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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수행하면 삶에 대한 모색이 사라진다
원하는 것이 원하는대로 되지 않고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
누구나 지금 현실의 모습은 불만족스럽더라도
더 나은 미래의 꿈을 꾸게 마련이다.
나 자신의 노력이나
주변 혹은 사회구조적인 뒷받침으로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꿈꾸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다음 넷 중 하나를 택하게 된다
1. 그냥 현실을 비관하고 자포자기하며 사회와 타협하며 살아가는 삶
2. 자기자신 혹은 외부대상에 대한 불만(극단적으로는 자살 혹은 테러)하는 삶
3. 끊임없이 자신을 개발하며 성공을 추구하는 삶
4. 현실의 불만족을 극복하게 하는 내면적 철학(삶의 본질에 대한 깨달음)의 추구하는 삶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자라면
1의 삶을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자신의 주관에 대해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니
그의 삶은 굴욕적 삶이고, 노예의 삶이다
2의 삶은 불만족의 원인을 세부적으로 해체하지 못하고
자신의 삶 자체 혹은 외부의 사회에 돌린 탓이다
자신의 불만족에 대해 탓을 돌릴 대상을
자신 혹은 외부에 돌린 것 뿐이다
3의 삶은 사회에서 인정받는 삶이다
주체적 삶을 원하는 자라면 누구나 3의 삶을 원한다
사회와 조직에서 리더의 위치에 있으며
자신도 혁신하고 자신이 속한 조직도 혁신한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따르고 존중한다
그에게도 실패는 따른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를 딛고 일어선다
다만 원하는 것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눈앞에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다
죽음앞에서 그는 무엇을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연설 :
스티브 잡스 역시 죽음이 오기 전에 젊을 때 자신의 꿈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라고 말해줄 수 밖에 없다>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 이야기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제가 17살때, 저는 "당신이 매일매일을 당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당신이 반듯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라는 명언을 읽었습니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이것은 저를 감동시켰고, 그 이후로 지난 33년동안 저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저 스스로에게 질문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내가 하는 일이 내가 원하는 일일까?"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그리고 그 대답이 여러날동안 연속해서 "아니요"였을때,
저는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내가 곧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제 인생에서 큰 결정을 내릴때 저를 도와주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왜냐하면 외부의 모든 기대, 모든 자존심, 실패에 대한 모든 두려움들 같은 거의 모든것들이
죽음 앞에선 모두 물러나고, 진정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당신이 언젠간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의 함정을 벗어나는 제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당신은 이미 벗은몸입니다.(갖은것이 없습니다. 잃을것이 없습니다)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당신의 마음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약 1년전,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저는 아침 7시 반에 스캔을 받았는데, 저의 췌장엔 종양이 분명히 보였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저는 그전까진 췌장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제가 그것은 치료할 수 없는 종류의 암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3개월에서 6개월밖에 살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의사는 저에게 집에가서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는데
그것은 의사들이 죽음을 준비하라는 간접적인 표현입니다.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그것은 저의 아이들에게 제가 앞으로 10년동안 그들에게 해줘야 할 말들을
몇달안에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가족들이 임종을 받아들이도
매사를 정리하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작별인사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저는 처방대로 모든날들을 살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어느날 저녁 저는 조직검사를 받았는데
저의 식도에 내시경을 넣어 위장을 지나 장에 바늘을 찔러 취장에서 암세포를 체취하는 것이었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저는 마취상태였고, 그곳에 있었던 저의 아내는 의사들이 현미경을 통해 세포를 관찰하면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술로 치료가 가능한
매우 희귀한 종류의 췌장암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슬을 했고 지금은 멀쩡합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이것이 제가 죽음과 가장 가까이 직면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수십년간 이것이 가장 죽음과 가까운 경험이 되길 바랍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No one wants to die.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죽음이 때론 유용하다는 것을 조금 더 확실히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천국에 가길 원하는 사람마저도 죽어서 그곳에 가고싶어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의 최종 목적지 입니다.
No one has ever escaped it.
아무도 죽음을 피해가지 못했습니다.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삶의 최고의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삶의 변화를 만듭니다. 죽음은 오래된 것을 새것으로 만들기 위해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 새것은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머지않아 어느날 당신은 점점 오래된 것이 될 것이고 사라질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무거운 이야기를 해 죄송합니다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의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낭비하지 마세요.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결과물에 따라 사는 도그마에 의해 사로잡히지 마세요.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다른사람의 의견이라는 소음에 당신 내면의 목소리를 덮어버리지 마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르는 용기 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그것들(마음과 직관)은 여러분이 진정으로 되고싶어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그 외 모든것은 부가적인 것들입니다.
<스티브 잡스 스탠포드 연설문 중 죽음에 관한 내용>
4의 삶은 자신의 인식을 분석하고 해체하는데서
그 답을 찾아가는 자의 삶이다
그는 인식이 어떠한 조건으로 생겨나고
어떠한 조건으로 사라지는 지에 대해
고민하여 자신의 인식을 제어하는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4의 삶을 살아가려고 하더라도 그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일단 자신의 인식의 발생과 소멸의 조건성을 정교하게 파고들어가기가 쉽지 않고
또한 그러한 철학을 배울 수 있는 곳도 극히 드물 뿐더러
그러한 철학은 자신과 조직사회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도려내는 법이기 때문에
배우는 과정에서의 많은 심리적 아픔이 전제된다
특히 우리 주변의 삶의 철학과 심리학 그리고 종교 등
온갖 인문학들은 모두 신의 섭리, 숙명론, 우연발생론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 바른 법을 찾아서
괴로움을 해결보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어리석은 인식에 토대한 철학들은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할 수 없는 것으로
사람들을 오도한다
사람들은 내가 경험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권위있는 혹은 성스러운 사람들의 말이기 때문에
일단은 수긍하고 따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말에 대해 비판적으로 따지지도 않고
검증하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3. “비구들이여, 나는 그 가운데서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사문, 바라문들에게 다가가서 물었다.
그대 존자들은 ‘사람이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이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경험하는 것은
모두 신이 창조했기 때문이다.’라는 이런 주장과 이런 견해를 가진 것이 사실인가?”
