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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문인협회 신인상수상작 (문학도시 2013. 9월호)
<단편소설>
아버지의 명당(明堂)
김 길 수
태풍은 엄청난 위력으로 수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남기고 지나갔다. 군데군데 커다란 생채기를 남기기도 하고, 가려져있던 속살을 적나라하게 까발리기도 했다.
태풍과는 전혀 무관할 것 같은, 수도 서울의 도심 한가운데 살고 있는, 구만씨에게도 이번 태풍은 전혀 예상치 못한 흔적을 남겼다. 그 흔적은 구만씨를 이기적인데다 부모의 은혜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으로 평가받게 만들었고, 동시에 구만씨의 성격이나 살아온 과정 등 극히 개인적인 일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말았다. 덩달아 다소 유별났던 선친의 언행까지 다시 들춰냄으로써, 구만씨의 입장이 더 난처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적어도 그를 아는 고향사람들과 일가친척들에게는.
대부분의 태풍피해야 으레 천재(天災)라는 이름하에 웬만한 과실이나 허물은 모두 묻어버리는 게 상식이다. 그럼에도 유독 이번 태풍으로 고향에 있는 구만씨의 부모묘소가 허물어져버린 것을 두고, 친척들이나 고향사람들은, 마치 그의 관리 소홀에 따른 인재(人災)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자식으로서의 구만씨의 묘소관리를 이야기하자면 그도 할 말이야 많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구만씨도 명절이면 성묘도 다니러오고, 그때그때 주변상태를 살펴왔기에, 구만씨로서는 인재(人災)에 무게를 두는 게 다소 억울할 수도 있지만, 그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므로, 변명까지 할 생각은 없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그 이유는 바로 선친께서 살아생전 보여줬던 외아들, 아니 후손들을 위한 정성과 노력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한 세대 전, 기행(奇行)에 가까우리만치 명당(明堂)에 심취했던 선친의 기대와 노력에 현시대를 살아가는 구만씨의 정성이 훨씬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구만씨로서는 될 수 있는 한 이러한 평가에 신경을 쓰거나 너무 휘둘리고 싶지 않은 심정이다. 당장에 생각들을 바꿀 수 있는 어떤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이미 벌어진 일을 새삼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조급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달라질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제 성호로부터 전화를 받은 순간에는 당장에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조급한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동시에 오래전부터 생각을 해왔으면서도 주위여건과 체면이라는 장벽 때문에 미루기만 해왔던 일이, 예상 못한 시점에 갑자기 확 터져버렸다고 생각하자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퇴근하여 밤새 이번 기회에는 그동안 미뤄왔던 일의 처리방향이라도 확실하게 매듭지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차가 고향 가까이 다가갈수록 어느 듯 계절은 가을색이 짙어가는구나! 싶었다. 한낮의 무더위는 아직 맹위를 떨쳤지만 저녁때가 가까워오자 제법 시원한 바람기가 느껴져 가끔 차창을 열고 시골길을 달렸다. 워낙 큰 태풍이 지나가며 깨끗이 청소를 해버린 탓인지 강가에 늘어선 버드나무와 들판으로 길게 드리워진 산 그림자가 여름날 오후의 청정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켜주는 듯 했다..
고향인 청계면 경계 안으로 진입하면서 구만씨는 어제 느꼈던 약간의 답답함과 초조감을 또다시 느꼈다. 피해가 어느 정도일까? 하는 걱정과 더불어 그동안 연락조차 하지 않던 친구가 애써 전화까지 해 주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엄청 미안했다.
면사무소 소재지 마을에 도착하자, 조금씩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버스 정류소 옆 공지에 차를 세우고 성호에게 전화를 했다. 성호는 금방 나오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차문을 열고나와 차츰 어두워져가는 여름날의 마을 모습을 둘러보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수 십 년을 보아온 거리다. 일자로 쭉 뻗은 2차선 간선도로를 따라 양편으로 늘어선 조그만 상점들에서 하나 둘 불들이 켜지고 있었다.
