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사무엘하 1장 11~12절, 마태복음 5장 43~48절, 누가복음 6장 32~36절
그러자 다윗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여, 자기의 옷을 잡아 찢었고,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가문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슬퍼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울며 금식하였다. <표준새번역>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표준새번역>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네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너희를 좋게 대하여 주는 사람들에게만 너희가 좋게 대하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그만한 일은 한다. 도로 받을 생각으로 남에게 꾸어 주면, 그것이 너희에게 무슨 장한 일이 되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죄인들에게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좋게 대하여 주고, 또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큰 상을 받을 것이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아들이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에게도 인자하시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표준새번역>
마태복음 22장 45절에는 예수님이 '메시아'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시편 110편 1절 말씀을 인용하여 다윗이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이미 있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으로 다윗의 후손이지만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불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냐는 질문을 던지셨고, 이 질문에 그 누구도 답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실로 예수님은 다윗 시절에도 하나님과 함께 계셨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 즉 메시아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한 다윗이었습니다.
왜 이 구절로부터 글을 시작했는가 말씀드리자면 다윗은 구약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은 듯 실천하고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말씀과 같았기에, 하나님을 알았던 다윗이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했던 것은 정말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체적인 사례를 다윗이 듣고 그대로 행하듯 실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과 다윗이 서로의 마음과 행동과 생각을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하지만 다윗에게도 그리스도이셨던 예수님!
그래서였을까요? 다윗은 자신의 삶 후반전을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앞장서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인거 같습니다. 이래서 '다윗 다윗'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의 전반전은 상처와 고통과 두려움으로 얼룩졌지만 그의 후반전은 오히려 그 전반전에 대한 아픔을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몇 번의 시간동안 '이래서 다윗이다'고 말할 수 있는 몇가지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사무엘하는 이스라엘의 첫번째 왕 사울에 대한 죽음이 다윗에게 알려지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드디어 사울이 죽었습니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던 사울이 드디어 죽었습니다. 그런 사울의 죽음을 알리면서 시작된 사무엘하는 다윗에게 정말 기쁜 소식으로 가득찬 '복음'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더 이상 숨어지낼 이유도, 도망다닐 이유도,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사라졌으니 얼마나 홀가분하고 편안해졌을까요? 이 죽음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감사해야 할지 벅찬 가슴이었을까요? 드디어 자신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충만했을까요?
하지만 오히려 성경은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자신의 옷을 찢고, 해가 지도록 울며, 금식한 다윗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 모습이 연기였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연기였다면 다윗의 주변 사람들까지 그렇게 할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모시고 있던 다윗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던 사울이 죽었다면 수하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박수를 치고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 뿐만이 아니라 다윗과 같이 있던 사람들도 모두가 다윗과 같이, 다윗처럼,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심입니다. 평소에 다윗이 사울을 생각하던 마음을 아는 이들이었기에 같은 마음으로 동참한 것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여, 자기의 옷을 잡아 찢었고, 그와 같이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 가문이 칼에 맞아 쓰러진 것을 슬퍼하면서, 해가 질 때까지 울며 금식하였다. <사무엘하 1장 11~12절, 표준새번역>
그리고 다윗은 조가를 지어서 그것을 '활 노래'라고 하여,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라고 명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윗은 실로 말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지!" 말로만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야만 완성되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이래서 다윗입니다. 그는 사울과 그의 가문의 몰락을 보면서 박수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슬퍼하며 애도했습니다. 그가 지은 조가를 보면 그는 실로 사울을 사랑했으며 존경했으며 아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말씀 중에 가장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거의 모든 사람이 바로 이 구절을 뽑을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바로 마태복음 5장 44절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표준새번역>
실로 이 말씀은 정말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을 넘어서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 가끔은 이해가 가지 않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구요? 저를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고, 어렵게 만들고, 상처를 주고,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을 했는데 사랑하라구요? 그리고 오히려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라구요?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건 너무하신거 아니십니까? 어떻게 이렇게 합니까?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원수를 사랑했다고 하는 실제 예가 많이 등장하지 않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만이, 정말 몇몇의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만이 가능했던 것으로 우리는 기억합니다. 솔직히 외면하고 싶은 말씀이라고 구석구석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발견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저는 당장에 '원수를 사랑하십시오!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려는 것보다 다윗의 이 실천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무엘상, 다윗 삶의 전반전에서는 사울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하가 시작되고 다윗 삶의 후반전이 시작되는 시점에서 다윗이 달라졌음을 발견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말씀을 입으로만이 아닌 삶으로 살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앎이 아니라 삶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묵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의 시작이 '복음서'가 아니라 '애가'로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통하여 먼저 사울과 같은 '원수'가 생기기 이전에 이미 마음 속에 씨를 뿌려 '용서와 사랑'이라는 나무를 자라게 하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간절히 소망하기는 다윗과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합니다.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어쩔 수 없이 다윗과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우리가 이 말씀을 기억하고, 다윗의 모습을 기억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려진다면, 말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요?
다윗의 후반전은 이제 말씀을 앎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주는 여정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처럼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기에 때론 좌절하고, 쓰러지는 모습이 사무엘하에도 등장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사무엘하의 다윗과 다릅니다. 사무엘상 때처럼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오랜 시간 공백을 두지 않습니다. 사무엘하에서의 다윗은 쓰러질 때, 힘들 때, 괴로울 때 더더욱 하나님을 찾습니다. 부족함에도, 여전히 나약함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이루기 위하여, 말씀을 실천하기 위하여 묵묵히 전진해 나가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이 저만치 멀리 서있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 묵묵히 그 말씀을 향해 나아가 그 말씀을 '나의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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