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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특집
이승훈 박영교 최명길 이재무 이승하 최 준 김상미
박완호 함기석 김종미 김혜영 이귀영 김미정 한상규
김문주 류현승 이현호 이희원
14
신작특집 2014·봄
삶은 무엇이고 시는 무엇인가? 외 1편
이 승 훈
언제나 사는 건 벼랑이었고 그래서 시를 썼다. 하지만 이 벼랑, 산다는 것,
시를 쓴다는 것에서 손을 놓고 싶다. 원래 벼랑 끝에서 손을 놓아라 이른바 현애살수懸涯撒手는 선어禪語다. 절벽에서 잡고 있는 손을 놓으라는 말. 선사들은 손을 놓을 때 다시 산다. 그러므로 나같은 떠돌이 시인, 자폐증에 시달리는
늙은 교수, 3류 선객은 이런 말을 하면 안 된다. 이 말이 강조하는 것은 깨달은
다음 깨달았다는 생각도 버려야 한다는 것. 그러나 나는 깨닫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깨달음에 집착한 것도 없고 그런 건 모른다. 다만 그동안 살아온 인생이 벼랑이었고 그래서 시를 썼지만 이젠 시에서도 손을 놓고 싶다는 것. 물론 손을 놓는다는 생각도 놓고 싶다. 삶은 무엇이고 시는 무엇인가?
poetry & world
신작특집 15
나는 이렇게 산다
1
그저 왔다 갔다 할 뿐이다.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저 방에서 이 방으로 하루에도 수백 번 왔다 갔
다 하지만 무얼 들고 간 것도 아니고 무얼 놓고
온 것도 아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그저 이
방 저 방 왔다 갔다 하네. 기침을 하면서!
2
“스님. 저 왔습니다.” 말하고 엎드려 인사를 드린다.
“한번만 해요. 이 교수. 한번이면 돼.”
방이 넓고 좋다. 옛날 쓰시던 방은 작고 조금 답답했다. 그러나 이번 방은 넓고 시원하고 창 너머 시냇물도 보이고 나무들도 보이고 국도로 지나가는 차들도 보인다.
“스님. 방이 넓고 좋습니다.”
“저 시냇물도 나무들도 지나가는 차들도 모두 나를 위해 있습니다. 그런데
중들은 큰 방이 필요 없어요. 아니 큰방이 작은 방이야. 그런데 이 교수 앞에선
말을 하면 안 되지. 이 교수는 내 말을 모두 시로 쓰거든 하하.” 오랜만에 찾아간 만해마을 오현 스님이 웃으신다.
196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상소문上疏文·1 외 1편
박 영 교
옛날부터 민심은 천심이라 했는데
정치인들은 늘 민심을 업고 살아갑니다.
사상 처음 열리는 국회, 백성의 대변인들이 「국민들 보는 앞에서」라는 말을
자주하는 것을 봅니다. 백성들 위에 서지도 말고, 불리 할 때만 백성을 앞세우지도 말며, 뒤에서 조종하지도 말 것이며, 백성을 선동, 우롱 하지도 말 것입니다.
아침 해
밝게 떠오르듯 그렇게 받드는 믿음으로
흐르는 한줄기 깊은 江물이어야 합니다.
상소문上疏文·2
올 겨울 크리스마스 전날에도 아직
자선냄비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양로원, 보육원 등에도 불우 이웃 돕는 따뜻한 손길은점점 싸늘한 바람뿐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전만해도 따뜻한 손길들과 훈훈한 입김들이 모이고 모여서 우리 이웃들은 추위를 모르는 한 해를 견뎌내곤 하였는데, 청문회의 쌀쌀한 바람을 맛보고는 성금들이 다른 곳으로 걸어갔나 봐요. 만백성이
낸 성금도 발이 달려서 뿔뿔이 다 걸어가고 없는 텅 빈 이 마당에 이젠 황금을
들고 황금이라 해도 곧이듣지 않는 겨울시대가 되었나봐요.
한겨울
상처가 아무는 날은 언제
아문 상처 위에 진실이 싹트는 날은 언제일까요.
197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몽동완피달 외 1편
최 명 길
‘몽동완피달’이라는 말을
한참 입 안에 넣어 굴리다보면 그게 꼭
나를 이르는 말인 듯하다.
이 몽동완피달아, 너는 정말
멍텅구리로 세상을 살았다.
약삭빠르지도 뛰어나지도 못하고,
남의 말에 솔깃하고
남의 그림자만 좇다만 형국
정말이지 너는 안타까운 멍텅구리였다.
젊어서는 그래도 포동했으나
어쩌다가 거울에 얼핏 나타난 얼굴을 보면
주름투성이 몰골
안골에 비쩍 마른 가죽만 씌워있구나
웃통을 벗고 보면
견갑골은 앙상해 삭다리 같고
흉골은 툭툭 불거졌다.
이런 내가 안쓰럽지만
세월이 깎아놓아 그런 걸 난들 어쩌겠는가
다만 그 안에서 조촐한 시나
가끔 튀어나온다면 좀 좋을까마는
그 일을 하는 자 오직 천지일 뿐이어니,
어찌 내 마음대로랴
완피달아, 이 몽동완피달아
쭈글쭈글 못난이야
* 심차몽동완피달深嗟.憧頑皮.: 일숙각 영가 현각(647-713) 선사의 『증도가』중 일구.