눈에 익숙한 시계포와 약국, 그리고 가장 큰 상점으로 보이는 성호네의 청계 슈퍼마켓 등, 낯선 것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건너편에 서 있는 우체국과 지서건물도 여전하다. 1년에 두 번씩은 거의 들리는 곳이다. 설과 추석에 성묘는 거의 빠지지 않고 다녀갔으므로 낯선 풍경은 애초부터 있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오늘따라 왠지 낯선 느낌이다. 가만히 생각하니 올 때마다 당일치기로 다녀간 탓이 아닌가 싶다. 숙박을 하고 갈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거니와, 자고 가야할 이유나 가까운 친척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자연히 마을의 저녁풍경은 생소할 수밖에.
“일찍 왔네!”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성호가 손을 잡으며 말을 걸었다. 밀짚모자 밑으로 보이는 얼굴모습이며 옷차림이 완전한 중늙은이다.
“오랜만이다. 그동안 잘 지냈고…?”
“나야 잘 지냈지? 오니라고 고생했제?.”
“고생은 무슨? 연락해줘서 고맙다.” “고맙기는… 너무 늦게사 알려줘서 우리가 미안치. 그런데…! 그동안 연락 좀 하고 살았으마 이런 일도 없이 진작 연락이 갔을낀데?”
“그래! 미안하다. 내가 옹졸해서 그랬던 것 같애!”
“옹졸한 기 아이라, 고향생각 별로 안 해서 그런 거 아이가? 그건 그렇고. 가자! 저녁이나 묵으면서 이야기하자.” 성호는 웃으며 얘기했지만 은연중 나무람이 묻어났다.
그리고는 구만씨의 답도 기다리지 않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자신의 가게인 슈퍼마켓을 뒤로 돌아가니 곧 성호네 살림집이었다. 시장 쪽에 있는 어느 음식점으로 갈 줄 알았던 구만씨는 성호의 집으로 바로 향하는 게 약간 당황스러웠다. 어디 딴 데 가서 저녁 먹고 들어가자는 구만씨의 말에 성호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야! 서울서 여까지 와갖고 또 체면 차릴라카나? 옛날 고추친구 집을 앞에 놔두고 음식점으로 가자고? 서울사람들은 그렁가 몰라도 여는 안 그란다. 마 그냥 들어가자”
성호는 구만씨의 말은 아랑곳도 하지 않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구만씨는 엉거주춤 따라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거실에 들어서자 성호부인이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미리 성호가 준비를 시켰나보다. 인사를 나누고는 식탁에 앉았다.
“가게는 누가? 그리고 부모님은?”
“가게? 가게는 막내가 보고 있어. 그리고 부모님이야 옛날에 돌아가셨지. 모친도 한 4년 정도 됐나?”
“어 그래. 미안하네. 그런 것도 모르고”
“아니야. 사람 사는 기 다 그렇지 뭐!”
구만씨는 다시 성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자주 만나지도 않았던 성호가 어쩌면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해주는가? 싶었기 때문이다. 넉살이 좋은 탓인가? 초등학교 동창이긴 하지만 그동안 별로 친교도 없었기에 더욱 놀랍고 고마웠다.
“그건 그렇고. 니 많이 놀랬제?”
“그래…! 그렇지. 생각도 안 해봤던 일이니까” 일부러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렇제. 당사자인 자네도 그런데…? 산주인도 아니고 아무 관계도 없는 다른 사람들이사. 그냥 예사로 보는기라. 그래서 동네사람들도 한참 후에야 알았다카데.”
“그런데 어느 정도래?”
“각곡마을 이장 말로는 상당히 심하다 카더라. 나도 못 가봐서…! 미안하네.”
“미안하긴? 그야 내일 가보면 알겠지. 그런데 고향 분들 욕 마이 하겠제?”
순간 구만씨는 자연스럽게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이 말 괜히 했구나! 싶었다. 성호가 평소엔 관리에 신경도 안 쓰다가 일 터지니까, 고향사람들 눈치를 보네! 하고 생각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성호도 그런 생각을 했던지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그래 그게 문제라니까. 내사 잘 모르지만, 각곡이장말로는 그동안 관리를 제대로 안 해 그런 거 아이가? 하는 걸로 봐서는 꽤나…?”
“그래…! 부끄럽네. 평소 내가 연락도 잘 안하는 바람에…! 관리문제도 그렇고…!”
“그러게 말이야…! 전화번호라도 지 때 알았으마 진작 알려줬을 낀데…!”
“…? 그렇지. 다 내 불찰이다”
어제 오전 성호가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왔을 때, 처음에는 누군지 전혀 감도 잡을 수가 없었다. 두 번이나 되묻고야 비로소 성호를 알아보았다.
