람의 전부가 병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숭배가 있는 곳에는 불의와 추행이 필연적으로 따라붙게 마련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이사야 1:18).
이미 부끄러운 욕심에 젖어 있는 우리들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주홍빛 같은 죄가 양털처럼 희어진다는 것입니다. 새하얀 빨래가 햇볕아래 펄럭이는 광경을 본 사람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입니다. 눈부시게 하얗고 잘 마른 옷가지처럼 우리의 마음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얼룩으로 더러워졌던 옷보다 더 험악했던 우리가 눈과 같이 하얘진다는 것이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사건입니까?
바울의 설교는 정직합니다. 사람들의 타락한 속성과 죄 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어 견딜 수 없는 마음의 고통을 겪게 합니다. 그 고통 후에 마침내 복음의 참된 가치를 보여줍니다.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갈1:10)” 한 그대로입니다.
24절 말씀은 우상 숭배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인류를 완전히 정욕에 맡겨 이의 놀림감이 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상황이며 진정 심판에 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장애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없는 증거라고 교만을 떨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요즘은 성적 범죄를 너무 가볍게 보는 편입니다. 기독교는 남자와 여자의 순수한 사랑과 정절을 아름다운 것으로 봅니다. 일부일처(一夫一妻)는 예수의 결혼률입니다.
우상 숭배로 시작된 죄는 하나님의 성전이어야 할 자기 몸을 스스로 더럽히는 데까지 가 버렸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경고한 말씀을 보겠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는 다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20)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히 찬송 받으실 분인데 오늘 우리의 현실은 하나님의 찬송을 가로채는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26-27절에서 바울은 동성간의 정욕을 음탕의 절정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음에서 시작된 현상입니다. 순리대로 순수한 사랑을 나누지 않고 왜곡된 방법으로 자신의 몸에 죄를 범합니다. 이러한 동성애는 바울의 시대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사회의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요즘은 물론 더욱 공공연하게 드러나서 보통사람들까지도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AIDS는 이런 잘못된 정욕에 대한 최소한의 경고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저회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 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28-32)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알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꺼려 멀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제약과 계율이 있다고 여겨 굴레에 얽매이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거부한 사람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십니다. 그 결과 29절부터 나열된 모든 죄악을 필연적으로 만나게 딥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인생이 이 세상에서 불행한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시편73:4-12절에서 보듯이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災殃)도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驕慢)이 저희 목걸이요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알랴 지극히 높은 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고 자만합니다. 이들은 악인이지만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점점 더합니다.
하나님 없는 일시적 평안이나 행복은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곧 그 생명을 손상케하고 영벌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죄의 목록입니다.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모든 불의 : 죄를 총칭하는 말
2) 추악 : 직접 행동에 나타나는 죄로 이는 악을 위한 악. 남을 괴롭히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악질적인 죄악
3) 탐욕 : 주로 물질에 대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그 깊은 내용에 있어서는 타인을 해치며 자기의 이익만을 구하는 죄악, 그리고 잔인한 이기주의에 의해 반사회적인 불공평의 조장과 강간 까지 일으키는 죄악
4) 악의가 가득한 자 :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악한 마음, 악한 계획, 남을 해하려는 독기 등을 가리킴
5) 시기 : 타인의 소유물 중, 자기 것 보다 더 좋은 것을 보고 불쾌한 감정을 가지며 그것을 빼앗으려는 욕망을 갖는다.. 한편 남이 그것을 상실할 때 야만적인 만족감을 느낌. 시기는 남을 해하려는 심성의 기초적 단계요, 발전하게 되면 살인 분쟁 악계 흉악등으로 이어지게 되는 잠복기에 있는 죄
6) 살인 : 시기→ 분쟁 사기 악독→살인
7) 분쟁(싸움) : 이 죄의 기초는 오해, 이해부족, 이기주의, 이해관계, 욕심인데 이 때문에 서로 다투어 싸우는 행위
8) 사기(음모) : 귀금속의 질을 하락시키거나 포도주에 다른 것을 혼합하는 것과 같이 비뚤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의 음흉한 성품과 행동
9) 악독 : 털끝만큼도 착한 마음이 없는 악 자체로 모든 일을 악한 생각으로만 해결하려 함
10) 수군수군하는 자 : 뒤에 숨어 본인이 듣지 않는데서 비방하고 악평하는 것이나, 남의 말을 듣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남을 비방하는 자
11) 비방하는 자 : 공공연하게 남을 비방한다. 근거도 없이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여 욕하며 자기 잘못에는 너그럽지만 남의 잘못은 용서할 수 없는자. 심히 고질적인 범죄
12)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 무신론자(인간 절대론자). 하나님의 존재가 자신에게 불리하므로 하나님의 뜻을 말하면 무조건 거역 하는 사람
13) 능욕하는 자 : 방자하여 남을 멸시하고 남을 모욕하고는 만족해하는 사람. 특히 신앙인에게 이런 짓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
14) 교만한 자(거만한자) : 마음속 깊이 자기 우월을 주장하는 자. 자기중심, 자기도취에 빠져 자신을 속이는 자
15) 자랑 하는 자(큰 소리 하는 자) : 교만의 외적 발동으로 자기 자랑을 일삼으며 남을 낮추어 발밑에 깔고 서려는 사람이다. 이가 발전되면 하나님까지 짓밟으려는 최대의 교만 불신에 이른다.
