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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2: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
히2: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히2: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히2:4 하나님도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이 나누어 주신 것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셨느니라
1.구원 가장 큰 필요
이 네 구절은 성경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다가오는 방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줍니다. 성경 전체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바. 매우 심각하고도 엄숙하며 긴박한 어조를 띠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복음서에도 이런 이조가 나오고 사도들을 비롯한 초대교회 설교자들의 설교가 기록된 사도행전과 신약성경의 모든 다양한 서신에도 같은 어조가 나옵니다. 성경이 이런 어조를 통해 전달하려는 생각은 이것입니다.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마 3:7, 눅 3:7).
마3: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 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3: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신약성경 최초의 설교자인 세례 요한도 처음부터 이런 어조로 경고했고,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같은 어조로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막 1:15).
막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 11:15. 막 4:9, 눅 8:8).
마11: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막4: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눅8: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것은 다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으로서, 주님의 메시지에 담긴 정신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주님의 어조는 심히 긴급하고, 매우 심각하며, 심지어 엄숙하기까지 합니다. 사도행전으로 넘어가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아는 기독교회의 지원 하에 이루어진 최초의 설교-가나오는데, 사도는 그 실교에서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라고 촉구합니다(행 2:40).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 같은 어조로 설교합니다
사도 바울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저 유명한 아덴 설교를 보십시오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행 17:30-31). 그는 사역하는 내내 같은 어조로 설교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서신서에도 같은 어조가 나오는데, 히브리서 2:1-4 에 특히 강렬하게 나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복음의 사실들에 주의를 집중하고 유념할 것을 촉구하고 간청하며 권면합니다.
그는 지금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 모든 서신은 교회의 일원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입니다- 들은 것에 유념하길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 복음을 믿었지만, 여전히 힘든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박해와 기근을 비롯한 온갖 어려움 속에서 일부 흔들리는 자들까지 생겨났습니다. 믿음을 아주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처럼 동요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그들이 듣고 믿은 사실들을 등한히 여기지 말고 떠내려가지 말길 권면한 것입니다. 반복하건대, 그의 메시지는 일차적으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그의 메시지가 복음의 사실들을 이미 붙잡고 있는 신자들에게 중요한 것이라면. 불신자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리라 추론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믿은 자들도 잊기 쉽고 잊을 가능성이 있는데, 전혀 믿지 않는 자들은 얼마나 더하겠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신자들에게 촉구하는 모든 내용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불신자들에게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히브리서의 메시지는 자신에게 유념한 것을 세상에 요구합니다. 복음을 슬쩍 쳐다보거나, 그에 관한 가벼운 글을 읽거나 그에 대해 가끔 토론하거나, 특별한 날과 행사 때 교회에서 하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유념하라는 것은 전적으로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의 첫 유럽 전도 이야기가 기록된 사도행전 16장에 아주 좋은 예가 나옵니다.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유념하게] 하신지라"(14절). 루디아는 바울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잘 살펴보고 생각해 보았다고 해도 좋습니다. 앉아 있는 동안에만 듣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다 잊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루디아는 복음 메시지의 절대적인 중요성을 깨닫고 그 메시지에 유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에 사용한 또 다른 표현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아마 항구 바로 바깥에 정박한 배를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배가 목적지인 항구에 이르지 못한 채 조류에 떠밀려 자신도 모르게 떠내려가는 것은 아주 안타깝고도 심각한 일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도 그렇게 떠내려갈 수 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떠내려갔습니다. 복음을 접하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항구 입구까지는 오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들어가면 항구에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저런 이유로 어정쩡하게 있다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내려가 버립니다. 항구가 뻔히 보이는데도 이렇게 지나쳐 버리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같은 위험에 처한 자들을 향해 경고하는데, 이것은 성경 전체에 나오는 복음의 경고이기도 합니다. 주님도 저 유명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동일한 경고를 하셨습니다. 복음을 듣지만 마치 길가에 떨어진 씨처럼 새가 채 가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사람, 그대로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영혼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고 그 능력을 일부 느끼고서도 그대로 떠내려가 되돌아오지 못하는 것보다 무서운 일을 저는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같은 위험을 경고하며, 편지를 쓰는 내내 같은 경고를 반복합니다.