‘멍텅구리 비쩍 마른 가죽과 같음을 슬퍼하노라.’
나를 내던졌다
화조대 바위 벼랑 끝에
별 일 없이 나가 앉았다가
나는 나를 내던졌다.
까무르르룩 하고 바닷새가 내뱉는
그 드맑은 소리가
나를 관통해 지나가는 순간
내가 사라지고
벼랑에는 바위벽을 치는
파도소리만 남아 으르렁댔다.
파도 잎사귀 펄럭임만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빙어 외 1편
이 재 무
속 환히 들킨 채 사는 물고기. 몸피 작아 적게 먹으니 크게 감출 것도 꿍꿍이도 없는 투명 찬란한 물고기. 얼음 천장 아래 유유상종 동족 더불어 가만, 가만히 들숨날숨 쉬며 바깥 소란에 아랑곳없이 살아가는 키 작은 물고기.
해마다 겨울이 오면 도시에서 몰려온 천렵꾼들 주전부리로 떼죽음 당하는
눈 먼 물고기.
소뼈다귀
소처럼 가련한 가축이 있을까?
살아서는 노동력을 바쳐야 한다
죽어서는 부위별로 팔려나간다
그 중 뼈다귀는 세 번 네 번 우려지기까지 한다
가죽은 북이 되어 매질을 당하거나
구두가 되어 다시 노동을 살아야 한다
세상천지에 이같이 불쌍한 존재가 또 있을까?
있다! 묻혀서도 걸핏하면 불려나와
부관참시 당하는 사람
그는 소 뼈다귀인가?
1983년 무크지 『삶의문학』으로 등단
아침의 역사 외 1편
―2011년 12월 14일 아침에
이 승 하
날이 밝았을 때, 광주도청 앞 여기저기 핏물이 고여 있었지만
거리엔 침묵만이 흐르고 있었다
날이 밝았을 때, 천안문광장 여기저기 핏물이 고여 있었지만
시체는 다 치워지고 없었다
출근길 정부과천청사역을 지날 때마다 외침이 들린다
“코오롱은 정리해고 기업입니다.
코오롱스포츠 제품을 사지 말아 주십시오.”
복직하려면 회사가 잘되어야 할 텐데……
코오롱스포츠사의 따뜻한 고어자켓, 점프, 패딩……
낙엽이 하늘로 날아가는 본사빌딩 앞
숟가락 들 힘이 없는 자들에게 기운을
변두리 끝 쪽방으로 내몰린 자들에게 음식을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에게 안식을
힘없는 자들을 위하여
내몰린 자들을 위하여
병 깊은 자들을 위하여
죽어야 했던 이들
완전한 암흑천지에서 아침을 꿈꾸었던 이들
스스로 빛이 되고자 했던 이들
동이 터 오는 시각에야
숨이 끊겨 가는 그 순간에야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람의 외침을 듣는다
사유의 자유를 위하여
평화와 평등을 위하여
1000번째 수요시위* 현장에서 사람들이 아침부터 외친다
아침의 역사를 쓰고자, 쓰겠다고
* 수요시위의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이다. 대한민국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에 열린다. 1992년 1월에 시작된 이래 500회가 된
2002년 3월, 단일 주제로 개최된 집회로는 세계 최장기간 집회로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고 이 기록은 매주 경신되었다. 2011년 12월 14일, 1000번째 수요시위가 있었다.
