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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설계도를 펼쳐 놓고 하나 하나 정성을 다해 만든 포수가 있다면 바로 그라고 생각한다"
포수 출신 탬파베이 조 매든 감독의 눈에 비친 조 마우어(26·미네소타 트윈스)의 모습이다.
FA 시장에 나올 경우 역대 최고의 몸값을 받을 것으로 보였던 마우어는, 그러나 지난달 22일(이하 한국시간) 8년짜리 재계약을 동의함으로써 '더 많은 돈'이 아닌 '미네소타 유니폼'을 택했다.
이로써 마우어는 루 게릭과 화이티 포드(뉴욕 태생, 양키스 은퇴), 칼 립켄 주니어(볼티모어 태생, 오리올스 은퇴)와 배리 라킨(신시내티 태생, 레즈 은퇴)에 이어, 그 도시에서 태어나 오로지 그 도시 팀의 유니폼만 입고 은퇴하는, 역대 5번째 레전드를 향한 중요한 한 발을 내딛게 됐다.
프로 선수가 돈을 좇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냉혹한 프로 세계에서 돈은 가장 확실한 '보호막'이다. 팀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다 먼저 뒤통수를 맞은 사례는 부지기수다. 하지만 마우어에게는 돈을 넘어서는 더 중요한 가치가 있었다. 바로 고향 미네소타와 고향 팀 트윈스다.
야구와 사랑에 빠진 집안
마우어는 1983년 4월20일 미니애폴리스의 쌍둥이 도시인 세인트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폴 몰리터와 데이브 윈필드, 250승 투수 잭 모리스가 세인트폴 출신이다(모리스는 1991년 미네소타의 WS 우승을 이끌었고, 몰리터와 윈필드도 은퇴하기 전 미네소타에서 뛰었다).
마우어의 집안은 한 마디로 야구에 미친 집안. 할아버지와 그의 형제들, 아버지와 그의 형제들, 마우어의 형제들 모두 메이저리거에 도전했다. 어머니 역시 소프트볼 선수 출신으로, 어머니는 팀 동료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났다.
할아버지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나름 유망한 우투좌타 유격수였다. 1950년대 초반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싱글A 팀에서 뛰었던 할아버지는, 그러나 야구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무릎 수술을 받고 짧은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마우어는 할아버지로부터 프로 선수의 마음가짐에 대해 귀가 따갑도록 들으며 자랐다.
부모가 일을 나가면 마우어 형제들은 할아버지가 돌봤다. 마우어의 집안은 대대로 왼손잡이가 드문 집안. 마우어의 아버지도 우타자였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을 좌타자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지만, 유일하게 마우어 만이 좌타석에 적응했다. 꼬마 마우어가 좌타자 그립을 잡고 방망이를 휘두르자 할아버지는 이렇게 외쳤다. "만세! 드디어 우리 집안에도 좌타자가 생겼다."
이제는 흔들의자에 앉아 마우어가 사준 대형 TV로 미네소타 경기를 보는 것이 낙이라는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은 사심 가득찬 예언을 했다. "내가 테드 윌리엄스를 봐서 아는데, 우리 조에게서는 윌리엄스가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느껴져. 언젠가는 조가 꼭 4할을 칠 것이야."
둘다 미네소타 토박이로 트윈스의 열성팬이었던 부모는 메트로돔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집을 마련했다. 그리고 마우어가 걸음마를 떼자마자 손에 플라스틱 방망이를 쥐어줬다. 지금도 마우어의 부모는 기저귀를 차고 방망이를 휘두르는 마우어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 테이프를 소장하고 있다.
1987년, 미네소타는 22년 만에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올랐다. 표 3장을 어렵게 구한 아버지는 두 형을 데리고 경기장에 갔다. 마음이 몹시 상했던 네 살 마우어는 옷장 속에 들어가 형들이 올 때까지 울었다.
