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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溪先生誕辰五百週年紀念論文集
내앞(川前) 500년
- 門戶形成에서 獨立運動까지 -
2000년 11월
기념논문집간행위원회
발행일 2000년 11월 20일
발행인 金鎬冕
편집인 金時鄴
발행처 淸溪先生誕辰五百週年紀念論文集
刊行委員會
주소 서울 종로구 경운동 47-1 건국1호 빌딩 308호
전화 02-738-2207
팩스 02-738-2207
(p 169 - p 250)
川前 金門의 獨立運動
<趙 東 杰> 국민대 명예교수
천전리는 안동 중심에서 12km에 있는 농촌 마을로, 의성김씨 청계 金璡의 후손이 살고 있는 문촌이다. 청계 후손은 천전리 뿐 아니라 임하, 지례, 금계리 등 여러 마을에 살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천전인’이라고 하는 것은 청계 후손으로 천전리 뿐만 아니라 안동 근방의 다른 마을에 사는 후손도 포함한다. 안동 향중에서 퇴계를 배출한 도산 문중과 서애를 배출한 하회 문중과 더불어 여러 면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p171)
천전인은 전통적 양반의 후예이고 유가의 후예였다. 조선시대 명문대가의 후예가 거의 친일파로 전락하거나 아니라고 해도 식민지 속에 안주했는데 천전인은 그것을 거부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때 (1)義兵을 일으켜 항전했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2)協東學校를 세워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P 247)
1910년 나라가 망했을 때 66세 고령의 문중 원로 (3)金大洛이 앞장서 삭풍 몰아치는 만주 벌판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였다. 만삭 임부도 일본 식민지에서 자식 낳기를 거부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망명길에 올랐다. 어린이도 부모의 옷소매를 잡고 망명하여 그 어린이가 커서 세대를 바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4)처음에는 南滿洲 三源浦에 정착하였다가 (5)나중에는 北滿洲 聚源昶(현재 巨源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래서 천전인의 독립운동이 “삼원포에서 취원창까지”라는 말을 남겼다고 했다.
망명 초에 耕學社, 共理會, 新興武官學校, (6) 白西農庄 軍營, 扶民會를 차례로 설치하여 독립군 기지를 개척하였다. 기후(풍토병)와 토질(중국인 지주의 소작인으로서 서툰 농사일의 고충)이 맞지 않았지만(마적의 습격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벼농사를 개발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를 건설했다. (7)3.1운동 뒤에는 韓族會, 西路軍政署, (8)統義府, (9)國民代表會, (10)正義府, 高麗革命黨, (11)革新議會, 韓國獨立黨과 朝鮮革命黨을 조직하여 帝國主義에 맞서 정의를 위해 싸웠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12)獨立同盟 北滿支部를 설치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온 정성을 다 바쳤다.
그런 가운데 (13)靑山里 戰爭에서 전사하고 (14)庚申慘變에서 참살당하거나 혹은 옥사하고 혹은 병마에 시달려 천수를 다하지 못한 인사가 수없이 많았다.(P248)
(15)국내에서는 滿洲로 망명한 집안을 걱정하여 독립군 자금을 공급하느라 말 못할 고생을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3.1運動에 몸바쳐 시위운동을 전개하고 巴里長書를 송달하고 義勇團을 결성하여 지하 독립운동에 정성을 다했다. 신간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는가 하면 농민운동을 전개하여 일본 제국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남은 힘을 다 쏟았다. 만주에서 손님이 오면 밤새워 밥을 짓고 옷을 만들어 심신을 안정시켜 먼 길을 떠나 보냈다. 죽어서 돌아오면 소리 없이 울며 뒷산에 묻었다. 남정네야 그렇다 치고 여인네의 인고의 삶을 무엇으로 보상하랴.
