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錦溪先生文集卷之八 外集
자양서당기
도가 천지 사이에 있어서 혼륜(渾淪)하고 웅장하여 한 순간도 없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의탁해서 세상에 전하였으니, 한 때 교양의 득실로 인해 혹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한 차이가 있어서 이 때문에 학교를 설치하여 도를 닦는 가르침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세도(世道)가 쇠미하고 학교가 닳아 해져서 이름만 있을 뿐 실상이 없었다. 게다가 시끄러운 성시(城市)와 가까워 율령이 구애됨을 면하지 못하니, 고상(高尙)한 선비들이 탐탁찮게 여겨 세속과 멀리 떨어진 운림(雲林)으로 자취를 의탁하여 성현의 뜻을 연마하며 궁구하여 호탕(豪宕)하고 강대(剛大)한 기상을 발휘하여 이 세상을 윤택나게 하게 후인을 이롭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 서당을 지은 목적은 선비가 학문하여 처음 벼슬에 나아가는 기초가 되고 또한 국가가 사문(斯文)을 높이는 날에 보탬이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내 친구 영양(永陽)에 사는 김군(金君)이 젊은 시절 학문에 뜻을 두어 사림에 추대를 받았으나 연이어 유사(有司)에 떨어져 우울하게 뜻을 얻지 못하고 명산(明山) 남쪽으로 물러나 살면서 수죽(水竹) 간에 집을 짓고 여러 해 동안 은거 수양하여 그 시행을 확대하려고 했다. 이에 동네 사람 정윤량(鄭允良)군 등과 도모하여 일을 돕고 힘을 내어 이의서재(李椅書齋) 옛터에 서당을 건립하기로 하고 그 좁은 터를 개척하여 그 규모를 넓혔다. 경술년(1550, 명종5) 가을에 일을 시작하여 그 다음해 봄에 손을 떼니 서당이 제 자리를 잡았다. 주방과 창고도 차례로 지어 모두 10칸 남짓이었는데, 음식 대접하는 밑천과 들어가는 비용은 모두 사적으로 취했지만 쓰는 것은 공적으로 하니, 유학(游學)하는 선비들이 모두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이에 강습을 일과(日課)로 삼고 약조(約條)를 규정하여 경동(警動)하고 분발하여 그 학업을 이루도록 했으니, 무릇 시행하고 조처한 것이 모두 여유로워 고인의 풍모가 있었다. 이에 임자년(1552, 명종7) 봄에 동네 사람들을 모아 낙성식(落成式)을 하였는데 몸소 맞이하고 간청(簡請)하여 내도 즐겨 나아갔다. 시골 노인들과 동네 어른들이 사양하며 줄줄이 잇고, 젊은 선비들이 나란히 서니, 또한 문채가 나는 모습이 볼품이 있었다. 당(堂)에 올라 바라보니, 위세가 시원스럽게 툭 트이고 기상 청명하였다. 겨울에는 온돌방이 있고 사랑스런 햇살이 창을 데워주며, 여름에는 서늘한 난간이 있고 맑은 회오리바람이 걸상을 씻어주었다. 바위 위에서 시를 읊고 바람을 쏘이며 호연(浩然)하게 갱슬(鏗瑟)하던 일을 생각하고, 대(臺) 가에서 옷자락을 떨치며 고기를 구경하는 즐거움을 자득했다. 흐르는 물을 당겨 섬돌을 감돌게 하여 해마다 만경(萬頃)의 황운(黃雲)을 적시고, 산을 빙 둘러 난간을 감돌아 날마다 천첩(千疊)의 취병(翠屛)을 대한다. 연못에 주무숙(周茂叔)의 연꽃이 피고, 지름길에 도연명(陶淵明)의 국화를 심으며, 높이 자라 서 있는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와 길게 자라 뻗은 백 장대의 대나무에 이르러서는 일당(一堂)의 좋은 감상거리이고 사시(四時)마다 경관을 달리하여 편안히 쉬고 한가로이 노닐기에 적합하니, 또한 호해(湖海)의 기상을 발휘하기에 충분하다. 또 자양(紫陽)은 바로 우리 문공(文公) 주자(朱子)가 향기를 남긴 곳이다. 이 고을이 계림현(鷄林縣)이었는데 자양(紫陽)으로 이름한 것이 몇 백 년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잡초가 우거진 야전(野田)을 동우(棟宇)로 바꾸고 자양(紫陽)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어찌 문명(文明)의 운(運)을 기다림이 있고 그 사이에 운수가 존재함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술이 반쯤 취해 제생을 불러 술잔을 잡고서 말하기를 “삼대(三代)의 학교는 모두 인륜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졌다. 19대 우주 사이에 도학을 전한 것이 성대하기도 하고 쇠잔하기도 하니, 치란이 이처럼 끊어지지 않는다. 