“내가 이와 같이 물었을 때 그들은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이 생명을 파괴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삿된 음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헐뜯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욕설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잡담을 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탐욕스럽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마음이 악의로 가득하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고,
삿된 견해를 가지더라도 그것은 신이 창조했기 때문일 테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105>
9. “깔라마들이여, 그래서 우리는 이와 같이 말했던 것이다.
깔라마들이여, 그대들은 소문으로 들었다고 해서, 대대로 전승되어 온다고 해서,
‘그렇다 하더라.’고 해서, 우리의 성전에 써있다고 해서,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이유가 적절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색하여 얻은 견해와 일치한다고 해서,
유력한 사람이 한 말이라고 해서 혹은 ‘이 사문은 우리의 스승이시다.’라는 생각 때문에
진실이라고 받아들이지 말라.”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5>
스스로의 삶을 살아가는 바른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는
어떠한 비난과 굴욕에서 굴하지 않을 수 있는
참된 자신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참된 자신을 세울 때 비로소
거짓된 자아의 모순이 드러나더라도
눈하나 끄떡하지 않고 스스로를 추스릴 수 있다
자신의 인식을 제어하고 추스리기 위해서는
인식의 발생과 소멸의 조건성을 알아야 한다
인식은 육근, 육경, 육식의 조건지어짐에 의해 생겨나고 사라진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는 초기불교, 대승 등 불교를 배운 많은 이들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 어려운 내용이다
부처님은 이 법을 알고 행하면 깨닫는다고 단언하셨다
이 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처님 당시 철학적 조류를 이해하고 가는게 좋다
부처님 당시 인도는 전쟁과 기근 등으로 인해 매우 혼란했던 시기로
지금의 우리 삶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궁핍했던 시기였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신철학으로 극복하려는 철학자들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라문과 육사외도이다
바라문은
인도 사성계급과 불가촉천민의 정점에 있는 무리들로서
종교와 철학, 윤리를 사람들에게 교육하고
사회의 제도 등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이다
현대사회에서도 인도의 성직자들은
최상위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자문을 구하고
그들의 발가락에 키스를 하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 될만큼 극진히 존중받는다
육사외도는
바라문이 아닌 철학자들 중 당시 대표적인 사상조류를 형성했던 이들이다
그들은 바라문의 사상체계와 그에서 비롯된 사회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사람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제시하는 새로운 철학체계를 세우려 했던 이들이다
그들 역시 제자 혹은 그들의 교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중들로 부터 극진히 존중받았다
바라문은
개인의 주체적 삶을 부정했으며
모든 행위와 그 결과(업)는 세상의 근본이 되는 신(브라만, 범신)으로 부터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윤회하여 잘못된 죄를 지으면 현생이 아니더라도 다음생에서 죄를 받게 되며
따라서 다음생에 행복한 삶을 살거나 더 나은 세계(천국)에 태어나려면
현생의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고 가르쳤다
그들의 가르침하에서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었다
이후 샹카라는 브라만교를 타교리의 장점을 흡수하여 베단타 철학(불이일원론)으로 계승하였으며
이것이 오늘날 힌두교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다
육사외도는
개인의 주체적 삶을 부정한 애매모호론(벨라티뿟다), 7요소의 존재론(빠쿠다 깟짜야나),
윤회를 통한 청정론(막칼리 고살라)와 일부의 주체적 삶을 인정한 자이나교(바르다마나_니간타)
개인의 주체적 삶을 인정하고 윤회를 부정한 사후단멸론(케사캄발린), 도덕에 대한 회의론(뿌라나 깟사빠)가 있다
육사외도는 세상의 문제에 대해 바라문에 보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접근을 시도했던 이들이다
또한 그들은 전통에 기반한 베다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나
혹은 베다 경전을 부정하고 새로운 철학을 정립하려 하였다
현대사상은 이들의 철학이 융합되고 조합된 것으로 그 토대는 이들 철학으로 환원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하에서
부처님(고타마 싯다르타) 역시 깨달음을 증득하기 이전 이미
왕이 되기 위한 정치수업의 일환으로 바라문의 교리를 배웠으며
출가이후 애매모호론(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타)과 고행주의(박가바)를 배우고 익혔다
그러나 그가 추구했던 것은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할 수 있는 지혜였다
그가 배우고 익혔던 어떠한 교리도
그에게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할 수 있는 법을 알려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 중도연기를 깨달았는데
'과연 누가 이 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스스로 고민했을만큼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쉽지 않은 법이다
붓다는 이레 동안 보리수 밑에 머무르며 자신이 이룬 해탈과 깨달음을 체계화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그는 다시 가까운 곳에 있는 니그로다 나무 아래로 자리를 옮겨 해탈의 법열을 누렸다.
거기서 붓다는 인간고의 본질과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러한 고뇌로부터 벗어나
대자유, 해탈을 성취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고심하게 되었다.
그의 심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명조차 돌아보지 않는 정진으로 천신만고 끝에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았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길을 가르쳐주고 그들도 이 해탈의 환희를 맛보게 해야 된다.
하지만 누구를 먼저 가르칠 것인가?
내 가르침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굴까?"
마가다 사람들은 바라문의 멍에에 짓눌려 있다.
그들은 바라문교에 빠져 있다.
옛 스승 웃다까와 야즈냐발캬마저 마가다에 와서는 바라문교의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아지따 께사깜발리, 막칼리 고살라, 니간타 나따뿟따 같은 성자들도 여기서는 인정받지 못했다.
그것이 옳건 그르건 그들의 가르침은 무시되어 버렸던 것이다.
바라문 사제들은 마치 더부살이와도 같다.
그들은 새로운 사상을 흡수하기 위해 다른 종교의 현자들에게 기대어
수액을 뽑아낸 다음 고사시켜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을 가르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바라문교가 그다지 강한 세력과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고향 까삘라왓투로 가면 어떨까?
여기 마가다에 머무르는 것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다.
<혁명가붓다 p 147, 숨출판사 중>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들로 인해
바른 내용을 접하기도 힘들지만
내가 만들어내고 있는 인식들의 실체를 들여다보며
사회로 부터 교육받고 스스로가 전제한 개념들을 깨트려나가는 작업은
사람에 따라서는 극심한 심리적 괴리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개과천선 마지막회 중 :
주인공이 인권문제에 트라우마를 가지게 된 계기와 거기서 벗어난 심리 상태를 표현하는 장면
'아버지 그래서 낚시를 싫어하셨던 거예요?
