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
소화기내과 전문의로서 내과의원을 운영하는 K원장에게 어느 날 55세의 남자인 J씨가 찾아왔다. J씨는 지난 3개월 동안 상복부 통증과 속쓰림, 잦은 설사 등으로 고생하였으며 약국에서 소화제를 사 먹어도 차도가 없다며 내원한 것이다. 신체검사에서 별다른 소견은 나타나지 않았고 다만 3kg정도의 체중 감소가 있었는데 J씨는 식사를 제대로 못하고 소화를 못 시켰기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J씨는 최근 들어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술을 먹었고 한번 먹을 때마다 소주 두 병 이상을마시고 있었다. K원장은 J씨에게 위궤양 혹은 위암이 있을지 모르니 위장내시경을 받아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J씨는 “그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부모님도 다 건강히 살아계신다. 요즘 스트레스를 받아 속이 좀 쓰릴 뿐이니 좋은 약을 지어주면 먹고생각해 보겠다.”고 하였다. K원장은 내시경 시술이 그리 고통스럽지도 않고 한번 해 보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텐데 무엇 때문에 병을 키우냐며 재차 내시경을 받아볼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자 J씨는 화를 내며 “내 몸은 내가 잘 아는데, 당신이 돈을 벌어볼 요량으로 그러는 게 아니냐, 약을 지어주기 싫으면 마음대로 하라. 괜히 암이라는 말로 사람 겁주고 그러는데 의사라고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다른 병원가면 될 게 아니냐”며 더 이상의 진료를 거부하고 나가버렸다.
<윤리적 고찰>
흔히 환자에게는 진료 거부권이 인정된다. 그 취지는 환자는 자신에게 제공되는 진료의 이익과 해악을 판단할 능력이 있고, 무엇이 자신에게 최선의 선택인지 자신의 가치관에 비추어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충분히 숙고된 자율적인 판단에 의한 환자의 진료 거부는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위 사례의 경우, 환자 J씨의 진료 거부는 자신의 상황에대해 충분히 고려한 후 내려진 자율적인 판단에 의한 거부라고 보기 어렵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환자는 위장내시경을 받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못하고 있다. 담당 의사는 위궤양 및 위암의 가능성 때문에 정확한 진단을위해 위장내시경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환자는 이러한 조언을 불필요한 검사를 한다고 속단하였고, 암을 운운하며 겁을 주어 검사를 받게 하려 한다고 오해하고 있다.
둘째, 환자는 자신의 검사 거부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신중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진료를 거부하고 나가버렸다”라는 것이 담당 의사로부터 더이상의 설명을 거부한 채 자리를 박차고 나간 것이라면, 이것이 무례한 행동임은 말할 것도 없고, 검사를 거부하는 환자의 판단은 결코 충분한 정보에 근거한 자율적인 판단이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자율적인 판단은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 판단이 즉흥적이지 않은 숙고된 판단이며, 충분한 정보에 근거하여 내려진 신중한 판단이라고 생각하기때문이다.
자율적인 판단이란 단지 문자상의 의미로는 ‘강압되지 않고 자율적으로이루어진 판단’을 의미한다.
그러나 생명의료윤리에서 존중되어야 한다고말하는 자율적 판단이란 단지 형식적으로 강압되지 않은 판단을 의미한다기보다 ‘신중하게 관련 사항을 충분히 숙고한 후 내려진 자율적인 판단’을의미한다. 따라서 일단 자신의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었어야하고, 환자를 이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삶의 가치관과 자신이 처한 총체적인 상황에 대해 숙고했어야 하며, 그 결정 과정에 외부로부터 어떤 강압없이 내려진 판단이어야 한다.이런 점에서 자율적인 판단을 내리는 전제조건으로서 담당 의사로부터충분한 설명을 듣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위 사례에서 담당 의사가 제시한 설명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첫째, 위장내시경을 조언하는 일에 있어 어떤 근거로 위장내시경을 받아보길 원하는지충분히 설명했는지가 의문이다. 정확한 검사를 위해 위장내시경을 받아보자는 첫 번째 조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좀더 상세한 근거를 설명하여야 했다. 그래서 환자에게 의사로서의 자신의 결정이 환자의 건강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진지한 판단임을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 소화제만으로 증상이 호전되지 않았고, 체중에 큰 변화가 있는 것은 단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만이 아닐 수 있음을 설명하고, 이런 경우 정밀 진단이필요함을 강조하면 좋았을 것이다. 또한 “신체검사에서는 별다른 소견이나타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 신체검사가 어떤 종류의 신체검사인지 명확하지 않아 정황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긴 하지만, 적어도 담당 의사는 신체검사에서 무엇을 검사했는지 그리고 그런 종류의 신체검사로는 확인되지 않는 예상 질병이 무엇인지 등을 설명해 주었다면 환자의 안이한 정황 이해를 교정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담당 의사는 위장내시경 검사가 단지 “그리 고통스럽지 않다”고만설명할 것이 아니라 위장내시경 검사는 어떤 검사인지 무엇을 확인할 수있으며 소요되는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비용은 어느 정도 드는지 설명할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위장 내시경을 받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떤 다른 검사 방법으로 진단할 수 있으며, 그 장 · 단점이 무엇인지 말해 주었다면 환자로부터 오해를 받지 않았을 것이다.
