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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동남아시아의 통화위기의 불똥은 우리나라 종금사를 통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종금사들은 알려진 바와 같이 단기로 자금을 조달하여 장기로 운용하여 만기불일치로 인한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1997년 12월에 대거 영업정지를 당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을 비롯하여 장은증권, 한국산업증권과 동방페레그린증권 등 증권사들도 영업정지를 당하고 결국은 퇴출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증권사들의 영업정지와 퇴출은 2000년대 초반 증권업계 판도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다. 그 불씨인 증권사 퇴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1.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은 어떤 회사들이었나.
1) 동서증권
극동건설그룹의 계열사였던 동서증권은 1997년 당시 창업 44주년을 맞은 주식약정액 기준 업계순위 4위의 대형증권사였다. 1953년 보국증권으로 설립되어 1974년 동서증권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1985년 국제그룹이 해체된 후 1년간 제일은행의 관리를 받다가 1986년 극동건설그룹이 인수했다.
인수 후 맞이한 증시호황으로 사세를 키웠으며 자산규모가 2조700억원으로 그룹계열사중 가장 규모가 큰 계열사였다. 전국에 83개 점포와 3개 해외점포를 가지고 있으며 국내 최초로 삼성전자의 전환사채(CB)발행 공동주간사로 참여하는 등 국제영업에 강점을 보여왔다. 특히 일본 닛케이금융신문이 1997년 초 발표한 외국증권사 인기순위에서 국내 증권사중 가장 높은 40위에 오르기도 했다.
특히 인수영업부문에서 강세를 보여왔으며 1995년에는 대기업그룹계열 증권사들을 제치고 주식약정고 2위를 기록해 주목을 받았었다. 1994년 동서할부금융, 1996년 동서팩토링과 동서투자신탁운용을 거의 전액출자로 설립하는 등 활발한 사업다각화를 추진하였다.
2) 고려증권
고려증권은 당시 약정액 기준으로 국내 증권업계 8위의 중견 증권사이자 고려금융그룹의 주력 기업이었다. 1959년 태창증권으로 출범한 동사는 1973년 대아증권으로 상호를 변경했다가 1981년 이강학씨가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고려증권으로 재출발하였다.
1997년 당시 임직원은 모두 1,100여명이었고 서울, 부산, 대구 등 전국 주요도시에 모두 54개의 지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1997년 6월말을 기준으로 자산은 1조2,842억원, 부채는 1조706원이었으며 자기 자본은 2,136억원(납입자본금은 1,644억원)이었다. 고려증권의 모기업은 고려금융그룹이었는데 고려금융그룹은 고려증권을 비롯하여 고려종합금융, 고려생명보험, 고려투자신탁운용 그리고 서울 대연각빌딩을 관리하는 고려통상과 의약품제조업체인 동광제약 그리고 제주도목장을 관리하는 반도축산개발 등 10개사를 두고 있었다.
창업주인 이강학씨는 1970년 개양산업을 설립함으로써 산업계에 첫발을 내디뎠는데 이후 대연각호텔(1973년), 동광약품(1978년), 고려증권(1978년)을 잇따라 인수했으며 1980년대 들어서는 투자금융(1983년), 종합경제연구소(1987년), 투자자문(1988년), 생명보험(1989년) 등을 차례로 설립 금융그룹의 면모를 갖추었다.