그가 사용한 세 번째 표현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다른 일에 정신을 파느라 구원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떠내려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원이 앞에 있음을 알면서도 등한히 여기다가 떠내려가는 것입니다. 복음을 일부 아는 사람들은 세상에 많습니다. 마음으로는 복음이 옳고 참되다는 사실을 알며, 언젠가는 주의를 기울여 복음이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듣고 살펴보겠노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천국과 지옥과 하나님과 죄에 대해서도 일부 알고, 진리의 명제와 진술도 몇 가지 압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등한시하며, 다른 일에 빠져 복음에 관심과 시간을 투자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등한시합니다.
성경은 도처에서 이 세 가지 위험을 피할 것을 권면하며, 복음에 귀를 귀울이고 유념할 것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정확히 반대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많은 일에는 큰 관심을 쏟으면서도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는 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생각 있는 자들도 그렇습니다. 물론 세상의 현 상태를 놓고 절박하고 심각하게 염려하기는 합니다. 이미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기에, 장차 일어날 일들의 조짐과 징후를 보며 미래를 두려워합니다. 철학자와 사색가와 선도적 사상가들이 이런 문제들을 붙잡고 씨름합니다. 그러면서도 복음을 가지고 다가가면 그런 말은 듣지 않겠습니다. 그건 이 문제와 무관해요'라고 합니다. 복음에는 들을 만한 말이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들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이처럼 대다수 사람들이 망해 가는 세상에 살면서도 히브리서 기자의 간곡한 권면을 듣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일까요? 왜 모든 교회의 문을 닫으면 안 되는 것일까요? 왜 기독교회를 폐지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현대 세계에서 오직 우리만 인간 문제의 유일한 해답을 가지고 있다는 독특한 주장을 인류 앞에 내세워도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모든 사람이 이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 네 구절을 통해 히브리서 기자가 제시하는 이유 우리가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일반적이고 주된 이유 세 가지를 밝히고자 합니다. 이 세 가지 이유는 곧 히브리서의 세 가지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네 구절 자체가 히브리서 전체의 요약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이유는 복음의 원천 내지 권위에 있습니다. 복음 메시지는 권위 있게 우리를 찾아오는데 그 권위는 메시지의 원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복음을 믿지 않고 유념치 않는 자들의 위험하고 우려스러운 상태와 위기에 있습니다 세번째이자 마지막 이유는 복음의 본질 내지 특징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복음을 주의 깊게 숙고해야 하는 이 세 가지 이유를 살펴보기 전에 지금 다루는 복음의 내용에 모두 동의하는지부터 확실히 짚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복음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에게 복음게 유념하라고 권하는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복음을 등한시하거나 복음에서 떠내려가면 안 된다는 엄청난 주장을 다루기 전에 지금 살펴보는 복음의 내용 자세를 알고 있는지부터 분명히 확인해야 합니다. 불행히도 오늘날은 그렇다고 단정할 수가 없습니다 익히 알다시피 사탄이 한 사람을 완전히 확보하는 데 실패한 후에 취하는 다음 단계의 방책과 개략은 복음을 오해하도록 부추기는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으며, 그럴 마음조차 먹지 않습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말하며 복음을 자기 삶 밖으로 완전히 밀어내 버립니다. 마귀는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자기 통제 아래 가둡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인생에서 실패했거나 실망한 자들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큰 외로움을 느끼거나 어려움에 빠진 자들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및 교회 쪽으로 생각이 기울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생각은 바른 복음에 근거한 것이 아님에도 마귀는 마치 바른 복음에 근거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자 온갖 수를 쓰며 잘못된 종교적 관심을 갖도록 부추깁니다.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고 곤란한 위기에 처한 사람이 늘 빠지기 쉬운 위험이 이것입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희망을 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들다가 이런 위험에 빠지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요즘 같은 때일수록 이 절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신약성경 자체가 이에 대해 경고하며 그 대처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실들은 믿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들은 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세상에 많습니다. 본인들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다고 생각하나 신약성경에 비추어 볼 때 그 믿음은 무가치한 것이라고 아주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빠질 수는 가장 큰 위험 중 하나입니다.
