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의 세계" 편역
태국의 역사
* 태국의 최근 정치에 관해 보다 심도 있는 이해를 얻고자 한다면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발표한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태국의 '왕실모독 처벌법'을 무시하고 각종 중요한 자료들을 모두 소개하고 있는 이 논문은 이제까지 태국에 관해 나온 글이나 책 중에서 어떤 자료도 필적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요 약
선사시대
동남아시아의 인류 거주사는 50만년이 넘는다. 최근 이루어진 반 치앙(Ban Chiang) 유적의 고고학 조사 등의 연구에 따르면 BC 4000년에 이미 오늘날의 태국(타이) 지역에 초기 청동기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와 함께 벼농사의 발달은 사회적·정치적 조직화를 촉진시켰다. 이와 같은 연구 결과는 이러한 발달이 이곳에서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지역에 전파되었음을 시사한다.
타이족(태국민족)은 언어학적으로 중국 남부에서 나온 여러 집단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태국민족을 비롯한 이러한 민족들을 포괄하는 "따이족"(=따이민족군)은 중국 남부에서 동남아시아, 그리고 인도 동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포를 보여주기도 한다.
현재의 타이족(태국민족)은 6세기와 7세기에 거쳐 중국 남부에서로부터 동남아시아로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타이족이 남하하기 전에 이 지방에는 선주민인 말레이족, 몬족, 크메르족 등의 문화가 꽃을 피웠다.
수코타이 시대
타이족은 13세기 처음으로 독자적인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전승에 따르면 크메르제국 지배하에 있던 1238년 수코타이에서 이 족장들이 크메르를 타도하고 타이인의 왕국을 세웠다고 한다. 수코타이 왕국은 람캄행 왕 시절 오늘날의 태국 지역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되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쇠퇴의 길을 걷다 1365년에 아유타야 왕국에 넘어갔다. 아유타야 왕국은 1700년대까지 타이 남부와 중부 지역을 지배한다.
수코타이 왕국이 쇠퇴하자 짜오파야(차오프라야) 강가에 1350년 새로운 타이족 왕국이 세워졌다. 수코타이 왕국 시절에도 태국 북부에는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란나타이 왕국이 융성했으며, 이 국가는 독립 왕국으로 존재하기도 했고, 때로는 버어마와 아유타야 사이에서 번갈아 가며 동맹을 맺어가면서, 오랜 기간동안 존속되다 결국에는 아유타야 왕국에 합병된다.
아유타야 시대
"아유타야 왕국"(Ayutthaya, อาณาจักรอยุธยา, 혹은 Ayudhya)은 1351년부터 1767년까지 존속한 태국의 왕조이다. 아유타야는 중국, 베트남(안남), 인도, 일본, 페르시아, 그리고 보다 후대에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 프랑스 등에 대해 성읍 바깥에 한해 집단거주지를 허용함으로써, 국제무역에 대해 대단히 개방적 자세를 보여준 왕조였다.
16세기의 외국 상인들은 이 왕국을 동양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왕국이라고 묘사했다. 나라이(Narai, 1656–1688 재위) 왕의 궁전은 프랑스의 루이 14세 국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에서 온 대사는 나라이 왕의 도성을 파리에 버금가는 규모와 부를 축적한 곳이라 표현했다.
버어마의 침략을 받기 전까지 아유타야의 조공국에는, 오늘날의 미얀마(버어마)에 위치했던 샨족(Shan) 국가들과 치앙마이(Chiang Mai) 지역에 위치했던 란나왕국(Lanna), 중국의 운남성과 산시성 지역, 라오스의 란상왕국(Lan Xang), 베트남에 위치했던 참파왕국(Champa), 그리고 하-버어마(반도부 버어마)의 여러 도시국가들이 포함됐다.
외국의 기록들에 따르면 아유타야는 공식적으로는 "시암"(Siam: 사얌)으로 알려졌지만, 여러 자료들은 아유타야 사람들은 스스로를 "따이족"(Tai)이라 불렀고 그 국가에 대해서는 "꿍따이"(Krung Tai) 혹은 "따이족 왕국"(Kingdom of the Tais)으로 불렀다고 기록했다.
톤부리 시대
톤부리(Thon Buri, ธนบุรี)는 버어마의 침공으로 인해 아유타야(Ayutthaya) 왕국이 멸망한 후, 딱신(Taksin 혹은 Taak-sin) 대왕이 한때 태국의 수도로 사용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후 딱신의 군사령관으로 정권을 이어받은 짜끄리 왕조의 개조 라마 1세(Rama I)는 1782년 다시금 짜오파야 강(Chao Phraya River, 차오프라야 강) 건너편의 방콕(Bangkok)으로 도성을 옮겨간다. 이후 톤부리는 독립된 도 및 읍으로 남아있다가, 1972년 방콕 광역시로 편입됐다.
짜끄리 왕조 : 라따나꼬신 시대
"라따나꼬신 왕국"(Rattanakosin Kingdom, กรุงรัตนโกสินทร์) 또는 "시암왕국"(Kingdom of Siam)은 태국의 역사에서 4번째로 등장한 왕국이다. 이 왕국은 방콕(Bangkok)을 근거지로 했고,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일부 말레이계 왕국들도 조공국으로 거느렸다. 이 왕국을 개국한 사람은 "짜끄리 왕조"(Chakri Dynasty, ราชวงศ์จักรี)의 풋타 욧파 쭐라록(Buddha Yodfa Chulaloke, พุทธยอดฟ้าจุฬาโลก: 라마 1세) 국왕이다.
