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강연
동요문학의 변천에 관한 연구
麻營 김철민 (본회 부회장, 통영도산중학교장)
● 1969년 중앙대 보육학과 아동문학강의를 하는 윤석중 선생님 밑에서 아동문학을 배우기 시작
● 1971년 교사로 부임후 1989년 까지 일간신문 및 어린이 신문, 잡지 등을 통해 동시 ,동화를 발표
● 1990년 아동 문학 연구 동시 신인 문학상
● 1992년 월간 아동문학 동시 신인 문학상
● 1999년 자유문학 청소년 시인상
● 교육장, 교육회장, 교육감, 교육부장관표창 대한 체육회장상, 한국청소년연맹 총재상, 국무 총 리표창, 국가전문행정연수원장상, 교육연공상, 공로상
● 한국아동 문학회 지회장 상임이사 엮임, 경남교육청 인성교육 단장 엮임
● 21세기 한국문학인 협회 부회장 엮임, 경남 문인 협회 이사 ,감사 엮임
● 한국아동문학연구회 경남지회장, 풀꽃아동문학회 이사 부회장 엮임
● 현재 한국아동문학회 부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이사, 한국문인협회상벌위원, 김영일아동문학상 운영위원장, 통영 도산중학교 교장
● 동시집: 「고향길」,「별과 등대와 꽃편지」,「소꿉친구랑 얼굴웃음」
● 시집: 「언제나 내게 소중한 당신」
● 위인집:「쿠베르탱」
● 상
<동시집> 한국아동문학작가상, 한국아동문학창작상, 영남아동문학상 해강아동문학 상, 경남우수문학작품상 ,
<시집> 자유문학청소년시인상, 21세기문학상본상, 세계계관시인통일본상, 고려문학 상
(교육) 2002년 한국교육공로상, 2008년 한국사도대상, 2009년 남강교육상
동요문학의 변천에 관한 연구
Ⅰ 서론
동요란 아동가요의 준말로 일반적으로 어린이가 부르는 노래로 정의(한용희:동요작곡가) 그러나 단순히 어린이들만의 노래가 아니며 어린이의 마음을 지녀야 하는 우리 모두의 노래(유경한: 시인 아동문학가)
동요는 어른들의 마음의 고향이요 상실된 실낙원을 회복시켜주는 노래인 동시 어린이들의 감성과 마음을 풍요롭게 만들며 꿈을 키워주고 어른이 되어도 노래와 함께 삶의 태도와 양식을 결정하게 해준다.
따라서 동요와 동시는 넓은 의미로 시의 범주에 속한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시 분야의 동요는 전래동요와 창작 동요가 있고 전래동요에는 다시 구전 동요와 정착동요가 있다. 동시에는 자유시형과 산문시형 동시가 있으나 동요와 동시를 엄격히 구분한다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동요는 어린이들의 세계에서 모든 사물과 자연의 생명을 불어넣고 그것들과 대화하는 꿈의 세계임을 짙게 의식한다. 의인화의 수법은 유아나 아동독자들에게 가장 친근하게 이해되고 즐거움을 주는 가장 빠른 방법과 표현 수단이기 때문이다.
동요는 작곡을 거쳐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 까지 불려짐으로써 폭넓은 대중성을 갖고 있다. 우리나라 동요의 탄생은 1923.6.10일자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옮겨보면 동요에 관하여 진장섭, 동요에 관한 실제론(1) 윤극영(2) 정순철 강연을 하고 윤극영 선생님을 이 자리에서 어린이들이 즐겨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우리 동요를 지어내자고 주장해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1) 동요와 동시의 구분
동요와 동시는 다같이 노래의 성질을 띠고 있으나 동요가 그 미를 밖으로 표출하고 일정한 양식아래 노래 부르는 것을 전제로 한 음악적 , 시적 미를 지향하는데 반해 동시는 그 미를 안으로 모아들여 자유분방하게 표현하며 작가의 내재적 리듬을 중요시 하여 회화적인 미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이재철은 말한다.
2) 동요의 특성
동요란 어른이 어린이를 위해 지은 것이든 어린이 자신이 지은 것이든 노래 부를 것을 전제로 지은 시라고 한다.
첫째, 선명한 리듬과 정형률 바탕에 이루어져 흥겹고 음악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둘째, 내용이 짧고 표현이 직접적이다.
셋째, 내용 전달과 표현이 강하다.
넷째, 폭넓은 대중성을 갖고 있다.
오늘날 이원수의 (고향의 봄), 윤극영의 (반달), 김영일의(다람쥐) , 윤석중의 (달맞이)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따라서 박춘식은 동요는 선명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형태의 노래로 불려질 수 있는 성질을 가진 점과 내용이 소박하면서 복잡하지 않은 점을 특징으로 제시하고, 또 박목월은 동요를 노래하는 것 또는 부르는 것이 위주가 되는 것이고, 동심을 주축으로 노래 부를 목적에서 창작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동요문학은 1920년대 한국동요문학을 결정적으로 꽃 피우게 한 인물이란 점에서 영원히 중요한 존재로 평가해야한다. 따라서 1920년대의 동요문학은 작곡의 의미가 결코 배제될 수 없는 그 시대 특유의 성격을 갖고 있음을 동시에 발견해야한다고 말했다. 즉 아동문학이 동요문학을 모태로 하고 있음을 그대로 입증케 하는 것이다.
