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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경전연구회 임제록 강좌 제1강 -1(2009.05.11)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諸佛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尊法 一心頂禮 盡十方三世 一切聖僧 我弟子等 講論三藏 唯願三寶 爲作證明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南無本師釋迦牟尼佛 無上甚深微妙法 百千萬劫難遭隅 我今聞見得受持 願解如來眞實義 큰스님께 삼배올리겠습니다. 잠시 입정하겠습니다. ***** 큰 스님 법문 ***** 그 동안 십육개월에 걸쳐서 법화경 강좌를 무사히 잘 마치고 이제 그 語綠의 왕이라고 하는 임제록을 공부하게 됐습니다. 그동안 뭐 승가대학 신문이라든지 또 다른 매체를 통해서 많이 알려져서 불교 신문에도 크게 났구요. 갈수록 공부하는 스님들의 열기가 높아지고 숫자도 더 많이 불어나는 것 같습니다. 경전에는 늘 初善, 中善, 後善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 마음 그대로 중간까지 가고 또 그 마음이 끝까지 가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그런 우리 공부 분위기가 되었으면 하는 그런 바램입니다. 경전을 우리가 참 많이 보유하고 있죠. 소위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것. 그것은 어느 종교에도 그와 같이 방대한 교설을 보유하고 있는 종교가 없습니다. 뭐 불교를 가지고 다른 종교와 비교한다는 자체가 사실은 잘못된 거예요. 알고보면 그렇게 비교할 대상이 아닙니다 사실. 제대로 알고 보면은. 교리라든지 그 역사라든지 여러 분야에서. 그러나 또 세상은 차별이 위주이기 때문에 차별의 관점에서 우리가 또 서로 비교함으로 해서 남의 것도 알고 또 우리 것이 좋은 줄도 더욱 깊이 알게 되는 그런 마음에서 자주 비교를 합니다마는. 그와 같이 많고 많은 성전을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사실 법화경은 경 중의 왕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경 안에서도 그런 말씀을 했지마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아주 대단한 경전입니다. 우리가 그 경이 담고 있는 깊은 뜻을 제대로 우리가 파악하고 실천하고 하는 그런 것이 우리의 과제로 물론 남아 있습니다마는 아뭏든 법화경은 참 위대한 경전입니다. 거기에 못지 않게 선불교의 역사도 대단히 깁니다. 그래서 ‘선불교’ 하면은 특히 한국의, 한국 불교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돼 있을 정도로 세계에다가 한국불교를 자랑할 때는 역시 선불교를 이야기를 합니다. 대승불교도 아니고 소승불교도 아니고 선불교를 그래도 제일 자랑거리로 생각하거든요. 선불교는 아시는대로 달마스님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경전의 왕인 법화경이 초기교설에서부터 한 오백 년이라고 하는 긴 세월을 거치면서 극도로 발전을 해서 법화경 불교에 이르러서 차츰차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죠. 그래서 비밀불교도 생기고 뭐 별별 불교도 생깁니다. 선불교도 물론 생기구요. 그리고 뭐 호국불교니 기복불교니 무슨 천도불교니 기도불교니 뭐 별별 중생의 요구에 따라서 또 그 지역의 민족적 특성에 따라서 별별 불교가 많이 생깁니다. 