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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절개 황현(黃玹) ( 1855-1910)
(매천 초상화)
1. 서론(緖論) 매천 황현(黃玹 1855-1910)선생은 한말의 우국지사로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합병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신 분이다. 매천사는 정면 3칸과 측면 2칸의 사당건물과 유물관 등이 남아 있는데 주목할만한 유형의 문화재는 없다. 유물로는 매천선생의 가죽신, 벼루, 연수, 지구위, 도장, 병풍, 교지, 초상화와 서책 1,300여권이 보존되어있다. l962년(문화재청의 자료는 1955년) 매천의 후손과 제자, 그리고 지역의 유림들이 선생의 정신을 기려 세운 사당으로 1984. 2. 9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제37호로 지정돼 있으며 매년 3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난 황현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종 20년(1883) 왕의 특명에 의해 실시된 보거과 첫 시험에 응시하여 우수한 성적을 얻었는데, 시골사람이라는 불합리한 이유로 자신이 2등으로 밀려난 사실을 알고서 잇달아 있는 시험을 모두 내쳐버리고 귀향했다. 이후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는 못하여 고종 25년(1888) 생원회시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뒤 청나라와 일본의 경쟁, 고종의 어려운 정치, 명성황후의 독점적인 세도정치 등 부패가 극심한 세태를 보고는 구례로 내려와 역사와 경세학 등 독서와 시문 짓기에 열중하였다. 그 사이 갑오농민전쟁 갑오개혁 청일전쟁을 비롯하여 이듬해 명성황후시해사건, 아관파천 등이 잇달아 일어나자 그는 어지러운 세태를 후손들에게 바로 알려주기 위해 경험하거나 보고들은 이야기들을 <매천야록>(梅泉野錄), <오하기문>(梧下記聞)등의 책으로 남겼다. 특히 <매천야록>은 황현선생을 더욱 유명하게 한 책으로 흥선대원군이 정치권력을 잡을 때인 1864년부터 대한제국이 망한 1910년까지 47년간에 걸친 이 나라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그의 나이 10세대의 사실부터 듣고 본 것을 기록한 셈인데 그 자료는 대부분 1874년 그의 나이 20세가 되어 서울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들은 것과 31세 이후 구례 광의면 월곡리에 은거하면서 듣고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시기를 식민지로 가는 과정이었다고 지적하고 책의 맨 앞에서 당쟁의 폐해를 논하고 사대부의 타락한 모습을 지적했다. 나라가 망하게 된 원인을 여기에서부터 찾았다고 한다. 이 책은 일종의 야사이지만 자결로 자신의 뜻을 보인 자신의 기개만큼 논조가 냉철하다. 그러나 이 글이 선생 사후에 바로 세상에 알려진 것은 아니다. 필사부본이 상해에 있던 김택영과 남원읍 방정식에 전해져 조선사편찬회에 알려졌을 뿐 원본이 숨겨져 일제기를 지냈다가 해방이 된 그 후 유족 황유현에 의해 국사편찬위에 전해져 빛을 본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955년 한국사료총서 제 1집으로 이「매천야록」을 펴낸 것을 보더라도 이 야록의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산청의 남명 조식선생과 함께 지리산의 동서쪽을 대표하는 인물로 추앙되고 있다. 초야에 묻혀있는 선비가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는 지경을 바라보면서 무력감과 절망감에 몸부림치다가 절명시 4편을 유서처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던 것이다. 2. 절명시(絶命詩) 亂離滾到白頭年(난리곤도백두년) 난리를 겪어 허옇게 센 머리 幾合捐生却未然(기합연생각미연) 죽고자 했어도 죽지 못했던 것이 몇 번이던가 今日眞成無可奈(금일진성무가나) 오늘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輝輝風燭照蒼天(휘휘풍촉조창천) 바람 앞의 촛불이 하늘을 비추누나 妖氣晻翳帝星移(요기암예제성이)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큰 별이 옮겨지니 九闕沈沈晝漏遲(구궐침침주루지) 대궐은 침침하여 시간 또한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조칙종금무복유) 이제는 조칙을 다시 받을 길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임랑일지루천사) 구슬 같은 천만 줄기 눈물만 쏟아지는구나 鳥獸哀鳴海岳嚬(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산천도 찡그리는데 槿花世界已沈淪(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우리세상 없어졌구나 秋燈掩卷懷千古(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을 덮고 옛말을 생각해보니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글 배운 사람 구실이 이처럼 어렵구나 曾無支厦半椽功(증무지하반연공) 내 일찍이 나라 위해 서까래 하나 놓은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지시성인부시충) 내 죽음 겨우 인을 이룰 뿐 충을 이루진 못했어라 止竟僅能追尹穀(지경근능추윤곡) 이제 겨우 윤곡1)처럼 죽음에 거칠 뿐 當時愧不攝陳東(당시괴부섭진동) 그때의 진동2)처럼 나라 위하지 못함이 부끄럽구나 절명시에 들어 있는 그의 심정은 그가 개인적으로 가족에게 남긴 유서ꡐ유자제서ꡑ(遺子弟書)를 봐도 알 수 있다. ꡒ내가 죽어야 할 의리가 없지만 다만 국가가 선비를 기른지 5백년이 되었는데 나라가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오히려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나는 위로는 하늘이 내린 본성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 성인의 글을 읽은 바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길이 잠들고자 한다. 이는 진실로 통쾌한 일이니 너희들은 슬퍼만 하지 말라.3) 격동의 조선 말기를 살다 간 역사가이자 시인인 매천은 망국의 소식을 듣고 세 덩어리의 아편을 삼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아편을 먹기 전 세 차례 망설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죽었다. 부패가 역병처럼 창궐하고 주변국들이 야수가 되어 잡아먹겠다고 덤벼드는, 그 나라를 걱정하다 결국 자신이 책임질 것도 없는 亡國의 비보를 듣고 그렇게 갔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는 애국과 우국, 순국이라는 말이 따라 다닌다. 그가 남긴 저서 ꡒ매천야록ꡓ과ꡒ오하기문ꡓ등에서 그는 잠시도 나라 사랑과 나라 걱정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가히 애국열사의 표상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1910년 9월 7일 새벽. 경술국치(庚戌國恥․1910년 8월 29일)의 비보를 들은 지도 1주일이 지났다. 아편 세 덩어리를 앞에 두고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시름에 빠진 매천(梅泉) 황현(黃玹). 이미 시인으로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절명시(絶命詩) 4수(首)를 써놓은 상태다. 저승을 코앞에 둔 그의 생각은 시구(詩句) 그대로 천고(千古)를 돌아볼 만큼 깊기만 하다. ꡒ이 아편 덩어리들을 삼키기만 하면 이제 저 세상이다. 나라 잃은 선비가 무슨 낯으로 세상을 대할 것인가. 그런데 진정 이것을 삼켜야 하는 것일까. 죽을 수 있을까.ꡓ망국(亡國)의 한을 달랠 길 없어 죽기를 각오하고 생을 끝내는 마지막 시까지 써 놓았건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손은 쉽게 아편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아편을 손에 들고 입에 대었다 떼었다 하기를 몇 차례. 그러다 결국 소주와 함께 그것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ꡐ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다니….ꡑ 선비로서, 사대부로서 매천은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까지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매천은 죽음에 이르렀다. 숨이 막히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증세가 점점 더 심해졌다. 지난 1주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으로 날을 보내지 않았던가. 몸은 허해질대로 허해져 아편 기운은 금세 몸을 휘감고 돌았다. 꿈인지 생시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절했다 깼다를 반복한 것도 여러 번. 그는 하루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보내다 결국 다음날 아침 한 많은 세상을 등졌다. 그의 나이 쉰다섯. 역사가로서, 시인으로서 한창 완숙미를 뽐낼 때였다. 죽기 직전 가족들은 통곡하며 그를 살리려 애썼지만 매천은 살기를 거부했다.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했던 자신이 초라해질 뿐이었다. 마지막 죽어가는 자리에서 그는 동생 황원(黃瑗)에게 부끄러움을 토로한다. ꡒ아우야, 내가 아편을 입에 댔다 떼었다를 세 차례나 했다. 선비로서 도리를 지키지 못했구나.ꡓ 3.ꡒ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ꡓ