1924년 윤극영 선생님은 우리나라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동요<반달>을 작곡하고 ,이어 한국최초의 동요 단체인 (다알리아회)를 조직하고 일제 식민지하에서도 꿋꿋하게 우리 겨레의 가슴속에 이어져 내려옴으로써 우리 민족의 운명과 같이해 오고 용기와 희망을 주었으며 1924년 그 무렵 민족대표33인 한분인 손병희선생의 사위 방정환님이 주간으로 계시는 신여성과 어린이 잡지에 동시 동요가 많이 발표되고 그 우수작품을 택해 작곡을 했다. 진남포에 사는 한정동님의 <따오기>는 동아일보의 신춘문예당선작이고 작곡도 이 무렵이었다.
윤석중 선생님은 초등학교 다니던 때부터 동요 동시를 발표하여 우수한 문학가라 평판을 얻었다.(1925. 동아일보)
<설날> 윤극영 작사․작곡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깨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 이래요
곱고고운 댕기도 내가드리고
새로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반달> 윤극영 작사․작곡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 바다 건너서 어디로 가니
멀리서 반짝 반짝 비치는 건
샛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오늘날까지도 널리 애창되고 있는 이 설날 노래는 바로 그가 귀국한 1924년 음력 섣달 그믐께 작사 작곡을 하고 윤극영 선생님의 불멸의 대표작 반달도 이 무렵에 선을 보였다. 반달은 당시 나라를 잃고 끝없이 유랑하는 우리민족의 슬픈 마음을 달래고 갈 길을 찾자는 노래로 이 동요는 한 맺힌 민족사의 한 기록이다. 특히1절은 고요히 움직이고 2절은 감정이 약간 들어갔으나 샛별 등대란다가 최근에 샛별이 등대란다‘’이‘’자가 추가되어 자칫 고조된 감정이 죽을 염려가 있었으나 윤형모학생이 고조된 감정을 잘 살렸다 그리고 희망을 제시해준 대목이었다.
반달이 태어날 무렵 -1920년대-에는 박태준 ․ 홍난파 ․ 한정동 ․ 윤석중 ․ 이원수 ․ 최순애 선생님 등이 동요창작에 참여하여 창작동요의 <개척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신춘문예 작품 모집에도 아동문학 장르가 추가 동요를 통해 겨레의 가슴에 아동문학이 부각되면서 매스컴들은 아동문학 작품의 소개와 지면할애도 아끼지 않았으며 윤극영 선생님이 한국 아동문학상에 남긴 공헌은 비록 작곡활동위주였다 하더라도 동요 문학을 결정적으로 꽃 피우게한 인물이라는 점을 영원히 중요한 존재로 평가해야한다.
이후, 1930년대의 <황금시대>와 1940년대의 <암흑시대>격변하는 한국의 근대현대사 속에서도 꾸준히 맥을 이어 어느덧 85여년의 역사를 갖게 되고 이후 광복과 함께 1950년대의 <전성시대>를 거쳐 , 1960년대의 <혼란시대>등 변화되고 , 1970년대의 <가치관정립시대>, 1980~90년대의 <다양화 시대> 특히 80년대부터 불기시작한 동요의 다양화운동은 우리나라 동요문학에 있어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고, 2000년대의 <도약의 시대>에 이르렀다.
<따오기> 한정동 작사 윤극영작곡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 소리 처량한 소리
날아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드뇨
내 어머니 가신나라 해 돋는 나라
잡힐 듯이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따옥따옥 따옥 소리 구슬픈 소리
떠나가면 가는 곳이 어디메드뇨
내 어머니 가신나라 달 돋는 나라
한정동 선생님은 몰라도 따오기 노래는 40살 이상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동요는 평양고보 다니던 17살 때 어머님의 산소를 찾아가서 어머님을 잃은 슬픔으로 쓴 동요이다.
<고향의 봄> 이원수 작사 홍난파 작곡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1925년 어린이지 10월호에 이원수님의 고향의 봄 당시 초등학교 6학년 나라를 빼앗긴 어둠과 아픔이 서정을 바탕으로 표출되고 있다.
이 시대에 어린이 문화운동의 별 윤석중 선생님은 빼놓을 수 없다. 아동 문학가 1932년 우리나라 어린이 노래 가사로서의 동요 창작과 어린이 노래 보급에 크게 기여하고 동요계의 일인자로 최초의 동시집 <잃어버린 댕기>와 최초의 동요곡집<윤석중 동요집>간행을 통한 한국 현대 아동 문학의 작품도 그만큼 역사적 기록의 가치를 빛낼 수 있고 선구적 족적을 남기시고 1990년 팔순기념 동요집<여든살 먹은 아이>로 KBS동요대상을 받았으며 창작동요85년 역사가 흐르는 동안 동요 작곡가들은 대부분 윤석중 선생님의 동시에 곡을 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나 향년 92세 2003년 12월 9일 윤석중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새나라어린이> 윤석중작사․박태준작곡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일어 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새나라의 어린이는
서로서로 돕습니다
욕심장이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1932년대 동요의 황금시대를 맞아 아동 문학가 김영일, 강소천, 박목월, 이은상, 목일신, 김태오, 김성도 선생님께서 좋은 동요 가사를 지어 방정환 선생님이 주간했던 어린이 잡지 외에도 신소년 , 아이생활은 기독교계통에서 발행한 잡지에도 아동 문학가들의 작품이 많았다.
특히 김영일, 목일신, 강소천, 박경종,임인수 선생님은 1930년대에 아이생활에 동요동시를 발표했으며 1933년 통딱딱, 통짝짝을 어린이지에 처음 발표해 동요 문학의 첫 발을 디뎠으며 일제하에서 아동문학의 창작활동 무대는 어린이 잡지 (어린이, 아이생활, 신소년 )등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는 어린이 특집란을 만들어 우수한 동요 문학 창작의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특히 1933년 경성 교육 보육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후 본격적인 동요작곡에 힘 쓴 이흥렬 선생님과 작가로는 노산 이은상 선생님의 꽃동산 그리고 연세대 음악교수인 현제명 동요작곡집이 출간되었고, 1934년 연세대학교 졸업반인 김성태 작곡가는, 김영일 작사 방울새와 윤석중 작사의 뱅글뱅글 돌아라, 김성도 작사 강아지래요 동요곡집을 꾸몄다. 또 36년 평양 숭실 전문학교 졸업반 때 목일신 작사 누가누가 잠자나, 김영일 작사 물새발자국 노래도 이때에 작곡 하였다.