또 그것은 그럴 수 있도록 불교는 워낙 다양하고 풍부한 소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게 이제 아주 옹졸하고 편협한 그런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면은 그렇게 여러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없을텐데, 워낙 불교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풍부하기 때문에 그래서 세월에 따라서 민족에 따라서 지역에 따라서 필요한 대로 여러 가지 불교가 따라서 생기게 됐습니다. 뭐 그 가운데 하나가 중국에 와서 선불교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불교가 발생하게 된 것이죠. 물론 뭐 선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은 석가모니 부처님으로 가섭 존자로 아난 존자로 그 代를 그 정신만은 계승했습니다마는 소위 우리가 선불교라고 하는 그런 독특한 내용의 선불교는 사실 달마스님으로부터라고 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은 천하의 논사로 유명한 마명이라든지 용수라든지 이런 분들도 우리 선불교 법맥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제 모두 아우르면은 법맥은 계승된 것에 틀림없지마는 그러나 그 독특한 선불교의 어떤 맛이라고 할까 향기라고 할까 이런 것은 사실은 그 특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달마스님에서부터 치는 것이 선불교의 독특한 맛과 어떤 그 기백과 그 정신을 더욱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선불교의 역사를 달마스님부터 치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이해하고 넘어가야 됩니다. 그 선불교도 달마스님으로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이르는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잘 살펴보면은 지금 우리가 공부하려고 하는 소위 임제선, 임제스님의 정신, 여기까지 이르러 오기가 삼백 년이라고 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래 사실은 달마스님으로부터 혜가, 도신, 홍인, 육조 혜능에 이르기 까지도 임제선에서 볼 때 그렇게 썩 완벽하다라고 하기는 좀 무리가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이제 비로소 황벽과 임제에 이르러서 선불교의 고준한 정신이 극에 달하게 됐다. 이렇게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 다음에 황벽과 임제에 이르러서 그 다음부터는 서서히 이제 쇠퇴의 길을 걷게 됩니다. 경전이 대승불교, 소위 법화경 불교에서 차츰 차츰 쇠퇴의 길을 걸으면서 뭐 이상한 불교가 생겼듯이 선불교도 역시 그래요. 선불교도 임제를 정점으로 해서 차츰차츰 선불교가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사실은. 그래서 묵조선이라는 것도 생기게 되고 간화선이라는 것도 생기게 되고. 그런 간화선이니 묵조니 하는 그런 방편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는 그런 방편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런 선불교 정신의 정점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다 보니까 그런 방편이 생기게 돼서 오늘날 간화선 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이런 시점에 이르렀죠. 그런데 이제 간화선도 사실은 초기에는 여러 가지 상황이라든지 사람들의 그 특성과 근기라든지 이런 것으로 볼 때 상당히 효과를 발휘를 많이 했었습니다. 