16) 악을 도모하는자(악을 꾸며 내는자) : 악한 일을 계획하는 사람인데 자기 성공을 위해 남을 누르려 악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계책(計策)을 생각한다. 주로 정치하는 자들로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이다.
17) 부모를 거역하는 자 : 5계명(네 부모를 공경하라)을 위반한 자로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인간관계의 제일 크고 기본적인 계명을 무시하고, 부모의 뜻을 거스리며 순종치 않는 자
18) 우매한 자(분별없는 자) : 도덕적인 감각의 상실로 사회질서의 파괴 등을 가져온다. 겁탈 강간까지도 포함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음
19) 배약한 자(신의가 없는 자) : 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신의가 깨진 상태이며 서로 믿을 수 없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20) 무정한 자(몰인정한 자) : 동정심과 사랑이 없는 사람, 또는 어떤 사상을 위하여 부모나 상전을 냉혹하게 버린 자
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들은 죽어야 마땅하다는 하나님의 공정하신 법도를 알면서도 자기들만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로 인한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면서도 목마른 자가 물을 마심같이 불의를 마시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처럼 같은 불의를 행하는 자가 있으면 아주 기뻐합니다. 부끄러움을 도리어 자랑으로 여기는 세대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도 위의 죄 목록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댓글 재독 할수 있도록 배려 하심에 감사를 드리며~다시한번 읽어봅니다 이해하기 쉽게 편하게 일목요연하게 글 주심에 감사를 드리오며 신앙생활 하는데 선생님의 도움 주심에 고마울 뿐임니다.
롬 1/11! 제게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니라 주님이 절 그토록 보고 싶어 하신다고 멋대로(?) 해석하고 그에 맞춰 생활하고 있습니다. 전 혈당 관리를 해야 하는데, 남산 산책로 나만의 기도소에 가 기도를 하면 혈당 수치가 똑 떨어집니다. 다른 곳에서 아무리 운동을 하고 땀을 빼도 안 내려갑니다. "왔다 가라. 난 너 보는 맛에 산다." 마치 이러시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절 그토록 사랑하신다니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왜 몰랐던가 주님만 영접하면 이렇게 좋다는 것을.
참으로 놀라운 복음입니다. 나에게 이 복음이 기쁨이되어 이웃에게 전하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늘 잊기를 기도합니다. 기도처 참 좋습니다. 나만이 홀로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소 너무너무 좋습니다. 저도 요즈음 집 근처 국사봉에 새벽3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3시간 정도 걸으면서 기도도 하고 이런 저런 생각도 특히 이웃과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지 못함을 가슴 아프게 느끼며 우리 앞에 선각자들은 그렇게 주님 말씀대로 살아간 분들이 있는데 그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두 분이 마치 '나만의 기도처'와 같은 곳에서 대화를 하고 계셨다니??? 카페지기 매의 눈에 딱 걸렸습니다. 계속 은혜스러운 대화, 쭉~~~~ 나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