나라를 잃은 선비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가 남긴 4수의 절명시(絶命詩)에는 슬픔, 고통, 절망, 수치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ꡒ대궐이 침침하고 어둡다ꡓ(九闕沈沈晝漏遲)고도 했고ꡒ해맑은 종이에 천가닥 눈물이 난다ꡓ(琳琅一紙淚千絲琳)고도 했다.ꡒ나라 위한 벼슬아치가 아니니(曾無支廈半椽功) 이 죽음은 도리일 뿐 충일 수 없다ꡓ(只是成仁不是忠)는 시구도 있다. 녹(祿)을 먹는 자가 그렇게 많아도 자기 배불리고 자기 일가(一家) 편하기만 원했을 뿐이라는 말이다. 그만큼 썩은 나라라는 사실이 절망감을 부추기지만 한편으로 나라가 망한 날 죽은 자 있으니 아직 그 나라는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기도 했다. 격동의 조선 말기를 살다 간 역사가이자 시인인 매천선생은 1864년(고종 1)부터 1910년(순종 4) 경술국치일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역사를 그린 ꡒ매천야록ꡓ(梅泉野錄), 19세기 동학혁명을 집중적으로 쓰고 있는ꡒ오하기문ꡓ(梧下記聞), 한시(漢詩)를 중심으로 한 선생의 유고집 ꡒ매천집ꡓ(梅泉集)이 선생이 남긴 대표작들. 이 글들 안에는 나라사랑, 나라 걱정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늘 ꡐ나라ꡑ를 앞세운 그였기에 나라에 누(累)를 끼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도 그의 붓 아래서 살아남지 못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최고 통치자인 고종과 그의 비(妃)인 민씨, 또 세도가로 악명이 자자했던 그의 친인척, 나라의 녹을 먹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고관대작들, 나라가 어지럽다며 남을 해하는 도적떼의 우두머리들…. 누구 하나 성한 사람이 없었다. ꡒ매천필하무완인ꡓ(梅泉筆下無完人), 즉 세상은ꡒ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었다ꡓ고까지 말하고 있다. 모든 역사 인물을 이해하기 위한 첩경은 당시 시대 상황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매천선생도 예외가 아니다. 어쩌면 누구보다 시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할지 모른다. 그만큼 선생은 혼란과 격동의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1855년생이니 선생은 아편전쟁이 발발한 지 13년, 일본이 미국에 의해 쇄국의 빗장을 연 지 2년 후 태어났다. 이후 벌어진 사건들은 큰 것만 꼽아 봐도 시대가 어느 정도 격변기였는지를 알게 된다.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한 ꡐ병인사옥ꡑ, 미국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격침당한 ꡐ셔먼호 사건ꡑ, 프랑스 함대가 통상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습격했던 병인양요. 하나하나가 쇄국을 고수하던 조선 사회에 경천동지(驚天動地)의 충격을 안겨줬을 만한 이 세 가지 사건들이 모두 그의 나이 11세 때 일어났다. 처음 한시를 지어 향리 어른들을 놀라게 한 바로 그때였다. ꡐ신동ꡑ소리를 듣던 명민한 그가 세상사 돌아가는 일,ꡐ역사ꡑ에 무심할 리 없었다. 19세기 중반 문호 개방을 요구하던 외세와 사사건건 충돌하면서도 조선은 철저하게 쇄국정책을 고수했다. 1863년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870년대 중반 조선의 정책은 쇄국에서 개국으로 급선회했다. 개국이 세계적 추세라는 인식이 지배층에 유포됐던 것도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1873년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며 철저한 쇄국주의자 대원군이 하야한 것이 정책 변화의 주요 동기였다. 조선이 마침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한 1876년은 선생의 나이 21세가 되던 해다. 피 끓던 젊은이였다. 그는 외세의 압력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쇄국의 빗장을 연 것을 한탄했다. 극심한 사회 혼란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개국파와 쇄국파의 분란에 굶주린 민중이 들고일어날 것이 뻔했다. 여기에 자기 몫만 챙기는 부패한 세도 권세가들이 있지 않은가. 어두운 앞날을 예견하며 시름에 잠긴 그가 방 한쪽 구석에서 시로 마음을 달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꼼꼼히 기록으로 남기고자 했던 단심(丹心)에 이해가 간다. 매천선생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한 그가 정통 유생(儒生)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장수(長水) 황씨로 세종대의 명재상이요,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 황희4)의 후손임을 늘 자랑삼아 얘기했던 그였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활약한 황진(黃進5)), 인조 때 정언(正言)을 지낸 황위(黃暐)6)는 가문을 빛낸 또 다른 자랑거리. 하지만 그 이후로는 얘기가 달랐다. 8대조인 황위이래 벼슬이 끊ꡐ몰락양반ꡑ이라는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잔반(殘班)들처럼 끼니를 걱정해야 할 신세는 아니었다. 그의 집안은 전남 광양(光陽)에서 손꼽힐 만큼 거부였다. 모두 조부와 부친 황시묵(黃時黙)의 덕이었다. 조부는 조상이 물려준 가난을 딛고 부(富)를 모았으며 부친은 이를 잘 관리하여 영특한 아들이 아무 걱정 없이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줬다. 어느날 갑자기 그에게 서적 1천권을 사줬다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는 것을 보면 집안의 뒷받침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매천은 집안의 자랑이었다. 집안에서는 그의 영특함이 8대조 이래 벼슬한 사람이 없다는 가문의ꡐ치욕ꡑ을 씻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매천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총명함이 마을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7세 때부터 서당에 다니기 시작한 그는 천자문을 간신히 떼어도 다행일 11세의 나이에 멋들어진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주자(朱子)의 ꡒ통감강목ꡓ(通鑑綱目)은 모두 암기했을 정도였다. 그가 벼슬에 대한 집안의 뜻을 처음부터 거슬렀던 것은 아니다. 14~15세 때 본도시(本道試)에 응시했고 17세 때는 순천영(順天營)의 백일장에도 응시하면서 자신의 필력(筆力)을 떨쳤다. 글에 대한 욕심도 한껏 커지고 있었음이 분명했다. 시골 한 귀퉁이에서 그를 만족시키는 문장가와 새 학문을 찾기 어려웠다는 사실은 19세 되던 해 그가 무작정 상경했다는 것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는ꡒ유림노사(儒林老師)의 진부한 학문(儒者陳腐之學)에 염증을 느낀다ꡓ며 그해 홀홀단신으로 서울을 찾았다. 이후 그의 행각은 장안을 떠들썩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시로써 세상을 논하고자 서울의 내로라하는 논객들을 찾아 다녔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 시골뜨기 선비가 서울의 최고 문인들에게 도전장을 낸 셈 이었다. 처음에는 우습기도 했겠지만 그의 글은 이내 이들을 사로잡았다. 이때 만나 평생 뜻을 같이했던 동료들은 조선의 쟁쟁한 문인들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7), 추금(秋琴) 강위(姜瑋)8),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9),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10) 등이다. 특히 이건창과의 교우는 신교(神交)로 알려질 만큼 애절한 것이었다. 영재는 매천의 글을 가리켜 ꡒ붓끝의 기백은 반고(班固․後漢의 역사가)가 눈에 차지 않는다ꡓ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천은 조선시대 선비의 최고 꿈인 관계 진출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ꡒ마을마다 급제자가 나오고 집집마다 진사가 있을 정도ꡓ로 혼탁한 세상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도 집안의 권유를 물리치지 못해 과거를 친 적이 꼭 두 번 있다. 