그리고 김대현 선생님은 함흥 영생고등 보통학교 동기 동창생으로 아동문학가 강소천 선생님의 동요를 많이 작사 해 주었으며 후에 김영일 선생님의 유명한 한국의 자장가도 김대현 선생님께서 작곡을 하여 세계적인 갈채를 받아 71년 경향신문에 전면에 소개된 적도 있다. (71년 경향신문)
<닭> 강소천작사․ 이계석작곡
물한모금
입에물고
하늘 한번
쳐다 보고
단 한모금
입에물고
구름 한번
쳐다보고
<자장가> 김영일 작사․ 김대현 작곡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소록소록 잠잔다
하늘 나라 아기 별도 엄마품에 잠잔다
둥둥 아기 잠자거라 예쁜 아기 자 장
우리아기 금동아기 고요고요 잠든다
바둑이도 짖지마라 곱실아기 잠깰라
오색꿈을 담뿍안고 아침까지 자장
Ⅱ 자유시 운동의 첫 걸음
김영일은 1930년 초에 <반딧불>과 <방울새>란 동시를 갖고 문단에 나왔다. <반딧불>은 매일 신보에 ,<방울새>는 아이생활에 당선된 작품이다.
일제 때에는 일본 사람의 억압 밑에 우리네 생활은 비참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 정든 고향에서 못살고 만주 등지로 쫓겨가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고, 살기가 어려우니 글을 쓴다는 것은 한가한 사람이나 하는 일로 여겨지거나, 특수층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더구나 글을 쓴댔자 돈벌이가 되는 것도 아니고, 일본 경찰의 눈총만 받게 되니, 문학을 하려는 사람은 남다른 각오를 해야만 했다.
아이생활에 당선된 <방울새>를 개작하여 다시 아이생활에 기성인의 대우를 받아 크게 실었다. 나중에 김성태씨가 작곡을 하여 지금도 교과서에 들어있지만 , 그 무렵에 쓴 동요로는 나팔불어요, 구두 발자국, 끼리끼리 놀자, 도리도리 짝짝궁, 물새발자국, 아기 방울등 오늘 날 많이 불려지고 있다. 그때만 해도 슬프고 적망적이고 어두운 동요들이 대부분이었으며 , 어린이에게 희망과 꿈을 안겨 줄 글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대였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1930년 중반에 창가나 가사조의 동요로부터 벗어나 자유시로 옮기는 작업을 하여, <다람쥐>도 그중의 하나가 되었다.
1) 자유시 초기
<방울새> (1933.4 아이생활 현상1등 당선작)
쪼로릉 쪼로릉
방울새 아가씨
쪼로릉 쪼로릉
어디서 사왔니
쪼로릉 쪼로릉
방울새 아가씨
너 갈제 고방울
나 주고 가렴
<방울새> 김영일작사․ 김성태 작곡
방울새야 방울새야
쪼로롱 방울새야
간 밤에 고방울
어디서 사왔니
쪼로롱 고 방울
어디서 사왔니
방울새야 방울새야
쪼로롱 방울새야
너 갈제 고 방울
나 주고 가아렴
쪼로롱 고 방울
어디서 사왔니
신문과 잡지에 김영일 동요가 이어서 당선이 되자 시인의 소질이 있다고 자부하게 되었다. 당선이 되고 나서 대우도 달라져 독자란에 나던 동요를 기성 작가의 대우를 해서 크게 자리를 잡아 실었다. 이 동요로 해서 김영일은 문학을 하게 되었다. 김영일 동요는 예나 지금이나 간결하고 경쾌한 것이 특색이인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방정환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또는 일제치하에서 가난을 참을 수 없어 그런지 거의가 눈물짓는 투의 동요들이다. 동요보다는 창가 가사라고 하는 것이 알맞을지 모르겠다.
동요로는 윤석중을 비롯하여 윤복진, 박목월, 강소천, 박경종, 임인수, 임원호, 김영일 등이 많이 발표한 것으로 안다. <방울새>는 본인도 모르게 김성태선생이 작곡을 하여 해방후 음악 교과서에 실림으로 해서 널리 퍼져 음악을 잘 모르는 나도 내 아이들에게 배워 이젠 곧잘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방울새가 발표될 때에는 그래도 총독부에서 문화 정책을 쓰던 때라 원고 검열도 전보다는 조금 완화되었다.
1943년 아이생활에 발표당시 원본 그대로입니다. 후에김영일은 조금고쳐 새롭게 노래를 불려지고 종래의 동요는 7.5조나 4.4조 의 외형률을 가졌으며 그 외형률을 버리고 자유시의 형태로 바꾸는 동시 혁명에 일대 거보를 내 디딘 분이 석촌 김영일입니다.
동시가 동요보다 새로운 생동감이 넘치는 아동 문학 분야로 등장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 동시는 짧고 간결하며 암시를 곁들여 여운을 남기는 문장으로 표현되어 있어 호평을 받은 것입니다. 새로 고쳐진 작품을 봅시다.