저기 원나라 고봉스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선요의 고봉 스님 대에까지도 상당히 그 간화선의 방법에 근거한 어떤 목표 달성이 그런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제 그 후로는 사실은 열심히 애는 쓰지만은 천 명이 애를 쓰면은 한 두 사람이 거기에 도달할까 말까 할 정도로 그렇게 지극히 그 한계가 너무나도 높고 어려운 상태이기 때문에 말로만 전하고 입으로만 전하고 우리의 그 의지만 강하지 사실은 거기에 이른 사람들은 참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의 근기는 간화선에서 설정해 놓은 그 방법대로는 지극히 힘든 일이고 그래서 요즘은 한철 두철 연한을 채우면은, 예를 들어서 승랍 또는 뭐 주지 또는 방장, 조실 이런 거 하는데 하나의 자격 요건을 갖추게 되는 것, 여기에 어쩌면 관심이 더 가 있어요. 몇 철 났다, 몇 철 났다. 몇 안거를 우리가 쌓아야만 우리가 비로소 선득도 되고 뭐 선원장도 되고 또는 조실도 되고 할 수 있는 그런 요건을 갖추는 하나의 법규까지도 제정되게 될 정도로 이렇게 됐습니다. 이건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거죠 사실은. 실제적인 공부하고는 거리가 먼 것인데 아뭏든 뭐 선방에서 철 나는 것이 철 數가 하나의 요건으로 될 정도로 이렇게 선불교가 변색이 된 것은 우리가 서로 이해해야 되고 다 인정을 해야 됩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정도로. 그래서 뭐 열심히 이제 참 화두를 드는 사람도 있지마는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보니까 심지어 念話頭, 誦話頭, 염불하듯이 화두를 외운다든지 염송하듯이 외운다는지 하는 그런 염화두니 송화두니 하는 그런 말까지 등장할 정도로 그렇게 참 話頭一念 疑團獨露 되기가 정말 어려운 그런 상황에 이제 이르렀는데 그러한 것을 우리가 인정을 하고 오늘날 우리가 임제록을 이렇게 다시 한번 공부를 한다고 하는 이유를 굳이 설명을 한다면은 선불교의 절정이 임제선이다. 그러면 오늘날, 사람은 뭐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사람이니까 비록 근기의 차이는 있다손 치더라도 사람의 본성은 똑같기 때문에 그래서 선불교의 절정에 달했던 임제스님의 선을 우리가 공부함으로 해서 다시 회복하자고 하는, 선불교의 본질을 다시 회복하자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선불교가 달마로부터 임제에 이르기까지 삼백 년 동안 절정에 달했다가 그 이후로 이제 쇠퇴의 길을 걸었는데 임제선을 공부함으로 해서 선불교가 절정에 달했을 때의 어떤 정신 세계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파악하는 그런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죠. 그래서 이제 우리 나라는 그 임제선이 전래돼서 지금 간화선이니 선불교니 선종이니 선방이니 무슨 뭐 선원에서 몇 철 나야 되느니 하는 이러한 선의 그 힘이 막강한 힘을 과시하고 있는 이러한 실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선종史를 통해서 선불교 선대 선사들의 후손으로 돼 있어요 우리가. 우리는 과거의 그러한 선사들의 어떤 법을 계승하고 승맥을 계승해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유인물을 통해서 지도를 한번 전체를 살펴서 점안을 하고 그리고 그다음에 임제스님이 얼마만치 우리 한국 선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는가 이것을 이제 살펴볼 생각입니다. 傳燈系譜(전등계보) 라고 하는 것부터 봅시다. 전등계보에 보면은 세존이 있고 가섭, 아난으로 해서 달마에 28조에 이르죠. 