이별가
내가 사랑했다
그대 목젖을 울리며 나오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은밀한 곳 주변에 소복이 돋아나 있는
음모 하나 하나를 사랑했다
그 귀여운 것들을
어느 날부터
머리카락이 하나씩 둘씩 흰색으로 바뀌어 갔지
피부는 탄력을 잃어 갔지
그대 느닷없는 웃음도 한참 동안의 울음도
기발한 농담도 기어드는 한숨도
하품도 재채기도 마른기침까지도
다 사랑했었다 정인이여
얼굴이 점점 거무스레해질 때
호흡이 불규칙하게 이어질 때
나 오직 한 가지 얼굴만 떠올렸다
그대 배 위에서 내려다보았던
수줍음 가득한 홍조 띤 얼굴을
오르가슴 직전의 그 얼굴을
내가 사랑했었다 눈뜬 채
이제 막 숨 멎은 그대여
고개를 외로 튼 그대여
지금부터 이 세상은 대낮에도 암흑이다
그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이렇게 살아 있다 사지 멀쩡하게
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김치를 와작와작 씹으며
1984년 『중앙일보』로 등단
다음날 외 1편
최 준
눈이 내려도 바깥은 여전히 살아 있는 자들만의 우주일까
양파의 흰 뿌리가 남녘 바닷가에서 자라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은 붉은 흙보다
지난여름 물빛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수면 아래서 남몰래 둥글어지는 것들에 대해
한순간 진지해지기도 하겠지만
당신과 내가 구름이라 이름 부르는
늙은 고래의 희망은 여전히 허공에 있다
이 순간에도 그는 온몸으로 파도를 다림질해
자신의 거대 육체가 소멸할 시간을 염탐하고 있는 중
하지만 때로 길은 꿈과 내통하지 않기도 하는 것이어서
모든 게 비밀인 채 문득 걸음 멈추는 시계가 있다
심장이 멎지 않는 한
그 박동은 십이월의 창문 너머로 뛰쳐나간다
작년의 그 길로, 마치 처음이라는 듯이
그러면 당신은 양파와 태양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겠지만
건너와 탈주에 익숙해진 바람처럼
지상의 육체들이나 맘껏 탐닉하다 떠나겠지만
해마다 거듭해 온 이 진부한 숨바꼭질은
간밤에 눈이 내렸기에 가능한 놀이였다
사라진 길 위에서 태어난 눈알들이
오늘의 당신을 일제히 외면하고 있다
오래된 의문
어제를 벗어버린 오늘 나무
어제의 나무가 걷던 길
어제의 나무를 없앤 그 길로 걸어갔던
어디에도 없는 발자국
구름은 굴러 다른 하늘로 가고
허공은 하나가 아니라고
다른 하늘로 떠오른 태양
오늘 나무는 어제의 나무가 아니라며
갈아 끼운 무릎으로 다시 걸어가는
어제의 길
나무는 오늘 온종일 어디에 있었나
어제처럼 저녁의 끝에서 다들 되돌아오는데
어제의 나무는 오늘 나무가 아니고
어제는 오늘이 아닌데
노을이 차려놓은 오늘의 밥상을
어제의 숟갈로 떠먹는 오늘 나무
그런데
나무는 왜 자꾸 나무를 두리번거리나
어제의 먹구름은 오늘 겨울
하늘 지붕 너머로 날아가고 싶은데
마른 눈물은 왜 오늘을 눈 내리는가
눈물을 식탁 위에 자꾸 소금 뿌려대는가
발목 없는 길 위에서 나무는 어제의 나무와
언제 헤어지려는가
오늘 나무는 어제의 나무가 아닌데
나무는 왜 영원히 나무만을 숨 쉬며 살아야 하는가
198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만선의 축복 외 1편
김 상 미
멀리 나갔던 배들이 돌아온다
죽을힘을 다해 건져 올린 바다의 은총을 가득 싣고서
어촌은 순간, 활기로 분주해지고
어부들은 제 몸에 달라붙은 소금기 밴 비늘들을 털어내며
활짝 열린 육지의 문으로 들어선다
몇날 며칠을 숨죽이며 집에서 기다린 가족들은
화창한 주말 날씨처럼 그들을 꽉꽉 껴안으며
외롭고 지친 영혼의 소독제
아낌없는 사랑을 온몸에 고루고루 발라준다
자, 이제는 모두가 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둘러앉은 가난하지만 풍성한 식탁
세상이 아름다운 건 이런 날 때문이다
있어야 할 자리에 모든 게 그대로 갖춰져 있는
이런 날은 달이 아무리 밝아도
만선의 기쁨으로 돌아온 어부의 행복을 따를 수 없고
맘껏 죽음에 열려 있던 망망대해를 건너 돌아온
가장의 평온보다 더 밝지는 않다
한 집 두 집… 불이 꺼지고
깊어가는 어촌의 밤
이런 날 밤은 매일매일 해안을 갉아먹던 파도소리도
정다운 휘파람 소리가 되어
또다시 먼 바다로 나가야 할 어부의 깊은 잠속에
지구의 다른 쪽 바닷가 무수한 물고기 떼들을 불러 모아
꿈속에서도 껄껄 웃는 어부들의 무한한 자부심
만선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게 해 준다
노랑나비 한 마리
나를 사지로 몰아붙인 누군가가 말했다
나다워지고 싶어 그랬다고
그럼 여태껏 내게 보여준 건 다른 사람이었나
아님 또 다시 다른 사람이 되겠다는 건가
도저히 알 수 없는 개개인의 속마음들
이제는 더 이상 고슴도치 같은 그 패러디에 속지 말자 흔들리지 말자
본래 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것보다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게 더 슬픈 법이고
눈을 감고 싸워도 눈을 뜨고 싸워도
어차피 모든 싸움의 결과는 다 똑같아지는 법
이제는 작고 사소한 오해도 황당한 뒤집기 게임도
내 취향과는 먼 구경거리
내일은 이래저래 얼룩으로 범벅 된 내 셔츠나 햇볕에 말려
멋지게 다림질이나 해두자
내 방에 가득 찬 얼굴들만 해도 음산한 협곡 같은데
나다워지고 싶어 그랬다니
자신들이 무슨 요술기념동전인 줄 아나 뒤집으면 감쪽같이 달라지는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독일에서도 느꼈고