이런 자들처럼 완전히 오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에게 특별히 와닿는 일부 측면을 진리의 전부로 여기며 붙잡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한 측면이나 견해를 기독교 전체와 쉽게 동일시합니다. 복음과 관련된 자신의 가정이나 개념을 내세우며, 복음에서 추출해 낸 일부 측면을 전부라고 주장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세상에는 행복을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저마다 다양한 이유로 불행하기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다양한 해결책을 알아봅니다. 그러다가 성경과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접하고 거기에서 행복을 찾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한 가지 목표나 소원에 초점을 맞추어 복음을 들으며,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것 같은 구절들을 성경에서 찾아냅니다. 오직 그 구절들만 붙잡고 다른 내용은 듣지 않습니다. 그 구절들에서 행복을 느끼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멋대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세상에는 행복을 약속하는 사교나 단체들이 많습니다. 예컨대 크리스천 사이언스Chnitan Saenue 도 기독교를 자처하며 성경에 따라 행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신앙을 조사해서 복음과 비교해 보면 완전히 딴판인데도 기독교를 자처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행복을 장담하는 심리학의 한 형태, 한 철학 한 이론을 고수하면서도 성경구절을 몇 가지 사용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체험이야말로 진정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믿습니다.
거의 완벽한 심리학적 방식을 쓰면서 동일한 착각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는 심리치료법이 많지만, 그렇다고 그런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다 기독교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이론을 갖춘 심리학자가 신약성경에서 환자에게 맞는 구절들을 뽑아낸 다음,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되 신약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자기 가르침을 제시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합니다. 이른바 사고의 과학 비슷한 것도 있는데, 그들 역시 자신들에게 맞는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되 히브리서 기자가 신자들에게 전했던 복음의 기본원리는 무시합니다.
이것이 제가 설명하는 종류의 위험입니다. 이처럼 행복을 추구하다가 참된 기독교 복음에서 일부만 뽑아낸 후 나머지는 무시해 버릴 수 있습니다.
걱정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많은 이들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근심과 부담에 짓눌려 거의 신경쇠약이나 정신병에 걸린 지경에 이른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소원은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가르침을 만납니다. 그 가르침이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면, 그냥 기독교려니 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받아들였다고 정말 그리스도인이 된 것일까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거듭 상기시키는바, 세상의 여러 단체를 통해 걱정에서 벗어나 더 행복해졌다 해도 여전히 비그리스도인의 자리에 머물 수 있습니다.
위안과 위로를 추구하는 다수의 사람들도 보십시오. 세상에는 상심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살아야 한 이유를 전부 잃었다고 느끼며 위로와 행복과 교제를 갈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분리주의자들이나 그 밖의 여러 집단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순한 위로의 메시지로만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위로라는 특정 필요만 직접 다룰 뿐, 복음의 다른 내용은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도의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자들도 많습니다. 삶이 당혹스럽고 난감한 오늘날, 모든 사람이 당면한 중대 문제는 "무엇을 할까? 둘 중 어느 길로 갈까? 내 인생을 어떻게 할까?" 하는 것입니다. 바른 인도를 받는 것이 세상 모든 사람의 실제적인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펼쳐 인도와 관련된 구절들을 전부 찾아낸 다음, "내가 원하는 게 이거야"라고 하며 기독교적인 삶과 인도의 방식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자들의 말을 듣거나 책을 읽어 보면, 마치 복음 전체가 인도의 문제만 다루는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내용은 하나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희생제사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보기에는 불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삶의 인도를 받는 한 가지 방편에 불과합니다.
육신의 치료에 지대한 관심을 갖는 자들도 있습니다. 세상의 죄로 인해 우리는 다 아프고 병에 걸립니다. 죄가 몰고 온 질병에 모두 노출되어 있습니다. 치유와 육신의 건강을 향한 갈망과 열망보다 더 보편적인 삶의 특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모든 경우처럼 여기에도 위험이 따릅니다. 복음을 한낱 치료의 방편으로 축소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오로지 건강만 이야기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단순한 치료의 방편이나 기제가 되어 버립니다. 이 관점 역시 기독교 용어로 포장한 심리학이자 복음을 가장한 심리학에 불과할 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닙니다.
"초월자와 조화를 이루고 싶다"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주의 중심과 일체감을 느끼길 원하고, 그런 암시가 있다는 이유로 성경을 찾으며, 오직 그 부분만 뽑아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들이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일에 관심을 쏟으며 그 일을 인생의 가장 큰 엄원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중 다수가 신비주의를 신봉하며, 그런 성향을 장려하는 듯한 성경구절이 보이면 무엇이든 붙잡습니다. 이처럼 신비주의의 길을 힘겹게 걸어가며 하나님을 찾으려 하면서도, 정작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기본요소는 무시해 버립니다. 가장 위대한 신비주의자이자 종교 사상계의 선구자로 가끔 예수를 언급하는 것이 고작입니다.