그래 東土에서 初祖를 이제 達摩(달마)라고 하고 2조 慧可(혜가), 僧璨(승찬), 道信(도신), 弘忍(홍인), 慧能(혜능), 南嶽(남악), 馬祖(마조), 百丈(백장), 黃蘗(황벽), 그 다음에 臨濟(임제). 이렇게 된다고요. 달마로부터 치면은 11대가 되지마는 가섭부터 계산하면 38조가 됩니다. 임제스님은. 그리고 그 밑으로 이제 임제스님 밑으로 다시 이제 1대로 치면은 興化(흥화)가, 임제 제자의 1대가 흥화가 되고 2대가 南院(남원)이 되고 3대가 風穴(풍혈)이 되고 4대가 首山(수산)이 되고 그래서 이제 5대, 6대, 7대, 8대 죽 내려와 가지고 이제 10대에 오면 圓悟 克勤 禪師 (원오 극근 선사) 그 다음에 11대에 가서는 虎丘(호구)가 되는데 한쪽으로 우리 귀에 익숙한 大慧 宗杲 (대혜 종고) 스님이 또 원오 선사의 제자지요. 한 스님의 제자가 하나만 있으라는 뜻은 아니니까 호구스님도 있고 대혜 종고 스님도 있습니다. 소위 대혜 종고 스님은 서장의 주인공이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우리 나라 太古普愚(태고 보우) 스님으로 이어진 법맥은 호구 스님에게로 전해진 법맥입니다. 그래서 12대, 13대, 14, 15, 16, 17 해서 及菴(급암)이고 18대가 石屋淸珙(석옥청공)인데 거기까지 중국 스님이예요. 그 다음에 19대에 내려오면은 태고 보우 스님, 우리 나라 고려 때 태고 보우 스님이 됩니다. 그 다음에 이제 幻菴(환암) 스님으로 龜谷(구곡) 스님으로 碧溪淨心(벽계정심)으로, 碧松(벽송) 芙蓉(부용) 淸虛(청허) 한편으로는 또 浮休(부휴) 쪽으로 흐르고 청허쪽으로도 흐르고, 이런 식으로 해서 한국 불교가 이렇게 오늘날 형성이 됐고 또 우리가 이렇게 존재합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우리들의 뿌리죠 말하자면은 우리들의 뿌리를 더듬어 보게 되는데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법이 얼마가 있든지 간에 우리는 이 시대에 소위 법맥을 우리는 그 나름대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견성을 했느냐 못했느냐 이걸 따지기 이전에 이 시대에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신라의 원효, 의상이고 조선시대의 서산, 사명인 거예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역사를 우리가, 불교 역사를 나중에 이제 이야기한다면 우리의 선적부에 올라있는 우리의 이름들이 그대로 고스란히 이 시대에 우리가 한국 불교를 자리 매김했던 사람들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건 뭐 좋든 싫든 내가 뜻이 있든 없든 간에 관계없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또 그런 역사에 의해서 우리가 오늘 이 순간 존재하게 되니까요. 그래서 이제 대강 그렇게 해서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데 흔히 우리가 선불교를 이야기 하면 五家七宗이라는 말을 잘 듣고 그 다음에 五宗家風이라는 말도 많이 듣게 되는데 오가칠종 또는 오종가풍 이렇게 합니다. 살펴보면은 셋째줄 大鑒慧能(대감 혜능) 혜능 스님이죠. 혜능 스님 밑에 큰 두개의 산맥이 있는데 南嶽懷讓(남악회양)과 저 밑에 내려가서 靑原行思(청원행사). 물론 이제 많은 제자가 있습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후손이 많았고 두드러진 제자로서는 남악 회양과 청원 행사를 들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남악 회양 밑에는 소위 馬祖道一(마조 도일)이 있고 百丈懷海(백장회해)가 있고 그 다음에 黃檗希運(황벽희운)이 있고 臨濟義玄(임제의현)이 있어서 臨濟宗(임제종)을 이루고 또 백장 스님 밑에 潙山靈祐(위산영우)가 있고 仰山慧寂 (앙산해적)이 있어서 위산 스님과 앙산 스님을 합해서 潙仰宗(위앙종), 이렇게 해요. 