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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왼쪽은 앗시리아 병사, 가운데는 왕의 행렬. 오른쪽은 앗시리아 왕에게 조공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아수르-단 2세(Ashur-dan Ⅱ 993-910 BC) 전성시대를 개막한 위대한 전사로 거의 매년 정복에 나서 피를 강 같이
흘렸고 시체를 산 같이 쌓았다고 전해집니다.
그 세력이 동서로는 인도에서 이집트,남북으로는 아라비아에서 러시아에까지,그들의 말마따나 멀리 산봉우리가
줄지어 선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왼쪽 바다에까지’ 미쳤습니다.
티글랏필레셀 3세(Tiglath-Pileser Ⅲ B.C, 745-727): 구약성경에 불(Pul)로 불리우는 앗시리아 최대의 왕 가운데
하나로 전성기를 이룩했습니다.
그는 북방 이스라엘의 므나헴(752-742 BC)에게서 조공을 받았으며(왕하 15:19), 베가(742-740 BC)때에는 북방
이스라엘을 다시 침략하여 북방 영토를 점유한 후 앗시리아의 므깃도 도(道)에 예속시켜 버리고 백성들을
이산(離散)시켰습니다(대상 5:26).
유다왕 아하스의 긴급 요청으로 기원전 732년 다메섹을 치고 왕 르신을 죽이기도 했으며(왕하 16:7-9), 북방
이스라엘의 베가를 물리치고 호세아(732-722 BC)를 왕으로 올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이사야 7장
16절과 8장 4절 예언의 성취이기도 했습니다.
살만에셀 5세 (Shalmaneser Ⅴ·727-722 BC): 이 때 이집트는 북방 이스라엘의 호세아를 꼬득여서 앗시리아에
반역하도록 조장하자 사마리아를 3년 간 포위한 끝에 기원전 722년 그가 죽기 직전 이를 함락하여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켰습니다. (왕하 17:1-6).
산헤립(Sennacherib 705-681 BC) 사르곤 2세의 아들로 각처의 반역을 무자비하게 대처하여 기원전 689년에는
바빌론성을 짓밟았습니다.
기원전 701년에는 서부 원정에 나서서 시리아와 팔레스틴의 왕들을 징벌하고 반역을 주도한 유다왕 히스기야를
징치하기 위해 우선 요새인 라기스를 비롯하여 수많은 유다의 도시들을 유린했습니다.
후에 재침한 산헤립은 유다를 끝장내려 하여 예루살렘까지 접근했으나 이사야의 권면으로 힘을 얻은 히스기야의
신앙과 하나님의 개입으로 하루 밤에 18만 5천의 군사를 잃고 퇴각하고 말았습니다(왕하 19장, 대하 32장, 사 37장).
후에 본국에서 아들들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아수르바니팔(Ashurbanipal 669-627 BC) 앗시리아 최고의 전성기를 이룩한 최후의 위대한 왕으로 이집트를 재차
정복하여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던 테베를 노략하는등 외정(外征)에 대성했습니다.
특히 고대 세계 최대의 왕립도서관을 세워 고대의 각종 문헌을 수집하여 소장한 것으로 더욱 유명한데 1853년 12월
22일밤 영국 사람 랏삼(Hormuzd Rassam)등에 의해 니느웨가 확인되고 이 도서관이 발굴되었습니다.
이곳에 소장된 고대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 문서 가운데 성경 창세기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와 흡사한 점토판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아수르바니팔 대왕 이후 그의 두 아들이 몇 년동안 다스렸으나 이미 대대적인 반역을 시작한 주변의 국가들을
제압할만한 역량을 잃은 채 막바지에 접어들었다.
특히 기원전 626년 바빌론은 느브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포랏살의 영도 아래 독립을 선언하고 도전했으며 메대도
시악사레스(Cyaxares)의 영도 아래 기원전 614년 앗수르(Ashur)성을 함락시키고 612년에는 수도 니네베가
바빌론과 메대와 스키디아(Scythians) 연합군에 의해 3개월 간 포위된 끝에 스바냐와(습 2:13-15) 나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나 3:1-3) 처절하게 함락되었으며 이집트와 동맹을 맺고 버티려던 신-사르-이슈쿤(Sin-shar-ishkun
626-612)왕도 함께 죽었습니다.