“드디어 찾았구나. 근무처를 몰라 여기저기 물어갖고 전화 했네. 다름이 아니라 이번 태풍 바람에 자네 선친 묘소가 마이 허물어졌다 카네.”
“뭐라고? 묘소가 허물어져? 어떻게?”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그란께 빠른 시일 내, 시간 내서 한 번 다녀가야겠다. 고향사람들 눈도 있고 하니. 알았제?“
“그래…! 알려줘서 고맙네. 빠른 시간 안에 내려가겠네.‘
그러고는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성호는 고향에 있는 동창친구다. 하지만 구만씨가 명절 때 고향에 내려오더라도 당일치기로 다녀가다 보니 직접만나 속 깊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 일도 거의 없었다. 어쩌다가 성호네 슈퍼마켓을 이용하거나 길거리에서 만나면 서로 건성으로 안부를 묻곤 했던 일이 만남의 거의 전부였다.
몇 년 전부터 옛날 초등학교 동창모임을 1년에 한 번씩 갖고 있다는 풍문을 들었으나 구만씨는 한 번도 참석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외동아들에 대한 선친의 교육열로 인해, 대도시로 전학을 간 탓에 졸업생을 기준으로 치자면 동창도 아닌 셈이다. 하지만 어릴 때의 친구들이라 나이 들면서는 그런 일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문제는 구만씨의 데면데면한 성격 탓에 제대로 어울리지 못했다 할 수 있다.
‘묘소가 허물어지다니? 태풍에 묘소가 허물어져?’ 구만씨는 전화를 끊고 잠시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을 정리해 봤지만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평소 홍수나 태풍피해를 입을 곳이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별로 없었기에 그랬고, 한편으로는 태풍의 위력이 그리 심했던가? 싶기도 했다.
아울러 별로 가깝지도 않은 친구가 약간의 질책을 담아 전해주는 전화를 받고나니 그동안 너무 소홀했구나? 하는 미안함이 먼저 떠올랐다. 결국 퇴근 무렵 국장실에 들러 연가신청을 했다. 고향에 일이 생겨 한 이틀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만 했다.
오전에 급한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길을 나섰다. 엊저녁 퇴근하여 아내에게 고향에 다녀와야겠다고 하니 갑자기 무슨 일이냐? 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의 묘가 지난 태풍으로 허물어졌다는 연락이 왔다면서 다녀오겠다고 했다. 아내는 여러 가지로 궁금해 하며 따라 나서려고까지 했으나, 우선 상황부터 알아보고 대처하자고만 이야기해두었다.
오랜만에 나온 장거리 운행이라 되도록 천천히 가리라 생각하며 곧장 경부고속도로를 달렸다. 하지만 자꾸만 속도계가 올라가는 걸로 봐서 자신도 모르게 조급해지는가 싶었다. 금강휴게소를 지나면서 성호에게 전화를 했다. 저녁 때 쯤 고향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그리고는 아직 가시지 않은 오후의 폭염 속으로 천천히 차를 몰았다. 머릿속으로는 평소와는 달리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돌아가신 지가 벌써 30년이 가까워 온다는 점에 생각이 미쳤다. 구만씨가 제대한 이듬해 돌아가셨으니까. 언제 그 많은 세월이 지나갔나 싶다.
아버지의 뒷산 돌보기는 한마디로 지극정성이었다. 틈만 나면 산에 올랐으므로 동네사람들은 물론, 웬만한 인근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구만씨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이런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말릴 일도 아니었다.
뒷산이래야 무슨 이름이 난 산도 아니고 삼십여 호로 이루어진 각곡리 마을의 야트막한 뒷동산이다. 천태산이 동쪽으로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다가 끄트머리부분에, 마치 마침표를 찍듯, 조그만 뭉텅이를 하나 남겼는데 그게 바로 아버지에게는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뒷산이다. 산의 이름은 구갑산(龜甲山)인데, 납작 엎드린 거북의 형상이라 그렇다는 이야기다. 넓이도 다 해봐야 10정보가 채 안 되는 정도이고, 높이는 굳이 높이랄 것도 없이 그저 밋밋하게 약간 솟아오른 언덕쯤이라 하면 딱 맞는 표현이다.