<다람쥐> (1943년 아이생활)
산골짜기
애기 다람쥐
도토리 밴또갖고
원족을 간다
다람쥐야
팔딱
재주나 한번 넘어라
날도 좋다
<다람쥐> 김영일 작사․박재훈 작곡
산골짜기 다람쥐
아기다람쥐
도토리 점심 가지고
소풍을 간다
다람쥐야 다람쥐야
재주나 한번 넘으렴
팔딱 팔딱 팔딱
날도 참말 좋구나
(1951년 이후 애창곡 노래가사)
특히 1937년 이후 박목월, 김영일 선생이 주창한 자유시론은 한때 정형률에 집착하려는 일부 동요작가들의 생각과 대립된 적도 있었으나 이에 자극을 받아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율문분야는 점차 동요보다는 동시를 많이 낳게 되었고 동요의 이름으로 발표된 작품들은 재래의 형식에서 벗어나 파격적으로 보이기 시작할 무렵 한마디 한귀절의 말들이 독특한 빛깔과 매끄러운 말소리와 아름다움을 찾아 시심과 동심의 일치점을 보았다.
2) 중국조선족 동요론
2008년7월 한국아동문학연구회, 중국연변조선자치주조선족 아동문학학회 주최 제3회 한. 중아동문학세미나를 연길시 백산호텔 국제회의장에서 열렸을때 연변대학 김만석교수 김철호 리혜선작가 동요작가 김득만등 참석 엄기원 회장과 같이 상면하고 만났다
김득만의 동요창작, 아동가사 창작, 동시창작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면서 우리 동요 동시안에서의 위치와 작용에 대하여 실사구시적으로 평가한다.
김득만은 1940년 9월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나 3살 부모를 따라 중국 연변 와청현에 들어와 소학교 시절부터 아동문학작품을 탐독하다. 1960년 첫 동시 ‘내가일하는 사양장’을 발표 지금까지 50년 간 동요동시를 창작한 동요문학가이다.
김득만은 채택룡, 김례삼, 최형동, 리행복, 조룡남의 뒤를 이어 동요창작을 한 사람이다.
1950년대 우리 동요는 황금시기를 맞이하여 채택룡의 <병아리>4.5조, 김례삼의 <고개길>7.5조와 <기차놀이>7.7조, 최형동의 <제비>7.7조,윤정석의 앵코타기7.7조+8.6조, 리행복의 <꽃동산>7.5조 ,조룡남의 <반디불>7.7조등 명 동요들이 창작되었다.
김득만은 바로 그 뒤를 이어 동요창작에 나선 사람으로 대량적인 동요를 창작하면서 남다른 추구와 집요한 혁신을 시도하여 적잖은 성과작을 창작한 동요인이다.
여기서 동요는 한 연에 기승전결이 표현되면서 아이들의 정서세계를 연마다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정형적인 소년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시문학이다. 때문에 동요는 정형시로서의 운율조성을 그 기본으로 하게 되고, 행 조직에서 정형률을 지행할 뿐만아니라 연 조직에서 대응되는 연의 구조와 행수가 거의 같을 것을 요구하게 된다. 일찍 채택룡은 7.5조를 가지고 2행 동요로부터 12행 동요까지 실험하면서 동요의 다양화를 시도하고, 김득만도 동요의 연조직을 다양화 했다.
<병아리> 채택룡 작사
삐악삐악 갓난 병아리
아장아장 걸음익히나
요리조리 조약돌 넘어
깡충깡충 재주피우나
삐악삐악 갓난 병아리
땅을 쪼아 아빠 흉내내나
엄마등에 갸우뚱올라
포득포득 재주를 넘나
(중국 길림성 연변에 중앙공원)
<맑은 샘> 김득만 작사
모래알 굴리면서 솟아 오르는
동구밖 청바위 밑 맑은 샘은 요
삼복철 무더운 날 야영의 길에
해방군 아저씨들 파주었지요
아, 수정같은 맑은 샘은요
군민의 정 담아 솟아납니다
3) 부산 동요시대
1950년 한국 전쟁을 맞아 부산으로 피난 하면서 전시동요를 많이 발표하시고 <제 1회 김영일 전시동요회>를 1953년 4월 27일부터 5월 1일 까지 부산 동아 극장에서 (오전10시)에 가짐으로써 전시 기간 동안 동요 작사자로서 윤이상 ,윤용하, 박태준 ,나운영, 박태현, 이흥렬 작곡가와 같이 부산 동요시대를 열어갔다. 이 발표회는 전시동요 보급회가 주최하고 대한민국 문교부, 내무부, 공보처, 대학교수단, 부산시, 대한 부인회 각 신문사들이 후원했던 바 윤이상 동요는 ‘반디야 반디야, 꼬마위문대, 날아라 소년 항공기, 오빠 사진 ,졸업노래등 이었는데 다알리아 아가씨는 부끄럼의 이미지를 네마디씩 호흡단위 (3/4*4마디)로 가락을 물흐르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노래하는 것인데 두도막 형식으로 통일 시킨 이 노래는 김영일 동요로만 엮은 문교부검정의 <새음악>1~6학년전체의 대표적인노래 중 하나이다. 이때 윤이상과 김영일의 만남은 통영신문 기자였던 김영화 (현재 한산신문 편집부장)이 1998년10월17일 특종으로 기사를 쓴 것을 밝혀둔다 이때 다람쥐작곡자 박재훈씨를 만나게 되어 처음 쓴 다람쥐와 조금 변형되어 경쾌하고 리듬이 아름다워진 다람쥐 노래가 완성되었다.(부록참조)
4) 동요의 혼란기(1960~1969)
1950년대 순수성과 예술성이 가미되어 그 가치가 크게 인정받던 동요는 1960년대 들어서면서 그 양상이 크게 변하기 시작 산업화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적 가치관이 흔들려 동요도 변혁의 시대를 맞았다. 온통 대중매체의 영향을 크게 받아 라디오와 TV를 통해 CM송이라는 노래를 마구 쏟아내면서 어린이들의 감각을 흩어놓고 말았다. 그러나 1963년 동아일보 소년판에 이주일의 동요란이 동요운동에 활기를 불어넣어 KBS어린이시간 , MBC, DBS, TBC방송이 각기 라디오 동요를 제정하였고, 대한교육연합회는 해마나 여름 ,겨울호 많은 동요를 보급하였다.