처음은 1883년(고종 20), 그의 나이 29세 때 일이었다. 정기 과거에 응시하지 못한 사람을 위한 특설보거과(特設保擧科) 초시(初試)에 응시해 차석을 차지한 것이 첫 시험 성적표다. 고향에서나 집에서나 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ꡒ시골 사람에게 수석 자리를 줄 수는 없었다ꡓ는 말에 분개해 낙향하고 말았다. 썩어빠진 관료들의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ꡒ다시는 과거를 보지 않겠다ꡓ고까지 했다. 더러운 세상에서 입신출세란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 한번 과거를 보게 된다. 8대 동안 급제자를 내지 못한 집안의 치욕을 씻어 보겠다는 부친의 뜻은 좀처럼 꺾일 기세가 아니었다. 매천의 부친은 그가 고향에 돌아온 후 늘 ꡒ내 생전에 너는 반드시 과거에 응시해야한다ꡓ며 관계 진출을 부추겼다고 한다. 부친의 뜻을 이기지 못해 두 번째 시험장에 나선 것이 1888년. 34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성균관 회시(會試) 생원시(生員試)를 치렀다. 여기서 그는 당당하게 장원(壯元)으로 합격, 금의환향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시험감독 정범조(鄭範朝)11)가 재주를 인정했다 하여 기분도 좋았겠지만 부친의 뜻이 하도 강고해 그는 일단 성균관 생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비로소 중앙 무대에 진출한 것이다. 하지만 이도 얼마 가지 못했다. 무능력한 국왕, 추악한 세도가, 부패한 관료들 틈새에서 더 이상 뜻을 펼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는 서울을 찾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가 할 일은 오직 책읽기와 책 쓰기였을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던 것이다. 그는 왜 관료로서의 출세를 마다하고, 또 좋은 벗들이 그토록 만류했는데도 서울을 떠났을까. ꡒ매천집ꡓ을 엮은 창강 김택영의 얘기를 들어보자. 1933년 소화 8년에 간행된 "매천집". '삭제'라는 표시가 조선총독부의 검열 표시를 나타낸다.ꡒ당시에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가의 우환이 날로 커지고 있었으며 정사(政事) 또한 날로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설 뜻이 없었던 매천은 마침내 두문불출, 서울에 모습을 내놓지 않고 오직 책에만 마음을 두고 있었다. 서울 친구들이 가끔 편지를 보내 서울을 너무 오래 떠나 있는 것 아니냐며 책망의 말을 하니 매천은 ꡐ자네들은 어찌 나로 하여금 귀신 나라의 미친 무리들 속에 끼어 미친 귀신 짓을 하게 하고 싶어 하는가ꡑ(子奈何欲使我入於鬼國狂人之中, 而同爲鬼狂耶)라고 했다.ꡓ(매천집 1권) 귀국(鬼國)과 광인(狂人). ꡐ귀신나라와 미치광이들ꡑ이라는 이 말은 20세기를 전후해 외우내환(外憂內患)과 누란지위(累卵之危)의 조선에 대한 매천의 역사의식을 대변한다. 구미 열강들은 물론 청과 일본까지 잡아먹겠다며 나선 마당에 무슨 세도가요, 무슨 왕실의 친인척까지 나서 부정부패를 저지른다는 말인가. 역사가 매천의 눈에 조선은 귀신과 미치광이들이 날뛰는 세상이 아닐 수 없었다. 매천은 결국 이 사사로운 세상을 떠나 향리에 칩거하며 평생을 세상에 대한 ꡐ관찰자ꡑ로만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빠짐없이 수집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겨 후세인들에게 반성의 기회를 만들어 줬다. 고향 광양으로 돌아온 후 거처를 구례로 옮긴 그는 1890년 개인 서재를 마련해 본격적인 집필 작업에 들어갔다. ꡐ구안실ꡑ(苟安室). 서재 이름에조차 그의 생각이 묻어 있다. ꡐ구차하게 쉬는 방ꡑ이며 동시에 ꡐ구차하지만 편안한 방ꡑ이다. 또 ꡐ구차하게 편안함을 구하는 방ꡑ일 수도 있다. 바로 이 방에서 그는 자신을 역사가로 인정받게 한 ꡒ매천야록ꡓ과 ꡒ오하기문ꡓ을 썼다. 매천의 역사관을 보자. 시대가 시대였던 만큼 그가 설정했던 가장 중요한 주제는 ꡐ망국ꡑ(亡國)이다. 누구 때문에, 왜 나라가 망했는지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한자의 어법을 십분 활용한 풍자와 비판은 그를 더욱 확고부동한 ꡐ역사가ꡑ로 만든다. 누가 나라를 망하게 했는가. 그가 우선 꼽는 사람은 왕과 명성황후 민씨였다. 매천은 이들의 무능과 부패를 망국의 첫 번째 요인으로 보고 있다. 그의 글을 본 현대 역사가들은ꡐ매천이 왕과 비를 저주했다ꡑ거나ꡐ일본보다 더 미워했다ꡑ는 등의 해석을 주저없이 쓸 정도. 매천의 붓 끝은 무엇보다 이들의ꡐ인재등용ꡑ을 질타하고 있다. 무당이나 점술가 등을 요직에 배치했다는 사실은 매천이 조선을 ꡐ귀신나라ꡑ라고 부른 가장 중요한 이유다. ꡒ매천야록ꡓ은 무당 진령군(眞靈君)의 중용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는다.ꡐ진령군이라는 무당이 충주에 피난가 있던 민비의 환궁일을 예언하여 중용되자 수령이나 병졸, 수사(水使)가 그의 손에서 나왔고 재상(宰相)들이 다투어 자매와 의자(義子․의붓아들)가 됐다. 그리고 한말에 법무대신까지 지낸 김해 출신의 이유인(李裕寅)은 궁핍한 무뢰배임에도 불구하고 귀신을 부릴 수 있다 하여 진령군의 추천을 받아 양주목사로 부임받기도 했다.ꡑ그가 열거하고 있는 무당과 점술가의 중용 사례는 이 뿐만이 아니다.ꡐ점술가 안영중(安永重)은 현풍군수로, 거창 출신 차성충(車聖忠)은 요술을 부릴 줄 안다 하여 왕의 사랑을 받았다. ꡐ왕은 진령군이 죽자 상복을 입었던 그의 의붓아들 김사묵(金思黙)이 경무사(警務使)로 있을 때 탄핵을 받았으나 진령군을 생각해 그대로 유임시켰으며…ꡑꡐ충주인 성강호(成康鎬)는 귀신을 알아볼 수 있다 하여 왕이 죽은 민비를 보게 하고 그리하여 그 집의 문은 성시(盛市)를 이뤘다ꡑ고 지적했다. 그는 또 고종을 가리켜 ꡐ사사로운 일에 끌려 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가 다만 그 일이 해결될 수 없을 만큼 착찹하게 된 후에야 적합한 인재를 기용하고는 했다ꡑ고 쓰고 있다. 그가 보기에 이것이 민란이 계속되는 이유였다. 민란이 끝난 후에도 그 근본적인 원인을 찾아 없애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함흥민란, 북청민란, 제주민란 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있다가 문제가 더 커지자 민란을 잠재울 인재를 구했다고 했다. 일단 고종이 최종적으로 등용했던 서정순(徐正淳)․이규원(李圭遠) 등은 적임자로 본 것이다. 그러나 ꡐ민란이 평정되면 그대로 방치했다ꡑ고 쓰고 있다. 발본색원하지 않고 임시방편의 처리만 함으로써 사회 혼란이 가속화됐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고종의 야합과 편협, 우유부단에 대한 지적도 날카롭다. 우선 그는ꡒ고종의 성품은 자신이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남들과 영합하기를 좋하했다ꡓ고 말한다. 이건창이 충청감사 조병갑의 탐학(貪虐)을 조사해야 한다는 건의를 묵살한 후 그를 기피했으며 자신을 노론(老論)이라 하며 남인․북인․소론 등 3색을 노골적으로 천대함으로써 최고 통치자로서의 불편부당성을 망각하고 나아가 관료의 당파싸움을 부추기기까지 했다고 지적했다. 특히 각 대신들을 임명하고 1주일도 채 안돼 자리를 바꾸게 하는 등의 졸속행정으로ꡒ부하직원들이 공문서를 들고 갈 곳을 모르더라ꡓ는 탄식은 오늘날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고종이 뇌물을 좋아했다는 말도 곳곳에서 나타난다. ꡒ남정철(南廷哲)이 과거에 급제한 지 2년도 안되어 평안감사가 됐다. 왕가의 친척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 빨리 출세한 것은 근세에 없는 일이었다. 그는 감영(監營)에 있을 때 고종에게 계속 뇌물을 바쳤는데 고종은 그가 충성한다고 생각하고 영선사(領選使)로 임명해 톈진(天津)으로 보내면서 크게 기용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민영준(閔泳駿)이 남정철과 교체된 후 작은 송아지가 수레를 끄는 조각을 황금으로 만들어 고종에게 바치자 고종은 얼굴빛이 바뀌며 남정철을 꾸짖었다. ꡐ남정철은 알고 보니 큰 도적놈이로구나, 관서(關西)에 이렇게 금이 많은데 혼자 독식했다는 말이냐?ꡑ 이때부터 그에 대한 총애는 쇠퇴했고 대신 민영준이 날로 중용됐다.ꡓ(매천야록) 명성황후에 대한 글 역시 여러 책 곳곳에서 등장한다. 물론 대부분 부정적인 내용들이다. 얼마나 탐욕스러운지,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악독한 성품인지…. 매천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정말 ꡐ귀신 나라ꡑ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매천야록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은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ꡒ신묘년(1891년) 겨울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강(堈)을 의화군(義和君)에 봉하자고 권했다. 