구만씨가 어릴 적엔 산의 주인인데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가 있는 곳이니까 응당 아버지의 관심과 애정이 쏠림은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차츰 나이 들어가면서 너무 심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기다가 아버지께서는 이 산을 구입할 때 마을 앞 수리안전답 열다섯 마지기와 맞바꿨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후에는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구입할 당시는 할아버지도 살아계셨지만 고령이시라 아버지께서 주도적으로 매수했는데 이유는 단 한 가지! 이 산에 아주 좋은 명당 묏자리가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니 더욱 그랬다. 자연히 아버지의 이런 기질은 고향마을은 물론, 인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함과 동시에 기벽의 소유자 정도로 평가받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사실 아버지는 그저 평범하고 상식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원래 성격이 이러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철이 들고 난 이후부터 주위에서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후천적인 영향도 컸으리라 생각되는 부분도 더러 있기는 하다.
그 중 하나가 자세한 연유는 모르지만, 구만씨의 할아버지 때부터 마을에서 유일한 타성(他姓)바지로 살아왔다는 점이다. 원래 유림의 고장이라 할 만치 유학의 전통이 강한 고장인데다 마을 전체가 안씨들의 집성촌인 각곡리 마을에 유일하게 김씨로 살아온 것이다. 요즘이야 그런 일이 문제될 게 없지만, 적어도 아버지 세대에 집단씨족마을에, 타성바지가 마을의 일원으로 원만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매사에 조심하며 모나지 않게 살아야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 있겠다는 점이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아버지가 유독 자식교육과 후손(後孫)에 대한 관심은 남달랐다. 자식교육이야 외아들 구만씨를 초등학교 때부터 대처로 보낼 만큼 적극적이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후손에 대한 정성은 소위 명당(明堂)에 대한 관심으로 표출되었다. 자연히 이 두 가지 일만은 어떤 주위의 시선이나 평판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러한 아버지의 유별난 언행에 더욱 기름을 붓는 사람이 바로 고모부였다. 고모부는 군내에서 제법 알아주는 지관(地官)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고모부의 수제자쯤으로 보면 무방할 것 같은 관계였다. 어머니는 별 쓸모도 없는 민둥산을 시가보다 훨씬 비싸게 거액을 주고 산 원인도 바로 고모부가 아버지를 부추긴 탓이라고 단정적으로 믿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이런 성격을 알면서 자라온 탓에 구만씨와 어머니는 아버지의 독특한 취미생활정도로 치부해버렸다.
“이곳에 뫼만 썼다하면 요새말로 장관자리 하나는 문제가 없다는 거라! 구만아, 너도 가만히 보렴. 여기서 바라보면 앞이 훤하지? 멀리 강물도 보이잖아? 여기가 바로 명당(明堂)이라! 네 할아버지 묘소도 터가 좋다곤 하지만 여기가 더 좋다고 하네.”
중학 2학년 때였던가?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을 때, 아버지께서 구만씨에게 산중턱쯤에서 들려준 이야기다. 그때는 그저 농담정도로 들었다. 어린마음에도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싶어 염두에 두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구만씨가 제대를 하고 왔을 때도 꼭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때 구만씨는 아버지의 집착이 너무 심하구나! 싶어 어머니께 걱정스런 상의를 드렸으나, 어머니는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 영감쟁이 가만 놔둬라. 평생 고치지 못하는 일을 의사인들 알겠나?” 제대이후 구만씨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다. 이런 일이 아버지에게는 참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겠구나! 하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복권당첨을 기다리는 사람의 심정과 유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구만씨가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은 마침 일요일이었다. 공무원 발령을 기다리던 중이라 집에서 소설책을 뒤적이고 있었는데, 40대 초반쯤의 양복 입은 두 사람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구만씨는 별 의심 없이 아버지가 계시는 사랑채로 안내를 해 주고는, 어른들 대화에 끼어들 일도 아니다 싶어 그 자리에서 물러나 대청마루에서 보던 책을 다시 읽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후 예상 밖으로 아버지의 고성(高聲)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구만씨가 사랑채로 나가보았는데, 순간 구만씨는 참! 세상에는 별 멍청한 사람들도 많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하마터면 크게 실소를 터뜨릴 뻔 했다.
그 양복쟁이 중 한 사람은 읍내에서 부동산 소개업을 하는 사람으로 같이 온 사람이 뒷산을 사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어르신! 값은 후하게 쳐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정 안되신다면 반만이라도…!”