현재 獨立運動 有功者로 포상받은 인원만도 29명으로 웬만한 市郡의 인원을 능가하고 있다. 北의 인사를 합하면 얼마가 될지 알 수 없다.(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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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의병 봉기 시에는 안동의 모든 문중 모든 마을에서 상하 없이 의병에 참전하였다. 그 때에 천전에서는 金興洛 金養鎭 등이 安東義兵陣을 창의하였는데, 그 무렵 천전리에는 상고가 잇달아 일어나 천전 문중을 총망라하여 문장인 金興洛이 일당백으로 활동하였다. 그래도 금계리에서는 많은 인원이 참전함 - 금계의 金 * *가 서기이고, 안동의병진이 함창 태봉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할 때 금계리 김씨가 많이 참전함.(p178)
西山 金興洛은 당초 의병의 창의를 발기하고(三溪書院通文=三溪通文=安東通文), 의병 활동의 중심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봉정사 회의), 그는 鶴峰의 11세 주사손으로 금계리에 세거하였다. 문하에 權相翊 金大洛 李相龍 등의 학자와 독립운동가가 많았다.(P180)
안동을 침략한 일본군은 의병 봉기의 핵심 인물로 西山을 지목하여 유독 西山에게 곤욕을 안겼다. 금계리 西山의 자택으로 몰려가 西山을 포박하고 마당에 끌어냈는가 하면, 안방까지 들어가 가산을 탈취하는 등 한나절 동안 난동을 부리다가 물러난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西山이 지휘부에 참가해 있어 금계리 문내에서 참전자가 많을 수 밖에 없었고 사람의 손상이 적지 않았다. 그 중 金繪洛은 1896년 6월 12일 포살당하였고, 金賢東 金秉東 등이 거론될 수 있다.(P184)
(2) 協東學校가 설립되던 1907년 전후에는 경향 각처에서 교육 구국의 기치가 전국에 메아리쳐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는 구호 아래 민립학교가 울흥하였다.(P190)
협동학교는 임동면, 임현내면, 임북면, 임서면, 길안면, 동후면, 와룡면등 안동의 동쪽 7개면이 협력하여 설립했다고 해서 協桐으로 학교 이름을 명명하였는데, 청계공 종손 金秉植이 초대 교장을 지내고 金厚秉, 金肯植(=金東三)이 적극적으로 활동함.(P186)
그러나 초기에는 천전 원로급이던 金大洛 金紹洛 형제가 반대하기도 함.(皇城新聞 1910년 8월 7일자에 보면 “安東頑固 金紹洛씨는 其子가 斷髮 入學할까 염려하여 斷指血書로 禁戒를 작하였다”라는 기사가 발견되고 그는 끝까지 신교육을 반대한 듯.) (P187)
이상룡이 의병으로부터 계몽주의로 전환하면서 그의 처남이던 白下 金大洛(都事公의 장남)은 ‘대한협회보’를 읽고 혁명적으로 전환하여 신교육에 찬동하며 자신의 저택을 협동학교 교실과 기숙사로 내놓고 자신은 소옥으로 물러날 정도로 적극 지지하게 됨.(P189)
그 후 협동학교는 문중의 원로 김대락과 문중 종손 김병식이 신교육의 선봉장이 됨으로써 문중 및 안동의 개화에 크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1910년 나라가 망하고 천전의 관계 인사가 만주로 망명한 후 협동학교는 임동면 수곡리 대평으로 옮겨가 무정부주의자 柳林같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거나, 3,1운동 당시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격렬했던 臨東 3,1운동의 동력을 공급하고 운명을 다하게 된다.(P193)
(3)만삭 임부인 손부 손녀까지 1910년 12월 24일 그 추운 겨울에 대동한 것으로 보아1910년에 66세였던 白下(비서) 김대락은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필연 죽을 자리를 찾아 만주 서간도 망명을 결심한 것이 아닌가 한다. 조국이 일본 식민지가 되었으므로 분만할 신생아가 일본 臣民으로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던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다급히 망명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P195)
(4)협동학교 교사였던 李觀稙, 一松 金東三 등은 신민회 가입 인사로서 신민회 계열에서 망명지로 삼고 있던 三源浦를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白下와 石洲 등의 안동 유림들도 삼원포로 망명하게 된 것이다.(P197)
삼원포에 망명 정착한 과정을 보여 주는 유일한 일기가 '白下日記‘이다. 매일 빠짐 없이 기록하여 날씨, 제사, 꿈, 식사 관계, 가족의 안녕, 방문 내왕자, 특기사항 등을 기록하였는데, 방문자의 명단을 보면 이회영, 이동녕을 비롯하여 다양한 인사의 등장과 퇴각 시기를 알 수 있다.(P200) 또한 일기에 등재된 식구와 방문자 가운데 천전 인사를 보면 1911-1913년에 천전에서 50명은 넘는 인원이 망명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외에 추가가의사회(耕學社인 듯), 추가가학교(新興學校인 듯), 합니하 신학교(新興中學校→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함)의 기사, 새 시대의 향약과도 같은 共理會 창설을 제창한 기사와 1913년 國恥日 행사장에서 朴氏夫人의 斷指事件등 다른 문헌에서 볼 수 없는 귀한 기사들이 있다.(P200)
한편 삼원포 근방에는 신흥학교 외에 그의 분교가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분교가 아닌 민족교육의 학교도 적지 않았다. 삼원포 안에만 三光學校, 은양학교, 삼성여학교, 보흥학교가 있었는데 삼광학교는 김동삼의 동생인 金東滿(金纘植)이 교장이었다.(P209)
(6) 白西農場은 유하현 삼원포 북쪽 孤山子 동남쪽 30km 산중에 軍管區를 설치하고 屯田을 개척한 것으로 그것을 대외적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농장의 이름을 붙인 것인데 그 뜻은 백두산 서쪽이라는 뜻이다. 그 庄主를 一松 김동삼이 맡았다.