보십시오. 임제스님은 혼자 이름으로 임제종, 이렇게 했고 위앙종은 두 사람의 이름을 합해서 위앙종 이렇게 했습니다. 그 다음에 興化存獎(흥화존장)으로 이제 이렇게 내려와 가지고 보면은 楊岐(양기)파, 黃龍(황룡)파 한글로 써 놓은 그 두분은 이제.. 오종 하면 임제종 위앙종 저 밑에 바로 내려가서 雲門宗(운문종) 운문스님, 雲門文偃(운문문언)해서 운문종, 그리고 法眼文益(법안문익)해서 法眼宗(법안종) 그 다음에 또 밑으로 내려오면 曹洞宗(조동종) 조산스님 동산스님 해 가지고 조동종, 이렇게 이제 오종이예요. 임제종, 위앙종, 운문종, 법안종, 조동종 이렇게 오종인데 거기에도 이제 임제스님 밑으로 아주 독특한 가풍으로 물론 임제스님 후손이지마는 그 중에서도 좀 이거는 특기할만한 그런 가풍을 가지고 있는 두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은 楊岐方會(양기방회) 스님이고 黃龍慧南(황룡혜남) 스님이다. 이분들은 그야말로 임제종 위앙종 못지 않은 그런. 그 아래이긴 하지마는 그에 못지 않은 그런 독특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 해서 그래서 흔히 양기파, 황룡파를 끼워 넣어가지고 五家七宗 또는 五宗七家 이렇게도 이제 말하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이 두분을 뺄 수가 없는 처지에 있어요. 오종만 말할 게 아니라 이 두 사람도 꼭 끼워서 거론할 수 밖에 없는 그 정도로 두드러졌던 분입니다. 그러나 오종에 비교해서는 약간 뒤떨어지는, 뒤떨어진다는 것은 참 죄송한 표현이지마는 어쨌든 그 아래로 그렇게 이제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五祖法演(오조법연)으로 원오 극근 선사로 원오 극근 밑에 대혜 종고에 와서 간화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됐고 그 다음에 제일 밑엣 줄에 보면은 이제 丹霞子涥(단하자순), 宏智正覺(굉지정각) 으로 해서 비로소 묵조선이라고 하는 것이 등장을 하게 됐다.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간화선이니 묵조선이니 하는 것은 임제스님으로 보면은 상당히 후대의 이른, 후대에 발생한 선의 특색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어요. 이게 아주 선종사에 대해서 자세한 내용은 아닙니다. 아주 머트롭게(?) 아주 대강만 이렇게 간추려서 살펴본 건데 그래도 이정도 그림은 우리가 이렇게 머리 속에 그리고 우리는 임제 스님이 불교사에서 어느 정도 위치에 있고 또 우리는 그 후손으로서, 저~ 말대 후손이지마는 어디쯤에 있다 이런 것을 이렇게 이제 가늠하는 이것도 삼 천 년의 찬란한 불교 역사에 이 못난 마지막 못난 중이 그 찬란한 불교 역사, 그 오랜 불교 역사에 나도 저 끝에 참여하고 있다고 하는 이 동참의식이 중요한 거예요. 그래야 사랑이 생깁니다. 불교에 대한 사랑, 애착이 생겨요. 그거 중요합니다. 愛宗心이 있어야 돼요. 愛佛心. 내가 한 가정의 또는 한 성문의, 어느 권속의 누구네 상장, 이것이 확실하게 어떤 소속감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문중에 대해서 애착을 갖게 되고 또 그 문중을 서로 보살피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거든요. 작게는 그런 게 있는데 크게 보면은 불교 전반에 대해서 아, 내가 그래도 한 모퉁이에 이렇게 이 거대한 집단 그리고 오랜 역사 그리고 세계사에서 불교 역사같이 찬란한 역사가 없는데 그 역사 속에 나도 한 인물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생각을 늘 내야 돼요 우리가. 그래서 불교 전체를 우리가 좀 애착을 가지고 아끼고 사랑하고 그러면서 책임과 의무를 갖는 그런 의식이 정말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 보면은 너무 그런 공동체 의식 소속감에 대한 의식이 너무 부족해요. 