구만씨는 그 때 그 양복쟁이가 조르는 이야기에 세상에 이런 횡재가 또 있겠나!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너무도 단호하고 간단했다.
“당신 재산 다 줘도 난 안 팔아요.”
구만씨는 순간, 아버지가 참으로 미욱스럽고 고지식해 보였다. 구만씨의 생각대로라면 당장 처분해버리고 도회지로 이사를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감히 그기 어떤 땅인데…! 팔다니. 벌써 저런 녀석들이 몇이나 왔었는지 몰라!”
아버지는 불쾌한 듯, 그 사람들이 쫓겨나듯 가버리고 난 뒤 얘기했다.
“예? 몇 사람이나 왔다니요?”
“니가 제대하기 전에도 저런 놈들이 더러 있었다. 명당 소문이 많이 났은 께. 지금도 그 녀석들이 읍내에 살고들 있기는 하지만……!”
“그럼 지금이라도 팔려면 팔 수 있겠네요?” 구만씨는 그만 애매하게 묻고 말았다.
“예끼 이 녀석…!” 아버지는 구만씨의 얘기에 화를 벌컥 내셨다. 하지만 구만씨는 이때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만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면, 많은 돈을 받고 팔아버릴 수도 있겠구나!’
아버지는 구만씨가 발령을 받아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 평소 매우 건강했음에도 뒤늦게 발견된 간암이 원인이었다. 늦게 결혼하여 낳은 외아들 구만씨가 말단공무원이 되는 걸 보고 일흔 하나의 나이에 돌아가신 것이다. 구만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그토록 아끼셨던 아버지의 명당에 묘 터를 잡았다. 그때까지 살아계셨던 고모부께서 자리를 잡았는데, 햇볕이 잘 드는 남향인데다 멀리 강물이 바라보이는, 복된 장소라고 여러 번 강조를 하신일이 생각났다.
안전(眼前)이 훤하고 정말 거칠 것 없이 탁 트인 장소였지만, 무슨 일인지 고모부는 산중심의 높은 부분이 아닌 발치께가 좋다고 했다. 따라서 앞쪽으로 십 여 미터만 나가면 제법 깊다란 절벽이었고, 절벽아래는 작은 개울이었는데 비가 그치면 금방 말라버리는 건천이었고, 개울의 불과 수 백보 아래에는 각곡리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직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너거 마을에서 누가 신고했다 카데. 이장이 했다던가? 태풍으로 산사태가 났다고!” 성호가 아내가 내 온 막걸리를 권하며 얘기했다.
“산사태라고?” “그래 산사태! 자네 산이 조금 무너졌는 갑더라”
“으음! 묘소가 허물어졌다면서…?”
“그래. 내가 듣기에는 묘소가 허물어졌다 카고, 산사태도 났다 카더라니까. 내가 어제 그 얘긴 안했나?”
“…그래? 그렇구나!”
구만씨는 어제 묘소가 허물어졌다고 했을 때, 봉분이 약간 무너졌겠지? 했었다. 원래 습기가 없는 황토토질이므로 홍수에 묏등이 씻겨갔나? 했었는데 산사태까지 날 정도였다면 문제는 훨씬 심각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우리 군(郡)지역을 국가에서 무슨 재난지역으로 선포할거라고 하데. 시간 나마 군청에도 한 번 들러봐라!” 그러면서 성호는 아는 대로 보충설명을 했다.
구만씨는 내려오면서 계속 아버지의 명당생각을 했었다. 동시에 그 명당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하는 것 같아 송구스러웠었는데 이제는 명당이면 태풍도 피해가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맹랑한 생각마저 들었다.
“친구야. 문제는…? 조금 전에도 얘기했지만 동네 사람들은 하기 쉬운 말로 니보고 안 좋은 이야기도 더러 하는 갑더라. 공무원으로 그런대로 살면서 지부모 묘소도 제대로 안 돌본다고. 그야 너거 선친께서 워낙 명당을 좋아했으니까 더 그렇겠지만.”
구만씨는 자주 만나지도 않았던 친구가 말을 아껴가며 해주는 진솔한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동안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왔을까? 가 눈에 선했다.
