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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1749년 8월 28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태어났다. 귀족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넉넉한 중산층 집안에서 자라나며 어려서부터 문학과 예술을 가까이 접했고, 8세에 시를 짓고 13세에 첫 시집을 낼 정도로 조숙한 문학 신동이었다. 부친의 권유로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20대 초반에 변호사로 개업했지만, 괴테의 관심은 이미 법률이 아니라 문학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여러 문인과 교제하고, 광범위한 독서에 몰두하며, 시와 희곡 등을 습작한다.
1772년에 괴테는 업무상 베츨라르에 머물며 요한 케스트너라는 새 친구를 사귄다. 케스트너에게는 샤를로테 부프라는 약혼녀가 있었는데, 괴테는 첫눈에 반해 그녀를 짝사랑하게 된다. 고향으로 돌아온 괴테는 얼마 뒤에 한 친구가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자살했다는 비보를 전해 듣는다. 이 소재에 자신의 체험을 섞어서 쓴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은 주인공 베르테르의 옷차림이 유행하고 모방 자살까지 일어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괴테는 20대 중반의 나이로 하루아침에 유명 작가가 된다.
1775년, 괴테는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이후 제2의 고향이 된 바이마르로 향한다. 인구 6천 명의 이 작은 공국의 신임 군주 카를 아우구스트 대공은 괴테를 전적으로 신임하며 국정을 맡긴다. 성공적인 공직 수행에도 불구하고 괴테의 내면에서는 예술을 향한 갈증에서 비롯된 불안이 나날이 커지고 있었다. “나는 날개를 가지고 있지만 써먹을 수는 없다.” 지적인 애인 샤를로테 폰 슈타인이나 당대의 지식인 헤르더와의 교제도 그의 욕구불만을 해소시키진 못했다. 급기야 괴테는 바이마르 생활 10년 만에 도망치듯 혼자 여행을 떠난다.
“1786년 9월 3일, 새벽 3시, 칼스바트에서 몰래 빠져 나왔다.” 이렇게 시작된 3년여의 여행 동안 괴테는 이탈리아의 주요 명소를 돌아보고 한동안 로마에 머물면서 느긋이 휴식을 취한 다음, 1788년 여름에 바이마르로 돌아왔다. 이때의 경험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괴테의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본 수많은 고전 예술품의 미적 기준을 이상으로 삼은 특유의 고전주의적 예술관이 확립된 것은 물론이고, 이 여행을 통해 크게 변모된 괴테의 내면을 이해하지 못한 옛 친구들과의 결별이 이어지며 긴 고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괴테는 실러라는 또 다른 독일 문학의 거장과 교류함으로써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셈이 되었다. “자네는 내게 또다시 청춘을 안겨주고, 나를 또다시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네.” 179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우정은 급기야 실러가 괴테를 따라 바이마르로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크세니엔>(1795)이라는 풍자시를 공저했고, 서로의 작품을 비평하며 집필을 독려했다. 희곡 <타우리스 섬의 이피게니에>(1787), <에그몬트>(1788), <토르크바토 타소>(1790), 그리고 독일 ‘교양소설’의 전형인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1796) 등이 이 시기를 전후해 나온 괴테의 작품들이다.
1805년에 실러가 46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하자 괴테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환갑을 맞이한 1809년부터 사망 때까지 20여 년간 비교적 평온한 삶 속에서 괴테의 창작력은 절정에 달했다. 희곡 <파우스트> 제1부(1808), 소설 <친화력>(1809), 자서전 <시와 진실> 제1~3부(1811~13), 기행문 <이탈리아 기행>(1816), 시집 <서동시집>(1816)과 <마리엔바트의 비가>(1823), 소설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1829), <시와 진실> 제4부(1830) 등이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다.
1825년에 괴테는 <파우스트> 제2부의 집필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6년 뒤인 1831년에 드디어 탈고했다. 하지만 그는 간행을 서두르지 않았고, 원고를 봉인한 뒤에 자신의 사후에 발표하도록 주위에 지시했다. 평생의 역작을 완성한 이상, 이제는 자신의 최후가 가까웠음을 실감했기 때문일까? 이듬해인 1832년 3월 22일, 괴테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바이마르의 한 묘지에서 평생의 지기였던 실러 곁에 누웠다. 사망 다음날 괴테의 유해를 본 에커만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평안한 기색이 고귀한 얼굴 전면에 깊이 어려 있었다. 시원한 그 이마는 여전히 사색에 잠겨 있는 듯했다.”