백서농장이 설치된 그 해(1914) 12월 10일에 백하 김대락이 작고하였다. 그러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백서농장의 주축이 된 것을 보면, 신흥학교를 졸업한 천전 인사의 직,간접 참여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P213)
경학사 → 공리회 → 부민단(회) 및 백서농장 군영 → 韓族會에서 백서농장 철수령을 내리면서 백서농장의 독립군들은 西路軍政署로 개편되었다. 이 때 백서농장을 만든 부민회 회장이던 이상룡이 서로군정서 독판을 맡고 백서농장 장주이던 김동삼이 서로군정서 참모장을 맡게 되었다.(P214)
(7)3.1운동을 마무리하면서 서간도에 독립운동전선이 세 조직으로 새롭게 정비되는데, 종래의 부민회가 韓族會로, 백서농장 군영이 西路軍政署로, 신흥중학교가 新興武官學校로 개편된 것이 그것이다. 여기에도 천전 인사의 역할이 남달리 돋보이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金東三, 金衡植, 金聲魯, 金成魯가 각 부서에서 활약하였다.(P216)
(8) 서간도지방의 독립군의 통합이 추진되어 1922년 6월에 남만통일회가 결성되어 통군부가 탄생하더니, 8월 30일에는 남만한족통일회를 결성하여 통군부를 통의부로 확대 개편하고 통군부 교육부장이던 김동삼이 統義府 총장을 맡게 되었다.(P223)
(9)국민대표회는 상하이에서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15일까지 개최되었는데, 여기서 김동삼이 의장을 맡았다)부의장은 안창호와 윤해). 그리고 한족회를 대표하여 김형식도 참가하였다. 국내외의 대표 인원이 90 내지 100명선으로 상하이는 전무후무하게 독립운동 대표자가 넘치던 한 때를 맞고 있었다. 여기에서는 임시정부에 대한 의견 차로 고수파, 개조파, 창조파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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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국민대표회에 갔던 김동삼을 비롯한 만주 대표들이 만주로 돌아왔을 때 통의부는 4분 5열되어, 임시정부 고수파의 양향력 아래 參議府(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 주만참의부)가 압록강 일대를 활동 무대로 탄생하였다. 이상룡, 양기탁 등의 지도자가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결국 1924년 10개 단체대표가 모여 全滿統一會議籌備會를 열어 또 김동삼을 의장으로 짐을 맡겨 전만통일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이승만을 중심한 임시정부 고수파와 안창호를 중심한 서북파의 대립이 만주까지 번져 여의치 않았다. 결국 전만통일회에서는 1924년 11월 24일에 正義府를 탄생시켰다.
正義府는 유하현 삼원포에 본부를 두었으나 활동 무대는 吉林省 전역으로 처음에 김동삼이 중앙행정위원 겸 외무위원장을 맡았고, 1년 뒤에 김형식이 민사(내무)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 때 금계 출신 김원식이 행정원 비서장 등을 맡아 동분서주하였다.(P225)
정의부가 설치됐을 때 북만 목단강 일대에는 金佐鎭을 중심한 신민부가 있어서 학자들은 이 때를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 정립기라고 하는데, 천전인들은 대개 정의부 지역에 살면서 활약하였다. 3부 가운데 정의부가 비교적 윤택했는데, 그것은 자연 조건이 좋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정의부에서 興實業社나 農民互助社 같은 단체를 운영하며 실업에도 주력한 결과로 보인다. 각 가정은 농민호조사에 가입해 있었는데 이는 1927년 4월 1일 김동삼 김원식 등 35인이 발기하여 결성한 것이다.(P226)
* 1920년대 중반부터 만주에서 사상 대립이 부상하여 독립운동의 힘이 분산되고 있었다. 1927년에는 曺奉岩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하고, 李東輝 계열 인사가 만든 赤旗團도 활동하여 헤이룽장성 동포사회에 공산주의의 파급이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이 때에 김동삼이 때마침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에 맞추어 독립운동 전선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그는 1920년 경신참변 이후 줄곧 통일운동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독립운동계에서 ‘統一의 化身’이라 해서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영향으로 1926년 민족유일당운동 북경촉성회가 결성된 후 중국 관내 곳곳에서 촉성회가 결성됐고 국내에서도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촉성회의는 회수를 거듭하면서 결국 삼부통합운동으로 성격이 바뀌어 1929년에 國民府와 韓族總聯合會로 양분되었다.