의화군은 상궁 장씨(張氏)의 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명성황후는 화가 나서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장씨의 거처로 가 … 큰 소리로 ꡐ칼 받아라ꡑ고 외치며 방으로 뛰어들었다. 장씨는 본래 힘이 세어 한 손으로는 칼자루를 잡고 한 손으로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땅에 엎드려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명성황후는 … 칼을 던져 버리고 웃으며 ꡐ과연 대전의 사랑을 받을 만하구나. 지금 너를 죽이지는 않겠다만 다시는 궁중에서 거처할 수 없다ꡑ고 한 후 장정을 불러 그녀를 포박하게 했다. 그리고 그녀의 음부 양쪽의 살을 도려낸 후 … 밖으로 내쫓아 버렸다. 그후 장씨는 형제들에게 10년 동안 의지하고 살다가 그 상처로 인해 죽고 말았다.ꡓ(매천야록) 명성황후와 함께 민씨 일가의 세도정치도 매천은 극히 싫어했다. 요직을 모두 차지한 후 온갖 부정부패를 다 저지르고 있었으니ꡐ망국ꡑ의 또 다른 기여자였다.ꡒ오하기문ꡓ에서 그는ꡐ대개 성이 민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탐욕스럽다. 전국의 큰 고을이라면 대부분 민씨들이 수령 자리를 꿰찼고 평양감사와 통제사는 민씨가 아니면 할 수 없게 된 지가 이미 10년이나 됐다ꡑ고 쓰고 있다. 나라를 잡아먹는 귀신은 다름 아닌 민씨 일가임을 알게 해 주는 대목이다. 그의 글 곳곳에서 민씨 가문에 대한 혐오증이 드러난다. 4. 개화당, 동학혁명에도 부정적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는 개화파나 동학혁명에 대해서도 매천의 평가는 결코 좋지 않았다. 현대 역사가들로부터 매천이 외면당하는 이유 중 하나다. 일부 역사가들로부터 메이지유신에 비교되는 평가를 받고 있는 갑신정변에 대해 매천은 거의ꡐ최악ꡑ인 해석을 내리고 있다. 그 중심 세력인 개화당을 가리켜ꡐ도적ꡑ이나 ꡐ역당ꡑ(逆黨)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이들의 살육과 횡포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동시에ꡐ음모ꡑ의 실패를ꡐ하늘의 뜻ꡑ으로 말하고 있다. 동학혁명에 대한 것은 개화당 이상이다. 매천에게 동학은 ꡐ굶주린 백성을 선동하는 술수ꡑ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동학도를 가리켜 서슴없이ꡐ동비ꡑ(東匪)ꡐ비도ꡑ(匪徒)ꡐ비적ꡑ(匪賊)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모두 도적떼 라는, 적의에 찬 용어들이다. 심지어 ꡐ그들에게 교형(交刑)을 처하고 참형(斬刑)에 처하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그들에게 알맞은 처형을 시행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ꡑ고 쓰기까지 했다. 그는 동학농민군과 대치하다 전사한 김한섭(金漢燮)을 추모하는 시구에서 동학도를 가리켜 개미․뱀․돼지로 비유하고 있다. ꡐ지난해 호남의 적들 개미떼 같더니(往歲湖南敵如蟻)/눈 깜짝할 새 뱀․돼지떼가 됐구나(轉眼猖獗蛇而豚)ꡑ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매천의 눈에는 도적이요, 모두가 미치광이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몇몇 인물들에 대해 그는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충신이요, 이들의 정신이야말로 유일한 나라의 희망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침략의 손길을 뻗치는 일제에 항거하다 목숨을 끊은 순국열사들. 이들에 대한 매천의 마음은 각별하다. 특별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며 순국의 전후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우리 후대인들은 그의 사실적 묘사로 인해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선열들과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ꡒ1905년 11월4일, 민영환12)(閔泳煥)이 자결했다 … 민영환은 탄식하기를 ꡐ어찌 집으로 갈 수 있겠는가ꡑ하면서 옛 하인인 이완식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묶었다…. 그는 일어나 화장실로 가 이완식을 부르며 ꡐ내가 설사를 하였으니 끓인 물을 조금 갖다 주게, 내 손을 조금 씻어야겠네ꡑ라고 하자… 그는 손을 씻은 후 통증을 느끼는 듯한 말로 ꡐ내가 무슨 죄가 있어 죽지 않고 이럴까ꡑ라고 했다. 이완식은 크게 놀라며 화급히 그를 끌어안고 문을 부수듯 방으로 들어갔다. 선혈은 이미 그의 다리까지 묻어 있었다. … 그러나 그는 절명한 상태였다. 벽에는 피묻은 흔적이 있었다. 촛불을 밝혀 보니 손가락으로 문지른 자국이 완연했다. 차고 있던 칼이 짧아 첫 번째 찌를 때 죽지 않고 피가 칼자루에 묻어 칼자루가 미끄럽자 손을 벽에다 닦은 후 다시 정신을 차려 찌른 것이다. 그는 후관(喉管․목구멍)이 다 베어진 채 죽어 있었다. 이완식은 큰 소리를 내어 통곡하였고 온 가족들도 그를 따라 울었다. 그 곡성(哭聲)은 서로 전달되어 삽시간에 성안으로 퍼져 산이 꺼질 듯이 요란했다.ꡓ(매천야록)
매천의 순국자에 대한 애정은 정말 남달랐다. 그의 붓은 단지 민영환과 같은 고관대작에서 일개 병졸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잃어 비분강개한 마음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애국지사에게는 특별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아주 상세한 묘사를 통해 자손만대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을 역사가의 의무로 알았음직하다. 그가 많은 양을 할애한 순국지사 김봉학(金奉學)은 평양에서 징집된 일개 병졸에 불과했다.ꡒ어찌 왜놈을 때려죽이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냐는 그의 말에 여러 장병들이 웃고 말자 그는 영문(營門)으로 달려가 입에 칼을 물고 한번 높이 뛰어 내려 엎어졌고 그 칼은 등을 관통했다ꡓ고 썼다. 순국의 전말을 잘 모른다면서도 학부주사(學部主事) 이상철(李相哲)의 죽음에 대해 아는 한도 내에서 기록을 남겼다. 힘이 닿는 한 반드시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심지어 그는 민영환의 사랑채에 살며 인력거를 끌던 인부가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목을 맸다는 사실까지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5.ꡒ가련타 , 어디에 님의 뼈를 묻사오리ꡓ 그러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3)만큼 그의 마음을 비탄에 빠지게 만든 순국지사는 없었다. 면암은 잘 알려진대로 개항기 흥선대원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길을 걸었던 유림(儒林). 1868년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한 후 삭탈관직 당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다시 기용된 후에도 끊임없이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해 제주도 귀양살이까지 한, 한말 쇄국을 주장했던 대표적 선비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전라도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하다 체포되어 쓰시마(對馬)섬으로 유배되어 단식 끝에 죽었다. 매천은 면암이 두번째 상소를 올려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을 때ꡒ한성의 사녀(士女)들은 술을 들고 다니기도 하고 향화(香火)를 머리에 이고 다니기도 하여 그 불빛이 거리를 찬란하게 비추었다. 그들은 이토록 최충신(崔忠臣)이 다시 살아난 것을 경축한 것이다ꡓ라며 그의 고결한 정신을 찬양했다. ꡒ매천야록ꡓ은 면암이 죽고 그 시신이 부산 동래를 찾던 날 풍경을 이렇게 쓰고 있다. ꡒ11월17일 전 판서(前判書) 최익현이 쓰시마에서 사망했다. … 그리고 21일, 그 상여가 부산에 도착하자 우리나라 상민들은 상점을 열지 않고 친척을 잃은 듯이 슬퍼하였다. … 그 상여를 따르며 미친 듯이 통곡하는 사람은 셀 수 없었다. 스님․기생․걸인들까지 영전에 바칠 제물 광주리를 들고 인산인해를 이뤘으며 … 그리고 그 부음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모여 동래를 출발하던 날에는 상여가 거의 가지 못할 정도였다. 일본인들은 무슨 변이 생길까 싶어 매우 엄하게 호위하면서 … 이때 사대부로부터 가동주졸(街童走卒)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를 ꡐ최면암이 죽었다ꡑ고 하면서 슬피 울었다. 나라가 세워진 이후 죽은 사람을 위해 이렇게 슬피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ꡓ(매천야록) 이ꡐ조문객 안에는 매천도 있었다. 한을 품고 굶어 죽은 면암을 위해 사대부들은 만사(輓詞) 하나씩을 써 그의 저승길을 달랬다. 그의 빈소에는 만사 수천장이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중에는 매천이 써놓은 만사 6수도 있었다. 처음에는 사시(斜視)의 시골뜨기가 써놓고 간 만사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글을 펴는 순간 그가 매천임을 알고 놀랐다는 얘기도 있다. 그의 시적 재능을 알려주는 일화다. 당시 사람들은 ꡒ매천의 만사가 으뜸ꡓ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의 만사ꡐ곡면암선생ꡑ(哭勉庵先生)은 실로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민다. 英年抱贄華溪門(영년포지화계문)이항로께 배움받은 꽃다운 나이로 救火人家位偶尊(구화인가위우존)애타는 백성 구하고자 상소를 올리셨지