1991년 월드시리즈 6차전. 이번에는 고모네가 함께 가자며 표 2장을 줬다. 그러나 집에 아이 셋 만을 남겨둘 수 없었던 부모는 대신 두 형을 보냈다. TV에 영사된 커비 퍼켓의 팀을 구하는 캐치와 11회말 끝내기홈런은 마우어의 마음 속 깊이 새겨졌다. 8살 꼬마는 그렇게 미네소타와 사랑에 빠졌다.
이제껏 이런 포수는 없었다 ⓒ gettyimages/멀티비츠 |
조기교육을 받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전폭적인 후원 속에, 마우어 형제들은 하루종일 밖에서 야구를 했다.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겨울이 되면 지하실에서 '피클 게임'을 했다. 어머니에 따르면, 마우어 형제들은 그 흔한 비디오 게임을 한 번도 하지 않고 자랐다. 아버지는 특히 바깥쪽 낮은 코스를 치는 연습을 집중적으로 시켰다.
마우어가 9살 때, 아버지는 골프공이 비스듬히 놓인 파이프를 타고 내려오는 장치를 만든 후 '퀵스윙'(Quickswing)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언제 튀어 나올지 모르는 골프공을 치려면 짧고 재빠른 스윙을 해야만 했다. 이 덕분인지, 마우어의 스윙은 현역 메이저리그 타자 중 가장 짧고 간결하다. 린스컴의 투구폼이 그의 아버지의 작품이라면, 마우어의 스윙 역시 그의 아버지의 작품이다.
어린 시절 마이클 조던의 우상이 그의 친형이었던 것처럼(이에 조던은 '형의 반만이라도 하고 싶다'는 의미에서 형 등번호 45번의 절반인 23번을 달았다), 마우어의 우상도 큰 형 제이크였다. 항상 자기를 앞서는 (나이가 더 많았으니 당연했다) 형을 이기기 위해 마우어는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마우어를 전체 1순위로 뽑은 2001년, 미네소타는 대학 3부리그 팀의 유격수였던 제이크를 23라운드에서 뽑았다. 누가 보더라도 마우어를 위한 배려였다. 드래프트 후 마우어는 형과 함께 루키리그 팀으로 갔다. 18살 마우어는 .400을 쳤지만, 22살의 형은 .155에 그쳤다. 제이크는 이후 5년간 마이너리그에서 도전했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미네소타는 2003년에도 드래프트 지명을 받지 못한 둘째 형 빌리를 영입했다. 투수였던 빌리는 그러나 어깨 부상을 당하고 은퇴했다. 한편 제이크는 2009년 미네소타 루키 팀의 감독을 맡아 리그 최우수 감독이 됐다. 마우어는 지금도 형을 존경한다.
서로 커비 퍼켓을 하겠다며 싸운 두 형과 달리, 마우어는 좌타자인 켄트 허백을 좋아했다. 하지만 마우어에게 있어 가장 특별한 선수는 같은 리틀리그 팀 출신이자 고등학교 선배인 몰리터였다. 1996년 몰리터가 미네소타 유니폼을 입게 되자 마우어는 뛸 듯이 기뻐했다. 마우어가 매일 같이 야구장에 출석 도장을 찍은 그 해, 만 39세의 몰리터는 리그 최다안타 1위에 올랐다.
미네소타를 선택하다
1997년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마우어는 야구 미식축구 농구에서 모두 최고의 선수가 됐다. 농구에서는 평균득점이 20점을 넘는 가드였으며, 마지막 2년은 주 올스타에 뽑혔다. 하지만 마우어는 미식축구에서 더 출중한 기량을 발휘했는데, 쿼터백이었던 그는 들어오자마자 팀을 주 챔피언에 올려 놓았으며, 마지막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경기에서 1경기 7개의 터치다운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시즌 후 '올해의 고교 미식축구 선수'가 된 마우어에게 플로리다주립대, 애리조나대, 마이애미대, 미네소타대 등의 장학금 제안이 쏟아졌다. 마우어의 입학 동의를 이끌어낸 플로리다주립대는 "우리가 톰 브래디를 얻었다"며 환호했다.