니네베가 함락된 뒤 앗시리아의 유민(遺民)들은 앗시리아의 최후의 통치자인 아수르-우발릿 2세(Ashur-uballit Ⅱ B.C.612-609)의 지도 아래 유프라테스를 건너 하란(Harran)을 수도로 정하고 이집트의 지원을 받으며 재기(再起)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610년 바빌론의 나보포랏살 왕은 동맹국 스키디아의 지원을 받으며 또 다시 하란을 점령했습니다.
때마침 이집트에서 삼틱 1세(PsamtikⅠ663-609 BC)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느고 2세(Necho Ⅱ, 609-594 BC)가
왕위에 오른 즉시, 앗시리아의 진군(殄軍)을 도와 하란을 탈환하기 위해 지원군을 이끌고 서둘러 북상(北上)했습니다
(왕하 23:29, 대하 35:21).
때에 재위 31년을 맞이한 유다의 요시아 왕은 국제정세가 신흥 바빌로니아에 유리하게 돌아감을 느끼고, 친바빌론
정책을 취하여 느고 2세의 이집트 군사를 므깃도 평지에서 맞아 북상을 저지하다가 전사하는 비운을 맞았습니다.
(왕하 23:29 이하, 대하 35:20-24).
종교 개혁을 해 우상을 철폐하고 유월절과 율법을 지킨 요시야 왕이 너무 허무하게 죽어 의문점을 낳습니다.
요시야는 친 바빌론 정책을 취했지만 하나님꺼서는 바빌론이 남 유다를 멸망시킬만큼 세력이 커질 것을 아시고
이집트와 앗시리아가 연합해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하셨습니다.
이집트군이 하란으로 가기 위해서는 남 유다를 지나가야 하는데, 요시야가 이를 대비하니, 이집트 느고 왕이
사자를 보내어 하나님이 시켜서 하는 일이니 막지 말라고 합니다.(역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이를 믿지 못하고 변장하고 싸우나 화살을 맞아 전사하고, 전력을 소모한 이집트군은
바빌론과의 전투에서도 패합니다.
이 일로 남 유다는 이집트의 속국이 되고, 바빌론과도 적이 되었으니 상황이 더 악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방법으로 역사하시므로 요시야 왕은 정 의심이 나면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던가 선지자에게 물어봤어야 했습니다.
앗시리아의 왕 아수르-우발릿 2세를 부추겨 하란을 탈환하려던 느고 2세의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퇴각하면서
시리아를 비롯한 팔레스틴 일대를 공략하였으며, 특히 하란 서쪽의 유프라테스강 상류의 강변의 요충도시인
칼케미슈에 앗시리아의 진군과 함께 기지를 구축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605년 나이 많고 병약해진 나보포랏살은 아들 느브갓네살을 보내어 칼케미슈에서 이집트와 역사적인
대격전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이집트는 대패하여 팔레스틴에서의 기반을 잃고 본국으로 철수하여 그 후 다시는
이전의 강대국으로서의 위세를 영원히 회복하지 못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습니다(렘 46:2).
그리고 앗시리아의 마지막 명맥도 영원히 끊어졌습니다.
b) 문화
기원 전 700년 앗시리아의 수도가 된 니네베(니느웨)는 그 무렵 가장 위대한 도시로 떠올랐습니다.
니느웨성은 선지자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회개시켜 심판을 면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B.C. 780 년)
웅장한 궁전과 사원들을 둘러싼 성벽은 그 위로 수레 3대가 달릴 만큼 두터웠고(너비 9.6m), 23m나 솟은 성벽을
너비가 24m인 해자(방어용 연못)가 둘렀습니다.
‘상인의 수가 별보다 많을’ 정도로 번창하고, 그 시대의 로마라고 하리만큼 세계의 중심지이던 니네베는 그러나
기원 전 612년 하루 아침에 사라졌습니다.