宰相儒林都結局(재상유림도결국)선비거나 재상이거나 이제는 모두 끝이구려 海東千載有公言(해동천재유공언)천년 만년 길이 길이 공론만 남았소
腐心萬里南冠○(부심만리남관○)속 썩은 귀양살이 이역이라 만리밖 屈指三霜赤○還(굴지삼상적○환)빨간 신 신고 오신다기에 삼년을 손꼽으며 기다렸는데
海外光陰來雁少(해외광음내안소)소식조차 뜸했던 그 사이 바다 건너서 天涯消息落星寒(천애소식낙성한)하늘 끝 큰 별 떨어졌다는 기별이니
招魂且莫登高望(초혼차막등고망)초혼한다 하여 높은 곳 올라 바라볼 생각마소 厭見靑蒼馬島山(염견청창마도산)푸르른 대마도 보기조차 싫지 않소
故國有山虛影碧(고국유산허영벽)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可憐埋骨向何方(가련매골향하방)가련타 어디에 님의 뼈를 묻사오리 6. 국내 漢詩史에서도ꡐ으뜸ꡑ
ꡐ곡면암선생ꡑ은 면암 선생을 기리는 만사로 뿐만 아니라 국내 만사 중에서도 걸작으로 인정받는다. 한시학자 이병주(李丙疇)는 매천의 시가를 가리켜 ꡒ지극히 깔깔하고 꼼꼼해 우리 한시사에서도 손꼽힌다ꡓ고 평했다. 역사학자 박은식(朴殷植)은 또한 ꡒ한국통사ꡓ에서 매천을 두고ꡐ기절(氣節)이 사림(士林) 중 으뜸ꡑ이라는 평을 남겼다. 그의 삶은 물론이요, 그의 한시에도 지조와 절개가 알알이 배어 있었다. 시대가 시대이니 만큼 나라의 존망을 우려한 시, 나라의 영원을 기원한 시, 지배계급을 조롱한 시가 많지만 어디서고 그의 지조와 절개를 느낄 수 있다. 매천에 관한 연구는 아직도 진행중이다. 일제 치하에서도 이름은 알려졌지만 그저ꡐ한시에 능한 순국지사ꡑ정도였다. 50년대 그의ꡒ매천야록ꡓ이 출간되고서야 비로소 그와 그의 역사관이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이 ꡒ매천야록ꡓ을 중시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여서 이다. 그의 기록에는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내용도 담겨 있다. 거기에 기록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길도 별반 없었다. 자칫 떠도는 소문만으로 역사를 기술하는 우(愚)를 범할 수도 있었다. 더욱이 그의 역사관은 지극히 ꡐ부정적ꡑ이었다. 왕실이나 세도정치가들, 매국노가 난자당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쳐도 개화파에 동학군까지 ꡐ도적놈들ꡑ이라 부르는 그의 역사관을 수용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7. 매천(梅泉)의 비판의식, 지금도 귀감ꡑ 또한 그가 갖고 있던 현실인식에도 명백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많다. 우선 청에 대해 의존적이었던 전통적인ꡐ화이론ꡑ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청을 통해 부국강병해야 한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으며 청의 내정간섭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찾아보기 어렵다. 갑신정변에 대한 청의 태도를 긍정적으로 그리는 대목도 있다. 특히 서양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다는 점도 문제. 병인양요, 신미양요, 병자수호조규, 구미 열강과의 통상조규 등에 대한 언급을 하고는 있지만 대부분 그와 관련된 국제정세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서양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경계심만 나타낼 뿐이라는 것이 주류적 해석이다. 개화당이나 동학혁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국제관계를 비롯한 전체적인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편견에 따르는 개인적 의견을 기술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문제점이나 한계를 지적받는다 해도 결코 폄하될 수 없는 매천의 그 무엇인가가 있다. 바로ꡐ비판의식ꡑ이다. 그것도 지식인이 갖고 있는 비판의식이다. 매천은 뚜렷한 주관을 갖고 사물을 봤으며 그의 주관에 따라 옳고 그름을 명백히 했다. 부정부패는 그가 일본보다 혐오했던 ꡐ괴물ꡑ이다. 넘쳐나는 장원급제자, 돈에 팔고 팔리는 힘센 ꡐ자리들ꡑ,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 심지어 그는 어느 누구도 침범할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지던 왕과 비의 부정부패까지 증오했다. 민생의 피폐는 물론 망국까지 모두 이들의 책임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민중사관의 시각일 수도 있다. 폭력은 당연히 비판의 대상. 갑신정변이나 동학혁명에 대한 해석은 그 같은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아가 그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유림까지 그는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해부였을지도 모른다. 그는ꡐ서원을 창설했을 때는 매우 좋은 뜻으로 시작했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사이 날로 폐단이 심해졌다ꡑ는 기록도 남겼고 피폐해진 사대부들을 가리켜 ꡒ이 어찌 사론(士論)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ꡓ라며 한탄하기도 했다. 주자학 자체를 비판한 대목도 있다. ꡒ조선왕조가 건국하면서 송(宋)과 같이 진짜 유림을 배출했지만 시간이 지나 지나친 흠모가 고질병이 됐고 … 근세에 선비라는 자가 … 장황하게 공허한 문자를 늘어놓는다ꡓ며 질타했다. 그는 대신 실학을 높이 평했다. 정약용(丁若鏞)에 대한 글은 거의 흠모하는 수준에 이른다. ꡒ다산(茶山)의 심기는 고상하여 오직 좋은 점만 있으면 그 사람을 스승으로 여겼다ꡓ거나 ꡒ실용적인 학문에만 힘을 기울여 구태여 옛 학문을 따르지 않았지만 … 결코 그들의 문장력과 바꿀 만한 것은 아니다ꡓ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매천을ꡐ민족주의적 실학자ꡑ로 보는 것은 여기에 근거한다. 그러나 그의 비판정신에 비춰보면 그의 시각이나 입장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뚜렷한 주관을 갖고, 어떤 부정부패나 야합에도 반대하고, 어떤 세도가나 권력에도 물러서지 않는 그만의 비판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기에 목숨까지 바쳤다. 그것을 바로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책무로 봤다. 예나 지금이나 ꡐ글 아는 사람 구실하기ꡑ란 쉽지 않은 것이다. 매천의 말 그대로이다. 8. 매천이 남긴 저작물들 ꡒ매천야록ꡓ은 1950년대,ꡒ매천집ꡓ은 1980년대 전모 드러났다. 매천이 남긴 저작은 ꡒ매천야록ꡓ ꡒ오하기문ꡓ ꡒ매천집ꡑ 등 3종. 동학혁명만 집중적으로 다룬 것으로 추정되는 ꡒ동비기략ꡓ(東匪紀略)은 원전이 전하지 않는다. 매천의 저작은 종류로 보나 양으로 보나 결코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역사학 또는 한시학적으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저작들로 취급받는다. 구한말의 시대상이나 한시의 발전을 말할 때 반드시 참고해야 하는 서적이 됐다. 또한 매천의 책은 한말 비사(秘史)에 반일(反日)정신이 농축되어 있어 출간과 번역에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기도 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ꡒ매천야록ꡓ. 이 책은 누가 봐도 비사(秘史)나 야사(野史)의 성격이 짙다. 관보를 비롯해 각종 신문을 참고한 것은 물론 본인이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 풍문으로 떠돌던 것, 요직에 있던 인물로부터 들은 것 등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다. 고종과 민비의 첫 아들 세자가 고자(鼓子)였다거나, 명성황후가 직접 나서 궁비(宮婢)에게 잠자리를 갖게 했으나 실패했다거나, 궁녀 장씨가 고종의 아들을 낳자 민비가 칼을 들고 쫓아갔다는 등의 얘기는 ꡒ매천야록ꡓ이 아니고서는 어디서도 접할 수 없는 얘기들이다. 