스페인, 파리, 몽골에서도 느꼈고
저 먼 라스코 동굴 벽화에 그려진 인간에게서도 느꼈는데
결국은 겁이 나 자기 자신에게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할 거면서
나다워지고 싶어 그랬다니
소크라테스가 깜짝 놀라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겠다
늙은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혼자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럼 그동안 나답게만 살아온 나는 무언가
나도 나를 수정해야 하나
끝없는 수정 또한 끝없는 인생의 낭비일 터
뭣 하러 그런 마조히즘적 헛고생을
가만히 있어도 하루에 수십 개의 머리카락들이 빠져나가는데
차라리 그 시간에 아무리 나를 부식시켜도 기분 좋은
멋진 태양과 끝없는 모래알로 눈부신 바닷길이나 걷자
어차피 나는 누구의 구미에도 맞지 않고 맞추지도 못하는
길 잃은 이 시대의 슬픈 문학적 나비 떼 중의 한 마리 나비
모두가 나를 힘껏 사지로 몰아가고 또 몰아붙여도
언제나 나를 기다려줄 어여쁜 내 장미 꽃잎에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키스는 해주고 날아가야지
오랜만에 세계의 뒤뜰에서 훨훨 날아오르는
저 자유로운 노랑나비 한 마리처럼
1990년 『작가세계』로 등단
뚝방 전설 외 1편
박 완 호
휘청거리는 만삭의 달빛, 엄마 마중 나간 열다섯 順이는 물비린내 나는 개울가에서 억지로 꽃봉오리를 열었다 스물 몇 살 낯선 사내는 비릿한 술 냄새를 풍기며 그 애를 안고 풀숲 속으로 지워졌다 이듬해 읍내에서 마주친 順이와 나는 반쯤 피다 만 웃음을 지으며 서로를 비껴갔다 등 뒤에서 젖먹이의 울음소리가 깜박였다
이건 좀 다른 이야기, 우리 마을보다 두 배쯤 되는 옆 마을 애들과 뚝방에서
패싸움을 벌이던 밤, 民이네 사랑방에 숨어든 우리는 동이 틀 때까지 숨소리를 죽이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담장을 끼고 도는 발자국소리가 날 때마다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덜컥, 벼락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열다섯 까까머리들의 심장 소리가 밤새 들창을 울려대던 그날이었을까 내
친구 順이는 뚝방 아래를 흐르는 물소리가 삼켜버린 짧은 비명소리를 놓치고는 서둘러 엄마가 되었다 서울 어디서 식모살이를 한다던 淑이의 소식이 들려온 것도 그맘때였다
급소
나는 급소가 너무 많다
감추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하나씩 늘어난다
툭하면 자리가 바뀌는 탓에
어디가 급소인지 깜빡할 때도 있다
아까도 한방 제대로 맞았지만
어제의 급소는 말짱한 대신
난데없는 헛손질이 그만
오늘의 급소를 건드렸다
바로 거길 가려야 해
가장 치명적인 곳, 하지만
벼락은 늘 낯선 자리에 와 꽂힌다
오래 전 내 급소는 엄마였다
엄마란 말만 들어도 죽고 싶었던,
죽는 게 꿈이었던 날들
엄마를 지나 아버지를 지나 또 누구누구를 지나
자꾸 급소가 바뀌어간다
이제는 급소가 너무 많아
눈을 씻고 봐도 안 보이는,
아무데도 없는 것들 때문에 아파질 때가 있다 지금은
얼굴 없는 당신이 가장 치명적인 급소이다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기호부대 병사들 야간 행군 일지 외 1편
함 기 석
18시다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얼굴에 위장크림을 칠한 부대원들이 연병장에
도열해 있다 얼룩무늬 제복의 포뮬라(Formula) 대위가 단상에 서서 확인한다
연결기호팀 병사 넷(→ ↔ ∨ ∧), 양화기호팀 병사 둘(∀∃), 보조기호팀 병사
둘 (( )), 술어기호팀 병사 둘(= ∈ ), 변항기호팀 병사 셋( x y z ), 13인의 철모
쓴 병사들이 완전군장 차림으로 집합해 있다
22시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돼지축사 지나 행군은 야음의 들로 이어진다 나는 φ이고 죽음은 ψ이다 계급은 하사, 유일한 여군의무병이다 행군은 이제 정식으로 강행된다 x=y 또는 x∈y 는 걷고 있는 정식이다.
(φ→ψ), (φ↔ψ), (φ∧ψ), (φ∨ψ)도 모두 숨 쉬는 정식이다
∃xφ는 불안한 눈동자를 가졌고 ∀z(x =y→(z ∈x →z ∈y))는 창백한 얼굴로
웃고 있다 회전하며 내 몸을 뚫는 비
25시다 폭우가 둑을 넘어 침공한다 검은 물이 뱀처럼 꿈틀꿈틀 행렬을 습격한다 대열을 이탈하는 소수 부대원들, 대위는 즉시 자유를 박탈한다 그들을 랜덤 규합하여 명제 또는 문장(sentence)을 만든다 죽음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x∀y∀z(x=y→(z ∈x →z ∈y))는 곧 차고 아픈 손이 달린 문장이 된다 부상자가 속출한다 나는 점점 다리가 아프다 혼미해진다 꿈일까
30시다 비가 그친다 동공이 갈라진 하늘에서 폐사한 물고기들이 쏟아져 내륙의 도시로 떠간다 시간도 말도 아침도 떠가는 정식이다 계급 없는 병사들, 혀
잘린 짐승의 비애를 뼈에 숨긴다 ((φ∧ψ)→φ), (φ→(φ∨ψ)), (φ→((φ→
ψ)→ψ))도 논리적 공리다 홍콩 여배우 공리의 울음 빛깔 뒤태를 숨긴다 하늘의 폐에서 가는 금속 햇살들이 쏟아진다 빛이 떨면서 차고 흰 풍경소리 울린다
플랫 랜드
정오가 되자 태양이 정지된다.