2. 1997년 증권업계는 상황과 고려, 동서증권의 부도
1997년은 연초부터 불어닥친 노사분규와 뒤이어 터진 기아자동차의 부도유예협약 등으로 인해 우리나라 경제자체가 매우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1997년 10월 5일 증권감독원이 발표한 국내 34개 증권사의 부실채권 현황을 살펴보면 사채대지급구상채권과 사고구상채권, 회수불확실 또는 회수불능인 미상환융자금과 미수금 등을 포함하여 9,363억원에 달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 대상으로 선정되기 이전의 부실채권집계액이었으니 기아로 인한 부실채권을 합산할 경우 그 규모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증권사별로는 고려증권이 1997년 6월말 현재 1,423억원의 부실채권 발생으로 국내증권사 중 가장 많았으며 한국산업증권 1,144억원, 대우증권 937억원, 동서증권 813억원, LG증권 769억원 등의 순으로 많았다. 부실채권이 없는 증권사는 조흥증권, 한누리살로먼증권 그리고 환은스미스바니증권 등 3개사 밖에 없었다. 이들은 증권사들 중 후발증권사였기 때문에 부실채권의 멍에를 뒤집어쓰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1997년 상반기 실적(1997년 4월~9월)에 대한 증권업계의 발표에 따르면 10대 증권사 중 8개사가 적자를 냈고 흑자를 기록한 증권사는 동원, 동양증권 등 2개사에 불과했다. 적자회사의 적자규모는 동서증권 434억원, 한화증권 393억원, LG증권 370억원, 고려증권 242억원 등의 적자를 각각 기록했다. 반면 동원증권은 보유주식상품이 적고 금융비용부담이 거의 없어 197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고 동양증권은 지난 사업연도 중 손실요인을 모두 반영하여 70억원의 이익을 기록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1997년 12월 2일에 청솔, 한솔, 쌍용, 신세계, 고려, 경일, 삼삼, 항도, 경남종금 등 9개 종금사가 영업정지를 당하게 되는데 이 중 고려종금은 그 계열금융기관으로 고려증권이 있었지만 양사 모두 부실이 커 합병이나 증자여력이 크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고려증권은 1997년 12월 3일 고려종금과의 합병을 전격 발표하게 된다. 당시 고려증권 대표이사였던 이연우 사장은 “그룹구조조정을 위해 증권과 종금을 합병키로 하고 재정경제원에 합병계획서를 제출했다.”고 밝히고 “증권․종금을 합병한 후 증자와 비수익자산처분 등으로 경영을 정상화시켜나갈 계획이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룹차원의 이러한 조치로 합병을 목전에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증권은 1997년 12월 5일에 상업은행 790억원 등 조흥, 서울, 외환은행 등에 돌아온 2천억원규모의 어음을 막지 못해 최종부도 처리되었다. 당시 고려증권의 부도 원인으로는 증시침체로 영업이익이 크게 감소한데다 지급보증을 남발한 상태에서 대기업 연쇄부도와 함께 대규모의 대지급이 생겨나면서 극심한 자금난을 겪었고 특히 콜자금조달 창구역할을 했던 계열사 고려종금이 업무정지를 당한데 따라 은행들의 콜자금 공급이 차단되는 등 자금줄이 완전히 막혔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분석되었다.
당시 고려증권의 회사채지급보증액은 12월 5일 현재 96건 4,258억원에 달했는데 이중 해당기업부도 등으로 대신 물어줘야 할 금액이 1,982억원으로 전체의 38.2%에 이르렀다. 이는 자본금(1,644억원)보다 338억원이나 많은 규모였다. 그러나 그 중 담보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전체의 3분의 1도 안되는 594억원에 불과했다.
또한 수익다변화 차원에서 추진했던 지급보증업무가 기업부도로 인해 경영위기를 불러왔고 증시 내적으로는 주가하락으로 보유주식 평가손실이 1997년 9월말현재 695억원에 달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원/달러환율 상승에 따른 환차손이 213억원에 이른 것도 경영을 압박하는 요인이었다고 한다. 또한 고려증권은 퇴출이 결정된 종금사에 약360억원 정도의 콜론(call loan)을 운용했는데 영업정지에 따른 지급중단으로 받지 못해 자금조달이 꼬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당시 콜금리와 기업어음의 할인율이 법정최고금리인 25%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증권은 다음날인 12월 6일에 최종부도처리 되어 증권관리위원회로부터 12월 6일부터 1개월간 영업정지를 당하게 된다.
고려증권의 부도로 정신 없던 상황에서 같은 달 12일에 동서증권이 자진영업중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동서증권은 12월 12일 새벽에 이날부터 자진해서 영업을 중지하겠다고 증권감독원에 통고했고 증권관리위원회는 이날 긴급회의를 통해 영업정지를 추인했다.
당시 증권감독원의 발표에 따르면 “동서증권은 최근 극심한 자금난을 겪었으며 특히 11일에는 영업점에서 예탁금인출을 요구하는 고객들에게 현금을 제대로 지급하지 못해 고객과 마찰을 빚었다.”는 것이었다. 동서증권은 회사채 및 해외증권투자에서 손실을 입었고 모기업인 극동그룹의 매각방침 표명으로 하루 700억원의 예탁금이 인출되는 상황이었다.
동서증권은 불길처럼 퍼지는 예탁금 인출에 응하기 위해 종금사의 하루짜리 콜 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1997년 9월말 현재 5,697억원의 차입금 중 하루짜리 콜자금이 2,312억원에 달했다는 자료에 미루어보면 급전을 돌리기 시작한 12월에 그 규모가 얼마나 불어나게 되었는지는 보지 않고서도 짐작이 가능한 상황이다.