2001년 졸업반 야구 시즌이 시작되자 마우어는 7경기 연속 홈런을 포함해 첫 11경기에서 10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이에 상대 팀들은 마우어와의 정면승부를 포기했다. 마우어는 .605 15홈런 53타점을 기록하고 '올해의 고교 야구 선수'가 됐다. 야구와 미식축구에서 동시 수상자가 나온 것은 마우어가 처음이었다.
지금도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은 마우어가 고교 통산 120여 경기에서 당한 삼진이 단 1개라는 것이다(통산 타율 .567). 2006년 미네소타 지역언론은 삼진을 잡아낸 투수가 누구였는지를 추적, 현재 펀드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는 폴 페이너임을 밝혀냈다. 처음에는 신원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했던 페이너는 "야구를 좋아하는 내 고객들에게 앞으로 괴롭힘 좀 당하겠다"며 머쓱해했다.
메이저리그 드래프트가 열린 당일 플레이오프 경기를 치르고 있던 마우어는, 선발 포수로 출장해 5회 동점 스리런홈런을 날린 후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5이닝 9K 무실점으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경기가 끝난 후 마우어는 미네소타로부터 1순위 지명을 받았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2001년 드래프트에서 가장 화제가 된 선수는 역대 최고의 대학 투수라는 평가를 받은 마크 프라이어였다. 하지만 미네소타는 마우어를 선택했다. 많은 사람들은 1983년 팀 벨처(1순위) 1993년 제이슨 배리텍(21순위) 1996년 트래비스 리(2순위)를 모두 놓친 미네소타가 겁을 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네소타의 테리 라이언 단장과 마이크 래드클리프 스카우팅 디렉터는 설령 프라이어를 잡을 돈이 있었어도 마우어를 뽑았을 것이라고 강변했다. 특히 마우어의 고교 경기를 100경기 가까이 직접 본 래드클리프는 '알렉스 로드리게스보다 더 뛰어난 선수'라는 믿음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2000년 드래프트에서 쓴 비용이 총 475만달러였던 미네소타는 마우어에게 515만달러의 입단 보너스를 줬다. 마우어는 이 돈을 5년에 거쳐 나눠 받기로 했다(나란히 1000만달러 안팎의 메이저리그 계약을 맺은 프라이어와 마크 테세이라는 각각 450만달러와 400만달러의 보너스를 일시불로 받았다).
객관적으로 마우어는 위험한 선택이었다. 마우어에 앞서 1순위 지명을 받은 포수는 1985년 B J 서호프가 마지막이었다. 특히 고교 포수는 1971년 대니 굿윈이 마지막이었을 정도로 포수, 고교 포수는 드래프트에서 가장 위험한 선택으로 간주됐다(굿윈과 서호프는 모두 포수로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연고지 지역 고교 선수를 전체 1순위로 뽑은 것도 축하할 일만은 아니었다. 앞서 지명을 받은 1971년 굿윈과 1973년 데이빗 클라이드가 모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4년 샌디에이고의 지명을 받아 역대 4번째 선수가 된 맷 부시도 결국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 못하고 은퇴했다).
게다가 마우어는 미식축구에서도 '꽃 중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백인 미남 쿼터백'이었다. 양키스로부터 큰 돈을 받았지만 결국 마이너리그 생활을 참아내지 못하고 미식축구로 돌아간 드류 헨슨처럼, 마우어도 미식축구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적지 않았다.
당시 미네소타의 형편은 대단히 좋지 않았다. 버드 셀릭 커미셔너는 시즌 후 2개 프랜차이즈를 해체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네소타는 몬트리올과 함께 가장 유력한 팀이라는 소문이 난 상태였다. 실제로 칼 폴래드 구단주는 사무국의 구단 해체 계획에 동의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무엇도 마우어의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이미 드래프트 전부터 '미네소타가 아니면 야구를 하지 않겠다'는 공언을 했던 마우어는 지명 다음날 도장을 찍었고, 고교리그 결승전이 끝나자마자 루키리그 팀으로 가기 위해 짐을 쌌다.