나의 독선 때문에 니가 먼 길을 돌아왔단 생각이 드는구나
아버지가 아니라 제가 만든 마음의 적과 싸워왔던 거예요'>
<쿵푸팬더1 중 도반과 스승을 해치고 얻은 무술의 비급에 아무 글자도 없음을 보고 실망하는 타이렁>
<영화 매트릭스1 중 주인공 네오가 자신이 속한 곳이 가상 현실임을 깨닫는 장면>
<영화 리틀붓다 중 싯다르타가 자기존재와 마주하고 있는 장면>
“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나는 치달려왔고 보지 못하였다.
집짓는 자를 찾으면서 괴로운 생은 거듭되었다.
집 짓는자여, [이제] 그대는 보여졌구나.
그대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
그대의 모든 골재들은 무너졌고 집의 서까래는 해체되었다.
마음은 업형성을 멈추었고 갈애는 부서져버렸다.
anekajaatisam*saaram* sandhaavissam* anibbisam*/
gahakaaram* gavesanto, dukkhaa jaati punappunam*//
gahakaaraka dit*t*hosi, puna geham* na kaahasi/
sabbaa te phaasukaa bhaggaa, gahakuut*am* visan#khatam*/
visan#khaaragatam* cittam*, tan*haanam* khayamajjhagaa//”
<부처님 오도송 초기불전연구원 역>
*부처님이 설하신 윤회는 살아있는 동안 자기존재를 천명함(有)으로 겪게 되는
온갖 괴로움(생노병사우비고뇌)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러한 허망감과 자괴감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바른 법의 개념을 익힌 후
점차적으로 법의 실체인 실참수행법(사념처)으로 접근해들어가는 것이 타당하다
부처님 가르침은 무상, 개고, 무아를 전제로 한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법인으로 불린다
무상, 고, 무아로 시작하고 무상, 고, 무아로 끝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이다
부처님 당시 애매모호론자들은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계를 가르쳤다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말로 표현하는 것이 금기시되었고
인식으로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검증하는 것이 아닌 스승의 인가가 중시되었다
부처님을 가르쳤던 알라라 칼라마, 웃다카 라마풋타 역시 애매모호론자였다
이러한 가운데 부처님은 깨달음을 증득한 이후
스승(佛)과 제자(僧)가 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법체계(法)가 있다고 설하셨다
그것이 5온, 12처, 18계, 12연기법, 4성제법과
그 법을 토대로 한 실참수행법(37조도품)이다
그리고 이 모든 법이 무상, 고, 무아의 삼법인 안에 포섭된다
깨달음의 결실이 인간의 인식을 넘어서는
절대우주, 근본물질, 순수인식, 아트만, 브라만, 하느님 등의 존재로 천명되지 않고
자기존재의 무상, 고, 무아로 천명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유일하다
무상하다는 것은
인간의 탐, 진, 치의 행(신, 구, 의)으로 인해 생겨난 결과들이 부질없다는 것이다
불교를 공부한다는 많은 이들이 무상을 일체 세상 혹은 물질의 무상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끝이란
한길 이 몸뚱이에서 생겨나는 인식의 세상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경전은 다음과 같다
“밧디야여, 만일 이 큰 살라 나무들조차도 해로운 법들을 버리고, 유익한 법들을
두루 갖추기 위해서 개종한다면, 이 큰 살라 나무들에게도 오랜 세월을 이익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인간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말이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107>
"도반이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
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 있다고 나
는 말하지 않는다. 도반이여, 그러나 나는 세상의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괴
로움을 끝낸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도반이여, 나는 인식과 마음을 더불은 이
한 길 몸뚱이 안에서 세상과 세상의 일어남과 세상의 소멸과 세상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천명하노라."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108>
“도반들이여, 이 세상에서 세상을 인식하는 자와 세상을 지각하는 자는
그 어떤 것을 통해서 [인식하고 지각]하는데 그것을 두고 성자의 율에서는 세상이라 말합니다.
도반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인식하는 자가 있고 세상을 지각하는 자가 있습니까?
도반들이여, 눈을 통해서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인식하는 자가 있고 세상을 지각하는 자가 있습니다.
귀를 통해서 … 코를 통해서 … 혀를 통해서 … 몸을 통해서 … 마노를 통해서
이 세상에는 세상을 인식하는 자가 있고 세상을 지각하는 자가 있는데,
이것을 성자의 율에서는 세상이라 말합니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215>
괴로움이란 것은
무상한 것이 항상하기를 바라는 것이 괴로움이란 것이다
인간이 바라는 것들 중 영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씀이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의 제제와 같은 꿈많고 아직은 어린 소년, 소녀가 아니라면
집앞에 있는 나무나 문득 마주치는 돌맹이가 내가 죽을 때까지 항상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신에게 필요하고 특별하게 의미부여한 대상이 항상하기를 바란다
문제는 그것이 항상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것에 대한 나 자신의 인식도 변한다는 것이다
헤어지면 죽을 것 같던 연인이
한순간에 철천지 원수로 변하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흔한 스토리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온갖 괴로움은 결국 자기자신의 무상함에 대한 어리석음에서 비롯된다고 설하셨다
이것을 부처님은 오취온고라고 하셨다
이에 관련한 내용이 대념처경 등에 담겨있다
13. “비구들이여, [앞에서 언급한 괴로움들을] 요약하면 그 괴로움들이란
[오온에 대해 나·내 것·나의 자아 등으로] 취착하게 된 다섯 가지 무더기들(五取蘊)에 기인한다.”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이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은 [오온에 대해 나 등으로] 취착하게 된 육체의 무더기(色取蘊),
[오온에 대해 나 등으로] 취착하게 된 느낌의 무더기(受取蘊),
[오온에 대해 나 등으로] 취착하게 된 지각의 무더기(想取蘊),
[오온에 대해 나 등으로] 취착하게 된 의도들의 무더기(行取蘊),
[오온에 대해 나 등으로] 취착하게 된 의식의 무더기(識取蘊)이다.”