나만 생각하는 거야. 참~ 禪 이라고 하는 고준한 불교를 우리가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마음 씀씀이는 저 순전히 소승 중에도 상 소승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보면은. 그래서 일단은 우리가 불교에 소속돼 있는 어떤 소속감 또 동참의식 이런 것이 필요하다 하는 말씀도 아울러 드립니다. 그 다음 이제 다음 페이지 넘겨서 보면은 임제선을 계승한 한국의 선불교라고 돼 있습니다. 한국의 불교 역사는요 우리 피 속에도 전부 다 젖어 있는데 여기에 소개된 열 일곱류,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있었습니다마는 종이가 모자라서 이제 이것만 기록을 했는데 한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무슨 내용인고 하면은 그 어려웠던 조선 시대에 정말 온갖 고난을 다 겪어가면서 불교를 계승해 온 그 뼈대가 바로 임제선의 정신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스님은 전부 임제 스님의 그 정신을 계승해서 이렇게 나에게 물려 왔고 또 후손들에게 물려 주게 되노라 라고 하는 그런 기록들, 비문들, 문집들, 또 불교 역사서 속에서 들어 있는 글들입니다. 또 이런 것을 우리가 역사책의 한 부분이지마는 이런 것을 우리가 이런 기회에 살펴봄으로 해서 (이런 거 어디서 구해보기도 어려운 거예요) 살펴봄으로 해서 우리가 그 역사성을 인식하게 되고 역사 속의 일원으로서의 어떤 그 자부심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1. 不失臨濟者(불실임제자)는 有本有原(유본유원)이라 吾東方太古和尙(오동방태고화상)이 入中國(입중국)하야 嗣石屋而傳之幻菴(사석옥이전지환암)하고 幻菴傳之小隱(龜谷)(환암전지소은(구곡))하고 小隱傳之正心(碧溪)(소은전지정심(벽계))하고 云云(운운)...--鞭羊集 권2 1번 보면은 不失臨濟者는, 임제를 잃어버리지 아니한 것은, 여기서 임제라고 하면은 임제스님 얼굴을 말한 것도 아니요 임제스님의 뭐 몸뚱이를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죠. 임제스님의 선사상, 임제스님의 정신, 임제스님의 불교적 안목,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임제스님의 불교적 안목을 잃어버리지 아니한 사람은 有本有原이라, 근본이 있고 근원이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임제 스님의 불교 사상이 조금이라도 떼어가지 아니한 사람은 그거는 근본도 없는 사람이다 이 말이여. 吾東方太古和尙, 우리 나라 동방 태고 화상께서 중국에 들어가 가지고서 석옥스님의 법을 계승했고 그리고는 傳之幻菴이여, 환암스님에게 그 법을 전하고 환암 스님은 소은 구곡, 구곡입니다. 구곡 스님에게 그 법을 전하고 또 소은 스님은 정심, 백계정심 선사에게 전했다, 이게 이제 편양 언기집 2권에 기록된 내용 그대로입니다. 이와 같이 임제 스님의 정신을 계승해야 비로소 그 불교인으로서 중으로서 근본이 있는 사람이다 라고 이렇게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2번의 2. 太古愚公(태고우공)이 入中國得佛旨(입중국득불지)하야 以還于東(이환우동)하야 到師八葉(도사팔엽)이니 實臨濟之正宗(실임제지정종)이니라 --碧巖 碑 -- 법주사 太古愚公, 태고 보우 스님이 중국에 들어가서 得佛旨, 부처님의 뜻을 얻어서 以還于東하야 동쪽 해동으로 이제 돌아와서 到師八葉하시며, 우리 스님에게 여덟 번째 이파리 팔대 손에까지 이르렀으니 實로 臨濟之正宗이니라. 하, 기가 막히죠. 임제스님의 정종이라네. 아주 정통적인 종파다 이 말이여. 아주 바른 임제의 바른 종파다. 그게 벽암 스님 비석, 법주사에 가시게 되면 꼭 확인하세요. 