따라서 매천은 자손들에게 ꡒ이 책을 절대 외부인에게 보여주지 말라ꡓ는 유언을 남겼고 자손들은 상당 기간 이 책을 비밀에 부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중 후손들이 원본의 훼손이나 분실을 우려해 다수의 복본(複本)을 만들고 이를 생전에 매천과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던 김택영에게 교정을 부탁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김택영은 상하이(上海)에 거주하였으므로 후손이 이 책을 운반하는 것도 꽤 조심스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해방 후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이 책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인정, ꡐ한국사료총서ꡑ 제1집으로 간행해 비로소 일반인에게도 접할 기회가 생겼다. 그러나 한글로 번역된 것은 비교적 최근으로 1994년 교문사에서 한학자 김준의 번역으로 완역본이 발간됐다. ꡒ오하기문ꡓ 역시 94년 역사비평사에 의해 처음 완역(김종익 옮김)됐다. ꡒ매천집ꡓ의 발간도 적지않은 고충이 따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매천이 순절할 당시 매천은 동생 황원에게 ꡒ김택영은 시문의 정리를 맡아준다 해도 너무 멀어 갈 수가 없을 것 같구나ꡓ라면서 김택영이 정돈해 주기를 원했고ꡒ시는 연대에 따라, 문은 주제에 따라 나누어 글에 능한 사람에게 부탁해 정리하라ꡓ고 유언을 남겼다. 김택영은 상하이(上海)에서 매천의 글을 정리해 1911년과 1913년 초간본으로 간행했고 박형득(朴炯得)은 이를 기본으로 시문을 선별 편집해 ꡒ매천시집ꡓ을 발간했다. 이들 문집은 매천이 순국한 후 동생과 문인들이 통문(通文)을 돌려 2백70여명으로부터 출연받아 간행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이들 문집에 적지 않은 작품들이 빠져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건방(李建芳)과 황원이 ꡒ매천집ꡓ에서 빠진 글을 다시 정리한 시집이 발견된 것이다. 일명 총독부 검열본으로 이름붙여진 이 시집은 총독부의 검열 표시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일제 치하 문학 작품에 대한 검열 연구에도 일조하고 있다. 검열본에는 시문의 상당 부문에 ꡐ치안방해ꡑꡐ일부분 삭제ꡑꡐ삭제한 곳을 공란으로 두지 말 것ꡑꡐ삭제한 내용의 요지를 기록하지 말 것ꡑ등의 표시가 곳곳에 묻어 있다. 매천은 죽어서도 일본의 압제를 밝히고 있는 셈이다. ꡒ매천집ꡓ은 아직 완역되지 않았다지만 후학들의 연구서를 통해 그의 시향(詩香)을 느낄 수 있다. 이병주의 ꡒ한국 한시의 이해ꡓ(민음사, 1987), 민족문학연구소의 ꡒ한국고전문학 작가론ꡓ(소명, 1998)이 대표작. 간단하게나마 그의 일대기를 볼 수 있는 글은 정옥자 등이 쓴 ꡒ시대가 선비를 부른다ꡓ(효형, 1998)와 오가와 하루히사(小川晴久)가 쓴 ꡒ실사구시의 눈으로 시대를 밝힌다ꡓ(강, 1999) 등을 보면 좋다. 9. 매천선생을 생각하며 대부분의 우리에게서 매천선생의 이야기는 그야말로 교과서에서 배웠던 지식, 그러니까 불과 한두 줄로 간단히 요약되는 지식이 고작 아닌가 한다. 선생의 영정 앞에 참배를 한 후에 다들 분위기가 숙연해 지는 한편, 한 가지 의문의 까다로운 수수께끼가 있을 수 있다. ꡒ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고, 왜 지도층에 있는 선비나 관리들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ꡓ<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신복룡, 풀빛>에서 외국인들의 조선견문록에서도 똑같은 의문을 소개하고 있다. 한말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절, 그러니까 임오군란, 명성왕후 시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많은 관리나 선비들이 자결을 했던 것을 두고 외국인들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글을 남겼던 것이었다. 당시의 허망한 무력감과 비분강개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래도 망국지경에 지도층에 있는 선비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궁리를 포기하고 죽음을 택할 경우, 그 아래 무지렁이 민초들이 당할 정신적 공황은 누가 보살핀단 말인가? 또한 대한제국을 통째로 삼키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여론주도층인 선비가 제대로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사라져준다면 속으로는 쾌재를 부를 것이 아닌가? 이 답답한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梅泉野錄, 황현, 허경진 옮김>을 구하여 보자. 이 책은 고종 원년(1864)부터 순종 4년(1910)까지 47년간의 역사가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매천 선생이 후세에게 전하고 싶어 하셨던 속뜻을 나름대로 짐작을 할 수 있으리라.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서도 시골선비라 하여 2등으로 내리는 당시의 부패한 조정에 실망하여 향리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초야에 묻혀 후세교육에 진력하는 한편,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는 예리한 사관(史官)의 입장에서 무려 47년간에 걸친 역사를 남기게 된다. 이 책에는 집권층의 부패, 외세의 침략과 민족의 항거, 동학의 봉기와 의병들의 투쟁, 고종과 순종의 무능력 등등.... 특히 지배층의 실정(失政)을 기록할 때는 시중에 떠도는 유언비어까지 채집할 정도이며, 일부 기사는 왕정체제 밖에 몰랐던 한말의 선비로써 인식의 한계를 들어내기도 한다. 일례로 동학도를 나라를 어지럽히는 비적(匪賊)으로, 또 의병을 상당부분 부정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고 권력층의 무능과 부패를 다룬 것과 당시의 하와이나 멕시코로 떠난 한인이민의 상황까지 기술한 것을 보면 초야에 묻혀 사는 일개 선비인 선생의 정보수집에 대한 열의는 물론, 그 방대한 정보량에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특히 명성왕후와 고종이 무당에게 진령군(眞靈君)이라는 벼슬을 주어 지방의 수령방백의 등용은 물론 나라 정책까지 주무르게 하는 대목에서는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역사책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권력층의 부패, 왕에서부터 일개 아전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부패된 상황을 읽다보면, 솔직한 심정으로 그러고도 대한제국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가가 의아해 질 정도였다. 여기에 꼭 들어맞는 선현의 말이 떠오른다.ꡒ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 나라 스스로 멸망 할 짓을 한 연후에 다른 나라가 그 나라를 멸망시킨다.(國必自伐然後人伐之) -孟子ꡓ "손가락으로 달을 보라고 가리키니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보고 이러쿵저러쿵 한다." 라는 말이 있다. 진정으로 매천 선생의 죽음은 손가락이고, 나라를 멸망으로 내몰게 한 집권층의 타락과 부패를 기록한 <매천야록>이 달이 아닌가 한다. 요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최고 권력층 주변의 부패를 보며 <매천야록>의 교훈을 곰곰이 새겨보게 된다. 기술은 이미 세계와 어깨를 겨누는데, 우리의 정치권은 여전히 백년전의 상황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마저 들게 된다. 다시금 매천선생의 죽음을 생각해 보자. 매천 선생의 죽음의 의미는 지조 있는 선비 개인으로써의 인(仁)을 완성하고 가신 데 그치지 않고, 선생이 후세에 전하고자 하신 참뜻은 부끄러운 선대의 역사를 거짓 없이 아로새겨서 부디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리라. 梅泉선생! 의로운 죽음14) 뒤에 숨겨져 있던 선생의 정신이 매천사우(梅泉祠宇)내의 짙은 매화향기로 승화되어 우리들 가슴속에도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는 느낌이 오는가! 1) 宋의 진사, 몽골병 침입 때 일문이 절명 2) 宋의 선비로 국가기강을 세우는 상소를 하고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억울하게 죽음 3) 이갑규 譯註 4)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 장수(長水). 자 구부(懼夫). 호 방촌. 초명 수로(壽老). 시호익성(翼成). 개성(開城) 출생.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가 1383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1389년(창왕 1) 문과에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이 되었다.