또한 끝없는 증시추락으로 1995년 489억원의 대규모 적자를 낸데 이어 1996년에도 375억원의 적자를 기록했고 1997년 상반기결산에서도 437억원의 적자를 기록했다. 또한 1995년 3월 9,850억원이던 부채규모가 같은 해 9월에는 1조4,027억원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여기에다 건설경기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극동건설이 계열금융사인 동서증권을 통해 대거 자금을 조달한 것도 동서증권의 부실을 심화시킨 원인이 되었다.
3.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의 퇴출과정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이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양사에 예탁된 고객들의 예탁금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증권회사에 예탁된 주식, 채권 등 유가증권은 증권예탁원에 보호되어 있고 고객들의 예탁금은 투자자보호기금 등에서 원리금을 전액보상하기 때문에 고객들의 재산은 철저히 보호된다는 증권감독원의 발표를 굳이 따르지 않더라도 고객들의 재산은 완벽하게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 증권사와 투신사의 경우인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번 신뢰를 잃은 금융기관이 과연 고객들을 제대로 유치할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이고 만약 고객들의 신뢰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 회사는 결국 퇴출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12월 12일 증권관리위원회의 발표에 의하면 영업중지를 선언한 동서증권의 고객예탁금 및 환매체잔고 반환에 쓰일 재원마련을 위해 한국은행에 특별융자를 신청하는 등으로 인해 고객 예탁금 반환이 늦어질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당시 투자자보호기금이 동서증권 고객들에게 지급할 자금규모는 고객예탁금 2,800여억원과 환매채잔고 1600억원 등 모두 4,4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고려증권의 부도로 인해 투자자보호기금의 재원이 고갈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증권업계에는 예탁금 지급기반이 약한 증권사를 중심으로 흉흉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였다.
동서증권에 이어 먼저 부도가 났던 고려증권도 12월 15일 서울지법에 법정관리를 신청하게 된다. 하지만 서울지법은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의 법정관리 신청을 기각하게 된다. 재판부는 결정문에서 "금융기관의 영업이 신용을 바탕으로 이뤄진다는 점을 감안할 때 부도나 영업정지처분으로 신뢰성을 상실한 두 증권사는 법정관리절차를 거치더라도 회생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특히 두 금융기관을 인수하려는 제3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회생가능성은 더욱 희박하다. 또한 금융기관이 보유하고 있는 부동산과 유가증권 등의 자산은 청산절차를 밟더라도 효용이 감소하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부실금융기관의 신속한 정리와 투자자보호를 규정하고 있는 현행법의 취지를 보더라도 금융기관은 법정관리를 하기에 부적합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재판부의 이러한 결정은 부실금융기관의 경우 제3자 인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파산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당시 상황에서 두 금융기관에 대한 제3자 인수는 법정관리의 기각으로 더욱 어렵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1998년 2월 26일 고려증권에 희망의 불씨가 나타났다. 주택은행과 산업은행 등 채권은행단이 채권을 출자금으로 전환해 주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주택은행은 26일 증권업협회에 38개 채권은행단이 채권의 출자전환 등에 합의했다고 통보하면서 고려증권이 사용한 투자자보호기금인 1,044억원의 처리방안에 증권업계도 합의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다. 채권은행단은 고려증권에 대한 여신 5,394원 중 3천억원을 출자전환하고 2,394억원을 7년만기 후순위채권으로 소화키로 합의했다.
주택은행측은 고려증권이 사용한 투자자보호기금 중 1998년 중에 244억원을 갚고 나머지 800억원은 2년 거치 연 2%의 금리로 3년 분할상환 한다는 방안을 제시하며 증권사들에 동의해줄 것을 요구했고 증권업협회는 긴급 회원사 기획부장회의를 열어 35개 국내 증권사 및 21개 외국사 국내지점으로부터 투자자보호기금에 대한 동의서를 받았다.
이에 증권관리위원회는 동서, 고려 두 증권사에 대해 증권업 허가취소를 논의하였으나 영업정지기간을 4월 30일까지로 1개월 정도 연장해 주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영업취소설이 돌면서 3월 27일부터 증권거래소에서 매매중단 되었던 양사의 주권 거래가 28일에 재개되었다.
동서증권도 자구계획을 추진하였는데 1998년 4월 20일에는 서인도제도의 조세회피지역에 설립된 미국계 펀드인 호라이즌홀딩사와 지분매각계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동서증권에 따르면 호라이즌홀딩사는 총 2억5천만달러(당시 한화로 3,530억원)를 투자하여 동서증권의 지분 50%이상을 확보하여 대주주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증권감독원의 일정으로 보면 22일 개최예정인 증권선물위원회에서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의 자구계획을 심의한 후 영업권인가 취소 여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는 점을 미루어 본다면 동서증권의 자구계획안은 영업인가취소를 면하기 위해 급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크게 신뢰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나 싶은 점이 있다.