“비구들이여, 이렇게 취착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들 자체가 괴로움(五陰盛苦)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라고 말한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242>
무아라는 것은
이처럼 무상한 것이 항상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은 마음(집착)이
결국 자기존재의 무상함을 알지 못하는데서 비롯됨을 말한다
즉 부처님께서 설한 무아를 깨달을 때 비로소
무상한 것이 항상하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무상, 고, 무아는
부처님 가르침의 시작부터 끝까지 항상 놓치지 않으면서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사고하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인식의 발생과 소멸의 조건에 대해 깊히 사고해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깊이 사고한다고 답이 나올 성질의 것은 아니다
깊이 사고하기 보다는 주의해서 사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인식을 살펴들어가야 할 주체 역시 인식이기 때문이다
도둑이 도둑을 찾는 꼴이다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법의 개념을 세우지 않으면
인식은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해 보지도 못한
그 무언가가 실재한다고 전제하며 거기에 끄달려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때 아난다 존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을 올린 뒤 한 곁에 앉았다.
앉아서 아난다 존자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불가사의합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연기는, 세존이시여,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그리고 이제 연기는 제게 명료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연기는 심오하고도 심오한 듯합니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말해서는 안되느니라.
아난다여, 법을 깨닫지 못하여, 법을 통찰하지 못하여,
이와 같이 사람들은 엉킨 실타래처럼 되고 먼짓덩이처럼 되고 문자풀과 바빠자 풀처럼 되어
고처, 악취, 악처의 윤회를 넘어서지 못하느니라.”
— 디가니까야 대인연경 중에서, 고싱가 숲 해설 인용
* http://www.gosinga.net/page/10?wpmp_switcher=mobile 참조
바른 법을 알기 전에는
나의 모든 인식은 생존의 욕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모든 윤리와 제도 역시
나 자신의 생존과 안락을 전제로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것일 뿐
조직과 사회를 위해 나 자신의 생존과 안락이 담보받아야 한다면
그러한 윤리와 제도는 나에게 무의미한 것일 뿐이다
그래서 사회윤리는 사회를 위한 자기자신의 희생을 그토록 강조할는지도 모른다
노자는 이에 대해
도가 무너지니 인이 생긴다고 얘기했다
도덕경의 관련 문구들을 인용해본다
진실로 어진 사람이 무언가 할 때는 아무 할 일이 없으며
진실로 옳은 사람이 무언가 할 때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며
예를 따르는 사람이 무언가 할 때는
아무도 따르지 않으면 팔을 꺽어서라도 억지로 시킨다네
<도덕경 38장 조현숙 역 중에서>
조정은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데
들판은 잡초가 무성하고 창고는 비어 있네
호사한 비단옷을 입고 번득이는 칼을 차고
싫도록 먹고 마시고 쓰고도 남아 있으니
이놈들이 바로 도둑놈들이다
도의 길이 아니다
<도덕경 53장 조현숙 역 중에서>
그러므로 성인은 말하였네
내가 하는 일이 없으면 백성은 질서를 되찾고
내가 평화를 좋아하면 백성은 정직해지며
내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백성은 부유해지고
내가 욕심이 없으면 백성은 소박한 생활로 돌아간다고
<도덕경 57장 조현숙 역 중에서>
그러면서도 그러한 윤리를 만들어내고 감시하는 위정자들이
자기자신에게는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한국의 위정자들이 자기자식은 군대를 보내지 않는다거나
자신 혹은 자식의 국적을 해외로 돌려놓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바른 법을 모르는 자에게 예외가 없는 것이다
단지 사회에서 추앙받는 사람은
위정자의 의도와 목적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회가 만들어놓은 윤리를 철저히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일 뿐이다
한편 많은 이들이 노자의 '도'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도'와 동일한 것으로 착각한다
중국 선가는 노자의 '도'와 부처님께서 설하신 '도'를 융합하여 선종을 만들어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부를 수 없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無, 名天地之始,,, 有, 名萬物之母.
이름이 없는 것이 하늘과 땅의 시작이며
이름이 있는 것은 모든 것의 어머니
故常無, 欲以觀其妙,,, 常有, 欲以觀其徼.
항상 욕망이 없다면 그 신비스러움을 볼 수 있으며
항상 욕망이 있다면 그 분명함을 볼 수 있다
此兩者, 同出而異名, 同謂之玄.
이 둘은 한 근원에서 나왔으나 이름만 다를 뿐
그 같음을 어둠이라 부른다
玄之又玄, 衆妙之門.
어둠 속의 어둠이어라 모든 신비의 문이여
<도덕경 1장 조현숙 역 중에서>
노자가 말한 참된 진리는 변함없는 것이다
변함없기 위해서는 형태를 갖추거나 이름에 묶이면 안된다
그러나 그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뭇는다면 그것은 나도 모른다(현묘지문)이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인식으로 설정하거나 말로 표현하게 되면 이미 그 틀에 묶이게 되어
그 본질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반면 부처님 말씀에서는 '모든 것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변하므로
어떤 것이 변함없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괴로움이 된다'이다
따라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른 법을 배우고 행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노자는 첫 시작부터 인식이나 언어로 무언가를 전제하는 행위는 참된 진리로 부터 멀어진다라고 얘기한다
반면 부처님은 현실의 괴로움에 대해 있는 그대로 알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식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조건에 대한 바른 법(중도연기)을 배워야 한다
즉 노자는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인식으로 한정지을 수 없는 참된 진리(도)를 전제하여
현실문제에 대해 스스로의 인식의 한계에 대해 인지하지도 못한 채
선악과 옳고 그름을 논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하는 노자를 부처님이 만난다면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말할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도를 그대는 무엇으로 깨달았는가?'
'그대의 도는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할 수 있는가?'
'그대의 진리는 어떻게 사람들과 공유되고 삶에 어떤 유익함을 주는가?'
'그냥 생각으로 참된 진리를 전제하여 어리석은 범부들을 우롱한 것은 아닌가?'