KBS에서는 매주 월요일 마다 노래는 즐겁다라는 프로에 어린이 합창단이 합창과 독창으로 전국어린이에게 동요를 매달 한곡씩 보급하였다. 이때 작곡은 이계석, 유병문, 정세문, 전환 ,박준, 박태현 작사자는 아동문학가, 시인 박경종, 이원수, 김영일 ,장수철, 박목월, 조병화 선생님이시다.
1964년 한국동요작곡 통신교실 손대업회장 뒤에 한국동요작곡 연구회로 개칭하고
1999년 한국동요음악연구회 한용희회장으로 있다가 2004년 3월에는 정기 총회에서 명칭을 한국동요음악협회로 오세균 회장 외 많은 아동 문학가들이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상업방송의 영향으로 어린이들이 자기의 노래인 동요를 점점 잃어가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유행가와 라디오의 경향이 크고 학교에서 노래를 가르치는 시간이 적기 때문에. 이런 좋지 못한 경향을 바로 잡기 위해 1969년 한국동요동인회 발족(아동문학가 15명 작곡가15명 )초대회장 김영일 한국아동문학회장께서 맡았으며 새 동요곡집을 발간하여 어린이들의 자기노래를 굶주리지 않고 어른들도 자꾸 동요를 부름으로써 동심으로 돌아가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할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동요를 통해 운동을 펴나갔으며 지금부터 4년전 한국동요작사작곡가협회로 개정하였다 .
5) 동요의 가치관 정립기(1970~1979)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텔레비전(흑백)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상업화가 거세진 속에 ‘동요부흥운동’이 일어난 시기라 할 수 있다.
상업주의의 도전을 받은 우리의 동요가 여러 가지 사회적 환경에 가려 빛을 잃어가는 그 시점에서 ‘동요를 지키고, 동요를 인식하고, 동요를 사랑’하는 자구적 몸부림이 동요 관계자 (아동문학가, 음악인)사이에 일어났다. 재래식 양식으로 아무리 열심히 창작해도 그것을 모방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칫 모작이라는 비평을 받기 쉬워 과감히 재래식 양식과 형식에서 탈피해야 할 것이다는 자성론이다. 특히 1970년대부터 텔레비전으로 옮겨와 방송된 <KBS 누가누가 잘하나>는 상업적인 물질속에서 동요를 지켜주던 보배같은 프로그램이었고 77년부터 한국 아동음악상을 제정하여 아동음악발전에 공헌 한음악인, 교육자에게 시상하였다.
<과수원길> 박화목작사 윤용하작곡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 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쌩긋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한국아동문학회 박화목 2대회장이었던 보리밭의 작사자로 널리 알려진 당시 건전가요 부르기 세태 속에 대중가요 가수에 의해 전국적으로 전파를 타고 퍼지기 시작한 후 모르는 사람 없이 인기동요가 되었다. 특히 과수원길을 부른 가수 서수남, 하청일 등 각 방송사와 많은 단체들의 동요보급 및 활성화를 위한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디오와 TV를 통해서 가요 위력 앞에서는 동요는 어린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으나 과수원길은 동요의 생활화와 저변 확대라는 측면에서 성악가들이나 가요 관계자들의 방송매체를 동한 이바지가 크다.
그리고 아동문학가이면서 국제 신문에 입사하여 죽음에 이르기까지 15년간 기자로서 어린이들에 대한 따뜻함을 가진 동시인으로서의 삶은 활기찬 모습과 어린이와 같은 밝고 고운 눈으로 혼탁한 세상을 아파하고 순수를 지키기 위한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가슴을 드러내 꽃씨에는 동요 5편과 동시 32편이 실렸다.
<꼬까신 하나> 최계락 작사
꽃그늘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꼬까신 하나
아가는 사알짝
신 벗어놓고
맨발로 한들 한들
나들이 간다
가지런히 기다리는
꼬까신 하나
1951년 사화집 이인지에 수록 초등학교 음악책에도 등재됨
개나리 꽃그늘 아래 아가가 신던 꼬까신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맨발로 한들한들 사알짝 나들이 갔나보다. 한량없는 아름다운 장면이 한폭의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 하다.
73년에는 MBC라디오 동요반세기 방송으로 구성에는 한용희 작곡가 낭송에는 강영숙 아나운서께서 하셨으며 77년에는 한국 아동 음악상이 처음 제정 되었다.
그리고 74년 노래동산회 주최 고마우신 선생님에 12번째 김영일 아동문학가 된다. 역대 고마우신 선생님은 음악가와 아동문학가가 대상이었으며 1회 윤극영, 2회 마해중, 3회 윤석중, 4회 박태준, 5회 이흥렬, 6회 한정동, 7회 박태현, 8회 이원수, 9회 김성태, 10회 박목월, 11회 김대현 ,12회 김영일 ……
6) 동요의 다양화 시대 (1980~1989)
80년대 접어들면서 텔레비전 시대에 방송이 시작되면서 만화 영화주제가. CM송, 가요의 홍수 속에서 동요를 멀리하려는 어린이가 많아 졌으나 위기의 돌파구를 열어준 것이 바로 ‘방송 창작 동요제’라고 할 수 있다.
