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6대왕 이였던 고종의 비 명성황후. 한 동안 우리의 기억 저편에 있던 명성황후의 존재는 1995년 뮤지컬 명성황후 열풍을 타고 이 시대에 다시 등장한다. 매체를 통해 가깝게 느끼고는 있지만 그녀의 외모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부분은 알려진 사실이 드물다. 아직까지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외관 1883년 서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명성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의 부인 "로즈 푸트"는 그 녀를
" 뛰어난 침착성(mastert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 "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명성황후를 만난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이렇게 썼다. " 당시 왕후는 40세가 넘은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美人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가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카내 주는것이었다 "
명성황후를 御醫로서 자주 만났던 언더우드부인의 기록은 좀 더 분석적이다. "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조선 방문기간 중 명성황후를 4차례 만났으며 그녀가 남긴"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통해 명성황후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라 전한다.
비숍여사의 글에는 황후의 외모 뿐 아니라 성품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을 한다.
외모가 아닌 성품에 대해서는 황후를 만난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먼저 영국의 "데일리 메일"지 조선특파원 맥켄지 기자는 황후를 주변사람들에게는 관대했으나 적과는 타협하지 않는 강한 여성으로 묘사를 했으며 당시 주조선 미국 서기관 이였던 윌리암 샌즈 역시 의지가 강한 시대를 앞선 한 명의 정치가로써 황후를 보았다. 또한 황후 시해사건을 지휘했던 일본인 미우라 고로 공사도 "황후는 재능이 뛰어났으며 좀처럼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간간히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황후의 모습을 추론해보면 나이에 비해 무척 젊은 피부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정치가로서의 역량 또한 무척 뛰어난 단아한 외모와 풍부한 학식을 겸비한 여인으로 생각된다.
명성황후의 일생
본명 민자영. 조선 철종당시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나 9세 때 고아가 되어 어렵게 생활을 하다 세도정치의 기반을 없애기 위해 중전을 물색하던 대원군의 눈에 띄어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이 후 총명함으로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면서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쇄국정치를 고집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의 문물개방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외국을 통해 유입이 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은 조선이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게 하는 반면 수구세력들의 불만은 늘어나고 일본상인들의 농간으로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고조된다.
결국 별기군 특별우대에 반발하여 무위영의 군사들은 난을 일으켜 민씨척족과 황후의 처형을 요구하는 사건인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다시 등장을 하게 되고 황후는 변장을 한채 피신을 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다시 정국의 중심에 대원군이 등장을 하고 큰 위협을 느낀 조정의 기득권층은 청나라 텐진에 주재하던 영선사 김윤식에게 통지를 하여 청국의 조정을 요청하였다.
청국은 종주국으로써 속장을 보호해야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기득권을 되찾으려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대원군을 납치해 청국으로 호송을 하고 다시 황후는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후 10여 년간 일본과 청나라의 각축전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나 이미 노쇄한 청나라는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명성황후탄강구리 비
을미사변의 발생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일족은 개화당 세력을 밀어내며 사대당으로 다시 집권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개혁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가 세력을 잃게 되자,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형세가 나빠지매 친로책(親露策)을 써서 일본 세력을 압박하였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1년)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책되어 남청량리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에 이장하였다.
을미사변의 발생당시 일본은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고 조선 조정은 이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 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1895년의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이완용, 민영환, 윤치호 등을 앞세워 親美, 親러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7월13일 이노누에(井上馨) 대신에 군국주의 군벌인 미우라(三浦)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1895년 9월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의 친로(親露)책과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명성황후의 이러한 친로(親露)책은 일본을 자극하였으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여우사냥" 이라는 작전명 아래 황후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러시아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방책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미우라(三浦)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관리하되, 내각에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어윤중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이재면(李載冕)과 이준용(李埈鎔)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세력의 협조를 얻었다.
이와는 별도로 미우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한성신보사(漢城新報社)의 수십명 일본 낭인(浪人)들, 일본 수비대와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기타 친일파들을 포섭하였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는 명성황후 제거 예정일 8월22일을 앞당겨 8월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건청궁 침입로
명성황후 거처이자 시해된 옥호루는 궁궐의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건청궁의 서편에는 고종의 침전인 장안당이,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는 그 동쪽에 있었다. 곧 이어 40~50명의 일본인 패거리들이 곤령합(坤寧閣:玉壺樓)을 에워싸고 황후 수색에 혈안이 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 된 장소가 바로 옥호루다.
1895년 (을미년) 10월8일 새벽 5시30분경..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미명에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경복궁 정문인 光化門으로 들이 닥쳤다. 일본군과 일본인 복장을 한 이 괴한들은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일행을 살해하고는 곧바로 근정전을 지나 건청궁(乾淸宮)으로 쳐들어 갔다.
