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 대중 선동의 천재였던 괴벨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면 그 나라 국민은 자동적으로 세 부류로 나뉜다. 한쪽에는 Resistance(저항세력), 다른 쪽에는 Collaborator(협력세력)들이 있고 그 사이에 머뭇거리는 Masses(대중)이 있다. 그 나라 국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온갖 부가 약탈되는 것을 참고 견디게 하려면 머뭇거리는 대중을 레지스탕스 무리에 가담하지 않고 콜라보들 편에 서도록 설득해야 한다." - 요제프 괴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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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침략하자 조선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나타났다. 한쪽에는 독립운동가들, 반대쪽엔 친일민족반역자들이 있었고 그 사이에 대다수 민중들이 있었다. 일본은 민중들이 친일파들 편에 서도록 치밀한 작전을 벌였다. 그 핵심이 바로 '식민지 근대화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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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낡은 조선을 발전시킨다."
이 얘기를 반복적으로 선전해서 일본의 식민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게 만들려고 했다. 그러면서 일본은 친일파를 앞세워 땅과 쌀을 빼앗고 이름과 말도 빼았았다. 심지어 전쟁에 동원해 생명까지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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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맞서 독립운동 세력은 해외로 나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을 조직했다. 자신이 태어난 땅과 자기 민족을 지키고 싶었던 한국의 레지스탕스들. 그들은 독립을 대치하자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을 꾸며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일제 콜라보 친일파들은 천황의 신민으로 사는 것이 조선 민족의 운명이라며 독립군들을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비웃었다. 이들 중에는 혈서까지 써서 기어코 일본군인이 된 자도 있었고 심지어 독립군을 잡아죽이는 일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이것이 독립군 토벌을 위한 친일파 특수부대, 간도특설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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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독립군들은 일제보다 친일파들을 더 증오하고 경멸했다. 그래서 친일파들을 암살하기 위해 비밀조직(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했다.
한국의 레지스탕스와 일제 콜라보들 두 세력의 길고 긴 전쟁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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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초토화 시키겠다고 대규모 병력을 출병시켰다. 그러자 홍범도와 김좌진은 부대를 이끌고 청산리 일대에 집결했다. 죽음을 각오한 3천여 명의 독립군들(그들 대부분은 대종교도였다)은 3만 5천 명의 일본군에 맞서 6일간의 대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을 완벽하게 박살내는 기적을 만들어 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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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본이 의병과 다름없는 조선인 독립군들에게 대패하면서 처음으로 치욕적인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일본군은 조선인 민가들을 습격하며 소름끼치는 대학살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상해임시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강경파들은 당장 중국과 연합해 게릴라전을 벌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온건파들은 군사력을 제대로 키워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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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런 중요한 시점에 이승만이 상해로 왔다. 일단 모두가 환영을 해주었다. 독립성금 문제로 이승만을 비판했던 사람들도 환영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행사가 끝나자 임정요인들은 일본에 맞서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벌이자며 정부 개혁방안들을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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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정부에서 근무해야 효율적이다. 그게 힘들면 국무회의에 권한을 위임해달라."
하지만 이승만은 모조리 거부했다.
"나는 미국에 있을 것이고 어떤 권한도 넘겨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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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정부요인들은 폭발했고 이승만은 전격적으로 대통령 교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거기엔 아주 획기적인 이승만의 독립운동 전략이 담겨 있었다
"우리 형편 상 전쟁준비는 국민들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 국내외 일반 국민들은 각자 직업에 종사하면서 여가시간에 병법을 연마하라.
무기도 각자 구하라. 그러다 좋은 시기가 오면 일제히 나서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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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정부 핵심요인들은 이승만에게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결국 상황은 파국으로 치달았다.
이동휘 "저런 썩은 대가리와 함께 일할 수 없다."
김규식 "말이 되는 대책이 있어야 참여해서 돕지 시간만 낭비하기 싫다."
안창호 "당신이 사퇴해야만 독립운동 세력이 통합된다."
국무총리(이동휘)가 이미 떠난 상황에서 김규식 그리고 안창호마저 임정을 떠났다.
위기탈출의 귀재 이승만. 과연 그는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했을까?
"긴급한 외교사명이 있어 미국에 간다."고 홀로 떠났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은 국군이 승리하고 있다고 거짓 방송한 뒤 서울을 떠나지 못한 피난민과 다리위의 피난민들을 알면서도 다리를 폭파한 후 홀로 피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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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상해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임정을 개혁하려는 독립운동가들이 의정원(대한민국 임시정부 입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들은 독립운동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이승만의 대통령 권한부터 정지시켰다. 최초의 대통령이자 최초의 탄핵을 당한 대통령이 바로 이승만이었다.
미국에서 이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지금부터 임시정부에 인구세를 보내지 마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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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은 "잠은 청사에서 자고 밥은 동포들에게 빌어먹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한 남자가 임시정부의 새로운 지도자로 떠올랐다. 나라를 잃은 분한 마음에 일본 첩자를 맨주먹으로 때려 잡았던 터프한 남자.
그리고 조국이 독립할 수만 있다면 임정의 문지기가 되도 좋다는 순정파 로맨티스트. 그는 열혈민족주의자 김구였다. 역시 진짜 독립운동가는 이승만과 달랐다.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말은 전혀 하지 않았다.
"미약하더라도 우리가 일본과 직접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일본의 적대국들이 한국을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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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바로 구체적인 공격계획을 수립했다. 상해 일본군 사령부, 국내 조선총독부, 만주 관동청, 그리고 도쿄의 일본 천황까지 직접 타격하는 목표를 설정했다. 이를 위해 김구는 특무조직,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그리고 1932년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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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목표달성은 쉽지 않았다. 그 때에 운명처럼 김구를 찾아온 청년이 있었다. 그는 농민들을 가르친 계몽운동가였고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나도 알고 있다. 일본 장교 몇 명 죽인다고
독립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_윤봉길
이 소식은 하와이에도 알려졌다. 그러자 이승만은 김구에게 주제넘은 충고를 했다.
"어리석은 짓들 좀 작작해라. 강대국을 자극해봐야 독립운동에 하등 도움이 안 된다."
이하..더 기록하고 더 쓰기도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