새벽 일찍 성호네집에서 3킬로 정도 떨어진 각곡리 마을로 향했다. 어릴 때 걸어서 학교를 다니던 좁다란 들판 길이었지만 지금은 차가 왕복으로 달리는 포장농로가 되어있었다. 30여 호의 시골마을이 안개 속에 조용했다. 동구 밖 당산나무 아래 차를 세우고 골목길을 지나갔다. 이장(里長)집부터 들릴까 하다가 현장에 먼저 가보자! 싶어 뒷산으로 향했다.
태풍은 하필이면 묘소앞 쪽 낭떠러지 부분을 마치 거인이 손톱으로 확 내려긁듯이 두 개의 커다란 자국을 내 놓고 있었다. 긁힌 생채기에서 드러난 황토색 속살은 주위의 짙푸른 나무들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산사태지점에서 불과 10여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위치한 쌍분묘소는, 마치 한 번도 돌 본 적이 없는 무연고 묘소나 다름없었다. 아직 가을벌초도 안된 상태로 무너지다보니 잡초와 황토 흙이 뒤엉켜 보기조차 민망했다. 멧돼지들이 자주 봉분을 해친다고 했는데, 이번에도 그놈들이 들쑤셔놓은 틈새로 빗물이 침수되자 응집력이 약한 흙이 그대로 무너져 내린 게 아닌가 싶었다.
몇 년 전부터 당숙께서는 둘레석 설치공사를 하라고 하셨다. 그러지 않고는 멧돼지 등 산짐승들의 피해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한 마디 덧붙였었다.
“명당(明堂)이마 뭐 하노? 먹고 살만한 자식이 있어도 제대로 관리를 안 하는데…?”
구만씨의 묘소관리가 못마땅해 미수(米壽)에 가까운 당숙이 직접 빗댄 말이다.
구만씨보다 네 댓살 연장(年長)으로 같은 마을에서 자란 이장은 반갑게 맞아주었다.
“진작 알려줘야 하는데 전화번호를 알아야지. 그래서 지난 장날 성호씨한테 물어봤다 아이가. 혹시 자네 전화번호 알거든 좀 전해주라고” 그리고는 덧붙였다. “자네, 명절성묘 차 고향에 오면서도 산소만 돌아보고 가 버리니까 이런 일이 생긴기라. 앞으로는 내려오마 꼭 들러서 차라도 한 잔씩 하고 가시게나!”“네. 드릴 말씀이 없네요. 제가 항상 바쁘다는 핑계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이사람 참! 인사는 무슨 인사? 말이 그렇다는 기지…! 태풍이 지나가고 내가 천태산에 올라가다 본께, 자네 산 쪽이 이상하더라꼬. 그래 가까이 가본께 그기 바로 산사태 난기라. 시골인심도 옛날과 달라서 지일 아이마, 보고도 모른 체 한다카이” “……?”
“그래서 면사무소에 전화를 했다 아이가. 그랬더니 면사무소, 군청, 산림조합에서 부리나케 나와서는 조사를 해 가데. 사진도 찍고. 상부에 보고를 해야 된다 카면서.”
“언제쯤 조사를 해 갔습니까?” “한 보름정도 됐는가베. 공사 안 하마 안 돼지, 우리 동네에도 피해가 올 수 있은께. 자네야 산주니까. 그리고 선친 묘소가 바로 위에 있은 께 더욱 그렇고.”
구만씨는 이장에게 인부를 구해 묘소에 대한 임시조치를 부탁하고는 곧장 군청으로 향했다. 군청 담당직원 이야기는 아주 사무적이었다. 재난지역으로 선포되면 공사설계와 견적을 내어 연말경에 공사를 하게 될 것이라 했다. 그동안 심사과정이 필요하고 예산도 하달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이상 별로 물어볼 것도 없었다.
“고향에 아무리 연고가 없다케도 산소는 자주 들러봐야 할 거 아이가? 서울 가서 출세도 하고 밥술께나 묵는다는 사람이 부모 묘소 꼴이 그기 뭐꼬? 누가 욕 안하겠노?”
인사를 받고는 명절도 아닌데 웬일로? 하시던 당숙은 구만씨의 설명을 듣자 다짜고짜 구만씨를 몰아세웠다. 내려올 때마다 항상 비슷한 이야기다. 당숙을 모시고 있는 형수님은 연세가 높아 그런지 기억도 외곬로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자네가 그리 잘 된 것도 모두 성님(아버지)묘소 덕분인줄 모르나? 생전에 명당 찾니라고 얼매나 고생을 했는지 정말 모르나?”