괴테는 80년 넘는 생애 동안 시와 소설, 희곡과 산문, 그리고 방대한 양의 서한을 남겼다. 문학뿐만 아니라 신학과 철학과 과학 등 여러 분야에도 손을 댔고, 유능한 관료이며 탁월한 인격자로도 존경을 받았다. 괴테가 오늘날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 문학사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보적인 인물인 까닭은 이처럼 오랜 활동 기간과 다재다능함 때문이다.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에 이르는 그의 생애 동안에는 산업혁명과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의 대두 같은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났다. 그런 역사적 격동기 속에서 괴테의 문학은 다른 여느 작가와는 다른 깊이와 넓이 모두를 성취했다.
나아가 괴테의 생애는 수많은 공국과 도시로 분열되었던 오늘날의 독일이 처음으로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에 눈뜨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렸다. <파우스트>를 비롯한 괴테의 대표작들은 다른 유럽 문학에 비해 낙후되었다고 평가되던 독일 문학의 수준을 일거에 드높였다. “독일 민족의 자의식은 바이마르에서 태어났다”는 문화사가 자크 바전의 지적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일찍이 셰익스피어가 영국 문화와 영어에 끼친 영향 못지않게, 괴테는 독일 문화와 독일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다.
문학사적으로 괴테는 고전주의 작가로 분류되지만, 젊은 시절에는 <베르테르> 한 편으로 실러와 함께 질풍노도(슈투름 운트 드랑)의 대표 주자가 되었으며, 나중에는 낭만주의의 선구자로도 평가되었다. 하지만 고전주의적 예술관을 철두철미 견지한 괴테는 오히려 낭만주의에 대해서는 적잖은 거리감을 느꼈던 것으로 전한다. 이는 만사에서 질서와 조화를 중시한 괴테 특유의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가령 괴테는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는데, 이는 뉴턴의 광학에 대한 반발로 이루어진 색채 연구와 함께 괴테의 보수성을 드러내는 증거로 종종 언급된다.
괴테의 수많은 작품은 이후의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여러 명시는 슈베르트가 곡을 붙인 <물레질하는 그레첸>, <마왕>, <들장미>처럼 독일 가곡의 대표작으로 거듭났다. 베토벤은 괴테의 희곡 <에그몬트>에 붙이는 서곡(1810)을 작곡했다. 당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모차르트나 베토벤이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작곡해 주길 바랐던 괴테의 희망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지만, 훗날 베를리오즈의 <파우스트의 저주>(1846)와 구노의 <파우스트>(1859) 등의 작품이 좋은 평판을 얻었다. 앙브루아즈 토마의 오페라 <미뇽>(1866)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에 나오는 에피소드를 각색한 것이다.
햄릿이나 돈키호테가 특정한 인간 유형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파우스트는 자신의 호기심(또는 이익)을 위해 막대한 위험조차도 서슴지 않고 감수하는 인간 유형의 대명사가 되었다. 괴테의 희곡 제2부에서 파우스트는 인류를 위한 공익사업이라는 이유로 해안을 개간하고 제방과 운하를 만드는 대규모 토목공사에 돌입한다. 개발 과정에서 공사 예정 부지에 사는 어느 노부부가 퇴거 명령에도 불구하고 떠나지 않자, 파우스트는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내쫓을 궁리에 골몰한다. 급기야 메피스토가 폭력배를 동원해 집에 불을 지르자, 노부부는 그만 빠져 나오지 못하고 불타 죽는 비극이 발생한다. 이처럼 파우스트의 행위는 본질적으로 인간성의 말살을 내포하고 있다. 짐작컨대 이것이야말로 어쩌면 괴테가 경고하고자 했던 근대성의 크나큰 맹점 가운데 하나는 아니었을까.(박중서)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프랑크푸르트 북쪽으로 6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도시 베츨라는 약 4,000명의 전체 주민 중 거의 4분의 1이 법원에서 일하는 곳이었다. 1772년 5월 25일 괴테가 제국 대법원 명부에 이름을 올렸을 때 그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베츨라에서 값진 경험과 인맥을 쌓을 가능성은 실로 엄청났을 것이다. 베츨라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1772년 6월 9일, 괴테는 근처 도시인 폴페르츠하우젠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갔다가 샤를로테 부프라는 여인을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열아홉살이었던 샤를로테 부프는 독일기사단의 베츨라 영지 관리인이자 홀아비였던 하인리히 아담 부프의 딸로, 열한 명의 자녀 가운데 둘째였다. 푸른 눈과 금발의 매력적인 여성이었던 샤를로테는 꾸밈없고 재기 발랄하고 활달한 아가씨였다.