마지막으로, 선한 삶을 인생의 중대 관심사로 삼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아주 도덕적인 사람들로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세상을 떠난 이후 영혼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관심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까. 어떻게 인간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살며 인류를 향상시킬까. 어떻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살까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는 도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기에 그 내용만 취하고 나머지는 무시해 버립니다.
제가 이 모든 문제를 길게 살펴본 것은 현실을 다루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타고난 제 심성과 성향 또한 그와 같았음을 아는 탓이기도 합니다. 제 지인들 중에도 이런 식으로 잠시 만족을 얻었다가 결국 얻은 게 하나도 없음을 발견한 이들이 많습니다. 이제껏 우리가 논한 위험들에 빠져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만족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더 이상 추구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도착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더 이상 여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그 자체로 잘못된 접근법이 되는지 밝혀 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행복을 주고,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주며, 위로해 주고, 인도해 줍니다. 기적적인 몸의 치유가 가능하다고 가르치며, 무한한 존재와 만나게 해주고 하나님을 알도록 도와줄뿐 아니라 경건하고 도덕적이며 윤리적인 삶을 살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선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먼저 일어나야 다른 모든 축복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따라옵니다. 제가 최대한 독단적으로 주장하고 싶은 점이 이것입니다. 이 일 없이 그리스도인의 축복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며,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이 세상의 신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중심 메시지를 먼저 믿어야 복음의 축복이 따라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무엇에 유념해야 합니까? 다름 아닌 "들은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이 서신을 받는 자들은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해야 했습니다. 떠내려가지 않도록 자신들이 이미 들은 특정한 사실들을 등한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한 것입니다. 모호하거나 희미하거나 막연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가장 먼저 전하시고 사도들이 이어 전한 메시지입니다. 이후 모든 시대에 전해진 특정한 메시지이자 성경에 기록된 구체적인 메시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전체를 다 전해야 합니다. 일부만 취하고 나머지를 무시할 권리가 없습니다. 복음 전체를 전하지 않으려면 아예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다 전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거짓 선지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행 20:27).
행20:27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체, 단순한 치유나 윤리나 위로가 아닌 메시지 전체 신약성경이 말하는 특정 메시지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이 메시지의 내용은 의문의 여지 없이 분명합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규명해야 했던 사도 바울은,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자신도 똑같이 전한다고 했습니다. 요컨대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사적인 메시지가 아니다. 주님께 받은 메시지요 성경의 메시지요 다른 형제들이 전하는 메시지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도들과 바울의 메시지 사이에는 서로 충돌하는 부분이 없었습니다. 긴가 민가하는 부분이나 불확실한 부분 또한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십시오. 동일한 중심 메시지, 핵심 메시지가 보일 것입니다. 그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본질적으로 구원에 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보응을 피하리요?"
그러므로 우리가 살펴볼 첫 번째 질문은 '이생과 영원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것이며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는 무겁고 아픈 마음으로 앉아 계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처음 전쟁(1차 대전)과 지난 전쟁(2차 대전 때 사랑하는 이를 잃거나 또는 전쟁과 무관하게 사랑하는 이를 잃고 가슴에서 피를 흘리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여러분의 첫 번째 문제나 가장 큰 문제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여러분에게 불멸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 그런데 여러분은 죽어야 하고 죽은 후 심판대 앞에 서서 하나님을 대면해야 한다는 것.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에 대한 선고를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드리건데, 여러분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상태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몸이 병들어 건강을 갈망하는 분들도 육신의 건강 문제에 앞서 영혼의 문제, 영혼의 건강부터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잘못을 범합니다. 마귀는 부차적 문제를 일차적 문제와 맞바꿈으로써 결국 일차적 문제를 다루지 못하게 만듭니다. 사실은 사별과 슬픔을 통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 찾아오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이들이 있습니다. 소중한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자기 영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서로를 위해 살고 서로를 즐겁게 하느라 하나님을 등한시했고 하나님 생각은 하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소중한 사람이 떠나면서 남은 이의 영혼이 깨어나고,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별과 슬픔이 남은 이의 영혼을 깨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토머스 차머즈 [Thomas Qulmen는 19세기 스코틀랜드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였습니다. 매우 유능한 인물이자 위대한 설교자로 내내 활동했으며, 과학적 사고의 소유자로 훌륭한 과학적 설교를 했습니다. 그렇게 10년간 스코틀랜드에서 대단한 사역을 하다가, 어느 날 덜컥 병에 걸려 거의 12개월 동안이나 병실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참으로 설교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참으로 믿은 적 또한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물론 전에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설교했던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막상 무릭한 처지가 되어 보니, 사실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알지 못하는 자기 모습이 보인 것 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질병을 도구로 사용하여 토머스 차머즈를 빛으로 이끄셨으며, 온전한 진리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병을 감사드렸고, 이후 세상에 나가 새로운 방식과 능력으로 복음을 설교하며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습니다.
