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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2:02 2021-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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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 인류의 시작
: 500만년전 최초 인류, 루시, 호모 에렉투스, 일반적으로 알려진 수직 계승 구조가 아니라
복잡한 교차 계승구조로서 현생 인류가 나타났다.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2010년 이후 유전자 해독기술의 발달로,
유럽인들의 유전자에 남아있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를 확인했다.
* 다윈의 진화론?
다윈은 그의 책 '종의 기원' 마지막 6판에서만 '진화'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 전에는 '변종의 후손' 이란 말을 사용.)
'진화'가 가지는 어감이 그의 의도를 해칠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그때 당시
이미 많은 사회학자들이 '진화'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었고, 그런 흐름에 맞춰서,
그의 책에도 따라 쓰게 되었던 것이다. 종의 기원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생명의 다양성과
그 다양성을 자연 환경이 선택 한다는 의미이다. 종의 다양성과 자연 선택설.
흔히들 알고 있는, 원숭이가 인간이 되는 진화론은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적자 생존 -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처음으로 사용. 다윈은 사용하지 않음.
(약육강식/생존경쟁 : 모두 인간의 세계관이 자연에 투영된 잘못된 자연관)
진화론과 창조론은 대립할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해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어야 한다.
호모 사피엔스, 왜 다른 종들은 멸종했을까,,,
라스코/알타미라 동굴벽화 : 이미 4만년전 사람들은 현대인들의 지능 수준 도달.
인간의 피부색의 변화사, 눈동자의 흰자는 개와 사람의 공통점일 가능성 있음.
홀로세, B.C. 1만년전, 마지막 빙하기의 끝, 작물의 재배를 시작하다
사회 집단의 형성, 대규모의 사회, 계층화된 사회, 신의 존재
고대 문명의 시작, 인류의 4대 문명? 고대 문명 교류사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은 대만에서 동남아를 거쳐 어떻게 마다가스카르까지 갔을까?
카누 타고, 남태평양 동쪽 이스터 섬까지 이주해 간 폴리네시아 사람들 (B.C.2000년전, 5000km 이상거리를 배타고 이동.)
고대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문명이 발전했고, 능력이 뛰어났던 사람들이다.
석기시대 사람들을 흔히들 생각하는 원시인으로만 치부하는것은 너무 편협한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흔히 사용하는 가방을 한개라도 만들수 있을까? )
원시인, 선사시대, 구석기, 신석기 용어들 모두 서양 제국주의 배경아래에서,
기능적인 분류로 인간의 우월을 결정하고, 문명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분위기에서 만들어진
고고학자들의 분류방식인 것이다. (후대의 인간들이 우리를 '산업혁명인' 또는, 인터넷 시대의 인간'
들이라고 명명한다면, 기분이 어떨까를 생각해보자.) 이 우월성이 식민 지배의 당위성을 제공함 -
문명국가가 비문명국가를 개발하고, 착취하는게 옳은일이다라고 스스로 식민지배의 근거를 제공하게된다.
(아직도 우리의 편견은, 아프리카나 동남아시아의 못사는 나라 사람들이 우리보다 생각과 사상이
모자르고, 어리숙할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이 현대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는 부족할지 몰라도,
자연에 대한 생각과 철학은 우리보다 훨씬 뛰어나다. 인디언 추장, 시애틀, 오체투지, 모든 생명있는 것들을 위한 기도)
기술과 과학 문명의 우월로서 인간을 판단하는 세계관, 문제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 우리나라의 시작
: 고조선 이전의 흔적
홍산문화, B.C.4000 ~ 6000년전, 중국 내몽고자치구 츠펑시(적봉시)-중국 북동부,
1900년대초 일본 식민지 지배의 일환으로 일본 고고학자가 탐사중 발견.
175채의 집이 10채 단위로 줄지어 있는 계획도시의 모습, 한채당 약 18평
전체 4만제곱미터 규모, 중앙에 40평대집 두채 존재. 우두머리 또는 제사용 공간으로 추정.
집집마다 생산도구, 취사도구, 식품 저장용 움막 존재, 초기 씨족사회 공동체로 추정함.
빗살무늬토기, 적석총, 옥기등등 출토된 유물이 기존 중원문화와는 차이가 있음.
하지만 중국은 이를 중국문화의 시조라 여겨, '중화시조취락'이라 명명하고, 옥룡을 츠펑시 상징물로 만듦.
