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정사의 고즈넉한 절 - 기림사(祇林寺)
위에서 본 기림사 전경 과거의 모습으로 현재의 건물배치와는 조금 다름 (범종루가 상단으로 옮겨졌고 유물전시관 1동이 철거되었으며 종무소 건물이 세워짐)
천왕문에서 본 기림사(현재) 과거의 모습 우물에 전각이 있고 범종루가 우물과 진남루 사이에 있었으나 지금은 상단부로 옮겨져서 시야가 넓어졌다 철거된 범종루 맞은편에 종무소 건물이 새로 지어졌다
함월산의 기슭에 있는 기림사는 불국사보다 앞서 지어졌고 한때는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렸을 정도로 대단한 규모의 사찰이었다. 일제 강점기까지 31본산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불국사 말사로 귀속되어 있다.
기림사와 골굴사를 품고 있는 함월산은 추령을 사이에 두고, 안개와 구름을 토하고 삼킨다는 토함산과 마주하여 솟아있는데 ‘함월’이라는 말은 달을 품은 산이라는 뜻으로, 달을 잘 담을 수 있는 둥글고 넓은 분지 가운데, 용이 날아오르고, 봉황이 춤추며, 신령스런 거북이가 물을 마신다는 영구 음수형의 명당자리에, 기림사라는 고즈넉한 사찰이 들어 앉아있다.
사찰 입구의 임정교(林井橋) 임정교는 기림사의 옛 이름이 임정사였음을 말해준다
기림사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진다
인도 수다라국의 왕과 왕비, 후궁들이 광유스님의 제도 하에 세속과 왕좌를 버리고 부처님을 예배공양하기 위하여 차(茶) 시중을 들며 불법의 세계에 귀의하였다. 왕후에게서 태어난 태자 안락국은 수다라 왕이 도(道)를 얻어 열반에 들자 광유스님의 권유로 해동 계림국(신라)에 도착하여 명당을 찾아 조그만 암자를 세우고 이름을 '임정사'라 하였다고 한다.
임정사가 창건된 지 백오십년 후 신라 선덕여왕 때 원효대사가 절을 확장하고 절의 이름을 부처님 당시의 최초의 절인 '기원정사'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이름인 '기림사'라 개명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수행했던 승원 중에서 첫 손에 꼽히는 것이 기원정사와 죽림정사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23번의 하안거를 보내신 곳이다.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祇林)이라 하니 경주 함월산 기림사는 그런 연유에서 붙인 이름이다.
기림사의 일주문
경내에서 본 기림사의 일주문
일주문에서 기림사로 가는 숲길, 흙길을 약 5분 걸으면 기림사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보면 1424년(세종 6년)에 교종과 선종 각 18개 사(寺)를 정하여 불교 사원을 통폐합 할 때 기림사는 선종사찰로서 경상도 4개 사원(경주 기림사, 합천 해인사, 진주 단속사, 거창 견암사)에 포함되었는데 이때 토지가 130결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림사는 높은 석단을 사이에 두고 상단부와 하단부로 나누어지는데, 상단부는 근래 들어 조성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곳으로 삼천불전, 관음전, 범종각, 유물전시관, 요사채(화정당, 해행당, 백운당) 등이 있으며, 하단부는 창건 당시부터 이어져 오는 곳으로 일주문, 진남루, 대적광전, 응진전, 약사전, 삼층석탑이 있다.
기림사는 이 지역 다른 사찰과 달리 임진왜란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사찰로 경주부 관아에 보관되어 있던 영부안선생’이나‘호장안’등 수많은 문헌들이 당시 호장 최락에 의해 기림사로 옮겨져 잘 보관 된 결과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며 사찰 내 국가지정 문화유산으로는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보물 833호), 건칠보살좌상(乾漆菩薩坐像:보물 415허), 대적광전내 삼존불(三尊佛:보물 958호), 비로자나불의 복장유물(보물 959호) 등이 있다.