오늘의 날씨는 내각의 합 180 외각의 합 360
백색왕국 칠각형 지하묘지에서 일곱 알파벳 난쟁이들이
똑같은 행위를 반복, 반복, 반복한다.
(H) 달이 음각된 컴퍼스로 선왕들의 시신을 옮긴다.
7도 7도 7도 반시계방향으로 다시 7도 7도 7도
(I) 3각형 4각형 5각형 6각형 7각형… n각형을 작도한다.
무한개의 각을 무한히 그려 원(O)에 근접해간다
(S) 평평한 우주, 평평한 지구, 평평한 무덤을 제조한다.
일곱 번의 전쟁 일곱 번의 폭동 일곱 번의 대학살
(T) 미라가 된 여인에게 장미 꽃다발을 전하며 말한다.
불멸은 싫어 불멸은 환멸이야 당신과 이혼하고 싶어
(O) 파란 가발을 뒤집어쓴 램프에게 연인처럼 말한다.
내 눈을 태워줘 내 혀 내 음악 내 악몽도 다 태워줘
(R) 108도로 제한된 뿔각 그네를 타며 왕복 운동한다.
앞이다 뒤다 어제다 내일이다 다 죽었다 다 죽는다.
(Y) 온몸에 검은 수식을 문신한 대리석 개가 명령한다.
모두 앉아! 일어서! 열중 쉬어! 차려! 모여! 흩어져!
태양이 눈동자부터 녹아내리는 정오다.
백색왕국 지하묘지에서 죽음을 박탈당한 일곱의 묘지기들이
똑같은 행위를 무한히 반복, 반복, 반복한다.
1992년 『작가세계』로 등단
몽상가들 외 1편
김 종 미
새파란 가스 불 위로
끓고 있는 붉은 찌개 위로
찌개국물을 길어 올린 스텐 숟가락 위로
천천히 다가가는 입술
간이 맞나, 맛보기 위해
어쩌다가 내 혀는 간보기에 길들여졌을까
어쩌다가 내 손은 요리하기에 길들여졌을까
간이 필요 없을 때가 있었다
불이 필요 없을 때가 있었다
잡아 올린 거대한 바다표범의 뱃살을
즉석에서 베어 먹는 에스키모인의
야성은 사자처럼 아름답다
바다표범을 바다표범답게 먹어주는 경배
경배가 없는 요리는 잔혹하게 진화하고
야성을 버린 인간은 플라스틱처럼
몽상적이다
고립
백년만의 폭설은
몇 개의 밤과 몇 개의 낮을 통해 기록되었다
강원도 첩첩산골 눈에 파묻힌 집이 티브이에 나왔다
고립된 집의 고립이
전격적으로 전면에 떴다
도시 한복판에서
고독사한 노인의 죽음처럼
육 개월만인가 일 년만인가 발굴된
하얀 두개골만 남은
저 노인은 누굴까 잠시
노인의 이력을 찾아 돋보기를 꺼내다가
고립된 지구를 발굴하기 위해
인공위성을 쏘다가
잠에서 깨어나면
왜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거지?
봄이 와도 세월은 녹지 않고
헬리콥터가 뜨고
카메라 플레시가 번쩍여도 알 수 없네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꽃들의 복음 외 1편
김 혜 영
A
(불가능한 혁명은 꿈꾸지 않는다)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불가능한 혁명도 이룰 수 있어)
그렇게 말해야 돼
나무들이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의 소망을 충족시키는 기계가 아니야
(나는 순종하는 기계가 아니야)
그리고 아름다운 거절
(이상한 부탁을 하는 전화, 검은 복면의 무사처럼)
(욕망이 저울의 추를 쥐고 있어)
(절망도 꽃이 되는가)
(눈 내리는 들판에 발자국을 남긴다)
천사의 날개도 꺾이는 순간이 있지
천사가 질투한 것은
변덕스러운 연인의 눈빛이었지
(투명한 까마귀가 병 속에 있다)
기원
(아내의 잔소리에 강박적으로 도망가는 남자)
(이제는 붉은 노을이 되었지)
(쭉 늘어진 입술과 귓불이 씰룩씰룩)
얼마나 먼 곳에서 온 얼굴인가
남자의 기원을 알 수 없다
벌레였는지 노예였는지 왕이었는지
(불멸의 문장도 망각되리라, 죽음이 입맞춤하는 순간에)
문자에 의지하지 않는 종족에게
복음이 전수되었지
고요한 침묵이었고 폭력이었지
無心
(니 쪼대로 살아라!)