바른 법과 그 법을 가르치는 스승은
인간의 인식은 이 몸이 현실(경계)과 감각접촉하여 생겨나고 사라짐을 설한다
수행자가 자신의 인식이 어떤 조건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지를 객관적으로 살피게 하여
자기존재에 대한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자기합리화에 대해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한다
바른 수행자라면 자기자신의 인식을 살피는데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타를 불문하고 자기존재의 어리석음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온갖 행위들의 모순을 드러낸다
물론 바른 법을 배우지 못한 이는 그것이 모순임을 알아차리기도 힘들다
그리고 알아차리더라도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신과 동일시하여 심각한 자괴감을 느낀다
부처님께서 설한 법을 이해하는 것은 바른 법에 대한 개념의 확립이고
이후 실참수행법은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는 것(염오, 이욕)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자괴감에서 한 걸음 물러나
인식의 조건지어 생겨나고 사라짐을 관찰하고 제어하는 법이
앞서 얘기한 육근, 육경, 육식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식의 조건생, 조건멸을 설한 이유는
자기존재의 해체를 위함이므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나를 해체한 결과가
또 다른 존재(브라만, 신, 절대우주, 순수의식, 우주근본물질, 재생연결식 등)와 같은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내것은 하나도 없다'
매일 세수하고 목욕하고 양치질하고
멋을 내어보는 이 몸뚱이를
"나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갈 뿐이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이 육신을 위해
돈과 시간, 열정, 정성을 쏟아 붓습니다
예뻐져라,
멋져라,
섹시해져라,
날씬해져라,
병들지 마라,
늙지 마라,
제발 죽지 마라...!
하지만 이 몸은
내 의지와 내 간절한 바램과는 전혀 다르게
살찌고, 야위고,
병이 들락 거리고,
노쇠화되고,
암에 노출되고,
기억이 점점 상실되고,
언젠가는 죽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아내가 내 것인가?
자녀가 내 것인가?
친구들이 내 것인가?
내 몸뚱이도 내 것이 아닐진대...!
누구를 내 것이라 하고
어느 것을 내 것이라고 하던가?
모든 것은 인연으로 만나고
흩어지는 구름인 것을
미워도 내 인연
고와도 내 인연
이 세상에서 누구나
짊어지고 있는 고통인 것을...!
피할 수 없으면 껴안아서
내 체온으로 다 녹이자
누가 해도 할 일이라면
내가 하겠다.
스스로 나서서 기쁘게 일하자
언제 해도 할 일이라면
미적거리지 말고
지금 당장에 하자
오늘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정성을 다 쏟자
운다고 모든 일이 풀린다면
하루종일 울겠다.
짜증부려 일이 해결된다면
하루종일 얼굴 찌푸리겠습니다.
싸워서 모든 일이 잘 풀린다면
누구와도 미친듯이 싸우겠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일은
풀려가는 순서가 있고 순리가 있습니다
내가 조금 양보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배려한 그 자리
내가 조금 낮춰 논 눈높이
내가 조금 덜 챙긴 그 공간
이런 여유와 촉촉한 인심이
나 보다 더 불우한 이웃은
물론 다른 생명체들의
희망 공간이 됩니다.
나와 인연을 맺은
모든 사람들이
정말 눈물겹도록
고맙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세상은 정말 고마움과 감사함의 연속입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 -
<대가족순례행사 교황 연설 중 :
연설무대로 난입한 꼬마와 함께 하나님의 은총으로 모두가 서로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삶을 살아가라는 프란치스코 교황>
그러한 결과들은 자기존재의 무상함을 알지 못하고 개념뿐인 해체를 통해
또 다른 존재를 상정하고 자기동일시를 하고 있는 상태로 보아야 한다
존재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상단견에 머무른다는 표현과 동의어이다
집(samudaya)은 인연론적인 발생의 뜻은 없고, ‘함께(sam) 올라(ud) 간다(aya)’의 뜻만을 갖는다. 즉 이미 존재하고 있는 법들이 ‘결합하여 상승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의 집은 육계라는 진여법계에서 오온이라는 유위세간이 성립하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 된다.
<고익진, 《아함법상의 체계성 연구》, p. 104-108>
한국 불교철학의 태두라고 추앙받고 있는 고익진 교수 역시 존재의 무상함을 또 다른 존재로 상정시킴은 마찬가지이다
불교계의 용수보살, 세친, 달마대사, 원효대사, 의상대사, 경허선사, 성철스님, 법정스님. 진제스님 등과
노자,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 등의 성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과
틱낫한, 달라이라마, 마하시, 마하리쉬, 마하라지,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등과 같은 근현대 수행자들
서양현대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 칸트, 데카르트, 헤겔, 홉스, 니체, 베르그송, 들뢰즈 등과
켄 윌버, 에크하르트 톨레나 시크릿 류의 성공학 강사들은 물론이거니와
심리학자인 프로이트, 융, 에리히프롬
현대교육학자인 슈타이너, 하워드가드너 등등
즉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온,처,계,연,제와 37조도품)을 따르는 제자들이 아니라면 깨달음은 요원하다
아래는 라마나 마하리쉬가 제자들과 문답한 내용들 중 일부이다
11. ‘나는 누구인가?’ 하는 생각을 끊임없이 착파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것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하고 물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상관없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하고
꾸준히 물어야 합니다. 이때 나오는 답은 ‘나에게’일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나는 누구인가?’ 하고 탐구해 들어가면,
마음은 그 근원으로 돌아가고 일어났던 생각은 가라앉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수행해 나가면 마음은 그 근원에 머무르는 법을 스스로 익히게 됩니다.
이 미묘한 마음이라는 것이 두뇌와 감각 기관을 통해 밖으로 나갈 때, 거친 이름과 형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장 안에 머무르면, 이름과 형상들은 사라집니다.
마음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심장 안에 붙들어 두는 것이 ‘안으로 향하기’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심장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밖으로 향하기’ 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마음이 심장 안에 머무르면,
모든 생각들의 원천인 ‘나’가 사라지고 항상 존재하는 진아가 빛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 ‘나’라는 에고성 없이 그것을 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식으로 행위하면 일체가 쉬바[신]의 성품으로서 나타날 것입니다.
17. 일체 만물은 신의 작품 아닙니까?