비석에 이렇게 돼 있어요. 3. 芙蓉靈觀(부용영관)이 接臨濟之遺緖(접임제지유서)하니 浮休與淸虛休靜(부휴여청허휴정)은 俱事靈觀(구사영관)하니라 --또 다른 碧巖 碑 그 다음에 또 芙蓉靈觀스님은 臨濟의 遺緖를 접해서, 임제의 유서가 뭡니까. 유서는 알짜배기 아니요? 저 치지러니, 그걸 유서라 그래. 좋은 건 알짜는 다 거둬들이고. 예를 들어서 농사지어서 추수 다 한 뒤에 저기 이삭 줍기 식으로 떨어져 있는 거. 그거 농사 많이 짓는 사람들은 그까짓 줍지도 안해. 그런 정도의 아주 작은 부분을 줏어 가지고서 줏었으니 浮休與淸虛休靜은 부휴 스님과 청허휴정은, 俱事靈觀하니라. 모두 영관스님을 섬겼다. 섬길 事 자예요. 함께 영관스님을 섬겼다. 이게 또 역시 벽암스님 비석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와 같이 유수한 스님들의 비문에는 임제라고 하는 낱말 또는 임제의 宗風을 계승했다고 하는 낱말이 들어가지 아니하면 그 비석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보는 거야. 뼈대도 없고 근본도 없다. 임제의 정통을 잇지 않은 사람이 무슨 불교를 안다고 하느냐. 무슨 불교 공부를 했다고 하느냐 하는 정도로 우리는 그동안 몰랐지마는 그렇게 내려왔습니다. 임제 이후에는요. 대단한 일 아닙니까 이게. 그 다음에 네번째. 4. 太古(태고)는 嗣石屋而傳之幻菴(사석옥이전지환암)하고 幻菴傳之龜谷(환암전지구곡)하고 龜谷傳之正心(구곡전지정심)하고 正心傳之智嚴(정심전지지엄)하고 智嚴傳之靈觀(지엄전지영관)하고 靈觀傳之西山(영관전지서산)하니 此實臨濟之正脈而惟西山(차실임제지정맥이유서산)이 獨得其宗(독득기종)이라--休靜 碑 太古는 석옥에게, 석옥 청공, 중국이죠 석옥 청공에게 법을 이어서 환암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에게 전하고 구곡은 정심에게 전하고 정심은 지엄에게 전하고 지엄은 영관에게 전하고 영관은 서산에게 전했으니 이것은 실로 臨濟之 正脈이며 오직 서산이 홀로 그 종지를 얻었다. 참 이렇게까지 돼 있습니다. 이게 휴정스님의 비문에 나와 있는 글이예요. 그 다음에 5. 臨濟十八傳而爲石屋(임제십팔전이위석옥)하니 太古得石屋之傳이라 自是로 又六傳而至吾師하니 其源流之遠이 如此니라 --대흥사 淸虛 碑 臨濟十八傳(임제십팔전)이, 임제스님으로부터 열여덟번 전해 가지고서 석옥에게 이르러서 그 다음에 석옥스님은 전했으니 태고 스님, 우리나라 태고 보우 스님은 석옥의 전함을 얻었다. 석옥스님에게 전해 받았으니까 또 이로부터 또 六傳, 여섯 번 전해가지고서 吾師에 이르렀으니, 우리 스님에게 이르렀으니 그 源流의 멀고 먼 것이 이와 같다. 청허 스님 청허 휴정 선사의 대흥사에 있는 비에 이렇게 있습니다. 6. 臨濟後二十四世(임제후이십사세)에 有嫡孫曰浮休(유적손왈부휴)니라 --浮休碑 - 白谷集 권2 그 다음에 임제지후 이십사세에 有嫡孫, 적손이 있었는데 曰 浮休라. 보십시오. 임제 이후 이십 사 세에 적손이 있었다. 임제 적손, 그것은 곧 부처님의 적손, 이런 뜻도 돼요. 그가 바로 부휴선사다. 부휴스님의 비문에도 있고 백곡집에도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일곱 번째 7. 龜谷衣冠膚(구곡의관부)는 去爲臨濟孫(거위임제손)이로다 -- 哭龜谷詩 -- 牧隱 龜谷衣冠膚, 핏줄, 혈통이란 뜻입니다. 옷과 관과 핏줄 이런 말이여. 구곡의 옷과 관과 핏줄은 저기 가 가지고 臨濟孫이 되었다. 거기 흘러 가서 임제손이 되었다. 그건 이제 구곡 스님을 곡하는 시에, 목은이라고 하는 유명한 고려 말 三隱(삼은) 있죠. 목은 하고.. 목은 이색이라는 분은 아주 대단한, 불교에 조예가 깊었고 나옹스님의 碑도 쓰고 한 그런 분이죠. 그 다음에 여덟 번째 8. 臨濟之宗統(임제지정통)이 至淸虛(지청허)하야 又五世而得海源(涵月)(우오세이득해원(함월))하니 是惟喚惺衣鉢嫡傳也(시유환성의발적전야)니라 ---涵月碑---通史上 557 臨濟의 宗統이 淸虛에 이르러서 또 五世에 海源, 함월스님입니다. 함월을 얻었으니 이는 오직 喚惺衣鉢의 嫡傳也라 그랬어오. 換醒, 志安(지안) 스님입니다. 