그리고 4월 24일 금융감독위원회는 영업중지중인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의 처리와 관련하여 재경부장관에게 증권업허가 취소를 5월 1일부로 요청키로 결정을 내린다. 그리고 끝내 두 증권사는 5월 1일에 증권업허가취소라는 사망진단서를 손에 쥐게 된다. 1998년 6월 1일 재정경제부는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의 증권업허가를 취소한다고 발표하였다.
당시 두 증권회사가 지급 보증한 회사채 규모는 5,458억원원에 이르렀고 동서와 고려증권이 증권거래소에 낸 250억여원의 회원비와 3천억원 가량의 증시안정기금 출자부문은 채권단의 부채상환에 사용되었다.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의 소액주주수는 1998년 3월기준으로 85,370명이었는데 동서의 경우 소액주주들이 총발행주식수의 60%, 고려는 63%를 차지하고 있어 일반투자자들의 피해가 매우 컸던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동서증권과 고려증권은 1998년 10월 16일자로 증권거래소에서 상장폐지되었다.
망하는 자가 있으면 흥하는 자가 있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인 모양이다. 종금사와 증권사의 연쇄부도로 금융업계가 모두 어려움에 처했던 상황에서 외국계증권사들은 반사이익을 얻었는데 외국인 투자자들의 경우 국내증권사를 통한 주식매매주문을 끊고 일부 외국증권 서울지점으로 창구를 옮기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자딘플레밍, ING베어링, HG아시아 등 일부 증권사로 외국인 매매주문이 집중되어 이들 회사가 때아닌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또한 두 증권사의 부도이후 증권업계에도 판도변화의 바람이 일었는데 상대적으로 튼튼한 그룹을 뒤에 둔 재벌계 증권사들의 약정고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이었다. 두 증권사의 부도가 있었던 1997년 12월 국내증권사의 위탁, 기관, 국제부문을 모두 포함한 약정액수에서 LG증권이 2조7,411억원(약정점유율 10.50%)으로 선두에 나선 것이었다.
1997년 11월까지 수위를 지켰던 대우증권은 2조7,228억원(점유율 10.42%)로 2위로 처졌으며 현대(7.78%), 대신(6.60%)이 각각 3위와 4위를 지켰다. 동서증권이 부도남에 따라 쌍용과 동원이 5위와 6위로 각각 한 계단씩 올랐으며 11월에 9위였던 삼성증권이 법인 및 국제약정의 호조로 약정총액 9,794억원으로 7위로 두 계단이나 상승한 것이었다.
4. 영업용순자본비율과 장은증권의 퇴출
1998년에 들어 금융감독위원회는 ‘증권회사 재무건전성 감독규정’을 개정했는데 개정내용에 의해보면 은행의 BIS비율(국제결제은행 자기자본비율)과 비슷한 개념인 증권사의 영업용 순자본비율을 기준으로 이 비율이 150%미만인 증권사는 경영개선조치를 이행해야 하고 100%미만인 증권사는 영업권 양도나 제3자 인수와 같은 고강도 처방을 받게 되는 것이다. 특히 금융감독위원회는 같은 해 6월말의 재무상태를 기준으로 증권사의 재무건전성을 심사하여 강력한 조치를 취할 것을 표명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각 증권사들은 영업용순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1998년 7월 4일 장은증권이 스스로 영업정지를 요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금융감독위원회는 장은증권에 대해 1개월간의 영업정지처분을 내리게 된다. 장기신용은행의 계열사였던 장은증권이 스스로 영업정지를 요청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영업용 순자본비율을 맞추는데 실패했기 때문이었는데 장은증권의 영업용 순자본비율은 1998년 6월말 현재로 16.9%에 불과했다.