아무런 욕망도, 의지도 노력도 없이 태양은 떠오르는데, 단지 태양이 떠 있기만 해도, 일장석(sunstone)은 화기를 뿜어내고, 연꽃은 개화하며, 물은 증발하고, 사람들은 제각기 할 일을 하고 나서 휴식합니다. 자석 앞에서 바늘이 움직이듯이, 세 가지 (우주적) 작용 또는 다섯 가지 신의 활동에 의해 지배되는 영혼들은 그들 각자의 업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하고 휴식합니다. 신은 아무런 의지도 없으며, 아무런 업도 그에게 붙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상 만물의 활동이 태양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고, 다른 4대 원소들의 성질이 일체에 두루한 에테르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호준 역, 청하>
<kbs다큐 마음5 중 존 카밧진의 마음챙김 명상 소개 자료 :
단지 소리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바라봄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리석은 인간, 동물들의 위엄 : 사유할 수 없는 동물을 인간보다 더 신성시하는 에크하르트 톨레>
<타인에게서 사랑받으려고 하기 이전에 자기자신을 스스로 사랑하라는 크리슈나무르티 :
바른 법을 알지 못하면 누구나 자기존재에 대한 사랑과 존귀함이라는 자아교리에 갖히게 된다>
<틱낫한 방한 대중강연 :
느낌을 통해서 마음의 화를 제어하고 세상 전체에 대한 자비심을 끌어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틱낫한>
<선불교 뉴욕에 가다 :
바른 법에 대한 개념도 가르쳐주지 않고 내가 허상이니 욕심을 버리고 참나를 찾으라는 진제스님
진제스님이 아니더라도 선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문득 깨달아 지는 것이라 말한다>
위와 같은 방식으로
단지 호흡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거나
'이 뭣고?'의 화두만을 던지고 있거나
생각을 멈추고 단지 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
타인 혹은 대상에게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보내는 것 등
으로는 수행에 아무 소득이 없다
바른 수행은 육내외입처(내면과 외면)의 현실에서 부딪히는 경계를 살펴서
자신의 행위에 갖추어진 불선한 의도는 제거하고
선한 의도는 증장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선과 불선의 기준이 곧 법이 되는 것이며
그 법은 곧 자기존재의 무상, 고, 무아를 보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추앙받고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학자나 성인 혹은 종교가들이
자기존재에 대한 근원적 통찰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것은
그만큼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이 위대하고
세간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삶을 바라보고 있다는 반증이다
즉 부처님의 깨달음은 세상사에 대한 미련이 더 이상 없음(염오, 이욕)에서 시작된다
현대의 한국 철학자 강신주나 최진석 역시
자기존재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을 그들의 강연에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이야기쇼 울림 42회 강신주 :
꿈을 꾸고 일단 행해보고 거기서 벗어나는 삶을 많이 경험할 때 성숙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삶은 원하는 것을 이루지만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는 삶의 연속이다
설사 모든 것을 다 이루더라도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단순히 이루고 버리는 삶으로 삶 전체에 대한 관조를 얻을 수 있을까?>
그릇된 수행의 결실은 결국
절대적 자기존재 혹은 순수한 자기존재 나 없는 자기존재 등으로 결실을 맺는다
즉 현재 바른 법(사성제법)에 대한 개념 없이 행해지고 있는
온갖 불교 수행법(위빠사나 수행법, 명상 수행법 등)은 모두 바른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인간의 자기존재에 대한 어리석음 개념을 깨트리기 위해서는
중도연기법에 토대한 끊임없는 사유가 필요하다
13. “그렇다면 그대 존자들은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면서 물질[色]을 초월하여 물질이 없는[無色]
저 [네 가지] 평화로운 해탈들을 몸으로 체득하여 머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반이여.”
14. “여기서 존자들은 [구경의 지혜를] 드러내었지만 이러한 법들은 증득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됩니까?”
“도반 수시마여, 우리는 통찰지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하였습니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288>
인식은 무엇을 조건으로 생겨나는가?
이 몸이 대상경계를 감각접촉하여
좋고 싦음의 느낌을 갖게 되고
그 느낌을 바탕으로
지각하는 대상에 대해
의도를 내어 행하고(좋은 것은 추구, 싫은 것은 회피)
그 행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기자신의 인식세계(알음알이)를 구축한다
수행자는 이러한 인식과정을
현실 경계를 감각접촉할 때마다 법답게 살펴
자기존재에 대한 허망한 인식에서 비롯된 온갖 집착에서
묶여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마음챙김(정념)이라 한다
17. “도반들이여, 눈이 있고 형색이 있고 눈의 알음알이가 있을 때
감각접촉[觸]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감각접촉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느낌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느낌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인식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인식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일으킨 생각[尋]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일으킨 생각이라는 개념이 있을 때
사량 분별이 함께한 인식 더미의 일어남이라는 개념을 설명한다는 것은 가능합니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259>
“도반 밧다여, 세존께서는 유익한 계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존께서
는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을 닦는 것이 유익한 계들의 목적이라고 말씀하
셨습니다. 무엇이 넷입니까?
도반이여, 여기 비구는 몸에서 몸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
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음 챙기면서
머뭅니다. 느낌에서 … 마음에서 … 법에서 법을 관찰하며 머뭅니다. 세상
에 대한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버리면서 근면하게, 분명히 알아차리고 마
음 챙기면서 머뭅니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296>
앞서 언급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신의 섭리, 숙명론, 우연발생론과 같이
현실에서 사실로 경험할 수 없는 법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다
이는 그러한 내용이 맞을 수도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고
그러한 쓸데없는 논쟁을 벌이는 대신
스스로의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인식하고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자들을 위해서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보셨기 때문이다
도사씨라는 촌장이 세존께 아뢰었다.
여래께서는 무슨 이유로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설법을 해 주시고
또 어떤 사람을 위해서는 설법을 해 주시지 않습니까?
세존께서 촌장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물을터이니 마음대로 나에게 대답하라.
촌장이여 비유하면 세가지 밭이 있는데,
첫번째 밭은 비옥하고 기름진 밭이고,
두번째 밭은 중간쯤 되며,
세번째 밭은 척박한 밭이다.
어떤가? 촌장이여, 그밭의 주인이 맨 먼저 어떤 밭부터 갈고 씨를 뿌리겠는가?"
촌장이 대답하였다.
"고타마시여 가장 비옥하고 기름진 밭부터 먼저 갈고 씨를 뿌릴 것입니다."