셋째, 만약 이런 설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환자가 권고를 받아들이지않는다면 그리고 위장 내시경 외에는 정확한 검사를 위한 다른 방법이 없다면 담당 의사는 환자가 과연 판단능력을 지닌 사람인지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 담당 의사의 권고를 이해할 만한 보호자를 대동하도록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위장 내시경 검사는 일단 미루고 증상치료를 위한 처지를 한 후 다음에 내원할 때는 환자뿐만 아니라 보호자와함께 상의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물론 이러한 상세한 설명이 진료 현장에서 얼마만큼 가능할지 회의적인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환자의 건강을 돌보는 의사의 본분을 생각해 볼 때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의사소통은 아주 중요하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의사의 지시를 존중하지만 위 사례에서처럼 항상 지시를 존중하는 것은아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경우 의사는 특별히 자신이 내릴 의료적 판단이 환자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원활한 의사소통 능력도 좋은 의사가 갖추어야 할 능력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좋은 의사는단지 병만 잘 고치는 의사가 아니라 환자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정확하게잘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의사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의사가 환자에게 자신의 판단을 설명할 때, 그 추론과정이 드러나게 할 필요가 있다. 투명한 모델(transparent model)이라고 불리는 이 모델은 환자가 의사의 추론과정을 여과 없이 빤히 볼 수 있도록 하여 담당의사의 의료적 결정에 환자가 함께 참여하게 하는 장점이 있다. 물론 모든환자에게 이 모델을 적용하는 것은 한국의 진료 현실상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위 사례에서와 같이 특별한 경우 그리고 환자의 상태가 심각한 경우 내려지는 의료적 판단은 이 모델을 적용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면서 환자가 검사를 받도록 해야 하는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환자의 자율적인 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주어져야 하기에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에 근거한 원활한 의사소통은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법률적 고찰>
환자의 진료거부는 기본적으로 환자의 권리이다. K원장의 내시경 시술은 J씨의 신체를 침습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그 시술을 받을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J씨의 승낙이 필요하다, 이렇게 시술에 대하여 환자가 자신의 질병에 대하여 치료를 받을 것인지, 치료를 받는다면 어느 정도를 받을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환자의 자기결정권’ 이라 한다.
그리고 환자의 자기결정권의 행사는 의사의 충분한 정보제공 또는 설명이 있을 것을 전제로 한다. 대법원은 의사의 설명의무와 설명의 정도에 대하여 ‘환자 본인 또는 그 법정대리인에게 그 질병의 증상, 치료방법의 내용 및 필요성, 발생이 예상되는 위험 등에 관하여 당시의 의료수준에 비추어 상당하다고 생각되는 사항을 설명하여 그 환자가 필요성이나 위험성을 충분히 비교하여 그 의료행위를 받을 것인가의 여부를 선택할 수 있도록…’ 이라고 판시하고 있다.(대법원 2002.10.25.선고 2002다48443 판결 등)
이 사례는 어떤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다. 속이 쓰리다는 증상을 호소해 온 J씨에게 K원장이 제시한 내시경 시술은 전문적인의료 지식을 가진 의사로써 권유할 수 있는 시술방법으로 보인다. 다만 사례에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혹시 K원장이 내시경 시술을 해야 하는 이유와 그 부작용 등에 대해 J씨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아 J씨가 오해하여 진료를 거부하였고 그로 인해 J씨에게 손해가 발생하였다면, K원장이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 대법원은 ‘환자 측에서 선택의 기회를 잃고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 데 대한 위자료만을 청구하는 경우에는 의사의 설명 결여 내지 부족으로 선택의 기회를 상실하였다는 사실만을 입증함으로써 족하다’.고 판시하고 있다.(위 판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