더 화려하고 더 오래 영화를 누린 도시가 많은데 겨우 89년을 번성한 니네베가 그처럼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2600년이 지나도록 자주 거론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바로 니네베 시절의 아시리아가 역사의 들머리에서 보기 드물게 잔학성을 떨친 데 있습니다.
아시리아의 제왕들이 오벨리스크(돌 한 개를 깎아서 높이 세운 기념탑) 따위를 만들어 저마다 새겨 놓은 무용담이나,
궁전과 사원 벽에 새긴 글과 그림에는 왕에 대한 두려움을 자아내는 내용이 가득합니다.
‘짐은 잔인하고…전쟁에서는 앞장서 달리는 온 천하의 왕이며…무릎 꿇지 않는 적들을 짓밟고 온 세상을 손아귀에
넣었노라.’(아슈르나시르팔 왕)
‘나는 들판을 피로 물들이는 무시무시한 태풍이로다.’(아슈르바니팔 왕)
포로나 반역자를 창에 꿰고 살갗을 벗긴 아슈르나시르팔보다 더 잔인한 왕은 니네베로 수도를 옮긴 센나케리브입니다.
그는 바빌론을 쳤을 때 도시 전체가 시체로 가득 찰 때까지 주민들을 하나하나 살육하고 집들을 남김없이 불태웠습니다.
피의 제왕은 니네베 신전에서 기도하다가 아들들에게 살해되어 자신의 주검도 피로 물들였습니다.
앗시리아인들은 말과 법률과 생활 양식을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로부터 배웠지만, 돌을 다룬 솜씨만은 누구보다
빼어났습니다.
그들은 돌을 다듬어 아치를 세우고 수로를 팠으며 뛰어난 조각 예술을 후대에 남겼습니다.
제련술·상감술·도료술 같은 공업 기술에도 뛰어났습니다.
도서관은 수학·천문학·점성학 책으로 가득 찼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식물원·동물원과 사냥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앗시리아가 첫째로 내세운 자랑거리는 군대입니다.
군대 조직에는 기병대·전차대·경보병대·중보병대·포병대·기술지원부대에다 첩보부대까지 있었습니다.
병력은 보병 170만,기병 20만에 전차 1만6,000대.
구약 성경은 아시리아 군대가 들이닥치는 모습을 ‘돌풍과 같다’고 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그들이 사자처럼 바다처럼 으르렁거리며 달려와 지나는 곳마다 슬픔과 어둠을 남겼다”고
한숨 지었습니다.
돌개바람처럼 서아시아를 휩쓸었던 앗시리아는 기원전 612년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메디아, 칼데아, 스키타이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지르고,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에 내던졌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눈부시고 거대했던 도시 니네베는 폐허로 바뀌었습니다.
수천년간 사막 바람이 뜨거운 모래와 먼지 구름을 몰고 와 폐허를 덮자, 왕성은 큰 둔덕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람 타고 날아온 씨앗들이 봄비를 맞고 움이 터서 둔덕에 초록빛 융단을 깔았습니다.
‘니네베가 황폐하였도다.…누가 위하여 애곡(哀哭)하리오?’(구약 성서 나훔 3장 7절)
아시리아 것으로서 남은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눈부신 영화를 누리던 궁전이 있었다는 자취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스처럼 신전이 서 있지도 않았고 멕시코나 잉카처럼 피 묻은 제단도 없었다.
c)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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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 왼쪽은 사람 얼굴에 날개 달린 사자몸이고, 가운데는 사람 얼굴에 다리가 5개이고 날개 달린 황소 몸과
생명수를 지키는 독수리 얼굴의 그룹 천사 모습이고, 오른쪽은 생명수를 지키는 신들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수메르와 바빌론에서도 발견되며, 앗시리아 역시 사탄을 섬기는 종교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잔혹성은 사상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앗수르의 국가신인 아슈르를 신들의 왕으로 추대하였고, 달, 태양, 날씨, 사랑의 여신 등을 섬겼습니다.
도시마다 신전이 있었고, 수호신이 있었습니다.
앗수르인들은 영적인 세계를 심각히 받아드려 죽은 자를 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병이나 재앙을 가져다 주는 귀신을 쫓기 위해 몸에 부적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또한 미래의 일을 알기 위해서 점성가를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