앞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증권당국은 금융산업구조조정 계획에 따라 이 비율이 100% 미만이면 금감위의 폐쇄명령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이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장은증권은 대주주인 장기신용은행을 대상으로 400억원 이상의 자금지원을 요청했었는데 자금지원 방식은 장기신용은행이 장은증권발행 후순위채권을 인수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장은증권의 이러한 자금지원요청에 대해 장기신용은행은 50%이상 인원감축 등을 실시해야 한다는 조건을 먼저 충족시켜야 자금지원에 나설 수 있다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 같은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해 장은증권은 6월말을 전후해 고객예탁금 인출사태에 직면했고 급기야 영업정지를 신청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동사는 1997 사업연도 중 1,221억원의 영업수익을 기록했지만 당기순손실이 274억원에 달하는 적자결산을 면치 못했다. 장은증권의 자산총계는 4,626억원으로 3,790억원의 부채총계를 상회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장은증권은 경영부실로 영업정지를 당하기 전에 거액의 회사돈을 빼돌려 직원들의 명예퇴직금을 지급하는 도덕적 해이로 물의를 일으켰다. 당시 장은증권은 직원 417명을 모두 퇴직처리 하면서 정상적인 퇴직금 28억원 이외에 160억원을 명예퇴직금 명목으로 지급한 것이다. 당시 고객예탁금 850억원을 자력으로 반환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던 상황에서 고객 돈 반환을 뒤로 미룬채 직원들의 호주머니를 먼저 채워준 것이었다. 당시 증권사들이 퇴출되는 과정을 보면 증권감독기관의 감시역할은 없었던 것과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1998년 9월 21일 장기신용은행은 장은증권에 500억원을 신규출자하여 영업정지중인 장은증권을 회생시키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 같은 출자배경에 대해 장기신용은행은 "국민은행과의 합병으로 유가증권 운용규모가 5천억~1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증권 자회사의 존속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장기신용은행은 "앞으로 장은증권이 리스크가 없는 채권 주식 등의 중개업무에 치중토록 하고 회사명도 조만간 변경키로 했다"고 밝혔다. 장기신용은행의 출자결정에 따라 국민은행, 주택은행, 삼성증권, 농협 등 주요채권단도 보유중인 장은증권의 증권채에 대해 금리와 상환조건 등을 대폭 완화해주기로 합의했고 채권액 850억원 가운데 430억원은 후순위채로 전환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금융감독위원회는 9월 25일 장은증권의 경영개선계획서를 심의한 결과 경영정상화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계획서 승인을 거부하고 퇴출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1999년 3월 16일 재정경제부는 장은증권에 대해 증권업인가 취소결정을 내렸다.
5. 퇴출된 자와 남은 자들에 대한 뒷 이야기
영업용순자본비율을 맞추지 못한 증권사는 사실 장은증권외에도 더 있었다. 당시 SK, 동방페레그린증권, 산업증권 등 3개사가 1998년 6월말 기준의 재무건전성에서 영업용순자본 비율 150%에 미달했었는데 당시 SK증권은 영업용순자본비율이 마이너스 62.7%이며 또 다른 건전성지표인 재산채무비율도 100% 미만인 것으로 나타났다. 동방페레그린증권과 산업증권의 영업용순자본비율은 각각 마이너스 73.9%와 마이너스 49.2%로 나타났다.
이에 각 사들은 자구계획을 제출하였는데 SK증권은 연내에 4천억원의 유상증자를 실시하겠다고 발표했고 동방페레그린증권도 유상증자계획을 수립해 빠른 시일 안에 재무건전성 지표를 정상수준으로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산업증권은 외국자본과의 합작을 성사시키겠다고 하였다.
결국 SK증권은 금융감독위원회의 ▶ 대주주인 최태원 SK회장의 증자참여 ▶ 연내에 2천억원 유상증자 ▶ JP모건과의 소송에 따른 1천억원가량의 피해예상금액에 상당하는 추가증자 등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퇴출을 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퇴출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던 또 하나의 증권회사였던 쌍용증권은 금융감독위원회의 ▶ 연내에 대주주인 H&Q아시아퍼시픽사가 1천억원의 유상증자와 5백억원의 후순위차입을 통한 자금조달을 하고 ▶ 보유부동산을 추가 매각토록 한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역시 퇴출의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동방페레그린증권은 대주주였던 대한종금이 1999년 4월 9일에 영업정지에 들어가면서 자구계획이 물거품이 되면서 퇴출 되었고 산업증권도 외국자본과의 합작이 성사되지 못해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 불어온 외환위기는 우리나라 금융계에 커다란 회오리가 되어 수많은 은행과 종금사 그리고 증권사를 퇴출시켰다. 그러나 문제는 위기상황에서 더욱 철저한 구조조정이 일어났어야 했지만 금융시장의 기반붕괴를 우려한 당국의 의지부족으로 또 다른 부실의 징후를 안고 우리 금융시장은 재기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하지만 부실을 안은 금융기관은 고객으로부터 외면을 받게된다는 것은 당시 상황을 통해 확인되었다. 앞으로 얼마나 그들이 버티게 될 지는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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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픈 역사를 아름다운 추억으로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