또 같은 이야기다. 구만씨야 쑥스럽지만, 출세했다는 이야기도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말단공무원으로 시작했지만, 오십대 초반에 중앙부처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니 당숙이나 고향사람들이 볼 때야 틀린 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 싶은 것이다.
“죄송합니다. 한다한다 하면서도 자꾸 미루다가”
“그 돈 아끼지 말고 봉분공사 좀 제대로 하게나. 멧돼지들이 그냥 가만 놔두나? 무연고 묘도 아이고…,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지”
“예 잘 알겠습니다.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아! 참. 생각은 무슨 놈의 생각? 당장 봉분이 허물어졌는데…?”
당숙께서는 구만씨의 대답에 더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구만씨는 달리 할 말도 없어 어정쩡하게 대답했다.
“아! 예. 이번 군청에서 복구공사 할 때 맞춰 공사하겠습니다.”
하지만 구만씨의 생각은 점점 엉키는 것 같다. 자신이 생각하는 방안을 당숙이나 동네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도무지 묘안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당당하게 얘기하자! 싶다가도 이분들 중에는 아직 30여 년 전,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일상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사무실사람들이나 친구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르다는 게 문제였다.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봐도 자신의 계획이 백번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몰고 올 뒷이야기들이, 아직은 감당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다. 고향사람들이야 남의 일이니 일정시간 지나면 어영부영 잊게 되겠지만, 집안사람들도 그렇지만, 특히 당숙께서는 기절초풍할 일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가문에 없는 불효막심한 놈이라면서.
구만씨의 그 계획이란 바로 묘소를 서울인근으로 이장하는 것이다. 머지않은 장래 자신마저 없으면 누가 부모의 묘소를 관리하거나 돌아볼 것인가? 무엇보다 후손들이 쉽게, 자주 가볼 수 있고, 아름답게 가꿔놓은 공원묘지 같은 곳이 최상의 명당이 아닐까? 싶은 간단명료한 논리에서다.
거기다가 조금 전, 현장에서도 생각했듯, 언제라도 이번 같은 태풍은 올 것이고, 그러면 또 같은 일이 되풀이 될 것이라 생각하니, 비록 이기적이고 편리함만 쫓는다는 핀잔이 있더라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생각을 굳혔다.
애써 당숙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가다, 오후 늦은 시간에 서울로 출발했다. 출발에 앞서 고향마을 쪽을 한 번 더 가보았다. 산사태의 생채기는 오후시간이라 그런지, 아니면 두 번째로 보아 그런지 훨씬 누그러져 보였다.
빠른 시일 내 해야 할 보수공사를 생각하면서도, 이러나저러나 어쩔 수없이 욕은 얻어먹게 마련이구나! 싶다. 덧붙여 최소한 당숙께서 돌아가시기까지 묘소이장을 늦추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려오면서 다짐했던 결론은커녕, 우물쭈물하다가 이야기도 못 꺼낸 게 아쉽다. 그렇지만 아버지께서 생각하신 명당보다는 이 외아들이 생각하는 명당이, 요즘시대에 어울리는, 진정한 명당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아마 아버지께서도 이 아들의 생각을 기특하게 받아주시지 않을까! 싶어 씩! 웃음까지 베어 나왔다.
액셀러레이터를 밟자 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
★작품제출자 인적사항★
- 성명 : 김길수 (金吉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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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울 주변이면 언젠가 개발되기 마련, 그 때 또 이장해야 한다. 지금이야 아들이 살아 있으니 챙겨 주지만 4, 5대 후손에게 이장하는 부담을 안겨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시골에 던져 두고, 일년에 한번씩 가 보는 것으로. 그리고 그 산이 구만이네 산이라니, 또 외아들 외아들로 내려가는 시대이니, 자손 만대 선산으로 사용하는 것이 옳은 듯 하이.이제 곧 전 지구에 흩어져 살텐데, 대한민국 합천 어디에 20대 조부부터 산소가 다 모여 있단 기억도 한 문화가 되고, 긍지가 될 것이라. 각각 봉문을 하기 보담 집단 묘소로 가는 것이 옳으리라. 나도 요즘엔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네. 마눌이 자기는 죽으면 나 따라 오기 싫다고 하여 ..
옳은 말씀이오. 답신이 엄청 늦었네. 살다보면 그렇다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