(11)그 때 김동삼은 혁신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다가 1931년 滿洲事變을 전후한 때 하얼빈에서 사돈 李源一과 함께 체포되어 20년간의 독립운동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 그 후 평양감옥과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7년에 서대문감옥에서 옥사하니, 평소 일송을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이 성북동 尋牛莊에 시신을 토렴하여 장례를 지내어 식민지 하에서 의미 심장한 社會葬과 같았고 현재 국립묘지에 의관장 묘소가 있다.
김동삼이 1931년 하얼빈에서 잡힐 무렴 金元植은 1932년 관내로 들어갔다가 다시 만주로 파견되고 또 관내로 철수, 신한독립당을 결성하고 1935년에는 남경에서 양기탁, 김규식,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새로운 정세에 대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1940년 1월에 작고하였다.
(5)金政植은 경신참변 후 옥고를 치른 후 심양에서 아버지 剩軒 金紹洛을 모시고 살다가 1927년 경 하얼빈 동북 35km 지점, 阿城縣 북쪽 송화강변의 聚源昶을 개척하였다. 그 후 月松 金衡植(김대락의 子)과 그의 양자 正魯도 취원창으로 오는 등 천전 독립운동의 취원창 시대가 열렸다.
처음에 月松 金衡植이 취원창에 학교를 세우고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에 이바지하였으나 취원창 조선족 민족학교는 1932년 괴뢰 만주국이 건립되면서 폐쇄당하고 만주국 학교로 운명이 바뀌는데 지금도 巨源鎭(옛 취원창) 거리 복판에 학교가 있다.
(12)취원창에서 전개한 독립운동이라면 먼저 金政植을 꼽아야 하는데, 1940년 전후 동북항일연군과의 관계도 생각해 볼 수 있고, 1943년 연안의 조선의용군과의 연락망도 있었다.
한편 月松 金衡植은 1944년 연안의 독립동맹(조선의용군) 북만지부 책임자로 위촉되어 독립운동의 마지막 불꽃을 피웠다. 그는 비서(백하) 金大洛의 아들로 아버지를 따라 간도로 망명하여 두루두루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1940년에는 삼원포 藍山에 있는 아버지 金大洛의 무덤을 찾아가 가토하고 지석 대신 흰사발을 무덤 앞에 묻어 놓았다. 해방이 되자 조선독립동맹 북만지부 책임자 명의로 金枓奉의 초청을 받아 평양으로 환국하고 ---그 후 연로 퇴직하고 금강산 장안사 휴양 중 1950년 戰火가 미치자 외인에게 수욕을 당하는 것보다 차라리 ---구룡폭에서 자진하였다. 향년 74세였다. 독립동맹의 김두봉 등이 숙청당하는 것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P239)
이와 같이 천전인의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은 “삼원포에서 취원창까지” 연이어 이루어진 것이다.
(13) 1920년 10월 북간도 화룡현 청산리전쟁에서 金成魯가 전사하였다. 그는 金奎植의 아들로 父子가 망명하여 金成魯는 哈泥河 신흥중학교를 졸업하고 그 후에 孤山子의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金奎植은 都事公 金鎭麟의 아들 大洛 孝洛 紹洛 呈洛 4형제 가운데 鎭項에게 出系한 呈洛의 아들인데, 1910년 망명하여 활약하다가 1944년 오상현 안가촌에서 일본군에게 납치되었다.(P217)
(14) 1920년 음력 9월 25일 벌써 첫눈이 오고 계속되는 눈으로 발목이 빠질 정도였는데, 삼원포에 쳐들어온 일본군은 三光學校 교장을 맡아 민족교육에 헌신하던 金東滿 등 약 40명을 잡아 말꼬리에 달아 끌고 다니면서 학살하거나 총살하였다.(P218)
경신참변으로 서북간도의 망명촌락은 폐허가 되었다. 천전 문중에서 문장인 白下가 작고하여 없는 마당에 김동삼과 김형식(백하 김대락의 子)은 일족을 북만주로 이주시키고 金政植, 金昌魯, 金聲魯는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각각 국내로 파견하였다. 여기서 천전인의 서간도 생활에서 북만주시대가 시작되었다. 북만주에는 일본인의 손길이 미치지 않았다.(P218)
金政植은 경신참변을 당하고 국내에 들어와 곧 검거되어 3년 간의 옥고를 치루었다.