꽃들은 편안하다
(포기하지 마)
꽃들은 언제나 등 뒤에 꽂혀 있다
절벽 끝에서 초원으로 가는 …… 無心
만년필
검은 잉크가 지나간다
검은 발자국 뒤에 남은 얼굴
쓴다는 것은
구석기 시대의 돌칼로
항아리에 빗살무늬 문양을 긋는 것
종이에 물결무늬를 그리는 것
얼굴은 언어의 집
검은 잉크가 남긴 상형문자
붉디붉은 자두가
후우, 입김을 불어 커다란 물방울을 분다
거품의 살갗에 떠오른 무지개
검은 잉크가 걸어온다
검은 신발을 신은 목소리가 초록으로 불탄다
1997년 『현대시』로 등단
누구의 누구의 누구의 100% 아는 사람 외 1편
―칼라일
이 귀 영
지하에 서있는 앉아있는 비슷한 하품 비슷한 피곤
누군가의 누군가의 누구
북촌-남촌-태평양-대서양-파도에든-언덕에든
밤 맞는 어깨 비 맞는 어깨 비슷한
백야 춤추는 사람 달리는 사람
검은 영안실 사람 영화관 사람
환승하고 환승하고 환승을 기다리는 그림자
시장 돌층계 아래 국수 먹는 사람 칼 가는 사람
종일 군복 수선하는 종일 주차 확인하는
종일 담배를 파는 종일 구두를 닦는 종일 종일……
종로 3가 가로등이 가지 않는 짧은 쾌락의 값을 주고받는,
철가방 곡예 감자를 먹는 사람들 낙과를 줍는 사람들
절뚝이는 도망가는 숨어있는 순도 높은 밤의
사람 사람 사람, 미안하다 다 알고 있는데
어스름길가 푸성귀를 파는 손등 푸성귀를 사는 손등
우산이 없는 우산이 있는 불안과 안도 비슷한
언젠가 사랑이 스친 오래된 내일이 스친 얼굴 비슷한
북빙에 남빙에 100퍼센트 인류
이파리와 모래알과 만년설이 처음인가요 우리?
어디서 봤지? 아, 아,
어디면 무슨 소용인가-이미 칼라일이 말했네
주머니에 넣어 둔
시간을 조물거린다 미움 한 줌 사랑 한 줌
시간이 닳도록 어제의 구름에 손을 넣고
뭉게 떠오르는 추상 알맹이 집히는 주머니 동전을 세며
한 평 가옥을 조물거리는데
시스티나의 천국과 지옥이 열리는데
달아 별아 구름을 웃고 바람을 웃는 너는 무엇
씨줄 날줄 폭우 아래 나를 우는가 쾌락을 우는가
최후는 도달할 것인가 시간이 재어지지 않는
땅을 지은 하늘 바라보며 결국,
알파파 신호에 기대어
첫 입술-첫 수유-첫 유배-첫 죽음-첫
너를 피해 거니는 이방 미로 은둔이 자유로워
주머니에 깊이
전자궤도를 조물거리는 자위, 웬 행운인가?
1998년 『현대시』로 등단
계단 1/2 외 1편
김 미 정
날개는 보이지 않고 밧줄은 없는 날들이야 무너지는 것은 내부부터였을까
계단을 오르다 말고 너는 뒤돌아보며 웃는다 반쪽의 얼굴만 보인다 마치 우는
것처럼 보여
담벼락 가득 반쯤 지워진 낙서들 그리고 창으로 보이는 반쪽의 하늘 우린
계단을 밟는 순간 뭉개지고 끝내 숨어버린 구름의 시간들 오늘은 모든 것이
적당해진다 어느 방향으로 뛰어내리면 멋질까 옥상 문이 열리고
엉켜버린 구름의 머리칼이 계속 돌아간다 손끝의 지문처럼 어떤 포즈로 바닥에 누워있을까 알 수 없는 질문과 말해지지 않는 정답들 고요히 계단과 계단 사이 튀어나와 있다 앞사람들이 모두 고꾸라져 넘어진다
나는 반쯤 궁금한 계단이 되어간다
바퀴들
당신의 눈을 열고
낡은 바퀴들이 굴러 나온다
혀처럼 붉고 깨지지 않는 바퀴들
어디로든 닿고 싶은 표정으로
젖은 길을 감고 뒹굴지
내 입술과 당신 입술이 어긋나
조금만 빨리 달리면 만날 수 있을까
돌돌 말리는 하루
밤과
또 밤들을
허리에 감고 돌리네
새벽 두시 모습을 알아볼 수 없어
빨갛게 번진 입술과 턱까지 내려온 눈물
굴러가다 멈춘
바퀴살을 후후 불며
젓가락으로 감아올리면
바퀴와 입술사이
무성한 풀들의 노래가 시작되고
앞으로 달려가다 멈춘 아이처럼
바퀴가 길을 벗고
다시 돌아오지 않아도 좋아
2002년 『현대시』로 등단
겨울, 12월 31일, 다시 겨울 외 1편
한 상 규
겨울은 1월에도 12월에도 찾아온다.
1월 1일 겨울은 처음이지만
12월 31일 겨울은 끝이다.