(버스 손잡이가 옥룡 모양으로 되있음.)
현재 중국땅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동북공정.
(만주일대의 동북 3성,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의 역사를 모두 중국역사라고 주장.)
홍산문화는 우리나라도 중국의 시조도 아닐수 있다. 어느 나라의 시조인지가 중요한게 아니다.
그냥 그 당시 그 땅에 산 사람들의 역사일 뿐이다. 그 지역은 중국도 대한민국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 지역의 문화를 우리가 중국보다는 더 많이 받아들였었고, 만주 일대의 고조선 영역을
우리의 고구려와 백제는 자신들의 뿌리- 부여라고 일컫었던 것을 보면, 우리에게 더 큰 영향을 준 것 같아 보인다.
고조선 시기의 유물들, 비파형동검,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옥기 등등의 출토 지역을 살펴보더라도
한반도와 만주, 요녕성 일대는 동일한 문화권이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중국 본토와는 유물들의 양식이 다른 문화권이라는 것을 알수 있음.)
중국은 고대부터 내몽고 지역은 오랑캐의 땅이라고 적대시 했었고, 만리장성의 바깥쪽에 내몽고 자치구가
존재하는것을 보면 (북경 바로 위쪽), 그 지역이 중국의 뿌리는 아닐것이라고 생각된다.
북경이 중국의 수도로 된것도 1100년대 금나라 시기 이후 였었고, 그 이전의 중국의 오래된 수도는
지금 산시성의 시안, 옛 지명 장안이었다. ('시안' : 산시성의 성도, 황하강 유역, 중국 중부에서 약간 위쪽에 위치.)
고조선, 비파형 동검, 옥기, 고인돌 왕국, 전세계 고인돌 60% 가 우리나라, 단군신화는 어떤 의미일까,
삼국사기, 삼국유사 - 모두 고려시대에 작성됨. 삼국사기 (1145년), 삼국유사 (1283년)
너무 적은 우리의 역사 기록들, 분명히 고조선에서도 삼국시대에도 문자기록을 남겼을텐데,,,
지금까지 내려오는 역사책 한권이 없다는게 안타깝다.
일본서기(700년경) 보다 앞서는 책도 없고, 고려이전 제대로 된 역사 기록이 없다는게,,,
(역사 기록들을 불태우고 약탈해간 정복자들이 너무 원망스럽다.)
고조선의 역사는 대부분 중국의 사서들을 참고하여 추측하는 수준이고, 그나마도 중국의 입장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기록이 자세하지도 않고, 객관적이지 못할수 있다.
게다가 그 당시는 한창 중국이 통일 중국의 위대함에 도취되있었던 시기라서, (진/한) 자신들 외에는
모두 미개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던 시기였었고, (중화사상, 한족) 이러한 사조를 바탕으로, 역사서들에도
이런 생각들이 그대로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동이족, 북방민족들의 문화 풍습을 대부분 미개한것으로 표현,
프랑스인이 개고기를 먹는 한국의 풍습을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
고조선 때의 역사책 한권이 안남아 있다는 사실은 우리 역사에서 천추의 한이다.
고조선이나 삼국시대 역사책 몇 권만 남아있었어도 우리 고대사 연구가 이렇게 분열되고 지리멸렬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분명한 것은 그 당시 고조선과 고대 중국은 대등한 나라였었고,
비록 한나라와의 전쟁에 패했지만, 우리가 중국을 종주국으로 모셨던 나라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나 조선시대는 중국을 황제의 나라로 인정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대략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이 통일을 이루었을때 즈음,,,B.C.600~ 200년,,,
그 시기는 철기가 대량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었고, (진/한) 넓은 평야지대와 황허강과 양쯔강을
가지고 있던 중국은, 그 시기이후로 식량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다. 이는 곧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왔고,
이를 통해 국력과 군사력의 증가 및 문화 발달, 계층과 전문가들이 발전했던 시기가 찾아오게 된것이다.
(인류의 4대 문명이란 것도, 이런식의 인구 증가가 그 당시 기술발달의 결과물들을 더 많이, 그리고 더 거대하게
만들어서, 위대한 것처럼 보여지게 된 것 뿐이다.)
그 이후로 중국은 중세시대까지 아시아 최강국으로 패권을 잡았던 것이다.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융성한 중국 최고의 전성기가 찾아오게 된것이다.