라따나꼬신 왕국 시대의 전반부는 국력을 응축해나가면서 버어마, 베트남, 라오스와 갈등을 한 시기이다. 그리고 후반부는 영국과 프랑스 식민주의에 직면했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유럽 식민주의(European colonialism)의 영향권에서 간신히 벗어난 국가로 존립할 수 있었다.
라따나꼬신 왕국은 서구 열강들과 교섭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현대적인 중앙집권적 민족국가(nation state)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주요한 사회 경제적 발전도 이뤄졌다. 즉 외국과의 통상교역 확대, 노예제도(노비제도)의 철폐, 교육제도의 확대를 통해 중산층이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1932년 절대왕정을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혁명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실질적인 정치적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입헌시대
1932년 시암 쿠데타로 인해 타이의 정부는 절대 군주제에서 입헌 군주제로 바뀌었다. 라마 7세는 최초에 이러한 변화를 받아들였지만, 결국 정부와의 불화를 일으키다 영국에서 스스로 퇴위했다. 이후 군사정권은 라마 7세의 조카였던 어린 아난타 마히돈 국왕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하지만 아난타 마히돈(라마 8세) 국왕은 1946년 머리에 총상을 입은 채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공식 발표는 자신의 총을 청소하다가 실수로 발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동생으로 왕위를 이은 푸미폰 아둔야뎃(라마 9세) 국왕은 타이 역사상 재위 기간이 최장인 군주이며 많은 태국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데에는 <왕실모독 처벌법>과 같은 가혹한 체제유지 악법들과 언론통제와 검열, 교육제도 등, 수많은 제도적 장치들이 한몫을 담당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은 일본군에 점령당했고, 태국 역시 남부지방과 동부로부터 침공을 받았다. 그러나 독재자 피분송캄 총리는 재빨리 일본과 동맹을 맺고 버어마로 진격할 길을 내주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후에, 일본에 대항했던 "사리타이" 반군 세력이 사전에 정부에 침투해 있었기 때문에, 태국은 비교적 빨리 정상화가 가능했다.
이후 태국은 미국의 영향권으로 들어갔고, 주변국인 캄보디아와 라오스, 베트남이 공산화되면서 더욱 더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간간히 시위를 통해 들어섰던 민간정부의 운명은 길지 못했고, 오랜 군부 통치가 하나의 전통처럼 지배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현재 푸미폰 국왕의 최측근(추밀원 의장)이 된 쁘렘 띠나술라논 총리 시절 점진적인 입헌적 정치문화의 기반을 놓았고, 이후 1991년 쿠테타의 과도기간이 끝나는 1992년 선거 이후부터는 실질적 민주주의 정치가 이어졌다. 그러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의 치세 하에서 현실정치에 대한 왕실의 영향력 역시 점점 더 강화되어 왔고, 실질적으로 현재 기득권 보수층 세력의 권력정점에는 왕실이 위치하고 있다.
탁신 친나왓의 등장
2001년 선거에서 재벌 출신의 탁신 친나왓 씨가 새로운 총리가 되었다. 이후 2번이나 연속으로 당선되는 그의 집권기에, 태국은 경제 사회적으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사회로 전환될 계기를 마련한다. 탁신 전 총리는 자유시장 개방과 빈곤층 대책이라는 2중 트랙을 통해, 특히 북부와 북동부 지역 농민층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1997년 아시아금융위기"의 여파에서 태국 경제를 탈출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강력한 마약단속 정책 등에서 인권침해에 대한 논란이 발생하기도 했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기존의 태국사회의 근간이었던 국왕 중심의 체제이데올로기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발생한 점이었다.
결국 2006년에 친-왕당파의 "2006년 태국 군사쿠테타"가 일어나 정국을 과거로 복귀시키고자 했지만, 이후의 민정이양에서도 2번이나 연속으로 친-탁신계 정당이 정권을 구성하게 되었다.
2008년 12월에는 태국의 극우왕당파 "옐로우셔츠"(PAD) 시위대가 방콕국제공항 점거테러를 일으킨 후 사법부가 여당의 해산명령을 내림으로써, 친 탁신계 정부는 물러나고 정계개편을 통해 아피싯 웻차치와와 총리가 이끄는 반 탁신계(왕당파) 정부로 교체되었다.
탁신을 넘어서는 항쟁
2010년 3~5월에 레드셔츠(UDD) 이 반정부 시위대는 방콕 시내의 중심가를 점거하고, 장장 70일에 이르는 비폭력 항쟁을 보여주었다. 태국 정부는 결국 이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일주일간의 "인간사냥" 후에 유혈진압을 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외신기자 2명을 포함하여 80명 이상이 사망했고, 1,900명 이상이 부상했다. 그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처철했던 시민항쟁 중 하나로, 이제 태국이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사회로 돌아갈 수 없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바로가기: "태국사태 2010년 : 위대한 레드셔츠 70일 항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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