金聲魯 역시 국내에 들어왔다가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7년 징역형을 살다가 1922년 4월 4일 옥사하였다.
천전인의 수난 소식을 듣고 고향에서 김동삼의 종제 金章植이 달려왔다.
금계 출신 金元植도 이 무렵 만주로 망명하였다.
임동면 책거리 장터의 3.1운동에 참가했다가 망명한 柳林이나 남편을 일본군에 잃은 南慈賢여사가 만주에 간 것도 이 때였다.
안동, 상주, 영주 일대의 유림 청년들이 義勇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폈던 것도 이 때의 이야기로 천전인으로는 金秉東, 金龍煥 金奎憲이 그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었다.(P219)
(15) 3.1운동 시에 안동에서는 길안면 정터(泉旨里)시위운동에 梧垈里의 천전인이 집단적으로 참가했다. 조선 후기 霽山 金聖鐸의 후예로서 金珌洛이 일본군에게 호령을 하다가 처형되었고, 金徵魯, 金載洛이 재판을 받았다.(P240)
3.1운동의 시위운동과는 별도로 유림이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승인 촉구서를 송달하였는데 이를 파리장서라고 한다. 파리장서는 서울에서 金昌淑 등이 추진하여 137인의 대표 명의로 독립 촉구서를 보낸 것이다. 안동에서는 金秉植, 金瀁模 등이 천전 문중을 대표하여 참가하였다. 파리장서는 유림의 위정척사 논리를 극복하고 새로운 근대적 독립운동 논리를 개진하고 있었다는 데서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 제1차 유림단 사건(P241)
3.1운동 이후 1920년대에 임시정부 지원 활동으로 金瀁模의 子인 금계리의 金연煥이 주도하여 임시정부 재무부장 이시영과 연락하여 모금활동을 폈다.
1922년에는 義勇團이 조직되어 금계 종손 金龍煥이 철저히 신분을 위장하고 의용단 서기로 , 또 금계 출신 金秉東, 金奎憲 등이 활약하다가 1922년 12월 28일 발각되어 모두 1년 이상의 옥고를 치루어야 했다.(P219, P243)
제 2차 유림단 사건은 1925-1926년에 心山 金昌淑 등이 중국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금계획을 세우고 국내에 잠입하여 주로 경상남북 유림을 상대로 모금하여 1926년 心山 金昌淑이 탈출한 후 발각되어 많은 유림이 옥고를 겪었던 사건을 말한다. 心山이 국내에 머문 기간이 8개월 정도였는데 그 동안 비밀이 유지된 것도 놀라운 유림의 결속이라 아니할 수 없고, 특히 이 때에 안동 영주 봉화 유림의 호응이 남달랐는데 봉화 법전면 소천리 四未亭 마을의 金東植, 金華植, 金昌植은 鶴峰의 제6자의 후손들이다.(P244)
1920년대에는 마을마다 야학, 농민운동, 청년운동이 활발했는데, 지례마을에서 金聖煥 金弼煥이 우리농림회를, 輞川의 金時萬 등이 안동청년동맹 망천지부를 만들었다. 1927년 신간회 결성에서는 천전인 金厚植, 金廷植의 참여를 볼 수 있다.(P245)
1930년대 이후에 들어서면 독립운동 전반에 걸친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타계하고 만주에서도 괴뢰 만주국 건설 이후 독립운동은 지하운동으로 전개하였다. 천전 인사들이 취원창을 지키며 지하 운동을 할 때(金政植 등) 천전 문중의 문장인 金衡植은 연년 딸, 자부, 부인을 병마에 잃고 양자 正魯를 고향에 돌려 보낸 뒤 한 때 외로이 나날을 보냈으며, 고향에 돌아온 正魯는 두문불출하고 이웃과도 교유 없이 논밭만을 오가며 오로지 일본의 패망만을 축원하였다. 천전리 뿐 아니라 온 나라가 숨을 죽이고 있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