부차적 문제를 일차적 문제와 맞바꾸는 것보다 더 큰 위험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런 위험에 빠진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볼 아주 쉬운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독교용어를 사용하지만 사실은 복음 아닌 무언가를 고수하는 것은 아닌지 알아볼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아무 소망도 없고 힘도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 길을 잃은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고 있습니까? 아무리 성경의 인도를 받고 비범한 체험을 했더라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선고를 받은 죄인임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또 다른 질문을 던져 보겠습니다. 여러분 삶의 체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대적인 중심과 핵심을 차지하고 계십니까? 그와 무관한 체계는 하나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단순히 위대한 스승으로 완벽한 삶을 산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본보기로 따르는지 묻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와 무관하게 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의미에서 그가 중심에 계신지 묻는 것입니다. 히브리 신자들이 들은 것'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중심을 차지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리 놀라운 인도를 받고 비범한 체험을 했더라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전에 한 유명한 영국 배우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을 자처하지 않는 사람임에도 어느 날 오후 놀라운 인도를 받았으며, 그것이 자기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셰익스피어 Williant shakapare. (셰익스피어. Hela, 1막 5장) 의 희곡 주인공 햄릿의 말이 맞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철학으로 상상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난다네. 마찬가지로 육신의 놀라운 치유를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움직이지도 못하던 사람이 걷고 뛰고 달리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참 그리스도인인지 알려면, 자신의 치유가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결과인지 알려면, 다음과 같은 두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자신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아무 소망도 품을 수 없는 길 잃은 죄인임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고 그와 화목케 되기 위해 주 예수 그리스도가 반드시 필요함을 알고 있습니까?
훨씬 더 구체적인 세 번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십자가 죽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했습니다(고전 2:2). "들은 것. 즉 진리 안에 들어가려 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중심적이고 긴요하며 절대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 입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없으면 내가 죄사함을 받을 소망이나 하나님을 뵐 소망이나 천국에 이를 소망이 다 사라져 버림을 안다.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비참하게 살 운명을 피할 수 없음을 안다." 복음 메시지의 중심적이고 긴요하며 핵심적인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행전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보십시오. 그가 전한 진리와 바울이 진한 진리, 신약 모든 서신서의 주장이 이것 아닙니까?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의 피 아닙니까?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와 무관한 복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죽음에 관심이 있습니까?
다시 한 번 엄숙하게 말씀드립니다. 자기 행복을 생각하기 전에, 걱정에서 벗어나길 바라기 전에, 마음의 위로를 갈망하기 전에, 인도를 구하기 전에, 몸의 치료를 구하기 전에, 초월자와 조화를 이루길 바라기 전에 자신의 영적 상태부터 직시하십시오. 우리는 다 덧없고 무상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아이작 와츠는 「예부터 도움 되시고」라는 찬송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시간은 유수처럼 흐르며 제 자식들을 데려가네. 동이 트면 사라지는 꿈처럼 그들도 날아가 잊혀져 버리네. 지금 여러분은 살아 있는 영으로서 마지막 날을 향해 피할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첫 번째로 필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여러분의 죄를 사해 주신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되어 주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종말을 준비하십시오 자신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지,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세상에 오셔서 내 죄를 위해 죽으시고 날 의롭다 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지 확인하십시오. 상담하건대, 하나님을 그처럼 아는 사람은 다른 문제들도 하나씩 담대히 그 앞에 가져간 것이요 하나님은 그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하는 이 영혼의 필요를 가장 먼저 채우지 않은 채, 작은 필요들을 일시적으로 채우는 분이 아무도 없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