토니 그윈 이후 가장 정교한 타자? ⓒ gettyimages/멀티비츠 |
포수 타격왕
2002년을 싱글A에서 보낸 마우어는 8월에 시즌을 마감하는 탈장 수술을 받았다. 2003년 마우어는 상위싱글A 62경기에서 .335, 더블A 73경기에서 .341를 기록했다. 도루저지율은 50%를 넘었다. 마우어가 밀어치기를 너무 잘 한 나머지, 몇 몇 팀은 마이너리그 경기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시프트를 쓰기도 했다.
시즌이 끝난 후 마우어에게는 'BA 올해의 마이너리거'와 랭킹 1위 자리가 주어졌다. 마우어에게 안방을 맡기기로 결심한 미네소타는 주전포수 A J 피어진스키(현 화이트삭스)를 샌프란시스코로 보냈다. 이 트레이드에서 미네소타는 조 네이선과 프란시스코 리리아노를 얻는 대박을 터뜨렸다.
2004년 개막전. 마우어는 개막전에 선발 출장한 역대 5번째 20세 포수가 됐다(앞선 4명 중 2명은 자니 벤치와 이반 로드리게스다). 데뷔전에서 3타수2안타 2볼넷의 맹타를 휘두른 마우어는 2번째 경기 첫 타석에서도 안타를 때려냈다. 하지만 2번째 타석에서 파울 타구에 무릎을 맞고 교체되는 불운이 일어났다.
곧바로 부상자명단에 오른 마우어는 6월에 돌아왔다. 하지만 한 달 반 만에 부상이 재발, 결국 시즌을 마감했다. 35경기에서의 성적은 .308-369-570. 부상만 없었다면 역사에 남을 루키 시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2005년 첫 풀타임 시즌(.294 .372 .411)을 통해 충분한 경험을 쌓은 마우어는, 마침내 2006년 폭발했다. 특히 마지막 순간까지 데릭 지터와 치열한 타격왕 대결을 했는데, 마지막 경기를 남겨두고 마우어는 .346 지터는 .345였다. 그리고 벌어진 시즌 최종전. 메이저리그 12년차의 지터는 중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5타수 무안타에 그쳤다. 하지만 23살의 마우어는 4타수2안타를 기록했다.
마우어 .347, 지터 .344. 마우어는 메이저리그 역대 4번째이자 아메리칸리그 최초의 포수 타격왕, 그리고 메이저리그 역사상 처음으로 양 리그 통합 타격왕에 오른 포수가 됐다(이는 통산 2위만 2번을 한 지터가 가장 아깝게 놓친 타격왕으로, 다른 한 번은 1999년 노마 가르시아파라에게 밀렸다).
역사를 쓰다
2007년 마우어는 사두근 부상으로 109경기 출장에 그쳤고 장타율도 크게 떨어졌다(.293 .382 .426). 2008년 2번째 타격왕으로 분위기를 반전했지만, 타율은 .328로 NL 1위 치퍼 존스(.364)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2009년, 마우어는 그야말로 메이저리그 포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시즌을 보냈다. 3번째 타격 타이틀을 따낸 최초의 포수가 됐으며, 포수 최초로 2년 연속 타격왕이 됐다. 포수 최초로 타율-출루율-장타율 3개 부문을 석권했으며, 포수 최초로 2번째 ML 통합 타격왕이 됐다. 그리고 1936년 빌 디키와 1997년 마이크 피아자가 기록했던 .362의 포수 역대 최고 타율 경신했다.
1876년부터의 내셔널리그, 1901년부터의 아메리칸리그에서 나온 타격왕 타이틀은 총 243개. 이 중 포수가 따낸 것은 단 6개 뿐이다. 그리고 그 중 절반을 마우어가 혼자 따냈다. 다른 3개의 타이틀은 1926년 버블스 하그레이브와 1938, 1942년 어니 롬바르디에게서 나왔는데, 이는 선수들의 이동 거리가 크게 늘어난 이후 타격왕에 성공한 포수가 마우어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우어는 1999년 이반 로드리게스 처음으로 포수 MVP가 됐다(1977년 이후 MVP를 따낸 포수는 로드리게스와 마우어뿐이다. 로드리게스 때는 페드로 마르티네스와의 논란이 있었다). 투표권을 가진 시애틀 담당 일본인 기자가 미겔 카브레라를 뽑지만 않았다면 포수 최초의 만장일치 수상이었다.