한편 조선은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日軍 將校가 훈련시키던 훈련대를 해산하고, 미군장교 다이(Dye)가 훈련시킨 부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親日係인 어윤중(魚允中)과 김가진(金嘉鎭)을 면직시키는 대신 친러시아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排日政策을 더욱강화하였다.
이들은 고종의 침전(寢殿)인 곤령전(坤寧殿)에 난입,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高宗은 옷이 찢겨지는 등 수모를 당하였다.
이들 중 한 무리는 인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로 내달렸다.
"왕비 살해의 상처가 있는 옥호루라고 쓰여있는 일본의 관광엽서"
"복원된 경복궁 옥호루"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景稷)이 길을 막고 나서자 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는 高宗이 보는 앞에서 다시 칼로 무참히 베었다. 이어 왕비의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일제는 민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마져 부셔버렸다. 최근에 복원하였지만...)
궁녀 3명과 왕비 (閔妃 .. 시해사건 발생 2년 후인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됨)의 비명소리이었다.
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李拓 .. 純宗의 본명)를 통해 피살자 중 한 사람이 왕비임을 확인하고는 왕비의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鹿園 .. 人工으로 만든 山, 지금의 청와대 춘추관 자리) 솔밭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에 태워버렸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능욕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듯하다. 궁궐의 닌입에 앞서 이미 술에 만취한 그들은 칼은 맞았지만 아직 살아있는 민비를 강간하였거나 또는 시간(屍姦 ..시체 강간)도 서슴치 않았음이 분명한 듯하다.
에조보고서
2002년 폴란드전 때 공개를 했는데 조중동 어디에더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
일본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逸健太郞)은 당시 舊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있던 "이시즈카 에이조 (石塚英藏)"가 사건 직후 본국으로 보냈던 보고서 내용 ... "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명성황후의 시간 (屍姦) : 일본잡지에 실린 삽화. 한 폭도가 그 곳에 머리를 박고 있다.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죽어있는데도 계속 했다. 명성황후는 그렇게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들은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 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그리고 서민들이 다 보고있는 길거리에서 가슴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했다.
이후 명성황후의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로 태웠다."
석영총장의 원문
실제로 시해 장면을 묘사한 '에조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들은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명성황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 "(왕세자 이척의 증언) "
명성황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명성황후를 찔렀다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 웨베르 보고서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일본인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처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참담한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태는 인간 아니 국가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후안무치한 사태였고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본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전 모스크바 대학 박종효 교수가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한 문서를 찾아내어 이를 공개하였다. 그리고 2001.11월 KBS는 이를 역사스페셜을 통하여 방송함으로써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이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당시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Karl I .Waeber) 駐조선 러시아 대리공사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A4 용지 무려 3백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발생 직후 고종이 발표한 성명서, 전 대한제국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 당시 궁정경비대 부령이었던 이학균(李學均). 한 상궁.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J.Scredin Sabatine)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록, 주한 외교 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 자료 등 다각도의 정보와 증거 자료가 첨부됐다.
조선의 26대왕 이였던 고종의 비 명성황후. 한 동안 우리의 기억 저편에 있던 명성황후의 존재는 1995년 뮤지컬 명성황후 열풍을 타고 이 시대에 다시 등장한다. 매체를 통해 가깝게 느끼고는 있지만 그녀의 외모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부분은 알려진 사실이 드물다. 아직까지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외관 1883년 서양 여성으로는 최초로 명성황후를 알현한 주한 미국공사의 부인 "로즈 푸트"는 그 녀를
" 뛰어난 침착성(mastertful poise)과 언제나 무엇인가를 탐색해 내려는 듯한 눈빛(searching eyes)을 지닌 총명한 여인 "이라고 묘사하였다.
그로부터 10년 후, 명성황후를 만난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은 이렇게 썼다. " 당시 왕후는 40세가 넘은 여인으로서 몸이 가늘고 美人이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에다가 피부는 진주가루를 이용해서 창백했다. 눈은 차갑고 날카로웠는데, 그것은 그녀가 훌륭한 지성의 소유자임을 나카내 주는것이었다 "
명성황후를 御醫로서 자주 만났던 언더우드부인의 기록은 좀 더 분석적이다. " 그 분은 기민하고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가장 신랄한 그 분의 반대자도 항상 그 분의 기지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 그녀는 조선 방문기간 중 명성황후를 4차례 만났으며 그녀가 남긴"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통해 명성황후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라 전한다.
비숍여사의 글에는 황후의 외모 뿐 아니라 성품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을 한다.