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에 은거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간청으로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 그 후 직예문춘추관(直藝文春秋館) ․사헌감찰(司憲監察) ․우습유(右拾遺) ․경기도도사(京畿道都使)를 역임했다. 1400년(정종 2) 형조 ․예조 ․이조 등의 정랑(正郞)을 거쳐 1404년(태종 4)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지신사(知申事)에 올랐으며, 1408년 민무휼(閔無恤) 등의 횡포를 제거, 그 후 형조 ․병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 이조판서로 세자 폐출(廢黜)을 반대하여 공조판서로 전임되었으며, 이어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가 되었다. 1418년 충녕대군(忠寧大君:世宗)이 세자로 책봉되자 이를 반대하여 서인(庶人)이 되고 교하(交河)로 유배, 다시 남원(南原)에 이배(移配)되었으나 1422년(세종 4) 풀려나와 좌참찬에 기용되고, 강원도 관찰사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 좌의정에 올랐고 1430년 투옥된 태석균(太石鈞)의 감형을 사사로이 사헌부에 부탁한 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이듬해 복직, 영의정에 올랐다.1449년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18년간 영의정에 재임하면서 농사의 개량, 예법의 개정,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 면제 등 업적을 남겨 세종의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또한, 인품이 원만하고 청렴하여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파주의 방촌영당(판村影堂), 상주(尙州)의 옥동서원(玉洞書院) 등에 제향되고,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방촌집》이 있다. 5) 황진 黃進 [1550~1593] 본관 장수(長水). 자 명보(明甫). 호 아술당(蛾述堂). 시호 무민(武愍). 1576년(선조 9) 무과에 급제, 선전관을 거쳐 1591년 조선통신사 황윤길(黃允吉)을 따라 일본에 다녀와 미구에 일본이 내침(來侵)할 것을 예언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복(同福)현감으로 근왕병(勤王兵)을 이끌고 북상하여 용인(龍仁)에서 패전하고 이어 진안(鎭安)에서 왜적의 선봉장을 사살한 뒤 적군을 안덕원(安德院)에서 격퇴하고, 훈련원 판관(判官)이 되어 이치(梨峙)전투에서 적을 무찔렀다. 그 공으로 익산(益山)군수 겸 충청도 조방장(助防將)에 오르고, 절도사 선거이(宣居怡)를 따라 수원(水原)에서 싸웠다. 이듬해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승진하여 패퇴하는 적을 추격, 상주(尙州)에 이르는 동안 연승(連勝)을 거두고, 적의 대군이 진주성(晉州城)을 공략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절도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성중에 들어가 9일 동안 혈전 끝에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진주 창렬사(彰烈祠), 남원 민충사(愍忠祠)에 제향되었다. 6) 황위(黃暐) 1605(선조 38)~1654(효종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자휘(子輝), 호는 당촌(塘村). 병마절도사 진(進)의 손자이며, 정열(廷說)의 아들이다. 정홍명(鄭弘溟)의 문인이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원에서 창의, 의병 수천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향하여 올라오다가 과천에서 적군을 만나 싸워 승전하였다. 청나라와 화친이 맺어지자, 군사들을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1638년 정시문과에 장원급제, 정언이 되었는데,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에 앞장섰던 김상헌(金尙憲)이 주화론자(主和論者)들로부터 배척당함을 보고 상소, 구제하다가 파직되었다. 1649년 효종 즉위와 함께 다시 등용되어 함경도도사․평양서윤 등을 역임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남원 풍계사(楓溪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역대 충절인들의 사실을 모은 《정충록 旌忠錄》이 있다. 7) 이건창 李建昌 [1852~1898] 본관 전주(全州). 자 봉조(鳳朝/鳳藻). 호 영재(寧齋). 인천 강화 출생. 가학인 양명학을 계승하였으며, 강위(姜瑋)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과 가까웠다.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15세의 어린 나이로 인해 등용이 연기되어 1870년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1874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1875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을 탄핵했다가 벽동에서 유배생활을 한 후 벼슬을 포기하였다. 고종의 간곡한 부름으로 1880년과 1893년에 어사로 나가 관인의 비리를 엄하게 조사하고 민폐를 해결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1890년에 한성부소윤, 1891년에 승지에 나아갔지만 관인 생활은 많지 않았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사 고군산도에 2개월 동안 유배되기도 하였다. 병인양요 때 조부인 이조판서 이시원(李是遠)의 자결을 목도하였으며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1890년에 한성부소윤으로서 국가의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넘기지 말 것을 건의한 것이 한 예이다. 양명학자로서 심학(心學)의 의미를 강조하여 정치 ․경제도 그것에 기반을 두고 허명(虛名)을 배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문학적으로 김택영에 의해 여한9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권력에 비판적이었으며 민생의 실상과 어려움을 많이 다루었다. 저서로 문집 《명미당집(明美堂集)》과 조선 중기 이후의 붕당을 개관하고 평가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다. 8) 강위 姜瑋 [1820~1884] 본관 진주(晋州). 자 중무(仲武) ․위옥(葦玉) ․요초(堯草). 호 추금(秋琴). 곤궁한 선비 집안에 태어나 병(兵) ․형(刑) ․전(錢) ․곡(穀) 등 각 방면의 학문을 닦았고, 민노행(閔魯行)에게 시(詩)를 배웠으며,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많은 감화를 받았다. 당대의 대시인으로서 전국을 방랑하며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다가 판서(判書) 정건조(鄭健朝)에게 초빙되어 삼정(三政)의 폐단에 대한 장문의 시정책을 적어주었다.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이 체결될 때 필담(筆談)을 책임맡았다. 1883년(고종 20) 박영선(朴永善)과 함께 박문국(博文局)을 세우고, 일본인 이노우에[井上角五郞]를 초청하여 한국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간행하였다. 그는 국한문이 혼용된 가사체 연구에 착수하여 1886년(67세) 《한성순보》를 《한성주보(漢城週報)》로 고친 후 국한문을 혼용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과 함께 한말(韓末) 3 대 시인으로 불렸다. 저서에 《동문자모분해(東文字母分解)》 《용학해(庸學解)》 《손무자주평(孫武子注評)》 등이 있다. 9) 김택영 金澤榮 [1850~1927] 본관 화개(花開). 자 우림(于霖). 호 창강(滄江). 당호 소호당주인(韶護堂主人). 개성 출생. 1891년 진사가 되고, 1894년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 1895년 중추원 서기관(中樞院書記官)을 역임하다가 이듬해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903년 다시 홍문관찬집소(弘文館纂集所)에 보직되어 문헌비고 속찬위원(文獻備考續撰委員)으로 있다가, 뒤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1905년 학부(學部)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가의 장래를 통탄하던 중 1908년 중국으로 망명, 퉁저우[通州]에 살면서 학문과 문장수업으로 여생을 보냈다. 특히 고시(古詩)에 뛰어나 문장과 학문에서 청나라 캉유웨이[康有爲]․정효서(鄭孝胥)와 어깨를 겨누었다. 저서에 《한국소사(韓國小史)》 《한사계(韓史몇)》 《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중편한대숭양기동사집략구전(重編韓代崧陽耆東史輯略舊傳)》이 있다. 10) 정만조 鄭萬朝 [1858~1936] 본관 동래(東萊). 자 대경(大卿). 호 무정(茂亭). 서울 출생. 