(나침반, 종이, 화약 등, 서양 식민지배의 원천기술들은 모두 중국이 발명함.)
하지만 우리나라가 문화적으로 열등한 관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청동기 기술, 다뉴세문경, 백제 금동대향로, 모두 주조 기술로 만들었음.
서울 잠실 근처의 풍납 토성 : BC100 년경 축조시작한 토성이 아직도 보존되고 있음.
(전체 둘레 약 4km, 높이 6 ~ 11미터 가량)
서울은 문화재의 보고, 춘천 중도 레고랜드 유적지, (유적지 개발 보존 필요.)
삼국 시대 이후의 역사는 침략 전쟁의 희생양,,,고려시대 (환향녀), 조선시대(임진왜란)
근대 서구 열강 식민지 시대의 희생양, 국제 조폭 시대, 일본의 국권 침탈,
식민 지배 35년, 해방후 6.25 전쟁 발발. 무엇을/누구를 위한 전쟁인가?
미국은 우리의 친구? 가쓰라 태프트 밀약등등,,,'외교는 거래다.'
남북 분열후 군부 독재 시대의 시작, 민주화 운동, 문민정부, IMF,
우리 나라의 양당구조, 보수와 진보? 수구 기득권과 보수 세력의 싸움판일뿐.
끊임없는 식민사관 : 중세 시대 중국위주, 지금은 미국 위주.
(강한것에 굴종하는 동물과 인간의 기본적인 세계관을 따른 결과.)
외교 정책 : 실리 추구보다는 원칙 추구를 해야한다.
실리 추구를 하려다 보니, 강대국 사이에서 휘둘리기만 할 뿐이다. 우리의 원칙을 세우고
우리의 길을 가야한다. 인간과 자연을, 기술과 자본보다 우선시하고, 모든 생명과 지구의 공동 번영을
최상의 가치로 추구한다면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명목상 이의를 제기할수 없다.
뚜렷한 명분과 원칙하에서 외교를 하다보면, 전세계 어느 강대국들도 무시할수 없는 나라가 되있을것이고,
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자리매김할수 있다. 경제적 제재나 외교적 압박은, 우리 민족의 위기 극복능력과
국가 위기때마다 하나로 똘똥 뭉치는 저력을 믿어보자. (우리나라는 3050 클럽 7번째 국가.)
현재 30-50 클럽에 가입된 국가는 일본(1992년), 미국(1996년), 영국(2004년), 독일(2004년), 프랑스(2004년),
이탈리아(2005년), 한국(2019년) 등 7개국뿐이다.
- 중국과 일본의 역사.
: 간략한 중국과 일본의 역사를 살펴보고, 그들의 역사속에서 우리나라를
다시 한번 볼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자. 우리나라와의 공통점과 차이점.
<중국> 중화 사상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정치적으로는 공산당 1당 독재체재이면서, 경제는 자유 시장경제의 이상한 국가.
<일본> 왜놈으로 무시하던 나라였었는데, 어느샌가 세계 경제 대국으로,
정치적으로는 사실상 자민당의 장기 집권으로 반독재 국가에 가까운 모습.
(하지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기업친화적/미국 친화적인 당이 장기 집권함.)
한 나라의 역사속에서 우리의 세계관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확인해보자. (리더 중심의 승자 독식 체제.)
- 우리나라와 일본은 어떤 관계일까?
: 유전적으로나, 역사기록으로나, 남아있는 유물들로 보나, 사실상 형제의 나라 일본.
일본인들은 우리 조상들의 후손, 특히 백제의 후손들일 가능성이 크다.
'쿠다라나이', 가치가 없다, 쓸모없다'라는 일본말. 여기서 '쿠다라'는 우리말 '큰나라'의 차음,
야마토 시대때 '백제'를 가리키는 말. 쿠다라나이는 '백제의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이고, 그런것들은
가치가 없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말.
백제 무령왕릉, 왕과 왕비 관의 재질은 금송, 일본 고유의 특산품이자 최고급 목재.
이외에도, 유물, 역사기록, 지명, 유전자 분석 결과 등등 너무나 많은 우리나라의 흔적들.
(그 당시 해상 무역 강국이었던 백제. 인도나 페르시아 지방과도 교역한 흔적.)
가까우면서 먼나라 일본, 닮은것 같으면서도 다른 점들이 많고,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은 점이 많은 나라.