외모가 아닌 성품에 대해서는 황후를 만난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먼저 영국의 "데일리 메일"지 조선특파원 맥켄지 기자는 황후를 주변사람들에게는 관대했으나 적과는 타협하지 않는 강한 여성으로 묘사를 했으며 당시 주조선 미국 서기관 이였던 윌리암 샌즈 역시 의지가 강한 시대를 앞선 한 명의 정치가로써 황후를 보았다. 또한 황후 시해사건을 지휘했던 일본인 미우라 고로 공사도 "황후는 재능이 뛰어났으며 좀처럼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간간히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황후의 모습을 추론해보면 나이에 비해 무척 젊은 피부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정치가로서의 역량 또한 무척 뛰어난 단아한 외모와 풍부한 학식을 겸비한 여인으로 생각된다.
명성황후의 일생
본명 민자영. 조선 철종당시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나 9세 때 고아가 되어 어렵게 생활을 하다 세도정치의 기반을 없애기 위해 중전을 물색하던 대원군의 눈에 띄어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이 후 총명함으로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면서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쇄국정치를 고집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의 문물개방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외국을 통해 유입이 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은 조선이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게 하는 반면 수구세력들의 불만은 늘어나고 일본상인들의 농간으로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고조된다.
결국 별기군 특별우대에 반발하여 무위영의 군사들은 난을 일으켜 민씨척족과 황후의 처형을 요구하는 사건인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다시 등장을 하게 되고 황후는 변장을 한채 피신을 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다시 정국의 중심에 대원군이 등장을 하고 큰 위협을 느낀 조정의 기득권층은 청나라 텐진에 주재하던 영선사 김윤식에게 통지를 하여 청국의 조정을 요청하였다.
청국은 종주국으로써 속장을 보호해야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기득권을 되찾으려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대원군을 납치해 청국으로 호송을 하고 다시 황후는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후 10여 년간 일본과 청나라의 각축전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나 이미 노쇄한 청나라는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명성황후탄강구리 비
을미사변의 발생
1884년 갑신정변 이후 민씨 일족은 개화당 세력을 밀어내며 사대당으로 다시 집권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1894년 일본의 강압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개혁으로 말미암아 명성황후가 세력을 잃게 되자,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형세가 나빠지매 친로책(親露策)을 써서 일본 세력을 압박하였다.
이를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1897년(대한제국 광무 1년)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책되어 남청량리에 장사하였다가, 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홍릉에 이장하였다.
을미사변의 발생당시 일본은 청. 일 전쟁에서 승리한 대가로 받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동맹군의 힘에 굴복해 다시 청에 돌려준 상태였고 조선 조정은 이같은 정세를 감지하고 배일 친러 정책을 실시하여 일본군을 조선에서 몰아내고자 하였다.
1895년의 임오군란 이후, 명성황후는 이완용, 민영환, 윤치호 등을 앞세워 親美, 親러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일제는 7월13일 이노누에(井上馨) 대신에 군국주의 군벌인 미우라(三浦)를 주한일본공사로 임명하였다
1895년 9월 일본 공사 미우라는 명성황후의 친로(親露)책과 정면충돌을 하였으며, 명성황후의 이러한 친로(親露)책은 일본을 자극하였으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대러 관계를 주도하고 있던 "여우사냥" 이라는 작전명 아래 황후의 암살계획을 수립하였다
일제는 조선에서 러시아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일이 우선이라고 판단하고 방책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미우라(三浦) 등은 대원군이 궁중을 감독관리하되, 내각에 간섭하지 않으며, 김홍집,어윤중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고, 이재면(李載冕)과 이준용(李埈鎔)을 중용할 것 등을 조건으로 대원군세력의 협조를 얻었다.
이와는 별도로 미우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한성신보사(漢城新報社)의 수십명 일본 낭인(浪人)들, 일본 수비대와 경찰관들을 하수인으로 고용하고 기타 친일파들을 포섭하였다.
훈련대의 해산으로 다급해진 미우라는 명성황후 제거 예정일 8월22일을 앞당겨 8월20일 새벽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건청궁 침입로
명성황후 거처이자 시해된 옥호루는 궁궐의 가장 깊숙한 건청궁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건청궁의 서편에는 고종의 침전인 장안당이, 황후의 침전인 옥호루는 그 동쪽에 있었다. 곧 이어 40~50명의 일본인 패거리들이 곤령합(坤寧閣:玉壺樓)을 에워싸고 황후 수색에 혈안이 되었다. 명성황후가 시해 된 장소가 바로 옥호루다.
1895년 (을미년) 10월8일 새벽 5시30분경..어둠이 채 가시지도 않은 미명에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경복궁 정문인 光化門으로 들이 닥쳤다. 일본군과 일본인 복장을 한 이 괴한들은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일행을 살해하고는 곧바로 근정전을 지나 건청궁(乾淸宮)으로 쳐들어 갔다.