겨울
12월 31일
늦은 밤
눈이 내린다.
내리는 눈은 마지막이지만 다시
처음이 된다.
내리는 눈과 이미 내린 눈이
엉겨 붙는다.
겨울이
마지막 눈을 내리게 하고
겨울이 다시
처음 눈을 내리게 하는 것인지
눈이
겨울을 처음 오게 하고
눈이 다시
마지막 겨울을 오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인 다시
처음인 눈을 맞아
하얗게 탈색된 검은 눈썹 위
내리는 눈물 아래에서
12월 31일 늦은 밤
나는 눈물 흘리며 웃음 짓는다.
어느 날
어느 날 루게릭이 아버지를 방문했다.
양키스의 전설적 타자였던 루게릭이 아버지를 방문한 날
아버지는 2130경기를 연속 출장했던 철인 루게릭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고 알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루게릭에 대해 알게 된 날
루게릭은 여전히 아버지를 알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아버지를 방문했다.
루게릭은 양키스의 철인이었다.
어느 날 루게릭과 아버지가 서로를 알게 된 날
루게릭은 피곤했고 더 이상 잘 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말하고 은퇴했다.
그의 팔과 다리는 화석처럼 변해갔고
아버지는 두 팔과 다리가 목소리를 잃어갔다.
어느 날 루게릭이 아버지가 된 날
루게릭은 아버지에게 그의 이름을 주었고
그와
아버지는
사라졌다.
어느 날 아버지와 루게릭이 사라진 어느 날
루게릭은 사라졌지만 아버지가 되었고
아버지는 루게릭과 같이 전설이 되었다.
2003년 『시와세계』로 등단
유쾌한 고백 외 1편
김 문 주
입술 앙다물고 두 주먹 으스러질듯 움켜쥐어도 부르르 떨리는 다리. 저 손이 단숨에 분간 없이 확 나를 쳐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생각지 못한 의지가 치솟았기 때문. 피가 거꾸로 솟는다더니 다리 들리고 보니 알겠다. 치마 홀라당 까고 보여주는 지저분한 흉터, 헤진 속살. 누가
감히 맨살을 잡을 수 있나. 덫에 걸려 발버둥 치던 멧돼지의 게거품 소리가 숲을 헤집던 기억. 네 다리에서 돋아나는 이빨, 식욕이 살아나는 으르렁거림. 육식을 한 적은 없으나 이건 본성이다. 오래 전에 본 도끼 맛을 잊고 냄새나는 엉덩이 껴안으며 조용히 살아가려 했다. 폭력이 짐승을 길들인다. 지글지글 끓던 주둥아릴 찢어주고 유리창을 박살내며 다리 네 개로 발광하면서 날뛰었다.
부러진 다리에서 피가 질질 나는 줄도 모르게. 그래, 나 말종이야. 절름발이 되어 쫏겨나면서 실로 오랜만에 뭐 빠지게 웃는다.
법원에 가자
송달장으로
12개의 금고들과 만나라는 지시가 왔다
차라리 12마리의 뱀을 보내지
목도리를 두르고 허리띠를 차고
넥타이로 맬 수 있게
방아쇠를 당기시오란 쪽지가 차라리
그들을 위한 최소한의 예의가 될텐데
벼랑에 서서야 비로소
몬드리안의 추상화를 감상하다니
왜 나만 거머쥐지 못했나
타로를 보며 결정적인 한방
명쾌하게 해석할 한 컷의 행운
마법사는 후계자에게 마법을 넘겨
자자손손 마법의 성을
나는 구멍, 대대손손 구멍가게
십 년 동안 모은 동전은 썩지도 않고
세상의 눈알들과 굴러다니며 시시껄렁해지고
시시껄렁하기에 나는 너무 우아하고
인생은 환장할 정도로 맛있는 것 투성이라
은행마다 금고를 두었다 친절하고 예의바른 그들
예쁜 알약과 우울증 시럽까지 선물한다
마법의 경지에 숨 가쁘게 거의 다 왔을 때
골드바를 베어 먹으려는 때
빨간 리본 초청장이 팡파르 울리며
도착한다
2006년 『시와반시』로 등단
와! 딱정벌레와 분청사기 외 1편
류 현 승
나는 딱, 너는 精, 우리는 벌레
버드나무 가지 사이로 테라코타 빛 햇살 들어 와, 와
배면이 조장하는 것은 말하지 않더니
골방 ‘체게바라’가 담배 연기로 훅훅 불어 낸
막사발 굽 모서리가 차가운
‘나는 딱’
손사래 칠 거스러미를 떼고
밥이 되고, 차비가 되는, 방패를 든 남부럽잖게 애매한 조응이
-이 빠진 곳 없는걸 보니 너 살아있구나
겸연쩍게 말하는 ‘너는 精’
무심, 무심히 겹겹 쌓은 조도
성냥 통째 불 붙여 톱밥 창고 태우고
가마 창구멍 불길을 보는 방어기제 찾더니
배롱나무에 기대 손차양하고 등고선을 따라 읽는 누구나
딱, 精, 벌레와, 와
뱀처럼 은유가 감고 돌아간 자리에
잠은 이어 지다 끊어지다
물레와 기물器物 사이, 아무렇지도 않게 몸 푸는 채도
귀얄질 한 벙벙한 껍질에 실루엣 층층 쌓아
황갈색으로 진득한 회억回憶 뒤밀이 한다
그녀와 짜장면에 대한 통시적 블루스
1.
