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영 [右水營]은 어떤 곳인가
우수영은 우도 수군절도사영 의 줄인말입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는 전라도와 경상도에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는 주진을 각 각 두 곳씩 설치하였다. 서울에서 볼 때 각 도의 서쪽편, 즉 오른편을 담당하는 주진을 우수영, 동쪽편, 즉 왼편을 담당하는 주진을 좌수영이라 하였다.
우수영은 조선조초 무안 대굴포(大掘浦)의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에 있다가 세종 22년 (1440년)에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해남으로 옮겨졌다. 그 후 세조 10년에 절도사영으로 승격되었다가 1907년 군대해산으로 각도의 수영은 모두 해체되었다.
**(467년 동안 우수영이 군사요충지 였다.)**
우수영의 관원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지금의 함대 사령관 정도)와 중군(中軍)(수군절도사에 버금가는 관직으로 군량미를 관리하였고 임기는 2년이었다.)이 한명씩 있었다.
사진설명 : 명량대첩기념공원
우수영 밑에 속읍이 있었고, 그 아래 속진이 있었다.
속읍(屬邑)으로 나주, 영암, 진도, 영광, 해남 등을 두었고, 속진(屬鎭)으로 법성포, 군산, 고군산, 위도, 임하도, 고금도, 가리포, 금갑도, 어란포 등은 거느렸을 만큼 규모가 큰 곳이다.
또한 본영(本營)과 속음진의 배 130척을 관할 하였고 복파관, 망해루 등의 정자가 있어 해상을 관망하는 기지로 삼았다.
한학의 역학(譯學) 1명과, 왜학의 역학 1명을 두었다. 군사는 수군장졸의 병력1085명. 부산 경상좌수영, 충무 경상우수영, 여수 전라좌수영, 그리고 해남 전라우수영 그외에도 충남 보령, 경기 강화에 수영이 있었으나 모두 흔적들이 없어져 복원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충무공의 접전지였던 우수영에는 성벽(城壁)들이 남아 장엄한
해군사령관의 위엄을 드러내고 있다.
망해산과 연결되는 북상재의 토성(망해산과 북상재 사이에 북문이 있다.
우수영성지는 문내면 동외리 석축과 망해산(望海山)의 토축이 혼합된 튼튼한 성이었다.
지금도 동서남북 4대문의 흔적들이 남아 그 때의 모습을 아스라히 떠올리게 한다. 당시 성의 둘레는 2,484척, 옹성(甕城)이 4개, 연못이 하나, 우물이 2개이며 태평정이 있고 동문밖(지금의 남자노인당 자리)에 충무공의 승첩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충무리로 옮겨있다.
사진설명 : 울돌목에 놓여진 진도대교(외다리 였던것이 2005년에 쌍다리가 완공됐다)
우리가 망쬐라고 하는 곳은 망해산(望海山)의 망대(망해루)로 바다를 망보던
곳이고,
사진설명 : 망해산의 망해루(망대, 망쬐)
울돌목은 똘이 우는 목이라 해서 울돌목(명량 鳴梁)
동쪽밖을 동밖에-돈밖에(동외리), 남쪽밖을 남밖에(남외리), 서문밖을 섬밖에
(서외리), 동쪽문안을 동문안(동내리),라고 하였고, 이충무공의 이름을 따서 충무리, 피섬(피로 바다와 섬이 물들었다하여 피섬), 우수영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무기창고가 있던곳이라 하여 무고리이다.
전라우수영성지는 지방기념물 제139호 (92.3.9)로 지정된 곳이다.
조선조 세종 8년(1426년)에 설치 고종 32년(1895년) 폐쇄까지 약 500여년 동안 우리나라 서남해안을 지켜온 해군기지이다.
사진설명 : 동여도 의 전라우수영
우수영성지의 위치는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 1161외이며 시대는 조선시대(1927) 전라우수영의 설치는 고려말 우왕 3년(1377) 무안 당곶포에 수군처치사영(水軍處置使營)이 설치된뒤 세종 22년(1440) 해남 황원곶(현 위치)에 이를 이설, 세조 11년 (1465)에 수군절도사영으로 승격·개편되었다.
성종 10년(1479) 순천 내례포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후부터 전라
우도 수군절도사영(약칭 전라우수영)이라 칭하게 되었다.
영역은 원문내 남북 길이 10리, 동서 너비 5리이었다. 영성(營城)은 석축 둘레
3,843척, 높이 11척, 여첩 607개, 호지 3개소가 있었다.
『전라우수영지』(1787)에 의하면 영내의 민호는 620호,
수군 장졸의 병력은 1,085명을 보유하였다.
한편 본 영의 관할구역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었으나 임란 이후부터 한말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나주,영광,함평,무안,영암,해남,진도 등 7관을 속읍으로
관내의 속진으로는
금갑도,남도포,어란진,고금도,신지도,마도진,목포진,이진진,다경포,법성포,임치진,지도진 ,주도진,금모포,고군산,선산진,흑산도,청산진,가리포 등 19진이 우수영의 관할구역에 속했던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전라우도 연해지역 14관을 관할하였을 만큼 전시에 있어서 본영의 군사적 규모와 역할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전라우수영의 군비로는
관사로서 내아 제승당 등 26개소의 각종 당청과 중요시설로 선청과 집회소 또는 회의장소로 이용된 12개소의 누정이 있었다. 중요시설로 선창을 두었는데,
성남문밖에 석축으로 만든 4개소의 항구 시설이었다.
군선으로는
전선 2척,귀선 2척,해골선,방골선이 각 1척,병후선 8척 등 모두 17척을 보유, 여기에 사부,화포수,타공,웅고,기라졸 등의 수군을 배치하였다.
수군절도사는 무관 정3품이었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 본영의 수사 김억추는 통제사 이순신과 더불어 명량대첩 을 거두었는데, 명량은 본영 선창으로부터 불과 5리도 떨어져 있지않은 급조류의 해협의 천험의 관방을 이룬 곳이다.
우수영의 축성은 설치 위치로는 해안성, 축성재료로는 토성과 석성의 혼합성,평면형태로 사각형과 원형의 중간형태인 부정형성, 축성방법으로는 편축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성돌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아랫쪽은 150㎝ 이상이 되는 것들도 있으나 올라가면서 50㎝에서 30㎝정도로 작아진다.
<참고문헌> 명량대첩 기념공원, 해남군
잘못된 부분이 있을 땐 지적해 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이글의 원저자 이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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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 공부했읍니다
잘보고가네요그리운고향을감사하네요----
좋은 자료 고맙습니다
중요한 고향정보 감사하게 잘 보았습니다.
전라우도 수군절도사영에 대하여 좋은 사료를 올려 감사 함니다
자세한 우수영의 역사를 이곳에 올려줘서 자료로 활용하겠습니다.
잘못된곳 없나 모르겠어요 선배님
북상제와 망해산 즉 망제 의 성은 토성만이 아니고 내가 우수영초등학교 4학년때 망제와 북상제 성터에서 돌을빼 우수영초등학교 뒤쪽 담장에 날르는 사역을 이용효교장이 시켜서 4학년이상 6학년까지 성곽 돌을
빼 날랐고 이후 주민들도 이를 본따 빼가서 지금처럼 토성 흔적만 남았습니다 참으로 큰 죄들을 저지른것이외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