1) MBC창작 동요제
1983년 제 1회 MBC창작 동요제를 통해서 발표된 대상 수상곡‘새싹들이다’는 동요 창작의 표본이되 제6차 교육과정 4학년 교과서에 수록 어린이들의 정서에 잘 어울려 생명력있게 꾸준히 애창되고 있는 곡이다.
2) KBS 창작동요대회
1989년부터 KBS 창작동요대회를 매년 실시하면서 참가자의 자격 제한이 없어 동요 창작에 대한 의욕만이 앞선 일부 작곡가들이 참여 독창성이 없는 비슷한 곡이 출품되어 표절시비와 예술성이 떨어지는 곡들도 있었고, KBS-TV를 통해 전국에 방송되어 발표된 곡들은 ‘전국어린이 동요대회’ 이주일의 동요 방송프로그램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5회를 끝으로 이 대회는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으나 1990년 2회 때 최우수로 수상한 현 한국동요음악협회 오세균 회장 이었다.
3) 국립국악원 주최 창작 국악 동요제
1987년 어린이 정서의 물꼬를 민족문화의 장으로 둘러보자는 뜻에서 국악동요 발표회를 개최하여 1992년부터는 EBS 교육방송국 공동주최로 우리 전통음악을 계승하고 국악동요의 적극적인 창작과 보급을 목적으로 창작 국악 동요제를 매년 실시하여 경연대회 형식으로 95년 3대 한국아동 문학회장으로 있던 송명호님의 다듬이소리와 위촉 및 경영대회형식으로 98년 새싹회장 아동문학가 윤석중선생님의 달굴달궁이 수상되었다.
1988년 YMCA는 동요작곡 및 작사, 지도, 보급 분야에 업적이 두드러진 사람이나 단체에게 작곡부분, 노랫말보급 지도부문 영역으로 대한민국 동요 대상을 시상하여 동요창작활동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1회 작곡 이수인 노랫말 , 신현득 보급부분 한국동요 동인회 수상되었고, 20회 까지 아동문학가 ,작곡가들을 요약하면,
작곡: 한용희, 김공선, 이창규, 김숙경, 황철익, 이계석, 전준선 등
작사: 유경환, 엄기원, 김종상, 김완기, 유창근, 문삼석, 이복자, 송명호, 선용, 이진호, 윤이현, 이준관 조창희 등
지도보급 및 공로:윤석중, 김방옥, 우덕상, 오세균, 김정철 등
동요가수상: 서수남 , 하청일, 유열씨 등이 있다.
7) 동요의 부흥기(1990~ )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각 방송국들의 시청률지상주의로 인해 어린이 프로그램이 하나둘 폐지되고 동요 프로그램도 대부분 없어졌다.
청소년 위주의 가요나 쇼프로 아니면 드라마 일색 프로그램 편성과 동요대신 랩, 힙합 등 마치 자신들의 노래인양 부르기 시작 무슨 뜻인지 모르며 그저 요란한 랩 송과 속도 빠른 춤이 그들의 언어를 현재까지도 대신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음악인과 아동문학가들은 ‘시대적 흐름과 이 시대 어린이들의 감성, 기호에 맞는 동요를 창작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파랑새 창작동요회
파랑새 창작동요회는 1990년 조직된 동요창작 및 보급 동요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95년 미국 LA거주하는 대한의아들 동요작곡가 권길상님의 초청으로 교민들에게 우리의 동요를 보급하기 위한 ‘한국신작 동요 LA공연’을 가졌으며 교민방송을 타고 우리나라 동요가 방송되기도 했으나 80년대와 90년대 각종 창작 동요대회를 통해서 새로운 동요를 발표해온 동요작곡가와 현직 교사 및 아동문학가 대부분이며 요즈음 어린이들 사이에서 불려진 50% 창작동요들은 동요작곡가들이 만들었다.
외국 멀리 고국의 향수를 전해줄 신작 동요도 좋지만 우리의 선배들이 노랫말을 지었다. 원로아동문학가 어른들이 지은 노래도 같이 불러 주었으며 얼마나 좋겠는가? 거기엔 우리의 1세 2세 60살 넘는 분이 30~40% 6․25를 겪었을텐데 두고 온 고향의 향수 손자, 손녀 그리고 일가친척과 어릴 적 친구들과 같이 불렀다. 동요가 많이 있었다. 요즈음은 젊은 세대에 밀려 초등학교 음악책에는 원로들의 애창곡들이 없어져 한숨만 나온다.
국정, 검인정 교과서에 교육과학기술부 음악심의위원회에서는 앞으로 꼭 다루어 질 것이다
(대한의아들) 김영일작사 권길상작곡
나아가자 씩씩하게 대한소년아
태극기 높이들고 앞장을 서서
우리는 싸우는 대한의 아들딸
무찌르고 말테야 중공오랑캐
총칼로 육체무장 단단히 하고
내나라 금수강산 지키며가자
우리는 싸우는 대한의 아들딸
자유와 평화는 우리것이다
2) 부산 KBS 창작 동요 및 그 외
50년대부터 실시해오던 KBS어린이 노래자랑 프로그램인 (누가 누가 잘하나)의 후속 프로그램인(전국어린이 동요대회)가 1988년부터 TV를 통해 방송하다가 1992년 (노래는 내친구)로 개칭 되었으며 1993년에는 시청률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중단되고 다시 지방에서 1994년 8월에 KBS부산 방송총국에서 ‘어린이들에게는 꿈을 , 어른에게는 잃어버린 동심을’되찾아 주자는 취지로 부산 KBS창작 동요대회를 만들어 현재까지 실시해오고 있다.