천왕문과 축대
천왕문
시계바늘 돌아가는 방향으로 남방증장천왕, 서방광목천왕, 동방지국천왕, 북방다문천왕
진남루(鎭南樓)
진남루의 앞면
진남루의 뒷면
진남루의 내부 현재 진남루는 기림사에서 운영하는 탬플스테이시에 강의장과 숙소로 활용되고 있다
진남루의 앞면 문
진남루 화반(華盤)의 문양 화반(華盤)이란 전통한옥 목조건물에서 기둥 사이를 가로 지른 나무 위에 놓여, 위의 가구재를 받치는 부재(部材)로서, 옛날에는 덩굴을 얽히게 한 모양의 부조를 하였고 나중에는 가장자리에 꽃모양을 새긴 것에서 유래함
기림사는 임진왜란 때에는 영남 승병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는데 현재 진남루가 보존되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진남루는 남방을 진압한다는 뜻으로 여기서 남방은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서 우리나라 곳곳에 진남루라는 명칭을 가진 곳이 많다. 특히 관문이나 읍성(邑城), 산성(山城)의 남문(南門)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이름이며 사찰에서 진남루가 있는 곳은 승병활동이 왕성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기림사는 전략요충지로서 경주지역 의병과 승병 활동의 중심 사원이었으며, 이때 이 진남루는 승군의 지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건물 형태는 익공계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상부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독특성을 지니고 있느데 조선 철종때인 1863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하였다.
3층석탑 (도지정 유형문화재 205호)
대적광전과 진남루 사이 서쪽에 응진전(오백나한전)이 있고 바로 그 앞에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높이 약 3m의 아담한 3층석탑이 서 있다. 감은사 탑과 같은 암석인 안산암(安山岩)으로 만들었는데, 2중의 기단 위에 3층으로 몸체 돌과 지붕돌을 쌓았고 그 위에 노반, 복발, 앙화까지 남아 있다.
기단부
1층 몸돌과 지붕돌
상륜부(노반-복발-앙화)
아랫 기단은 낮으며 한 면에 3개씩의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윗 기단은 높고 각 면마다 기둥 셋이 새겨져있다. 몸돌은 아래는 굵게, 위는 좁게 나타내는 사다리꼴모양으로 각 층마다 모서리 기둥을 새겼는데 지붕돌의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다.
크기도 작지만 기단의 기둥수, 처마 받침의 단수가 줄어든 것을 보아, 통일 신라의 일반형을 따른 신라 말기 탑으로 보여진다.
목탑지와 보리수(찰피나무)
목탑지에는 흔히 보리수라고 부르는 나무가 1그루 있으나 불가에서 일컷는 보리수와는 완전히 다른 나무로서 피나무과의 '찰피나무'라는 나무이다 이와 비슷한 '염주나무'도 절간에서는 흔히 보리수라 부른다
과거의 모습 ( 큰 찰피나무가 있었으나 잘라져 나가고 지금은 그 뿌리에서 다시 자라난 찰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석탑 동쪽의 보리수 밑에는 목탑(木塔)터가 남아 있으나 목탑의 규모와 폐탑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며 초석과 장대석만이 남아 있다 목탑지 위에는 흔히 보리수라고 부르는 찰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대적광전 -보물 833호
배흘림기둥과 꽃창살이 예쁜 대적광전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이다. 적(寂)은 번뇌를 멸한 고요한 진리의 세계, 니르바나의 세계를 말하며, 광(光)은 그 세계에서 나오는 참된 지혜가 온 우주를 찬란히 비춘다는 것을 말한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철종 14년 (1863년) 화재로 113칸의 법당과 요사체가 모두 불에 탔는데, 대적광전은 화마를 면했다고 한다.
대적광전에 있는 삼존 불상은 임진왜란 직후 중원의 장인이 향나무 틀에다 진흙을 발라 만들었다는 소조 불상 3기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이렇게 3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1986년 복장유물에서 조선시대 사경 및 건신사리 4과 등이 나와 보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대적광전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배흘림기둥의 다포식 단층 맞배지붕이 단정하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놓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며 대개의 건물이 주심포 사이에 공포가 하나씩인데 비해 이곳은 주심포 사이에 2개의 공포가 있어 더욱 화려함을 나타내고 있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의 앞면에는 모두 화려한 꽃창살 문을 달았는데 색이 바래 화려한 꽃창살 조각의 느낌이 포근하게 전해지며 단청이 퇴색하여 더욱 고색창연한 느낌을 준다.