크리스티안 케스트너는 그녀가 열다섯 살 때 처음으로 만났는데 자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만드는 그녀의 상냥하고 공손한 태도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1771년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역할과 책임을 떠맡게 되었을 때 로테가 따뜻한 마음씨로 힘든 기색도 전혀 없이 가족들로부터 사랑받고 모두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을 보고 그 마음이 더욱 깊어지게 되었다. 로테는 케스트너의 마음을 받아들였고 괴테가 넉달 동안 베츨라에 멈물 때쯤에는 그 근방에서 케스트너가 로테의 ‘약혼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괴테는 사십 년 후에 쓴 회고록에 로테가 명랑하고 애교 있으며 순수하고 건강한 아가씨였고 “그녀가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기분 좋은 평온함이 감돌았다”고 기록했다. 특히 가정에 지복을 가져다줄 여인이라는 이유에서 로테를 남자라면 누구나 결혼하고 싶어할 아가씨로 생각했다. 흥미로운 사실을 괴테가 그녀를 묘사함에 있어 격렬한 열정보다는 차분한 만족감을 불러일으키는 여성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괴테는 “차분하고 조용한 몸가짐과 명석함, 단호한 행동과 말씨”가 눈에 띄었던 케스트너에게도 호감을 느꼈다. 그는 케스트너가 부지런하고 지각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로테와 괴테 그리고 케스트너 사이의 우정은 점점 깊어갔다. 괴테의 자서전에 따르면, 즐거웠던 1772년의 여름이 ‘진정한 독일식 목가’가 된 이유 또한 바로 이 우정 때문이었다. <시와 진실>에서 노년의 괴테는 그해 여름을 꿈꾸듯 즐거웠던 계절로 묘사했다. 케스트너는 분별력 있고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의 본능은 근거 없는 질투심보다는 우정으로 그를 이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테와 괴테가 가깝게 지내는 것을 그리 탐탁하게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녀와 단둘이 즐거워하고 있는 그이 모습을 보는 것이 달갑지 않다”고 그는 적었다.
자서전에서 괴테는 세 사람의 우정에 어떠한 마찰도 없었음을 암시했다. 그리고 로테 곁에서 그가 느꼈던 고통과 좌절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소망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는, 행복의 일부였다고 밝혔다. 1772년 여름 로테는 괴테에가 그의 마음을 받아줄 수 없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는 자신에게서 우정 외에 그 어떤 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그에게 말했다.” 9월 10일 저녁, 세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던 중 로테가 대화의 주제를 저세상에 대한 것으로, 그리고 이승에서 알았던 사람을 저승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로 이끌었다. 이때 괴테는 또 한 번 낙담했다. 다음 날 아침 7시에 괴테는 한마디 말도 없이 베츨라를 떠났다. “나는 지금 혼자입니다. 눈물을 흘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이 행복하길 바라며 떠나니 부디 나를 잊지 말아주세요.”란 편지를 로테에게 남겼다.
케스트너의 일기에 의하면, 로테는 이 편지를 읽을 때 눈물을 글썽였고 케스트너는 그토록 갑작스럽게 떠난 무례한 처사에 대하여 괴테를 변호해야만 했다고 한다. 한편 괴테는 코블렌츠로 가서 친구 요한 하인리히 메르크와 작가 조피 폰 라 로슈, 추밀원 고문관이었던 그녀의 남편, 그들이 열여섯 살 먹은 딸 막시밀리아네를 만났다. 괴테는 <시와 진실>에 이렇게 기록했다. “옛 열정이 마음 속에서 채 가시기도 전에 새로운 열정이 시작되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이다.” 괴테는 막시밀리아네에게 깊이 빠져 들었고 소설 속 로테의 외모 역시 샤를로테 부프보다는 막시밀리아네 폰 라 료슈를 훨씬 더 많이 닮았다. 그러나 막시밀리아네에게서도 괴테는 실연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이 년 후 그녀는 프랑크푸르트 출신의 중년 상인과 결혼했다.