다시 세존이 촌장에게 물었다.
"촌장이여 다음에는 어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겠는가?"
촌장이 대답 하였다.
"고타마시여 당연히 다음에는 중간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겠습니다."
세존께서 촌장에게 말씀 하셨다.
"다음에는 어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겠는가?"
촌장이 대답하였다.
"다음에는 가장 질이 좋지 않고 척박한 밭을 갈고 씨를 뿌릴 것입니다."
세존께서 촌장에게 말씀 하셨다.
"나도 또한 그와 같다. 저 비옥하고 기름진 밭과 같은 이는 비구와 비구니들이다.
나는 항상 그들을 위해서 바른 법을 설한다. 그 설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다.
뜻도 좋고 맛도 좋은 것이어서 원만하고 깨끗한 범행을 열어 보이고 나타낸 것이다.
촌장이여 저 중간쯤 되는 밭과 같은 이는 우바새와 우바이이다.
나는 또한 그들을 위하여 바른 법을 연설한다.
촌장이여 저 농부의 가장 질이 좋지 않고 척박한 밭과 같은 이는 외도(外道)들이다.
나는 또한 니건자의 무리들을 위해서도 또한 설법한다.
그리하여 나는 저들에 대하여 설법을 듣는 이가 적어도 그들을 위해
연설하고 설법을 듣는 이가 많아도 그들을 위해 연설한다.
그래서 그저 대중들이 내가 연설하는 훌륭한 법에서 단 한 구절의 법이라도 들어
그 이치를 깨달으면 그도 오랜 세월 동안 그 이치로 인해 유익하게 되고
편안해지면 즐겁게 머무르게 될 것이니라."
<잡아함 32권>
육근, 육경, 육식의 법은 신의 섭리, 숙명론, 우연발생론과 같은 어리석은 관념을 제거하고
현실의 자기자신의 어리석음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하여
스스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법이다
물론 신의 섭리, 숙명론, 우연발생론과 같은 허망한 관념에 대해서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고 삶을 살아가는 이들도 많다
그들 역시 나름대로의 소신이 있어
타인과 사회 혹은 자기자신에 피해주는 행위를 하지 않고
검소하고 소신있는 삶을 살아가기도 한다
이는 육사외도 당시 사후단멸론자이나 도덕부정론자 혹은 애매모호론자의 견해와 유사하다
그들 역시 사회에 해를 끼치는 삶을 살아간 것은 아니다
다만 나 자신의 인식과 의도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가려 타당하게 행하지 못함으로 인해
우유부단하거나 사회와 화합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그는 자신의 인식과 의도를 객관적으로 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인식에 끄달리지만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내면의 갈등만이 존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인식과 의도가 어떤 조건으로 생겨나고 있는지를 살피지 못하는 한 그 삶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원하는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인식
원하는 것이 소멸하기를 바라는 인식
내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인식
내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인식 등
바른 법을 모르는 자는 이러한 인식들의 그물에 걸려
그 삶이 다할 때까지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바른 법의 개념을 배우기도 어렵지만
그 개념을 체득하여 실천하기는 더욱 어렵다
자기자신의 존재가 무상함을 알지 못하고는
절대 그것을 깨트리지 못한다
바른 법을 모르는 이에게 그것은 생살을 파내는 아픔과 다름아니다
또한 '나, 내 것, 나의 자아'라고 알고 있는 그 무엇(몸, 느낌, 마음, 법)에 대해
누군가가 깨부수려고 한다면
그는 즉각적이고 필사적으로 대항할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몸, 느낌, 마음, 법)이 무상함에 대해 철저히 배워야 한다
어떠한 조건과 목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나, 내 것, 나의 자아라고 생각하게 되었는지
배우고 익혀야 한다
그것이 육근, 육경, 육식의 법이다
육근, 육경, 육식의 법에 대한 이해를 갖추게 되면
스스로 자기존재에 대한 견해의 무상함을 볼 수 있게 된다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 나서 형색을 경험하고 형색에 대한 탐욕도 경험한다.
그러면 그는 ‘내 안에는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있구나.’라고 하면서 자기 안에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있음을 꿰뚫어 안다. 우빠와나여, 이렇게 꿰뚫어 아는 것을 두고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귀로 … , 코로 … , 혀로 … , 몸으로 … , 마노로 … ”
“우빠와나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색을 보고 나서 형색을 경험하지만 형색에 대한 탐욕은 경험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는 ‘내 안에는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없구나.’라고 하면서
자기 안에 형색들에 대한 탐욕이 있지 않음을 꿰뚫어 안다.
우빠와나여, 이렇게 꿰뚫어 아는 것을 두고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귀로 … , 코로 … , 혀로 … , 몸으로 … , 마노로 … ”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209>
바른 법은 세상과 조화될 수 없다
세상은 자기존재에 대한 상정(오취온)에서 비롯된
온갖 견해들로 가득차 있다
자기존재의 무상, 고, 무아(해체)를 외치는 자는
그 이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위협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자일 뿐이다
나 자신이 무상한데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란 말인가?
이러한 의문이 당연히 떠오를 것이다
바른 법을 배우지 못한 이들이나 배운 수행자들에게 모두 그러한 인식이 생겨날 것이다
다만 바른 법을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그 인식이 최종점이 될 것이고
거기에서 생겨난 괴로운 느낌으로 인해
그러한 법을 가르친 이를 원망하고 배척할 것이다
때로는 자기존재를 해체하면
궁극적인 절대자와 합일하게 된다는
허망한 논리를 펼치는 이들에게 설득당하기도 할 것이다
반면 바른 법을 배운 수행자는
그러한 인식은 다시 무엇을 조건으로 생겨나는가를 살펴
그 인식 역시 자기존재의 무상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됨을 살펴낼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인식에 묶여 괴로워하거나
그것을 괴로움이라고 인지조차 못하는 이들을 위해
바른 법을 설할 것이다
바른 법을 배우고 훈련받지 못한 이들은
철저한 자기존재의 타파를 통한 무상, 고, 무아의 증득을 얻기 어렵다
어리석은 인식은 바른 법조차 자기합리화로 왜곡시킨다
세상의 훌륭한 이들은 꿈을 얘기한다
때로는 나 없음으로 시작해서
과거도 잊고 미래도 잊고
지금 여기에서 우주와 하나됨을 얘기한다
달콤한 미래를 얘기한다
비록 미래에 그것을 얻지 못하더라도
내 안에 모든 우주가 이미 갖추어져 있다는데
그것을 마다할 이는 아무도 없다
다만 그 끝과 결실이 허망할 뿐이다
출세간의 훌륭한 이들은 나 없음을 얘기한다
이를 토대로
미래의 꿈과 희망은 어리석은 인간이 만들어낸 허망한 인식일 뿐이라고 가르치며
자신의 꿈도 제거하고
타인의 꿈도 제거한다
과거의 후회와 원망은
떠오를 때마다 왜 그러한 인식이 생겨나는지 살펴서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만들라고 한다
그 과정은 괴롭지만 그 결실은 참되다
물론 그 결실도 나 없음에 기인한 참된 평온이다
나 없는 자가 어떤 과거를 후회하고 어떤 미래를 모색할 것인가?