대적광전의 꽃문살
대적광전의 공포. 1칸에 2개의 포가 들어가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은 것을 보아 17세기의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1997년 해체공사 때 종도리에서 4종의 묵서가 발견되었다. 대적광전은 1997년 해체공사를 할 때 옛 모습을 전혀 손상시키지 않아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대적광전 삼존불 - 보물 958호
대적광전 안에는 가운데 비로자나불, 왼쪽에 노사나불, 오른쪽에 석가모니불을 모셔 삼신불(三身佛)을 이루는데, 흙으로 빚은 이 세 불상은 손의 위치와 자세만 다를 뿐 표정과 모양이 거의 같고 옷 주름까지도 비슷하다. 삼존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얼굴이나 신체의 볼륨이 강하며 벌어진 넓은 어깨와 곧은 상체, 두터운 어깨너비 등 건장하면서도 위풍당당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상체에 비해 지나치게 작은 얼굴과 빈약한 무릎부분, 비로자나불의 굵은 팔뚝 등 인체의 비례가 현저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불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상호나 손 등의 세부적인 묘사를 보면 매우 세련된 솜씨임을 엿볼 수 있다. 적절한 두께로 주름을 세겨넣은 옷자락 표현이 장대한 몸체에 잘 어울리는데, 왼쪽 무릎 위로 접어 올린 옷자락이 비로자나불만 살짝 한 겹 더 접혔다는 차이가 있다.
대개 삼존불일 경우에는 좌우 부처들이 두 손을 서로 대칭되게 한쪽씩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은 둘 다 오른손을 들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대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인데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것이다.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삼신불의 교리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법신불(法身佛)-비로자나불 순수하고 차별상이 없는 영원불멸의 진리를 형상화한 부처님이다. 일체의 존재는 그것의 나타남이다.
보신불(報身佛)-노사나불 과거의 수행에 의한 공덕, 모든 미덕을 구비한 이상적인 인격으로서의 부처님이다. 과거 세상에 모든 만행 선근공덕의 보답으로 갖추어지는 부처님의 모습이다.
화신불(化身佛)-석가모니불 중생을 교화 구제하려고 부처님 자신이 중생의 모습으로 변화하여 나타난 것을 말한다. 현세에 인간의 모습으로 출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천백억 화신불이다.
삼신불(三身佛)은 세 부처님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부처님의 세 가지 관점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비로자나불의 복장유물에서 발견된 전적들 불경 필사본 및 기타 여러 가지 문적(文籍)들로 모두 54권 71책이다.
※ 비로자나불 복장유물은 문화재 절도범에 의해 도난되었다가 1986년 9월 6일에 되찾았으며 보물 959호로 지정되어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약사전
월광보살 약사여래 일광보살
내부의 단청
약사전은 동방 만월 세계에서 중생 교화를 맡고 계신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으로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사람의 병을 고치고 번민에서 구제하시는 부처님으로 약사유리광여래불(藥師琉璃光如來佛),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한다. 중생의 병을 제거하며, 모든 감각기관을 완비시켜 해탈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다. 일광(日光)보살, 월광(月光)보살을 각각 좌우 협시(脇侍)로서 약사삼존(藥師三尊)으로 삼으며, 권속에는 호법신(護法身)으로서의 12신장을 모신다. 차를 공양하는 내용의 벽화(약사전 내부 서쪽 벽면)
응진전(나한전)
응진전은 오백나한상을 모신 건물로 전면 5칸, 측면 2칸 겹처마 맞배지붕이며 조선중기의 건축 형식을 취하고 있다. 2002년 4월 개분불사를 하는 중에 오백나한 복장에서 조성당시에 씌여진 것으로 보이는 발원문이 나왔는데 조성년도가 옹정7년(擁正七年)으로. 서기로는 1729년이며 우리나라 연호로는 영조5년이다. 불상조각에 참여하신 분은 금산사 스님 4분과 본사스님 3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오백아라한은 정확히 526분의 성자이다. 부처님 당시의 제자들 중에 가장 뛰어난 10대 제자, 16성중(聖衆)과 500성중(聖衆)이다.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 최고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응진전 어칸 위의 용머리와 새머리 장식