꼿꼿한 볕이 꽉 찬 자리를 비워가는 때
낮별은
- 땡그랑, 동전 소리 나는 앵벌이 눈물 한 방울이다
따사로움은 측면으로 슬그머니 온다고 청해루 여주인은 희떱게 주술을 걸고
껌벅이는 공복의 부표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는 공존
한 팔을 의자에 걸고, 구부린 몸을 폈다, 다리를 뻗고 코끝에 이는 바람을
두 눈 몰아 응시하다
너를 기다리는 초조한 한 점이 15분을 알리고 또 한 점이 피었다 진다
시계추처럼 흔드는 손 그림질도 지쳤다
탁자 아래 긴 그림자가 정체를 물으면 벌떡 일어나
- 얼마죠?
2.
해는 고개 숙이고 내일 올 거라 했다
춘장 같은 어둠은 퉁퉁 분 면발처럼 자라
해를 닮으면 안 되겠니 왔다 다시가면 무겁지 않을 텐데
단무지 같은 달이 뜬다
2006년 『시안』으로 등단
겨울나무에서 겨울나무로 외 1편
이 현 호
눈더미를 시트처럼 뒤집어쓴 겨울나무들이 장렬葬列을 이루고 있다. 느끄름히 이우는 하루 속을 걸어가는 사람도 겨울나무를 닮았다. 바람에 쓸려 다니며 지상에 앉지 못한 마른눈송이들은 아직 짐이 무겁지 않기 때문이야. 그때 한 겨울나무가 팔을 분지르고 온몸을 떨며 더께 같은 눈덩이를 털어냈다.
그것은 한 영혼의 낙차―한때 나는 다른 사람이었으며, 그 사람은 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악착같이 살아서 만나자고 말하고 그를 떠나왔다. 빈방에
한 마리 구름을 기르던 그가 밑줄 친 시구처럼 떠오르면, 그는 나를 대신해 슬퍼해준다―생활이 생활을 반성하지 않듯이, 무렴히 쌓이는 눈은 발자취를 첩첩 덮어주었다. 줄지어 선 겨울나무들의 끄트머리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계절과도 불화하지 않았다. 다시 겨울나무에서 겨울나무로
성탄목
그 겨울
살풋 맞잡은 손안엔 별이 살았다
우리는 하나의 소실점으로 멀어지는 세모꼴의 찻길을 육교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헐벗은 가로수 나뭇가지들 사이로 차량의 불빛들 반짝이고 희미한 바람에 실려 공중을 떠돌던 마른눈송이들이 그 조감도에 맴돌 때
언젠가 저렇게 큰 크리스마스트리를 갖고 싶어
깍지 낀 손안의 별은 지구에서 가장 환한 성냥불 우리는 서로의 맘속에 이
별이 다녀갈 만큼 큰 굴뚝을 지어주었다 별무리 같은 꼬마전구들을 휘감은 겨울나무가 계절을 잊고 이른 꽃순을 피워올렸다
그 겨울
크리스마스트리는 아름답다
그것뿐이다*
* 기형도, 「聖誕木」에서.
2007년 『현대시』로 등단
폭풍흡입 외 1편
이 희 원
나는 흡입한다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차창 밖 굉음을,
간판과 먹구름을
무가지와 전광판의 광고를,
나는 채워진다
한자와 로마자가 빨려온다
아라비아수자가 섞여온다
문자 속, 말들이 뒤 따라온다
좁은 공간을 타고 그녀가 온다
그녀의 산이 오더니
그녀의 바다가 쫓아온다
갑자기 허기가 몰려오고
그녀의 입술을,
그녀의 가슴을,
향해 나는 돌진한다
과부하가 걸린 내 머리는 폭발하고
그녀의 말 한마디도 붙잡지 못한다.
한때, 그녀를 흡입한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내가 찾고 싶은 것들은 늘 저 밖에 있고
“난 내 빵의 어느 쪽에 버터가 발려있는지 모른다.”
* 하워드제이콥슨의 소설 “영국 남자의 문제”에서 한 줄
후 토크
어떤 페이지를 펼치고
노트에 앉는다.
책 받침대를 쫓아내고
뚜껑 열린 펜 촉이 말라가는 오후,
검은 건반이 흰 건반 사이로 가라앉는다.
해독되지 않는
구름의 문양이 어떤 구름의 문양을
바람의 음파가 어떤 바람의 음파를
밀어내는 오후
누르고 눌러도
배 밖으로 나오는 간들,
입 밖으로 나온 혀들과 부딪치다
길을 잃고
나는 입술을 기억하지 못하는
핏빛 말들을 칼질한다.
이젠 누가 그어 놓은
밑줄에 앉아야 하나
어떤 페이지는 마침내
아무것도 씌워지지 않는다.
2007년 『시와세계』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