환성지안의 嫡傳이다. 역시 임제스님을 들먹여서 역사를 써 놓은 것입니다. 함월 스님의 비문에. 임제 스님 이야기를 하지 아니하면요 비석으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중으로서도 가치가 없구요. 이제 여러분들도 한국 불교에 있어서 최소한 한국의 선불교에 있어서는 여러분들이 이제 임제스님의 정신을 공부하게 됐으니까 비로소 우리는 임제의 후손이고 중으로서 말하자면 그 가치를 하게 됐고 어디가서 아, 나도 임제 후손이야. 임제록도 공부했어. 그래서 임제사상을 계승했다 라고 큰 소리 칠 수 있는 그 꺼리를 이제 비로소 장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위기에서 보면 사실 그렇게 표현할 수 있어요. 9. 受衣鉢於雪岩(수의발어설암)하니 蓋臨濟嫡孫也(개임제적손야)니라--- 霜月碑---通史上 552 아홉번째는 衣鉢을 雪岩에게서 받았으니 대개 臨濟의 嫡孫也라. 또 그렇게 임제의 적손이라고 그렇게 나와 있네요. 그 상월 스님 비에도 있고 불교 통사에도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10. 蓋師之學(개사지학)은 沂雪岩以上(기설암이상)하야 直紹西山而丕揚臨濟宗焉(직소서산이비양임제종언)하니라 ---虛靜碑 (英祖十年辛酉·서기1741立)---通史上 531 그 다음에 열번째. 대개 스님의 학덕은 沂雪岩以上, 설암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물 沂(기) 자 인데 거슬러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설암 이상으로 거슬러 위로 올라가서, 直紹西山, 바로 서산을 이어서 임제종을 크게 드날렸다. 丕揚(비양), 클 丕 자 입니다. 크게 임제종을 드날렸다. 이게 이제 허정 스님의 비에 나와 있고 역사도 서기 몇 년도에 세워졌다는 내용까지 나와 있죠. 11. 投西山(투서산)하야 染禪旨(염선지)하니 師承有自(사승유자)하며 淵不無(연불무)라 近繼碧松(근계벽송)이요 遠承臨濟(원승임제)로다 ---松雲大師小祥疏---浮休集---全書八 20 그 다음 또 십일번째는 西山에 던져서 禪旨에 물을 들였으니 스승이 계승한 것은 有自라. 부터함이 있다. 시작이 있단 이 말입니다. 시작이 있으며 淵不無라 그 흘러감이 없지 아니하다. 시작이 있으니까 흘러감이 있죠. 근원이 있다 이 말입니다. 自 자는. 유자 하는 것은 시작이 있다. 근원이 있으며. 그로부터 이제 연원이 없지 않다. 近繼碧松이요 근래에는 벽송이 그것을, 벽송을 계승했고 遠承, 멀리는 임제스님을 이었다. 遠承臨濟라, 멀리는 임제스님을 이었다. 이렇게 됐어요. 놀라울 일 아닙니까. 우리가 저 역사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어서 그런데 이렇게 우리는 스님들이 과거 우리 선배 스님들 우리의 스님의 스님, 스님의 스님, 스님의 스님들이 이렇게 오매불망 임제스님을 참 계승을 하려고 했고 임제 사상을 이어 받으려고 했고 임제스님의 사상을 이어 받는 것을 그렇게 정말 가문의 큰 영광으로, 한 생애의 큰 영광으로 생각했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자꾸 중언부언하고 또 이런 자료를 이렇게 있는 대로 종이껏 갖다 놨는가 하면은 이게 우리 의식 속에 있어야 임제록의 한글자 한구절이 그 무게를 더합니다. 가치있게 보여요. 더 귀담아 듣게 되고 여러분들이 돌아가서도 좀 더 마음을 다지고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내가 수고스럽게 이런 소개를 이제 하는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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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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