응진전 정면 어칸 위 공포에는 특이하게도 3마리의 용과 2마리의 봉황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조각이 매우 섬세하다. 일반적으로 건물의 어칸 양쪽과 모서리 귀공포 위에 용머리조각이 배치되는데 비해 이곳은 정면에만 있고 모서리에는 장식조각이 없는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삼천불전
삼천불전과 도자기로 구운 삼천불
현재의 건물은 최근 1990년경에 지어진 전각으로 정면 7칸 측면 3칸 108평의 거대한 크기이며, 불당 안에는 경내 암자에서 도자기로 구운 삼천불이 모셔져 있다. 삼천불을 모시는 이유는 항상 어디에서나 부처님이 계신다는 사상에서 유래된 것으로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의미를 담고 있다. 1817년(순조17년)에 초의선사가 기림사 근방에서 나는 옥돌로 천불을 조성해 모셔두었는데, 1818년(순조18년)에 해남 대둔사로 이운을 해서 대둔사 천불전에 모셨기 때문에 현재 있는 삼천불은 당시의 불상이 아니다 처음 만든 옥돌 천불상은 1817년 11월 기림사에서 조성해 대흥사로 배로 ?겨가게 되었는데 2척의 배 가운데 1척은 풍랑으로 표류해 일본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 1818년 8월15일 천불전에 추가 봉안되었다(일본표해록).
관음전
천수천안관세음보살
역시 근래에 조성된 건물로 천수천안관세음보살(千手千顔觀世音菩薩)을 모신 전각이다.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과 열 한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천(千)은 광대무변(廣大無邊)의 뜻을 나타낸다. 수없이 많은 중생의 고통소리를 보아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눈이 필요하고, 수많은 중생을 손을 내밀어 구제해야 하므로 그렇게 많은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열 한 개의 얼굴을 한 십일면(十一面)관세음보살은 아수라도에 있는 것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맨 위의 불면(佛面)은 불과(佛果)를 표현한 것이고, 전후좌우 십면은 보살이 수행하는 계위(階位)인 10지(地)를 나타낸다. 이것은 중생의 11품류의 무명번뇌를 끊고 불과를 얻은 뜻을 상징한다고 한다
유물전시관
건칠보살 반가상-보물 415호
기림사 유물관에는 보물 415호로 지정된 건칠관세음보살반가상이 있다. 불상의 높이가 91Cm 이며 연산군 7년(1501년)에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예가 적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사진촬영금지라서 문화재청 사진을 가지고 왔습니다>
건칠불상이란 종이로 만들어 옻칠을 한 불상을 말한다 먼저 흙으로 불상을 만들고 불상의 표면에 마(麻)와 창호지, 회를 섞어 얇게 바른 뒤 마르면 표면에 다시 한지를 바르고 옻을 칠한 뒤 다시 한지를 붙이고 옻칠을 하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친 후 겉이 완전히 건조해지면 속에 든 진흙을 빼낸다. 그리고 그 위에 개금(改金)을 하여 불상을 완성한다. 건칠보살상은 속이 비어 있고 한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매우 가벼우나 습기에 약한 것이 단점이다
기림사의 건칠보살상은 머리에 상투를 올리고 그 위에 따로 만들어진 2단 구조의 보관을 썼는데, 관의 표면에는 아름다운 당초문(덩쿨무늬)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눈·코·입 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있고 귀는 짧으며 목에는 삼도가 없다. 양 어깨는 좁지만 가슴은 당당한 편이며 천의(天衣)를 걸첬는데 양어깨를 내려와 대좌 아래까지 흐르고 상의자락 역시 다리에서 그냥 아래로 내려온다. 목에는 3가닥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가슴 부분에 있는 독특한 띠매듭은 조선시대에 나무로 만든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왼손은 대좌(臺座)를 짚고 다리는 대좌 아래에 내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로 보아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전반적으로 얼굴 모습이나 체구는 당당한 편이나 손과 발이 작게 만들어져 비례감이 떨어진다.