강위(姜瑋)의 제자로서 1884년(고종 21) 교섭통상아문(交涉通商衙門)주사가 되고, 1889년 알성문과에 급제, 예조참의 ․승지를 거쳐 1894년 내부참의(內部參議)와 궁내부 참의관을 지냈다. 1896년 무고를 받고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2년 만에 풀려나와 복관, 규장각부제학이 되고, 헌종 ․철종 때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위원이 되었다. 국권피탈 후에는 이왕직전사관(李王職典祀官) ․총독부중추원촉탁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위원 등을 역임하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강사가 되었다. 1929년 경학원(經學院) 대제학으로 명륜학원(明倫學院) 총재를 겸임하였고, 《이왕가실록(李王家實錄)》 편찬위원이 되었다. 시문에 능하고 특히 변려문(폿儷文)에 뛰어났으며, 글씨도 잘 썼다. 문집에 《무정전고(茂亭全稿)》가 있다. 11) 정범조 鄭範朝 [1833~1898] 본관 동래(東萊). 자 우서(禹書). 호 규당(葵堂). 시호 문헌(文獻).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듬해 홍문관에 보직, 1860년 대교(待敎)를 거쳐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였다. 1864년(고종 1) 좌찬성에 승진하고 1876년 전라도관찰사, 1879년 공조판서, 다음해 예조판서를 지내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치되자 당상(堂上)으로 취임하였다. 1881년 사대교린사당상(事大交隣司堂上) ․감공사당상경리사(監工司堂上經理事)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공조 ․이조 ․병조의 판서를 지내고 1884년 한성부판윤, 1886년 독판내무부사(督辦內務府事), 1888년 호조판서, 1892년 우의정에 올랐다. 12) 민영환 閔泳煥 [1861~1905] 본관 여흥. 자 문약(文若). 호 계정(桂庭). 겸호(謙鎬)의 아들. 명성황후의 조카. 백부(伯父)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태호(泰鎬)에게 입양하였다. 1877년(고종 14)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 ․수찬 등을 거쳐 188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882년 성균관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그 해 생부 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간 거상(居喪)하였다.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일단 관계(官界)로 돌아와, 약관의 나이로 도승지 ․홍문관부제학 ․이조참판 ․한성우윤(漢城右尹) 등을 지냈다. 1887년 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 ․친군전영사(親軍前營使)를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1888년, 1889년 두 차례에 걸쳐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893년 형조판서 ․한성부윤을 지냈으며, 1894년 내무부독판사(督辦事) 및 형조판서를 다시 역임하였다.1895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戴冠式)에 참석하였는데, 이 때 일본 ․미국 ․영국 등지를 두루 거치면서 서구문명을 처음으로 접하였다. 귀국 후 의정부찬정(贊政) ․군부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 또다시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겸직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이 때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즉위 60주년 축하식에도 참석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상주하였다. 군제(軍制)의 개편만이 채택되어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 시정(時政)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일파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참정대신(參政大臣) 등을 지내고, 훈1등(勳一等)과 태극장(太極章)을 받았다. 친일적인 대신들과 대립, 일본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의 한직(閑職)으로 밀려났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백관(百官)을 인솔하여 대궐에 나아가 이를 반대하였다. 일본 헌병들의 강제 해산으로 실패, 다시 백목전도가(白木廛都家: 육의전)에 모여 상소를 논의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집에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본 뒤 조용히 자결하였다. 당대 제일의 권문세가 출신으로서, 현직(顯職)의 명예를 던지고 망국(亡國)의 슬픔을 죽음으로써 달랬다. 의정대신(議政大臣)에 추증, 고종의 묘소에 배향되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중장(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3) 최익현 崔益鉉 [1833~1906] 본관 경주(慶州). 자 찬겸(贊謙). 호 면암(勉庵). 경기 포천(抱川) 출생. 김기현(金琦鉉) ․이항로(李恒老) 등의 문인(門人).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正言) ․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수봉관 ․지방관 ․언관 등을 역임하며 강직성을 드러내 불의 ․부정을 척결하여, 관명을 날리고,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의 중지, 당백전(當百錢)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기용되자 명성황후(明成皇后) 측근 등 반(反)흥선 세력과 제휴, 서원(書院)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고, 호조참판으로 승진되자 다시 대원군의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 왕의 친정(親政), 대원군의 퇴출을 노골적으로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75년에 풀려났다. 이듬해 명성황후 척족정권이 일본과의 통상을 논의하자 5조(條)로 된 격렬한 척사소(斥邪疏)를 올려 조약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흑산도(黑山島)에 위리안치되었으며 1879년 석방되었다. 1895년에는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이를 반대하다 투옥되었다. 1898년(광무 2)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이 되고 뒤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의정부 찬정(贊政) ․경기도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진력하였다.1904년 러 ․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고종의 밀지를 받고 상경, 왕의 자문에 응하였고 일본으로부터의 차관(借款) 금지, 외국에 대한 의부심(倚附心) 금지 등을 상소하여 친일 매국도배들의 처단을 강력히 요구하다가 두 차례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향리로 압송당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창의토적소(倡義討賊疏)〉를 올려 의거의 심경을 토로하고, 8도 사민(士民)에게 포고문을 내어 항일투쟁을 호소하며 납세 거부, 철도 이용 안 하기, 일체의 일본상품 불매운동 등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였다.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 ․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ꡐ의거소략(義擧疏略)ꡑ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쓰시마섬[對馬島]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敵)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遺疏)를 구술(口述), 임병찬에게 초(抄)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죽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문집에 《면암집(勉庵集)》(합 48권)이 있다. 14) 1910년 8월 일제에게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자, 절명시 4편과 유서를 남기고 아편을 먹어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으며 선생은 이건창, 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라고 불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