한편 조선은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하는 한편, 日軍 將校가 훈련시키던 훈련대를 해산하고, 미군장교 다이(Dye)가 훈련시킨 부대를 중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親日係인 어윤중(魚允中)과 김가진(金嘉鎭)을 면직시키는 대신 친러시아계 이범진(李範晉)을 등용하는 등 排日政策을 더욱강화하였다.
이들은 고종의 침전(寢殿)인 곤령전(坤寧殿)에 난입,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高宗은 옷이 찢겨지는 등 수모를 당하였다.
이들 중 한 무리는 인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로 내달렸다.
"왕비 살해의 상처가 있는 옥호루라고 쓰여있는 일본의 관광엽서"
"복원된 경복궁 옥호루"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景稷)이 길을 막고 나서자 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는 高宗이 보는 앞에서 다시 칼로 무참히 베었다. 이어 왕비의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일제는 민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마져 부셔버렸다. 최근에 복원하였지만...)
궁녀 3명과 왕비 (閔妃 .. 시해사건 발생 2년 후인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됨)의 비명소리이었다.
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李拓 .. 純宗의 본명)를 통해 피살자 중 한 사람이 왕비임을 확인하고는 왕비의 시신을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鹿園 .. 人工으로 만든 山, 지금의 청와대 춘추관 자리) 솔밭에서 석유를 뿌리고 불에 태워버렸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아 능욕이라는 표현도 부족한 듯하다. 궁궐의 닌입에 앞서 이미 술에 만취한 그들은 칼은 맞았지만 아직 살아있는 민비를 강간하였거나 또는 시간(屍姦 ..시체 강간)도 서슴치 않았음이 분명한 듯하다.
에조보고서
2002년 폴란드전 때 공개를 했는데 조중동 어디에더 기사는 실리지 않았다.
일본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逸健太郞)은 당시 舊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있던 "이시즈카 에이조 (石塚英藏)"가 사건 직후 본국으로 보냈던 보고서 내용 ... "
먼저 낭인들이 20명 정도 궁에 쳐들어와서 고종을 무릎 꿇게 만들고 이를 말리는 세자의 상투를 잡아 올려서 벽에다 던져 버리고 발로 짓밟았다.
명성황후의 시간 (屍姦) : 일본잡지에 실린 삽화. 한 폭도가 그 곳에 머리를 박고 있다.
명성황후를 발견하자 옆구리 두 쪽과 배에 칼을 꽂은 후 시녀들의 가슴을 다 도려내고 명성황후의 아랫도리를 벗겼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20명이 강간을 했다. (살아있을 때도 하고 죽어있는데도 계속 했다. 명성황후는 그렇게 시간과 윤간을 다 당했다. 그것을 뜯어 말리는 충신들은 사지를 다 잘라버렸다.)
이렇게 너덜너덜해진 황후의 시체에 얼굴부터 발 끝까지 차례대로 한 명씩 칼로 쑤셨다. 그리고 서민들이 다 보고있는 길거리에서 가슴을 도려내는 큰 수치를 당했다.
이후 명성황후의 시체에 기름을 붓고 불로 태웠다."
석영총장의 원문
실제로 시해 장면을 묘사한 '에조 보고서'를 뒷받침하는 증언과 자료들은 많다.
일본인 흉한들은 명성황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 "(왕세자 이척의 증언) "
명성황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 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명성황후를 찔렀다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 웨베르 보고서 1895년 을미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을 난입한 일본인들은 조선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강간한 후 처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참담한 만행을 저지른다. 이 사태는 인간 아니 국가로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후안무치한 사태였고 비열한 3류 사무라이 나라 일본이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전 모스크바 대학 박종효 교수가 1995년 러시아 외무부 문서보관소 소속 제정러시아 대외정책국에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기록하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보고한 문서를 찾아내어 이를 공개하였다. 그리고 2001.11월 KBS는 이를 역사스페셜을 통하여 방송함으로써 명성황후 시해사건 전말이 낱낱이 밝혀지게 되었다.
이 문서는 당시 카를 이바노비치 웨베르(Karl I .Waeber) 駐조선 러시아 대리공사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A4 용지 무려 3백 장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이 보고서에는 사건 발생 직후 고종이 발표한 성명서, 전 대한제국 러시아 공사 이범진(李範晉). 당시 궁정경비대 부령이었던 이학균(李學均). 한 상궁.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 세르진 사바틴(A.J.Scredin Sabatine) 등 당시 궁내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록, 주한 외교 공사들의 회의록과 당시 신문 자료 등 다각도의 정보와 증거 자료가 첨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