보살상의 대좌에 홍치(弘治) 14년(연산군 7년, 1501)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묵서로 남아 있으며, 유례가 드문 건칠불(乾漆佛)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건칠이란 옻나무를 베어 불에 구우면 나오는 옻을 말하며 생칠은 옻나무에 흠집을 내어 나오는 옻을 칠하는 것을 말한다. 건칠불은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속을 빼낸 불상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는 예가 매우 적어 가치가 매우 크다.
기림사 소장 사리함
오종수(五種水)
기림사에는 옛날부터 전해지는 5가지의 샘물이 있는데 이를 오종수 혹은 오정수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고 구전(口傳)이 끊어져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3-4곳은 추정이 가능하다
빨간 원이 현재 우물이 있는 곳
? 명안수(明眼水) 안명수라고도 하는데 천왕문 앞 왼쪽 담장 아래 있는 우물이라고 한다. 이 물을 마시면 10리 밖의 과녁도 보일만큼 눈이 밝아진다고한다.
? 장군수(將軍水) 응진전(나한전) 앞 삼층석탑 아래에 묻혀 있다. 이 물을 계속 마시면 장수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물을 먹고 장수가 되면 혹시 반역자가 생길까봐 우물을 폐기하고 그 위에다 석탑을 옮겨 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도 고요한 밤 탑 밑에 귀를 기울리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 화정수(華井水) 기림사 경내 요사체의 마당에 있으며, 마실수록 마음이 편안해지고 고요해지며, 대중들이 이물을 마시며 정진하면 서로 화합한다고 한다.
? 감로수(甘露水) 감로암(북암)에 있는 감로수는 찻물로는 둘도 없는 석간수로서 이 물로 차를 끓이면 최고로 맛있는 차가 된다고 한다. 물빛이 우유빛이지만 일단 바가지로 뜨면 무색이 된다 . 감로암의 뒷켠 바위 아래에 있다
? 오탁수(嗚啄水) 지금은 없어졌지만 기림사 동쪽 개울 건너 동암(東菴)에 있었다고 한다. 까마귀가 바위를 쪼은 자리를 파 보았더니 물빛이 좋은 샘물이 나왔다고 전해지는 우물이다.
종무소 앞의 우물(안명수라고 전해진다) 삼천불전 앞의 우물
문헌과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기림사에는 오종수 외에 전단정이라는 물이 있는데 차를 우려내는 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다고 전해지는 샘물이지만 지금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스님들의 말로는 지장전(명부전) 바로 뒤에 있었던 우물이, 물이 고여 있을 때는 시리도록 파란 빛깔의 물인데 떠보면 파란색이 없어지고 물맛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우물이 아니었을까 추정을 하기도 한다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
매월당 김시습
생육신의 한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은 불교적 미신을 배척하면서 불교의 종지는 사랑과 자비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것이라고 주창하였다,
31세 때 경주 남산 용장골에 조그만 산실을 짓고 7년을 머물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으며. 이 용장사에 그의 사당이 있었다. 영조 44년(1768)에 부윤 홍술해가 사당을 개축하여 위판(位板)을 봉인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용장사에 있던 김시습 사당은 고종 5년(1868년)에 정부의 시책으로 헐리게 된다.
10년이 지난 고종15년(1878)에 이를 애석히 여긴 경주유림들이 기림사 주지스님에게 부탁하여 기림사로 옮겨 세워 초상(肖像)을 봉안하고 여기에 딸린 논밭을 함께 넘겨주었다.