그리고 1994년 대전일보 전국창작동요대회 와 1998년 EBS고운노래가 댄스뮤직과 랩의 홍수 속에서 동요를 잃어가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동요를 찾아주고 맑고 고운 동요의 노랫말처럼 어린이들의 순수한 동심을 잘 가꾸어 나가도록 하자는 취지로 창작동요대회를 개최하고 2000년에는 성남시 전국 창작동요제가 있다.
한국동요음악협회에서 매년 어린이를 위한 새노래 동요를 발표하고 그중 김철민아동문학가외 통일의그날, 어린이만세가 선정되 책에 게재 그리고 CD를 통해 동요을 자주 불러지도록 보급한다
(통일의 그날) 김철민작사 엄철수작곡
남북이 흩어져도 혈통은 하나
빼어난 금수강산 세계의 자랑
휴전선 장애물 넘고 넘어서
남북한 어린이들 손을 잡아요
(어린이날만세) 김철민작사 오세균작곡
진달래꽃 피는언덕에 푸른꿈이자 라고
하늘만큼 높은꿈들이 우줄우줄자 라고
웃음꽃피는 골목마다 곱게곱게자 라고
오늘은 어린이날 웃는얼굴만 만세
Ⅲ 결론
동요문학을 배우면 글짓기 공부도 되고 음악공부도 되고 나아가서는 아름답고 착한 마음씨를 갖게 됩니다. 우리나라 동요문학 발전을 위해 온갖 정열을 쏟은 분들의 성의를 생각할 때 소홀히 생각하면 안 될 중요한 문제다. 어린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어린이 운동이 시작되면서 학대받고 천대받던 우리 어린이에게는 앞날의 희망을 안겨준 동요운동이다
일본에게 나라는 빼앗겼지만 이 땅의 어린이들에게 민족운동으로써 어린이 운동을 펼치고 몰래 몰래 숨어서 불러오던 그 당시 우리 동요는 민족성을 보여 주었고 마음 깊숙이 파고들어 강한 의지와 앞날의 희망을 주었으며 해방된 광복이 후에는 새시대의 새나라 애국운동 수단으로 동요가 돋보이게 되었고 6․25 사변은 어린이에게 괴롭고 고달픈 마음을 주었으며 전쟁으로 시달려 거칠어진 마음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재건의 노래로 힘차게 퍼져 나갔으며 또한 어릴적에 학교나 동네에서 여자아이들은 동요를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재미나게 놀았다.
60년 혼란기, 70년 가치관정립, 80년 다양화, 90년 이후 동요의 부흥기를 맞아 어린이들의 순수한 생활감각에서 창출되고 시대적 흐름이 반영되었다.
따라서 TV나 매스컴에서 나오는 특집 프로그램에는 어린이가 대중가요, CM송 등 부르고 또 어른들은 부추기고 있으니 사회, 학교, 가정이 한뜻이 되고 어린이들도 여기에 뜻을 같이하여 우리나라 동요 발전에 발맞추어 나가야 하겠다.
끝으로 필자는 한국동요문학의 바람직한 창작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노랫말 속의 문학적 의미와 리듬, 아름다운 정서 예술성이 짙은 동요가 창작되도록 노력한다.
둘째, 우리의 얼과 정서가 담겨있는 한국적 동요가 많이 창작되어 어린이들사이 TV나 방송매체를 통해 동요가 자주 불려지도록 보급한다
셋째, 해방이후 현재까지 한국동요변천에 관한 연구가 체계적으로 밝고 고운동요가 심도있게 다뤄져야한다.
넷째, 동요를 사랑하는 모든사람들에게 봉사정신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우리모두 한마음이 되어야한다
다섯째. 어린이를 위한 노래를 지역특성에 맞게 음악교과서를 반영하는 방안이 논이 되어야한다
끝으로 2007 개정되는 교육과정에는 잊혀져가는 옛 동요 애창곡들을 음악교과서에 채택하고 통영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56년이 지나도 윤이상 동요를 현 음악교과서
단 한곡도 수록 되지 않고 찾아볼 수 없어 매우 안타까운 심정이다
서양음악이 주가되며 획일적으로 배우는 현재의 음악수업은 지양하고 윤이상 동요가 음악교재로 활용되면 지역어린이 음악수업이 새로운 활기를 띄우며, 따라서 2007 개정되는 교육과정에 초등학교는 동요와, 중고등학교에는 김영일작사 윤이상작곡 졸업하는날이 음악교과서에 채택되어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대한민국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즐겨 부를수 있도록 방송매채(TV, 라디오)를 통해 적극 홍보를 해야 된다.
(부록)
1) 동요노래비
지난날 주옥같은 동요를 지어 어린이들의 존경을 받아오던 동요작가의 작품을 기념하고 또 어린이들의 마음에 동요의 참뜻을 새겨 주기 위한 노래비가 곳곳에 세워졌다.
1968년 창경원 윤극영님의 반달, 덕수궁 윤석중님의 새나라의 어린이 ,수원 팔달공원 홍난파님의 고향의 봄, 신마산공원 이원수님의 고향의 봄, 충주 탄금대 권태웅님 감자꽃, 울산 학성공원 서덕출님의 봄편지, 경주 학성공원 박목월님의 얼룩송아지 등이 있다.
1970년 우리나라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방정환님의 동상이 남산 어린이 회관 앞에 세워졌다.
2) 김영일 동요문학비
한국아동문학의 개척자로서 평생을 오로지 아동문학 발전에 바친 석촌 김영일선생이 작고하시어 김영일 동요문학비를 한국아동문학회에서 선생의 문학정신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3년만에 서울특별시에 허가를 받아 후세에 길이 빛날 동요 문학비가 어린이들의 꿈동산인 과천 서울대공원에 1992년 10월 건립하여 비문에는 서예가 정주상 선생님 제작에는 홍익대 미대 곽남신 교수님께서 문학비 설계를 해 주었으며 제막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전라남도 장성관광공원에는 전라남도장성군에서 김병효 아동문학가 도움으로 김영일, 윤석중 동요문학비를 세워졌다. 2005년에는 김완기, 김종상 이진호등 아동문학가들의 동요문학비를 제자들이 세웠다고 한다.