도가 하루라도 행해지지 않으면 인류가 하루 만에 다 없어지니,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이유는 집은 집답고 나라는 나라답기 때문이니 공(功)의 초래한 이유를 알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향당의 학교는 현관(賢關)과 비교하면 미약한 듯 하지만 궁벽한 시골의 만진(晩進)으로 문왕을 기다려 일어나는 사람은 반드시 몽인(蒙引)하는 부지런함에 힘입어 일어나 성취하는 바가 있으니, 모든 기술자가 공장에서 일을 완성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호안정(胡安定)이 호소(湖蘇)에서 교육을 베풀어 명공(名公)이 배출되었고, 이발(李渤)이 여산(廬山)에서 학교를 창설하여 문교(文敎)가 울창하게 일어나 한 때 사람을 만드는 효과 도리에 국학보다 넉넉함이 있었으니, 가르치지 않는 사람이 없고 학문을 하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어찌 옛날 가숙(家塾)이 남긴 뜻이고 밝은 시대를 위해 낙육(樂育)하는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강학은 도를 밝히기 위한 것이고, 도를 밝히는 것은 치용(致用)하기 위해서이다. 은거하여 그 뜻을 구하고 의리를 행하여 그 도를 통달하는 이것이 사군자(士君子)의 소중한 포부이고 커다란 기탁(寄托)이다. 그런데 지금 유자(儒者)가 된 자는 이미 이와 반대이니 도와 학을 갈라서 두 가지로 삼는 것을 면하지 못해 전주(箋註)를 주워 모아 입과 귀로 기송(記誦)하는 것만 학(學)으로 삼을 뿐, 성인이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한 뒤 여력이 있으면 학문한다는 뜻을 까마득히 살피지 못하고, 아름답게 문장을 다듬고 잠꼬대하듯 제멋대로 날고 달리는 것만 문장으로 여겨 이른바 영화(英華)가 밖으로 드러난다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문장을 아득히 생각하지 않으니, 존심(存心)의 의리의 분변에 어둡고, 발신(發身)이 진취의 계산에 급급해 곤궁한데 처해서는 자신을 지키는 행동이 없고, 세상에 나아가서는 쓸만한 실상이 없다. 더구나 중화위육(中和位育)의 공을 미루어 백성과 만물이 지극히 다스려지는 은택을 입게 하기를 바라는데 있어서이겠는가? 배우고서도 이와 같은 자는 천한 장부(丈夫)가 녹(祿)을 구하고 이익을 노리는 자질일 뿐이고 진실로 학당(學堂)을 지어 저양(貯養)하는 뜻이 아니니 또한 어찌 이것이 큰 걱정거리가 아니겠는가. 지금 사방에 걱정이 없어 몸에 투구를 매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기르는데 있어서 이미 배불리 먹어 즐거워한다. 세상에 남자로 태어나 학문을 버리고 무엇을 하겠는가? 덧없는 세월이 흘러 늙게 되었으니 사업은 때에 맞게 하는 것이 귀하고 행실은 스스로 힘쓰는 것이 마땅하거늘, 더구나 교육을 창도하는 그 적임자가 있고 유유자적하며 지낼 그 알맞은 곳이 있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선을 사모하는 것이 그 천성에서 나왔으니 영천 사람 같다.
또 정문충(鄭文忠정몽주의 시호)이 옛날 살던 곳이 5리쯤에 있었는데, 군인(郡人)이 사사로이 묘우(廟宇)를 세워 선비들이 바람을 향하고 덕성을 훈도하는 바탕을 삼았으니, 진실로 이미 그 위대함을 알았던 것이다. 군(群)에 지낼 때 이 당(堂)에서 시습(時習)하여 함유(涵濡)하고 갈고 닦는 방도를 다하여 포은(圃隱)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고 자양(紫陽)의 적통(嫡統)을 전했으니 중흥을 자임하는 호걸(豪傑) 중에 어찌 그 적임자가 없겠는가? 장차 눈을 비비며 기다리겠다.” 하니, 제생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김군(金君)이 종이 한 장을 전하며 후학자의 규범을 삼기를 청하였다. 내가 사양했으나 되지 않아 대략 진말(眞末)을 서술하였다.
김군의 이름은 응생(應生)이고, 덕수(德秀)는 그의 자(字)이다. 기유년(1549, 명종4) 사마시에 합격했다. 정군(鄭君)도 오천(烏川) 출생이고 포은(圃隱)의 족손(族孫)으로 문충공의 임고서원(臨臯書院)을 주영(主營)함에 또 돈을 내어 일을 도왔다. 모두 선을 즐기고 선비를 사랑하여 은근히 인륜을 두터이 하고 풍속을 이루는 뜻이 있었으니 이 한 가지 단서를 보면 그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
가정(嘉靖) 임자년(1552, 명종7) 봄에 쓰다.
[원문]
첫댓글 명산할배 절친이셨던 황준량 선생의 자양서당기입니다. 조선시대 초등교육기관 연구하시는 분들 필수 코스이며, 첫째 문장 "도가 천지 사이에 있어서 혼륜(渾淪)하고 웅장하여 한 순간도 없어진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에게 의탁해서 세상에 전하였으니, 한 때 교양의 득실로 인해 혹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한 차이가 있어서 이 때문에 학교를 설치하여 도를 닦는 가르침을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 학교교육의 필요성을 우주적 관점에서 이렇게 잘 쓴 문장은 드뭅니다. 아주 훌륭한 명문이지요. 가끔 인용하시는 분들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