기림사 경내에 있는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
최근(1996)에 매월당의 사당이 무너질 염려가 있자 경주유림의 요청으로 경주시가 시비를 들여 새로 사당을 지었으며 무량사 김시습 사당에 그려져 있는 영정을 모사하여 다시 봉안하였다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매월당 김시습의 사리 (원래 무량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시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기림사는 김동리 소설 '무녀도'에서 을화가 아들을 불제자로 만들기 위해 맡긴 곳이기도 하다
1,400년전 차(茶)와 더불어 창건된 우리나라 최고의 차 유적지 기림사
기림사는 1,400여년전 차(茶)와 더불어 창건된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차(茶) 유적지이다 기림사의 창건 설화에서 인도 수다라국의 왕과 왕비, 후궁들이 세속과 왕좌를 버리고 부처님을 예배공양하기 위하여 차 시중을 들며 불법의 세계에 귀의하였듯이 태자 안락국 역시 임정사를 짓고 부처님께 차 공양을 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기림사가 차공양, 차 문화와 함께 창건된 사찰이라는 것은 창건 설화와 기림사 뒤편의 차밭, 약사전 내벽에 그려져 있는 차공양 벽화가 대신 말해준다
약사전의 벽화-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그림
기림사의 차방
기림사 뒷편의 호암천 옆에는 기림사에서 가꾸는 차밭이 있고, 이곳에서 채취한 차를 신도들과 절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무료로 공양을 하고 있다. 누구든지 차실에 들어가 준비되어 있는 차를 마시고 담소를 나눌 수 있다.
차는 달이는 물에 의해서 그 맛과 효능이 천차만별이라고 하는데 차를 달이는데 있어서 그만큼 물이 중요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차(茶)를 달이는 물로는 오대산의 우통수(于筒水), 속리산 삼타수(三陀水) 그리고 기림사의 전단정, 오종수(五種水)가 가장 이름난 물이라고 한다.
기림사는 동해구로 나가는 중요 길목에 위치
기림사는 현재 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도로(국도 4호선)변에서 북쪽으로 약 5km나 떨어져 있지만 옛 신라시대는 경주에서 동해구로 나가는 중요한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고 죽어서 용이 되고자 했던 신라 문무왕의 장례행렬도 이 길을 따라 운구되어 동해수중릉에 안치되었다
지금은 보문호과 덕동댐이 만들어져 있지만 옛날에는 토함산에서 시작된 물길이 경주 북쪽을 흘러 형산강에 합류하는 하천이었다 경주를 떠난 마차는 이 하천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추령 고갯길에서 왼쪽 모차골로 방향을 틀어 수렛재를 넘어서 기림사를 거치고 감은사 앞을 지나 대왕암까지 이르게 되는 길이었다.
지금은 보문에서 추령터널을 지나 양북, 감은사로 길이 열렸지만, 당시엔 서라벌-보문호-덕동댐-추령계곡-추원마을-수렛재-용연폭포-기림사-대종천-감은사로 이어졌다고 한다 험난한 추령을 피해 비교적 완만한 골짜기로 들어가 수렛재를 넘고 다시 호암천 골짜기를 따라 동해구로 이어진 길이었다
모차골이란 이름은 마차가 다니던 길이라는 ‘마차골’ 에서 변형이 되었고 수렛재란 고개 이름도 수레가 넘어다녔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수렛재를 넘어 기림사 계곡으로 들면 수레를 끌던 말이 굴렀다는 말구부리가 있고, 장례행렬이 잠시 쉬어가며 손을 씻었다는 세수방이 있다.
용연(기림폭포)
거기서 좀 더 가면 용연(龍淵)이다. 용연은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비바람을 잠재우고 적을 제압하는 피리 만파식적과 옥으로 된 허리띠를 동해의 용으로부터 얻어 경주로 되돌아가던 길에 쉬어갔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682년 신문왕이 여기에서 용에게 받은 허리띠 한 조각을 개울에 넣으니 용이 되어서 승천하고 그 자리에 깊은 소와 폭포가 생겼다는 기록과 기림사 서쪽에서 점심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용연(龍淵)은 깊은 소(沼)와 폭포가 있어 이곳을 기림폭포로 부르기도 한다 . *********************************************************************************
기림사의 청건 설화
기림사에는 전해 내려오는 창건설화가 있다. 그만 임정사로 돌아가야겠습니다." |
출처: 토함산솔이파리 원문보기 글쓴이: 솔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