2009년 마우어가 대반전을 이룬 부분은 특히 장타력이다. 마우어는 홈런 기록을 13개에서 28개로 늘렸고 2008년까지 통산 .457였던 장타율을 .587로 끌어올렸다. 똑같이 밀어치지만 이제 그가 밀어친 타구는 홈런이 된다.
마우어는 어떻게 이런 변신을 이룰 수 있었을까. 해답은 2008년 12월에 받은 신장 수술에 있다. 마우어는 어릴 때부터 신장 부위에 불편을 느껴왔고 이로 인해 만성적인 허리 통증에 시달려왔다.
2008시즌이 끝난 후, 마우어는 팀에게 수술을 허락해달라고 했다. 복귀 첫 타석 첫 스윙에서 홈런을 날린 후 마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이래 몸이 이렇게 좋은 적은 없었다." 대폭발은 이렇게 예고돼 있었다.
단판승부에서 승리한 후 그라운드를 도는 마우어 ⓒ gettyimages/멀티비츠 |
미네소타에 남다
마우어는 최정상급 타자이자 포수, 그것도 뛰어난 수비력의 포수인데다가 <잘생기고 예의 바른 백인선수>라는 매력까지 있었다. 팬들의 절대다수가 백인인 메이저리그에서 칼 립켄 주니어와 같은 이런 이미지는 엄청난 장점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나란히 새로운 포수를 구해야 하는 양키스와 보스턴이 한판 대결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마우어의 연봉 기록 경신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마우어는 FA 시장에 나서 자신의 몸값을 테스트해 보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고 미네소타의 8년간 1억8400만달러(연평균 2300만달러) 계약을 받아들였다. '미네소타가 아니면 야구를 하지 않겠다'던 10년전 마음은 달라지지 않았다.
칼 립켄 주니어, 크렉 비지오, 토니 그윈, 에드가 마르티네스 등은 더 많은 돈을 뿌리치고 한 팀과의 의리를 끝까지 지킨 위대한 선수들이다. 하지만 이들에게도 '메이저리그 최고 연봉'이라는 유혹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로써 미네소타 팬들은 1996년 하루 아침에 커비 퍼켓을 잃었던 것과 같은 고통을 피하게 됐다. 한 팀에서 팀내 최고 실력의 선수, 클럽하우스의 리더, 팀내 최고 연봉자가 모두 동일인물인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모든 장기 계약이 그렇듯, 마우어의 8년 계약 역시 위험하다. 특히 선수 생명이 짧은 포수이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하지만 올해가 만 27세 시즌인 마우어는 계약 마지막 해가 되더라도 만 35세다. 요기 베라, 자니 벤치 등 생각보다 빨리 마스크를 벗은 선수들도 34세 시즌까지는 풀타임 포수로 활약했다.
거대 계약은 팀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다. 2000년 겨울에 했던 텍사스의 오판은 알렉스 로드리게스 1명 만으로도 우승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은 것이었다. 로드리게스가 했던 착각 역시 텍사스가 자기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고서도 계속해서 큰 돈을 쓸 수 있다고 믿은 것이었다.
반면 미네소타와 마우어는 이 계약에 발목을 잡히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현재 미네소타는 28년 만의 새 구장 개장과 마우어 효과가 합쳐져 큰 흥행 돌풍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으며, 저스틴 모어노, 조 네이선, 마이클 커다이어 등의 주력 선수들을 장기 계약으로 잡아놓은 상황이다. 또한 새 구단주는 아버지와 달리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미네소타가 마우어의 이번 계약에 '추후 지급'을 전혀 넣지 않은 것은 그 만큼 자신이 있다는 증거다).
1991년, 8살 마우어는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월드시리즈 우승 퍼레이드를 보며 트윈스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먼훗날의 자신를 상상했다. 2010년, 트윈스 유니폼을 입고 있는 27살의 마우어는 또 다른 상상을 하고 있다. 20년 전, 바로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꼬마들에게 똑같은 꿈을 선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