사실상 형제의 나라이지만, 이미 서로 사이가 나빠질때로 나빠진, 관계가 꼬여버릴대로 꼬인 두나라,
하지만, 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저격후, 감옥에 수감중일때. '일본인들을 미워하지 마라, 지배자들 정치가들의 잘못이다'
'동양평화론'을 통해, 한,중,일 삼국이 힘을 합쳐 서구 열강에 대항해야 한다 주장.
지금의 내생각도 같다. 일본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그다지 미워하지 않는다. 반한 감정은 일부
극우세력의 모습일 뿐이다. 실생활에서, 여행에서 만난 일본인들, 얼마나 친절하고 착한가,,,
일부 정치인들의 몰지각한 역사의식, 그리고 제대로된 역사교육과 반성의 부재가 대중들에게 그대로
전달되고 있는것 뿐이다. 일부 지식인들은 자국의 역사문제를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가들, 기업가들이 두나라의 관계를 이끌게 해선 안된다. 양국의 시민들이 나서서, 제대로된 역사 인식과
반성, 그리고 그것을 통한 화해를 이뤄야 한다.
- 근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지배 시대 이후의 세계 나라들,
: 영국의 산업 혁명 이후 나타난 폭발적인 생산 증가와 인구증가로 인해, 식민지 개척이 점점 필요해진
상황에서, 기존 강자 (영국, 프랑스등)와 후발주자 (독일 등) 사이의 알력의 결과로, 1차 세계대전 발발,
그리고 그 이후의 2차 세계대전.
2차 세계 대전의 종식과 더불어 식민지배 국가들의 독립, 하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 군사 독재 정권이 들어서고,
이에 맞서는 반정부 투쟁, 내전, 유혈사태, 분열. 거의 모든 국가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현상.
(서아시아(중동),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콩고 민주공화국 - 2015년까지 전쟁으로 600만명 사망, 2차대전이후 가장 큰 희생자수.
르완다 대학살 등등. 멕시코는 어떻게 마약 왕국이 됐을까?
* 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 : 히틀러라는 한 사람을 악의 근원이자, 모든 문제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우리의 시각. 하지만 히틀러는 문제의 시작이기도하지만, 사실상 그 당시 사회가 만들어낸 결과물
이기도하다. 그 당시 독일사회가 열망하는 것에 대한 발현체이자, 개개인들의 바램이 모여서 만들어낸
하나의 결과물이다. (그 당시 독일 국민들의 열등감, 모멸감, 2등시민)
모든 정치 집단과 대표자들이 이런 사회적 관념의 발현이자 결정체. -> 히틀러라는 괴물이 만들어지게 된
사회적 배경을 알아보고, 히틀러 한 개인은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이 아닌, 그 시대의 결과물로써 바라볼수
있는 시각이 필요하다.
- 프랑스 대혁명 (1789~1794), 영국의 명예혁명, 미국의 독립 전쟁.
: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는 프랑스 혁명, 군주제의 종식을 시민의 힘으로 이끌어낸,
인류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진정한 민주주의의 승리인가?
아니면 또다른 권력으로 중심축이 이동한 것인가?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여자와 노예의 인권은 없었다. 혁명기간에 여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계몽사상가들조차 여전히 여자는 열등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
큰 의의가 있는 사건이긴 하지만, 그 배경에는 인류의 권력지형도가 기존 군사력에서, 자본력으로
이동한 것 때문에 가능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산업 혁명이후, 자라나기 시작한, 상업, 금융업, 산업 자본들의 규모가 점점 커지는 반면에, 왕 중심의
기존 권력은 제자리 걸음이었기 때문에, 자본가들의 권력은 점점 커지고, 이 자본가들의 커진 정치적 욕구가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되게 된 것이다.
군사력에 의한 독재가 자본에 의한 독재시대로 변모하는 과정. 그나마 중산층의 등장으로 전보다는
살기 나은 세상으로 생각하지만, 하위 50% (무자산) 사람들에게는 똑같은 세상.