괴테는 베츨라의 친구들과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10월 초의 어느 날 친구 폰 구에게 자살했다는 (후에 낭설이었던 것으로 밝혀진) 소문을 듣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그로부터 삼 주가 지나기도 전에 두 번째 자살 소식이 들렸다. 이번에는 사실이었다. 10월 29일 밤, 카를 빌헬름 예루잘렘이 총으로 자살했던 것이다. 그는 30일 정오 무렵에 사망했고 같은 날 저녁 땅속에 묻혔다. 괴테보다 조금 연상이었던 예루잘렘은 1747년 3월 볼펜뷔텔의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브라운슈바이크 대학에 진학했고 훗날 괴테와 같은 시기에 라이프치히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770년 괴팅겐에서 학위를 받았다. 1771년 그는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사(公使)였던 폰 회플러의 비서관으로 베츨라에서 일하게 되었다. 베츨라에 사는 동안 비록 괴테와 가깝게 지낸 적은 없지만, 가끔씩 괴테와 친구들이 베츨라나 가르벤하임에서 모임을 가질 때 같이 어울리기도 했다. <시와 진실>에서 괴테는 예루잘렘을 둥근 얼굴에 푸른 눈과 금발 머리를 가진 예의 바르고 점잖은 청년으로 적었다. 괴테는 특히 예루잘렘이 황량한 풍경화를 그리기를 즐겼던 것과 다른 사람의 아내(엘리자베트 헤르트)를 사랑했던 사실을 상기했다.
괴테는 11월 6일부터 11일가지 베츨라에 머무는 동안 예루잘렘의 죽음에 대해 자세히 조사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또 11월 말에 케스트너에게 부탁해두었던 상세한 보고서를 받은 후에는 곧 그것을 바탕으로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들을 쓰게 된다. <시와 진실>에 따르면, 괴테는 정확한 사실을 입수한 순간 소설 전체의 구조를 온전하게 눈앞에 그릴 수 있었다고 한다. 케스트너의 보고서는 베츨라에 떠도는 소문을 기록한 것으로 예루잘렘이 엘리자베트 헤르트에 대한 사랑을 공공연히 공언하고 다녔음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헤르트 부인은 이 사실을 남편에게 말한 다음 이 젊은이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그리고 예루잘렘이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해달라고 그녀가 부탁하자 남편은 그 말에 따랐다.
이 일이 있은 후 예루잘렘은 케스트너에게 자신이 곧 여행을 떠날 예정이니 권총을 빌려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케스트너는 예루잘렘이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그이 요청을 수락했다. 자정과 새벽 1시 사이에 예루잘렘은 총을 쏘았다. 케스트너는 예루잘렘이 책상 앞에 앉아서 총을 쏜 것 같다고 썼다. “의자 등받이와 팔걸이가 피투성이였네. 그의 몸은 의자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있었지.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네. 그는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 속에서 엎치락뒤치락했던 것 같아.(그는 부츠와 푸른코트, 담황색 조끼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고 있었네.)” 예루잘렘은 정오 무렵에 사망했고 그날 밤 11시가 되기 조금 전에 묘지에 묻혔다. 케스트너는 이발사 수습생들이 십자가 든 사람의 뒤를 따라 관을 무덤까지 운구했다고 기록했다. 그가 이 말 뒤에 덧붙인 평범한 문장은 괴테가 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이 되었다. “사제는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았네.”
케스트너와 로테는 1773년 4월에 결혼했고 결혼식이 끝난 뒤에야 괴테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막시밀리아네 폰 라 로슈는 1774년 1월에 결혼했다. 그 이후에 괴테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마이클 헐스)
■ 우린 어떤 베르테르를 읽어왔나
한국에 가장 많이 번역된 독문학 작품이라면 헤세의 <데미안>과 함께 단연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하 베르테르)을 꼽을 수 있다. <젊은 베르터의 고뇌>라는 제목의 번역을 포함해서 과도한 중복 번역의 사례로 지목될 만큼 많은 번역본이 나와 있다. 1774년 괴테 나이 스물 다섯 살에 발표된 <베르테르>는 알려진 대로 대단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괴테 자신의 운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다. 게다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그러하지만 베르테르 역시 작가보다 더 유명한 주인공의 하나다.