16. “비구들이여, 이렇게 사람은 자신을 학대하지 않아서
자신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지 않고 남도 학대하지 않아서
남을 학대하는 짓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학대하지 않고 남을 학대하지 않으며,
바로 지금 여기에서 갈증이 풀리고 모든 오염원들이 꺼지고
안으로 고행의 오염원들이 없어 시원해지며
선정과 도와 과와 열반의 행복을 체득하고 스스로 고결하게 되어 머문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285>
바른 수행자는 신과 우주 혹은 초능력(육신통)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내안의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보고
거기서 벗어나고 다시는 생겨나지 않도록 행하는 법을 가르친다
이것이 부처님이 설하신 사성제법이다
바른 법을 배우고 익히는 자들에게
어리석은 세상과의 타협은 없다
그렇다고 세상을 버리지도 않는다
바른 법을 가르치면 그들 중 누군가는 바른 결실을 볼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자기존재를 해체한 이에게 더 이상의 비교의 대상은 없다
너보다 내가 낫다거나
너보다 내가 못하다거나
너와 내가 동등하다라는 견해의 토대가 되는
나라는 개념 자체가 허물어져 버렸다
그래서 그의 행위는 주체적이라고 말해도 틀린 것이다
바른 법을 행하는 자라는 말만 어울리게 된다
또한 자기존재의 소멸을 이룬 자만이
듣는 이에게 괴로움 없는 참된 삶의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5.27. “수밧다여,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없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없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없다.
수밧다여, 그러나 어떤 법과 율에서든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支聖道]가 있으면
거기에는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두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세 번째 사문도 있다.
거기에는 네 번째 사문도 있다.
수밧다여, 이 법과 율에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가 있다.
수밧다여, 그러므로 오직 여기에만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두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세 번째 사문이 있다.
여기에만 네 번째 사문이 있다.
다른 교설들에서는 사문들이 텅 비어있다.
수밧다여, 이 비구들이 바르게 머문다면 세상에는 아라한들이 텅 비지 않을 것이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291>
나, 내 것, 나의 자아가 있는 자의 말은
자신을 왜곡하고 타인을 왜곡한다
바른 법을 행하는 이만이 위없고 고귀한 자라 불린다
그에게 더 이상 해야할 일은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삶의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이는 그러한 이에게서 바른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6. “비구들이여, 비구는 고귀한 마음(출세간)을 고귀한 마음이라고 안다.”
“혹은 고귀하지 않은 마음(세간)을 고귀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7. “비구들이여, 비구는 위가 남아있는 마음(유학)을 위가 남아있는 마음이라고 안다.”
“혹은 위가 없는 마음(무학)을 위가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8. “비구들이여, 비구는 삼매에 든 마음을 삼매에 든 마음이라고 안다.”
“혹은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을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9. “비구들이여, 비구는 해탈된 마음을 해탈된 마음이라고 안다.”
“혹은 해탈되지 않은 마음을 해탈되지 않은 마음이라고 안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156>
바른 수행은 남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자신의 괴로움을 해결보기 위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온갖 괴로움이 대상(몸, 느낌, 마음, 법)에 대해
나, 내 것, 나의 자아라고 상정하고 거기에 취착함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그러한 견해를 해체하여
세상의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실을 증득하기 위해
바른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하며
그것은 바른 법을 깨우친 선지식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수행자 역시 감각적욕망과 자기존재에 대한 무지로 인해
바른 법조차도 그릇되게 왜곡시키면서
좋고 싫은 느낌에 묶여 괴로움에 끄달려 나가게 된다
이것을 다섯 가지 장애(오계 : 감각적 욕망, 악의, 해태와 혼침, 들뜸과 후회, 회의적 의심)라고 한다
오계는 바른 법을 배운 수행자들이 수행의 과정에서 겪게 되는 괴로움들이며
이 글에서는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비구여, 취착과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는 같은 것도 아니요, 취착과 취착의 다섯 가지 무더기는 서로 다른 것도 아니다.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욕탐이 거기서 취착이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263>
“비구들이여, 잘 배운 훌륭한 제자는 오온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나 눈뜨게 되며,
이런 깨달음에 의하여 평온을 얻으며 평온을 통하여 해탈한다. 해탈하면 ‘해탈했다.’라는 지혜가 생기며,
‘태어남은 부수어졌고 청정한 삶은 성취되었고,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는 일이 없다.’라고 안다.
그는 어리석음을 버린 사람이며, 다시 태어나지 않는 생사의 윤회를 벗어난 사람이며, 갈애를 끊어버린 사람이며,
‘나’라는 집착된 교만을 버린 사람이며, 그래서 이런 어리석음, 생사윤회, 갈애,
‘나’라는 아만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완전히 뿌리 채 뽑아버린 사람이다.”
<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p 190>
부처님 가르침은 인간이라면 반드시 겪게 되는 온갖 괴로움으로 부터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피상적이고 맹목적인 삶이 아닌 스스로가 경험하고 검증하는 진실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김종수 스승님이 설하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기를 권한다
이와 관련된 도표(깨달음 그 불편한 진실 요약)와
책소개 동영상을 싣는 것으로 끝을 마무리 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의미심장한 말씀 일상 가운데 깊이 새겨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