3) 음악 선생님 윤이상과 아동문학가 김영일의 만남
윤이상 선생님은 1917년에 태어나 1956년 유럽으로 떠나기 전까지 40여년간의 한국 생활기의 윤이상은 일제 강점기와 민족 분단이 고착하는 시대였다.
그에게는 한국 생활기는 단순히 살아가는 체험의 시기는 아니라 그가 고백하는 “나의 음악은 조국의 전통에서 샘 솟아 오르고, 음악은인간의 피와 정신이 통하여야 한다.”
1948년 통영 공립여자 중학교에서 부산 사범 학교 음악교사로 취임하고 9월 2학기때 교감으로 금수현과 국어교사 이수자 선생님이 신임으로 부임한 해였다. 1950년 1월 이수자 선생님과 결혼을 하고 민족 비극인 6.25가 일어나자 전시 작곡가협회 사무국장으로 김세형, 이흥렬, 김동진 김대현, 박태현, 김성태, 나운영 선생님과 함께 활동 하였다.
그리고 아동 문학가이자 동요작가 김영일과 함께 문교부 검인정 학년별 1-6년 국민학교 새음악과 전시초등학교 노래책 “소년기마대”의 노래를 1950-53년 3년간 작곡하여 공동저작으로 부산에서 발행하여 발표회도 가졌다. 1998년 10월 30일 자 한겨레신문 기사에서 <새음악과 소년기마대>를 발굴 제공한바 있는 아동문학가이자 통영중학교 연구부장인 김철민 선생을 만났다. 그의 부친이 윤이상 작곡의 노래들을 작사한 김영일이었다. 김영일은 1914년에 태어나 84년에 삶을 마감하였다. 아동문학가이자 동요작가로서 당시 <전국문학단체 총연합회>사무차장을 맡고 있었으며 현재 김철민 선생은 아동문학가로서 활동을 하고 있다. 본 글에 게재되는 악보는 김철민 교사의 호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린다. 새 음악 책에 모두 100여곡 중 김영일 작사 윤이상 작곡한 동요는 70여곡이다. 한편 김영일은 전시하에 부산에서 작곡가 윤용하와 같은 집에 함께 기거할 정도로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윤이상 이외에 작곡가 박태현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인 박화목 등과 부산 동요 시대를 열어갔다. 박화목 <보리밭 사잇길로 윤용하 일대기>서울 범우사발행 따리아 아가씨 등을 작사한 김영일은 제 1회 김영일 전시동요 발표회를 1953년 4월 27일부터 5월 1일 까지 부산 동아극장 오전 10시에 가짐으로써 전시기간 동안 동요 작가로서 확고한 지위를 가졌다. 이 발표회는 <전시동요 보급회>가 주최하고 대한 민국 문교부 ,내무부 ,홍보처, 대학 교수단 ,부산시 ,대한 부인회, 각 신문사 등이 후원하였던 바 동요작곡자로 윤이상과 더불어 박대현과 윤용하 등이 발표하였다. 이 발표회에 발표회에 발표한 윤이상 동요는 반디야 반디야,꼬마위문대, 날아라 소년 항공기, 오빠 사진, 졸업하는날등과 동요극 봄이오내 노래중 일부를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또 한겨례신문이 발표하기전 통영 신문기자로 있던 김영화기자(현 한산신문 편집부장)이 한국전시 초등음악책 최초 공개와 한국 전시 교육체제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1998년 10월 17일 신문전면에 대서특필 특종기사를 실었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그리고 김영화 기자는 교육부 이순영연구관에게 들은바 이 책들은 전시 체제하에서 지역별로 발행된 책으로 그 가치와 의의는 참으로 크다고 밝혔다. 또 한국 문화예술진흥원 관계자는 문화예술 연감의 편집 자료들에서는 노래책 소년기마대와 새음악이 있었다고 기록은 되 있으나 실제로 그 자료가 발견돼 공개된 적은 없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국정 교과서 편찬 이전 지역별 교과서 편찬 시절에 국가 지정으로 발행된 책으로 추정되며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아주 어려운 귀한 자료라고 보도를 하였다.
졸업하는날
김영일작사 윤이상작곡
비가오나 눈이오나 기나긴 날은
같이웃고 같이놀던 배움의동무
오늘은 떠나는날 졸업하는날
헤어져도 잊지말자 선생님은혜
기쁠때나슬픈때를 가리지 않고
서로돕고 이끌면서 닦은이학문
큰뜻품고 떠나는날 졸업하는날
멀리가도 잊지말자 동무의사랑
참고문헌
이재철「아동문학개론」문운당 1967
한용희「한국동요반세기」세광출판사 1973
유창근「차세대 문학의 이해」태영출판사 2008
정연택「한국동요변천에 관한 연구」인천교육대학원 석사논문 2001
김만석「중국한국조선 아동문학 비교연구」시와 사람 2008
권석순「김영일 아동문학연구」강릉대학교 대학원박사논문 2009
조선우「음악과 민족」세종문화사 1999
한국동요음악협회「어린이 동요세상」드림뮤직 2008
이상현「한국아동문학론」평화당 1976
김형만「최계락 동시연구」경상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0
박화목「신아동문학론」보이스사 1982
한국아동문학회․한국아동문학가협회「한국 동시동요감상」경원각 1980
유승조 색동회아동문학전집 12. 13권 상서각 1977