그런 <베르테르>를 어떻게 읽고 이해할 것인가. 새삼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것은 괴테의 <베르테르>가 두 가지 판본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1774년에 나온 초판과 1787년에 나온 개정판이 그것이다. 초판본이 나온 이후에 오·탈자를 교정한 판본들이 더 나왔지만 적극적인 개고 과정을 거쳐서 나온 1787년판을 통상 결정판으로 간주하며, 대부분의 한국어판 <베르테르> 역시 이 1787년판을 옮긴 것이다. 하지만 두 판본 간의 차이가 사소하지 않다면, 그리고 출간과 함께 독일을 포함하여 유럽 독서계에 충격을 던진 작품은 1774년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판본의 문제는 좀 더 세심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두 판본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한 여주인을 사랑한 하인의 에피소드가 초판본에는 빠져 있다는 점이다. 다르게 말하면, 베르테르에게 치명적인 사랑의 모델이 되는 인물을 괴테는 개정판에 의도적으로 집어넣었다. 베르테르는 이 하인을 세 차례 만나는데 그때마다 사랑의 단계에 대해서 알아나간다. 처음 만났을 때 베르테르는 여주인에 대한 하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하여 진정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비로소 깨달았다고 말한다. 베르테르에게 연애 경험이 없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인은 새로운 경지의 사랑을 그에게 일깨워준 것이다. 베르테르가 로테를 만나서 사랑의 감정을 키워나가는 것은 하인과의 만남 이후에 벌어진 일이다.
마치 사랑의 교사 같은 역할을 하는 하인의 존재는 로테에 대한 베르테르의 감정을 모방적인 것으로 읽게 한다. 하인은 여주인에 대한 연모의 감정이 탄로 나서 여주인의 오빠에게 해고당하고, 이후에 자신을 대신하여 여주인을 모시게 된 다른 하인을 질투심에 살해하고 만다. 베르테르는 살인범으로 체포되어 끌려가는 하인을 보고서 애통해하며 적극적으로 변호하고자 한다. 동병상련을 느끼며 베르테르가 자신의 운명을 하인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장면이다. 더불어 그의 감정이 자발적이거나 직접적이라기보다는 모델에 의해 매개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러한 설정이 빠져 있는 것이 1774년판이다.
주인공 베르테르가 세계문학사상 가장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로 등장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가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모델의 행동을 흉내 낼 뿐인지는 중요한 차이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이 차이는 괴테도 의식했을 차이다. 개정판을 낼 무렵의 괴테는 이미 30대 후반으로, 1786년부터 1788년 사이의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고전주의자로 변모해가던 괴테다. 초판본을 내면서 ‘질풍노도‘ 운동의 대표자로 떠오르게 되는 젊은 날의 괴테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게 된 괴테이기도 하다. 개정판 <베르테르>가 그러한 변화를 반영한 판본이라면 초판본과는 구별해주는 것이 온당하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어떤 <베르테르>를 읽어왔으며 또 읽고 있는 것인지부터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이현우)
■ <시와 진실>
괴테의 출생시부터 1775년 바이마르에 부임할 때까지의 이른바 젊은 시절을 서술한 것이다. 1808년 괴테의 전집이 완성되는 기회에 그의 발전과정을 서술하여 작품 해석의 뒷받침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옛 친지들로부터 자료 제공을 받아 11년에 제1부, 12년에 제2부, 14년에 제3부를 각각 발표하였고, 제4부는 옛 약혼녀 릴리에 대한 배려에서 집필을 중단했다. 그러나 1831년에 퇴고하여 유작으로 발표하기로 작정하여 괴테 사후인 1833년에 출판되었다.
원래 이 자서전의 표제는 <나의 생애로부터:Aus meinem Leben, Dichtung und Wahrheit>이다. <시와 진실>은 그것의 부제였는데, 지금은 후자가 본제목처럼 생각되고 있다. 작자 괴테의 말대로 “자기 생애를 지배한 사실상의 근본적 진실”을 표현하려 하였으며 <괴츠 폰 베를리힝겐>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의 제작 과정과 시대사조의 동향이 강력한 개성을 지닌 괴테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으며, 세계의 자서전 문학 중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 <시와 진실>은 사실의 일차원적인 재현이 아니라 고차원적인 진실을 전하고 있으며, 가장 뛰어난 당시의 문화사이기도 하다. 또 이 ‘젊은 시절’ 이후의 자서전의 나머지 부분은 <이탈리아 여행>(최종 1829) 등이 보충해 주고 있다.(두산백과)
첫댓글 강의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