(프랑스 혁명 전, 후 부의 분배 비율은 변함이 없었음. 상위 10% 가 전체 부의 90%를 차지, 다만 부의 구성이
기존 농지 위주에서 부동산, 산업자본, 금융자본으로 구성이 변화되는 과정. 토마피케티, 21세기 자본)
- 1900년대의 고성장 -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등장과 기업사회의 고착화 (기술도취 사회)
: 지난 100년간,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인구증가율과 경제성장률. (지난 100년 vs 지난 2천년간)
0 ~ 1900년까지 대략 2천년간 인구 증가 2억에서 10억으로 5배 성장. 연간 경제 성장률은 약 0.1% 미만
<-> 하지만 1900년대부터 약 100년간 인구 10억에서 80억으로 8배 성장,
지난 100년간 경제 성장률은 연간 약 5% ~ 10% 대까지 성장
(경제성장률, 인구증가율, 토마피케티 '21세기자본', 한국은행 홈페이지 통계)
이 폭발적인 인구증가와 눈부신 경제성장은 우리 인간 사상에 성공지상주의를 강한 이데올로기로
심어놓았다. '뭐든지 할수 있다라는 자신감',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 '노력을 통한 성공', '꿈과 비전' 등등,
이러한 생각들은 지난 100년간 형성된, 인류 역사상 단 한번밖에 없었던, 정말 '특별한' 시기에만
가능했던 일들을 보고자란 사람들로부터 생겨난 믿음인 것이다. (그리고 이 흐름은 현재에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이같은 엄청난 번영의 시기는 인류 역사상 단 한번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것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경제성장, 현대 과학기술의 발달, 인구 증가, 세계화를 통한 지식 교류와
공급사슬망 확보 등을 통해, 우리는 인류에게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이 이뤄지는 것들을 보았고, (우주여행 등등)
혁신이라고 불리는 '믿기지 않는' 물건들을 세상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인공지능 등등)
현대는 기술도취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 마음속에 이러한 생각들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세상에 불가능한 것은 없다',
'꿈을 꾸면 누구나 꿈을 이룰수 있다.' 내지는, '인간은 무한한 잠재력을 가졌다'라는 생각들이 설득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생각들은 만들어진 허구일 뿐이다, 자세한 내용은 '인간의 능력' 편 참조)
또는 '노력을 하면 누구든지 성공할수 있다'라든지, '이런 혁신의 세상에, 불가능이 없는 세상인데도 불구하고,
힘들고 지치고, 일이 잘 안풀린다면, 그것은 방법을 잘몰라서이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지 못하는
개개인의 문제다라고 한다. 그리고 불안하거나 행복하지 못하다면 감사가 없어서이고, 긍정의 힘이 부족해서이다.
또는 회복 탄력성이 부족해서' 라는 주장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 역시, 모든 개인의 문제를, 한 개인에게서만 찾고자하는, 잘못된 시각으로부터 만들어진
오해일 뿐이다. 인간은 모든 삶의 에너지를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 얻는, 사회성에 의존하는 가장
극단적인 동물의 한 종이기 때문이다.
혁신은 오직 사물과 기술등의 형이하학적인 것들에서만 나타난다. 우리 인간의 행복과 삶의 본질,
또는 생명과 자연을 우선시 하는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현대 사회의 권력자들인, 기업이 주도하기때문이다.)
우리 삶의 형태는 5천년전 이집트의 노동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도 현대 직장인들과 마찬가지로
급여를 받았고, 잠자리를 제공받고, 노동시간이 존재했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출퇴근시간, 노동시간,
또는 급여 그리고 직장동료, 주어진 업무등등, 결정할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하고, 더 경쟁해야하며, 더 치열한 세상에 살고 있다.
인류는 그 어느때 보다 번성했고, 삶의 질은 높아졌지만, 우리 삶의 본질은 거의 변한게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은 권력 지향적이고, 리더 중심의 승자 독식 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우리의 세계관은, 우리가 현대 사회의 권력인 '자본력'을 가진 기업 중심으로 생각하고, 그 권력자들에게
모든 시선과 관심을 집중하게 만든다. 그리고 기업의 승자가 모든것을 독차지 하는것이 공정하고,
능력이라는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 이로부터 나타난 기업중심적 사고 방식과 기업의 생리가,
우리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여기로부터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가 뿌리를
두고 발생한다. (이 내용은 '기업 중심 사회' 편 참조)
1900년대에 나타난,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인류의 번영은, 우리에게 '성공지상주의', 또는 '능력주의'를
강한 이데올로기로 심어놓았고, 이것은 마치 과거 신분제도에 버금가는 믿음을 형성하고 있다.
왕족의 혈통을 물려받은 사람은 평민과는 당연히 다른 존재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기업 중심적 사고방식' 이나 '능력주의' 를 의심하기는 커녕, 이것이 공평하고, 정의롭다는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사회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기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